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객(俠客) 청말10대무술고수(5) 동해천

 협객(俠客) 청말10대무술고수(5) 동해천

동해천(董海川. 1797~1882). 본명은 동명괴(董明魁)


팔괘장(八卦掌)은 19세기초, 중국 북경에서 처음 출현한 근대 무술이다. 내가권법의 최고봉이라는 표현대로, 그 이치가 난해하고 어려워서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이 팔괘장을 만든 동해천(董海川)은 청나라 가경(嘉慶) 2년(1797년) 10월 13일 하북성(河北省) 문안현(文安縣)의 주가오(朱家塢)촌의 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광서8년(1882년) 10월 15일, 별다른 병 없이 정좌한 채로 서거했다고 한다. 그는 한 문파의 창시자답게 전설적인 행적이 많았다.
  

동해천의 선조는 명나라 초기에 산서성 홍동현에서 하북성 고성현으로 이주하였다. 그 후, 명나라의 영락 연간에 동씨 일가의 한 부족이 하북성 개구촌으로 이사하였으며 몇 세대가 거친 후에는 문안현 무관촌으로 진출하였다. 문안현은 매년 홍수에 시달렸기 때문에 지대가 높은 주가오촌으로 옮겨 지금까지 21대에 이르고 있다. 

할아버지인 동박헌(董博軒)에게는 동수업(董守業)과 동수신(董守興) 이라는 아들 둘이 있었고 동수업에게는 동덕괴(董德魁), 동명괴(董明魁. 동해천), 동무괴(董武魁) 세아들이 있었다. 그 당형(堂兄)인 동헌(董憲)이 글과 무술을 좋아하여 한번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었다. 그의 영향으로 동해천은 무술을 접하게 되고 동헌가 왕래하면서 무술과 글을 익히는데 정진하여 젊어서 이미 그 지역에서 유명하였다. 연장자에게 공손하며 그 총기가 뛰어나 어려서부터 글과 무예를 병행하여 정통하였다. 성격은 강직하여 힘없는 자가 탄압받는 것을 극히 싫어하였다. 천하를 주유하면서 고향의 가족에게 피해가 없도록 그 이름도 '海川'으로 개명해 버리니 강이나 하천이 바다에서 모두 합쳐지듯 세상 모든 것을 포용하고 받아들이겠다는 그의 포부가 담긴 것이다.
   

이 동명괴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말이 적으며 예의가 발랐다. 4살 때부터 문자를 배워 6살 때는 천여 글자를 알았다고 한다. 낮에는 글을 배우고 밤에는 무술을 수양하여 겨울이나 여름이나 십년을 하루같이 조금도 쉬지 않고 노력을 하였다. 선사는 체격이 크고 힘이 세서 사지의 발육도 보통 사람들과 달랐으며 양팔을 늘어뜨리면 무릎의 밑까지 미쳤다고 한다.

26세 때인 1824년 남방인 오월(吳越. 지금의 강소성, 절강성 지역)과 서쪽의 파촉(巴蜀. 지금의 사천성 지역)을 유람하게 된다. 그 동기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견이 있는데 주가오촌의 진옥주(陣玉珠) 노인의 회고에 따르면 「나의 조부 진국균의 이야기로는 가경 15년 대홍수 때 농작물의 수획이 전무하자 동해천의 집은 빈곤해서 생활이 힘들었다. 그러나 동해천은 무술에만 몰두하여 생활에 신경을 쓰지 않자 모친은 불평을 털어놓았고. 그것을 모면하기 위해, 그리고 전부터 생각하던 무술의 수련을 위해 동해천은 집을 떠나 남쪽으로 갔다고 한다」라고 한다. 고향을 떠난 이유야 어찌되었든 그는 이 시기에 유람하던 지역의 무술고수들을 방문하여 직접대련을 하면서 그들의 무술을 습득하게 되는데 많게는 한 번 방문하여 13번이나 대련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무예수련탐방은 고향에서 고수에 대한 소식을 들으면 찾아가는 식으로 진행되어 1824년부터 1834년까지 약 40여 차례에 걸쳐서 이러한 수련방식을 거치게 된다. 귀향후 상대방과 대련한 것을 기억하며 자기나름대로 수련을 이어가니 그의 무공은 나날이 진보해 갔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시비가 붙어 싸우던 중 그만 상대방이 동해천에게 맞아 죽는다. 체포를 피해 여기저기로 피신을 하던 중 안휘성의 구화산에 가게 되는데 그 곳에서 도사(道士) 운반(雲盤)을 만나게 된다. (일설에는 이인(異人) 화징하(華澄霞) 라고도 함) 안휘성 남부지역은 오래전부터 '휘상(徽商)' 이라고 불리우는 재벌 상인들을 많이 배출한 지역이고, 상업이 번성하다보니 표국과 경비업이 성행했다. 따라서 무술이 번성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는 없다.   

이 운반도인 밑에서 해천은 8년 동안 공부를 하게 된다. 운반은 "나의 도(道)는 팔전장(八轉掌)으로 체(體)를 삼고 권계(권법과 무기법)로 용(用)을 삼아 연습하고 익히는데 공이 지극한 조화에 이르면 천하의 적이 없으며 개인적으로는 몸을 양생시킨다"는 오의를 전하고 해천을 속세로 내보냈다. 또한 사숙인 곽원제(郭元濟)에게 전수받아 심기가 더욱 깊어지고 무예는 대성하였다. 이것이 팔괘장의 기원이다. 
    

윤복의 저서,「동해천」에 의하면 구화산 등지를 떠돌던 기간은 1851년부터 1861년까지이며 아마 남방에서 일어난 태평천국의 난과 비슷한 시기이다. 또한 강과무(康戈武)는 남방의 팔괘장 성지를 고증하는 가운데, 남방의 도교에는 「전천존(轉天尊)」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도교의 단련법으로 원주상을 걷는 것이라고 한다. 강과무는 동해천 선사가 이가남유(離家南遊)의 초기에 하북성 웅현 관구초에 있는 선조가 살던 곳으로 가서 번자권을 배웠으며 이후 남방으로 가 전천존(轉天尊)의 「주권운동(走圈運動)」을 집어넣었으며 팔괘의 역학을 배우고 깨달은 바가 있어 창시한 것이 지금의 팔괘장이라고 고찰하고 있다.
   

동해천이 구화산에서 하산한 이후 북경의 숙왕부(肅王府)에서 태감(환관)으로 있었던 연유에 대해서는 이견이 분분하다. 아래는 각기 제기되는 것들이다. 

첫째, 동해천이 소주(蘇州)를 방문하여 창랑정과 사자림, 한산사 같은 유명한 명승고적을 구경하고 있엇다. 이때 소주의 지사는 악명이 높아서 백성들의 재산을 빼앗고 이쁜 여자들을 납치하여 능욕하는 등 그 패악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이것을 들은 동해천은 의협심에 불타 야밤중에 지사의 집에 몰래 잠입하여 지사를 죽이고 억류된 여자들을 구했다고 한다. 정부의 관리를 살해했기 때문에 전국에 지명수배되어 쫓기는 몸이 되자 아예 이름을 숨기고 하남성으로 달아나 은신하였다. 이때 농민 반란군과 연계가 되어 함풍제의 살해 청부를 받아서 이를 실현하기 위해 북경으로 갔다는 말이 있다. 즉, 태평천국군의 지도자 홍수전과 동해천의 사숙 곽원제(郭元濟)가 친분이 있어 곽이 홍수전에게 동해천을 추천했다고 한다. 태평천국의 난은 남방에서 일어나고 북방에서는 염군(捻軍) 의 란(1855∼1868)이 있었기 때문에 동선사는 염군에 참가하여 싸웠으며 밀명을 받아 궁중으로 잠입, 환관으로 가장하여 황제를 암살할 기회를 노렸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둘째, 소주의 지사를 죽였던 어쨋든 자신의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서 스스로 거세하여 환관이 되어 북경에 가서 연줄을 찾아 사왕부(四王府)의 태감이 되어 청소와 세탁, 차심부름 등의 잡일을 하고 지내다 숙왕부로 가게 된다.

   

동해천의 무술고수로서 본색이 드러난 계기에 대해서도 이견이 좀 있다. 숙왕부(肅王府)에서 일을 하던 중 숙친왕(肅親王)이 벌인 연회에서 무술시합중에 우연히 들통이 났다는 것인데 그 자신이 무술시연을 보였다는 설과 당대 태극권의 고수인 양로선(梁露蟬)과 대결을 벌이면서 본색이 탈로났다는 설이 있는데 어째거나 그의 무술실력이 뛰어나 그 자리에 있던 고수(양로선)와 대련이 벌어졌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숙친왕이 벌인 연회에서 왕부의 수문장인 사회회(沙回回)가 무술시연을 보인다. 사회회는 제자도 많았으며 무술도 훌륭했지만 성격이 좋지 않았다. 먼저 수제자 등을 시켜 시연을 보이고 자신은 마지막으로 나왔다. 사회회는 자신 있게 연무하였으며 하면 할수록 광적인 상태가 되어 관중들에게 불쾌한 느낌을 안게 하였다. 그것을 보고 있던 숙왕은 동해천에게 차를 가져오라고 시켰다. 그런데 차를 가지고 가자 손님들이 너무 많아 혼잡한 탓에 숙왕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하인에게 주인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마음을 정한 동해천은 한손에는 차, 한 손에는 쟁반을 들고 묘기를 부려 숙왕 앞에 내려섰다. 숙왕이 이것을 보고 무척 놀라 동해천이 무술을 연마했을을 눈치채고 그에게 무술시연을 명하니 그는 그의 절기들을 선보인다.
이렇게하여 동해천의 무공이 드러났다는 얘기가 있고 다른 하나는 역시 연회장에서 태극권의 명인 양로선(楊露蟬)이 명을 받아 숙왕부에 와서 왕부 내의 무술고수들과 대결을 벌이는데  연전연승을 한다. 마지막으로 남은 이가 양로천에게 맞아 쓰러니는 찰나 마침 음식쟁반을 들고 지나가던 동해천이 그를 구해주고 양로선과 겨루나 두 사람이 대치하면서 서로 승부를 가리지 못하였으나 동해천의 무공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한다.  

   

동해천은 문하생들을 엄하게 지도 하였다. 배우러 오는 사람들에게는 '좌전우선(左轉右旋)'을 기본으로 한 보환식을 가르쳤다. 오래 수련하여 재능을 인정받은 사람들에게는 "나와 너희들이 배우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제자들은 "팔괘입니다"고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고 한다. 범위를 넓히면 주역의 팔괘이론이다. 또 이 괘는 「구괘(拘掛)」의 「괘(掛)」이다. 잡고 건다는 의미로 괘(掛)는 팔괘의 괘(卦)에 손수변(手)이 붙은 것이다. 손으로 행하는 팔괘가 되는 것이다.
   

동해천이 무술을 가르칠 때는 지극히 엄하였지만 그 이외의 때에는 항상 웃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어느 날, 제자들이 모여 연습을 한 뒤 담소를 나누던 중 기분이 좋았던지 동해천이 "지금 불을 끌 테니 모두 나를 잡아 보아라. 운이 좋아 잡은 사람에게는 상금을 주겠다" 고 말하는 것이었다. 불이 꺼지고 캄캄한 방안에서 스승을 찾기 시작했다. 모두 웃으면서 스승을 찾았지만 그는 어디에도 없었다. 30분 정도 경과하여 불을 켜보았지만 역시 없었다. 그 때 천장에서 커다란 웃음소리가 났다. 그는 손가락으로 천장의 모서리를 잡고 발은 천장에 붙이고 있었던 것이다. 
  

하루는 왕부의 일로 북경 교외로 나갔을 때였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도적들이 사는 마을을 지나치게 되었다. 그러자 도적들이 하나 둘씩 나타나서 가는 길을 막아서는 것이었다. 그때 동해천은 양손에 계조예(鷄爪銳)라는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네 목을 원한다" 고 도적의 두목이 말하자 길을 비키지 않으면 네 목을 치겠다고 선사가 대답하였다. 도적 두 명이 동시에 칼을 가지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동해천의 계조예가 번쩍이자 두 사람은 땅바닥에 쓰러졌다. 주변에 있던 다른 도적들은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칼과 창을 휘두르며 공격을 하였다. 가운데 둘러싸여 있던 동해천은 천화타류(穿花打柳)의 수법으로 십여 명의 적을 순식간에 제압하였다. 게다가 도망가는 적을 마을까지 쫓아가서 남은 십여 명의 도적을 토벌하여 도적들을 일망타진하였다.
  

동해천의 제자 중에는 탄자(彈子, 암기의 일종, 새총과 비슷)를 잘 쏘는 사람이 있었다. 이것은 옛날에 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도구였는데 진흙이나 쇠로 만든 구슬을 탄자로 쏘아서 적을 명중시키는 무기였다. 
그가 제자들과 함께 담소하던 중 "이 중에 탄자를 잘 쏘는 사람이 있는가?" 하고 말하자 마침 탄자를 잘 다루는 한 사람이 "날고 있는 제비를 맞추면 백발백중입니다" 라고 자랑한다. 동해천이 "사람에게 쏘아본 적은 있는가?"라고 물으니 "사람에게 쏜 적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자 "그럼 나를 한번 쏴보지" 라 하니 그 제자는 동해천의 윗머리를 겨냥하여 쏘았다. 동해천이 날아온 탄자(彈子)를 손가락 두 개로 잡아채어 도리어 그 남자에게 던지는 것이었다. 탄자는 상대의 이마에 맞아 작은 혹을 만들었다. 앉아있던 제자들은 크게 웃었다. 사람들이 옛날 무술의 명인이 날아오는 표창과 화살을 손으로 잡는다는 것은 소설에서나 나옴직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목격을 하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만안공원묘지에 있는 동해천의 석상>

 

동해천은 85세인 1882년 겨울에 세상을 뜨게 된다. 죽음에 임박해서도 침대에 누운 상태에서도 두 손으로는 팔괘장의 수식을 취했다고 한다. 제자들이 유지를 모아 북경 동직문(東直門) 밖 소우방촌(小牛房村) 부근에 묘지를 정해 안장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것을 걱정한 팔괘장 연구회장 故이자명을 비롯한 25인이 발기를 하여 팔괘장 관련인사 400여명의 협력을 얻어 1982년 8월 2일 북경시 서교(西郊)의 만안(萬安)공동묘지로 이장하였다. 만안공원의 동해천 묘소 주변에는 그후 저명 팔괘권사들이 안장되어 팔괘장 수련자들의 성지가 되고 있다. 소설 '옹정검협도(雍正劍俠圖)'는 동해천을 모델로 쓴 것으로 주인공 동림(董林)은 字가 海川이다.

이 시기 전후에 ‘동해천은 팔괘장의 창시자인가?’ 와 ‘동해천은 팔괘장의 시조가 아니다’ 는 논문이 무술잡지에 발표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음양팔반장(陰陽八盤掌)」을 하는 사람들이 낸 소문이다. 이것은 북경팔괘장연구회의 간부인 강과무, 조대원, 저국용씨 등이 현지 조사를 통해 거짓임이 드러났으며 강과무씨는 ‘팔괘장 원류의 연구’ 라는 장편의 논문을 발표하여 이 논쟁에 쐐기를 박았다. 

중국내에서 현재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유사팔괘장을 하는 사람들은 팔괘장 2대 전인에게서 잠시 배운 사람들이 독립하여 독자적인 단체를 설립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팔괘장에서 파생된 일부 유사팔괘장 무술들은 그 원리가 변형되어 팔괘장의 기본원리와 달라졌으므로, 팔괘장이라고 볼 수 없다.


<주: 서울팔괘장연구회의 자료에 중국의 다른 자료를 번역하여 보충하였음>

瓢蟲

不朽의 古典에서 찾은 智慧와 心灵, 역사적 敎訓과 省察에서 옛글의 향기에 취해 사랑에 빠지게 되었음을 밝히는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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