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해람(解纜)과 계람(繫纜) 사이
조각배 띄운 오후 하늘도 쾌청하고
가을 강 바람 쐬니 병든 몸 상쾌하네
단풍과 솔은 멀리서도 빛깔 또렷하고
일렁이는 바위 그림자 듣던 대로 황홀하네
시상이 솟구쳐 글로 다듬기 어려운데
노 젓는 소리에 졸다가도 쉽게 놀라 깨네
뱃전에 기대 풍광 보니 몹시도 흥겨운데
구름 너머 돌아가는 새 가장 마음 끌리네
孤舟解纜午天晴 고주해람오천청
散髮秋江病骨淸 산발추강병골청
歷歷楓松遙辨色 역력풍송요변색
依依巖溆舊聞名 의의암서구문명
詩緣腹藁篇難定 시연복고편난정
睡被鳴橈夢易驚 수피명요몽이경
欹枕所過渾漫興 의침소과혼만흥
出雲歸鳥最關情 출운귀조최관정
- 신유한(申維翰, 1681~1752), 『청천집(靑泉集)』 「오후에 징파강에 배를 띄우며[午發澄波江]」
이 시는 신유한(申維翰)이 1739년 59세의 나이로 연천 현감으로 부임하여 지은 작품이다. 환갑이 다 되도록 말단 관직과 지방 수령 자리를 전전하다 이제 또 척박한 땅의 수령이 되었으니 달가운 벼슬살이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울울한 심사를 달랠 수 있는 안식처가 바로 징파강이었다.
징파강은 임진강의 지류로 한탄강과 합류하기 이전에 북쪽에서 흐르는 강이다. 안협, 토산, 삭령, 연천을 거쳐 마전 남쪽에서 임진강 본류와 합류하는데, 삭령의 우화정(羽化亭), 연천의 웅연(熊淵)과 징파 나루가 경치가 좋았다. 신유한은 2월에 부임하여 6월엔 웅연을 유람하였고 한 달 뒤 징파 나루를 유람하며 이 시를 지었다. 음력 7월 보름 선유(船遊)의 경험을 노래하였으니 딱 요즘과 같은 절기에 지은 작품이다.
하늘도 쾌청하고 바람도 상쾌하니 뼛속까지 시원하다. 축축 늘어지는 여름을 인고하여 가을맞이 유람에 나섰는데 날씨까지 도와주니 이보다 흡족할 순 없다. 가을 강바람의 청량함과 승경을 유람하는 흥분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역력(歷歷)은 또렷한 모양이고 의의(依依)는 일렁이는 모양이다. 멀리서도 또렷이 보이는 나무에 눈이 정화되고 일렁이는 물결에 투영된 바위 그림자는 절벽의 풍광을 더욱 황홀하게 만든다. 상반된 이미지가 혼연히 하나가 되어 서로의 바탕이 된다. 멋진 풍광에 절로 창작욕이 샘솟지만 이내 글로 담기 어려움을 깨닫고 창작을 포기한다. 그저 한가함을 즐길 따름인데 노 젓는 소리에 설핏 잠이 들다가도 또 그 소리 때문에 단꿈에서 깨어난다.
모든 풍광이 아름답지만 하늘 위로 자유롭게 나는 새에 더 마음이 끌리는 이유는 광활한 대자연에 나도 모르게 가슴이 툭 트였기 때문이다. 시선이 하늘로 향하면서 후련한 심정이 극대화된다. 56자의 짧은 시이지만 마치 요즘의 여행 블로그를 보는 것처럼 매 장면이 선명하고 생생하다.
신유한이 가을 강에 배를 띄운 것은 소식(蘇軾)의 유람을 본뜬 것이다. 소식은 황주(黃州) 유배 시절, 임술년 7월 기망(旣望)과 10월 보름에 장강(長江)의 적벽(赤壁)을 유람하고 이를 불후의 명작 「전적벽부(前赤壁賦)」와 「후적벽부(後赤壁賦)」로 남겼다. 그 영향으로 우리나라에서도 7월 16일과 10월 15일에 뱃놀이를 즐기는 문화가 유행하였는데, 전국 각지에서 배를 띄우고 술을 마시며 시를 읊었다. 임진강은 그중에서도 인기가 많았던 장소로 그 배경에는 적벽이 있었다.
임진강 유역은 주상절리가 발달하여 강변을 따라 병풍처럼 늘어선 절벽이 참으로 장관이다. 석양을 받은 절벽이 붉은 빛을 발해서인지, 절벽의 돌단풍이 가을에 붉게 물들어서인지 임진강 주상절리 절벽은 적벽으로 불렸다. 소동파가 장강 적벽에서 조조의 적벽을 떠올렸듯이 조선의 풍류객들은 임진강 절벽에서 소동파의 적벽을 떠올렸다. 신유한도 연천 현감으로 있으면서 적벽 풍광에 꽤나 매료되었다.
시에서는 호젓한 정취를 즐긴 듯 보이지만 이날 행차는 꽤나 성대하였다. 신유한은 아들을 대동하였고 연천의 박천휴(朴天休)와 그 자제들이 참석하였으며 아전과 하인들이 동원되었다. 15일 오후에 징파 나루에서 배를 띄워 휴류탄(鵂鶹灘), 유탄(楡灘) 등을 거쳐 한탄강과 합류하는 도가미(陶家湄)까지 이르렀다. 해가 진 뒤에는 하선하여 일행들과 회식을 하고 숙박하였으며, 다음 날에도 유람이 이어졌다.
이날의 선유에서 전적벽부가 재연되었다면 3년 뒤 임술년 10월 보름에는 후적벽부의 재연이 이루어졌다. 마침 경기도 관찰사 홍경보(洪景輔)가 관할 지역을 순력하게 되어 당대의 문장가 연천 현감 신유한과 일류 화가 양천 현령 정선(鄭歚)을 불러 뱃놀이를 즐겼다. 이때 행차는 더욱 성대하였는데 수많은 수행원을 거느리고 삭녕 우화정에서 출발하여 연천 웅연에 정박하였다. 이 장면을 정선이 마치 기념사진처럼 「우화등선(羽化登船)」, 「웅연계람(熊淵繫纜)」 두 작품으로 남겼고, 신유한은 「의적벽부(擬赤壁賦)」라는 글로 아름답게 기록하였다. 59세 7월 보름엔 징파강 남쪽을, 62세 10월 보름엔 북쪽을 유람하였으니 신유한은 소동파 적벽을 징파강에 재현하는 일에 참으로 진심이었다고 할 만하다.
▲ 『연강임술첩(漣江壬戌帖)』에 실린 정선의 「웅연계람」과 신유한의 「의적벽부」(1742, 개인 소장)
‘해람(解纜)’은 닻줄을 푼다는 말로 출항을 의미하며 ‘계람(繫纜)’은 이 반대말로 정박을 의미한다. 모든 여행은 결국 해람과 계람 사이의 항해이다. 일상의 닻줄을 풀고 우연의 세계와 조우하다 다시 일상에 닻줄을 내려 필연의 세계로 복귀하는 것이 여행의 본질이 아닐까. 시에서는 ‘해람’의 공간만을 다루고 있지만 그 ‘등선(登船)’이 ‘등선(登仙)’의 경험으로 치환될 수 있는 이유는, 땅에 발을 내딛는 ‘계람’의 일상이 변함없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삶의 여정도 해람과 계람의 무한한 반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상향의 바다를 향해 닻줄을 풀었다가 현실의 땅에 정박하여 지난 항로를 점검하는 일이 우리의 삶과 매우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나의 배는 어느 바다를 항해하고 있는지, 또는 어느 포구에 정박하였는지 돌아보게 된다. 가을이 성큼 찾아왔다. 시원한 바람과 밝은 달이 모두의 항해를 아낌없이 응원할 것이다. ㅣ 글쓴이 김효동 :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경기 연천 '임진강·한탄강' - 붉은 주상절리 하얀 돌단풍꽃 평화 향한 몸짓
연천 = 글·사진 박경일 기자
*경기 연천의 왕림교에서 내려다본 차탄천의 은대리 주상절리. 여기에 차탄천의 물을 끼고 걷는 트레킹 코스 ‘에움길’이 있다. 수직의 직벽을 이룬 주상절리 협곡 사이로 이어진 오솔길을 따라 물새 떼가 날아오르는 물을 건너가며 걷는 길이다.
삼국시대 이래로 수많은 전쟁이 지나간 땅. 여기는 접적 지역인 경기 연천입니다. 분노와 적의(敵意), 그리고 긴장과 대치. 지금 전방지구는 북한의 잇단 도발과 북폭설로 일촉즉발의 긴장이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아슬아슬합니다. 이런 긴장 속에서 구태여 전쟁의 상흔이 여태 남아있는 접적 지역을 찾아갔던 건 평화에 대한 소망 때문이라고 해두겠습니다. 저마다 해법은 다를지라도 평화를 향하는 마음이야 다들 매한가지 아니겠습니까.
연천은 비릿한 쇳내가 풍기는 거칠고 굵은 것들의 땅입니다. 건너온 역사와 지형으로 미루어보면 연천은 ‘남성적’입니다. 화산 폭발로 이 땅 위에는 시뻘건 용암이 흘러내렸고, 훗날 그 열기만큼 뜨거운 삼국의 쟁패가 있었습니다. 조선으로 건너가는 길에는 고려 왕조의 죽음이 있었고, 조선 왕조시대에 이곳은 말 달리던 사냥터이기도 했습니다. 녹슨 철조망으로 나뉘어 아직도 지뢰가 남아있는 분단의 최북단인 건 말할 것도 없습니다.
벚꽃의 물결이 북으로 밀려 올라가면서, 연천 땅에도 이제 늦은 봄기운이 완연합니다. 민간인통제구역(민통선) 안쪽의 임진강 습지의 버드나무들도 연둣빛으로 물이 한껏 올랐고, 임진강과 한탄강의 주상절리 단애는 돌단풍과 벚꽃의 흰빛으로, 진달래의 붉은빛으로 환합니다. 임진강과 한탄강의 모습은 그저 평화로울 따름입니다.
긴장의 땅에서 번져가는 따스한 봄기운은 상징으로 다가옵니다. 전쟁으로 부서져 뒹구는 것들과 땅에 묻힌 이야기들. 그리고 금단의 공간이 돼서 남아있는 자연. 그 땅에서 만난 평화로운 풍경 하나하나가 새삼스럽습니다. 이쪽의 평화가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던 건 연천 땅에서 문득 마주친 삼각형 지뢰 표지판이, 민통선의 초소가 나누는 경계가 너무나 뚜렷해서 일 겁니다. 뒤늦게 당도한 봄볕이 이리도 환한데, 쇳내 나는 경계 너머의 겨울은 언제쯤이나 물러가게 될까요.
여행이란 무릇 ‘다른 것’을 보는 일. 그렇다면 연천이야말로 특별하다. 생겨난 지형도, 보여주는 경관도 다르고, 경계에 선 긴장감도, 비장한 역사의 무게감도 다르다. 그중에서 가장 특별한 게 한탄강과 임진강이다. 이 두 강이 펼쳐 보여주는 경관은 다른 강과는 ‘완전히’ 다르다.
한탄강과 임진강은 대부분의 유역에서 평지 아래로 푹 꺼져서 흐른다. 드넓은 평야 지대를 잘 드는 칼로 ‘썩’하고 잘라낸 듯한 수직의 벼랑. 강은 그 벼랑의 발치에 있다. 너른 들이 펼쳐진 평야가 갑자기 뚝 잘리고 강물이 저 아래로 도도하게 흐르는 것이다. 양수기가 없던 시절에는 저 아래 강물을 두고도 가뭄에 타들어 가는 논에다 물을 대지 못했단다.
이런 협곡 지형은 강이 흘러가는 연천 땅 어디든 있지만, 보는 이의 입이 딱 벌어지게 하는 곳이 딱 두 곳이 있다. 그중 하나가 임진강변의 미산면 동이리 주상절리다. 동이리 주상절리는 ‘적벽’이라고도 불린다. 벼랑에 물드는 단풍 때문이라기도 하고, 해 질 무렵 기운 해가 벼랑을 붉게 물들여 그렇다는 얘기도 있다.
동이리 적벽은 지도를 앞에 놓고도 잘 알려줄 수 없을 만큼 찾아가는 길이 까다로워서 묻혀 있었던 곳이었다. 그런데 지난해 1월 임진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동이대교가 놓이면서 손쉽게 찾아갈 수 있게 됐다. 적벽은 동이대교 바로 아래 있다. 강물을 따라 일어서 있는 적벽의 높이는 40m에 육박하고, 길이는 자그마치 1.5㎞다. 적벽은 강 돌이 뒹구는 반대편 물가에서 볼 때 가장 압도적이다. 강 건너편에서 직벽을 정면으로 마주 보면 단애를 이룬 직벽이 함락 불가능한 거대한 성곽처럼 길게 늘어서 있다. 비슷한 경관을 가진 다른 곳을 떠올릴 수 없을 만큼 독특하고 장쾌하다. 거대한 직벽은 그 앞에 선 것들을 한없이 작게 만든다. 마주 선 어마어마한 바위벽의 위용, 그리고 그것을 만든 힘에 생각이 가닿기 때문이다.
동이리 적벽 위는 조선 초기에 왕이 신하들과 말 달리며 사냥을 했던 ‘가사평’이다. 질퍽한 진흙땅으로 여기를 걷던 중이 넘어져 흙범벅이 된 가사를 벗어놓고 갔다는 곳, 그러나 땅이 얼어 단단해지는 늦가을부터 초봄까지는 말을 달리기 좋은 땅이었다.
세종은 여기서 2만 명에 달하는 신하와 군사를 이끌고 자주 강무(講武)를 했다. ‘강무’란 군사훈련을 겸한 수렵대회. 수렵은 수단이었고, 강무의 진짜 목적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군사훈련과 군사동원체제 점검이었다.
세종은 가사평 들판에서 신하들과 말을 타고 이 들을 달리면서 화살을 쏘아 들짐승을 잡았다. 강무 행사를 나섰다가 혹한을 만나 병사 26명과 말 70마리가 얼어 죽는 사고도 있었다. 그러나 세종은 병들어 쇠약해지기 전까지 강무를 거르지 않았다. 유교와 성리학에 경도된 문약(文弱)에 빠진 문신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재위 내내 강무를 반대했지만 세종은 완강했다. ‘군대를 상비하는 국가사를 폐할 수 없다’는 게 세종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세종 때 대마도를 정벌하고 여진족을 몰아냈으며 4군과 6진을 설치할 수 있었던 건 이런 대비 덕이 아니었을까.
세종은 건강이 악화해 궁 밖으로 나설 수 없게 된 재위 25년까지 모두 35차례나 강무를 했다. 온몸에 갖가지 질병을 달고 살다시피 했으면서도 풍찬노숙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세종은 강무를 하면서 사냥이나 군사훈련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길 위에서 만나는 촌로에게 옷을 하사했고, 가난한 과부와 고아들에게 쌀을 나누어주게 했다. 나라의 안위를 생각하면서 한편으로 백성들의 삶을 돌봤던 성군의 기록이다. 지도자의 이런 덕목을 필요로 하는 게 어찌 그때뿐일까.
연천에서 협곡지형의 빼어난 경관을 만날 수 있는 나머지 한 곳이 임진강에 합류하는 차탄천이다. 여기를 찾아가는 것도 다리를 짚어가는 게 빠르다.
차탄천의 물길을 건너가는 왕림교. 그 다리 아래 차탄천을 끼고 우뚝 솟은 은대리 주상절리가 있다. 동이리 주상절리가 압도적인 경관을 멀리서 볼 수 있는 곳이라면, 여기 은대리 주상절리는 가깝게 그 위용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동이리도 그렇고 은대리의 협곡지형을 이루는 주상절리도 화산이 뿜어낸 뜨거운 용암 위로 지나간 오랜 세월이 더해져 만들어진 것이다. 시작은 화산폭발이다. 수십만 년 전, 강원 철원과 평강에서 화산이 폭발했다. 분출된 용암은 한탄강 유역을 메우면서 철원을 거쳐 연천, 파주까지 흘렀다. 용암이 급격하게 식는 과정에서 주상절리가 만들어졌고, 그 틈 사이로 강물이 파고들어 깎아내면서 지금의 협곡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왕림교 아래 차탄천으로 내려서면 물길을 거슬러 주상절리 협곡을 따라 걸을 수 있는 트레킹 코스를 만나게 된다. ‘에움길’이다. 이 길은 왕림교 아래 좁은 협곡 가운데에서 물길을 이쪽저쪽으로 예닐곱 번 건너가며 용소까지 이어져 있다. 협곡에서는 주상절리와 판상절리 등 다양한 지형을 볼 수 있다. 게다가 손으로 만져가며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주상절리가 가깝다.
주상절리 틈에는 지금 순백의 돌단풍 꽃이 만개했다. 물가에는 버드나무가 연둣빛으로 물들어 있고 늦게 핀 벚꽃도 진달래도 피어 있다. 길을 걷는 내내 백로며 왜가리, 민물가마우지, 물오리 떼들이 푸드득 고요한 수면을 차고 날아올랐다. 천변 이곳저곳에 쓰레기가 좀 있는 게 거슬리긴 하지만, 비밀스러운 협곡의 청량한 기운을 다칠 정도는 아니다. 왕림교에서 용소까지는 3㎞쯤. 내내 수면 높이와 비슷한 순한 길이라 왕복 1시간 20분쯤이면 넉넉하다.
연천의 비장한 풍경은 접적(接敵) 지역에 있다. 연천에는 북한 땅을 가장 가깝게 바라볼 수 있는 태풍 전망대가 있다. 1991년에 지은 태풍 전망대는 황산리의 비끼산 수리봉(264m) 정상에 있다. 군사분계선과 가장 가까운 최북단 초소가 있던 자리에 전망대를 세웠다.
본래 최북단 초소는 군사분계선 남쪽 2㎞ 지점에 있었다. 그런데 1968년 북한이 철책선을 휴전선 가까이 끌고 내려왔고, 이에 질세라 우리 군도 철책을 끌고 올라갔다. 결국 초소는 휴전선에서 800m 앞둔 곳까지 올라갔고 북한 초소까지 불과 1.6㎞의 거리가 됐다. 그 초소 자리에 태풍 전망대가 들어선 것이다.
태풍 전망대는 지금 리모델링 공사 중이다. 지난달 공사가 시작돼 오는 6월 초에 다시 문을 연다. 공사가 한창인 전망대는 문을 닫았지만, 전망대 들머리인 민통선 내 임진강 평화 습지원까지는 출입할 수 있다. 민간인통제선(민통선) 출입을 통제하는 초소까지 가는 길에 기막힌 풍경의 마거천 습지도 있다.
평화 습지원은 임진강 상류에 홍수조절용 군남댐을 건설하면서 두루미 서식지를 확보하기 위해 조성한 곳. 습지원으로 드는 길목에는 이제야 벚꽃이 터지기 시작했다. 인간의 발길이 한 번도 닿지 않았을 강 건너 습지에는 버드나무들이 연둣빛으로 환하다. 습지원의 평화로운 풍경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건 접적 지역의 긴장과 극적으로 대비되기 때문이다.
습지원 한쪽에는 지난해 5월 개관한 연강 갤러리가 있다. 민통선 내 최초의 예술 공간이다. 주상절리를 테마로 한 대형 사진으로 외관이 꾸며져 있고, 1, 2층 전시장과 지역 농산물을 판매하는 로컬 마켓, 관광객들이 쉬어갈 수 있는 카페테리아로 구성돼 있다. 2층 전시실에는 한성필 작가가 임진강과 한탄강의 주상절리를 대형 사진으로 담아낸 작품이 걸려 있다. 쏟아져 내릴 듯한 기기묘묘한 주상절리의 규모감이 인상적이다.
연천에서 생경하게 마주하는 것들이 어찌 이것 뿐일까. 연천의 임진강 하류 쪽에는 고구려가 주상절리의 직벽을 성벽 삼아 지은 호로고루성이 있다. 임진강의 옛 이름인 ‘호로하(瓠蘆河)’에다 ‘오래된 보루(古壘)’를 붙여 지은 이름이다. 성은 임진강의 폭이 넓어지며 수심이 낮아진 자리에 서 있다. 고대국가의 토성 위에서 치맛자락처럼 펼쳐져 흘러가는 임진강의 모습을 본다. 칼과 창이 맞서던 전쟁의 자리여서였을까, 때마침 봄비가 내려서 그랬을까. 성 위에 올라서 본 임진강의 모습이 서늘하고 비장하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경순왕릉이 있다. 신라 마지막 왕의 죽음이, 지뢰표지판이 걸린 철조망을 뒤로 두고 있다. 선대왕을 강제로 자결시킨 견훤의 선택으로 즉위한 경순왕. 그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신라는 이미 무너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적과 맞설 힘이 없었던 그는 신라를 고려에 순순히 넘겨줬다. 나약한 군주의 비겁한 선택이란 시각도 있지만, 백성들이 무참하게 살육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을 것이었다. 경순왕이 죽자 고려 조정은 상여를 막아섰다. 신라 유민들이 장례행렬을 따라 경주로 내려가려 했기 때문이었다. 소요를 우려한 고려는 임진강을 앞에 둔 도성 밖 80리 거리쯤에 경순왕을 묻었다. 신라 왕릉 중에서 경주 밖의 유일한 왕릉인 경순 왕릉이 연천 땅에 있는 이유가 이렇다.
마지막으로 연천에서 또 한 곳을 보탠다. 조선시대 고려의 왕들을 모셨던 사당 숭의전이다. 고려 왕 4명과 고려 충신 16명의 위패를 모신 숭의전은 임진강변의 그윽한 자리에 있다. 숭의전에서 마음이 갔던 건 고려의 사직보다 길가 언덕의 무덤 한 기였다. 무덤은 숭의전을 관리했던 고려왕조의 후손 왕순례의 것이다.
조선개국 후 고려왕족을 몰살하는 과정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해 공주 땅에 숨어 살던 왕순례. 사소한 다툼 끝에 이웃의 밀고로 고려왕족임이 발각된 그는 죽음 대신 벼락출세를 한다. 조선이 출범하고 60여 년이 지나 체제가 안정되자 조선 왕조는 고려의 왕을 모시는 사당을 세웠는데, 그에게 벼슬과 농토, 노비를 내리고 사당의 관리를 맡긴 것이었다. 출세도 이런 벼락출세가 없었다. 그러나 기고만장한 그는 첩을 두고 방탕한 생활을 하다 결국 쫓겨나고 만다. 한 사람의 죽음과 삶, 은둔과 출세, 그리고 탐욕과 추락이 이제 길가의 초라한 무덤으로 남아 덧없다.
▲여행정보
◇ 연천 가는 길 = 서울외곽순환도로 의정부IC로 나가면 국도 3호선이 의정부와 동두천을 지나 전곡까지 이어진다. 전곡읍에서 372번 지방도로를 따라 어유지리 방향으로 가면 동이리 적벽이 있는 동이대교가 나온다. 태풍 전망대는 공사 중이라 문을 닫았지만 임진강평화습지원과 갤러리까지는 갈 수 있다. 습지원과 갤러리도 민통선 너머에 있어 출입절차를 밟아야 한다. 삼곶리 민통초소 앞에서 신분증을 제시하면 초병이 함께 차에 탑승하는데 민통선 안에서는 줄곧 동행해야 한다. 목적지 외의 지역에서는 차에서 내리는 건 물론이고 정차할 수도 없다. 민통선 안에서는 습지원이나 갤러리 못지않게 임진강의 습지 풍경도 훌륭하니 방문지역에 두루미 관찰대를 포함하는 게 좋겠다.
◇ 여행정보 = 오는 5월 3일부터 7일까지 연천 전곡리 선사유적지와 전곡읍 일원에서 열리는 연천구석기 축제에 맞춰서 찾아가면 좋겠다. 전곡리 유적은 1978년 동아시아 최초로 구석기시대 아슐리안 주먹도끼가 발견된 곳. 이를 계기로 연천은 올해로 25회째 구석기축제를 열고 있다. 학습형 축제인 구석기축제에서는 한반도의 구석기문화를 포함해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구석기문화를 두루 접하고 체험할 수 있다. 대형 화덕에서 구워 먹는 구석기 바비큐가 가장 인기 있는 축제 프로그램. 감자 캐기, 석기로 돼지고기 자르기, 바비큐 굽기 순서로 이뤄진 구석기 바비큐 체험인 구석기어드벤처는 사전예약 후 이용할 수 있다. 일본, 영국, 독일 등 10여 개국의 해외전문가가 참여해 운영하는 세계구석기 체험마을도 흥미롭다.
이밖에 동굴벽화 그리기, 구석기 활쏘기, 어린이 낚시대회, 구석기 체험존 등 체험 프로그램이 다양하다. 비보이 공연, 7080 가족음악회, 어린이노래자랑, 연천 프린지 공연 등 다양한 공연도 펼쳐지고 연천마당에서는 연천 농특산물 장터도 들어선다. 구석기축제추진위원회 031-839-2562 ㅣ <출처> 20117. 4. 19 / 문화일보
연천군 임진강변으로 떠나는 역사여행 … 휴전선에 묻혀진 사연 절절한 현장들
변영숙 여행작가
임진강변 고구려성(호로고루, 당포성, 은대리성)과 신라 마지막 ‘경순왕릉’, 고려 4왕을 모신 ‘숭의전’
경기도 연천에는 언제나 긴장감이 흐른다. 마을을 조금만 벗어나면 곳곳에 철조망과 방호벽이 보이고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지뢰’ 표지판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어디서 총을 든 군인들에게 막혀 길을 돌아가야 할지 모른다. 일부 지역은 민간인 출입이 통제된다. 우리의 비극적인 현대사가 만들어낸 오늘날 연천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것이 연천의 전부가 아니다. 연천의 참모습은 비극적인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걷어내야 비로소 보인다. 연천의 자연은 아름답고 대지는 풍요롭다. 동쪽으로는 고대산, 보개산, 화인봉, 향로봉, 종자산이 펼쳐지고 남쪽은 감악산, 마차산, 종현산이 부드럽게 감싸고 있으며, 함경남도 두류산에서 발원한 임진강과 강원도 평강군 장암산에서 발원한 한탄강이 유유히 흐르며 천혜의 비경을 만든다. 고대산 동남쪽이 철원의 금학산, 서쪽이 대광봉이다.
비옥한 토양과 풍부한 수량, 적절한 일조량으로 쌀농사, 인삼농사가 발달한 연천평야는 철원과 함께 중부지방의 최대 곡창지대였다. 서해로 흘러가는 임진강과 한탄강 줄기를 따라 형성된 포구들 덕에 6.25 이전 한강 이북의 최대 교역의 중심지였다.
그런가하면 연천 지역에는 구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유적이 다수 남아 있다. 한반도 최초의 구석기 인류인 ‘호모에렉투스’의 거주지로 밝혀진 전곡리 구석기 유적지는 기존 뫼비우스 학설(유럽인 사학자가 뫼비우스가 아슐리안 주먹도끼는 유럽에서만 발견된다고 주장)을 깨는 주먹도끼와 가로날도끼와 같은 아슐리안(Acheulean, 주먹도끼가 발견된 프랑스 아슐성에서 유래) 구석기 유물이 3000여점 이상 출토된 세계적인 구석기 유적지이다.
또한 연천은 31기의 고인돌과 다수의 돌무지 무덤이 발견되는 등 한반도 고대사의 비밀을 밝혀줄 단초가 되는 지역이다. 어디 그뿐이랴. 연천의 임진강 유역은 신라, 고구려, 백제가 치열하게 뺏고 빼앗기는 숨막히는 역사의 격전지이자 중세 고려 500년 역사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개성)와 인접한 곳으로 다양한 층위의 역사와 문화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 고고학의 현장이기도 하다.
더욱이 한탄강 유역은 국내 유일의 내륙형 주상절리와 협곡이 발달한 지역으로 그 희귀성과 지질학적 가치가 인정돼 2020년 7월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됐다. 더불어 재인폭포, 아우라지베개용암, 좌상바위 등 연천의 대표적인 지질명소가 한탄강 유역의 26개 지질문화명소로 선정됐다.
연천은 천혜의 자연환경과 역사문화적, 고고학적, 지질학적 유산이 넘쳐나는 곳이다. 그럼에도 군사분계선과 인접한 군사도시라는 선입견 때문에 여전히 다듬어 지지 않은 원석 상태로 남아 있다. 불행일까 아니면 오히려 다행일까.
임진강변 고구려성 ‘호로고루’ … 과거엔 치열한 접전지, 지금은 사계가 아름다운 풍광
임진강 북안의 호루고루성1400여 년 전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고대국가의 유적을 만난다는 것은 설레는 일이다. 남한 지역에서 몇 안 되는 고구려 유적이라 더욱 그렇다.
연천 임진강 유역에는 6세기 중엽 신라군에 밀려 임진강 유역까지 후퇴한 고구려가 임진강을 따라 쌓은 10여 개의 성 가운데 호로고루성를 비롯해 은대리성, 당포성 등 3개의 성이 복원돼 있다. 이들 3개 성은 모두 임진강 북안(北岸) 현무암 절벽 위에 세워진 평지성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호로고루가 위치한 연천 장남면은 파주 적성면과 맞닿아 있다. 파주 적성 전통시장을 지나 장남교만 건너면 ‘인삼의 고장 장남면’이라 적힌 기념탑이 위풍당당하게 방문객을 반긴다.
장남면의 또 다른 축은 고려인삼의 원산지격인 북한 황해북도(2003년 6월까지 개성특별시 소속) 장풍군과 맞닿아 있으며 토양과 기후가 같아 역시나 인삼이 유명하다. 장남면 들녘에는 그늘막이 세워진 인삼밭이 끝없이 어어지는데 이 역시 초행길인 여행자에게는 매우 이색적인 풍경으로 다가온다.
장남면 들녘을 가로지르면 텅빈 논밭 너머로 얕으막한 구릉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호로고루의 첫인상은 성이라기보다는 농한기에 들판에 길게 누워 쉬고 있는 소를 연상시킨다. 고구려군이 당나라군을 맞이해 최후의 결전을 벌였던 호로고루는 강가에 위치한 조금 높게 솟은 언덕처럼 보일 뿐 어디서도 과거 치열한 접전지의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없다.
호로고루란 명칭은 과거 이 지역이 임진강을 뜻하는 ‘호로하(瓠蘆河)’ ‘표하’ 로 불린 데서 유래했다는 설과 고을을 의미하는 ‘홀’과 성을 뜻하는 ‘고루’가 합해져서 생겼다는 설이 있다.
호로고루 인근 지역은 육로로 평양과 한양을 잇는 최단 지역으로, 수심이 낮은 여울목이 지나고 있어 걸어서도 강을 건너는 것이 가능했다. 때문에 배를 이용하지 않고도 물자나 대규모 병사들의 이동이 가능한 전략적 요충지를 차지하기 위한 삼국의 각축전이 치열했던 곳이다. 실제로 삼국사기에 이 지역에서 삼국이 자주 전투를 벌였다는 기록이 있다.
2020년 9월의 호루고루성 앞 해바라기 향연이 지역은 원래는 백제 땅이었으나 4세기 중엽 이후 고구려의 영토가 됐다. 6세기 중엽 이후 신라군에 밀려 임진강 유역까지 후퇴한 고구려는 임진강을 따라 호로고루, 당포성, 은대리성, 무등리보루, 덕진산성 등 10여 개의 성을 쌓는 등 최남단 방어선을 구축하고 120여 년간 신라와 대치했다.
나당 연합군에 평양성이 함락된 후 고구려 부활군은 호로고루에 집결해 마지막 항전을 했으나 결국 당나라군에게 패퇴하고 말았다. 고구려 병사들은 뿔뿔히 흩어져 도망갔다. 더러는 신라군에 투항하기도 했다. 그렇게 고구려는 영원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산성과 달리 평지성인 호로고루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이용해 쌓은 성이다. 동쪽을 제외한 3면은 15m 높이의 주상절리와 절벽이 그대로 성벽으로 활용됐고, 동쪽 평지에만 폭 40m, 높이 10 m, 길이 90m 성벽을 쌓았다. 암갈색 현무암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높이 10m의 성벽은 위로 가면서 좁아지면서 비스듬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성벽의 양쪽에는 낮게 성을 한 겹 더 쌓은 옹벽이 설치돼 있다.
계단을 밟고 성벽 위에 올라서서 주변 지형을 둘러보면 왜 호로고루가 천혜의 자연요새인지 단박에 이해가 된다. 특히 서쪽인 고랑포구쪽에서 조망한 호로고루는 그야말로 아찔한 임진강 절벽 위에 세워진 철옹성이다.
호로고루는 6.25 전쟁으로 북한군이 포를 설치하는 와중에 방치된 성벽이 드러나면서 존재가 처음 알려졌다. 1991년 군사보호구역 내 문화유산조사를 통해 처음으로 고구려 유적으로 확인됐다. 이후 2000년부터 총 네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다양한 문양의 붉은색 고구려 기와를 비롯해 토기와 토제 및 동물뼈와 탄화곡물 등의 유물이 출토됐다.
호로고루에서는 남한 지역의 고구려 유적들 중 가장 많은 기와가 나와 ‘고구려기와의 보고’로 불린다. 이밖에 주둥이가 뾰족한 호랑이 모양의 휴대용 남성 소변기인 호자(虎子)와 상고(祥鼓)라고 적힌 악기의 일부분으로 보이는 토기조각, 고구려인 모자 형태의 토기 등 흥미로운 유물들이 다수 출토됐다. 호로고루 입구에 설치된 홍보관에 들러 호로고루의 발굴 과정과 출토유물에 대한 설명을 참조하면 관람에 도움이 된다.
호로고루의 사계는 변화무쌍하다. 봄에는 청록색의 청보리가 일렁이고, 9월이면 수 만송이의 해바라기가 일렁이는 ‘통일바라기 축제’가 열린다. 새하얀 눈에 뒤덮힌 겨울 풍경과 호로고루 위에서 바라보는 임진강을 붉게 물들이는 저녁 노을은 가슴이 시리도록 아름답다. 깜깜한 밤 호로고루성 위로 궤적을 그리며 지나는 별들의 향연은 기회가 된다면 꼭 감상해야 할 것이다. 문득 텅 빈 대지 위에서 먼 과거의 시간과 마주하고 싶은 날 이곳 호로고루로 달려오면 된다.
호로고루와 똑닮은 당포성 … ‘폐허미’와 한탄강 수직 주상절리의 공존
호로고루에서 동쪽으로 14km 떨어진 임진강 남안(南岸)에 호로고루와 똑닮은 고구려 당포성이 있다. 당포나루로 흘러 들어오는 당개샛강과 임진강 본류 사이에 형성된 절벽 위에 형성된 삼각형 모양의 평면 대지에 세워진 당포성은 입지 조건과 평면 형태, 축성 방법 등이 호로고루와 쌍둥이처럼 닮은 전형적인 고구려성이다.
당포성당포성을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곳은 진입로인 삼화대교 위이다. 삼화대교에 서면 임진강 너머로 주상절리 절벽 위에 서 있는 당포성의 한 눈에 들어온다. 성 아래 길게 펼쳐지는 주상절리와 황톳빛 임진강물, 우거진 수풀에서 전운이 감도는 비장함마저 느껴진다. 호로고루보다 찾는 이가 적은 당포성은 폐허의 적막감이 감돈다. 성 위에 홀로 선 휘어진 나무 한 그루가 옛 성터의 쓸쓸함을 더하고, 해질녘 나무 위로 줄지어 날아가는 철새에 눈물이 날 지경이다.
당포성은 복원된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는 복원이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와 훼손이 심하고 붕괴의 위험까지 있어 흙을 덮고 그 위에 잔디를 식재해 성을 보호하고 있다.
동쪽 귀퉁이에 새로 쌓은 동벽을 통해 성의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는데, 동쪽 성벽의 길이는 200m, 전체 둘레는 450m, 높이 6m 정도로 추정된다. 성벽은 안쪽에 흙을 먼저 다져 쌓은 후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현무암을 다듬어서 얹혔다. 우리가 보는 동벽은 최근에 다시 복원한 것으로 자로 맞춘 듯 돌의 크기도 일정하고 정돈돼 있다.
당포성은 2020년 한탄강 유역의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인증과 함께 지정된 한탄강 지질문화명소 26곳 중 한 곳이다. 당포성 및 임진강변 아래의 주상절리는 수직과 방사상으로 발달했고, 하천의 침식으로 생긴 하식동굴이 많다. 또한 이곳은 화산의 진원지에서 용암이 가장 멀리까지 흘러온 지역으로 현무암층의 두께가 상류에 비해 얇아진 모습을 보인다.
전곡읍 연천군 보건소 뒤의 ‘은대리성’ … 고구려 남진 후방 거점기지 추정
은대리성은 하천의 침식작용에 의해 형성된 삼각형의 대지 위에 쌓은 성이다. 이곳은 옛부터 서울과 원산을 잇는 교통로로 활용되는 등 육로와 수로 어느 쪽이든 주변 지역과의 교통이 편리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평안해 보이는 은대리성전곡읍의 연천군보건소 뒤편의 좁은 길을 따라 들어서면 성 좌측으로 깎아지른 임진강 절벽 북안 안쪽으로 평지의 은대리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오래된 성이라기보다는 동네 사람들의 놀이터 같다.
은대리성은 성벽 전면에 펼쳐지는 성곽의 규모가 한눈에 봐도 앞서 두 성과 비교해 가장 크다. 성의 둘레가 약 1km에 달하며 외성과 내성의 이중 방어체계를 갖추고 있다. 한탄강과 차탄천이 만나면서 형성된 여울목의 요충지를 통제하는 방어 진지와 고구려 남진 시기 후방의 거점 기지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성 내부에서 배수 처리를 위한 구(溝) 시설이 확인됐고, 고구려 시대의 토기들이 다량 출토됐었다. 발굴된 토기로 편년(編年)하면 5세기 이후 3개성 가운데 가장 먼저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계 유물이 나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 이후 폐성됐을 것으로 보인다.
임진강변 신라 유적지 … 망국의 ‘경순왕릉’ … ‘이역만리’ 구천을 헤매
경주로부터 이역만리인 연천에 조성된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릉호로고루에서 임진강변을 따라 고랑포 역사공원 쪽으로 10여분 정도 달리면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릉이 있다. 연천의 장단면 끝자락 고량포구에서 멀지 않은 야트막한 구릉에 조성된 경순왕릉 주변에는 곳곳에 ‘지뢰조심’ 푯말이 붙어 있고 철조망이 둘러쳐져 있어 긴장감이 느껴진다.
견훤에게 시해당한 경애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경순왕은 935년 10월 두 아들과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태조에게 국서를 보내 투항했다. 백성들의 희생을 줄이고 경주의 찬란한 문화를 지키기 위한 결정이었으나 이에 반대한 마의태자는 금강산으로 들어가고, 둘째 아들은 화엄사로 들어가 중이 됐다.
경순왕은 개경에 머물며 태조의 첫째 딸과 결혼해 정승공으로 봉해졌으며, 경주로 이름을 바꾼 신라를 식읍으로 받아 경주의 사심관으로 임명됐다. 978년 경순왕이 개성에서 생을 마감하자 유족들과 유민들은 그의 능을 경주에 조성하기 위해 운구하하자 유민들의 반란을 우려한 고려는 ‘왕족의 능은 개경 100리 밖에 쓸 수 없다’며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유해는 개경에서 80리 떨어진 장단면 고랑포리에 묻히게 됐다. 망국의 왕은 죽어서도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 구천을 헤매고 있다.
경순왕릉은 임진왜란 후 방치됐다가 영조 23년에 재정비됐다. 한국전쟁 후에 다시 소실될 뻔했으나 한 병사에 의해 수풀 속에 쓰러져 있던 묘비가 발견돼 다시 정비됐다. 경순왕릉에는 곡장이 둘러쳐져 있고 봉분 앞에 2기의 석물도 세워져 있다. 경순왕과 관련해 어진 5점이 전하며, 강원도 원주에 영정을 모신 경천묘, 충남 보령에 위패를 모신 경모전이 있다.
고려 태조 등 네 왕의 위패를 모신 ‘숭의전’
연천군 미산면에는 고려의 왕들과 공신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던 숭의전(崇義殿)이 있다. 고래 태조 왕건의 원찰이었던 앙암사(仰巖寺)터에 1397년 고려 태조 왕건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을 건립한 게 숭의전의 시초가 됐다.
태조 왕건 고려 4왕의 위패를 모신 숭의전깎아지른 임진강 절벽 위에 세워진 숭의전은 앞쪽으로 임진강 물결이 유유히 흐르고 보호수로 지정된 500년 된 느티나무가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자라고 있다. 조선 태조는 1397년(태조 6년) 역성혁명을 통해 건립된 조선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사당을 건립해 고려 태조의 위패를 봉안했고, 1399년 태조의 맏아들 2대 혜종, 6대 성종, 8대 현종, 문종, 원종, 충렬왕, 공민왕 등 고려 8왕의 위패를 봉안하게 했다.
세종 7년에는 “나라의 종묘에도 다만 5실을 제사하는데, 전조(고려 왕조)의 사당은 8위를 제사하니 예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태조, 현종, 문종, 원종 등의 4위만 봉향하기 시작했다. 1452년(조선 문종 2년)에 고려의 후손 왕순례를 찾아 부사로 삼아 제사를 맡아 지내게 하고 사당 이름을 ‘숭의전’이라 부르기 시작했으며, 고려 왕 4위와 고려조의 충신 16명을 배향하기 시작했다. 현재는 개성 왕씨 종친회, 숭의전 보존회 주관으로 봄, 가을 두 차례 봉행되고 있다.
숭의전은 조선시대 네다섯 차례에 걸쳐 개수와 중수를 반복하다가 6.25전쟁으로 전소돼 1971년 재건됐다. 고려 4왕과 16공신의 위패가 모셔진 숭의전 및 배신청(陪臣廳)을 비롯해 이안청, 전사청, 앙암재 등 5동의 건물과 내신문, 외신문, 협문 3동, 운조문 등 6개의 문이 있다.
숭의전에서 청정로를 달리다 보면 도로변에 초대 숭의전사를 지내던 왕순례의 묘가 있다. 오랫동안 실전됐다가 1988년 도로 확장 공사 중에 우연히 발견됐다. 작은 봉분과 최근에 세워진 망주석 한 쌍이 놓여 있으며, 묘표 앞면과 뒷면에 쓰여진 문자를 통해 이 묘가 1485년에 조성된 왕순례의 묘임이 밝혀졌다.
왕순례는 고려 제8대 현종의 먼 후손으로 본명은 왕우지이다. 그는 고려 멸망 이후 충남 공주에 숨어 살다가 숭의전 제사를 지낼 후손을 찾았을 때 관에 알려졌으며, 왕명에 따라 ‘순례’라는 이름과 전답과 노비를 하사받고 숭의전사로 임명됐다.
이밖에 고려의 충신으로 알려진 목은(牧隱) 이색(李穡) 영당(影堂, 사당)이 왕징면 노동리에 있고, 조선 초 문신인 운성부원군 박종우와 태종의 딸 정혜옹주의 합장묘가 연천군 장남면 반정리에 있다. 청산면 궁평리에는 인조와 귀인 조씨 사이의 둘째 아들인 낙선군 이숙(李潚) 묘, 연천읍 상리에는 원나라에 공녀로 갔다가 순제의 황후가 된 기황후(奇皇后) 묘터가 남아 있다.
이밖에 화산활동으로 용암이 흘러내려 협곡을 이룬 한탄강변의 주상절리에 낙차가 제법 있는 연천읍 고문리의 재인폭포, 일제 강점기에 만든 터널에 천장에는 종유석이 매달려 있고 바닥에선 겨울에 고드름이 거꾸로 선다는 연서면 신탄리의 역고드름 터널이 유명하다. 연천 가장 북쪽의 고대산에서는 넓은 정상에서 철원 평야지대를 파노라마처럼 펼쳐 볼 수 있다. 신탄리역에서 출발하는 게 일반적인 등산 코스다. 연천군 전곡읍의 고구려 시대 신답리 고분도 짬이 나면 가볼 만한 곳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