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불교에서 ‘相( pali. sañña, skt. saṃjñā)’이란 말이 광범위하게 사용되어, 불경에서 ‘상에 얽매이다’, ‘상에 집착하다’, ‘상을 여의라’ 등의 용어가 자주 나옵니다. 불교에 있어서 ‘性’이란 불변의 본체를 말하는 데 비해, ‘相’이란 변화하고 차별로 나타난 현상계의 모습을 말합니다.

심리적인 측면에서는 일종의 固定觀念이라 할 수 있는데, 불교에서는 이 고정관념이 갖가지 왜곡을 일으키므로 이것을 갈등과 번뇌의 원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무의식 속의 고정관념을 내려놓는 순간 불성을 바로 볼 수 있다고 해서 <금강경>에는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고 합니다. 그런 ‘相’이 중국에서 한자로 번역되기 전의 어원인 산스크리트어에는 samjna, laksana, nimitta의 세 가지가 있어서 이 말들이 같은 ‘相’이라는 글자로 번역되었지만, 불경에서 쓰임에 따라 그 뜻은 다소 다릅니다.

samjna(산냐)

주로 생각, 견해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이러한 samjna는 수백 가지 수만 가지가 있지만, <금강경>에서는 우리 중생들을 윤회에 들게 하고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것을 四相으로 설명하면서 이것을 끊을 것을 강조합니다.

그 4상은 중생이 실재한다고 믿는 네 가지의 相, 즉 我相 · 人相 · 衆生相 · 壽者相입니다. 그러면서 <금강경>에서 “만약 보살에게 我相 · 人相 · 衆生相 · 壽者相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물며 보살도 그러한데 수행이 안 된 중생은 더욱 심하여 四相이 실재한다고 믿으며, 이에 따라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nimita(니미따)

형상, 모습의 뜻으로 <금강경>에서 보살은 상에 머물지 말고 보시해야 한다고 할 때의 상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과거로부터 많은 경험, 기억의 총합에 의한 대상을 만났을 때 생겨난 인상(일종의 선입견, 전체적인 첫인상)을 일컫습니다.

laksana(락샤나)

어떤 대상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상, 특별한 모양으로서, 부처님의 ‘32相과 80種好’라고 해서 부처님의 모습에 대한 특징을 말할 때의 상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즉, 특수한 형태의 뜻으로서 <금강경>에 ‘여래의 身相으로 여래를 봤다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할 때의 상이 이것입니다. 즉,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모습, 모양, 특징, 현상 등을 일컫는 것입니다.

이상의 세 가지를 예로 들어보면, 눈으로 꽃을 본다고 할 때 꽃의 모양과 형상은 nimita의 상에 해당하고, 그 꽃이 지닌 개병적인 특별한 모습은 laksana에 해당하며, 꽃을 보고 꽃이라고 일으킨 생각들은 samjna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세 가지 용어를 똑같이 ‘相’이라는 글자로 번역한 이유는, 이들 사이에는 그 의미에 있어 큰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형상이나 모습에는 나름대로 특징이 있게 마련이고, 저 앞에 어떤 형상이 있다는 것은 결국 내 마음에 이미 인식된 앎이 있다는 것이니까, 이 모두를 다 함께 相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4상인 我相 · 人相 · 衆生相 · 壽者相은 위의 ‘samjna(산냐)’라는 말 속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4상도 사람 혹은 시대에 따라 해석이 구구했습니다.

예전의 해석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나라는 관념= 아상
사람이라는 관념= 인상
중생이라는 관념= 중생상
목숨이라는 관념= 수자상

또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습니다.

아상= 자기중심적 사고
인상= 사람 중심적 사고
중생상= 동물 중심적 사고
수자상= 생명 중심적 사고.

그러나 최근에 이를 아래처럼 바로잡았습니다.

자아가 있다는 관념= 아상
개아가 있다는 관념= 인상
중생이 있다는 관념= 중생상
영혼이 있다는 관념= 수자상

아래에서는 이러한 새로운 입장에서 4상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我相(atman samjna)

아상이란 고대 인도의 브라만교에서 주장한 영원불멸의 존재인 ‘아트만(atman)’에 근거한 견해로서 ‘我’ 혹은 ‘自我’라는 생각을 말하며, 여기서 ‘나’라고 하는 것은 나의 육신, 나의 주장, 나의 직장, 나의 사회적 위치, 나의 능력 등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불교적 관점에서 볼 때 ‘나’라고 정의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속성은 변화하기 마련으로 죽게 되면 모두가 해체돼버리고 육신도 결국 화장하거나 땅에 묻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깨닫고 나서, ‘우주의 모든 사물은 成住壞空하고, 생각은 生住離滅하므로 우주의 모든 것은 [나]라고 할 만한 것이 결국 없음’을 알았고, 그것이 諸法無我인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 인도는 브라만교가 지배하면서 자아를 신[브라흐만]에게 종속시키는 凡我一如의 神 중심 사회로서 인간이 신의 노예로 전락해 있었습니다. 부처님은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人本의 새로운 사상을 세우고, 인연의 법칙에 의할 뿐 아트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無我의 진리를 펼치고 我相을 여의라고 하셨습니다. 즉, 五蘊을 “나, 나의 것, 자아”라고 집착하는 것을 我相이라 하여, 모든 괴로움이란 한 마디로 五取蘊苦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중생은 내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 아상을 가지고 있으므로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상대방이 생겨나고 그로부터 모든 만물이 생겨나 이 현상계가 만들어져서 다른 相들도 모두 이 我相으로 인해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즉, 인상, 수자상, 중생상은 아상의 다른 표현일 뿐, 4상이 각기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말입니다. 그 하나가 바로 我相입니다.

我相이 모든 상에 빠지는 근원이므로 아상을 여의지 못하면 凡夫이고, 我가 滅盡되고, 모든 번뇌를 다 끊어버려서 참다운 無我가 되어야 해탈이 된다고 합니다. 즉, 아상이 부서지면 모든 상이 다 부서지고, 아상을 버리면 해탈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상이 있으면 下心이 이루어질 수 없고, 下化衆生을 할 수도 없으며, 無住相布施를 할 수도 없다는 말입니다.

人相( pudgala samjna)

여기서 ‘人’을 사람이라 해석하면 안 됩니다. 여기서 인은 사람의 의미가 아니고 인간의 몸이나 마음에 내재하고 있는 어떤 개체적 원리를 말한다. 즉, 部派佛敎시대에 犢子部에서 주장한 개아(個我, 뿌드갈라/pudgala)를 말합니다.

바라문들이 윤회의 주체라고 주장하는 atman에 대하여, 붓다는 현실적으로 경험하기 불가능한 가공의 망상이라고 부정했습니다. 그러나 部派佛敎 시대에 와서는 윤회에 있어서 중심적 주체가 없다는 점을 혼란스럽게 여기고, 불멸 후 300년 경 부파불교 시대에 犢子部와 正量部에서는 생사윤회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윤회하는 개개 존재의 인격주체로 뿌드갈라(pudgala)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이것은 초기 경전에도 있던 개념으로 뿌드갈라의 어원은 ‘사람, 생명 등 살아있는 존재’로서 鳩摩羅什은 人으로 옮겼고 현장은 補特伽羅로 音寫했습니다.

윤회의 주체로서 개아를 인정하는 것은 붓다께서 주창한 무아의 불교이념에 背馳되는 것으로, 여기에 대하여 불교의 각 교단은 해명을 내놓고 있지만 명쾌하지는 못합니다. 붓다께서도 당초에 뿌드갈라를 4상의 하나로 지목해 놓았으니, 내가 윤회의 주체로서의 인간이라는 교만한 마음의 인상(개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해탈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해석에서는 人相을 我相처럼 집착하는 모습의 하나로서, ‘남’을 의식하는 데에서 오는 행동과 생각이라 말해왔습니다.

이와 같이 개아(인상)를 나와 남을 갈라놓는 분별심이라고 말하는 것은 뿌드갈라의 語義가 ‘개인’ 혹은 ‘인간’을 의미하는 개념이었기 때문에 그런 해석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개아는 ‘나’라는 我相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나와 상대에 대한, 혹은 내가 인간이라는 생각에 대한 분별로 보더라도 이것은 ‘나’라는 상이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아상의 연장이라 하겠습니다. 즉, 개아는 眞我와 대비되는 아상으로서 진아를 찾는다는 것은 곧 자기(개아)를 버림으로써 가능한 것이고, 자기(개아)를 버림은 곧 망심과 분별과 집착을 버리는 心空을 말한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부처님께서 독자부의 뿌드갈라(pudgala)를 부정하셨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잘못된 비약입니다.

왜냐하면 뿌드갈라를 제시한 독자부가 생긴 것은 불멸 후 300년이 경과한 후의 일이기 때문에 석존께서 부파불교시대의 주장인 뿌드갈라를 직접 지적하셨다 하기엔 시기적으로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衆生相(sattva samjna)

sattva란 넓게는 ‘존재하는 모든 것’ 혹은 ‘살아있는 모든 것’을 나타내는 말로서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한 모든 생명체를 의미합니다. 이것을 구마라습은 衆生으로, 현장은 有情으로 번역했습니다. 이 중생상은 깨닫지 못한 중생들이 가지는 본능적 집착을 일컫는데, 그것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첫째, 괴로운 것을 싫어하고 재미있고 좋은 것만 탐내는 등 이기적인 행동이나 상념의 집착으로 나타나서, 좋은 것은 자기 것으로 하고, 나쁜 것은 남에게로 돌리려 합니다.

둘째, 천당과 지옥이 따로 있다고 생각해서 천당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욕심으로 나타납니다. 즉, 별다른 수행도 없이 苦가 없는 天界에 태어나고자 하는 祈福佛敎도 중생상의 소산이라 하겠습니다.

셋째, 약한 사람을 억누르고 강한 사람에게 빌붙는 약육강식도 중생상이고, 자기의 일에 지나친 욕심을 갖고 남을 이기기 위해 투쟁하는 것도 중생상입니다.

넷째, 중생상은 자신의 몸이 五蘊이 화합해 이루어진 참된 실체라고 고집하는 잘못된 견해를 가집니다. 그리하여 살아있는 생명체와 생명이 없는 자, 유정과 무정을 나누는 이원론적 집착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중생상도 그 근원에서는 ‘나’라는 我相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깨달음의 주체인 ‘나’라는 상을 상정해 놓기 때문에 일어나는 모순입니다.

다섯째, 나는 중생이니까 부처님과 같이 해탈할 수 없을 것이라는 스스로 退屈心을 내는 것입니다. 이런 중생상은 열등의식이 바닥에 깔려 있어서인데, 초기 대승불교에서 sattva(중생)를 너무 강조하다 보니 중생은 부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실재가 있는 것처럼 돼버린 것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중생상을 갖지 말라고 하신 것은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이런 자기 비하적인 견해를 타파하기 위해서입니다. 부처와 중생을 분별해서 자신을 중생이라고 생각하고 불도를 닦는데 게을리한다거나 불도를 닦아도 부처가 된다는 확신이 없는 이것이 중생상입니다. 모든 중생은 그 자체에 불성을 가지고 있어 누구라도 수행을 통해 불성을 닦으면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 一切衆生悉有佛性이요 見性成佛인 것입니다.

壽者相(jiva samjna)

수자상의 원어인 jiva는 영혼, 목숨, 생명이라는 말인데, 부처님 당시 자이나교에서 주장한 생사를 초월한 존재 또는 영원불멸의 ‘순수영혼’이 있다는 견해로서, 구마라습은 壽로, 현장은 命으로 번역했습니다. 따라서 壽者(산스크리트어 jīva)란 목숨, 생명체, 목숨 달린 존재(생명체, 육신을 가진 존재)를 말합니다. 부처님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마하비라 Mahavira’가 창시한 자이나교(Jainism)에서 ‘순수한 영혼(jiva)’으로 설정했던 것이니, 이 또한 불교의 입장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五蘊은 모두가 실체가 없어 한시도 머물지 못하는 무상한 존재인데, 이를 바로 알지 못하고 그 속에 영생불멸의 윤회하는 주체로서 순수영혼이 있어서 오온은 사라져도 이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여기는 그릇된 착각을 하는데 그러한 착각을 수자상이라 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은 자이나교의 ‘순수영혼설’을 반박하기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인연에 따라 일시적으로 생겨났다 사라지는 허깨비에 불과하다고 하였습니다. 즉 諸行無常인 것입니다. 따라서 생사를 초월하고 시간을 초월한 순수영혼이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상에서 벗어나라고 가르쳤습니다. 종전에는 이 수자상을 ‘목숨’으로 이해해서 오래 살려고 하는 욕심이라 해석했으나 지금은 자이나교의 ‘순수영혼’의 존재설에 대한 거부를 표시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상으로 볼 때,

我相은 브라만교에서 주장한 ‘아트만(atman)’을 부정한 것이고,
人相은 독자부와 정량부에서 주장한 뿌드갈라(個我)를 부정한 것이며,
衆生相은 중생들의 어리석음, 열등의식, 퇴굴심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고,
壽者相은 자이나교(Jainism)에서의 ‘순수한 영혼(jiva)’ 즉, 영혼불멸설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라는 말들은 우리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잘못된 보편적 견해이기도 하므로 이러한 4상을 극복해야 비로소 해탈을 성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리석은 중생이 어떻게 하면 4상이라는 분별과 집착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금강경> 해설의 최고 권위자인 六祖 혜능대사는 범부와 수행인을 구분해서, “4상이 있으면 중생이요, 4상이 없으면 부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마음이 迷하면 중생이요, 마음을 깨달으면 곧 부처’라고 하는 말과 같으니, 결국 4상을 극복하는 길은 마음을 昏迷하게 하는 망념을 극복해 正見을 갖추는 것이겠습니다.

금강경 번역과 사상의 새 풀이

기자명 이정재 
금강경 번역과
사상(四相)의 새 풀이

<금강경>이 궁극적으로 말하려는 것은 공(空) 혹은 공 사상이다. 같은 공을 다룬 반야심경과는 어떤 상이점이 있을까? 가장 핵심적인 용어는 사상(四相)에 있다 할 것이다.

지난 호에 필자가 불조요경의 금강경 저본에 관해 쓰면서, 그 번역에 대한 검토가 요구된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그 필요성의 일단(一段)을 짚어보고 넘어가기로 한다. 그것은 사상에 관한 것으로, 그 해석과 이해의 차이가 현저히 다른 데에서 오는 것과 관련된다.

금강경의 시작은 지극히 평범하며,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에서 비롯된다.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금강반야바라밀다경 2분 선현기청분)

금강경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일까요?’라는 우리의 평소 질문과 고민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에 대한 석가의 일성이 ‘사상(四相)’이다. 사람이 사상에 사로잡힌 점을 지적하며, 이를 넘어서야 비로소 ‘완전한 열반’ 즉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를 수 있다(금강반야바라밀다경 3분 대승정종분)고 답한다. 그만큼 사상은 금강경의 핵심 용어이자 금강경 이해를 위한 중요한 개념이다. 때문에 금강경의 여러 곳에 걸쳐 수차례 언급되고 있다. ‘유(有)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즉(卽)비보살(非菩薩)’은 일체의 상을 없앰, 즉 진공의 회복을 말하고 있다. 그래야 보살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상은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것인가.’를 깨친 자의 안목으로 나열한 것이다.

<원불교대사전>에는 사상(四相)을 다음과 같이 풀어놓았다.

(1) 깨치지 못한 중생들이 전도(顚倒)된 생각에서 실재한다고 믿는 네 가지 분별심, 곧 아상(我相)·인상(人相)·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을 이른다.

① 아상: 모든 것을 자기 본위, 자기중심으로 생각하여 자기가 가장 잘났다고 하거나, 자기의 것만 좋다고 고집하거나, 오온(五蘊)의 일시적 화합으로 이루어진 자기 자신을 실재한다고 집착하는 소견.

② 인상: 우주만물 중에서 사람이 가장 중요하며, 일체만물은 사람을 위해서 생긴 것이라, 사람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인간본위에 국한된 소견.

③ 중생상: 부처와 중생을 따로 나누어 ‘나 같은 중생이 어떻게 부처가 되고 무엇을 할 수 있으랴.’ 하고 스스로 타락하고 포기하여 향상과 노력이 없는 소견.

④ 수자상: 자기의 나이나 지위나 학벌이나 문벌이 높다는 것에 집착하는 소견. 이러한 사상에 사로잡히면 중생이요, 사상을 벗어나야 불보살이 될 수 있다. 사상은 ‘아인사상(我人四相)’이라고도 한다.

이 용어해설은 <원불교전서> 불조요경의 금강경 용어에서 비롯된다.

“어찌한 연고인고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아상과 인상과 중생상과 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니라.”(<원불교전서> 불조요경 금강경 3)

그런데 조계종에서 발간한 <표준 금강반야바라밀다경>(이하 표준본이라 칭함)에서는 이를 다르게 번역하고 있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보살에게 자아가 있다는 관념, 개아가 있다는 관념, 중생이 있다는 관념, 영혼이 있다는 관념이 있다면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조계종 표준본 20쪽)

달라도 너무 다르다. 우리가 알고 있었던 사상이 이처럼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단 말인가. 한편으로 허탈하기까지 하다.

인상을 개아의 관념으로, 수자상을 영혼의 관념으로 풀이하고 있는 점은 기존의 상식은 물론 원불교대사전의 풀이와도 많이 다르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의미의 인상과, ‘개아가 있다’는 관념의 인상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더 큰 차이는 수자상에 대한 풀이다. 세속적 지위로 풀이한 원불교와는 달리, 영혼이 있다는 관념으로 풀이하고 있지 않은가. 없애야 할 상이 세속적 상이 아닌 영혼이란 점은 워낙 획기적이라 깊은 고구(考究)가 요구되는 대목이다.

놀라운 해석차이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중생상에 대한 해석은 가관이다. 조계종 표준본은 중생상을 ‘중생이 있다.’는 관념으로 옮겼으나, 그 뜻이 ‘우리가 아는 그런 중생이 아님’을 각주를 달아 설명한다. 즉 “본 문맥에서 중생(sattva)은 부처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중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끊이지 않고 지속되는 존재(sat)’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표준본 21쪽 각주 6)는 것이다.

기존에 알고 있던, 하굴심으로의 중생속성 개념이었던 중생상과는 너무도 다른 해석이다. 중생상을 중생적 속성이 아닌 ‘존재의 지속성에 대한 관념’으로 보고, 그것도 버려야 할 상으로 제시하고 있다.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쯤 되면 사상(四相)은 과연 무엇이고, 비사상(非四相)은 또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것인가에 대해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더 나아가 그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답으로서의 비사상의 가르침이나 수행이 허망한 느낌마저 든다. 금강경 번역본의 점검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 있다.

이렇게 해석이 달라진 연유는 어디에 근거하는 것일까. 또 큰 번역의 차이는 수백, 수천 년 동안의 가르침과 어떤 관계가 있으며, 과연 깨침을 이해하고 수행을 하는 데 문제는 없는 것일까.

해석이 달라진 연유는 우선 학문의 발달로 산스크리트어를 해독할 수 있는 지식과 도움을 주는 많은 정보가 축적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아울러 그에 따른 원뜻 이해 수준의 진전에 연유한 것으로 봐야할 것 같다. 한국의 금강경은 중국어로 번역되어 풀이된 것이 들어왔고 그것을 원전으로 삼아왔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 학문의 발달로 인해 국내외 학자들이 산스크리트어를 접하고 읽을 수 있게 되면서, 해석의 수정이 가능해졌다.

물론 과거 구마라즙을 비롯한 보리유지, 진제, 달마급다, 현장 등 역시 범어를 보고 번역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의미에 대응하는 개념이 문화권마다 상이하여 한편으로 의역을 하고 또 직역이 되기도 하였다. 이 의역된 용어는 세월이 지나면서 중국적 사상의 개념화로 고착이 되었고, 이것이 삼가해나 오가해의 주석서에 기록된다. 이것을 거의 그대로 가져와 이해하고 구한말에 이르러 한역을 한 결과가 현재까지의 금강경 번역의 실태다. 그러나 그 개념 이해의 혼선에 따라 번역의 혼란이 가중되자 표준본을 내기에 이른 것이다. 지난 호에도 언급했듯이 표준본은 과거와 현재 동서의 모든 자료를 점검하여 얻은 결정본이다. 물론 개선의 여지가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현재까지의 지식과 지혜의 총아로 보아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사상서나 종교경전의 번역은 개념의 보수성과 해석의 심천이 심하므로 그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온전한 번역을 할 수 있다고 여겨진다. 한편 새 불교를 지향하는 원불교는 새로운 해석을 시도할 수도 있어야 한다. 위의 정황을 미루어 볼 때, 우리는 현재의 불교계가 수행하는 작업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 아닌가 판단된다.

번역의 문제가 나왔으니 하나 더 언급을 하자. 원불교는 애초부터 한글 위주의 경전을 지향하였다. 그것이 개혁 방향의 하나였다. 짧은 영주나 성주 등의 의식적 의미를 가지는 한문경구 외의 경전은 번역본을 사용하는 것이 옳다. 예를 들어 반야바라밀다심경의 경우가 그렇다. 경의 한글번역경의 사용이 개혁에 더욱 잘 어울린다. 평소 이런 생각이 있었으나 유보하고 있던 차에, 조계종이 먼저 한글번역경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원불교가 말로만 개혁을 지향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씁쓸함이 드는 대목이다.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기자명 서광 스님 

“이와 같이 셀 수 없이 무수히 많고 끝이 없는 중생을 구제하지만 실제로는 구제를 받은 중생이 없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을 가지고 있으면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아상은 우리 몸을 자아로 집착
인상은 경험 대상에 대한 집착
중생상은 계산해서 생겨난 집착
수자상은 내가 영원하다는 착각

지난 호에서 보살은 중생구제의 과업을 수행함에 있어서 ①그 어떤 대상도 제외되어서는 안 되며 ②구제의 목표지점은 무여열반임을 살펴봤다. 여기에서는 ③그렇게 중생구제를 하되, 했다는 의식이 마음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세 번 째 실천덕목을 언급하고, 그 이유로 보살이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라고 하는 이 4가지 상(相/想)을 가지고 있으면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한다.

‘금강경’을 독송하거나 공부해 본 사람은 누구나 익숙하게 기억하는 것이 이 4가지 상에 대한 개념이다. 그러나 이 개념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쉽지가 않고, 자기가 이해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4가지 상에 대한 개념을 명료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금강경’ 전체 내용을 파악하는 데 장애가 된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보살이 이 4가지 상을 가지고 있으면 보살이 아니라고 선언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이 4가지 상을 잘 이해하고 깨달아서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도록 노력해야하기 때문이다.

흔히 4가지 상의 의미는 각각 자아가 있다는 관념[我相], 개아가 있다는 관념[人相], 중생이 있다는 관념[衆生相], 영혼이 있다는 관념[壽者相]이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그러한 정의를 통해서 우리가 ‘금강경’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고, 실제 삶과 인간관계에 응용, 실천하면서 영적 성장과 깨달음을 증장시킬 수 있는 토대나 동기를 마련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치유적인 관점에서 나름의 설명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우리가 ‘나’라는 자아의식을 갖게 되는 가장 근원적인 밑바탕에는 경험(또는 앎)이 자리하고 있고 그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육체다. 그런데 우리들의 일상적인 경험은 대부분, 경험하고 있는 주체와 경험되어지는 대상으로 이원화하는 과정을 통해서 끊임없이 생멸하는 찰나적인 경험을 기억창고에 저장한다. 그런 다음 요모조모로 분별, 계산하면서 이름을 붙이고 집착해서 고정관념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만들어진 고정관념이 일차적으로 경험의 주체인 자기 자신과 관계되어 있으면 자아에 대한 집착[我執]으로 발전하게 되고, 자기 이외의 대상과 관계되어 있으면 현상에 대한 집착[法執]으로 발전하게 된다.

여기서 4가지 관념은 경험 주체로서의 자아에 대한 집착의 종류를 구분해 놓은 것이라고 보면 된다. ①경험하는 감각기관들(눈, 귀, 코, 혀, 몸, 의식)이 머물고 속해있는 우리 몸을 자아라고 집착하는 고정관념(아상), ②경험되어지는 대상에 소유권을 투사하고 그것을 나의 것이라고 믿는 고정관념(인상), ③아상과 인상을 대상으로 요모조모로 계산하고 따져서 생겨난 제2, 제3의 갖가지 고정관념들(중생상), ④나라는 존재가 영원히 존재한다는 착각에서 비롯된 고정관념(수자상)이다.

그런데 보살이 이 4가지 관념을 가지고 있으면 왜 더 이상 보살이 아니라는 것인가? 그것은 우리가 중생구제의 과업을 실천할 때 ‘나’와 타자를 차별해서 ‘나’에게 집착하게 되면, 그 ‘나’로 인해서 나의 것이라는 소유에 대한 집착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또 소유물에 대한 집착은 갖가지 정서장애(번뇌)와 사고장애(망상)를 만들고, ‘나’라는 존재가 영원히 존재한다는 착각으로 이끌기 때문에,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태도가 강해져서 진정으로 타자를 유익하게 하는 마음이나 행동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중생구제와는 멀어지게 되므로 보살은 더 이상 보살이 될 수 없다는 의미다. l 서광 스님 한국명상심리상담연구원장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금강경 이야기   

"상(相)"이란 우리의 생각이 굳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관념(觀念)이라 합니다. 우리의 관념은 감각기관인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등의 육근(六根)이 그 대상 경계인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에 응(應)하여 생겨납니다. 따라서 관념은 당연히 주관적 견해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나[我]의 견해, 즉 아견(我見)으로서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이것이 곧 아상(我相)이 생겨나는 원인입니다.

혜능대사는 아상(我相)이란 “미혹한 사람이 재산과 학문과 족성(族姓)이 있음을 믿고 일체 사람을 경만(輕慢)하는” 것이라고 규정했습니다. 미혹한 사람이라는 것은 생명체로서의 중생을 말한 것입니다. 경만(輕慢)이란 ‘낮추어보고 업신여긴다’는 뜻입니다. 우리들은 자신의 생명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자신의 존재에 대한 자부심이 아주 큽니다. 반면에 상대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대체로 남을 가벼이 생각하여 업신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돈이 많은 부자들은 아상(我相)이 높습니다. 드높은 명예와 권력을 손에 쥐고 있는 사람도 아상이 높습니다. 학문이 뛰어나거나 지식이 많은 사람의 아상도 대단합니다. 교수가 학생에게 ‘이것도 논문이라고 썼나?’라고 말한다면 아상에 의한 겁니다. 그렇다고 상이 반드시 뛰어난 사람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나는 부족하고 못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분명 아상에 젖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상은 어떤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니지요. 요즘 사회의 화두로 대두되고 있는 계층 간의 소통도 아상이 그 원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 사람마다 모두 자신의 아상이 있고, 자신의 견해[我見]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상과 아견의 크기나 나타나는 양상은 사람마다 모두 다릅니다.

​소통을 원활하게 하려면 먼저 자신의 아상을 버리고, 먼저 상대편에게 다가서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이 쌓아올린 아상의 벽을 허물지 않고서, 상대가 벽을 허물고 자신에게 다가서기만을 바랍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소통할려고 하는데, 상대편이 마음을 열고 다가서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 모두는 자신의 관념에 의한 아상을 지키려 하고, 자신의 견해[我見]가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젊은이들은 어른들이 자신들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자신들의 생각이 옳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젊은 세대가 가지는 아상입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젊은이들이 자기 멋대로 라고 생각합니다. 젊은이들이 어른인 자신들을 무시하고 홀대한다고 여깁니다. 어른들이 가지는 아상인 것이지요. 어린아이는 아상이 없을까요? 요즘에는 아이들의 아상이 때로는 어른들의 아상을 뛰어넘습니다. 아버지는 아이들 앞에서 그저 고개를 들지 못합니다.

농부는 농부의 아상이 있고, 주부는 주부 나름의 아상이 있습니다. 요즘 가정에는 아내의 아상이 남편의 아상을 뒤엎고도 남습니다. 눈치 빠른 아이들은 그것을 압니다. 그래서 부르는 순서를 '아빠, 엄마'에서 얼른 '엄마, 아빠'로 수정했습니다. 골든 벨에서 떨어진 아이가 ‘엄마! 미안해!’라고 큼지막하게 써서 흔들어 됩니다. 그 아이는 손오공처럼 아버지 없이 태어났을까요? 이것도 또한 아이들의 아상인 겁니다. 아이들의 관념에 의한 견해이니까요. 이러한 현상은 어쩌면 시대의 부적절한 흐름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들이 겪는 괴로움의 상당 부분은 아상(我相)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아상(我相)에서 남이라는 관념, 즉 인상(人相)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의 "인(人)"은 ‘남’ 또는 ‘타인(他人)’이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우리 모두의 삶은 분명 나와 남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상대역인 ‘남’을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자신은 가장 선(善)하고, 깨끗하다고[淨] 아주 높이 평가합니다. 반면에 상대는 선하지 않고[不善], 깨끗하지 않다[不淨고 생각합니다.  상대는 모든 것이 부족하고, 예의바르지 않고, 무식하고, 나쁜 생각과 행동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여깁니다.

 이렇듯 아상에 휩싸여  바르지 못한 견해로 상대를 보면 자신도 괴롭고, 상대편도 또한 괴롭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겪는 괴로움의 상당 부분은 아상과 인상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는 겁니다. 아상과 인상을 벗어나지 않고는 결코 평화로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상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나'의 상대역인 ‘남’에게도 그 사람의 아상(我相)이 있습니다.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도 때로는 주인의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강아지가 지니고 있는 아상으로 자신의 상대인 주인을 판단하기 때문이지요. 강아지에게도 아상이 있다고 말하면 웃고 말겠지만, 그럴진대 나의 상대역인 그 사람의 아상(我相), 곧 인상(人相)은 얼마나 큰 것이겠습니까. 우리의 삶이 진정으로 아름답기 위해서는 아상과 인상이 공히 소멸되어야 합니다. 그럼 아상과 인상이 소멸되고 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그러나 다시 중생상(衆生相)의 문제가 남습니다. 중생상에 대하여 혜능대사는 “좋은 일은 자기에게 돌리고 나쁜 일은 남에게 돌리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해안스님은 “괴로운 것을 싫어하고 즐거운 것을 탐내는 것이 중생상”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스님들의 말씀에 ‘중생들이 지니고 있는 나약한 습성과 군중심리가 곧 중생상’이라고 덧붙입니다.

중생이라고 이름 지어진 우리들에게는 나약한 습성이 있습니다. 우리의 올바른 삶은 원력(願力)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진정한 원력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바로 "금생(今生)의 이 몸으로 부처를 이루는[卽身成佛]" 일입니다. 다음 생이면 이미 늦기에 성불은 금생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선행과 수행 정진은 실로 그 원력을 이루기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선행과 수행 정진으로 닦은 선근복덕을 자질구레한 작은 소원을 이루는데 허비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중생심은 작은 소원을 비는 것조차도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 시작할 때 마음은 거창하지만 채 삼일을 넘기지 못합니다.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스스로 신심을 꺾고는 물러서고 맙니다. 물러서는 이 마음, 즉 퇴굴심(退屈心)이 바로 중생심이요, 중생상이라는 겁니다. 

중생심의 타파(打破)하지 않고서는 한 발짝도 부처의 길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중생상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중생상을 버리고 나면 다시 수자상(壽者相)이 남습니다.

수자상(壽者相)에 대하여 혜능대사는 “경계를 대하여 취하고 버리고 분별하는” 것이라 했고, 해안 스님은 “청정열반을 잊지 못하고 영원히 거기에 머물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불교적 수행을 통하여 무엇인가를 얻었다고 생각하거나 깨달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곧 수자상이라는 겁니다. ‘나는 아상, 인상, 중생상을 이미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것도 또한 수자상입니다. 이렇게 설명하고 보니 너무 피상적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 식의 설명을 덧붙이려고 합니다.

대저 목숨을 가진 생명체는 모두 오래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 육근(六根)이 청정하여 심신이 건강하고 수명 장수하기를 소원하는 겁니다. 스님들은 여기에 덧붙여 모든 중생이 “함께 정각을 성취케 하소서[俱成正覺]!”라고 기원합니다.

스님이 지성스럽게 축원을 해주면 신도님은 기분이 좋습니다. 안주머니 깊은 곳에 간직했던 지갑을 꺼내어 손수건에 싼 것을 꺼냅니다. 손수건을 벗기니 또 손수건이 있습니다. 이렇게 양파 껍질을 벗기는 것과 같은 수고로움을 몇 번 더하면 드디어 지난 설날 아들이 며느리 몰래 쥐어주고 간 용돈이 나옵니다. 당신의 생명 같은 돈 만원을 부처님께 올립니다. 어찌 부처님께서 감동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 순간만큼은 기원정사를 지어 보시했던 급고독장자가 부럽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지요? 바로 수자상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오래 사는 것만으로도 부족해서 모두 걱정근심이 없으면 좋고, 거기에 병(病)이 없어 아프지 않고 오래오래 살다가 잠자듯 가게 되면 더욱 좋다고 생각합니다. 나이 많은 사람은 자기보다 나이가 작은 사람들이 어른으로 대접해주기를 바랍니다. 말은 아니라고 하면서도 대접받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살아 있다는 맛이 나거든요. 중생의 이런 습성이 곧 수자상입니다.

그렇다고 수자상이 단순히 오래 살고 싶은 욕망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가장으로써, 혹은 회사나 직장에서 높은 자리에 앉아 있다면 그 자리에 따른 상이 있기 마련입니다. 바로 수자상입니다.

​나는 지금 높은 의자에 앉아 강의를 하고 있고, 여러분은 바닥에 앉아 강의를 듣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상을 버리지 못했다면, 나에게는 여러분에게 금강경을 강의한다는 수자상이 있을 겁니다. 여러분에게는 무엇이 남아 있을까요? 중생상이 남아 있습니다. 특히 금강경을 한 번도 읽지 않았거나 강의 자료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분들은 그 작용이 더 강합니다. 도저히 알 수 없으니, ‘시간이여, 어서 흘러가라!’하고 앉아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자기 위치에서의 수자상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나이를 내세워 누군가로부터 칭찬받고 싶고 대접받고 싶다면, 누군가를 지배하고 싶다면 수자상이 남아 있는 겁니다. ‘나는 할 수 없어!’ 라고 물러선다면 중생상의 모습입니다. 나와 남을 나누어 보는 시각이 남아 있다면 아직 아상과 인상을 떠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상(四相)은 내가 존재한다는 견해, 즉 아상으로부터 파생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상만 제어한다면, 나머지 상을 벗어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고 말하는 겁니다.

부처님께서는 누누이 당부하십니다. 불법을 배우려는 사람은 부지런해야 하고, 불법을 배우는 목적이 자신보다는 이웃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배운 것, 내가 지니고 있는 것을 이웃에게 흔쾌히 주어야 합니다. 내게 있는 것을 이웃에게 베풀어 주더라도 ‘주었다는 상(相)’에 집착하지 않아야 합니다.

상(相)을 벗어나지 못하면, 진정한 불법의 경계에는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만약에 상(相)이 남아 있다면 "보살이 아니다[卽非菩薩]"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보살은 곧 부처를 이루기 위하여 수행하는 모든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불도(佛道)를 이루기 위하여 발심 수행하고 있다면, 여러분 자신이 곧 보살입니다. 그러나 아직 상에 집착하고 있다면, 보살이라고 말 할 수 없습니다. 상을 벗어난 사람을 이름하여 보살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아상·인상·중생상에 대한 선승(禪僧)의 주장

기자명 김해일보
김해 칠산 묘법연화사 법지 합장
칠산 묘법연화사 법지 합장

 우리는 전혀 사리에 맞지 않는 주장이나 말을 억지스럽게 하여 자신의 조건에 맞추려고 하는 것을 비유하는 의미로 견강부회(牽强附會)라는 사자성어를 꼽습니다. 이는 송나라 때 청초의 『통지총서』에 소개된 말로써, 다른 사람의 의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신의 의견과 고집만 내세우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사회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 불가에서도 금강경의 해석을 두고 이런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점을 확인할 수 있는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금강경은 선불교를 주창하는 조계종의 '소의경전(所依經典)'입니다. 소의경전이란 신행(信行)을 비롯하여 교의적(敎義的)으로 의거하는 근본 경전을 말합니다. 이러한 금강경이 '마음이 곧 부처(즉심시불)'라며 마음속에서 부처를 찾으라던 마조선사의 일갈에서부터 헷갈린 해석으로 음모에 휩싸이게 됩니다. 오로지 '내가 곧 부처'라는 말 놀음에 빠져 단박(돈오)에 부처가 되는 것은 오직 한마음에 있다고 꼬드깁니다. 그리고는 금강경에서 부처님이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등 네 가지 상을 버리라고 가르친다'라고 강조합니다.

 실제로 이 네 가지 상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으면 금강경은 아마도 껍데기만 남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상은 자아가 있다는 관념이며, 인상은 개아가 있다는 관념이며, 중생상은 중생이 있다는 관념이며, 수자상은 영혼이 있다는 관념이라고 설명하면서 이러한 관념을 벗어나기 위한 목표를 삼는 것이 선수행이라고 설명을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네 가지 상을 떨쳐버리면 깨달음을 얻는다고 가르칩니다. 정말 어이가 없는 견강부회를 드러내고 있는 짓들입니다. 대략 2천 년 전쯤, 금강경을 편집했을 당시의 사정을 조금이라도 고민해 본다면 그런 황당한 주장에는 아마도 고개가 갸우뚱해질 것입니다.

 부처님은 인간의 보편적 사고와 인도의 전통적인 사상을 극복하고 중도연기를 설했습니다. 존재론적 관점을 벗어나려 했으며, 특히 자아(아트만)나 브라만과 같은 절대적인 존재를 인정하고 있던 기존의 사상을 깨트려버리고 무아설을 설파했습니다. 존재론적 관점으로 접근하는 부처님의 인간관은 '현상으로서의 몸뚱이(오온)는 존재한다. 그러나 거기에 나의 자아나 보편적인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단지 불교는 업에 의한 비실체의 변화인 윤회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불변하는 영혼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무아설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무아설은 부처님 열반 후 오래지 않아 교단 내외로부터 많은 도전을 받게 됩니다. 당시의 다른 종교들은 일관된 변화를 위해서는 변화를 초월하는 핵과 같은 것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 금강경을 편집하려는 사람들의 의도는 교단 내외로부터 부처님 가르침의 근간이 훼손되는 것을 막아야겠다는 강한 시도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그래서 유아설과 유신설만큼은 철저하게 깨트리려 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혼이며 『금강경』에서 이를 지칭하는 표현이 당시 인도사회의 전통적 유신론과 유아론적 설명인 아상, 인생상, 중생상, 수자상입니다.

 아상은 '아트만으로 힌두교에서 주장하는 영혼설'이고, 인생상은 '보특가라로 독자부에서 주장하는 영혼설'이며, 중생상은 '사트바로 특정 종교나 학파의 주장이라기보다는 당시에 널리 퍼져있던 유력한 영혼론 중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수자상은 '지바라는 것으로 쟈이나교의 영혼설'입니다.

 그러므로 『금강경』에서 이러한 4가지의 상을 부정하는 것은 오로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불교의 완전한 변화를 주장하는 입장에서, 당시의 사상과 타종교가 부분적으로라도 실체를 주장하고 있던 그 견해를 비판한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중국의 선불교가 이를 번역하면서, 나라는 생각, 인간이라는 생각, 중생이라는 생각, 오래 산다는 생각으로 번역하고 검토 한번 없는 채, 잘못된 가르침이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이 없어야 깨달음을 얻는다며 단박 깨침을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어찌 부처가 되는 중생의 길이 오직 한마음에 달려 있을까요? 과연 뛰어난 마조선사일지라도 한 찰나에 선뜻 부처님의 경계에 이를 수 있었을까요? 수만 갈래의 마음, 항하강의 모래 수만큼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의 종자를 하나로 모아 그 마음까지도 떨쳐버려야 하는 것이 부처님의 경계입니다.

 불교는 다른 종교처럼 우격다짐의 믿음을 강요해서는 안됩니다. 특히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임을 다시 한번 살펴보아야 합니다. 논리적으로 판단해서 말이 안 되면 바로 버리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오늘도 한국불교는 이런 엉터리 해석을 전수하며 견강부회에 빠져 있는 것같아 안타깝습니다.

金剛經에서 말하는 四相의 考察

 제주불교신문 승인

우주법계의 생명은 오직 하나일 뿐인데  중생이 자아(自我)를 인식하는 방식은 나(我相) 따로, 남(人相) 따로, 중생(衆生相, 부처 따로)이 따로 이며 영원하다(壽者相)라고 집착(執着)하는 4가지로 구분하는 것을 4상(四相)이라 하며, 그 출발은 우주법계와 떨어져 내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아상(我相)에서 기인되고 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4상(四相)은 없다고 설하셨고,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인 4상(四相)이 없어야 무상보리(위 없는 깨달음)를 이루는 보살이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면 먼저 4상(四相)을 개별적으로 알아 보도록 하자.

1. 아상(我相)

자기라는 고집, 즉 자기가 제일이라는 모습이다. 나에 대한 것과 나라고 하는 집착(執着)에서 벌어지는 모든 행위와 사건, 그 나름의 자만 의식이다. 근본은 있는 것이 아닌데 마음속에 생긴 병으로 미(迷)한 사람이 재보와 학문과 족성(族姓, 즉 가문) 모든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것과 마음에 능소(能所)가 있어서 중생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다.

2. 인상(人相)

남이라는 고집, 즉 나(我)와 남을 나누어서 보는 모습이다.

남와 남을 차별하는데에서 생기는 배타의식이나 차별의식으로 내 것만 좋고 내의견만 옳다고 남의 의견은 다 무시해 버리는 것이며 자신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한다면서 남을 공경하지 않으며 자기가 계(戒)를 갖고있으니 파계자(破戒者)를 업신여기는 것이다.  자기 자신과 견주어서 남을 비교, 차별 또는 경멸하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즉 모든 사물에 대하여 생각할 때 항상 객관(客觀)적인 판단과 의식으로 생각하며 객관적인 관념에 집착(執着)하여 행동라는 것을 말한다.

3. 중생상(衆生相)

중생(衆生)의 본능적 고집, 즉 재미있고 호감(好感)가는 것만을 본능적으로 취하는 모습이다.

우리는 못난 존재라는 열등의식에 사로 잡히는것, 즉 부처님의 가르침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들을 위한 것이며 우리는 부처님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착한일에 만족하는것. 즉 좋은 일은 자신에게 돌리고 나쁜 일은 다른 사람에게 돌림으로서 삼악도의 고통은 싫어하며 천상(天上)에 나기를 원하기만 한다.

4. 수자상(壽者相)

생명에 대한 고집, 영원한 수명(壽命)을 누려야지 하는 상(相)이다. 나이에 대한 편협(偏狹)된 집착(執着), 즉 나는 지금 몇 살이다. 젊었다. 늙었다. 라는 한계의식을 말한다. 

어떤 경계에 대하여 취사 분별함, 마음에 오랜 삶을 좋아해서 부지런히 복업을 닦아 모든 집착을 잊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아상의 번뇌(煩惱)를 통해 인상이 나오고 또한 중생상, 수자상이 차례로 나오게 되는데 아상은 매우 미세한 번뇌(煩惱)로서 끊임없이 노력을 해도 완전히 떨쳐버리기가 참으로 어렵다.

현대의 심리학에서 최대의 발견은 잠재의식(潛在意識)의 발견이다. 라고 하는데 그 설명이 불성(佛成)이고 우리들의 진실한 생명의 위력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중생이라고 생각하면 중생 행동밖에 못하는 것이고 부처라고 생각하면 저절로 부처 행동이 나오는 것이다.  금강경에서는 4상은 무상정등정각의 깨달음을 얻지 못하게 하는 최대의 장애물이라 하고, 육조 혜능대사는 이 4상(四相) 있으면 중생이요. 4상이 없으면 부처라고 이야기했다. 아무리 무량한 중생들을 제도했다 하더라도 4상이라는 그릇된 마음을 항복 받지 못하면 부처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금륜 문경언 <본지 객원기자· 제주어보존회몬울엉봉사단장>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정확한 이해

작성자향상일로

若菩薩 有 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則非菩薩(약보살 유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즉비보살)

만일 어떤 보살이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다면 곧 보살이 아니니라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각각의 낱말의 의미는 아트만(atman), 자성(pudgala), 중생(sattva), 영혼(jiva)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금강경의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은 마음에 일어나는 모든 관념을 말하는 것이지, 아트만, 자성, 중생, 영혼 각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주관에서 벗어나서 객관적인 사람이 되어야한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아상이란? “주관에서 벗어나서 객관적인 사람이 되어야한다”는 표현에서 사용한 주관이라는 의미이며,  인상 · 중생상은 객관적인 사람의 의미와 같습니다. 아상은 주관을 말하는 것이고, 인상· 중생상은 객관을, 수자상은 절대객관을 말하는 것입니다. 금강경은 주관과 객관을 모두 벗어나야만 보살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대하거나 모든 일상생활을 할 때는 아상 즉 주관에서 벗어나야 하고, 객관에서도 벗어나야 하고, 절대객관이 있다는 신앙적인 믿음마저도 벗어나야만 진정한 보살행이라는 가르침이 금강경의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정확한 의미인 것입니다.

아상 (atman samjma)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한역 (K.650, T.99), p. 74 / 2145 (1). 

"'세존이시여, 이 5수음(五受陰)은 무엇이 그것의 근본[根]입니까? [즉,] 무엇이 5수음을 모으[集]고, 무엇이 [모아진] 5수음을 생겨나[生]게 하고, 무엇이 [마음으로 하여금 생겨난] 5수음과 접촉[觸]하게 하는 것입니까?' 고타마 붓다는 그 비구에게 말하였다. '이 5수음(五受陰)은 욕탐[欲, 欲貪]이 그것의 근본[根]이다. [즉,] 욕탐[欲, 欲貪]이 5수음을 모으[集]고, 욕탐[欲, 欲貪]이 [모아진] 5수음을 생겨나[生]게 하고, 욕탐[欲, 欲貪]이 [마음으로 하여금, 생겨난] 5수음과 접촉[觸]하게 한다.'"

모든 인간의 오온은 오취온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의 인식은 항상 욕탐이 만들어낸 상(samjma)인 것이지, 색 수 상 행 식의  오온 중에는 상(samjma)이 아닌 아·인·중생·수자를 아는 요소는 없습니다.

따라서 아상이란?

아트만 자성 중생 영혼 등을 한정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인식 행위 자체 즉 의식의 모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상 (pudgala samjma)
인상이란?

개인이 집밖으로 나오면 단체 생활을 하게 되는데, 사람이 둘이상 모이면 반드시 군체가 됩니다. 

사람 뿐만 아니고 모든 생명체는 둘이상이 되면 군체가 되는 것이 자연의 법칙입니다.

군체라는 것은 여러사람이 모이게 되면 그중에 머리역활을 하는 사람이 한사람 생기고 손발역활을 하는 사람이 생깁니다.  음식을 먹는 입을 담당하는 사람이 있다면  먹은 음식 찌꺼기를 배설하는 항문 역할을 하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인데 항문을 해야할 사람이 나도 맛있는거 좀 먹자고 달라들면

전체 조직이 한꺼번에 죽어버립니다. 

아상을 완전히 버려야하고 군체의 세포가 되어야하는 것인데 이때 군체의 전체에 있는 정신 영혼이 바로 인상인 것입니다

중생상 (sattva samjma)

4상 중 중생상은 다른 3상과는 다른 것입니다. 아트만(atman), 자성(pudgala), 영혼(jiva)은 모두 외도들의 믿음의 대상이었지만 중생상은 외도들의 믿음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중생이라는 것은 본래 유정 무정의 모든 중생을 말하는 것인데, 금강경 4상 가운데 중생상은 유정의 중생상만을 대상으로 합니다. 유정의 중생과 무정의 중생의 차이는 욕탐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로 갈라집니다. 그러므로 중생상이라는 것은 욕탐을 말하는 것입니다.  

중생은 각각 중생들 종류별로 가지고 있는 욕탐이 조금씩 다릅니다. 기린은 높은곳에 풀을 뜯어먹으려는 욕구때문에 목이 길어지고, 쥐나 두더지의 의식은 땅속에서 사는 것을 지향합니다.  물고기, 새 등 모든 유정의 중생은 각각 의식이 무엇을 지향하는 가에 따라서 습성과 모습이 다릅니다. 개가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우선 개의 습성을 먼저 모두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생상인 것입니다 .

수자상 ( jiva samjma)

도반들이여, 눈(眼)과 형색(色)을 조건으로[緣] 눈의 알음알이[眼識]가 일어납니다.

이 셋의 화합이 감각접촉[觸]입니다. 감각접촉을 조건으로하여 느낌이 있습니다. 느끼는 것을 인식하고, 인식하는 것을 생각하고, 생각하는 것을 퍼져나가게 하고, 퍼져나가게 하는 것을 근거로 해서 사람에게 퍼져나가는 상(samjma)이 일어납니다.

 4상은 마음에 일어나는 모든 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붓다께서는 식(識)을 조건으로 하여 상(samjma)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하셨고, 상(samjma)이 일어나는 것은 "욕탐[欲, 欲貪]이 근본[根]이고 욕탐[欲, 欲貪]이 5수음을 모으[集]고, 욕탐[欲, 欲貪]이 [모아진] 5수음을 생겨나[生]게 하고, 욕탐[欲, 欲貪]이 [마음으로 하여금, 생겨난] 5수음과 접촉[觸]하게 하는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의식이 의식외부에 실재로 존재하는 사물을 인식하는 것은 시각 청각 기타의 체감각을 통하여 들어온 감각신호를 오성의 틀로 인식한 후 기억에 저장되어 있는 과거의 경험된  상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인식된 것은 실재로 존재하는 사물이 아니고 과거의 경험된  상인 것인데, 수많은 과거의 경험 중 어떤 경험이 상기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 바로 욕탐이므로 의식은 욕탐이 상기시킨 과거의 기억(상)입니다. 욕탐이 상기시킨 과거의 기억(상)이란 samjma이므로, 붓다의 상(samjma)은 현대인식론에서 본 실제 인간의 의식 작용에서 일어나는 상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이때 나오는 오성이 바로 수자상(jiva samjma)입니다. 오성은 과거에는 우주에 존재하는 우주적 영혼의 절대 객관인 선험적 의식으로 여겼으나, 현대인식론에서는 선험적의식은 단순히 검험주의 인식론의 예외적인 사례로만 취급합니다. 개나 고양이와 같은 동물들이 임산출산에 대한 교육을 받은 적이 없이도 임신 출산에 대한 모든 지식을 알고 있는 것을 과거에는 우주적 절대적 영혼에 의한 것으로 보았으나 최근에는 진화론적인 검험적 의식으로 봅니다. 수자상(jiva samjma)은 수억년동안 진화하면서 쌓인 경험적인 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상 (불교)

사상(事相)은 현상계의 차별상 또는 현상계의 차별적 존재들을 말한다. 속제(俗諦) · 진소유성(盡所有性: 다함이 있는 성질) · 진소유(盡所有: 다함이 있는 것)라고도 한다.

4상(四相, 산스크리트어: catvāri lakṣaṇāni, 티베트어: mtshan nyi bzhi, 영어: four marks of existence)은 생멸(生滅)하는 존재, 보다 정확히는 생멸변천(生滅變遷)하는 존재로서의 모든 유위법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4가지 성질인 생(生) · 주(住) · 이(異) · 멸(滅) 또는 생(生) · 주(住) · 노(老) · 무상(無常)을 말한다.[3] 《구사론》에 따르면 이 4가지 성질은 유위법으로 하여금 유위법이게 하는 유위법의 본질적 성질로서 어떤 법이 이 4가지 성질을 갖추고 있으면 그것은 유위법이다. 그리고 이 4가지 성질이 없으면 그 법은 무위법이다. 유위상(有爲相) · 4유위(四有為) · 4유위상(四有爲相) · 유위4상(有爲四相) 또는 4본상(四本相)이라고도 한다.

4유위상 또는 유위4상은 설일체유부의 5위 75법의 법체계와 유식유가행파의 5위 100법의 법체계에서 심불상응행법(心不相應行法)에 속한다.

4유위상 또는 유위4상은 찰나유위상(剎那有爲相)과 분위유위상(分位有爲相)으로 나뉜다. 찰나유위상은 모든 유위법에서 매 찰나마다 일어나는 생멸변천으로서의 생(生: 생겨남) · 주(住: 유지됨) · 이(異: 달라짐) · 멸(滅: 소멸됨)을 말하며, 세유위상(細有爲相) 또는 승의제유위상(勝義諦有爲相)이라고도 한다. 분위유위상은 유정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한 기간[一期] 즉 한 생애 동안 겪는 생멸변천으로서의 생(生: 태어남, 유년기) · 주(住: 성장과 장성, 소년기부터 장년기) · 노(老: 노쇠함, 노년기) · 무상(無常: 죽음)을 말하며, 조유위상(粗有爲相) 또는 세속제유위상(世俗諦有爲相)이라고도 하며 이것은 1기상속(一期相續) 즉 유정의 한 생애 동안의 5온의 상속에 의거하여 유위상을 세운 것이다. 한편, 《북본열반경》 제12권에서는 생(生: 탄생) · 노(老: 늙음) · 병(病: 병듦) · 사(死: 죽음)를 1기4상(一期四相)이라 말하고 있다. 1기4상은 과보4상(果報四相) 또는 조4상(粗四相)이라고도 한다.

4상(四相)은 5온 즉 심신(心身: 마음과 몸, 정신과 육체)에 대해 실아(實我, 아트만), 즉 '실재하는 나[我]'라고 그릇되이 집착하는 4가지 유형의 잘못된 견해인 아상(我相) · 인상(人相) · 중생상(衆生相) · 수자상(壽者相)을 말한다. 아인4상(我人四相) · 식경4상(識境四相) 또는 4견(四見)이라고도 한다.

아인4상의 이치에 대한 깨달음의 정도에 깊고 옅음의 차이가 있는데 옅은 상태에서 깊은 상태의 순서로 아상(我相) · 인상(人相) · 중생상(衆生相) · 수자상(壽者相)이라고 하고 이 4가지를 통칭하여 4상(四相)이라고 하며 지경4상(智境四相)이라고도 한다.

동양철학자가 풀어주는 금강경에 무릎 ‘탁’

[토요판] 이권우의 요즘 읽은 책
<도올 김용옥의 금강경 강해>
이권우 도서평론가 

어떤 분야에 대한 특별한 지식이 없어도, 상당히 중요한 주제이구나 짐작할 방법이 있다. 특정 주제를 다룬 책이 지속적으로 나오는 경우다. 나에게는 금강경 해설서가 그러했다. 불교에 대해 상식수준의 지식밖에 없지만 계속 금강경을 풀어낸 책들이 나오는지라, 이 책이 불교에서 상당히 의미있구나 싶었다. 언젠가는 읽어야지 하다 이번에 비로소 완독했다. 자극이 되었던 것은 한형조의 <붓다의 치명적 농담>. 금강경이라는 경전 제목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풀어내는 과정을 통해 불교에 관한 기본지식을 전해준다. 이 책에 이어 지은이가 본격 금강경 해설서인 <허접한 꽃들의 축제>를 냈는데, 그 전에 다른 이의 책을 먼저 보고 싶어 <도올 김용옥의 금강경 강해>를 읽었다.

이름난 학승들의 금강경 해설서가 수두룩한데도 굳이 동양철학자들의 책에 손이 간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듯싶다. 한형조나 도올이나 노자와 장자가 전공인데다 유학에 대한 이해도 깊고, 불교에 대해 이미 쓴 책들이 있다. 아마도 무의식적으로 금강경은 유불도에 회통한 이가 설명해야 하리라 여겼던 모양이다. 기대한 바대로 책을 읽으면서 흥미로웠고 새롭게 깨닫게 된 내용도 많았다. 이래서 금강경을 중요시하는구나 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형조나 도올이나 금강경이라는 제목을 상당히 공들여 설명했다. 도올은 “청천벽력처럼 내려치는 지혜! 그 지혜는 인간의 모든 집착과 무지를 번개처럼 단칼에 내려 자르는 지혜”라 풀이한다. 도올의 설명 가운데 소승과 대승의 차이는 상당히 유익했다. 소승에서는 인간이 도달하는 최고의 성자를 아라한이라 했는데, “이 아라한은 절대적인 붓다의 경지의 하위개념으로서 설정된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아무리 수도를 해도 붓다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이에 반해 대승은 “누구든지 곧바로 불타가 될 수 있다”고 여겼다. 소승이 아라한을 내세웠다면 대승은 보살을 중요시했는데, 이는 “깨달음을 바라는 모든 자”를 뜻한다.

개인적으로 금강경의 눈은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我相)이나 인상(人相)이나 중생상(衆生相)이나 수자상(壽者相)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라는 대목이다 싶었다. 도올의 해설에 따르면 아상과 인상은 윤회의 주체를, 중생상은 몸이나 생명을 뜻하는 유정을, 수자상은 존재의 순수영혼을 뜻한다. 이를 달리 해석하면 “아상이란 나라는 생각이다. 인상이란 내가 인간이라는 생각이다. 중생상이란 내가 살아 있는 생명체, 저 죽어가는 돌보다 더 위대하다는 자만감이다. 수자상이란 시간의 존속을 가지는 모든 존재”다. 말하자면 금강경은 이런 것들의 부정정신에 뿌리내리고 있다. 여기에 이르면 자연스럽게 금강경이 일체의 모든 색(色)을 부정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때 무릎을 치게 된다. 아하, 금강경이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고 있으나 결국 공(空)으로 가는 길을 열어놓고 있구나 하고 말이다. 그 깊은 뜻이야 잘 모르나 색이니 공이니 하는 말이 불교의 주춧돌임은 들어는 보았던지라 금강경의 가치를 재음미하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현장이 상(相)을 상(想)이라 번역했다는 설명이다. “아가 있고 인이 있고 중생이 있고 수자가 있다는 생각(想) 그 모습(相)이 있는 한 우리는 영원히 보살승에 오를 수 없게 되는 것”을 뜻하는 탁월한 번역어 선택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무릎을 칠 수밖에 없다. 불교는 본디 세상만사를 우리의 욕망이 만들어낸 매트릭스라 여기지 않던가. 더불어 이것을 깰 때 비로소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했다. 상을 부정할 적에 비로소 보살이 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아는 이가 현각의 금강경 강론이 유튜브에 있다 해서 몇 대목 보았다. 도올과 그리 다르지 않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게으른 게 문제인 듯싶다. 부지런하면 참된 세계에 이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들이 그득하니 말이다. l 이권우 도서평론가

상(相) :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우주 법계의 생명은 하나일 뿐인데 중생이 자아(自我)를 인식하는 방식은 나(我相)따로, 남(人相)따로, 중생(衆生相, 부처 따로)이 따로 이며 영원하다(壽者相)고 집착(執着)하는 4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를 4상(四相)이라 하며 그 출발은 우주 법계와 떨어져 내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아상(我相)이다.

 상(相)이라는 것은 우리들의 소견이나 인식, 또는 번뇌가 생각 상 (相)의 상태를 지나 어떠한 고정된 형상처럼 너무나 견고하게 우리 내부에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말한다.(무비 스님)

 중생(衆生)과 불성(佛性)이 본래 다름이 없건만 사상(四相)이 있으므로 인하여 무여열반에 들어가지 못하니, 사상(四相)이 있으면 곧 중생이요 사상이 없으면 곧 부처이니라. 미(迷)하면 불(佛)이 곧 중생이 되고 깨달으면 중생이 곧 불(佛)이로다.(육조 스님)

 자기 존재 인식의 메카니즘(mechanism)으로 항상 이 사상중의 하나에 집착하여 자아를 인식하며 살아가는 게 중생의 모습이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4상은 없다고 설하셨고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이 4상(四相)이 없어야 무상보리(위없는 깨달음)를 이루는 대 보살이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한다. 바꾸어 말하면, 이 4상이야말로 해탈(解脫)을 얻지 못하게 하는 최대의 장애(障碍)라 할 것이고 바로 이 4상으로 부터 벗어나 무아에 이르는 것이 깨달음인 것이다.

아상(我相) : 자기라는 고집, 즉 자기가 제일이라는 모습이다.

- 나라고 하는 것, 나라고 하는 집착에서 벌어지는 모든 행위와 사건, 그 나름의 자만 의식. 근본은 있는 것이 아닌데 마음속에 생긴 병

- 미(迷)한 사람이 재보와 학문과 족성(族姓, 가문)이 있음에 의하여 모든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것, 마음에 능소(能所)가 있어서 중생을 가볍게 여기는 것

 아상을 가진 사람은 재산, 학문, 가문, 권력, 자기의 용모 또는 힘을 믿고 자기가 최고라는 고집에 빠져 있으며 모든 사람을 업신여긴다. 즉 이것은 바로 삼라만상을 인식하고 행동하는 주체가 존재한다는 생각이며 그 주체가 곧 나 즉 아상이다. 모든 사람은 바로 이 주체인 나라는 존재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인상(人相) : 남이라는 고집, 즉 나와 남을 나누어서 보는 모습이다.

- 나 이외의 남이다 하는 차별에서 생기는 배타의식이나 차별의식

내 것만 좋고 내 소견만 옳다하며 남의 의견, 남의 종교를 다 물리침

- 나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행할 줄 안다하고 남을 공경하지 않으며 자기가 계(戒) 가짐을 믿고 파계자(破戒者)를 업신여기는 것

 자기에게 견주어서 남을 비교, 차별 내지 경멸한다. 즉 모든 사물에 대하여 생각할 때 항상 객관(客觀)은 의식하고서 생각하며 객관에 집착하여 행동한다.

중생상(衆生相) : 중생의 본능적 고집, 즉 재미있고 호감(好感)가는 것만을 본능적으로 취하는 모습이다.

- 우리는 못난 존재라는 열등의식에 사로잡힌 것, 즉 부처님의 가르침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들이 다 부처이니 우리들 내부에 있는 불성을 찾아서 적극적으로 활용하라는 것

- 좋은 일은 자기에게 돌리고 나쁜 일은 남에게 돌림, 삼악도의 고통을 싫어하여 천상(天上)에 나기를 원하는 것

 중생(衆生)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들은 즐겁고 좋은 일인 듯하면 자기가 취하려 하고 귀찮고 힘든 일이면 남에게 미루려는 생각을 가진다. 즉 주관(主觀)과 객관 뿐 만아니라 그 외적인 것도 전부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수자상(壽者相) : 생명에 대한 고집, 즉 영원한 수명(壽命)을 누려야지 하는 상이다.

- 나이에 대해 편협(偏狹)된 집착. 즉 나는 지금 몇 살이다, 젊었다, 늙었다, 우리는 나이를 먹어가는 존재이다. 하는 한계의식을 말한다.

- 어떤 경계에 대하여 취사분별함, 마음에 오래 삶을 좋아해서 부지런히 복업을 닦아 모든 집착을 잊지 못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는 늙지 않으리라는 생각, 죽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가지며 모든 객관의 사물들이 그 영원한 수명과 함께 하리라는 착각 속에 산다. 즉 우리가 부를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부가 영원히 나와 같이 한다고 생각하며,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그 지식이 나와 영원하다고 생각하며, 존재하고 소유하고 있는 것이 영원하며 언제나 자기와 같이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상의 번뇌를 통해 인상이 나오고 또한 중생상, 수자상이 차례로 나오게 되는데 아상은 매우 미세한 번뇌로서 끊임없이 노력을 해도 완전히 떨쳐버리기가 참으로 어렵다. 어느 순간에 떨쳐버린 줄 알았다가도 어느새 또 나에 대한 집착, 상대에 대한 고정관념이 자리 잡게 된다.

 그러나 중생상, 수자상으로 갈수록 거친 번뇌(煩惱)라 비교적 상에서 벗어나기가 쉬우므로 적어도 중생상, 수자상은 떼어놓고 의욕적으로 살아가야 한다. 이 의욕은 바로 원력(源力)과 상통하는 것이다.

 서양의 심리학자들이 말하길 20C의 심리학에서 최대의 발견은 잠재의식(潛在意識)의 발견이다. 라고 하는데 그 설명이 불성(佛性)의 설명이고 우리들 마음의 무한한 힘과 가능성, 우리들의 진실 생명의 위력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이것을 믿고 활용하여 바라는 것을 성취해 가야 한다. 업(業)타령은 불교인의 할 짓이 아니다.

 업을 극복하고 팔자도 극복하고 인연조차도 힘차게 극복해가야 한다.

 자기 스스로 중생이라고 생각하면 중생 행동밖에 못하는 것이고 부처라고 생각하면 저절로 부처 행동이 나오는 것이다. 그리하여 원력(願力)과 생명력(生命力)이 넘치는 반야(般若)의 삶을 펼쳐 보이는 보살의 인생, 부처의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사람마다 사상 중 어느 상이 강렬한가에 따라 그 살아가는 방식에 차이가 있다. 또한 중생은 항상 이 사상중 하나로 자아를 인식하고 있으며 한 가지 상으로 한정되어 인식하는 게 아니고 4상이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작용하며 한시도 이 인식으로 부터 벗어남이 없다.

 금강경에서는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무상정등정각)의 깨달음을 얻지 못하게 하는 최대의 장애물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육조 혜능은 이 사상(四相)이 있으면 중생이요, 사상이 없으면 부처라고 하였다.

 아무리 무량한 중생을 제도했다 하더라도 사상이라는 그릇된 마음을 항복 받지 못하면 부처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아상은 나라는 실체가 있다는 자아인식이 강렬한 집착에서 벌어지는 모든 번뇌이다. 즉 고귀하고 존귀한 영원불멸의 존재(아트만)가 있다는 자아 인식작용이다. 이른바 나라는 고집이며 내가 누구인데 하는 우월 의식이라 하겠다.

 아상을 가진 사람은 재산, 학문, 가문, 권력, 자기의 용모 또는 힘을 믿고 자기가 최고라는 고집에 빠져 있으며 모든 사람을 업신여긴다. 즉 이것은 바로 삼라만상을 인식하고 행동하는 주체가 존재한다는 생각이며 그 주체가 곧 나 즉 아상이다. 모든 사람은 바로 이 주체인 나라는 존재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상이 강한 사람일수록 자존심과 아집이 강하고 명예를 중요시 하며 남에게 지는 것을 싫어하고 성격이 불같고 화를 잘 내며 복수심이 강하다. 또한 성적으로는 고결한 면이 있으나 남의 견해를 받아들이기 힘든 부류이다. 어떠한 상식적 설명이나 올바른 학문적 견해를 제시해도 (그건 네 생각이고. 하며 인정하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 남의 말을 좀처럼 받아 드리지 못하는 사람이며 부처님이나 공자님이 나타나 가르침을 전해주더라도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하므로 가장 제도하기 어려운 부류의 사람인 것이다(인연이 없는 자).

 이 아상은 죽은 후에도 버려지지 않고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러서도 가장 떨치기 어려운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원효스님께서는 아상이 강한 것이 장점일수도 있다 하셨는데 이는 올바른 견해라기보다는 차선책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즉 무아를 인식하지 못하거든 아상이라도 확실히 붙들고 가라고 하신 뜻을 잘 헤아려야 할 것이다.

 아상을 버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말씀하신 것이다.

 도를 닦는 길에서는 아(我)를 초극해야 성(性)이 밝혀지는데 나를 포기하고 놔야 비워야 들어오는데 아를 포기해야 성취되는데 아상이 강한자의 경우 이것을 알아도 그것을 놓지 못하는 것이 큰 병인 것이다. 즉 아상이 강한자의 경우 우주가 사라져도 내 자아를 놓고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알아도 안 되는 것이기에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상이 강한 자는 세속의 생에서는 이러한 집착으로 인해 오히려 성공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고, 내 것이라고 여기는 이 몸은 지수화풍 네 가지 물질이 인연(因緣)따라 만들어 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상(人相)이란 남이라는 고집, 나와 남이 갈라져 있는 마음에서 나오는 행동과 생각으로 사람과 짐승, 성인과 범부를 차별하는 것으로 배타의식이나 차별 의식을 말한다. 즉 모든 사물에 대하여 생각할 때 항상 객관은 의식하고서 생각하며 객관에 집착하여 행동한다. 또한 육체적 존재로서의 자아 인식으로 육체 어디엔가 고귀한 존재로서의 영혼이 있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자 및 의사들이 100년 동안 인간의 뇌와 육체를 관찰 연구했지만 그 어디에도 영혼을 찾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로 인해 2000년 기독교 신앙이 무너지고 막시즘이 출현하게 되었던 것이다.

 중생상(衆生相)이란 중생의 본능적 고집, 즉 재미있고 호감(好感)가는 것만을 본능적으로 취하는 모습을 말하며 중생, 모든 생명체들은 즐겁고 좋은 일인 듯하면 자기가 취하려 하고 귀찮고 힘든 일이면 남에게 미루려는 생각을 가진다. 즉 주관과 객관뿐만 아니라 그 외적인 것도 전부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살아있는 순간순간을 소중히 하고 인생을 즐기려는 경향이 있으며 생에 뭔가를 이루려고 하고 작은 것에서도 영원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며 이기적인 경향이 있다. 즉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으로 살아있는 순간순간에 집착하며 성욕이 강하며 즐기기 위해 모든 것을 다하려 하고, 시간을 아까워하며 생존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경향이 있다.

 상술과 현실감각이 뛰어나며 언변과 자기합리화가 강한 경향이 있다.

 아상은 자아가 영원하다는 경향에 비해 중생상이 강한사람은 순간순간에 집착하며 생존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경향이 있다.

 수자상(壽者相)은 생명에 대한 고집, 즉 영원한 수명을 누려야지 하는 모습을 말하는데 모든 사람들은 자기는 늙지 않으리라는 생각, 죽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갖는다. 모든 객관의 사물들이 그 영원한 수명과 함께 하리라는 착각 속에 산다. 즉 우리가 부를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부가 영원히 나와 같이 한다고 생각하며,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그 지식이 나와 영원하다고 생각하며, 존재하고 소유하고 있는 것이 영원하며 언제나 자기와 같이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생애의 목숨(命)에 집착하는 것이며 목숨이 다하면 이생이 끝이라는 인식으로 건강과 수명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이다.

 건강에 좋은 건 다 먹으려 하고 불사신(不死身)이 되려고 하며 신선 등 장생술에 관심이 많은 경향이 있다.

 우리가 한 세상만 살면 그만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죄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육칠십 년 살면 그만인 존재가 아니다.

 이 육신은 한동안 쓰다가 던져 놓고 가야 되는 도구에 지나지 않지만 우리는 내생을 또 살아야 하는 존재이다. 이와 같이 사상은 모든 중생들이 실체가 아닌 것을 실체로 잘못 보는 것을 통틀어 말하는 것이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이렇게 네 가지로 이야기하지만 이 네 가지는 서로 떨어져 있는 게 아니다. 서로 얼키고 설켜서 각양각색의 마음을 잉태(孕胎)하고 팔만사천가지 번뇌를 연출한다.

 부처님은 사상을 부정함으로써 껍데기를 영원불멸한 실체로 보려는 우리의 잘못된 생각을 배척하신 것이다.

 이 네 가지를 완전히 떨쳐 버려야 실상을 바로 볼 수 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일체가 껍데기임을 바로 알게 되면 무량중생을 모두 무여열반에 들게 했더라도 내가 했다는 전도된 생각을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을 밑바탕으로 언행으로 나타나는데 탐 진 치(집착과 욕구, 분노, 화, 어리석음)에 의해 윤회가 있는 것이다.

 아울러 인류 문명의 발전 원인도 이 사상에 의해 이뤄진 것이다.

(자손에게서 자기분신의 모습을 보고 자기가 영원하지 못함을 자기 분신을 통해 추구해 가려는 심리적 현상은 바로 인상에 의함이다)

 또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은 부처님 당시 모든 종교가 실체라고 잘못 본 것의 구체적 명칭이기도 하다.

 아상은 브라만교에서 우리 내면에 있는 아트만을 불멸의 실체로 보는 것을 말한다.

 인상은 부파 불교에서 윤회하는 실체적 존재가 있다고 주장한 것이며 중생상은 정신을 자기로 보고 영원하다고 잘못 본 것이다.

 수자상은 숙명론자 유물론자들이 우리 몸은 물질적 정신적 요소로 이루어졌으며 그 요소들을 불변의 결합체로 본 것이다.

 운명은 결정되어 있어서 변할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우주관이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4상

 보통 아상을 나, 인상을 남, 중생상은 부처와 중생이란 분별, 수자상은 목숨에 관련된 이야기로 이해하는데 금강경 본래의 뜻은 아니다.

 아상은 아트만, 인상은 뿌드갈라(개아, 보특가라), 중생상은 사트바, 수자상은 지와가 원어인데 모두가 인도철학에서 영원불변하는 당체로 설하고 있는 개념들이다. 이중에서 인상은 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개아(個我, 보특가라)를 말하고 수자상은 목숨수명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지와(영혼)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인도철학에서 영원불멸의 당체로 이렇게 저렇게 여러 개념으로 설하고 있는데 그러한 것들이 전부 허망한 것들이란 말을 하기 위해 열거한 것이다. 그러므로 4상을 따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영원불멸의 당체 즉 아상이란 말의 유사어들이라고 보면 될듯하다. 그래서 이러한 4상이란 것이 전부 아상의 다른 말들이므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須菩提 若菩薩 通達無我法者 如來說名眞是菩薩(수보리 약보살 통달무아법자 여래설명진시보살) 즉 무아를 바르게 알면 아상이 깨지고 이런 자를 보살이라 한다는 것이다.

 법상(法相)과 비법상(非法相)이 있다.

 비법상(非法相)이란 이를테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같은 상들을 말한다. 이러한 것들은 버려야 할 상들로서 비법상이라 한다.

 탐욕, 성냄, 어리석음, 질투, 분노, 적의 잔인, 게으름, 후회, 들뜸, 의심, 14무기 같은 알음알이, 사량 분별, 인과가 없다는 생각, 삼세가 없다는 생각, 깨달음, 아라한, 성불이 없다는 생각, 업이 없다는 생각, 삼보를 능멸하는 생각 같은 것들이 비법상으로서 탐, 진, 치라는 3개의 뿌리를 기반으로 하여 일어나는 여러 가지 불선법들, 악업들, 삿된 견해 등으로 이러한 것들은 버려야할 것으로 비법상이다.

 법상(法相)이란 이를테면 금강경에서 강조하고 있는 보살, 불 국토, 일체중생을 무여열반에 들게 하겠다는 생각, 보시바라밀, 인욕바라밀 등 6바라밀과, 삼천대천세계라는 상, 깨달음, 성불,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같은 것들을 법상이라고 한다.

 부처님의 원음인 아함경과 니까야에 근거하여 말한다면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보리분법인 사념처, 사정근, 사여의족, 오근, 오력, 칠각지, 사선, 사무량심, 사무색정, 수다원과 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라한과 해탈열반 같은 것들을 법상이라고 한다. 이러한 것들은 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닦되 집착하지 않고 닦아야 할 것으로 법상이라고 한다.

 그래서 금강경에선 이일체제상 즉명제불(離一切諸相 卽名諸佛) 아상, 중생상 같은 비법상은 버리고, 육바라밀, 아라한, 보살, 성불이란 법상은 집착하지 말고 닦아 성취하란 말이다.

 여래설일체법 개시불법(如來說一切法 皆是佛法), 이 말은 비법은 버림으로써 법은 집착하지 않고 닦아 성취함으로써 모두 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법상과 비법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알아야 한다.

 어일체법 응여시지 여시견 여시신해 불생법상(於一切法 應如是知 如是見 如是信解 不生法相) 일체법에 대하여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고 이렇게 통찰하여 법상을 내지 말라. 즉 아상 인상 중생상같은 비법상들에 대하여서는 무상 고 무아를 바르게 알고 바르게 보고 바르게 통찰하여 무아라는 것을 통찰지로 통달하고(通達無我法者) 잘못된 비법상을 떠나라(離一切諸相)라는 것이다. 사성제, 팔정도, 육바라밀, 아라한, 보살, 성불에 대해서는 바르게 알고 바르게 보고 바르게 통찰하여 바르게 닦아서 집착하지 말고 머무르지 말고 성취하고 증득하란 말이다.

 수행에 도움이 된다하고 선업에 도움이 된다하고 해탈열반에 도움이 된다하여 조그만 성취에 만족하여 주저앉지 말고 깨달음, 해탈, 열반, 중생구제라는 불자의 서원을 힘써 행하란 말이다.

 아함경과 니까야의 관점에서 보면 비법이란 고성제와 집성제로 고성제는 오취온고 집성제는 갈애인데 이러한 오취온고와 갈애는 위파사나 통찰지로 알고보고 꿰뚫고 버려져야 한다.

 법이란 멸성제와 도성제로 도성제는 8정도이고, 또는 사념처. 7각지를 포함한 37조도품이고, 여러 가지 명상법들이고, 보시. 지계. 생천 등의 가르침들이고,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이고,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함이고, 멸성제는 무명의 소멸. 갈애의 소멸. 깨달음. 해탈열반. 아라한. 성불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법들은 머무르지 말고 완전한 성취를 향해 집착함 없이 향상전진 정진하여 성취해야 할 것들이다.

 상은 여러 가지인데 아상같은 것은 비법상으로서 해탈열반에 도움이 되지 않고 삿된 것들로서 버려야 한다. 반면 자비관, 염불, 염법, 염승 생천, 보시, 지계, 부정관 같은 것들은 수행에 도움이 되는 상으로서 닦아야 할 것들이다.

 금강경은 이렇게 상들을 여의라고 하는 경인데도 불구하고 대승경전이기 때문에 부처님 원음에 대한 왜곡된 상들이 잔존한다.

 부처님 원음(原音)이 소승경전이라는 상은 비법상으로 버려져야 한다.
 아라한(阿羅漢)이 소승이라는 상도 비법상으로서 버려져야 한다.
 육바라밀이 팔정도보다 낫다는 상도 비법상으로 버려져야 한다.

 아상(我相)은 나라는 생각으로 하나는 아집(我執)이고 또 하나는 영생(永生)의 두 가지로 해석 할 수 있다.

 수자상(壽者相)은 오래 산다는 생각으로 하나는 아미타불의 뜻이 있고 또 하나는 몸과 마음을 오래 살리려고 한다는 생각이다.

 아상(我想)은 나라는 실체가 있다는 생각에서 나와 남을 구분하는 생각이고 수자상은 영혼이라는 것이 있어 이 영혼은 소멸하지 않고 다음 생으로 계속 이어져 영원히 사는 주체라고 아는 생각이며 중생상은 육도에 존재하는 생명들을 그룹별로 구분하는 생각이다.

 법(法)이란 인과법을 말하는 것이니 이는 주관적으로도 인지가 가능하고 객관적으로도 인지가 가능한 이치를 법상이라 하며 비법상(非法相)은 법상과 상대되는 개념으로 법상은 이것이 바른 법이라는 생각이고 비법상은 이것은 바른 법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이런 상들에 대한 집착이 불교에서 말하는 상(相, 想)이다.

 이런 자신의 생각이나 견해에 따라 다른 사람들의 의견과 충돌하여 항상 내 생각만을 주장하여 옳고 그르고 시비분별이 일어나는 것이 세간의 삶이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은 자기의 견해일 뿐 바른 생각인 정견과 정사유가 아니다. 

 그냥 자신이 살면서 받아들인 정보에 의해 일어나는 자신의 고정관념이라고 안다면 다른 사람의 고정관념도 그의 생각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생각이 맞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각자의 생각은 그 사람에게만 맞는 것이지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누구의 견해가 맞는 것이라고 결론이 나지 않는다. 아무리 근사한 생각이라도 그것을 고집하면 그것은 그 생각에 대한 집착, 즉 상(相, 想)을 낸 것이다. 이런 상도 아지랑이처럼 조건에 의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일 뿐 붙잡을 수 있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불교 수행에서는 모든 상(관념, 相, 想)을 척파하고 그 안에 실재하는 법을 통찰하는 것이 불교 수행의 과제이다.

 실재하는 법(法, 담마, 다르마)이란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識)과 마음의 작용(受想行)과 물질(色)이 가진 reality이다.

 이들은 매순간 조건에 의해 찰나 생멸하기 때문에 이들을 있는 그대로 지켜볼 뿐, 그들 중 어느 것도 내 것이라고 붙잡을 수 없다.

 그러므로 법이란 관념이나 상이 아닌 실재(實在)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실재는 찰나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붙잡을 수 없다.

 금강경에서 4상은 그것이 이름(관념, 相, 想, concept)일 뿐 실재가 아니라는 말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실재가 아닌 상, 이름에 속지 말 것을 강조한다.

 그냥 이름(상, 자신의 생각, 관념, concept)인 것을 그 이름을 실재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데서부터 모든 번뇌, 탐진치(貪瞋癡), 괴로움이 일어난다. 그냥 그것은 이름일 뿐이라고 보는 눈이 생기면 그리고 마음, 마음의 작용, 물질(五蘊)의 생멸하는 실재(reality)를 보는 힘이 생기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바로 금강경을 통달하여 무아를 알고 법을 보는 것이다.

육조스님 : 중생(衆生)과 불성(佛性)이 본래 다름이 없건만 사상(四相)이 있으므로 인하여 무여열반에 들어가지 못하니, 사상(四相)이 있으면 곧 중생이요 사상이 없으면 곧 부처이니라. 미(迷)하면 불(佛)이 곧 중생이 되고 깨달으면 중생이 곧 불(佛)이로다.

 아상(我相) : 미(迷)한 사람이 재보와 학문과 족성(族姓, 가문)이 있음에 의하여 모든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것(마음에 능소(能所)가 있어서 중생을 가볍게 여기는 것)

 인상(人相) : 나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행할 줄 안다 하고 남을 공경하지 않음.(자기가 계(戒) 가짐을 믿고 파계자를 업신여기는 것)

 중생상(衆生相) : 좋은 일은 자기에게 돌리고 나쁜 일은 남에게 돌림, 삼악도의 고통을 싫어하여 천상(天上)에 나기를 원하는 것

 수자상(壽者相) : 어떤 경계에 대하여 취사분별함, 마음에 오래 삶을 좋아해서 부지런히 복업을 닦아 모든 집착을 잊지 못하는 것

무비스님 : 상(相)이라는 것은 우리들의 소견이나 인식, 또는 번뇌가 생각 상(相)의 상태를 지나 어떠한 고정된 형상처럼 너무나 견고하게 우리 내부에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말한다.

 아상(我相) : 나라고 하는 것, 나라고 하는 집착에서 벌어지는 모든 행위와 사건을 말함. 그 나름의 자만 의식이라고 하겠다.

근본은 있는 것이 아닌데 마음속에 생긴 병인 것이다.

 인상(人相) : 나 이외의 남이다 하는 차별에서 생기는 배타의식이나 차별의식을 말함.

 내 것만 좋고 내 소견만 옳다 하며 남의 의견, 남의 종교 다 물리친다.

 중생상(衆生相) : 우리는 못난 존재라는 열등의식에 사로잡힌 것을 말한다. 즉 부처님의 가르침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들이 다 부처이니 우리들 내부에 있는 불성을 찾아서 적극적으로 활용하라는 것이다.

 수자상(壽者相) : 나이에 대해 편협(偏狹)된 집착을 말한다. 즉 나는 지금 몇 살이다. 젊었다. 늙었다. 우리는 나이를 먹어가는 존재이다. 하는 한계의식을 말하는 것이다.

 아상(我相)의 번뇌(煩惱)를 통해 인상이 나오고 또한 중생상, 수자상이 차례로 나오며 사실 아상은 매우 미세한 번뇌로서 끊임없이 노력을 해도 완전히 떨쳐버리기가 참으로 어렵다.

 어느 순간에는 떨쳐버린 줄 알았다가도 어느새 또 나에 대한 집착, 상대에 대한 고정관념이 자리잡게 된다. 그러나 중생상, 수자상으로 갈수록 거친 번뇌라 비교적 상에서 벗어나기가 쉽다. 그래서 평소에 불자라면 적어도 중생상, 수자상은 떼어놓고 적극적으로 살아가길 권한다.

 자기 스스로 중생이라고 생각하면 중생 행동밖에 못하는 것이고 부처라고 생각하면 저절로 부처 행동이 나오는 것이다.

 그것처럼 불교를 통해서 우리의 참 생명을 바르게 이해하면 본래로 없는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을 낼래야 낼 수가 없고 번뇌도 저절로 쉬어질 것이다.

 그리하여 원력(願力)과 생명력(生命力)이 넘치는 반야의 삶을 펼쳐 보이는 보살의 인생, 부처의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금강경(金剛經)> [출처]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작성자 천석

금강경에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4상 四相)이 있습니다.

1. 아상이란 '나'라는 생각을 말합니다. 

사실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이름, 나의 육신, 나의 학력, 나의 직장, 나의 사회적 위치, 나의 능력 등등 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불교관점에서 볼때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모두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죽게되면 모두 리셋되어 버리고 육신도 결국 화장하거나 땅에 묻히고 영혼만 윤회하게 됩니다. 영혼은 진정한 나일까요? 영혼역시 윤회하다 여러 형태로 변화하여 생멸을 반복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에 이르셔서 보시니 우주안의 모든 사물은 성주괴공(생겨나서 머물다 부서져서 원래대로 돌아감)하고, 생각은 생주이멸(생겨났다 머물고 변화하다 없어져버림)한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우주안에 있는 모든 것은 결국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불교 3법인 중 하나인 제법무아입니다. 그런데 아상은 그런 내가 실제 존재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즉, 아상이 있다는 것은 내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있다고 생각한 순간 상대방이 생겨나고 그로부터 모든 만물이 생겨나 이 현상계가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따라서 아상을 버리게 되면 해탈을 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반대로 아상이 있으면 해탈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의 다른 '상'들은 모두 이 아상으로 인해 비롯됩니다.

2. 인상이란 자신이 인간이란 우월감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축생에 비해 우월하지만 천상의 여러 신에 비하면 미물에 불과합니다. 불경에 보면 부처님께 법문을 듣기 위해 여러 신들이 세력을 거느리고 내려오는데 거의 군대 수준의 인원을 거느리고 옵니다. 그 영혼의 키만 해도 유순이란 단위를 사용하는데 유순이란 단위는 따로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미천한 인간은 자신이 만물의 영장이고 대단한 존재로 착각하여 교만한 경우가 많습니다. 바로 내가 인간이라는 그 교만, 결국 교만 때문에 인상을 가지고 있으면 해탈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3. 중생상은 나는 중생이니까 부처님과 같이 해탈할 수없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같은 따위의 중생이 어찌 부처님과 같이 위대하고 거룩한 존재가 될 수 있겠는가 하면서 부처님 법에 대한 관심을 끊어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대로 올바로만 따라가면 반드시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부처님 스스로 경전에서 보증하고 계십니다. 저런 중생상을 가지고 있는 중생은 해탈을 할 수 없습니다.

4. 수자상은 오래 살려고 하는 욕심 입니다. 

수자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 세상에 대한 애착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인연에 따라 일시적으로 생겨났다 사라지는 헛깨비에 불과하다고 하셨으나 사람들은 인식 수준이 낮으므로 인간의 일생을 생각해 볼 때 지금의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애착하고 집착하여 더 오래 살려고만 합니다. 이 세상이 공하다고 보는 경지에 가야 불교 공부를 하는데 아직도 세상이 실체가 있다고 착각하고 애착하므로 수자상이 있으면 해탈을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상의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은 중생이 앓는 병으로 금강경에서는 이를 떠나야 보살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 사상 [ 四相 ]

나다(我相), 남이다(人相), 중생이다(衆生相), 장수한다(壽者相)의 네가지 관념(觀念)을 뜻한다. 불교수행의 목표는 이 네가지 관념을 없애는데 있다. 이 네가지 생각이 인간에게 붙어 있는한 해탈(解脫)은 성취할 수 없기 때문이며, 견성성불(見性成佛){자기(自己) 본래(本來)의 천성(天性)을 깨달아 불도(佛道)의 성과(成果)를 거둠}은 요원한 일이 되기 때문이다. 이 네가지 생각이 많으면 많을 수록 중생으로서의 업보(業報)를 더하는 근본이 되므로 이 사상(四相)이 무너지면 상대세계를 초월하여 절대의 경계 즉 함이 없는 무위도(無爲道)를 성취하게 된다. 

1. 아상(我相) 우리 중생은 몸둥이를 나 라고 생각하고 있으나 이 육체는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다. 그리고 육체를 구성하고 있는 근육. 신경. 골격등은 따지고 보면 물질에 불과하다. 물질은 죽은 것이며 생명이 아니다. 따라서 죽은 물질이 나 일 수는 없다. 또 사람들은 우리의 정신을 가지고 나라고만 한다. 그러나 이 정신작용도 시시각각으로 변하여 어느 한 생각이고 나라고 붙들어 내세울 만한것이 없다. 즉 어떤마음이 생겼다가(生) 그 생각이 얼마동안 있다가(住), 차차 변하다가(異), 마지막에는 생각이 없어진다(滅). 이것을 생주이멸(生住異滅)이라고 한다. 이렇게 육체나 정신 그 어디서도 나를 찾을 수 없고 실제 나란 없는 것이다. 이 없는 나를 있는 것으로 집착(執着)하게 되면 온갖 죄업(罪業)이 두터워져 삼악도(三惡道){(지옥도(地獄道)와 축생도(畜生道)와 아귀도(餓鬼道)의 세계}에 빠지게 된다. 

2. 인상(人相) 인상이란 아상에 대한 상대적 생각이다. 내가 있으면 반드시 남은 따라오게 마련인 때문이다. 이것은 연기설에서 비롯된다. 

3. 중생상(衆生相) 중생상이란 생활에 대한 애착이다. 남보다 잘 살고 잘 입겠다는 생각, 남이 하니 나도 해야 한다는 생각, 좋은 일은 자기에게 돌리고 나쁜 일은 남에게 돌리는 것을 말한다. 즉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생활이다. 

4. 수자상(壽者相) 수자상이란 이 몸뚱이로 좀더 오래 살려는 생각, 일정한 기간의 생명이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 곧 생사를 초월하지 못한 생사관(生死觀)을 말한다. (문화원형 용어사전)

12연기와 『금강경』의 사상

일행스님  
[질문]

지난번 『쌍윳따니까야』 경전 공부 중에 아상我相은 ‘주관적 자아’, 인상人相은 ‘객관적 자아’라고 설명하시는 것을 잠깐 들었습니다. 그래서 『금강경』 사상四相의 아상, 인상 역시 그렇게 보고 이해를 하고 있는데, 중생상衆生相은 잘 모르겠습니다. 무엇을 중생상이라고 하는지요? 그리고 수자상壽者相도 부탁드립니다.

[답변]

일전에 아상我相은 ‘주관적으로 느끼는 나’이고, 인상人相은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나’라고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경전 『쌍윳따니까야』에는 이런 표현이 곧잘 등장합니다.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自我이다.

여기서 ‘나’는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드러난 나의 모습, 즉 인상人相을 말합니다. 현재 내가 나를 인식하고 있는 모습은 사람의 형태입니다. ‘나의 자아’는 내 깊은 의식 속에 스며 있는, 주관적으로 형성되어 있으면서 현재 알지 못하고 있는 ‘자아의식’, 즉 아상我相을 말합니다.

나의 존재방식은

왜 ‘나’를 이렇게 ‘객관적인 나’와 ‘주관적인 나’로 구분지어 언급하는 걸까요?

우리의 존재방식은 명색名色입니다. 즉 의식[마음/명名]과 육체[물질/색色]가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현재 인식하고 있는 ‘나라는 존재’는 명색 전체로서 지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상人相입니다. 이 인상이 나의 깊은 의식 속에 내가 알고 있는 ‘나’라는 정보로 심어지고[형성되고] 있고, 이렇게 심어진 정보는 현재 내가 일으키는 마음작용을 물들이는[형성하는] 정보(업력業力)로 작용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인상은 깊은 의식에 심어지면서 훗날 미래의 나를 복원시키려는 아상으로서의 잠재된 끌림으로 작용합니다.

12연기의 2번째 ‘행行’은 ‘형성形成’으로 번역하는데, 3번째 ‘식識’을 물들이는 잠재적 충동력인 셈입니다. 이 형성으로 말미암아 물든 식識이 있게 되고, 이 식의 물듦이 인연의 끌림으로 작용하여 태胎에 들게 되고, 그렇게 하여 이 세상에 육체와 정신이 결합된 ‘명색名色’의 존재방식으로 태어나게 됩니다. 

사람이기에 인상人相이라고 이름 붙였지만, 각각의 생명체가 스스로를 지각하는 지능이 있다면 자신의 현재 모습대로 자신을 지각하게 되겠죠. 그래서 인상은 객관적 자아라고 하는 것입니다.

12연기법과 사상

12연기緣起에 대한 언급이 나왔으니, 『금강경』의 사상四相을 계속해서 12연기법에 견주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12연기는 첫 언급의 시작을 ‘무명無明’으로 하고 있습니다. 변화의 흐름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착각과 오류가 일어나는 것은 ‘알지 못함’에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윤회輪廻라는 변화의 흐름 속에 있습니다. 그 흐름 속에서의 모든 존재의 생성과 소멸은 단지 그 흐름의 한 단면이고 한 현상일 뿐입니다. 그래서 모든 현상, 즉 성成·주住·괴壞·공空, 생生·노老·병病·사死, 생生·주住·이異·멸滅 등 그 어떤 것도 흐름에서의 변화의 모습들이기에 모두 자연스러운 것이며 잘못된 현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사실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입맛대로 왜곡해서 보는 그릇된 견해가 있어서 결국 마음에 괴로움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릇된 견해는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 것일까요?

12연기에서 첫 번째 ‘알지 못하는 상태’, 무명無明 상태임을 전제前提로 하면서 두 번째로 언급하는 것이 업業입니다. 업은 ‘행위’에 대한 ‘정보情報’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업은 두 가지 측면에서 구분해서 언급합니다. ‘심어지는 업’과 ‘제공되는 업’입니다. 심어지는 업은 ‘정신의식에 의해서 깊은 의식으로 가는 업’이고, 제공되는 업은 ‘깊은 의식에서 정신의식으로 가는 업’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업業은 어디에서 일어나는 것일까요?

지금 나의 의식[마음]에서 일어납니다. 정신의식은 ‘인식’과 ‘반응’을 합니다. 이 인식과 반응은 식識이 일으키는 움직임, 즉 행위입니다. 그 행위를 세 가지로 구분하여 정리합니다. 정신적 행위, 언어적 행위, 신체적 행위가 그것입니다. 이를 삼업三業이라고 합니다. 행위는 사라져도 행위에 대한 기억은 남게 됩니다. 행위는 정신의식이 일으키고, 그 기억은 깊은 의식에 저장됩니다. 이 저장되는 업業을 ‘심어지는 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정신의식에 의해서 일어난 행위, 즉 업[삼업]이 있고, 그 업이 깊은 의식에 저장되는 것입니다. 이 저장된 업은 언젠가 다시 정신의식에 제공되어 인식과 반응이라는 식識의 활동을 제약하고 구속하는 요인要因으로 작용합니다. 이를 업력業力이라고 하며, 12연기의 두 번째 ‘행行’으로 언급되어집니다. 

이 2번째로 언급되는 행行으로 말미암아 ‘나’라고 여기는 자아의식이 출현하게 되는데, 이를 아상我相이라고 하며, 인상人相이 가미加味된 자아의식[12연기의 3번째 ‘식識’]입니다. 인간으로 살면서 심어진 자아에 대한 정보[심어진 인상人相]는 사람이라는 정보가 많이 들어 있겠지요. 이렇게 인상人相이 가미된 아상我相에는 자신의 옛 모습을 복원시키려는 끌림이 있게 되고, 이 끌림은 자연스럽게 익숙하다고 느껴지는 태胎와 인연되게 합니다. 그래서 육체와 결합된 존재방식으로 생겨나게 되는데, 이를 불교적 표현으로는 ‘명색名色’[12연기의 4번째]이라고 합니다. 성장하여 인식을 할 즈음부터 현재의 나의 모습을 ‘나’라고 알게 되는데, 이를 인상人相이라고 합니다. 의식 속에 심어지는 나에 대한 정보가 되는 셈입니다.

이렇게 생겨난 물질적인 몸에는 대상의 정보를 받아들이는 감각기관이 있습니다. 이를 육근六根이라고 합니다.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가 그것입니다. 이 감각기관에 의해 내 안에 들어온 대상의 정보가 있습니다.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이라는 육경六境입니다. 이 육근에 의한 육경이 나의 정신의식에 들어온 대상에 대한 정보인데, 이를 ‘육입六入’[12연기의 5번째]이라고 합니다.

이 육입에 의한 정보에 정신의식이 주의를 기울이면 비로소 접촉이 일어나고[12연기의 6번째 ‘촉觸’], 이로 인하여 느낌[12연기의 7번째 ‘수受’]이라는 의식작용이 비로소 일어나게 됩니다. 이 느낌에 영향받아서 ‘개념적인 지각’이 일어나게 되는데, 소위 입맛에 따른 왜곡된 인식입니다. 그 인식에는 자아를 충족시키려는 욕망[12연기의 8번째 ‘애愛’]이 있습니다. 그 욕망으로 인해 대상에 대한 나의 반응은 집착[12연기의 9번째 ‘취取’]으로 전개되어집니다.

여기서 질문을 볼까요. 중생상衆生相을 물으셨죠?

현재 나의 마음 작용에는 욕망과 집착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내 마음은 들뜨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합니다. 이를 괴로움이 있는 상태라고 하는 것이죠. 이렇듯 현재의 나의 마음은 애愛·취取가 들끓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렇게 경계에 따라서 마음이 동요動搖하고 있는 모습을 ‘중생상衆生相’이라고 하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자기 충족을 위한 자기 본위로 세상을 살면서 내 의식에는 ‘나라는 자아의식’이 점점 자라게 되고, 내가 지각하고 있는 나 자신을 계속해서 유지·보존하려는 근본 욕망 또한 강성해지게 됩니다. 이를 사상四相 중의 마지막 ‘수자상壽者相’이라고 하며, 12연기의 10번째 ‘유有’를 수호守護하려는 욕망입니다. 이 유有는 ‘존재한다는 자아의식’으로 지금 내 안에서 일어나는 애愛·취取라는 중생심衆生心에 의해 덧씌워지고(업데이트되고/형성되고), 이렇게 덧씌워져 심어진 변화된 자아의식은 앞으로 대상을 접촉함으로써 일어나는 마음을 왜곡하는 형성의 업력業力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이렇게 무명으로 시작하여 물든 인식이 일어나는 존재의 상태를 해결하지 못하면, (『금강경』의 사상四相에 빗대어 말하자면) 아상我相·인상人相·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을 해결하지 못하면, 윤회輪廻의 흐름 속에서 여전한 끄달림에 의한 ‘생生’[12연기의 11번째]이 있게 되고, 이 태어남으로 인해 갖가지 괴로움의 증상인 ‘노老·사死·우憂·비悲·고苦·뇌惱’[12연기의 12번째] 또한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질문은 간단한데, 언급하다 보니 말이 길어지고, 내용 또한 다소 난해難解해졌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성철스님께서는 “『금강경』의 사상四相을 ‘주관’, ‘객관’, ‘공간’, ‘시간’으로 풀이하셨다.”라고 하십니다. 이는 스님의 맏상좌인 천제스님께서 알려주신 내용입니다. 이를 빗대어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상我相은 깊은 의식에 심어져 있는, 근원적인 자아의식으로 ‘주관적인 나’입니다. 이것이 제공되는[형성] 업 속에 깃들어 있어 의식을 물들입니다. 

- 3번째 ‘식識’, 에고의 출현

•인상人相은 명색名色이라는 존재방식으로 있는 동안 자신을 지각하는, 현상적인 자아의식으로 ‘객관적인 나’입니다. 

- 4번째 ‘명색名色으로 느끼는 나’

•중생상衆生相은 현재 나의 내면이라는 공간[영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자아를 기반基盤한 중생의 모습(마음작용)입니다. 

- 8번째 ‘애愛’·9번째 ‘취取’의 발현

•수자상壽者相은 자아를 영속永續시키려는 시간적인 측면에서의 욕망의 모습입니다. 

- 10번째 ‘유(有)’의 수호守護

평소 『금강경』의 사상四相을 12연기緣起와 연결하여 사유思惟하곤 하였는데, 질문 덕분에 글로써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공부 수행하는 데 좋은 참고가 되었으면 합니다. 

[금강경 모든 관념을 깨뜨려라] 구마라집의 상(相), 현장의 상(相, 想)

 김남수 승인
신장 위구르 키질 석굴 앞에 조성된 구마라집 스님 조각. 
구마라집과 현장의 번역 차이

중국 역경사에서 흔히 구마라집의 번역을 구역(舊譯)이라 하고, 현장의 번역을 신역(新譯)이라 말한다. 구마라집의 번역이 200년 이상 앞서기 때문이고, 또 번역에서도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금강경』 번역 역시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인다. 우리가 독송하는 『금강경』 번역은 구마라집 번역본이다. 구마라집이 번역하고 양나라 소명태자(昭明太子)가 32분(分)으로 나눠 편집한 『금강경』이다. 연구자들은 구마라집본에 과감한 생략과 의역이 있다고 보고 있다.

구마라집 번역본의 또 하나의 특징은 범어본(梵語本)의 ‘상즈냐(saṃjnā, 빨리어로 산냐)’와 ‘락샤나(lakṣaṇa)’ 및 ‘니밋따(nimitta)’를 모두 상(相)으로 번역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현장은 상즈냐를 상(想)이라 번역하고, 락샤나와 니밋따는 상(相)이라는 단어로 번역한다. 상즈냐는 생각·관념으로, 락샤나는 모양, 니밋따는 표식·영상 등으로 해석된다. 구마라집은 이 셋 모두를 상(相)으로 본 것이다.

구마라집은 『금강경』에 나오는 아상(我相, ātmasaṃjñā), 인상(人相, pudgalasaṃjñā), 중생상(衆生相, sattvasaṃjñā), 수자상(壽者相, jīvasaṃjnā)에 붙는 상즈냐를 ‘상(相)’으로 번역하는 반면, 현장은 아상(我想), 유정상(有情想), 명자상(命者想), 보특가라상(補特伽羅想), 사부상(士夫想, puruṣasaṃjñā), 의생상(意生想, manomayasaṃjñā), 마납파상(摩納婆想, māṇavasaṃjñā), 작자상(作者想, kartṛsaṃjñā), 수자상(受者想, bhoktṛsaṃjñā)에서 보이듯 ‘상(想)’으로 번역한다. 범본(에드워드 콘즈본)에서는 사상이 ‘아상-중생상-수자상-인상’의 순서지만, 구마라집 역본에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순서대로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으로 되어 있다. 또한 구마라집은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4개의 사상(四相)이지만, 현장은 사부상·의생상·마납파상·작자상·수자상 5가지를 추가한 9상(九相)으로 가짓수에서도 차이가 난다.

중국 서안 자은사에 조성된 현장 스님 조각.

부처님의 상호 32가지를 나타내는 단어인 락샤나(lakṣaṇa)를 구마라집과 현장 모두 ‘상(相)’으로 번역했다. 32상은 ‘발바닥이 평발이다’, ‘발바닥에 바퀴 문양이 있다’, ‘손눈썹이 길다’, ‘손가락이 길다’ 등 부처님의 외형적 32가지 특징을 말한다. 

니밋따(nimitta)는 각기 다른 의미로 번역하기도 했다. 구마라집은 ‘상(相)’으로 번역하고, 현장은 니밋따(nimitta) 뒤에 붙는 상즈냐(saṃjnā)라는 의미를 살려 ‘상상(相想)’으로 번역했다. 구마라집은 “수보리야, 보살은 상(相)에도 머물지 않고 보시해야 한다(須菩提 菩薩 應如是報施 不住於相)”로, 같은 문장을 현장은 “선현이여, 보살마하살은 상상(相想)에 머물지 않고 보시해야 한다(善現 如是菩薩摩訶薩如不住相想行報施)”로 번역한다.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

구마라집과 현장은 모두 락샤나(lakṣaṇa)를 상(相)으로 번역했지만, 문맥의 의미는 또 다르다. 

<구마라집 번역>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현장 번역>

乃至諸相具足 皆是虛妄 乃至非相具足 皆非虛妄 如是以相非相 應觀如來
(내지제상구족 개시허망 내지비상구족 개비허망 여시이상비상 응관여래)

많은 분이 독송하는 구마라집 번역본을 우리말로 풀이하면, ‘무릇 상(相)이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니, 만약 모든 상(相)을 상 아님(非相)으로 본다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 정도로 해석한다. 

그런데 현장의 번역을 우리말로 해석하면 의미가 조금 다르게 읽힌다. 풀이하면, ‘모든 상(相)이 갖춰져 있어도 모두 허망하며, 상이 갖추어져 있지 않아도 모두 허망하다. 이같이 상과 상 아님으로 여래를 보아야 한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상을 상이 아닌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해석과 ‘상과 상 아님을 모두 보아야 한다’는 뜻으로 

둘 사이에 미묘한 차이가 있다. 한편으로, 구마라집 번역본을 ‘만약 모든 상과 상 아님을 볼 수 있다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산스끄리뜨 금강경 해설서
금강경 역해
각묵 역해 | 불광출판사 | 2001년 | 474쪽 | 28,000원

대중들이 한문으로만 읽던 『금강경』을 산스끄리뜨어 해석으로 읽게 해준 최초의 책이다. 산스끄리뜨 원문, 구마라집 번역, 현장 번역을 비교했으며, 단어와 문장의 의미를 하나하나 해설했다. 불교의 중요한 개념들을 상세히 해설했으며, 『금강경』 이해에 새로운 해석을 시도했다.

산스끄리뜨 금강경 역해
현진 옮김 | 불광출판사 | 2023년 | 504쪽 | 30,000원

산스끄리뜨 원본 『금강경』과 한문본을 철저히 비교한 완역본이다. 역자 현진 스님은 인도에서 8년간 산스끄리뜨와 빨리어를 수학하고, 귀국 후에는 연구 모임을 이끌며 2,500년 전 부처님 가르침의 원음을 전하는 데 주력해 왔다. 이 책은 산스끄리뜨본을 먼저 번역한 후 한역본과 일일이 대조하며 용어와 표현의 차이 하나하나를 살폈다.

니까야로 읽는 금강경 
이중표 해설 | 불광출판사 | 2022년 | 400쪽 | 28,000원

『금강경』이 설하는 언어의 세계와 보살의 길을 바르게 이해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이중표 교수는 초기 경전 니까야를 통해 대승 경전 『금강경』을 해석한다. 『금강경』의 탄생 배경, 니까야와의 연관성을 산스끄리뜨어, 한문 원전의 꼼꼼한 해석을 바탕으로 설명했다. 

오온의 想(상), 금강경의 아상, 인상, 을 뭐라고 번역해야하나?

작성자조성래
오늘도 저의 반야심경 해설작업의 일부를 올립니다.
오온의 想(상)을 뭐라고 번역해야하나?

  그럼 오온의 想(상)을 뭐라고 번역해야하나? 想(상)은 ‘인식(認識)’으로 번역하면, 딱 맞아떨어진다. 그런데 想(상)을 <한글대장경>에서는 ‘생각’으로 번역했고, 조계종 <한글 반야심경>과 김윤수의 <잡아함경>에서는 번역하지 못 하고, 그냥 한글로 ‘상’이라고 하고 있다. 니까야 번역을 보면, 想(상)을 각묵 스님은 ‘인식(想)’으로 번역했고, 전재성 박사는 ‘지각(想)“으로 번역했다. 참고로 말하면, 지각(知覺)은 오온의 마지막 요소인 識(식)과 맞아 떨어지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금강경의 사상(四想, 四相)에 대한 잘못된 해석

한국 불자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想(상)으로는 금강경의 사상(四想)이 있다. 아상(我想), 인상(人想), 중생상(衆生想), 수자상(壽者想)이 그것이다. <금강경> 제3분(分)에 나오는 다음 문장을 어떻게 번역할지가 문제가 된다.

何以故 須菩提 若菩薩有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即非菩薩。
(하이고 수보리 약보살유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즉비보살)
한국을 대표하는 강백 중 한 분인 무비 스님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나'라는 상, '남'이라는 상, '중생'이라는 상, '수명'에 대한 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독자들이 봐도 이 번역이 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것이다. 위의 내용을 정확하게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나’라는 인식, ‘사람’이라는 인식, ‘살아있는 생명체’라는 인식, ‘영혼을 가진 존재’라는 인식을 갖고 있으면, 그는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위의 두 번역은 그 의미에 있어서 많은 차이가 있다. 무비 스님의 번역은 想(상)을 번역하지 못 하고, 그냥 ‘상’으로 쓰고 있을 뿐만 아니라, 人相(인상), 衆生相(중생상), 壽者相(수자상)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 하고 있다. 교학이 부실한 한국 및 중국의 기존 불교에서는 相(상,想)의 개념이 제대로 잡혀있지 않은 까닭에 번역문이 대단히 어렵다. 무비 스님의 번역을 보면, 특히 중생상, 수자상은 그것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모호한 말로 번역돼 있다.

“나[我]”라는 생각, 즉 “나”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아상(我想)’이라고 한다. “사람[人]”이라는 생각, 즉 “사람”이라고 인식하는 것을 ‘인상(人想)’이라고 한다. “중생”이라는 생각, 즉 “목숨을 가진 존재”, “생명체”라고 고집하는 것’을 ‘중생상(衆生想)’이라고 한다. 그리고 “영혼을 가진 존재”라는 견해를 가지는 것을 ‘수자상(壽者想)’이라고 한다. 여기서 ‘생각’, ‘인식’, ‘고집’, ‘견해’ 등은 다 같은 의미로서 ‘想(상)’을 문맥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표현해본 것이다.

영어번역에서는 想(상)을 '개념', '관념', '생각', '(~라는) 인식', '환상', '착각' 등의 뜻인 ‘notion’, ‘idea’, ‘illusion’ 등으로 옮기고 있는데, 그 중 ‘notion’이 가장 적확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산스크리트어 saṃj˜nā(삼즈냐)의 번역어인 想(상, 相)은 그릇된 인식(생각, 믿음), 착각, 망상, 상상, 환상, 미망(迷妄) 등의 뜻으로, 반야심경에 나오는 '전도몽상(顚倒夢想)'과 같은 뜻이다.

기존 한국불교에서 사상(四相)의 개념을 잘못 배운 분들 중에 혹자는 ‘이것은 너무 비약적인 해석이 아닌가’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해석이 맞는 것이다. 그 근거로 다음 글을 보자.

  금강경의 사상(四想, 四相)에 대한 상세한 해설

<금강경>을 읽고 나면, 남는 것은 我相(아상), 人相(인상), 衆生相(중생상), 壽者相(수자상) 밖에 없다. 그만큼 이것이 여러 번 나오고,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금강경>의 이 네 가지 상(相, 想)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육조 혜능(慧能: 638~713)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그 뜻을 해설해 놓았지만, 그것들은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해석해놓은 것들이라, 정확성이 많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특히 壽者相(수자상)에서 ‘壽者(수자)’의 의미가 뭔지 알 수가 없다. 또 인상(人相)에서 ‘人(인)’이 ‘사람’이라는 뜻인지, ‘다른 사람[他人]이라는 뜻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럼 壽者相(수자상)에 대해 육조 혜능 대사는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한 번 보자. 혜능 대사는 수자상에 대해 “범부들이 대상을 보고 취사분별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고, 또 “수행인이 오래 사는 것을 좋아해서 부지런히 복을 닦으며, 온갖 집착을 놓지 않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여기서 혜능은 ‘壽者(수자)’에 대해 ‘오랜 세월[長年]’, 즉 ‘장수하는 사람’이란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壽者(수자)는 산스크리트어 원어의 도움 없이, 한문만으로는 그 뜻을 정확하게 해석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게 한역돼 있는 단어다. 壽者(수자)는 ‘살아있는 존재’, ‘영혼을 가진 존재’, ‘생명체’라는 뜻이다. 이 한 가지만 봐도 사상(四相)이 그동안 원래의 의미와 얼마나 다르게 해석돼 왔는지 알 수 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금강경에서 想(상), 즉 사상(四相)에 대한 개념 잡기가 그만큼 어렵고 중요한데, 제대로 개념이 잡혀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 산스크리트어 원어를 통하여 사상(四相)에 대한 개념을 한 번 잡아보자.

  1) 아상(我相, 我想, ātman-samj˜nā): self-concept, egoism, a notion of a self, the illusion of “I" or ego-entity

‘아상(我相)’이란 ‘나’라는 생각, 즉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我(아)’는 산스크리트어 ‘ātman(아트만)’의 번역이고, ‘想(상)’은 ‘samj˜nā(삼즈냐)’의 번역이다. 아트만(ātman)은 힌두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개념으로, ‘호흡[氣息]’, ‘영혼’, ‘생명’, ‘자신(自身)’, ‘본질’, ‘본성’ 등의 뜻을 가진 단어로서 ‘我(아)’, ‘我者(아자)’, ‘自己(자기)’, ‘神(신)’ 등으로 한역돼 있다. 또 ‘samj˜nā(삼즈냐)’는 ‘이름’, ‘생각’, ‘인식’, ‘개념’, ‘잘못된 생각’이란 뜻으로 ‘名(명)’, ‘想(상)’, ‘相(상)’, ‘槪念(개념)’, ‘邪想(사상)’ 등으로 한역돼 있다. 즉 아상(我想)은 ‘나’라는 생각,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나’, 즉 ‘아트만’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데, ‘나’, 즉 ‘아트만’이 있다고 착각하는 것 등이다.

아상(我想)은 이 몸과 마음은 오온의 가화합(假和合)으로 이루어져 있어, 풀잎 위의 이슬과도 같은 존재일 뿐인데, 고정불변의 ‘나[我]’, 즉 아트만이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반야의 눈으로 보면, 몸과 마음이 있고, 그것의 작용이 있을 뿐, ‘나’라고 할 만한 존재는 오온 중 그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우리는 ‘나, 아트만, self, ego’라고 하는 추상적인 개념을 하나 만들어놓고, 그것에 집착하고 고집한다. 그런 나머지 괴롭다. 여기서 ‘나’라는 개념은 관념이 만들어 낸 하나의 환상일 뿐, 실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그 환상에 속아, 꼼짝없이 그것의 노예로 살아간다.

  2) 인상(人相, 人想, pudgala-samj˜nā): a notion of a person, a personality, an idea of a person, the illusion of a person

인상(人相, 人想)은 산스크리트어 ‘pudgala-samj˜nā(푸드갈라 삼즈냐)’의 번역어로, ‘사람’이라는 생각,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산스크리트어 pudgala(푸드갈라)는 ‘아름답다’는 뜻이 있고, 명사로는 ‘신체’, ‘물질’, ‘나[我]’, ‘개인’, ‘영혼’이라는 뜻이 있고, 이것은 我(아), 人(인), 衆生(중생), 有情(유정), 士夫(사부), 丈夫(장부) 등으로 한역돼 있다. 여기서 눈여겨 봐야할 것은 ‘pudgala(푸드갈라)’에 ‘我(아)’, ‘人(인)’, ‘衆生(중생)’의 뜻이 모두 다 들어있다는 점이다. 이것을 보면, 아상, 인상, 중생상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같거나 유사한 개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브라만 출신의 인도 승려인 진제(眞諦, 499-569)가 번역한 <금강경>을 보면, 사상(四相, 四想)은 ‘我想(아상), 衆生想(중생상), 壽者想(수자상), 受者想(수자상)’으로 번역돼 있어, pudgala-samj˜nā(푸드갈라삼즈냐)를 人相(인상)이 아니라 ‘衆生想(중생상)’으로 번역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인상과 중생상은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3) 중생상(衆生相, 衆生想, sattva-samj˜nā): a notion of a living being, a notion of a being with a feeling, a notion of a sentient being

‘衆生相(중생상)’은 산스크리트어 sattva-samj˜nā(사트바삼즈냐)의 번역으로, ‘중생’이라는 생각, 즉 ‘생명’ 또는 ‘생명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중생’은 산스크리트어 sattva(사트바)의 번역어다. sattva는 중생 외에 ‘존재하는 것’, ‘有(유)’, ‘존재(存在)’, ‘실재(實在)’, ‘실체(實體)’, ‘생명’, ‘생물’, ‘동물’, ‘유령’, ‘악마’ 등의 뜻을 가진 단어로서 ‘人(인)’, ‘彼(피)’, ‘他(타)’, ‘有情(유정)’, 衆生(중생), ‘含識(함식)’, ‘壽者(수자)’ 등으로 한역돼 있다. 여기서 눈여겨 봐야할 것은 ‘중생’의 원어 sattva(사트바)도 역시 ‘人(인)’의 뜻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을 봐도 인상과 중생상을 구분해서 다른 개념으로 해석할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진제(眞諦)가 번역한 <금강경>을 보면, 거기엔 sattva-samj˜nā(사트바삼즈냐)를 衆生相(중생상)이 아니라 ‘壽者想(수자상)’으로 번역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4) 수자상(壽者相, 壽者想, jiva-samj˜nā): a notion of a life, a notion of a life span, the notion of a living soul, the idea of a soul, a notion of a being with an immortal soul

‘壽者相(수자상)’은 산스크리트어 ‘jiva-samj˜nā(지바 삼즈냐)’의 번역어로, ‘생명’, ‘목숨 가진 존재’, ‘영혼을 가진 존재’라고 인식하거나 고집하는 것이다. 壽者(수자)는 산스크리트어 ‘jiva(지바)’의 번역어이다. jiva(지바)는 ‘존재하는’, ‘살아있는’ 등의 뜻이 있고, 명사로는 ‘영혼’이라는 뜻이 있다. jiva(지바)는 ‘命(명)’, ‘命者(명자)’, ‘存命(존명)’, ‘活命(활명)’, ‘壽(수)’, ‘壽者(수자)’, ‘壽命(수명)’, ‘活物(활물)’, ‘生物(생물)’, ‘生命(생명)’, ‘存在(존재)’ 등으로 한역돼 있다. 이 ‘壽者(수자)’의 원어 jiva(지바)에도 ‘我(아)’나 ‘중생’에서와 마찬가지로 ‘생명’, ‘존재’, ‘영혼’, ‘생물’이라는 뜻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을 봐도 我(아), 人(인), 衆生(중생), 壽者(수자)는 같은 의미의 단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금강경>의 다른 한역본을 보면, 진제(眞諦)와 현장(玄奘)은 jiva-samj˜nā(지바삼즈냐)를 壽者相(수자상)이 아니라 ‘受者想(수자상)’으로 번역해 놓았고, 급다(笈多)는 ‘壽想(수상)’으로 번역해 놓았다. 여기서 受(수)는 ‘느낌’이라는 뜻으로, 受者想(수자상)은 ‘느낌을 가진 자라는 인식’이라는 뜻이다. 壽想(수상)은 ‘목숨, 생명체, 영혼이라는 인식’이란 뜻이다.

우리는 이와 같이 산스크리트어 원어를 통하여 사상(四相)의 의미를 보다 정확하게 알 수 있다. 혹자는 “이것도 너무 심한 비약이 아니냐?”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절대로 비약이 아니다. 다음과 같은 <잡아함 570경>의 내용이 그 사실을 입증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 이 글은 <위빠사나금정선원> 조성래 원장의 글입니다. 무단 복제 및 전재를 금합니다. 카톡으로 주변의 귀한 분들께 많이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실행론 설법 35-소아(小我)와 대아(大我)

아라 함은 자기가 곧 이익(利益)하고 안락(安樂)하고 자기명예(自己名譽) 자기 지위(地位) 자기의견(自己意見) 세움이라.

아(我)는 것은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을 말하며, 상(相)이라는 것은 글자를 해석하면, 나무 위에서 보는 눈, 나무의 나이테, 나무의 마디 등을 말하는 것으로 자연과 만물과 시간에서 보여주는 것을 살핀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뜻으로 자기중심으로 살피는 것이 아상(我相)입니다. 아상은 자신이 만든 업이며, 업은 곧 윤회의 씨앗이 되는 것입니다. 이 아상을 잘 이용하면 윤회의 틀에서 벗어나기도 합니다. 

우리 사는 이 세상은 본래 없던 세계였는데 무시겁에 생겨났습니다. 처음 생겼을 때는 물질도 탐욕도 존재하지 않은 무색계(無色界)였습니다. 무색계가 수 없는 세월을 지나면서 물질이 생성하여 색계(色界)로 변천하였습니다. 다시 많은 겁이 지난 뒤 물질에서 탐욕이 생기면서 욕계(欲界)로 변천하였습니다. 무색계와 색계는 하늘[天空]로 선정적(禪定的)인 세계요, 욕계는 하늘과 땅이 공존하는 세계입니다. 이 셋을 삼계(三界)라 합니다. 삼계는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욕계에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무색계는 4개의 선정(禪定) 세계로 나누어지고, 색계는 정묘한 물질로 이루어져 18천으로 나누어졌으며, 욕계는 6천을 포함하여 육도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28천의 천상과 5도[인간, 수라, 축생, 아귀,지옥]로 이뤄진 것이 삼계입니다. 

이루어진 것은 언젠가는 본래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진리에 따라 삼계도 생긴 순차대로 본래 없던 것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돌아간다는 것은 소멸하거나 부서지는 것이 아니라 변천하여 바뀌는 것입니다. 바꿀 수 있는 장소가 아상을 뿌리로 하는 욕계이며 바꾸는 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좋은 방향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점점 고통스러운 방향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그 잘못된 바뀜이 아상에서 인상(人相)을 일으키고, 인상에서 중생상(衆生相)을 나오게 하며, 중생상에서 수자상(壽者相)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욕계에 살면서 한 생각 바로 세우면 극락정토에 살게 되고, 한 생각 잘못하면 지옥예토(地獄穢土)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아상의 근원은 욕심이며, 욕심 때문에 뭇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싯다르타는 출생할 때 일곱 걸음을 옮기시고 사방을 돌아보며 한 손은 하늘을, 한 손은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天上天下唯我獨尊 三界皆苦我當安之)”라고 선언을 하였습니다. 태자가 선언한 ‘유아독존’의 아는 대아적인 말씀이며, ‘삼계개고’의 약속은 이 세계를 극락정토로 정화하겠다는 맹세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욕계가 삼계를 지배할 수 있다는 것과 소아를 대아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증명의 말씀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날 때부터 자기중심 생각이 있습니다. 탐욕을 뿌리로 자기의 이익만을 앞세우는 아상(我相), 겉으로는 계율을 지키는 것 같지만 지키지 않는 인상(人相), 삼계의 고통을 괴로워하면서도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도리어 하늘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중생상(衆生相), 한번 잡은 것은 영원하기를 바라면서 놓지 않으려는 수자상(壽者相)으로 이어가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아상은 자신을 가리키고 인상은 상대를 말하며, 중생상은 자연과 만물과 뭇 생명을 말하며, 수자상은 시간을 뜻합니다. 이것이 4상과 삼간(三間)의 변천 작용입니다. 그리고 4상은 다시 8상이 됩니다. 아상은 소승적 아상과 대승적 아상으로 나누며, 이를 소아 대아라 하고, 인상은 소승적 인상과 대승적 인상으로 나누며, 이를 소인 대인이라 하며, 중생상은 소승적 중생상과 대승적 중생상으로 나누며, 수자상은 소승적 수자상과 대승적 수자상으로 나누어집니다. 

아상’ 중에 소아는 오로지 자신의 이익과 안락만을 위하여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이며, 대아는 자신의 위치를 바로 지키는 ‘다움’을 말합니다. 즉 아버지다움, 어머니다움, 남편다움, 부인다움, 자식다움, 남자다움, 여자다움, 아이다움, 어른다움, 선생님다움, 학생다움, 정치인다움, 법조인다움, 경제인다움을 말합니다. 자기다움이 성취될 때, 윤회하지 않는 해탈을 얻게 되면, 첫 깨달음 자가 성문(聲聞)입니다. 

‘인상’ 중에 소인은 모든 것을 상대와 비교하는 마음을 가지고 우열과 빈천을 분별하면서 항상 자신의 유리한 부분과 잘하는 부분은 크게 나타내면서 유세하고 뽐내며, 상대의 좋은 부분과 잘하는 부분을 감추면서 시기와 질투로 사사건건 허물 보고 부정하면서 방해하는 것이 소인상입니다. 특히 입으로는 윤리 도덕을 말하면서 행동은 하지 않고 자만심만 가득하며, 권력과 재물에 아부하고 빈천한 이를 멸시하며, 혹 남에게 도움을 줄 때도 좋은 것을 베풀지 아니하고, 쓰다 남은 것을 주되 아까워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소인상입니다. 대인은 자신보다 먼저 상대를 생각하여 양보하고 배려하면서 상대방이 어렵고 힘들어함을 항상 걱정하고 상대의 행동을 좋은 마음으로 말하면서 항상 은혜롭게 생각하는 것이 대인상입니다. 상대로 인하여 자신의 존재를 깨달아 해탈한 자를 불교에서 인연법을 성취한 연각(緣覺)입니다. 

‘중생상’ 중에 소승적 중생상은 자연과 만물에 고마움을 모르고 모든 것은 자신의 힘으로, 자신만의 공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면서 함부로 자연과 만물을 훼손하고 파괴하는 것입니다. 특히 동식물이 주는 혜택의 고마움을 생각하지 않고, 함부로 대하고 낭비하는 것입니다. 혹 애완동물은 사랑하고 보호하는 자비심을 지녔다 하여도 부모와 형제와 이웃을 소홀히 생각한다면 이것은 소승적 중생상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여행을 떠나면서 집에 계시는 부모님은 걱정하지 않으면서 애완동물을 걱정하는 것, 부모와 생활하는 것은 싫어하면서 애완동물과 산책하고 돌보는 것, 유명브랜드와 귀중품을 소중하게 하면서 부모 형제와 친척과 이웃에 소홀하게 하는 것 등이 모두 소승적 중생상입니다. 대승적 중생상은 자연과 만물을 위하여 그들과 함께하면서 어려움과 고통을 들어주며, 베풀고 감싸주고 의지처가 되어 줌에 항상 은혜롭게 생각하는 것이 대승적 중생상입니다. 자연과 만물과 뭇 생명과 함께하면서 육행 실천하는 것이 동체대비를 성취한 보살(菩薩)입니다. 

‘수자상’은 시간의 활동상입니다. 소승적 수자상은 연륜과 경력과 출생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은 영원하기를 바라면서 상대방의 부귀영화는 곧 사라지기를 바라거나, 자리가 높고 낮음과 오래되고 늦음을 분별하여 따지는 것이 소승적 수자상입니다. 특히 나는 ‘왕년에……’, ‘나는 젊었을 때……’, ‘내가 시집살이를 할 때……’를 말하면서 누구보다도 부지런했고, 똑똑했고, 고생했고, 힘들었다는 것을 앞세우면서 자신을 자랑하고 선전하는 사람이 소승적 수자상입니다. 또한, 시대의 변화는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시대만을 생각하면서 아랫사람과 젊은 사람을 가르치고자 한다면, 이들은 ‘애 늙은이’ ‘만년 상사,’ ‘꼰대’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소승적 수자상입니다. 대승적 수자상은 무상의 이치를 깨닫고 순간에 일어나는 일에 마음 두지 않으며, 순서와 질서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루는 아침, 낮, 저녁, 밤의 순서가 있고, 1년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순서가 있으며, 세월에는 어린시절, 학창시절, 청년, 장년, 노년의 순서가 있습니다. 서두르지 않고 조급하지 않으며, 기다리고 준비하면서, 말할 때 삼사일언(三思一言)하고, 행동은 코끼리처럼 움직이며, 생각은 일체중생의 이익과 안락을 먼저 서원하는 것이 대승적 수자상입니다. 이것을 실천하신 분이 인간 세상에서 가장 용감하게 사상을 바꾼 대영웅으로 존경받는 불세존입니다. 

우리는 별로 잘나지도 않았고, 아름답지도 않으며, 원만하지도 않고, 능숙하지도 못한 재주를 믿고, 하늘 높이 모양을 뽐내면서 무수한 겁을 흘러오면서 습관적으로 자기중심의 소승적 아상과 소승적 인상과 소승적 중생상과 소승적 수자상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습관을 바꾸려면 다시 삼아승지겁을 수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일념만년(一念萬年)이 되게 하는 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참회이며 진실한 참회라면 찰나에 중생 습관을 불보살의 모습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무상(無相)이며 무주상(無住相)으로 참회하며, 자연과 만물과 뭇 생명을 평등하게 생각하는 마음으로 무주상 보시를 성취하면 됩니다. 산은 높을수록 수풀은 낮아지고, 수풀이 낮아질수록 나무는 외로워집니다. 

쓸 곳도 없고, 쓸 때도 없고, 쓸 수도 없는 인아상(人我相)을 끊고, 법성산(法性山) 정상에 무주상의 법계일상(法界一相)을 세우는 진실한 참회를 합시다.  ㅣ 혜정 정사/기로스승

瓢蟲

不朽의 古典에서 찾은 智慧와 心灵, 역사적 敎訓과 省察에서 옛글의 향기에 취해 사랑에 빠지게 되었음을 밝히는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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