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란 무엇인가?

 공부란 무엇인가?


배우고 때맞춰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때맞춰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학이시습지 不亦說乎 불역열호)

공자가 ‘학’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다는 점은 ‘학’이라는 단어가 『논어』 전체에 걸쳐 65번이나 상용된다는 사실로부터도 확인된다. ‘군자는 먹는 일에 배부름을 추구하지 않고, 거처에 있어 편안함을 추구하지 않고, 일 처리에는 기민하되 말하는 데는 신중히 하고, 도가 있는 사람에게 나아가서 옳고 그름을 바르게 가린다. 그러하면, 배움을 좋아한다고 할 수 있다.’

『논어』 첫 구절의 궁극적인 신비는 배운다는 일의 호소력을 다름 아닌 그것이 유발하는 기쁨에서 찾았다는 데에 있다. “배우고 익히면 돈이 되지 않는가” “배우고 때맞춰 익히면 존경받지 않는가” “배우고 때맞춰 익히면 미남미녀를 만날 수 있지 않은가”라고 말하는 대신 “배우고 때맞춰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라고 말하는 것이다. 배움이 가져다주는 효용 때문에 지겨운 공부를 참아가며 해온 많은 이에게 이 언명은 놀랍게 들릴 것이다.

공부가 외적인 성취의 수단으로 전락할 때, 그 공부에 기쁨은 없다. 우리는 해야만 하는 일은 다 하기 싫다. 그러나 우리는 뭔가 하고 싶다. 일 빼고. 즉 수단화되지 않은 활동에 우리는 희열을 느낀다. 그래서일까. 경제적 불안함에도 불구하고 대학원에 진학해 소위 ‘순수’ 학문에 매진하려고 하는 학생들은 대개 수단화된 공부에 환멸을 느낀 이들이다.

“왜 공부를 하려고 합니까?”라는 질문에 그들은 다움과 같이 대답한다. “공부하는 순간이 좋아서요.” 이러한 대답은 공부하는 순간이 주는 기쁨에 충실하다는 점에서 『논어』의 첫구절을 닮았다. … 공부에는 다른 일에는 없는 특유한 매혹이 있음을 시사한다. 어떤 외부적인 목적에 대한 수단으로 전락하지 않은 공부를 할 때 우리는 비로소 ‘배우고 때맞추어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논어』의 첫 구절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의 작가 파스칼 카냐르(Pascal Quignard)는 『은밀한 생』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배우는 것은 강렬한 쾌락이다. 몇 살을 먹었든 간에 배우는 자의 육체는 그때 일종의 확장을 체험한다. 즉, 문이 없던 곳에서 갑자기 문이 열리고, 문 자체와 함께 육체가 열린다.”

그렇다면 쾌락이 사라진 세계는 어떠한가? 배움의 쾌락이 사라진 그 사막 같은 세계를, 프랑스 작가 앙투안 볼로딘(Antoine Volodine)은 『미미한 천사들』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나는 학교를 그만두기로 결심한 터였다. 공부가 점점 싫어졌다. 이제는 새로운 분야를 익히는 게 잘되지 않았고 애초 갖고 있던 지식이 개선되지도 않았다. 이런 식이다. 갑자기 학습욕구가 사라지고, 호기심이 무뎌지며, 노쇠가 시작되지만 그게 슬프지도 않은 것이다.”

『논어』가 겪는 가장 극적인 운명은 과거시험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의 텍스트가 후대에 이르러 사회의 엘리트를 뽑는 시험과목의 일부가 됐다는 것이다. 즉, 『논어』가 과거시험 과목의 일부가 되면서 배움의 정치적 동학에 적극적으로 휘말리게 된 것이다. 세속적인 목적을 염두에 두지 않은 배움의 기쁨을 설파하던 텍스트가 세속적 성공의 필수과목이 됐다는 것은 동아시아 문화사의 아이러니 중 하나다.

이리하여 한때 배움의 기쁨을 안내하던 『논어』의 첫 구절은 과거시험 합격을 위해 외워야 하는 대상이 됐으며 모범답안과 함께 돌아다니는 신세가 됐고, 결국에 가서 배움의 희열은 잃는 과정에 일조한다. 이러한 『논어』 첫 구절의 운명은 오늘날 고전 읽기가 겪고 있는 비극적 운명과 닮았다.

- 김영민(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배움의 기쁨을 설파한 『논어』 첫 구절의 운명, DBR, 2019.01(제264권), pp. 134~140

공부란 무엇인가 / 저자 : 김영민

“삶을 모욕하지 않기 위해”

‘꼰대 담론’이 퇴치한 것은 꼰대뿐만이 아니다. 꼰대로 몰릴까 겁내는 잠재적 스승까지도 함께 없앴다.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에서 김성우, 엄기호 교수는, 교과서에 나오지 않지만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 꼭 필요한 지식과 깨달음이 그간 사회의 선배와 스승들을 통해 공짜 수업의 형태로 전해져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꼰대’, ‘진지충’, ‘선비’ 같은 단어들의 등장 이후 진지하게 삶의 정수를 말하는 사람들은 많이 사라졌고, 우리는 자유의 영역을 조금 넓힌 대신 공짜 교육의 기회를 잃는 중이다.

그래서 김영민 교수의 이 책이 반갑다. 이 책은 먼저 공부하며 살아가는 자로서 인생의 화양연화를 낭비할지도 모를 이들을 염려하며 쓴 글의 모음이다. 그는 더 나은 인간으로 살기 위한 공부의 필요성과 삶의 태도, 공부의 과정 속에서 취해야 할 자세를 말한다. 책소개를 여기까지만 읽고 ‘진지충’을 피해 도망하려는 이들에게, 우선 딱 한 챕터만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왜냐면, 웃기기 때문이다. 분명 진지한 내용은 맞는데 자꾸만 낄낄대게 된다. “불온한 생각을 어디엔가 지뢰처럼 숨겨놓기 위해서라도 당대의 관습과 기대를 숙지하고 있을 필요가 있다.”는 책 속 문장처럼, 그는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젊은 세대들에게 통할만한 유머 사이에 버무려 놓았다. 시니컬한 유머 뒤엔 정신의 척추 기립근을 세워주는 명료한 중심이 있다.

선배와 스승의 공짜 교육이 사라지고 있는 사회에서, 재밌지만 엄중하게 올곧은 방향을 일러주는 이 글들은 귀하게 느껴진다(물론 이 책도 공짜는 아니다). 무엇보다 그의 말들이 한가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무섭도록 냉정한 현실 인식 때문이다. 지나치게 과열되었지만 애초에 불공정한 이 세계에서 노비가 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다 결국은 시시한 인간이 되고 마는 우리를 직시하며, 그는 인간의 변화를 가져올 공부의 필요성을 말한다. 삶을 모욕하지 않기 위해 배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엔 설득당할 수밖에 없다.

산책의 낭만 공부란 무엇인가 김영민

“이 수업은 여러분들의 지적 변화를 목표로 합니다” – 김영민의 『공부란 무엇인가』

공부의 길을 가려면 입시 공부에서 벗어나 진정한 배움을 논해야 한다. 이 책은 넓은 의미에서 공부가 무엇인지 탐색한다.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글쓰기, 토론, 배움의 의미를 밝히며 입시나 취업 공부가 아닌 ‘진짜’ 공부를 이야기한다. 딱딱할 수 있는 주제를 작가 특유의 문체와 이야기로 재치 있게 풀어냈다. “탁월함이라는 별빛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공부란 과연 무엇인지 같이 따라가 보자.   

작가 김영민은 하버드 대학교에서 동아시아 사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동아시아 정치사상사, 비교정치사상사를 연구하며 현재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의 사설 <추석이란 무엇인가>는 많은 독자들의 공감을 얻었고 다른 책으로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가 있다.

1부 - 지적 성숙의 과정

“상대가 사용하는 단어의 정확한 뜻을 물고 늘어지다 보면, 상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죄송합니다. 오늘치 인내력이 바닥났습니다. 다음에 다시 찾아주십시오. 철학자들은 일찍이 말한 바 있다, 명료함은 사람들을 화나게 한다고”

명료함은 소통의 기본 요소다. 물론 모든 의사소통에서 명료함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학술 담론에서 이를 빼놓을 수 없다. 예를 들어 국가, 정부, 사회, 공동체 같은 단어들은 유사하지만 다른 단어다. 이들을 일관된 기준 없이 글 또는 대화에서 사용한다면 큰 낭패를 보게 된다. 학술장에서 명료함 없이 내 주장을 내세우면 상대방은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남기 때문이다. 반대로 명료함 대신 모호함을 일부러 사용하는 자들도 있다. 이들은 보통 정치인이거나 예술인이다. 이들에게 모호함은 무기가 되어 상대에게 해석 작업을 넘긴다. 정치인은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서, 예술인은 추상성을 내세우기 위해 모호함을 이용한다. 즉 여러분이 문학을 하거나 정치인이 될 것이 아니라면, 교수님에게 제출해야 하는 과제를 하고 있다면 모호함은 잠시 넣어두자.    

“말이 재정의되는 일은 한 사회의 마음이 변화하고 있다는 표시이기도 합니다.”

명료함을 이루기 위해서는 개념 정의가 요구된다. 저자는 대머리를 예로 든다. 대머리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가령 ‘반짝이는 머리’로 정의한다면 이는 대머리의 정의가 아닌 단순한 비유일 뿐이다. 만약 ‘머리털이 적은 상태’로 정의한다면 얼마큼 적어야 대머리로 부를 수 있는지에 대한 과제가 여전히 남는다. 이렇게 가다 보면 누군가 ‘대머리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누군가 그를 대머리라고 불렀을 때 대머리로 간주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가 당연히 안다고 생각하는 개념도 언제든 정의가 바뀔 수 있음을 함의한다. 저자는 사회 다수가 어떤 관점으로 보는지에 따라 개념은 언제나 재정의될 수 있다고 밝힌다. 

“세상은 자기 희망대로 단순화하지 않았을 때에야 비로소 그전까지는 보이지 않던 문제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세상을 단순화해서 보는 것도 위험하다. 사람들은 대상을 직관적으로 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세상은 이리 단순하지 않다. “세상 속에 산다는 것은 모순, 긴장, 혹은 혼란 속에 사는 것이다.” 따라서 정교함과 개념 정의를 끝냈다면 경험적 지식을 쌓아야 한다. 이로 하여금 모순으로 가득 찬 현실을 배우고, 이를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면서 삶을 기획하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다.

2부 - 무용해 보이는 것에 대한 열정

“지식 탐구를 통해 자신의 어떤 부분이 달라지는가? 지식이 깊어지면, 좀 더 섬세한 인식을 하게 된다. (중략) 대상을 섬세하게 판별하게 되는 일이 꼭 축복만은 아니다. 그에 수반하는 저주도 만만치 않다. 안목이 밝고 섬세해져 대상을 보다 선명하게 보게 되면, 그간 보지 못했던 아름다움도 감각할 수 있게 되지만, 그간 몰랐던 더러움도 시야에 들어오게 된다.”

섬세함은 경험 혹은 지식을 수반한다. 한국인은 태어나고 자라면서 동양인을 구분하는 능력이 있지만 서양인은 그렇지 못하다. 우리도 백인을 보면 유럽 사람인지 미국 사람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처럼 어떤 대상에 대해 섬세한 인식을 기울이는 작업은 고되다. 우리는 살아가며 자신이 매진하는 분야에서 섬세함을 얻기 위해 분투한다. 반대로 인문학을 공부하지 않는 사람은 사회학, 철학, 정치학을 특정 짓지 못할 것이고, 게임을 하지 않는 자는 아이템이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없다. 타자의 영역에서 “섬세함이 왜 필요한데”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나의 시선에서 무용해 보일지라도 이를 무시할 필요는 없다. 앞서 말했듯 사회는 항상 변화하고, 이에 따라 개인의 시선도 변화하기 때문이다. 서로 비교하는 것을 그만두고 각자 분야에서 섬세함을 갈고 닦자. 사람들은 무용해 보이는 것들 속에서 행복과 동력을 얻으며 살아가는 존재이니까. 만일 당신이 이런 질문을 받았다면 라인홀트 메스너(등반가)의 말을 떠올리자. “그렇게 묻는 당신의 인생은 무슨 의미가 있나요?”

“결핍으로 고통받기는 했지만, 결핍이라는 것을 아예 모르고 사는 인생이고 싶지는 않았다고 나직하게 중얼거릴 수 있기를 바란다.”

<공부하는 생애 주기>에서는 작가가 바라는 삶을 풀어냈다. ‘어릴 땐 존재한다는 것 자체만으로 행운이 가득하기를’, ‘청소년기에는 타고난 육체적 역량을 펼쳐보기를’, ‘외국어를 공부하고 한문이나 라틴어 같은 희소한 문자도 배워보기를’,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운전, 요리 등 자격증을 따보기를’, ‘기초체력을 틈틈이 기르기를’, ‘대학에 들어가서는 상대방을 설득하고 설득당할 줄 알기를’, ‘명강의를 찾아 들어보기를’, ‘엄하고 깐깐한 교수를 한 번은 만나기를’, ‘중년이 되어서는 내가 가진 결핍을 받아들여 보기를’, ‘노년이 되어서는 나보다 어린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자세를 가지기를’.

끝없는 배움의 길에서 방황하지 않기를 소망한다.

3부 - 질문과 맥락 만들기

“여러 경험과 생각이 쌓여서 하나의 성체를 이루고 나면, 그 성 내에는 일정한 온실 효과가 발생하여, 이런저런 입체적인 잡생각이 추가로 생겨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일견 별로 관계없어 보이는 생각과 경험들을 연결하기 위해서는 용기라는 덕목이 필요하다.”

수동적인 공부는 재미있을 수 없다. 어떤 목적을 위해서가 아닌 내가 원하는 공부를 하자. 하찮고 보잘것없어 보여도 괜찮다. 그럴 여유가 없다면 수동적인 공부에서 내가 즐길 수 있는 것을 찾아보자. 독서를 해도 좋고, 내 분야를 깊게 파거나 새로운 학문에 빠져봐도 좋다. 흥미를 끄는 공부는 지속하기 쉽다. 덧붙여 일단 시작하자. 공부는 하기 전이 어렵지, 막상 시작하면 크게 힘들지 않다. 겪어보지 않았는가?

“책은 사회와 자아의 중간에 있다. 사회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 독서에 몰입할 수도 있고, 자아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 책을 읽을 수도 있다.”

책을 읽었다면 서평을 쓸 수 있다. 과제로 서평을 받으면 학생들은 난감해한다. 12년 교육과정 동안 독후감을 써봤지, 서평은 생소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고 감상과 느낀 점을 작성하는 것이 독후감이라면, 서평은 이를 쓰되, 책에 대한 분석과 통찰을 녹여내야 한다. 추천사와는 다르게 책에 대해 비판할 소지가 있다면 여지없이 비판하고 평가도 내려야 한다. 다음은 서평을 쓰는 방법이다.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중심으로 내용을 정리한다. 책을 요약하면서 작품의 주제, 구성 등을 살펴본다. 좋은 질문을 떠올리며 이야기 속의 의미를 밝혀도 좋다. 설득력 있는 문체로 잘 그려냈다면 글 완성이다.

4부는 토론에 대하여, 5부는 현대 사회 속 공부의 의미를 담았다. 마지막으로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한 독자들에게 저자는 휴식을 주제로 글을 마친다.

“마지막 수업 주제는 휴식입니다. 산악인 존 크라카우어는 어떤 바보라도 정상에 오를 수 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살아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공부의 길에서 살아 돌아오는 일은 중요합니다.”

“이것이 삶이었나요? 이미 다 지난 일이군요.”

서평끊임없이 배우는 삶을 꿈꾸며《공부란 무엇인가 / 김영민》


끊임없이 배우는, 성장할 수 있는 삶을 꿈꾸며《공부란 무엇인가 / 김영민》

 예전에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과학자'가 굶어죽고 '공학자'가 살아남는다고. 그 말을 들었을 때 웃어 넘기거나 반발할 수 없었던 이유는 내가 순수 학문을 전공한 '과학자'에 가까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취업을 앞두고 보니 자연 과학 계열보다 공학 계열의 취업률이 막강히 높았다. 취업률이 학문의 수준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 대학은 대부분 '취업률'로 평가된다. 그나마 배운 걸로 먹고 살 수 있다는 사실이 변변찮은 위로가 되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내 전공과 잘 맞는 편이여서 4년 내내 즐겁게 공부할 수 있었다. 막상 대학에 와서 공부 해보니 전공이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친구들의 고민을 상담 해주면서 내 상황에 더욱 감사했던 것 같다. 하지만 우리나라 대부분의 학생들은 자신의 흥미나 적성보다 취업과 관련된 미래성이나 성적에 맞춰 대학을 간다. 즐겁게 공부해보는 경험이 드물 수 밖에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

  이 책은 '공부'에 대한 저자의 신념과 사상이 진하게 묻어나는 글을 모은 것이다. '공부 '라는 주제만으로 이렇게까지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꽤 흥미로웠다.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면서 오랜만에 공부하는 것에 용기를 얻기 위해 선택한 책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용기는 얻지 못했다. 이 부분은 마지막 '아쉬운 점'에 자세히 다루겠다. 읽어나가면서 성숙하게 나이 들기 위해서라도 공부의 끈을 놓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공부하는 삶

종교인이나 사기꾼을 제외하고는, 자기 일상이 지향하는 삶의 목적에 대해서 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8쪽

섬세함은 사회적 삶에서도 중요하다. 섬세한 언어를 매개로 하여 자신을 타인에게 이해시키고 또 타인을 이해하고자 하는 훈련을 할 때, 비로소 공동체를 이루고 살 수 있다. -84쪽

매사에 체력은 기본이지만, 학문의 길에서 체력은 특별히 주요하다. 학문은 장기 레이스이기 때문이다. 열정을 오래 유지할 체력이 없으면, 소기의 성과를 낼 수 없다. -98쪽

먹어도 살이 잘 안 찌는 체질 같은 건 없을지 몰라도, 공부해도 지식이 잘 안 찌는 체질은 있다. 자발성이 장착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 바로 그렇다. 아무리 지식을 퍼먹어도 머리에 많은 것이 남지 않고 다시 밖으로 빠져나간다. -125쪽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이 관습적이 되기 쉬운 이유는, 관습에 의존할수록 에너지 소비가 덜하기 때문이다. -135쪽

  우리나라와 같이 학구열이 높은 곳에서 어릴 적부터 공부 해야 한다는 말을 주구장창 들으면서도 '왜?'라고 묻지 못했다. 당연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며 저자의 생각을 들여다보는 동시에 '공부를 왜 해야 하는가?'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계속 던졌다. 그 자체만으로 자극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학문적인 공부도 중요하지만 긴 인생을 성숙한 어른으로 살아가기 위한 공부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되겠다는 다짐을 가장 많이 했다. 올바른 말과 행동, 편협하지 않은 사고, 적절한 비판과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

 그러기 위해서는 인문학에 대한 공부가 필요할 것 같다. 인문학 공부는 대학에 가지 않아도 배울 수 있기 때문에 부담도 덜 했다. 역사, 언어, 문화와 같은 다양한 분야를 접하며 과거와 미래를 통찰할 수 있는 안목을 키워나가고, 대화와 소통에 능한 포용력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이 관습적이게 되는 이유가 관습에 의존할수록 에너지 소비가 덜하기 때문'이라는 문구를 읽었을 때 충격적이었다. 내가 경험했던 일들이 하나둘 떠올랐고, 인간이 생각하거나 에너지 쓰는 일을 피할수록 얼마나 뒤쳐지고 답답해지는지 실감했다. 공부하는 삶에는 거창한 이유가 필요하지 않다. 되고 싶지 않은 어른의 모습을 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독서와 글쓰기

이 세상 속에서 산다는 것은 이러한 모순, 긴장, 혹은 혼란 속에서 사는 것이다. 이 세상을 주제로 논술문을 쓴다는 것은 그러한 모순과 긴장과 혼란을 직시하되, 그에 대해 가능한 한, 모순 없는 문장을 사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는 것이다. -40쪽

기초체력을 안 쌓으면 나중에 감기에 자주 시달리듯, 지적 기초를 안 쌓으면 지적 감기에 시달리게 된다. -92쪽

잡념이 많은 인간은 일단 창의적이 될 수 있는 기본 조건을 갖춘 셈이다. 생각 자체가 아예 많지 않다면, 일단 경험을 확대해야 한다. 인간은 대개 대상이 있어야 비로소 생각한다. 새로운 대상을 경험할 수 있는 여행이나 독서가 창의력 향상에 도움이 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133쪽

질문은 연구자뿐 아니라 독자에게도 필요하다. 주어진 정보를 수동적으로 취합하는 데 그친다면, 기억의 방광은 늘어날지 몰라도 지적 갈증은 해소되지 않는다. -164쪽

커피를 마신다는 것이 단지 카페인을 흡입하는 것 이상의 것이듯이, 글을 읽는다는 것은 그에 담긴 주장을 흡입하는 것 이상의 심미적 체험이다. -203쪽

  책을 읽고 내용에 대해 평가한 글을 '서평'이라고 하는데, 사실 내가 초기에 쓴 글은 서평이 아니었던 것 같다. 무조건적인 수용을 기반으로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모든 색상의 빛을 더했을 때 흰색이 되는 것처럼, 무지개빛과 같이 다양한 색상의 빛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너무 많은 것을 수용하기만 하면 결국 흰색이 된다. 아무런 색을 띄지 못한다. 스스로의 색깔에 대해 언제나 고민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늘 '적당히'를 추구하던 내가 나만의 색을 찾는데 도움이 되었던 것이 독서와 글쓰기이다. ​

  독서는 손쉽고 가성비 좋게 타인의 생각을 들여다보거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아주 유용한 방법이다. 글쓰기는 스스로의 생각을 들여다보며 가치관을 확립하고 반성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 2017년부터 단순히 독서에 그치지 않고 책의 전반적인 내용을 추리거나 저자가 추구하는 가치에 대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냥 읽는 것 자체도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지만 확실히 글을 쓰는 과정을 통해 사고를 넓힐 수 있었다. 나의 색깔을 찾고 확립하고 수정해나가기 위해 이 두 가지는 평생에 거쳐 해나갈 일이다. 

  책에서는 올바른 독서의 방향성과 글쓰기의 효과에 대해 알려주며 끊임없이 중요성을 언급한다. 지적 수준의 향상 뿐만 아니라 훌륭한 인성을 가진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도 꾸준히 필요한 활동이라는 것에 확신을 얻었다. 도서 블로거(인플루언서)로 활동하며 저자가 말하는 수준의 서평을 쓰고 있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상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한 자기반성과 자기객관화에는 도움이 되는 활동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다. 나의 색깔을 찾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만약 비슷한 종류의 고민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독서와 글쓰기를 추천하고 싶다.  ​

아쉬운 점

  처음엔 굉장히 흥미로운 마음으로 책을 읽다가 뒷부분으로 갈수록 마지못해 꾸역꾸역 읽어내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하지만 저자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고 싶어서 끝까지 완독하고자 했고, 다 읽은 후에는 진한 아쉬움이 남았다. 그 부분에 대해 솔직하게 써본다. ​

1. 학문을 향한 열정, 현실적인 문제 ​

  이 책을 읽고서 공부로 즐거움을 느꼈던 적이 있었나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대학 시절 원하던 전공을 원없이 공부해봐서 좋았다. (물론 책의 저자는 '학사' 수준의 공부는 진정한 학문이라고 치지 않았지만.) 단순히 학사 시절 경험한 학문이 좋고 재밌어서 지원한 석사 학위, 가게 될 대학교 연구실까지 정해진지 얼마 되지 않아 학문을 포기하고 취업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은 현실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는 학생들이 머리가 좋고 우수한 것에 비해 학문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 석사를 하면서도 생계를 걱정해고 돈을 벌어야 한다. '21세기 현존하는 유일한 노예 제도가 석사'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학생들은 학문을 탐구하고 매혹되어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펼치기 보다 교수의 눈치와 미래 취업, 당장의 생계라는 현실성에 치여 고민한다. 내 절친한 친구도 그런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결국 석사를 '수료'로 끝내고 말았다. 

  책을 읽다보면 저자는 이런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알고 있고 이 부분에 대해 지적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결국엔 학문을 향한 열정은 '공부하고자 하는 이의 의지'에 달린 것으로 정리하는 것 같아서 안타까웠다. 공부에 대한 열정이 있고 권위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현실적인 문제를 조금 더 직시할 수는 없었을까. 저자에게 묻고 싶다. 당신이 말하는 진정한 학문의 즐거움을 느끼며 공부하기에 과연 우리나라의 교육 시스템과 인식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는지. ​

2. 진정한 공부?​

  저자가 말하는 '진정한 공부'는 학사 수준을 넘어선 석사나 박사 학위 이상의 학문을 말한다. 더불어 책의 전반에 거쳐 공부하는 삶이 가치있고 높은 수준의 삶이라 말하는데 (심지어 약간의 비하가 느껴질 정도로 강요하는데) 과연 이 주장이 현실을 반영한 해답이었을까. 그렇다면 그렇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준이 낮다는 것일까. 

  어지간한 노력과 시간을 들이지 않고서 석사나 박사 수준의 학문을 공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과 자원은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석박사 과정을 선택하여 저자가 말하는 '진정한 공부'를 한다는 것은, 삶을 이루는 다른 가치들을 어느정도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다른 가치를 선택해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나 또한 현실적인 문제로 석사를 포기했다. 공부를 선택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의 삶이 괄시 받거나 비하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저자가 이 부분을 풀어낼 때 조금 더 신중했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공부에 수준을 나누어 말하는 전제 자체가 충격적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점점 흥미를 잃는 데 한몫 한 것은, 저자가 말하는 '진정한 공부'가 내가 생각하는 '공부'와 달라서 저자가 말하는 수준 높은 학문의 즐거움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격증 공부를 시작하며 자신감을 얻고자 편 책이었는데 결국 용기를 잃고 말았다. (자격증 공부는 대놓고 공부가 아니라고 했다.) 내 수준이 낮아서 혹은 읽다보니 자격지심이 생겨서 끝까지 완독할 의지가 희미해지기도 했다.

  끝으로 서평을 작성하면서도 계속 고민했다. 책을 읽고 쓰는 서평에는 읽는 이의 경험이 반영되기 마련인데, 저자가 말하는 진정한 공부를 경험해본 적 없는 내가 과연 글을 끼적이는 게 앞뒤가 맞는 일인지 고민됐기 때문이다. 많은 분들이 괜찮게 읽은 책인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는 아쉬움이 많이 남은 책이다. 

공부란 무엇인가?

瓢蟲

不朽의 古典에서 찾은 智慧와 心灵, 역사적 敎訓과 省察에서 옛글의 향기에 취해 사랑에 빠지게 되었음을 밝히는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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