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은 누구인가

 다산 정약용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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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은 1762년 (영조38년) 경기도 광주군 초부방 마현리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재마을)에서 5남 3녀 가운데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丁載遠, 1730~1792)으로 압해 정씨이고, 어머니는 해남 윤씨(海南尹氏, 1728~1770)이다.

다산의 집안은 기호 남인에 속했으며, 다산의 선조 가운데 연달아 8대에 걸쳐 홍문관(옥당) 벼슬을 역임하여 ‘8대 옥당집안’이라고도 한다. 어머니 해남 윤씨는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후손으로 학자이자 화가로 유명한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의 손녀였다. 학문과 벼슬로 이름이 높았던 호남의 대표적인 남인계 집안이었다.

정약용의 형제들로는, 가장 큰 장형은 이복(異腹)으로 의령 남씨 소생의 정약현(丁若鉉)이고 그의 첫 부인이 처음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인 ‘이벽’의 누이였다. 그의 딸은 황사영과 혼인했다. 어머니 해남 윤씨 소생으로는 둘째형 정약전(丁若銓)과 셋째형 정약종(丁若鍾)이 있다. 그리고 누이가 이승훈(李承薰)과 혼인했다. 서모 김씨 소생으로 정약횡(丁若鐄)이 있다. 이승훈은 최초로 세례를 받았고, 정약종은 신유년에 순교했다.

다산은 유형원(柳馨遠), 이익(李瀷)으로 이어지는 실학을 계승했으며 북학파의 사상까지 받아들여 실용지학(實用之學)·이용후생(利用厚生)을 주장하면서 실학을 집대성하였다. 다산은 일생 500여권이 넘는 저술과 2,700여수의 시를 남기고, 1836년(헌종2) 75세의 삶을 일기로 고향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다산 생애(개관)

다산의 삶은 성장기(成長期) - 사환기(仕宦期) - 유배기(流配期) - 만년(晩年)의 네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성장기는 출생하여 자라고 공부를 시작하여 성균관에 들어가서 공부한 기간(22세~28세)까지이다. 사환기는 28세에 벼슬에 나아가 여러 관직을 거쳐서 39세에 고향에 내려온 시기까지이다. 유배기는 40세에 신유사옥으로 유배생활에 들어가 18년을 보낸 기간이다. 만년은 57세에 유배가 풀려 고향으로 돌아와 75세에 세상을 뜰 때까지이다.

1.다산의 성장기

다산은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공부를 잘했다고 한다. 7세에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니 멀고 가까움이 달라서라네” [小山蔽大山 遠近地不同] 라는 시를 써서 아버지에게 칭찬을 받았다. 9세에 어머니 해남 윤씨가 별세하고, 10세에 부친에게서 경서와 역사서를 배우기 시작했다. 15세에 풍산 홍씨와 결혼하여 서울생활을 시작하였다. 홍씨는 병마절도사를 역임한 홍화보(洪和輔)의 따님이었는데, 당대 남인계의 명망 높은 집안이었다. 당시 남인계 소장학자들인 이가환(李家煥, 이익의 종손), 이벽(李蘗), 이승훈(李承薰)등과 교유하면서 실학의 증시조라 할 수 있는 이익(李瀷)의 유고를 읽게 되었는데, 깊은 감명을 받고 사숙하기로 했다.

이후 다산은 20세를 전후 해 과거공부에 본격적으로 힘을 기울였으며 급기야 22세에 과거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이때 정조대왕을 만나게 되고 총애를 받게 된다. 이러한 만남을 풍운지회(風雲之會)라고도 한다. 23세 때 두미협으로 배를 타고 내려가면서 이벽에게서 천주교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큰 감명을 받는다. 28세에 대과(문과)에 합격하여 벼슬길로 나아갔다.


2.다산의 사환기(仕宦期,벼슬시절)

28세때 벼슬에 나아간 다산은 규장각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발탁되는 등 정조의 총애 속에서 재주와 능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30세 때 진산사건(晉山事件, 1791)이 발생한 후로 정적들에게 시달리게 되었다.

배다리 설계에서 재주를 보인 다산은 31세에 부친상으로 여막살이를 하는 동안 정조로부터 수원화성(水原華城) 설계를 명령받는다. 33세에 경기북부 암행어사로 나아가 백성들의 참혹상을 목격하고, 권세를 휘둘러 민폐를 끼친 관리들을 처벌하도록 정조에게 보고했다.

1795년 4월에 중국의 소주(蘇州) 사람 주문모(周文謨)가 변복을 하고 몰래 들어온 이후 천주교도에 대한 압박이 심해졌다. 이를 빌미로 채제공(蔡濟恭) 등 남인세력에 대한 정치적 공세도 가열되었다. 정조는 이가환을 충주목사(忠州牧使)로, 정약용을 금정찰방(金井察訪)으로 좌천하여 임명하고, 이승훈은 예산현(禮山縣)으로 유배 보냈다. 천주교 혐의를 씻어주고자 정치적 공세를 벗어나게 한 것이었다.

1797년 6월 정조는 다산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임용했다. 이에 대해 다산은 ‘동부승지를 사양하는 상소문’을 올려 천주교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솔직히 밝혔다. 이 상소는 다산이 한때 천주교에 경도되었지만 나중에 버렸다고하는 변명이자 고백이었다. 사직상소를 낸 다음 달 정조는 다산을 황해도 곡산부사(谷山府使)로 특별히 임명했다. 그때 세력을 잡은 자로 참소하고 시샘하는 자가 많아 다산을 몇 년 외직(지방직)에 근무하도록 하여 그 불길을 진정시키려는 것이었다. 곡산 부임길에 데모 주동자 이계심(李啓心)을 만났다. 다산은 관청의 행정에 항의하는 그의 태도가 오히려 관청이 밝은 행정을 하는 데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권위적 지배를 부정하고 백성의 고통을 해결해주려는 목민관의 자세를 몸소 실천했던 것이다. 다산은 곡산부사로 있은 2년간 직접 한 고을의 피폐한 민생을 구제하고 누적된 폐단을 바로잡는 행정을 펼 수 있었다.

38세(1799)때 정조는 다산을 다시 조정에 불러 형조 참의에 제수했다. 곡산부사로 있으면서 의심스러운 사건들을 명쾌하게 해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위의 정치적 공격도 고조되었다. 다산은 39세(1800) 봄에 처자식을 거느리고 마현(馬峴)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참소하고 시기하는 사람이 많은데 벼슬을 하지 않고 낙향하면 공격받지 않으리란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정조가 갑자기 세상을 뜨면서 다산에게 이제는 아무런 보호막이 없었다.

낙향해 있던 다산은 노자의『도덕경』중 “머뭇머뭇, 겨울시내를 건너듯[與兮 若冬涉川] 조심조심, 사방을 두려워하듯[猶兮 若畏四隣]”이라는 구절에서 따온 여유당(與猶堂)이란 당호를 짓고 세상과 거리를 두고자 했다. 그러나 정적들의 칼날은 피할 수 없었다. 천주교 탄압을 명분으로한 ‘신유사옥’(辛酉邪獄, 1801)이 일어난 것이다.


3.다산의 유배기

신유사옥은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나이 어린 순조가 즉위하면서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고, 조정의 주도권을 노론 벽파가 장악한 가운데 발생했다. 천주교 배척을 명분으로 정적을 제거하기에 나선 것이다.

신유사옥으로 셋째 형 정약종은 순교하고, 한때 천주교를 받아들였다가 이제는 거리를 둔 둘째 형 정약전과 다산은 기나긴 유배생활이 시작되었다. 다산의 첫 유배지는 경상북도 장기(長*)였다.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서울로 다시 압송된 다산은 그해 11월 하순에 둘째형 약전은 흑산도로 다산은 강진으로 유배길에 올랐다. 형제는 나주 율정에서 눈물로 헤어진 뒤 서로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채 형은 흑산도와 우이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다 16년 후에 죽고, 다산은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다 18년 후에 귀향했다.

다산은 유배기간동안 좌절하지 않고 역경을 기회로 바꾸었다. 내가 “이제야 겨를을 얻었구나!”라고 하면서 학문과 저술활동에 열중했다. 다산은 강진에서 네 곳을 옮겨 다니며 거처했다.

(1) 사의재 : 1801년 겨울부터 약4년
(2) 고성사 보은산방 : 1805년 겨울부터 1년 가까이
(3) 제자 이청(학래)의 집 : 1806년 가을부터 약 1년 반
(4) 다산초당(윤단의 산정): 1808년 봄부터 약 10년

다산이 강진에 도착했을 때는 추운 겨울이었다(40세, 1801). 대역죄인이라 모두 접촉을 피했는데 이때 불쌍히 여겨 챙겨준 사람이 동문매반가(東門賣飯家)의 주모였다. 다산은 자신이 거처하는 누추한 방에 ‘사의재’(四宜齋)라는 이름을 붙이고 ‘네 가지 마땅함’ 즉 “생각은 맑아야, 용모는 장엄해야, 말은 과묵해야, 행동은 중후해야 한다”는 다짐을 하면서 학문에 열중하였다.

초기의 엄혹한 감시와 압박이 조금씩 풀리면서 다산은 1808년 다산초당(茶山草堂)으로 거처를 옮겼다. 다산초당은 제자들과 함께 학업에 정진하는 연구공간이 되었으며, 방대한 저술을 낳는 곳이 되었다. 다산의 제자에는 읍중시절에 수학한 제자(읍중제자)들과 다산초당에서 수학한 제자(다산 18제자)들이 있다. 다산의 제자들은 다산의 저술활동에 큰 힘이 되었다. 다산은 4서 6경에 대한 연구에 하였으며 1818년 해배되기까지의 마지막 기간에는 경세학(經世學) 연구서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마쳤다.『경세유표(經世遺表)』,『목민심서(牧民心書)』등을 저술하였고 미처 끝내지 못한『흠흠신서(欽欽新書)』는 고향집에 돌아가 저술을 마친다. 또한 다산은 수많은 서정시 및 사회시를 지어 19세기 초반 강진일대의 풍속과 세태를 읊으며, 압제와 핍박에 시달리던 농어민의 참상을 눈물어린 시어로 대변해 주었다.

4.다산의 만년(晩年) : 해배 이후

18년 유배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간 다산은 저술의 수정보완을 계속했다. 한편, 소론계의 석천(石泉) 신작(申綽), 노론계의 대산(臺山) 김매순(金邁淳),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등과 같은 석학들과 학문 교류를 했다.

다산은 회갑 때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썼는데, 여기서 자신의 호를 사암(俟菴)이라 했다. 이는 “백세 이후 성인을 기다려도 미혹됨이 없다”. [百世以俟聖人而不惑]에서 따온 이름이다. 학문적 자부심일 수도 있고, 훗날에 대한 기다림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1836년 회혼일(回婚日)인 2월 22일(양력 4월 7일) 회혼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가족들이 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21세기 실학 어떻게 할 것인가 - 글쓴이 조성환

‘실학’이란 개념은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현재 우리가 당면한 현실을 해결하는 학문’을 의미할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는 ‘근대성’이 당면 과제였고, 이에 대한 응답으로 정약용이나 최한기와 같은 학자들을 ‘실학자’로 재해석하였다. 하지만 20세기 후반에 들어서 상황이 달라졌다. 대략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근대성에 대한 성찰이 제기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흔히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불리는 ‘탈근대 담론’이 그것이다.

이외에도 한국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당시에 서양에서는 그보다 더 큰, 그리고 더 근본적인 담론이 대두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지구 담론’이다. 이 담론은 1990년대에 가속화된 ‘지구화(globalization)’와 ‘지구온난화(global warming)’라는 동시적 현상에 대한 학문적 대응의 일환으로 제기되었다.

‘탈근대 담론’, ‘지구 담론’, ‘인류세’ 개념 대두

그리고 2000년에는 서양의 일부 과학자들에 의해 ‘인류세(Anthropocene)’ 개념이 제기되었다. ‘인류세’란 간단히 말하면 ‘인간에 의해 기후변화가 유발된 시대’를 가리킨다. 2009년에는 인도 출신의 역사학자 디페시 차크라바르티에 의해 인류세 개념이 본격적으로 인문학의 영역으로 들어왔다(「역사의 기후: 네 가지 테제」, 『지구사의 도전』에 수록). 아직 지질학계에서는 정식 용어로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차크라바르티의 논문이 나온 이후로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에서는 ‘기후변화 시대’를 지칭하는 상징어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물론 인문학 안에서도 이 개념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인류세 개념의 등장은, 그리고 그것의 인문학적 수용은 그동안 우리의 사고체계를 지탱하고 있었던 ‘근대’라는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 특히 서구 근대인들이 그동안 생각해 왔던 ‘자연’ 개념, 즉 인간의 배경이나 환경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졌던 대문자 ‘네이처(Nature)’ 개념이 비판받게 되었다. 아울러 종래의 근대적 세계관이 지나치게 인간중심적이었다는 반성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그렇다면 그동안 ‘근대’라는 틀 안에서 사유되었던 ‘실학’의 내용도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흥미롭게도 서양에서 지구온난화와 함께 지구 담론이 대두되던 시기인 1990년에 한국에서는 종래의 실학 개념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가 제기되었다. 하나는 김용옥의 ‘실학(파) 허구론’(『독기학설讀氣學說』)이고, 다른 하나는 오가와 하루히사(小川晴久)의 ‘실심실학론’이다(「기(氣)의 철학과 실학 - 홍대용의 경우」, 『민족사의 전개와 그 문화(하)』, 창비)이다.

근대적 세계관의 반성으로 실학 담론도 시들

김용옥은 종래의 실학(파) 담론이 서구의 역사발전단계를 한국사상사에 무비판적으로 적용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비판하였고, 오가와 하루히사는 정반대로 조선후기의 실학은 근대 일본의 실용실학과는 달리 ‘실심(實心)’이 강조된 도덕실학이었다고 높게 평가하였다. 비록 실학에 대한 평가는 정반대로 갈라지지만, 양자의 공통점은 종래의 ‘근대적 실학 담론’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의 문제 제기가 나온 시점이 서양에서 근대성에 대한 성찰이 제기되기 시작한 시기와 겹친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뭔가 시대적인 요청에 대한 응답을 하고 있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어렴풋이나마 21세기의 실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암중모색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 이후로 이들의 문제 제기에 대한 적극적인 응답이 나왔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단 ‘실심실학’에 대해서는 오가와 하루히사를 비롯하여 정인재나 한예원 등의 선구적인 논문이 나왔다). 특히 21세기에 들어서 실학 담론은 동력을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인류세’ 개념의 등장과 함께 종래에 실학 담론을 떠받치고 있던 근대적 세계관 자체가 재고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실학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

해답은 간단하다. ‘근대’가 ‘인류세’로 새롭게 인식되기 시작했다면, 그리고 실학이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현실적 학문을 가리킨다면, 당연히 근대를 지향했던 실학 개념도 인류세라는 방향으로 재조정되어야 할 것이다. 즉 ‘인류세의 실학’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종래의 실학자들에 대한 해석이나 방점도 달라져야 한다. 가령 20세기에는 최한기 철학에서 ‘경험론’의 단초를 발견하고자 했다면, 이제는 거기에서 기후변화 시대의 인류세철학의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

실학자들에 대한 해석이나 방점 달라져야

실제로 최한기의 철학 체계는 ‘기화(氣化)’ 개념을 중심으로 짜여져 있는데, ‘기후변화’는 기화의 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대기의 상태가 (인간에 의해서) 변화한 것이 기후변화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기후변화에 해당하는 서양어 ‘climate change’에는 이러한 인식은 들어있지 않다. ‘climate’ 자체가 철학적 개념으로 쓰이지 않기 때문이다. ‘기화’는 최한기 이전부터, 가령 주자학이나 성리학에서도 자연 현상의 변화를 설명하는 개념으로 사용되어 왔다. 그것을 인간과 사물, 심지어는 기술의 영역에까지 확장해서 철저하게 적용한 것이 최한기의 기학(氣學)이다.

최한기는 ‘인기화(人氣化)’나 ‘물기화(物氣化)’ 같이, 인간과 사물(동물, 식물, 무생물)을 모두 ‘기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새롭게 규정한다. 나아가서 인간과 사물, 그리고 지구와 천체는 모두 ‘활동운화(活動運化)’하고, 이것은 기(氣)의 본성이 본래 그러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가령 지구의 자전에 의해서 지구에 사는 모든 존재는 항상 회전하고(運) 있다(다만 우리가 그것을 느끼고 있지 못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서구 근대의 자연과학자들, 가령 갈릴레이나 뉴튼이 생각한 ‘회전하는 물체’로서의 지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최한기는 지구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활동(活動)’한다고 보기 때문이다(아니 인간도 지구와 마찬가지로 ‘활동’한다고 말하는 편이 좀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활동’은 현대철학적 개념으로 말하면 ‘행위성(agency)’ 개념과 상통한다.

더 나아가서 최한기는 이 세계의 활동운화를 세 차원으로 나눈다 - 우주운화(宇宙運化), 인민운화(人民運化), 기용운화(器用運化). 여기에서 우주운화는 자연 세계의 기화 과정을 가리킨다. 가령 사계절이 바뀌고 밤낮이 교대되며 밀물이 들어오고 썰물이 나가는 현상을 말한다. 그리고 인민운화의 인간사회 영역이다. 대표적인 예가 정치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기용운화’는 도구(器)의 사용(用)에 의해 생기는 기의 변화를 말한다. 여기에서 ‘도구’는 특히 인간에게 편리함을 가져다 준 산업혁명 이래의 과학기술을 가리킨다. 최한기는 이것도 기화를 일으킨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상의 세 차원의 운화를 ‘삼기운화(三氣運化)’라고 명명하고, 이것이 하나로 어우러진 통합적 운화, 즉 ‘일기운화(一氣運化)’를 탐구하는 것이 ‘기학(氣學)’이라고 하였다.

최한기 기학, 인류세 실학의 가능성

이것은 인류세 시대에 대단히 중요한 통찰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인류세란 인간의 산업활동에 의해 야기된 인위적인 기후변화를 가리키는데, 근대인들은 인간의 산업활동(즉 과학기술의 사용)이 대기의 변화를 일으키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인류세의 인간을 ‘지질학적 행위자’로 규정한 과학사가 나오미 오레스케스의 다음과 같은 말로부터도 확인할 수 있다.

“여러 세기 동안 과학자들은 지구과정(earth process)이 너무 거대하고 강력해서 우리가 그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지질학의 기본 교리였다. 인류의 시간대는 지질학적 시간의 광대함에 비하면 하찮고, 인간의 활동은 지질학적 과정의 힘에 비하면 보잘 것 없다. 한때는 그랬다. 그러나 더 이상은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많은 나무를 자르고 수십억 톤의 화석연료를 태우면서 이제 우리는 지질학적 행위자(geological agent)가 되었다.”(Naomi Oreskes, “Scientific Consensus on Climate Change”, 2004)

이에 의하면, 과학자들은 인간의 산업활동이 지구의 운화에 영향을 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것은 지구의 규모가 너무나 거대하고, 거기에 비하면 인간의 활동은 매우 하찮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학적 관점에서 생각하면, 인간의 산업활동(기용운화)도 기화를 일으키고, 그것은 자연의 기화(우주운화)와 어우러져 하나의 ‘일기운화’를 이루고 있다.

이렇게 보면 기학은 인류세 시대에 요청되는 철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나아가서 오레스케스가 말한 ‘지질학적 행위자’는 기학의 용어로 바꾸면 활동기화하는 ‘기화적 인간’으로 표현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기학은 현대철학과의 대화가능성도 풍부하다. 역으로 기학은 인류세철학의 관점에서 재해석될 여지가 충분하다. 바로 이런 사상적 자원을 실학자들에게서 발굴하는 작업이야말로 21세기의 실학이, 특히 철학으로서의 실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아닐까? ■ 글쓴이 : 조 성 환 (원광대 철학과 교수)

‘빛의 혁명’과 조선후기 실학 - 글쓴이 김용흠

우리는 지난 2017년에 이어서 올해 두 번째로 현직 대통령을 탄핵하여 감옥에 보냈다. 그 과정에서 영하의 추운 날씨를 무릅쓰고 수많은 국민들이 시위에 나서서 ‘이게 나라냐?’고 외쳤다. 국민이 선거로 뽑은 대통령이 극소수 극단주의자들의 이익만을 추구할 뿐 제대로 자기 역할을 다하지 못하여 국가가 위기에 직면하였다는 인식에서 나온 일이었다.

국가적 위기 극복, 그 힘의 원천은?

그런데 이 사건에 참여한 사람들도, 이 사건을 분석하는 사람들도 이러한 힘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짚어내지 못한다, 그냥 막연하게 1919년 3‧1 운동과 독립운동을 거론하다가 대개는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멈춘다.

물론 3‧1 운동은 동학농민운동과 그 맥락이 닿아 있고, 둘 다 세계사에서 보기 드물게 우리 민족의 역량을 과시한 사건이었으므로 빛의 혁명의 원천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동학농민운동은 어디서 연원한 것일까?

여기서 우리 인식의 역사적 지평이 전근대와 단절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느낀다. 서양 문화와 사상의 압도적 위세 앞에서 전근대 역사의 존재와 의의를 스스로 평가절하한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이러한 인식의 지평이 문제가 있다고 맨 먼저 분명하게 자각한 것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이었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은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전락한 어느 나라 어느 민족에게서도 보기 어려울 정도로 장기간에 걸쳐서 지속성을 갖고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독립운동에 투신한다는 것은 자신이 이전에 누리던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독립운동가들을 지배한 사상 역시 서구 정치사상과 문화였는데, 그 결과는 독립운동의 분열이었다.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로의 분열과 갈등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민족의 독립이라는 목표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분열은 무의미하고 비효율적이라는 반성은 조직의 차원에서 신간회나 민족유일당운동 등으로 바로 나타났다.

역사 단절·서구주의·분단에 갇힌 인식의 지평

그런데 문제는 일제로부터 독립한 이후에 건설할 새로운 국가는 어떤 국가이어야 하는가라는 신국가건설론(新國家建設論)에 있었다. 1930년대 들어서 서구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국가는 미국이었고, 사회주의를 대표하는 국가는 소련이었다.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은 이들 서구를 대표하는 국가가 액면 그대로 새로운 독립 국가의 모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주목하게 된 것이 다산 정약용과 그의 저술이었으며, 이러한 인식이 다산의 저술을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로 간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서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의 중요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즉 일본 제국주의 지배를 벗어나 독립을 달성한 이후 우리 민족이 추구해야 할 새로운 국가는 서양의 사상과 제도만을 일방적으로 추종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것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이 모든 것을 바쳐서 얻은 새로운 인식의 지평이었고, 이후 해방 정국에서 대중적으로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어서 전개된 분단과 전쟁, 그리고 냉전체제는 우리 민족에게서 이러한 인식을 말살하는 과정이었다.

정약용은 환갑을 맞이한 1822년에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면서 스스로 묘지명을 지어 두었는데, 여기서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를 ‘일표이서(一表二書)’라고 이름붙이고, 그것을 관통하는 주제가 ‘신아구방(新我舊邦)’이라고 밝혔다.

이것은 오늘날 학문에 비추어 본다면 ‘국가론’의 범주로 간주할 수 있는데, 그는 이것을 저술하기에 앞서 먼저 육경사서(六經四書)로 대표되는 유학 경전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정리하였다. 즉 일표이서에서 전개된 그의 국가론은 수천 년간 내려온 동아시아의 지적(知的) 전통을 비판적으로 정리한 위에서 나온 것이었다.

실학, 민중 신뢰와 특권 포기 위에서

오늘날 우리는 정약용의 사상을 실학(實學)의 범주에서 이해하고 있다. 조선후기 실학은 왜란(倭亂)과 호란(胡亂), 즉 양란(兩亂)을 전후한 시기의 국가적 위기를 배경으로 삼아서 등장하였다.

조선왕조 국가는, 중세 국가로서는 드물게 주자학(朱子學)이라는 사상을 국정교학(國定敎學)으로 표방하면서 국가를 경영하려고 하였으므로 주자학이 원산지인 중국보다도 더욱 정교한 형태로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선조(宣祖)대에 이르면 후대에 ‘목릉성세(穆陵盛世)’라고 칭할 정도로 기라성 같은 주자학자들이 등장하였다.

그런데 양란으로 인한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였다면 그 사상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은가?

당시 뜻있는 관인(官人)‧유자(儒者)들은 국가가 직면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주자학은 물론 양명학(陽明學)‧노장학(老莊學)‧서학(西學) 등 당대의 모든 사상과 학문을 검토하고, 당시의 현실적 모순을 타개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리하여 대동(大同)과 균역(均役), 그리고 탕평(蕩平)이라는 대원칙 아래에서 다양한 국가 구상을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당시의 지배 계층이었던 양반 지주가 스스로의 기득권을 제한하거나 포기하지 않으면 국가의 위기를 타개할 수 없다는 절박한 현실 인식의 결과였다. 조선후기 실학자들 역시 양반 지주 계급 출신이었지만 자신의 사회경제적 특권을 내려놓는 제도 개혁안을 제출하였다는 점에 실학의 중요한 특징이 있었다.

여기에는 당시 직접 생산을 담당하면서 성장하고 있던 기층 민중의 역량에 대한 믿음과 기대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19세기 말에 발생한 동학농민운동은 바로 이러한 흐름 위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결국 조선후기 실학은 이러한 민중의 역량에 대한 신뢰 위에서 국가의 위기를 배경으로 삼아서 등장하였으며, 동아시아의 국가 경영의 전통에 입각하여 이전까지의 학문과 사상을 집대성하여 성립된 것이었다.

실학, 동아시아 국가 경영의 지적 전통에 입각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이 독립 이후의 신국가 건설을 구상하면서 다산 정약용에 주목하게 된 것은 이를 바탕으로 서양의 정치사상과 제도가 노출한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는 문제의식에 도달하였음을 보여준다.

중국과 우리나라는 서양과 다르게 수천 년에 걸쳐서 집권국가(集權國家)를 연속적으로 발전시킨 역사적 경험을 축적하여 왔다. 중국에서 수많은 국가들이 이합집산하면서도 통일 제국이 반복적으로 등장하여 연속적으로 발전하였듯이, 우리 역시 신라-고려-조선으로 중세국가가 연속성을 갖고 발전하였다.

그 과정은 생산력 발전 단계에 맞추어 국가가 계급 갈등을 조정하고 완화시킬 수 있는 사상과 제도를 발전시켜 온 과정이기도 하였다. 조선후기 실학의 국가론은 그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의 주목을 받았지만 이후 분단과 전쟁, 냉전체제가 이어지면서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2017년의 촛불 혁명과 2025년의 빛의 혁명은 우리 민족의 뇌리에 잠재되어 있던 바로 이러한 의식이 국가의 위기를 만나 표출된 사건이었으므로, 우리의 현실에 적합한 국가의 형태를 만들어내야만 성공할 수 있다. 그것은 대동과 균역, 그리고 탕평의 연장선상에서 국가 구성원 모두가, 계급과 계층, 민족과 성별을 넘어서 행복하고 보람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국가여야만 한다.

실학, 역사적 상상력의 풍부한 원천으로

아직도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서양의 정치사상과 제도는 이에 대한 분명한 방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미국과 유럽 등 서구 국가들은 스스로 민주주의 전통을 부정하고 퇴행을 거듭하고 있다. 여기에 조선후기 실학이 시대를 뛰어넘어 21세기에도 검토해야 할 대상으로 떠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된다.

21세기 들어서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선진국에 진입하였다. 그에 발맞추어 K-Pop과 드라마‧영화 등이 전세계를 열광시키고 있고, 현재 우리나라가 선진국이라는 경제적 지표는 차고도 넘치는데, 우리 국민들은 스스로 선진국 국민이라는 자부심을 갖는 것을 주저하고 있다. 드디어 노벨문학상 수상자도 배출하였지만 왠지 허전한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 공백은 서구의 사상과 제도의 한계를 넘어서 우리만의 독자적인 정치사상과 제도를 창출해야만 메워질 수 있다. 조선후기 실학은 그것을 위한 역사적 상상력의 풍부한 원천이 될 것이다. ■ 글쓴이 : 김 용 흠 (연세대 국학연구원)

다산 정약용은 누구인가

瓢蟲

不朽의 古典에서 찾은 智慧와 心灵, 역사적 敎訓과 省察에서 옛글의 향기에 취해 사랑에 빠지게 되었음을 밝히는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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