제프 월(Jeff Wall)은 개념미술의 전성기인 1960년대 중반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밴쿠버에서 그림을 그리던 그는 당시 북미 미술계에 일어난 다양한 매체 변화의 흐름을 타고 진지하게 사진을 탐구하였다. 본격적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한 월은 사진 매체가 가지고 있는 잠재적 에너지를 느끼고 사진이 지금까지의 인식과 달리 현대미술에서 중요한 매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러한 깨달음을 바탕으로 이후 월은 ‘시네마토그래피(cinematography)’와 ‘근사-다큐멘터리(near documentary)’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사진에 접근하여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대가로 성장한다. 그는 1970년대 중반 개념 미술의 실험정신을 새로운 형태의 회화적 사진으로 확장했다. 월은 스냅 사진으로 포착할 만한 짧은 한순간을 기억에 담았다가 영화를 제작하는 방식으로 연출하여 시간의 흐름이 정지한 듯한 묘한 영속성이 있는 스틸 이미지로 구현한다. 월 사진의 이러한 특징은 제작과정의 구축성에서 나온다.
크기와 색채에 있어 회화 같은 미학을 구현한 월의 사진은 역사와 재현의 문제를 주로 다루면서 동시대 사회의 주요 쟁점을 드러낸다. 월은 프린트의 표면에 존재하는 사진의 아름다운 입자는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사진이 커지면 드러나기 시작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처럼 세밀한 미학적 요소마저도 놓치지 않는 월은 뒤에서 비추는 빛의 투과성을 이용하여 자신의 사진을 보여 준다. 이러한 보여 주기 방식을 통해 월의 사진은 입체성을 얻고 입방체의 오브제로 인식된다. 영화 연출의 과정을 거쳐 구축되고 그림과 같은 크기와 색채효과를 지닌 월의 사진은 미술관에서 그림처럼 감상하고 오브제처럼 경험하는 사진이다.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t Richter)가 사진의 특징이 강조된 회화인 ‘포토페인팅’을 제작했다면, 월은 이와 같은 구축과 보여 주기의 방식으로 회화와 영화 제작과정의 특징과 미학을 담은 ‘시네마토그래피’를 제작했다.
제프 월, 이야기하는 자, 1986
에두아르 마네, 풀밭위의 식사, 1862-63
미술사의 차용으로 드러내는 동시대성
월은 실기와 이론을 겸비한 작가이다. 젊은 시절 그림을 그렸고 캐나다와 영국에서 미술사를 공부한 월은 미술사가답게 거장의 그림을 차용한 사진을 발표해 왔다. 월의 <이야기하는 자 (The Storyteller)>(1986)는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1862-63)를 떠올린다(도판1, 2). 두 명의 모던 댄디(modern dandy)가 나체 여인을 동반하고 한가하게 소풍을 즐기는 모습을 묘사한 마네의 그림 역시 미술사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그림의 구도를 차용한 작품이다. 월은 <이야기하는 자>에서 마네의 그림을 숲과 고속도로가 만나고 세 부류의 인물들이 공존하는 실제 같은 가상의 현대적 공간 속 일부로 재창조한다. 월은 숲과 콘크리트가 묘한 대조를 이루는 이 공간에 유럽의 식민지 개척으로 인해 이곳저곳으로 흩어진 원주민을 화면의 세 부분에 나누어 배치했다. 우측의 콘크리트 고속도로 밑에 완전히 고립된 한 남자가 있고 좌측 뒷부분의 숲에 가까이 있는 두 남녀는 휴식을 취하고 있다. 마네의 그림을 떠올리는 부분은 좌측 아래에 모여있는 세 사람이다. 이 장면에서 마네와 달리 월은 발언의 주체, 즉 ‘이야기하는 자’를 여자로 교체했다. 마네의 그림에서 남자는 손짓을 곁들여 이야기하고 있지만 동반한 여자는 턱을 괴고 다른 곳을 보고 있다. 월의 사진 속에서 이 상황은 여자가 이야기하는 가운데 남자는 얼굴을 받치고 여자의 말에 온전히 집중하고 있는 모습으로 치환된다. 이 작품은 백인들의 침입으로 고립된 동시대 북미 원주민들이 사회적으로 도태되는 소외과정을 함의한다. 이와 함께 월의 사진은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여자로 바꿈으로써 과거의 여성의 지위와 달리 소수자 그룹에서 조차도 상승하는 현대 여성의 변화한 지위를 강조한다.
제프 월, 여성들을 위한 픽쳐, 1976
에두아르 마네, 폴리베르제르의 바, 1882
<여성들을 위한 픽처(Picture for Women)>(1976)는 1800년대 말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에서 남성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수동적인 여성상이, 100여 년이 지난 1978년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분명하게 드러낸다(도판3, 4). 마네의 그림에서 가슴에 꽃을 달고 귀걸이, 목걸이, 팔찌와 같은 장신구로 단장한 여성은 다소곳하게 남성 고객을 맞이하고 있다. 반면 월의 사진에서 술집은 교실로 바뀌고 여성은 자신을 응시하는 카메라의 눈을 도도하게 올려다보고 있다. 마네의 그림과 비교하여 월의 사진은 남성과 같은 수준의 교육을 받고 사회 활동에 참여하는 1970년대 후반에 일어난 여성의 지위 상승을 강조하여 보여 준다.
이처럼 과거 거장의 그림을 참조한 월의 사진이 궁극적으로 드러내는 바는 역사의 흐름과 함께 변화한 현재의 상황이며, 그의 사진에서 동시대성은 거장의 작품을 매개로 과거와 현재가 교차함으로써 더 명확하게 다가온다. <여성들을 위한 픽처>에 등장하는 월은 불만을 품은 표정의 당당한 여성에 비해 뒤로 물러난 왜소하고 수동적인 남성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남성은 우월한 시선으로 여성 이미지를 그려내는 남성 작가의 위치 대신에 여성의 현재 모습을 가감 없이 담아내려는 듯 카메라의 릴리즈를 조심스럽게 잡고 있다.
월의 두 작업에는 자신이 사는 시대에 비판적 거리를 유지한 채 바라보고 관찰하려는 작가의 시선이 잘 드러나 있다. 월은 과거의 작품을 통해 우리의 현재를 자각하게 하는 작가의 통찰력을 보여 준다. 이처럼 월의 사진 곳곳에 들어있는 담론적 요소의 삽입은 사진에 대한 월의 새로운 인식의 결과이다. 월은 사실적 묘사에 적합한 매체라는 사진에 대한 기존의 인식에 얽매이지 않고 사진을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매체로 보았다. 이 새로운 인식을 바탕으로 월은 회화에서만 가능하다고 여겼던 ‘구축성’과 ‘구조성’을 사진의 제작과정에 도입했다.
제프 월, 미믹, 1982
시네마토그래피
‘평평하고 정적인 이미지’는 사진에 대한 전형적인 인식이다. 월은 영화 연출의 과정을 사진에 도입하여 사진의 평면성을 극복하고 이야기를 응축하여 내용의 풍성함을 더한다. 더불어 후면에서 비추는 광선을 통해 이미지의 입자가 드러나게하는 입체적인 형태의 역광 패널 전시 방식을 택하여 사진에대한 전형적인 인식에 도전했다. 월의 ‘시네마토그래피’는 사진 이미지의 정지성에 사유의 공간을 더하고 장면의 순간성을 영원성으로 재현하여 사라지지 않는 이미지로 남긴다. 월의 연출과정과 그로 인해 생성되는 이야기가 응축된 이미지는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하는 앙리 카르티에-브레송(Henri Cartier-Bresson) 류의 사진과 구분되는 중요한 특징이다. 월은 셔터를 누르는 사진과 구축하는 사진을 명확히 구별한다. 그는 영감의 순간을 신속하게 카메라로 포착하기보다는 그 장면을 기억에 담고 시간을 두고 생각하며 체계적으로 재현할 방법을 구상한다. 일단 한 장면을 작품으로 구현할 준비가 되면 월은 통상 그 장면을 재연할 연기자들을 섭외하여 영감을 준 장면을 목격한 장소를 촬영장으로 삼는다. 월은 연기자들의 복장이나 몸짓, 표정 등을 세심하게 정해주고 현장에서 함께 오랜시간을 보내고 촬영한다. 며칠씩 연기자와 함께하며 정확하게 지시를 따른 반복된 연기와 촬영과정을 반드시 거친다. 이러한 계획된 반복 과정에서 나온 수많은 사진 중, 단 하나의 예상치 못한 우연적인 사진을 건져낸다.
<미믹 (Mimic)>(1982)은 캐나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감을 시각화한 사진이다(도판 5). 보수적인 옷차림의 아시아 남성이 앞서 걸어가고 있고 조금 더 분방한 옷차림의 캐나다인 커플이 그 뒤에서 걸어간다. 여자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캐나다인이 여자가 모르는 사이 동양 남자를 향해 멸시하는 손짓을 보내고 있다. 동양 남자는 무언가를 감지하면서도 아무 일도 없는 척 걸어가고 있다. 월은 아마 길을 가다가 이와 유사한 장면을 목격하였을 것이다. 이 장면의 의미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한 끝에 작품의 소재로 결정한 월은 연기자를 섭외하여 마치 영화감독처럼 장소와 상황을 설정하고 그들의 옷차림과 몸짓마저도 철저히 지시한다. 이렇게 여러 장 촬영한 사진을 사후 디지털 작업을 통해 편집 및 수정한다. 관람자는 마치 순간의 장면을 포착한 자연스러운 사진처럼 느끼지만, 사실 그 배후에는 이렇듯 복잡한 촬영과 편집 과정이 숨어있다. <역기 드는 남자(Weightlifter)>(2015)은 우리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지구의 중력에 대한 사진이다(도판 6). 중력을 표현하고 싶다고 생각한 월은 역도선수 오디션을 열고 연기자를 구하여 며칠이고 원하는 사진을 얻을 때까지 모델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촬영했다. 무거운 역기를 안간힘을 써서 들어 올리는 장면은 생존을 위한 노동과 우리의 존재와 생명이 중력에 영구적으로 종속되어 있다는 벗어날 수 없는 조건을 상기시킨다.
제프 월, 역기드는 남자, 2015
제프 월, 접근, 2014
월의 시네마토그래피는 상황에 대한 사유와 특유의 제작 과정을 거쳐 침묵의 사진이 관람자에게 이야기를 건네고, 또 관람자 스스로 이야기를 짓게 하려는 시도이다. 순간적인 상황이나 동작 같지만 월의 사진은 마치 슬로우 모션을 정지시킨 듯한 묘한 시간성을 가지고 있다. 관람자는 월의 사진을 스치기보다는 머무르고 감상하고 영감을 받아 각자 자신만의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다. 그의 사진은 관람자들이 이전에 본 것 같은 유사한 장면을 제시하지만, 스치는 순간의 이미지에서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감상을 전달한다. 예를 들어 <접근(Approach)>(2014)을 매개로 관람자는 노숙인과의 특유한 만남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 만남을 일으키는 것은 노숙자의 모습에 집중하게 하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예술의 힘이며 이것이 바로 예술의 사회적 가치이다(도판 7).
2000년경 월은 미술작품을 참조하는데 국한하지 않고 문학적 텍스트를 순 수한 상상력으로 재현하는 작품을 제작한다. 월의 <랠프 앨리슨의 ‘인비져블 맨 이후, ’프롤로그 (After ‘Invisible Man’by Ralph Ellison, the Prologue)>(1999-2000)은 앨리슨의 소설 <인비져블 맨(Invisible Man)>의 도입부에 나오는 묘사를 바탕으로 시네마토그래피로 재현한 것이다.(도8) 앨리슨의 소설에서 무명의 한 흑인 해설자는 자신이 지하에 있는 동굴에 비밀리에 살고 있으며 그곳에는 몰래 끌어 쓴 전기로 1369개의 전구에 붉을 밝히고 있다고 말한다. 월은 소설의 다른 부분을 참고하거나 자신
의 상상력을 더하여 이 소설의 세부 사항 하나하나를 시각적 장면으로 구축한다. 결과적으로 월의 시네마토그래피는 소설적 허구의 세계를 실제보다도 더 실제처럼 재현한다. <진주층(Mother of pearl)>(2016)은 어느 여성의 이야기를 듣고 그 상황을 재연한 이미지이다. 월은 어린이가 동전 모양의 진주층을 유심히 보는 한순간을 목격한 여성이 얼마나 그 순간이 인상적이었는지 설명하는 이야기에 나오는 장면을 구축하고 이 장면을 재현했다(도판 9).
제프 월, 인비져블 맨 이후, 1999-2000
제프 월, 진주 껍질 층, 2016
근사 다큐멘터리(Near Documentary)
영화의 제작과 유사한 과정을 거친 월의 사진 이미지는 기록적이고 객관적인 동시에 회화적이고 환영적이다. 월의 사진은 다큐멘터리 사진과 시네마적인 것의 이종적 결합이라고 볼 수 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심상을 그릴 수 있는 그림과 달리사진은 그것이 연출일지라도 실제로 사진가의 눈앞에서 일어난 장면이라는 점에서 모두 다큐멘터리의 특성이 있다. 기록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우연히 만난 장면을 포착하는 것과 이후에 그 장면을 연출해서 촬영하는 것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 이런 의미에서 월의 말대로 자신의 사진에서 가짜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월의 사진은 다큐멘터리인가? 다큐멘터리가 아닌가? 월은 자신의 사진은 그 경계에 있는 ‘근사 다큐멘터리’라고 한다.
월의 <필드 워크. 발굴 (Fieldwork. Excavation...)>(2003)은 고고학적 발굴 사건에 관한 실제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사실(facts)’로 이루어진 긴 제목과 더불어 실제 고고학자의 발굴 현장을 연상시키는 다큐멘터리 사진 같다(도판 10). 월은 실제로 밴쿠버 근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발굴 현장에서 사진을 촬영했다. 이 사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연기자가 아니라 진짜 미국인 고고학자와 원주민이다. 월은 그들이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을 때까지 3~4주에 걸쳐 매일 매일 그들의 작업 광경을 사진으로 촬영했다. 원주민은 발견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고고학자를 곁에서 지켜보고 있다. 이 작품의 원래 제목은 매우 긴데, 월은 그 긴 제목에 이 사건에 대한 세부 사항을 모두 적어 넣었다.
제프 월, 필드 워크, 2003
월의 <필드 워크. 발굴...>은 명백히 발터 벤야민의 「발굴과 기억 Excavation and Memory」(1932)을 참조한다. 벤야민에게 있어 기억은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현재에 권력 쟁취를 위한 사회적인 실천 행위이다. 기억은 단순히 과거를 탐험하는 도구가 아니라 이러한 실행의 매개로 작용한다. 월의 작업은 “스스로의 묻힌 과거로 돌아가려는 자는 스스로가 파헤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벤야민의 목소리를 공명한다. 벤야민은 “그는 무엇보다도 같은 문제에 반복해서 돌아가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며 그 문제를 마치 지구를 흔들듯 흩어놓고, 마치 땅을 갈아엎듯 파헤쳐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 ‘문제 자체’는 가장 정교한 조사를 거쳐야만 그들의 오래된 비밀을 털어놓는 층위들이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모든 기존의 것과 연결되어서 우리의 미래의 통찰력의 명증한 공간 속에 있는 보물처럼 사는 이미지들을 생산해 낸다”고 했다. 월의 작업은 벤야민이 묘사한 인물처럼 동시대에 가능한 테크놀로지를 도구로 우리의 현재성을 과거와의 관계에서 파헤치는 동시대 예술가 특유의 탐구와 감수성을 드러낸다. ㅣ 글 이필 홍익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