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교신문
실행론 설법- (1)자기반성, 자기비판
“불법은 체요 세간법은 그림자라.”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알고 살아가라는 이정표와 같은 말씀입니다. 세상에는 주인공들이 많습니다. 하늘도 땅도 만물도 주인공이면서 하늘과 땅에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이 있고, 존재하는 만물에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이 있고, 흐르는 시간에는 과현미래(過現未來)가 있고, 사람에는 생노병사(生老病死)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각각의 주인공으로 법칙에 따라 변화가 무상(無常)합니다. 부처님은 변화무상한 법칙의 근원을 윤회법칙(輪迴法則)이라 하였습니다. 형상이 없어서 보이지도 않으며, 모양이 없어서 만질 수도 없고, 크기를 몰라서 측량할 수도 없는 법칙입니다.
진각성존은 이 법칙의 근본 체(體)를 ‘불법(佛法)’이라 하고, 모양으로 나타난 세간법(世間法)을 ‘그림자’라 하였습니다. 이제 불법(佛法)의 체(體)와 세간법인 그림자를 중심으로 참삶의 길[實行論]을 찾아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유정물이나 무정물은 각각의 주인공[價値]으로 자기의 몸이 있고, 자기의 소리가 있고, 자기의 마음을 가지고 활동합니다.
바위를 보십시오. 봄이 되면 물을 머금어서 시원하게 여름을 보내다가 가을이면 물을 뿜어내어 몸 안에 수분을 비웁니다. 나무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을이면, 봄과 여름에 머금었던 물을 뿜어내어 아름다운 최후를 장식하면서 가지 속의 수분을 모두 비웁니다. 가을에 물을 뿜어내지 못한 바위와 나무는 겨울에 얼었다가 봄바람에 녹는 과정에서 부스러지고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이처럼 만물은 모두 추운 겨울을 보내고 새로운 봄을 맞이하기 위하여 머금고 뿜어내는 생존의 변화법칙에 순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인공 중에 가장 으뜸가는 주인공인 만물의 영장(靈長)이라는 사람은 어떠합니까? 명예와 권력과 물질이 영원할 것이라 집착하여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정물의 바위 마음보다 부동(不動)의 나무 마음보다 못한 마음으로 살기도 합니다.
자연이 가르치는 무소유(無所有)의 법을 배운다면, 만물을 자유자재로 운용하는 걸림 없는 주인공[眞價]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굳이 욕심내고 집착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주인공이라는 생각으로 자연의 섭리에 순응만 하면 모든 원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나그네[無價値]요 손님이라는 생각으로 살면, 항상 부족하고 허전하며, 갈증과 불안만 증가할 것입니다. 우리는 다행스럽게도 주인공으로 살 수 있도록 인간으로 태어나서 부처님 법까지 만났습니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마시고 욕심도 버리고, 성냄도 버리고, 어리석음도 버리고, 집착도 버리고, 원망도 버리면서 티끌 하나 가리지 않은 적나나(赤裸裸)한 진면목(眞面目)을 찾아봅시다. 진면목을 찾는 수행의 길은 수없이 많습니다.
《진각교전》「불교는 우리의 풍토성과 혈지성에 맞는 것」의 “불교는 교리 자체가 자기반성(反省)과 자기비판(批判)으로 참회(懺悔)와 실천이 주목적이기 때문에…….”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을 비롯하여 과거 7불의 말씀은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뭇 선을 받들어 행하라. 그러면 스스로 그 뜻이 깨끗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사악취선(捨惡就善)을 중심으로 선근종자(善根種子)를 심도록 가르친 말씀입니다. 선근종자를 심으려면 먼저 그 선근종자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선근종자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며, 중생이면 누구나 다 지닌 본래 자성이 곧 선근종자입니다. 다만 무명(無明)이라는 어두운 커턴 속에 겹겹이 싸여 있어 알지 못했을 뿐입니다. 이제 자기반성과 자기비판으로 어둠의 장막을 걷고 현실에서의 좋고 나쁨에 대한 원인을 깨달아 정도로 향하는 싹을 틔워 본래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마음공부를 합시다.
자기반성과 자기비판은 겉으로 보기는 같아 보여도 자세히 보면 다릅니다. 먼저 자기반성(自己反省)이란? 자신의 지난 일들을 살펴 참회(懺悔)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지금의 나의 몸과 생각은 모두 과거로부터 인(因)을 지어 받은 모습입니다. 이제 자신의 모습을 맑은 물에 비치는 달처럼 있는 그대로 보십시오. 그 모습에서 과거의 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보태지도 말고 빼지도 말며, 아름다움도 추함도, 좋아함도 미워함도, 착함도 악함도, 가식도 꾸밈도 없이 보는 것입니다. 어두우면 어두운 대로, 밝으면 밝은 대로, 둥글며 둥근 대로 모나면 모난 대로, 이지러졌으면 이지러진 모습대로 보십시오, 그 가운데 자신의 진면목이 보일 것입니다.
소소영영(昭昭靈靈)하여 우습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할 것입니다. 신통하고 미묘한 가운데서 잘한 것과 잘못한 것을 찾아 잘한 일은 장려(獎勵)하고 잘못한 것을 참회하는 것이 자기반성의 공부입니다.
다음으로 자기비판(自己批判)이란? 자신을 바르게 분석하여 미래를 설계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미래 설계는 지금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분석한 연후에 좋은 설계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먼저 현재 나의 모습이 왜 이렇게 생겼는가? 그에 대한 원인을 알아야 하며, 언제부터인지? 어디에서 시작하였는지? 누구와 인지? 무엇을 했는지? 그 속에서 선악시비선후본말을 비판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비판을 잘합니다. 올바른 비판은 대안(對案)을 가진 비판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대안 없는 비판이 많습니다. 이러한 비판은 잘못을 고치지도 못하면서 오히려 비방하는 습관이 생겨 남을 무시하고 업신여겨 원수(怨讐) 맺기 쉬우며, 갈등과 분열만 조성할 뿐입니다. 혹은 대안을 가졌다 하여도 자기만을 생각하는 대안은 올바른 대안이 아닙니다.
올바른 대안은 첫째 사회와 일체중생을 위하는 대안이어야 하며, 둘째 자신의 됨됨이로 능력을 바로 알고, 설 자리를 확인하여 무엇을 담을 수 있으며, 얼마를 담을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모든 것에는 진리가 있고 가는 길이 있습니다. 하늘에는 천리(天理)가 있고, 인간에게는 윤리(倫理)가 있고, 수(數)에는 수리(數理)가 있고, 물(物)에는 물리(物理)가 있고, 생물에는 생리(生理)가 있음을 깨달아 각각의 주인공[價値]임을 인증하면서 비판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반성과 자기비판을 하는 가운데 자기만을 생각하는 소인(小人)과 남을 위하는 대인(大人)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나그네[無價値]의 삶을 사는 소인은 결과(結果)에 대하여 두려워하고, 주인공[價値]으로 살아가는 대인은 원인(原因)을 두려워합니다. 결과(結果)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받는 과보(果報)를 두려워하면서도 자신의 잘못을 인증하지 않으려는 마음이요. 원인(原因)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마음가짐에 조심하고 삼가면서 자기가 행한 것에 책임을 질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결과만을 생각하는 소인은 자기만을 위하여 그것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화를 잘 내고 원한(怨恨)을 잘 가지며, 간사하고 악독하여 그릇된 소견으로 남을 모함하며, 남의 미덕은 덮고 자기의 작은 공은 크게 자랑하며, 자기의 잘못을 남에게 전가하며, 남이 가진 것에 욕심내며, 남의 물건과 자리를 뺏으며, 거짓으로 사람을 속이며, 자기가 한 말에 책임지지 않으며, 덕은 쌓지 않고 악지식(惡知識)을 모아 힘을 과시하여 폭력을 행사하며, 자기는 먼저 인사하지 않으면서 인사하지 않는 사람을 꾸짖으며, 위 사람에게 아부하고 아랫사람을 가벼이 여기며, 순서를 기다리지 않으며, 남의 자리를 잘 뺏으며, 자신의 잘못을 정당화하면서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소인은 조그마한 이양(利養)만 받아도 곧 무너져 자기의 삶만 불행하게 만들 뿐 아니라, 가족과 인연 있는 주위의 환경과 몸담았던 곳을 위태하게 만들면서도 인과 이치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진면목을 찾아 능력에 맞는 삶을 살면서 모든 일에 조심하고 상대를 향해 겸허하며, 일체중생을 공경하고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올바른 자기반성과 자기비판의 수행을 해야 합니다. 단 하나인 마음이 환경 따라 천변만화(千變萬化)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둘도 되고, 셋도 되고, 넷도 될 수 있으며, 모양 또한 수천의 모습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모습이나 마음으로 나누고 변하여도 이것은 모두 자성심(自性心)에서 나타난 그림자일 뿐입니다. 자성의 체와 만물의 그림자가 일여(一如)한 참된 가치를 가진 주인공으로 변화시켜야 할 것입니다. 체(體)의 뿌리에서 현실의 꽃을 피우고, 진리의 열매를 맺도록 자기반성의 참회와 자기비판의 설계를 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도록 정진하고 또 정진합시다.
2. 불법(佛法)은 체요 세간법(世間法)은 그림자라
밀교신문
실행론 설법- 2.참회(懺悔) 수행(修行)
참회(懺悔)란 죄업(罪業)에 대한 것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 수행하는 법 중 하나를 말하는 것입니다. 잘못을 소멸하기 위한 참회는 소참(小懺)이요, 마음을 밝히기 위한 참회는 대참(大懺)입니다. 일상생활에서 가난과 병고와 불화를 소멸하기 위하여 지은 죄업을 참회하는 것은 소참(小懺)이며, 중생을 정법으로 인도하여 자성을 밝혀 영원히 해탈하게 하는 참회를 대참(大懺)이라 합니다.
수행자가 처음부터 대참에 들어가기는 어렵습니다. 먼저 소참으로 악업을 소멸한 연후라야 쉽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소참으로 업인(業因)을 녹이지 않은 상태에서 수행하면, 번뇌의 고통과 법문의 고난으로 중도에 그만둘 수도 있습니다. 소참이나 대참의 궁극목적은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의 길에는 참회하지 않았다고 죄 되거나 벌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인(因) 지은 대로 살며 악업장(惡業障) 소멸이 되지 않을 뿐입니다. 참회하는 법이 세워졌을 때, 악업장이 사라져 해탈하며, 나아가 열반과 성불을 경지에 오를 수 있을 것입니다. 싯다르타가 32상과 80종호를 갖추고 태어난 것이 많은 겁 동안 소참의 공덕을 쌓았음을 증명(證明)하는 모습입니다.
이제 소참보다는 대참을 중심으로 말하고자 합니다. 먼저 진각성존의 참회 수행법을 살펴봅니다. 성존께서 불법(佛法)에 처음 입문하였을 때 하늘과 땅을 향하여 예를 올리고, 다시 동서남북 사방에 예를 다하였습니다. 이것은 자연을 공경하면서 나와 하나가 되는 참회 공양을 수행한 것입니다. 이 참회 공양 수행을 바탕으로 10여 성상(星霜) 제방 선지식을 친근하여 법을 배우는 가운데 화상(火傷)의 법문을 만났습니다. 지금까지 익혀온 인연의 습관이 화상법문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속으로 나타난 화상법문을 일반인들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므로 현실의 백약은 무용지물이었습니다. 이열치열(以熱治熱)이요 이냉치냉(以冷治冷)이며, 자연만이 자연을 치유할 수 있다는 법을 깨달으시고, 진리 법신과 불보살의 본심이요 일체 만물과 중생의 본심인 육자진언으로 참회의 치유법을 행하였습니다. 내면의 화상을 치유하는 수행의 마지막 관문을 지나면서 대참(大懺)으로 눈물을 쏟아내었습니다. 7일간 밤낮을 지내면서 숙업(宿業)의 업장을 녹이고 자연과 하나가 되면서 법신의 언어인 도(道)를 말씀하시면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연초록빛 잎이 무성한 5월의 아침, 농림촌의 밝은 햇살을 맞으면서 대참의 공덕을 성취하셨던 것입니다. 다시 법계일여(法界一如)의 마음으로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면서 군생(群生)제도를 맹세하는 보림(保任)의 49일을 보내고,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전할 것을 비로법신(毘盧法身)에 약속하고, 농림촌을 떠나 참회 길에 첫발을 디디면서 우리들의 일대사인연과 만나셨습니다.
우리의 삶이 어찌 현생에 지은 업으로만 이루어졌겠습니까? 부모로부터 몸을 받은 시간이 얼마나 되었다고, 그 사이에 무슨 업을 얼마나 지었겠습니까? 태어난 모습은 얼굴이 잘나기도 하고 못나기도 하며, 복 많은 부모를 만나기도 하고 복이 엷은 부모를 만나기도 하며, 형제가 많기도 하고 외롭기도 하며, 몸이 건강하기도 하고 부실하기도 하며,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며, 희기도 하고 검기도 하겠습니까? 삶의 과정은 또한 어떠합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갖고 싶은 대로 갖고,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이것만 보드라도 태어난 이후 현재의 몸으로 지은 인(因)이 아니라, 과거 생에 지은 그 어떠한 인으로 말미암아 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현재 나의 몸을 보면서 원인을 찾아봅시다. 원인을 찾는 다음 참회합시다. 성존의 참회 수행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참회합시다. 참회 수행은 잘한 것과 좋은 것도 참회하며, 잘못한 것도 나쁜 것도 참회합니다. 잘하고 좋은 것을 참회함은 거짓과 삿됨의 허물을 찾기 위함이요, 나쁜 것과 잘못한 것을 참회함은 정도의 법을 찾기 위한 참회입니다. 먼저 병고에서 벗어나고 가난에서 벗어나고 불화에서 벗어나는 해탈의 참회를 합시다. 다음으로 숙세(宿世)의 업(業)의 원인을 깨달을 수 있는 참회를 합시다. 어두움이 사라지고 밝음을 얻을 수 있도록 참회합시다. 숙세(宿世)의 어두운 업을 녹이지 않고 현생에 좋은 인을 지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좋은 시간, 좋은 장소, 좋은 몸을 받지 못함을 참회합시다. 참회하지 않으면, 건강도 없을 것이며, 물질도 없을 것이며, 명예도 없을 것이며, 화합된 가족도 없을 것입니다. 참회하지 않으면, 있던 건강도 사라지며, 누리던 권력도 사라지며, 가족은 뿔뿔이 헤어질 것이요, 공경의 예를 이루지 못할 것이며, 어두운 밤길을 가는 것 같을 것이며, 가시밭길을 가는 것과 같을 것이며, 통발 속으로 들어가는 물고기와 같을 것이며, 섶을 지고 불구덩이로 들어가는 것 같을 것이며, 외롭고 가난하여 고통 가운데 살아갈 것입니다.
이제 잘한 것을 참회합시다. 사람으로 태어남이 무엇보다 다행한 일이므로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참회합니다. 부처님의 법을 만남이 참으로 고마운 일이므로 부처님의 법을 만난 것을 참회합니다. 사람으로 태어나고 부처님 법을 만난 것은 ‘불가사의’ 한 것입니다. 우리는 다행스럽게도 해탈과 열반과 깨달음을 한꺼번에 이룰 수 있는 일대사인연을 만난 것입니다. 불가사의한 인연을 보답하는 마음으로 사대 은혜 입은 것을 참회합니다. 현실적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참회로 시작합시다. 업장소멸(業障消滅)의 참회가 아닌 자성 밝히는 참회가 일상생활에 습관이 되도록 합시다. 매일 염송함을 참회합니다. 정진 중에 망상을 일으키지 않음을 참회합니다. 정시와 차사를 바르게 한 것 참회합니다. 절량법 실천함을 참회합니다. 상주물을 사용할 수 있음을 참회합니다. 부처님 법을 설할 수 있음에 참회합니다. 고통받는 중생을 제도할 수 있음에 참회합니다. 가난한 자를 해탈시켰음을 참회합니다. 불화한 집안을 평화롭게 했음을 참회합니다. 공식시간을 빠트리지 않았음을 참회합니다. 칭찬받음에 참회합니다. 남으로부터 인사받음에 참회합니다. 공양받았음을 참회합니다. 이것이 거짓과 삿됨과 자신의 허물을 살펴보는 참회입니다.
다시 잘못을 참회합니다. 성존의 법을 100분의 1도 행하지 못한 것을 참회합니다. 1000분의 1도 행하지 못한 것을 참회합니다. 만분의 1도 행하지 못한 것을 참회합니다. 백만분의 1도 실천하지 못한 것에 참회합니다. 진언의 이치를 깨닫지 못한 것을 참회합니다. 성존의 유법(遺法)을 받들지 않았음에 참회합니다. 성존의 법을 만방에 알리지 못했음을 참회합니다. 성지를 가꾸지 않은 것에 참회합니다. 성지를 자주 찾지 않은 것에 참회합니다. 갖고 싶은 물건을 다 가지면서도 희사법을 실천하지 못한 것에 참회합니다. 외전(外典)을 보면서도 실행론의 뜻을 깨닫지 못함을 참회합니다. 하고자 하는 것을 다하면서도 염송 많이 하지 않음에 참회합니다. 받기는 좋아하면서 베풀지 않음에 참회합니다. 진언법이 좋다면서도 많은 중생을 모두 제도하지 못함에 참회합니다. 모습을 꾸미면서 자성을 밝히지 못함에 참회합니다. 현실행사를 좋아하여 진리를 가벼이 생각함을 참회합니다. 법을 말하면서 진리를 논하지 않음에 참회합니다. 이것이 잘못된 것, 나쁜 행위로 정도의 법을 찾지 않은 참회입니다.
참회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세상의 꽃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꽃은 꽃잎이 다섯입니다. 5라는 수는 인간세계의 중심 수입니다. 손 발가락이 다섯이요, 지구가 5대륙, 5대양입니다. 종교성립도 다섯 꽃잎처럼 되어 있습니다. 아름다운 참회를 아름다운 꽃잎에 비유해봅니다. 첫째 꽃잎은 두려움을 없애는 것으로 종교의 시작이요, 두 번째 꽃잎은 고통을 알게 하는 꽃잎이요. 세 번째 꽃잎은 문제의 잘못을 용서하는 참회의 꽃잎이요, 네 번째 꽃잎은 자성을 찾는 수행의 꽃잎이요, 다섯째 꽃잎은 봉사와 보시로 회향의 꽃잎입니다. 다섯 꽃잎의 중심이 세 번째 꽃잎이 참회라는 것은 종교의 중심이 참회에 있다는 뜻입니다. 참회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가 발전할 때, 살기 좋은 사회가 될 것입니다. 깨달음도 참회를 중심으로 할 때 쉽게 얻을 수 있으며, 교화도 참회가 중심이 될 때 원만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가장 좋은 성존의 참회 수행법을 만났습니다. 이 좋은 일대사인연의 만남을 가벼이 넘기지 마시고 용맹정진하면서 일체중생을 제도하여 해탈의 복지구족한 세상을 이루어 성존의 깊은 은혜에 보답합시다
3. 불법(佛法)은 체요 세간법(世間法)은 그림자라
밀교신문
오대서원(五大誓願)
진각종의 공식 불사와 의식 등의 모든 행사는 참회, 강도발원, 오대서원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참회가 첫째요 서원이 두 번째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참회 부분을 설법하고 이제 서원에 관하여 설법하고자 합니다. 강도발원과 오대서원은 같은 뜻이지만 강도발원은 불사나 의식의 주제와 개인적 서원이라면, 오대서원은 밀교의 본원(本願)으로 대중적 서원을 말합니다. 현교는 사홍서원(四弘誓願)을 본원으로 하고, 밀교는 오대서원(五大誓願)을 본원으로 합니다.
만물은 어느 세상에 태어나든 각자가 생존에 필요만큼의 힘을 지니고 태어납니다. 그 세상에 적응할 힘이나 능력을 지니지 않으면 태어날 수 없습니다. 육도(六道)를 윤회하는 것은 육도에 적응할 힘 때문에 육도에 윤회하는 것입니다. 즉 지옥에 적응할 힘을 지니면, 지옥에 태어나 고통받을 것이요, 천상에 적응할 힘을 지니면, 천상에 태어나 영화를 누릴 것이며, 축생에 적응할 힘을 지니면 축생으로 태어날 것이요, 인간계에 적응할 힘을 지니면 인간으로 태어날 것입니다. 사성(四聖)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승(小乘)에 적응할 힘을 지녔으면 성문(聲聞) 연각(緣覺)이 될 것이요, 대승(大乘)의 적응할 힘을 지녔으면 보살(菩薩)이 될 것이며, 부처에 적응할 힘을 지녔으면 무상정등정각을 이룩할 것입니다.
적응하는 힘은 곧 인(因)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 태어난 힘을 보면, 낮에 필요한 것은 낮에 얻을 수 있고, 밤에 필요한 것을 밤이 되어야 얻을 수 있으며, 봄이면 봄에 맞는 것을, 여름이면 여름에 맞는 것을, 가을이면 가을에 맞는 것을, 겨울이면 겨울 맞는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자연은 이렇게 시간과 장소에 맞추어 필요한 만큼 모으고 버리면서 서로에게 장애(障礙)를 주지 않고, 도움을 주면서 생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필요에 따른 것을 얻지 못하고 이루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얻지 못하고 이루지 못하는 잘못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그 허물이 있습니다. 허물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허물은 자기의 능력과 그릇 이상의 그 무엇을 구하고자 하는 욕심이요, 둘째 허물은 자기가 지닌 본래의 힘과 능력을 발휘할 줄 모르는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자신의 욕심과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지 못하고 행하는 노력은 헛수고가 될 뿐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비유하면, 굵은 밧줄을 작은 바늘구멍에 꿰고자 하는 것과 바늘허리에 메어 쓰고자 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의 분복(盆福)은 적응할 힘만큼입니다. 자연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면서 생존하지만, 사람은 항상 부족하다는 생각과 기다리지 못하는 다급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어진 것도 다 누리지 못하면서 새로운 것을 얻고자 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마음이 있음으로 꿈도 있고, 희망도 있고 발전도 있으며, 나아가 윤회를 벗어나는 해탈도 열반도 성불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욕망으로 고통을 받기도 합니다. 우리는 바라는 마음과 이루고자 하는 욕망에서 동서남북으로 그 힘을 찾아 바쁘게 다니면서 그 어떠한 힘을 빌리고자 합니다. 세상에서 큰 힘을 지녔다고 생각하는 가장 높은 것, 가장 밝은 것, 가장 큰 것, 가장 깊은 것, 가장 넓은 것, 가장 많은 것, 가장 뛰어난 것, 가장 오래된 것, 신비하게 보이는 것을 찾아 신(神)으로 섬기면서 서원을 세웁니다. 즉 태양, 달, 별, 물, 불을 섬기며, 고요한 계곡, 심산유곡의 큰 바위, 폭포수, 서낭당 나무, 바다와 강에 정성을 들이는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힘과 능력을 알고자 하여 점(占)집을 찾아 관상(觀相), 수상(手相)을 보기도 하고 사주팔자(四柱八字)와 자구(字句)해석으로 미래에 대한 예언을 듣고자 하는 것입니다.
서원은 자신보다 강한 힘을 지녔다고 생각하는 신(神)에 맹세하는 것입니다. 강도 발원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능력과 본분(本分)을 찾아 부족하고 잘못됨을 참회하며, 가르침 따라 정진하겠다고 부처님 앞에 맹세의 글을 올리는 것입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은 탐진치가 가득한 글을 올릴 것이요, 믿음이 강한 사람은 인과(因果)를 깨달아 참회하는 마음을 표할 것입니다. 진언 수행자는 대승적인 서원을 세워야 합니다. 먼저 은혜 보답을 서원하고, 다음으로 자신의 잘못을 찾아 참회하기를 서원하며, 끝으로 바라는 것, 이루고자 하는 것을 서원하는 것입니다. 은혜 갚고자 하는 마음이 없고, 잘못을 참회하지도 않으면서 오로지 바라기만 한다면, 이러한 서원(誓願)은 기복(祈福)이 되어 또 하나의 병(病)인 서원병(誓願病)을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이 병이 짙으면 짙을수록 해탈의 진미(珍味)는 맛보지 못하고 마음의 고통과 현실적 재난만 따를 뿐입니다. 기복(祈福)으로 자신의 욕망만을 생각하는 서원병에 걸리지 않도록 선지식을 친근하여 바른 서원법을 배워야 합니다. 서원에는 본원(本願)과 별원(別願)이 있습니다. 본원은 자신을 위하는 원이요, 별원은 남을 위하는 회향의 원을 말합니다. 자신이 먼저 깨달아 해탈한 연후에 중생을 제도하는 회향의 원을 하여야 합니다. 밀교의 오대서원과 현교의 사홍서원은 모두 자성을 먼저 제도하고 깨달은 연후에 중생을 이롭게 하는 본원(本願)입니다. 석가모니불 500원, 아미타불 48원, 약사여래 12대원 등은 모두 본원을 성취한 연후에 세운 별원(別願)들입니다.
오대서원, 사홍서원은 모두 자성중생 제도하는 것을 근본으로 하여 성불의 길로 인도하는 수행의 차제(次第)입니다. 먼저 자기 자성을 제도한 연후에 자신의 복과 지혜를 모으게 되어있습니다. 자성중생 제도란 발심(發心)의 뜻으로써 해탈, 열반, 성불에 이르는 첫 관문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자성중생을 제도하고자 발심(發心)한 연후에 복과 지혜를 모으고, 복과 지혜가 원만하게 모여진 다음에 법문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자성의 법문을 깨달으면, 자신이 이미 32상과 80종호의 여래상이 갖추어져 있음을 알게 되어 스스로 섬길 것이며, 자성심의 섬김이 원만할 때 비로소 무상정등정각이 이루어져서 그 공덕을 널리 회향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홍서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성의 중생을 제도하고[發心], 자성의 번뇌를 끊고, 자성의 법문을 배우며, 자성불도를 성취하게 된다는 본원(本願)입니다. 진각성존의 가르침도 “육자진언 염송으로 자신이 먼저 가난과 병고와 불화의 고통에서 해탈한 연후에 가족과 사회를 제도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오대서원, 사홍서원, 진각성존의 무진서원은 모두 타(他)를 위하는 서원이 아닌 자신을 위하는 서원이 먼저입니다. 이러한 뜻을 알고 서원문을 외우거나 낭독할 때는 항상 자기 자성을 찾고자 하는 발심(發心)의 마음을 먼저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서원의 의미를 바로 알고, 부처님의 가르침인 공도(空道)의 법을 실천하여 허공과 같은 넓고 큰 서원을 세워야 합니다. 허공의 본성(本性)은 비우고 또 비우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비워 걸림 없는 공간을 만들었을 때, 그 속에 일체 만물을 채워도 아무런 장애가 없을 것입니다. 비어 있는 듯한 허공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세상에 모든 것을 담고 있으면서 중생이 원한다면 언제 어디서나 무엇이든지 보여줄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사람이 붉은 것을 보고자 하면 허공은 붉은 것을 보여주고, 푸른 것을 보고자 하면 허공은 푸른 것을 나타내며, 노랑을 보고자 하면 허공은 노랑을 나타내 보일 것입니다.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무지개를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름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비를 뿌리기도 하며, 빛을 통과 시켜 만물을 성장시키기도 하면서 또한 사라지게도 합니다. 마치 인과법칙(因果法則)의 흐름과 같이 걸림이 없으면서도 가장 겸손하여 자신을 내세우는 상(相)도 없고 자랑도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만들고 없애고 늘리고 줄임을 마음대로 하는 허공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법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허공을 닮은 마음 자세로 자성 찾는 발심(發心)을 합시다. 남을 탓하지 말고 사회에 허물도 돌리지 않는 마음으로 보이지 않는 가운데 좋은 인(因)을 짓고, 소리 없는 가운데 좋은 연(緣)을 만들면서 어느 곳도[場所] 머물지 않으며, 어느 것도[物件] 집착하지 않는 자신을 찾는 수행을 합시다. 자성 참회와 정진으로 자성 중생을 제도하는 오대서원의 본원(本願)을 차례에 따라 실천하는 수행을 합시다.
4.진언 염송(眞言 念誦)
불법(佛法)은 체요 세간법(世間法)은 그림자라
진언은 소리법문입니다. 인간 세상의 가장 필요한 것이 소리입니다. 육도를 벗어난 사성(四聖)의 첫 경지(境地)가 성문(聲聞)입니다. 성문이란 곧 소리를 듣고 깨달음을 얻는 세계를 말합니다. 소리 중에 가장 으뜸가는 소리가 진언입니다. 진언에는 색(色)이 있고 빛이 있습니다. 색과 빛은 신비로움이며, 미증유(未曾有)이며, 신통하고 미묘한 것입니다. 진언을 신비롭게 보지 않으면 진언 수행자가 아닙니다.
신비로운 진언의 이치를 깨달으면, 불가사의한 공덕의 빛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로자나불은 소리의 색과 소리의 빛을 허공 가득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무량하고 광대하게 나타나는 소리법문을 중생은 측량하지 못하므로 형상과 문자 방편을 사용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계시던 정법시대(正法時代)는 직접 법을 전하지만, 정법이 사라지고 상(像)을 숭상하는 상법시대(像法時代)는 문자경전(文字經典)으로 법을 전하였습니다. 상법이 사라진 말법시대(末法時代)는 성인과 멀어지고, 상(像)이나 문자를 믿지 않음으로 진심(眞心)을 담은 소리로 법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법 시대는 진언으로 깨달음을 얻는 시대입니다. 선종(禪宗)의 마음으로 마음을 전한다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법도 이와 같습니다.
진언의 분석이나 해석은 학자들에게 맡기고, 여기서는 수행을 중심으로 진언의 의미를 밝히고자 합니다. 진언은 어떠한 특별한 문자로만 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진실한 말 자체가 진언입니다. 모든 만물은 모두 진언으로 서로 화답하고 있습니다. 자연과 화답하고 시간과 화답할 수 없는 소리는 진언이 아닙니다. 화답의 언어를 지혜 없는 중생은 알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할 뿐입니다. 사람의 입은 화의 문이며, 입에 칼날이 있고, 입안에 독사가 머물고 있으며, 입에 독약이 있고, 입에 가시가 있다는 등의 격언들은 진리와 자연과 본심과의 화답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말들입니다. 거짓된 말이나 분별없이 하는 말은 곧 자기중심의 자성을 잃게 하는 것입니다. 중심을 잃어버리고는 아무것도 성공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한평생 진실한 말만 하여도 못다 할 것입니다. 진실한 언어는 모든 것을 성취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비유하면,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를 보십시오. 어린아이는 ‘배고프다.’ ‘대소변 보았다.’ ‘잠이 온다.’ 울음으로 뜻을 알립니다. 자기 마음을 떨림의 소리에 담아 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울음소리를 제일 잘 알아듣는 분이 어머니입니다. 이처럼 진언은 자아(自我)의 텅 빈 공간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며, 중생 본심의 소리요, 거짓이 없는 소리이며, 가식이 없는 소리입니다. 이 소리는 자연과 상응하고 만물과 상응하며, 법계와 상응하고 일체중생과 상응하며, 시간과 상응하여 모두 하나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진언 가운데 제1의 진언이 ‘옴’과 ‘훔’으로 이루어진 ‘옴마니반메훔’ 입니다. 고대인도(印度)에서는 우주 전체의 기본적 단위를 소리로 보았습니다. ‘옴’자를 AUM으로, ‘훔’ 자는 HUM으로 표기하여 AUM의 A=불(佛)=근본을 나타내며, U=법(法)=공(空)을 뜻하며, M=승(僧)=중생으로 표현하여 삼보(三寶)의 뜻을 담고 있으며, HUM의 H는 중생을 말하며, U[法]와 M[僧]은 옴의 뜻과 같이 표기하여 중생을 뜻하는 것입니다. 즉 ‘옴’은 불삼보(佛三寶)요, ‘훔’은 중생삼보(衆生三寶)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옴과 훔은 불(佛)과 중생이 각각의 자리에서 주인공임을 깨닫게 하여 우주가 내 속에 들어오고, 자연이 내 속에 들어오고, 뭇 중생이 내 속에 들어오고, 삼세의 시간이 내 속에 들어와 모두 하나로 유가상응(瑜伽相應) 하게 하는 진언입니다. 화두(話頭)에 비유하면, 진각종의 제1 화두는 “옴마니반메훔”이요, 제2 화두는 “깨쳐보라.”입니다. 두 화두를 함께 들고 수행하는 법이 진각종 진언 수행법입니다. 불보살의 명호는 현생(現生)의 명호이므로 현생의 공덕을 얻게 하는 법이요, “옴마니반메훔”은 법신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모든 불보살과 일체중생들의 본심 진언이므로 삼세(三世)를 통리(統理) 하는 깨달음의 진언입니다. 진각성존은 현생의 업신(業身)에서 만난 병은 관세음보살 명호 정근으로 다스렸지만, 숙세(宿世)의 업(業)은 “옴마니반메훔”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법문을 보시고 삼세를 총인(總印)하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진각성존의 무진서원(無盡誓願)을 담은 말씀 가운데 “말법(末法)시대 불교는 다라니(陀羅尼)로써 흥왕한다.”를 살펴봅니다. 성존 17년 교화 중심법은 오로지 육자진언뿐입니다. 육자진언에 참회가 있고, 육자진언에 희사가 있고, 육자진언에 육행실천이 있고, 육자진언에 교화가 있고, 육자진언에 삼고해탈(三苦解脫)이 있고, 육자진언에 현세정화가 있고, 육자진언에 밀엄정토가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존의 법을 실천하는 길은 육자진언의 신비로움을 믿고, 이외의 법은 어느 것도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일 타법(他法)을 존중하고 동경한다면, 육자진언의 진실법은 깨달을 수 없을 것이며, 스스로 외도(外道)가 되어 자신도 이익 없고, 가족과 이웃도 이익이 없으며, 허송세월의 시간만 보내게 될 것입니다. 잠시 마음을 모아 조용히 자신을 되돌아봅시다. 자신은 믿음의 중심을 어디에 두었으며, 무엇을 소중히 하고 존중하는가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오로지 진언으로 수행하고, 진언으로 공부하고, 진언으로 일하고, 진언으로 생활하며, 진언의 옷을 입고, 진언의 밥을 먹으며, 진언으로 숨 쉬고, 진언으로 대화하며, 진언으로 만나고 진언으로 헤어지며, 모든 것은 진언으로 시작하고 진언으로 마쳤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육자진언으로 종문(宗門)을 열면서 종명(宗名)을 진각(眞覺)이라 한 것은 진언으로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을 진언에서 찾을 때, 성존을 바르게 모시는 길입니다. “옛날에는 의발(衣鉢)이요, 이제는 심인법(心印法)이라.” 유법(遺法)의 말씀도 “옴마니반메훔”과 “깨쳐보라.” 말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심인법은 진언을 마음에 새긴 불심인(佛心印)의 법으로써 경(經)을 믿고, 스승의 가르침을 믿고, 인(因)지어 과(果) 받음을 믿고 수행할 때 심인을 깨치게 될 것입니다. 문자를 보고 이해하는 것은 깨달음이 아니며, 논의(論意)하는 것은 염송이 아닙니다. 오로지 마음의 소리로 염송할 때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성존 계실 때, 각자(覺者)님들은 잠시 미타진언을 부르게 하다가 폐기하고 모두 육자진언을 염송하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법문을 보이신 것입니다. 첫째는 안을 먼저 닦은 연후에 밖을 보호하라는 법문으로 물(物)의 주인인 각자님도 심(心)을 중심으로 법을 세우라는 뜻이요, 두 번째는 진각종은 육자진언 이외에는 어떠한 진언도 세울 수 없다는 법입니다. 그리고 “30년 동안 한 글자도 바꾸지 말라.” 강조하여 육자진언만을 세우라는 신신당부의 말씀을 남겼습니다. 성존 열반하신 후, 본의를 모르고 준제진언 파동이라는 가슴 아픈 일을 겪었습니다. 우리는 처음도 육자진언이요, 중간도 육자진언이며, 끝도 육자진언으로만 수행하여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진언 수행문에 입문한 수행자들입니다. 진언 이외의 법으로 공덕을 얻고자 하거나, 해탈하고자 하거나,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면 진각종도(眞覺宗徒)가 아닙니다. 공식 불사 시간에 진언 낭송을 두 번 하도록 한 뜻을 보면, 첫 낭송은 비로자나불에 귀명(歸命)하여 육자진언을 가지(加持) 받는다는 뜻이요, 두 번째는 진언 수행만을 하겠다는 약속을 표하는 것입니다. 선종(禪宗)에서 선지식으로부터 화두(話頭)를 받으면, 오로지 그 화두만을 들고 참선하는 법과 같습니다. 부처님 법은 무엇을 하든 공덕이 있습니다. 다만 쉽고 빠름의 방법이 다를 뿐입니다. 참선하는 사람은 참선만으로 공덕을 얻어야 하며, 염불하는 사람은 염불만으로 공덕을 쌓아야 하며, 독경하는 사람은 독경만으로 공덕을 쌓아야 하며, 진언을 염송하는 사람은 진언 염송만으로 공덕을 쌓아야 쉽게 해탈할 수 있습니다. 공덕을 쉽고 빠르게 이루려면, 복잡다난(複雜多難)한 자유시대일수록 자신이 세운 법에 흔들림 없이 중심을 세우고 타(他)를 향해 뒤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육자진언을 수행하여 심인(心印)을 깨달아 가정이 행복하고, 현세정화로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든다면, 이것이 진각성존의 가르침을 만분의 일이라도 실천하는 진언 수행자라 할 것입니다.
5.부처와 제보살과 중생들의 본심(本心)
밀교신문
“옴은 비로자나불, 마는 아축불, 니는 보생불, 반은 아미타불, 메는 불공성취불, 훔은 금강보살. 이 육자(六字)의 다라니(陀羅尼)는 부처와 및 제보살(諸菩薩)과 중생(衆生)들의 본심(本心)이라.”
본심은 곧 불심(佛心)입니다. 불심은 비로자나불의 마음입니다. 비로자나불의 마음은 본래 이름도 모양도 없어 보이지 않지만, 중생계에서는 억지로 부처라 이름하며, 성격을 청정이라 하는 것입니다. 밀교에서는 우주 법계가 본래 청정 본심이므로 비로자나불을 주인공으로 표기하며, 작용으로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 공(空), 식(識)으로 나누어 육대법신(六大法身)이라 합니다. 청정의 본심은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공능(功能)을 가지고 있습니다. 청정성이 가진 공능 가운데 단단한 마음은 땅이 되고, 습기(濕氣)의 마음은 물이 되고, 따뜻한 마음은 불이 되고, 움직이는 마음은 바람이 되고, 텅 빈 마음은 공이 되고, 아는 마음은 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섯으로 나누어진 마음은 각각의 존재로서 활동하면서 서로 합하기도 하고 나누어지기도 하면서 천변만화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천변만화하는 청정 본심은 만물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보살에 있으면 자비심이 되고, 연각(緣覺)에 있으면 십이인연을 깨달은 마음이 되며, 성문(聲聞)에 있으면 사제법(四諦法)을 깨달은 마음이 되고, 중생에 있으면 견물생심(見物生心)의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견물생심이란 중생은 물건을 보면, 가지려 하고, 모으려 하고, 바꾸려 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마음도 비로자나불의 청정 본심과 같이 천변만화를 일으키는 공능이 있습니다. 중생의 마음이 한 생각 진실할 때가 부처의 마음이요, 한 생각 자비할 때가 보살의 마음이며, 한 생각 깨끗할 때가 성문의 마음이요, 한 생각 고요할 때가 연각의 마음이며, 한 생각 착할 때가 천상의 마음이요, 한 생각 바를 때가 인간의 마음이며, 한 생각 투쟁할 때가 수라의 마음이요, 한 생각 어리석을 때가 축생의 마음이며, 한 생각 탐욕 할 때가 아귀의 마음이요, 한 생각 성날 때가 지옥의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한 생각의 마음을 옳게 사용하면 청정 본심으로 돌아갈 수 있는데, 중생은 이 공능을 좋은 방향으로 사용하지 않고 업(業)의 근원으로 만들어 육도를 윤회하는 방향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제 육도를 윤회하는 마음자리를 찾아봅니다.
법신불의 본심을 진여심(眞如心)으로 무형(無形)의 자성심이요, 중생의 업심(業心)을 유형(有形)의 자성심입니다. 무형의 자성심은 심인(心印)으로 영원하며, 유형의 자성심은 업의 번뇌로 윤회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법신이 윤회하는 중생을 위하여 천백억화신의 몸으로 나타나지만, 그 몸도 중생의 인연으로 생긴 몸이기에 곧 변하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잠시 머무는 화신불은 사대[地水火風]로 몸을 이루어 공(空)에서 놀며, 중도(中道)의 법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심(佛心)은 곧 허공과 같아서 하나의 마음에 만법을 포용하며, 만법을 포용한 마음을 어느 하나에다 중심을 세울 수 없어 무심(無心)이라 하며, 어느 하나에 정을 줄 수 없어 무정(無情)이라 하고, 어느 하나를 잡아 보일 수가 없어 무애(無礙)라 하며, 어느 하나로 수명을 정할 수 없어 무상(無常)이라 하며, 어느 하나로 가질 수 없어 평등(平等)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 하나만을 깨달으면 여래십호(如來十號) 가운데 어느 하나의 경지에 도달하여 수다원(須陀洹)이나 사다함(斯多含)이나 아나함(阿那含)이나 아라한(阿羅漢)이 되며, 전체를 깨달으면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의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중생은 수행에도 욕심을 일으킵니다. 정진도 고행도 제대로 하지 않고 큰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즉 해탈할 만큼 정진하지도 않고 해탈 이상의 열반이나 성불을 바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욕심내지 말고 하나하나 단계를 밟는 수행으로 먼저 자신의 본심부터 찾는 수행으로 시작합시다. 처음 들어가는 문은 무심(無心)으로 시작하든, 무정으로 시작하든, 무애(無礙)로 시작하든, 무상(無常)으로 시작하든, 평등으로 시작하든 각각의 쉬운 인연을 택하면 됩니다. 석가모니불의 고행(苦行), 아미타불의 원력, 문수보살은 지혜, 보현보살은 원만한 행(行), 관음보살은 자비(慈悲), 대세지(大勢至)보살은 희사(喜捨)를 보이신 것도 이와 같은 이치입니다. 이제 우리는 진언 염송하면서 무심(無心)을 시작으로 비로자나불의 청정한 마음자리와 하나가 되도록 수행합시다.
비로자나불의 청정한 법신의 마음자리가 곧 원만보신의 마음자리요, 원만보신의 마음자리가 곧 천백억화신의 마음자리며, 화신의 마음자리가 곧 나의 마음자리입니다. 보이지 않는 청정 본심이 보이게 나타나면 밝은 빛이 되고, 들리는 소리로 나타나면 진언이 되는 것입니다. 진언은 각각의 빛과 능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청정(淸淨)의 빛이 중생의 눈에 보일 때는 백색(白色)을 바탕으로 빛의 삼원색(三原色)이 나타나 오색의 신비로움으로 보이며, 오색은 다시 36색으로 보이며, 나아가 무한의 색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빛의 삼원색이 모양으로 나타나면 산하대지(山下大地)요 우리 몸입니다. 그리고 청정 본심의 소리가 진언입니다. 진언 가운데 가장 위대하고 가장 밝으며 가장 으뜸가는 진언이 옴·마·니·반·메·훔입니다. 진언의 첫소리 ‘옴’은 중앙의 비로자나불로 청정 본심을 지녔으며, ‘마’는 동방 아축불로 보리심을 일으키는 작용을 하고, ‘니’는 남방 보생불로 공덕을 이루는 작용을 하고, ‘반’은 서방 아미타불로 지혜를 일으키는 작용을 하고, ‘메’는 북방 불공성취불로 정진의 용맹심을 일으키는 작용을 하고, ‘훔’은 간방(間方)의 금강보살로 금강을 지녀 일체의 행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자진언을 염송할 때 우리 몸에 염송의 기수(記數)를 펼치는 것은 곧 빛의 상호공양(相互供養)이며, 소리의 상호공양이며, 불과 중생이 하나 되는 본심의 상호공양이 되는 것입니다. 상호공양으로 마음의 불상을 조성하고, 마음의 불탑을 세우며, 마음의 승을 공양하여 비로자나불의 청정 본심의 자리로 귀향하는 것입니다.
진언 수행은 대 자유인이 되어 비로자나불의 청정 본심의 자리로 귀향(歸鄕)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비로자나불이 좋은 의미로 나누어준 여섯 마음을 어리석게도 잘못 활용하여 윤회의 업만 더욱 두텁게 하였던 것입니다. 땅의 단단한 마음은 나눔을 멀리하였고, 물의 습한 마음은 부드러움을 멀리하였고, 불의 따뜻한 마음은 자비를 멀리하였고, 바람의 움직이는 마음은 선행을 멀리하였고, 공의 빈 마음은 집착을 쌓았으며, 식의 아는 마음은 사견만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이제 안과 밖이 청정한 본심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음을 참회하면서 제자리로 되돌려야 합니다. 되돌리는 방법은 ‘옴’을 부르면서 부처의 청정을 생각하고, ‘마’를 부르면서 부처의 견고한 보리심을 생각하고, ‘니’를 부르면서 부처의 공덕을 생각하고, ‘반’을 부르면서 부처의 지혜를 생각하고, ‘메’를 부르면서 부처의 용맹심을 생각하고, ‘훔’을 부르면서 부처의 상호공양을 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해탈과 열반을 멀리서만 찾았습니다. 나의 것이라는 생각, 영원할 것이라는 생각,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만 내려놓으면 그 자리가 해탈의 자리요 열반의 자리며 성불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손을 펴서 움켜쥔 것을 놓듯이, 웃음으로 성냄을 바꾸듯이, 고요한 가운데 지혜의 참마음으로 모든 것을 내려놓읍시다. 근심과 걱정은 애욕과 집착으로 생겨나고, 재앙은 욕심으로 들어오며, 허물은 경망스러움으로 생기며, 죄는 참지 못하는 가운데 짓게 되는 것입니다. 내 몸이 곧 무형(無形)의 법신이며, 천백억화신이 곧 나 자신입니다. 눈으로는 그릇된 빛을 보지 말며, 입으로는 실없는 말을 하지 말고 진언을 말하며, 몸으로는 부처를 닮는 결인(結印)으로 지혜와 덕을 쌓도록 합시다. 작은 공으로 큰 공덕을 바라지 말며, 지나간 일에 연연하여 원망하지 말며, 권력(權力)에 의뢰하고 금력(金力)을 믿지 말며, 상대방을 볼 때는 좋은 것을 생각하며, 용서하고 베푸는 마음으로 행동하면서 집착하던 것을 놓읍시다. 나 자신마저도 놓아버립시다. 모두 놓아버리면 자연 절로 비워질 것입니다. 마음이 비워지면, 비워진 그 공간에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채워져서 하나가 되는 대화합의 넉넉한 해탈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청정 본심의 자리로 귀향하는 최고의 길이 될 것입니다.
6.육자진언 염송을 왜 하는가?
밀교신문
문 : 옴마니반메훔을 어찌 이렇게 외웁니까?
답 : 법신부처님의 설법을 듣게 되어서 이전에 잘못한 것을 알게 되고 마음이 곧 고쳐지게 됩니다.
진각성존은 농림촌에서 법신불로부터 옴마니반메훔(AUM MA NI BHAN ME HŪṀ)을 계시받아 100일 정진하여 1946년 5월 16일 진언의 묘미를 깨달아 대각(大覺)을 이루었습니다. 다시 중생제도의 원을 세우고 49일간 보림[保任]을 거쳐 오로지 육자진언만을 수행하는 종문을 열었습니다. 육자진언은 법계 만사만리의 진리를 갖추었으며, 팔만사천 경전(經典)이 이를 의지하여 있으므로 진언을 염송하면 곧 부처 세계로 귀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래 부처였는데 어느 때부터인지는 중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중생 세계는 즐거움보다는 고통이 많은 세상입니다. 이것은 잘한 것보다 못하는 것이 많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고통의 세상을 벗어나려면 먼저 그 잘못을 찾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잘못을 찾는 법 가운데 하나가 진언 염송입니다. 답의 말씀을 나누면, 옴마니반메훔을 염송하면 첫째 법신부처님의 설법을 듣게 되고, 둘째 이전에 잘못한 것을 알게 되며, 셋째 마음을 고치게 되는 것입니다. 첫째 법신부처님의 설법을 듣는다는 것은, 당체설법(當體說法)을 듣는 것으로 과거 현재 미래 삼세의 인과를 깨닫게 되는 법이며, 둘째 이전에 잘못을 알게 된다는 것은, 과거 현재의 인과를 알게 되는 법이며, 셋째 마음이 고쳐지게 된다는 것은, 현재의 인과를 깨달아 미래의 삶을 알게 된다는 법입니다. 이것이 “깨달아 보라.” “참회해 보라.” “실천해 보라.” 하신 말씀으로 진각성존이 주신 화두(話頭)와도 같은 당체설법입니다.
중생은 육도를 윤회하면서 익힌 습관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잘못 익힌 습관을 고치려면 먼저 당체설법을 잘 듣고 그 잘못이 무엇이며, 고치는 방법은 어떻게 하는지를 알고 법대로 실천하여야 합니다. 당체설법은 수행자가 묻고 부처님이 답하는 법입니다. 이 법은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하는 법이므로 부처와 중생이 하나가 되지 않고는 묻고 답할 수가 없습니다. 당체설법의 내용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것으로서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하여 잘 잘못을 알려주는 법입니다. 당체설법 가운데는 잘못된 법을 지적받을 때가 많습니다. 지적받은 것을 고치는 방법도 염송하는 가운데 알 수 있고, 실천하는 법도 항송(恒誦) 하는 가운데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법을 같은 자리에서 같이 수행하여도 근기 낮은 사람은 귀가 먹고 눈이 어두워서 듣지도 보지도 못합니다. 낮은 근기를 높이는 방법 중에 제일 좋은 법이 항송(恒誦)입니다. 근기는 순간적으로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일상생활에서 무시 항송으로 높일 수 있습니다. 항송 하는 법은 남과 대화하지 않을 때도 옴마니반메훔, 앉거나 누울 때도 옴마니반메훔, 길을 가거나 넘어져도 옴마니반메훔, 놀라는 순간에도 옴마니반메훔, 꿈속에서도 옴마니반메훔, 이같이 행주좌와 어묵동정에 생각 생각에 항상 입속으로 옴마니반메훔을 부르는 것입니다. 진언을 부르면서 오매불망이 되는 순간, 부처님과 동체가 되어 당체설법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육자진언은 비로자나불의 불가사의한 힘을 지닌 심인(心印)을 인가받아 대 자유의 주인공이 되는 법입니다. ‘옴’은 법신불의 작용으로 우주 법계의 자연의 뜻을 담은 소리이며, 법계의 언어를 담은 소리이며, 법계의 몸을 담은 소리로 법신의 신구의(身口意)와 중생의 신구의를 하나로 상응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훔’은 보신의 불가사의한 힘인 ‘마니반메’와 합하여 중생에게 되돌리는 소리입니다. 그러므로 옴마니반메훔의 소리 울림에 의하여 내 몸과 마음이 법신의 몸과 하나로 합일되어 이 몸이 곧 법신이 되고, 이 마음이 곧 법신의 마음이 되는 경지에 이르면 몸 안의 세포가 모두 보살 위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진언을 부를 때는 옴마니반메훔의 소리를 분명하여야 합니다. 진언의 발음이 나라마다 조금씩 다른 것은 그 나라의 풍토성과 합일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풍토성으로 옴마니반메훔은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거나, 고통받을 때나, 고통이 들어 올 때는 ‘옴’과 ‘훔’의 발음이 분명하지 못합니다. ‘옴’의 발음을 음, 움, 운, 온, 등으로, ‘훔’의 발음은 흠, 홈, 훈, 혼, 등으로 발음하기도 합니다. 본인에게 물어보면 자신은 바르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는 진언의 소리가 자기 귀에 들리도록 하게 하여 분명한 발음을 하도록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옴마니반메훔 여섯 자는 우리가 살아가는 일생을 네 단계로 나누어서 볼 수 있습니다. ‘옴’은 출생의 뜻으로 부모님으로부터 몸을 받아서 성장하는 과정이요, ‘마니’는 성장한 상태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뜻하며, ‘반메’는 자기성취를 하면서 결실의 과정을 뜻하며, ‘훔’은 다음의 출생을 준비하는 과정을 뜻합니다. ‘옴’과 ‘훔’은 다 같이 출생의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옴’은 부처의 경지에서 출생하는 것이요, ‘훔’은 중생의 자리에서 출생하는 것입니다. 부처의 출생이 중생의 자리로 윤회를 시작하는 출생이라면, 중생의 출생은 윤회를 벗어나는 해탈하는 출생입니다. 법신부처님로부터 출생을 받고 다시 진언법을 만나 서원대로 살다가 회향의 해탈로 돌아간다면 다음 생은 현생보다 나은 곳에 태어날 것입니다. 이 네 단계는 일생만 나누는 것이 아니요, 하루를 새벽과 오전과 오후와 저녁으로도 나눌 수도 있고, 봄, 여름, 가을, 겨울로 1년으로 나눌 수도 있습니다. 하루의 시작은 새벽 정진에 있고, 일 년의 시작은 봄에 있습니다. 봄에 좋은 씨를 뿌려 좋은 촉이 난다면, 튼튼한 나뭇잎과 아름다운 꽃과 열매가 성실해지는 여름이 될 것이며, 오곡백과가 제대로 영글어 풍성한 가을 맞아 추수할 것이요, 편안하게 겨울을 보내면서 새로운 봄을 맞이할 준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봄은 봄답게 보내야 하고, 여름은 여름답게 보내야 하고, 가을은 가을답게 보내야 하고, 겨울은 겨울답게 보내야 합니다. 싹이 날 때는 옳은 싹이 나야 하고, 잎이 필 때는 옳은 잎이 피어야 하며, 열매를 맺어야 할 때는 옳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만약에 여름에 된서리와 우박이 내리고, 겨울에 소낙비가 쏟아진다면 좋은 현상이 아닙니다. 자연의 현상에서 일어나는 법문을 보고 진리를 깨닫는 불공을 해야 합니다. 자연의 현실에서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면 진리적 해탈을 얻을 수 없습니다.
불공을 일반적으로 말하기를, 가난한 사람이 재물을 구하기를 바라며, 헐벗은 자가 옷을 얻기를 바라고, 병든 자가 건강하기를 바라면서 화목한 가정과 행복한 삶을 서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이 같은 시대 같은 곳에 태어나서 같은 기능을 배우고 익힙니다. 심지어 같은 부모를 만나 한 지붕 아래에서 생활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같거나 비슷하여야 할 것인데, 몸과 생각과 언어가 각각 다르게 나타나며, 생활의 습관도 다르게 나타납니다. 넉넉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건강한 사람과 병든 사람, 화목한 사람과 불화(不和)한 사람,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의 차별이 있습니다. 때로는 순간적으로도 같은 음식을 먹으면서 배탈 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에는 반드시 그 어떤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막히고 무너지고 사라지고 부서지고 더디게 되는 것은 좋지 못한 인연과 화합하였기 때문입니다. 좋지 못한 원인을 제거하지 않고는 바라는 것은 이룩할 수 없을 것입니다. 비유하면, 밑 빠진 항아리에 물을 채우고자 하고, 좁은 그릇에 큰 것을 넣고자 하고, 작은 그릇에 많이 담으려 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의 복 그릇과 능력의 한계를 생각하지 않고 분에 넘는 것을 구하고, 맞지 않는 것을 넣으려 하고, 오를 수 없는 높은 곳에 오르려 하고,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려는 생각은 원래 그릇된 생각이며 행위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하늘이나 땅이나 자연이나 부모나 시간이 주는 것이 아니며, 모두 과거 나 자신이 지은 인(因)으로 나타나는 업의 현상들입니다. 모든 현상은 자신이 제공한 원인에 의한 것인데도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늘을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고 부모를 원망하고 시대를 탓하면서 가족과 이웃에게까지 피해를 주는 행위를 하기도 합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진언 수행자는 기복불공(祈福佛供)에 마음 두지 말고, 먼저 원인을 깨달아서 삼계에 주인공으로서 뜻하는 바를 모두 이루면서 살아가도록 마음 닦는 수행을 합시다.
7. 심인당은 비로자나불의 금강법계궁
밀교신문
심인당은 금강법계 비로자나궁전(毘盧遮那宮殿)이라.
정보리심 아축불은 그 동방에 항상 있고 /만법능생 보생불은 그 남방에 항상 있고 설법단의(說法斷疑) 아미타불 그 서방에 항상 있고 /이리원만(二利圓滿) 성취불은 그 북방에 항상 있다.
법신 비로자나불이 인증(認證)한 마음인 심인(心印)이 무시광대겁으로부터 업(業)을 지어서 윤회하는 중생심으로 변하였습니다. 다시 본래의 고향인 심인으로 돌아가기 위해 진언 수행으로 참회 정진하는 도량이 심인당(心印堂)입니다. 진각성존은 창종(創宗) 당시 참회원(懺悔園)이란 명칭을 6년이 지난 뒤 「심인불교(心印佛敎)」 「진각종(眞覺宗)」 「심인당」으로 개칭하고 법신 비로자나불을 교주로, 육자진언을 수행본존(修行本尊)으로 하여 밀교 교리를 확립하였습니다. 법신 비로자나불은 오직 하나 진리로 존재하며, 우주 법계의 심인으로 작용하면서 일체 만물을 포용함에 허공처럼 광대하여 시작과 마침이 없으십니다. 중생은 무명에 가리어 자신의 심인을 알지 못하므로 방편으로 화현(化現)하여 가지수법(加持修法)을 행하는 도량이 비로자나불의 금강법계궁입니다.
비로자나불이 자증교설(自證敎說) 하는 금강법계궁의 금강(金剛)은 비로자나불의 지덕(智德)의 견고함으로 중생의 번뇌를 깨뜨릴 수 있는 공능(功能)을 뜻하며, 법계는 부처님의 세계를 포함한 일체 국토를 말함이요, 궁전은 비로자나불이 일체의 공덕을 베푸는 청정도량을 뜻합니다. 그리고 석가모니불이 보살로 수행할 때, 연등불로부터 성불수기(成佛受記)를 받은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곳은 수행자가 비로자나불로부터 성불의 수기를 받을 수 있는 전법의 도량이요, 자성을 밝히는 심인도량(心印道場)이며, 일체의 장애가 사라지는 해탈의 자비도량(慈悲道場)입니다.
현교(顯敎)의 사찰처럼 불상(佛像)을 모시지 않아도 비로자나불이 무형으로 계시는 마음의 궁전이므로 중앙에는 법계체성지를 지닌 비로자나불이 청정법신으로 상주하며, 동방으로는 대원경지를 지닌 아축불이 자성법신으로 계시며, 남방으로는 평등성지를 지닌 보생불이 자수용법신으로 계시며, 서방으로는 묘관찰지를 지닌 아미타불이 타수용법신으로 상주하며, 북방으로는 성소작지를 지닌 불공성취불이 변화법신으로 상주하며, 간방으로는 일체지지를 지닌 금강보살이 응화법신으로 상주하는 설법하는 도량입니다.
5불과 금강보살들이 상주하면서 수행자가 본래의 청정본연(淸淨本然)을 얻고자 하면 비로자나불이 설하는 법을 듣게 되고, 만물과 명예와 건강과 화합하기 서원하면 아축불이 설하는 법을 듣게 되고, 공덕 쌓기를 서원하면 보생불이 설하는 법을 듣게 되고, 지혜문이 열리기를 서원하면 아미타불이 설하는 법을 듣게 되고, 하고자 하는 일에 장애 없이 성공하기를 서원하면 불공성취불이 설하는 법을 듣게 되고, 일체의 모든 서원을 이루고자 서원하면 금강보살이 설하는 법을 듣게 되는 곳이 금강법계궁입니다. 동방 아축불의 보리심, 남방 보생불의 공덕취, 서방 아미타불의 지혜문, 북방 불공성취불의 대정진, 간방 금강보살 자비행의 각각 다른 관문으로 법을 설 하지만 그 방향으로 염송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앙 본존을 향하여 염송하면 오불과 금강의 모든 보살이 수행자의 원에 맞게 찾아와서 법을 설합니다. 수행법은 먼저 보리심(菩提心)으로 들어가[信] 공덕을 쌓고[施] 지혜를 밝히며[戒] 정진하여[念誦] 자비로 회향할 수도 있고, 공덕취(功德聚)로 먼저 들어가 지혜문과 대정진을 지나 보리심으로 회향할 수도 있고, 지혜문(智慧門)으로 먼저 들어가 대정진과 보리심을 거처 공덕취에서 회향할 수도 있고, 대정진(大精進)으로 먼저 들어가 보리심과 공덕취를 거처 지혜문에서 회향할 수도 있습니다. 또 네 가지 문을 그치지 않고 하나의 문에서만 머물면서 수행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수행방법은 수행자가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원에 따라 자연 절로 먼저 들어가는 문이 정해집니다. 모든 것은 법에 맡기고 수행자는 오로지 자신의 능력과 인지음에 따라 정진만 하면 무엇이든지 이루어질 수 있는 곳이 금강법계궁입니다.
불교에는 중생이 부처님을 찾아가는 길과 부처님이 중생을 찾아오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중생이 부처님을 찾아가는 때는 불당(佛堂)과 법당(法堂)을 경치 좋은 장소에 웅장한 건물을 세우고, 화려하게 단청하여 찾아오는 이로 하여금 환희심이 나게 장엄해야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중생을 찾아오게 하는 길은 중생은 마음만 장엄하면 됩니다. 중생의 마음으로 최고 장엄 된 것이 금강법계궁입니다. 불당이나 법당에 들어가는 데는 삼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금강법계궁도 삼문을 지나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찰의 화려한 장엄은 삼문(三門)으로 시작되고, 금강법계궁의 장엄은 삼밀(三密)로 이루어집니다. 사찰의 불당(佛堂)과 금강법계궁을 비교하면, 일주문(一株門)의 불이(不二)의 경지를 나타내는 장엄은 삼밀에서 두 손을 모아 결인(結印)하는 신밀(身密)과 같은 것이요, 천왕문과 사천왕문의 마군을 항복시키는 장엄은 삼밀에서 자신의 번뇌를 다스리는 진언 염송의 구밀(口密)과 같은 것이요, 불이(不二)로 들어가는 해탈문의 장엄은 오불(五佛)을 관하는 의밀(意密)과 같은 것입니다. 이처럼 금강법계궁은 외관상의 장엄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수행자 자신이 곧 최고의 장엄이 되는 것입니다. 밀교 수행자의 장엄은 먼저 몸과 입을 청정히 하고, 다음으로 욕심, 성냄, 어리석음, 교만, 의심을 버리는 자비의 장엄입니다. 자비의 장엄으로 부드러움이 있고, 청결이 있으며, 엄숙함이 있고, 예의를 갖추어 자성삼보(自性三寶)의 귀명(歸命)으로 해탈 공덕과 열반 공덕과 성불 공덕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해탈 공덕의 성취는 윤회하는 곳마다 가장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요, 열반 공덕의 성취는 윤회에서 대 자유인이 되는 것이며, 성불 공덕의 성취는 무상정등정각을 이루어 영원한 본성(本性)의 자리에 귀향하는 것을 말합니다.
중생은 마음이 너무 굳고 딱딱하여 많은 고통을 받고 있으면서도 본연의 자리로 귀향하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욕심, 성냄, 어리석음, 교만, 의심(疑心)으로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므로 윤회의 자리가 점점 더 굳어지고 멀어지고 있습니다. 다섯의 근본 번뇌 중에 제일 좋지 않은 것이 의심입니다. 오로지 자기만을 생각함으로써 남의 모든 것을 무시하는 분위기에 젖어 있는 것이 의심입니다. 잠시만이라도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고 오탁(汚濁)에 물들어 있는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찰진 성품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비유하면, 쌀은 쌀끼리 서로 붙지 않습니다. 물을 부어 밥을 지을 때, 불기운이 닿아 익으면 저절로 붙게 되면서 쌀로서의 딱딱함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자기만을 생각하는 굳고 딱딱한 마음으로 주위의 세상과 융합하지 못하는 마음을 금강법계궁의 솥에 들어와 진언 염송의 물을 붓고, 용맹정진의 불꽃으로 욕심내고 성내고 어리석고 교만하고 의심하는 마음을 하나로 뒤섞여 본래의 자성으로 돌아갈 때, 개개인의 딱딱한 경계심이 변하여 일체중생을 생각하는 화합의 자비심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제 금강법계궁에서 진언 수행으로 자신의 마음속에 깊숙이 자리한 악(惡)의 씨앗을 녹여서 선(善)의 씨앗으로 바뀌도록 서원하고 정진합시다. 비로자나불의 금강법계궁전에서 자비의 물로 단단한 번뇌를 흠뻑 적시고 불리어서 용맹의 불로 익힌다면, 번뇌(煩惱)는 곧 보리(菩提)로 변할 것입니다. 보리의 공덕에서 지혜의 문이 열리고, 지혜의 문에서 중생을 제도하는 원력을 세워 대 정진한다면, 해탈의 자비 공덕이 성취될 것입니다. 해탈의 자비 공덕을 이룰 수 있는 우리들의 마음이 곧 금강법계궁이요, 내가 사는 집과 국토와 지구촌도 모두 금강법계궁이 될 것입니다. 이곳은 육자진언을 염송하는 복 밭으로 진리(眞理)를 앞세우고, 현실(現實)을 뒤세우는 부처님의 본뜻을 실천하여 원만한 상호공양이 영원토록 이루어지기를 서원합시다. 누구나 언제나 정법을 만날 수 있고, 해탈할 수 있는 곳, 육도 윤회를 벗어날 수 있는 도량을 만듭시다. 처음 금강법계궁에 들어왔을 때처럼, 다시 초심(初心)으로 돌아가 마음 모으고 앉아 고요히 세속에서 본심을 잃고 바삐 살면서 피곤하고 힘들었던 자신의 삶을 내려놓읍시다. 그리고 비로자나불의 자비로 장엄 된 가지 관정을 받고 가르침대로 실천하는 진언 수행자가 되기를 서원합시다.
8. 자성법신(自性法身)
밀교신문
“비로자나(毘盧遮那)부처님은 시방삼세 하나이라. 온 우주에 충만(充滿)하여 없는 곳이 없으므로, 가까이 곧 내 마음에 있는 것을 먼저 알라.”
석가모니불을 불교의 교주로만 알고 있는 불자들에게 비로자나불이 본래의 교주임을 알리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편으로 자신들이 본래부터 지닌 자성이 곧 법계의 성(性)이라는 것을 먼저 알리고 다음으로 도솔천 부처님→하나 부처님→법신불 →법계진각님 등으로 표현하면서 최후에 비로자나불이 불교의 교주라는 것을 밝혔습니다. 이렇게 순차적 바뀐 명칭들은 모두 우리들의 본심(本心)인 심인(心印)으로서 자성법신이 되는 것입니다.
비로자나불과 자성법신은 동체심인(同體心印)으로서 청정의 공능(功能)을 지닌 법신불입니다. 비로자나불의 뿌리에서 화신과 응신의 몸을 나타내면서 장소와 시대와 중생 근기에 맞추어 교화하였습니다.
이것은 풍토성(風土性)과 혈지성(血智性)을 찾아 서로 상응하여 싹을 틔우고, 잎을 내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다시 자성법신으로 회향하는 참뜻을 밝힌 것입니다.
진각성존은 비로자나불을 교주로 하고 육자진언을 수행본존(修行本尊)으로 정립하면서 귀명(歸命) 부분과 수행 부분을 분명하게 밝히면서 중생의 삼고(三苦)에서 해탈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자성법신이 무상(無相)이듯이 법신 비로자나불도 무상불(無相佛)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불상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불상(佛像)을 배척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기 17(1963)년 일반불교에서 불상을 건립하고자 할 때, 전국 심인당에 공문을 발송하여 신교도들에게 불상 건립에 동참하여 복을 짓도록 권선(勸善)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무상불을 강조한 것은 진언 수행 과정에서 형상에 집착하여 기복불공(祈福佛供)으로 흐르지 않도록 차단한 하나의 방편이었습니다.
중생은 의뢰하는 마음과 밖으로 향하는 마음과 화려한 상불(相佛)을 보고 유혹당하기 쉬운 마음이 있습니다. 이러한 유혹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유상불(有相佛)을 멀리하고 자신 내면의 본래불(本來佛)을 찾도록 “가까이 곧 내 마음에 있는 것을 먼저 알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법문의 진수(眞髓)는 자신이 곧 부처임을 깨닫게 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중생들은 처음으로 신심을 일으키는 데는 때로는 화려한 장엄 자체가 필요할 수 있지만, 본심을 찾는 데는 오히려 방해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내 마음에 본래 있어서 어디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누구에게도 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천차만별의 중생심을 불성(佛性) 하나로 표현하면서 내면에 갖추고 있는 불가사의한 무진공능(無盡功能)의 불이문(不二門)을 스스로 찾아 비로자나불의 만다라 세계에 귀향하도록 한 것입니다.
유상불에 집착하거나 유혹당하지 않도록 많은 경전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금강경’에서 “무릇 상이 있는 것은 다 허망한 것이라, 만약 모든 상이 상 아님을 보면, 즉시 여래를 본다(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고 하였으며, 또한 “만약 모양으로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함이라 여래를 보지 못하느니라(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하여 모양으로 부처를 보지 말라 하였으며, 다시 “일체의 유위법은 실답지 못하고 허망하여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고, 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고, 아침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은 줄을 응당히 이와 같이 관할지니라(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하여 무주상법을 설하였습니다.
그리고 ‘화엄경’에서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음이라[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하여 하나의 자성법신임을 밝히고 있으며, 선종(禪宗)의 문자를 세우지 아니하는 직지인심견성성불(直指人心見性成佛)의 가르침도 모두 자성법신을 뜻하는 것입니다. 무상(無相)이요, 무위(無爲)인 자성법신은 나고 멸함이 없고, 있고 없음도 없고, 크고 작음이 없고, 밝고 어둠이 없고, 얻고 잃음도 없고, 모양도 차별도 없는 이것이 곧 나 자신의 소소영영(昭昭靈靈) 하는 천진불(天眞佛)인 자성부처라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다만, 중생은 경계를 보아 마음을 일으키기[見物生心] 때문에 진실의 본성을 보지 못할 뿐입니다. 그 진실의 본성(本性)은 가까이 곧 내 마음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법신 비로자나불은 가까이 곧 내 마음에 있습니다. 그리고 마왕 파순이도 가까이 곧 내 마음에 있습니다. 중생의 마음 씀에 따라서 나 자신이 부처도 되고 마왕도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즉 한순간에 지옥과 극락을 오갈 수 있는 마음이 자성법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부처의 마음을 지니고도 중생으로 살아가면서 고통 받고 있습니다. 마음 하나 잘 사용하면 얼마든지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데, 왜 쉬운 길을 두고 어려운 길로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자비한 마음을 평생 사용하여도 다 사용하지 못할 것이며, 남을 돕는 보시행도 평생 하여도 다 하지 못할 것이며, 입으로 좋은 말을 평생 하여도 다 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현생에 사람으로 태어나 부처님 정법까지 만났으니, 복 가운데 가장 큰 복을 받은 것입니다. 참으로 귀하게 받은 행운의 몸을 다음 생에도 받을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지금부터 이 좋은 기회를 놓이지 말고 오늘부터라도 자성 법신의 본분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자성 법신의 본분은 몸으로 부지런히 정진하며, 몸으로는 살생, 투도, 사음하지 말고, 입으로는 거짓말,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으며, 욕하지 말고, 말을 꾸미지 말며, 뜻으로는 욕심을 생각하지 않고, 성내지 않으며, 어리석은 생각 하지 말고 십선(十善)을 행해야 할 것입니다.
한평생 선을 행하고자 하여도 시간 없고, 장소 없고, 사람이 없는데, 굳이 악을 지을 시간과 장소와 대상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불보살의 되고자 하는 마음은 다음으로 미루고 우선 중생으로서 삶을 바르게 하는 깨달음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그 깨달음이 무엇이겠습니까? 곧 “가까이 곧 내 마음에 있는 것을 먼저 알라.” 입니다. 비로자나불의 자내증(自內證)의 경지에서 보면, 자성법신은 위와 아래도 없고, 좌와 우도 없으며, 모두가 하나의 법계로 귀결되어 평등한 자체입니다. 중생이 자성법신의 자내증의 경지에서 설사 윤회하여도 고통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여 자진 고행으로 해탈의 참맛을 볼 것입니다.
중생은 언제부터인지 자내증의 자리를 잊고, 나고 죽음의 생을 받으면서 무한한 고통을 감내하면서 윤회를 거듭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윤회가 무엇이며,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윤회와 고통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라 생각하다가 삶이 지나치게 즐겁거나 괴로울 때는 그것을 연장하거나 벗어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생각으로 다시 태어나 이와 같은 즐거움이 지속하기를 바라기도 하고, 다시 태어나 이러한 괴로움을 받지 않고 즐거운 삶을 살아보았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던 것입니다. 중생들의 이러한 바람에 의하여 비로자나불이 중생들의 원력에 맞추어 수없이 많은 화신불로 출생하였습니다. 앞으로도 불법이 사라지려 할 때, 세상에 사악한 법이 가득할 때, 불법(佛法)이 매도되고, 불상과 불탑은 파괴되고 허물어지며, 수행자는 깨달음에 뜻이 없고 부귀영달을 구할 때, 새로운 화신불이 출생하여 다시 정법시대로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중생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어려울 때마다 화신불이 출현하여 구제할 것이니 얼마나 행복합니까? 우리는 부처님을 만나는 시기를 앞당겨야 합니다. 앞당기는 법은 자성법신의 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한 부처가 성도(成道) 하면 국토 모두가 성불한다.”고 하였습니다. 비유하면, 자석이 쇠붙이를 당기듯, 물로 자라나는 생명이 물을 찾아 뿌리를 뻗어가듯, 자성법신[佛]이 자성법신[衆生]을 찾아올 것입니다.
중생은 자성법신이 가진 자내증의 진실 법을 모르고, 밖에서 불을 찾아 섬기고 있습니다. 이제 자신을 향하여 귀명하고, 자신을 향하여 서원하며, 자신을 위하여 정진합시다. 내가 진실한 마음으로 합장하면, 법신과 화신도 함께 합장할 것이며, 내가 결인하면, 법신과 화신도 함께 결인할 것이요, 내가 진언을 염송하면, 법신과 화신도 함께 진언 염송할 것이요, 내가 부처를 관상하면, 법신과 화신도 함께 부처를 관상할 것입니다. 나의 마음이 영원불멸의 세계로 향하면, 법신과 화신도 함께 함께 영원불멸이 될 것입니다.
9.심인진리
밀교신문
“심인(心印)은 곧 다라니를 내 마음에 새겨있는 불심인(佛心印)인 삼매왕(三昧王)을 가리켜서 말함이요. 진리는 곧 변함없는 만유실체 본성(本性)이라. 삼밀(三密)로써 내 마음에 항상 인(印)을 새겨 가져 실상 같이 자심 알아, 내 잘못을 깨달아서 지심으로 참회하고 실천함이 정도니라.”
심인(心印)을 깨쳐 진리를 다스리는 것이 진각성존의 가르침입니다. 심인을 깨치기 위하여 심인에 귀명하는 것입니다. 심인에 귀명하는 것은 부처님이 인증한 불심인(佛心印)에 귀명하는 것으로 금생에만 국한한 것이 아니라, 삼세를 통하여 귀명함을 말합니다. 전법(傳法)의 인증(認證)인 가사(袈裟)와 발우(鉢盂)를 태운 육조 혜능(惠能)스님의 심인과 같은 맥락을 지녔으나 진리를 다스리는 부분은 다릅니다. 심인은 총인(總印)으로, 진리는 통리(統理)의 뜻으로 교화의 문을 열어 심인불교(心印佛敎), 심인당(心印堂), 심인공부(心印工夫)를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심인진리란 수행의 본존인 육자심인(六字心印)에 귀명하고, 삼세(三世)에 변함없는 만유 실체인 본성의 진리에서 자신의 허물을 참회하고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心]은 하나입니다. 하나의 마음이 상[森羅萬像]으로 나타날 때, 인증(印證)의 작용으로 각각 다른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의 마음, 보살의 마음, 연각의 마음, 성문의 마음, 중생의 마음, 흙의 마음, 물의 마음, 불의 마음, 바람의 마음, 초목의 마음 등으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누어진 마음은 또한 각각의 체성(體性) 따라 8만4천의 경계[森羅萬境]로 작용합니다. 8만4천의 작용 가운데 부처님으로부터 인증(認證)받으면 불심인(佛心印)이 되고, 보살의 인증을 받으면 보살심인(菩薩心印=薩埵心印)이 되며, 성문이 인증하면 성문심인(聲聞心印)이 되고, 연각이 인증하면 연각심인(緣覺心印)이 되는 것입니다. 천태지자(天台智者)는 화엄 법계를 인증받아 화엄심인(華嚴心印)을 전하였으며, 선종(禪宗)은 화두 탐구로 인증받아 선심인(禪心印)이 되었습니다. 선심인의 중심은 가섭존자의 심법(心法)이 달마(達摩)로 이어져서 동토 혜능(惠能)에서 빛을 발하여 많은 선종의 종파가 나누어진 심법입니다. 중생의 마음이 천차만별이면, 인도하는 스승도 천차만별이요, 수행방법도 천차만별이며, 심인을 깨치는 방법도 다양합니다.
화두 없는 묵조선(黙照禪)이나, 경전을 독송하고, 염불하고, 계율을 지키고, 보시하고, 인욕하고, 진언 수행하고, 불탑을 조성하고, 불화를 그려도 심인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만 수행마다 깨달음이 다르고, 화두마다 깨달음이 다르고, 나타나는 법문이 각각 다르지만, 모두가 심인을 인증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종문(宗門)과 종파(宗派)가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십호(十號)인 여래(如來), 응공(應供), 정변지(正徧智), 명행족(明行足), 선서(善逝), 세간혜(世間慧), 무상사(無上士), 조어장부(調御丈夫), 천인사(天人師), 불세존(佛世尊)은 모두 무상정등정각의 일부분 깨달음을 얻은 불심인의 자리입니다. 이 열 가지 공능(功能)을 모두 갖추었을 때 비로소 구경성불인 무상정등정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 지닌 심인(心印)은 삼라만상과 삼라만경의 일부분의 깨달음을 누구나 다 얻을 수 있지만 뿌리는 같습니다. 관세음보살의 본심인 육자진언이 비로자나불의 본심에서 나온 것이요, 모든 보살의 본심에서 유출한 것이며, 중생들의 본심에서 나온 진언입니다. 이러한 육자심인이 아축불이 인증(認證)하면 보리심인(菩提心印)이 되고, 보생불이 인증하면 공덕심인(功德心印)이 되며, 아미타불에 인증하면 지혜심인(智慧心印)이 되고, 불공성취불이 인증하면 정진심인(精進心印)이 되고, 금강살타보살이 인증하면 금강심인(金剛心印)이요 살타심인(薩埵心印)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만다라의 제존이 각각의 심인으로 인증받아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자진언을 염송하면 모든 불보살이 인증으로 불심인의 자리에서 진언의 묘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심인은 남을 의지하여 인증받을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 믿고 실천하는 가운데 인증받을 수 있습니다. 선종에서 화두(話頭)를 들고 참선하는 수행자는 스승으로부터 받은 화두에만 마음을 모아 오매불망 탐구하듯, 진언 수행자는 오로지 다라니[眞言]만을 마음에 새기면서 행주좌와 어묵동정에 염송함으로써 부처님으로부터 인증받을 수 있습니다. 인증을 받았을 때 자신의 본성을 깨닫게 되고, 깨달음을 얻었을 때 자신의 허물을 알게 되며, 다시 참회 수행으로 공덕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공덕으로 중생의 업을 멸하여 해탈하는 것입니다. 참회 공덕은 최고의 중생이 되는 것입니다.
최고의 중생은 현실적인 가난과 병고와 불화의 고통에서 벗어난 자리입니다. 부처로부터 인증받은 불심인(佛心印)이 아니면, 삼매에 들어갈 수도 없고 육자진언의 묘리도 깨달을 수 없으며, 삼고를 해탈할 수도 없습니다. 해탈하기 위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수행하여도 반드시 정도 수행을 하여야 합니다. 본래 진리에는 정도니 외도니 하는 구분이 없습니다. 마음을 한곳에 모으기 위하여 귀명할 수 있는 본존을 세우고, 그 본존의 가르침을 준수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정도와 외도로 구분되는 것입니다. 외도 수행은 올바르게 정해진 방편을 따르지 않고 사견에 집착하여 탐진치를 중심으로 하는 번뇌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만일 본심 진언이 아닌 다른 것에 귀명(歸命)하고 수행한다면, 그것은 심인진리의 법을 따르지 수행이 아닌, 탐진치에 물드는 외도의 수행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진언 수행이 나와는 맞지 않은 법이라고 생각하면서 의심(疑心)하여 심마(心魔)를 일으킨 상태라면, 아무리 용맹을 세워 염송하여도 깨달음의 공덕은 얻지 못할 것입니다. 심마는 곧 자심마(自心魔)로서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의심을 가지는 순간 자연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심마가 처음 들어올 때는 기세등등하게 들어오지만 나갈 때는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비유하면, 100년 동안 어둡던 굴속에 불을 밝히면 어둠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심마를 겁내지 말고 믿음을 굳게 세우면 저절로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만일 심마에 들은 상태에서 용맹심을 세운다면 그것은 만용(蠻勇)이 되어 세월만 허송하게 될 것입니다. 속히 믿음을 굳건하게 세워 심마를 항복시키거나 그렇지 않으면 다른 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화신 석가모니불 열반으로 친교(親敎)가 멀어진 지금에는 진리의 부처이신 법신불의 가르침으로 법의 중심을 세워야 하는 시절입니다. 아무리 많은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이 항상 우리 곁에 존재하며 가르침을 내리는 분이 법신불입니다. 형상에 의존하는 마음을 버리고 자신의 진면목(眞面目)의 불심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부처는 본래 불심인이 필요로 하지 않듯이 중생에게는 중생의 마음이 필요가 없어야 합니다. 부처님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중생의 마음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중생도 윤회의 업이 되는 중생의 마음을 놓고 불심인으로 돌아가는 불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어리석은 중생은 필요 없는 중생의 마음을 소중하게 생각하여 놓지 않고 있습니다. 중생심이 작용하면, 무상(無常)의 삼라만상(森羅萬像)과 삼라만경(森羅萬境)을 만들어 고달픈 삶을 살게 될 뿐입니다. 우리들 자신이 본래부터 지닌 불심인은 이름과 형상도 없으면서 지극히 크기도 하고, 지극히 적기도 하며, 텅텅 비어 호호하고 탕탕하며 외외(巍巍)하여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시간으로는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고 있으며, 공간으로는 하늘에 있으면 하늘의 주인공이요, 땅에 있으면 땅의 주인공이며, 허공에 있으면 허공의 주인공이요, 만물에 있으면 만물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자리는 명예의 주인공이 되고, 물질의 주인공이 되며, 권력의 주인공으로 머물기도 합니다. 모든 것의 주인공이 되는 불심인을 깨달으면 우리는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고 가질 수 있어 자유자재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심인을 찾는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을 찾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은 심인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고 잃어버린 불심인을 찾아 부처님으로부터 다시 인증받아 가난과 병고와 불화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해탈의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10.부처님의 위신력(威神力)
밀교신문
“고해(苦海) 중의 죄업중생(罪業衆生) 일심(一心)으로 삼보(三寶)에게 참회(懺悔)하고 귀명(歸命)하면 부처님의 미묘(微妙)하신 금색광명(金色光明) 받을지니 이 광명(光明)을 받는 자는 몸의 병과 마음 병이 모두 소멸(消滅)하느니라.”
위신력이란 만물이 가지고 있는 신통한 힘을 말합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입으로 말하고, 몸으로 닿임을 알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위신력입니다. 어린 사자 새끼는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아도 뭇 동물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사자가 가진 위신력이며, 새싹을 돋게 하는 봄, 꽃이 피고 숲이 우거지게 하는 여름, 열매를 익히고 단풍이 드는 가을, 꽁꽁 얼리는 겨울 등이 시간이 가진 위신력입니다. 이처럼 인간과 자연과 시간은 각각의 위신력으로 운영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위신력은 볼 수도 없고, 들을 수 없고, 맛볼 수도 없고, 말할 수 없고, 표현할 수 없고, 측량할 수 없이 무량하고 불가사의하게 잠재하여 있습니다. 이 신비로운 힘은 생명이 있거나, 생명이 없는 무정물이나, 시간에 있으면서 다만 강하고 약하고 위대하고 저속한 차이가 다를 뿐입니다. 이러한 위신력의 운용에 따라 자연은 성주괴공(成住壞空)하고, 만물은 생주이멸(生住異滅) 하며, 생명은 생노병사(生老病死)로 윤회하는 것입니다.
십 법계인 사성(四聖)과 육범(六凡)의 가진 위신력을 보면, 청정성의 부처님 위신력을 중심으로 보살은 자비의 힘, 연각은 인연을 깨닫는 힘, 성문은 아라한의 힘, 천상은 즐거움을 누리는 힘, 수라는 투쟁(鬪爭)하는 힘, 인간은 희노애락(喜怒愛樂)의 힘, 축생은 어리석은 힘, 아귀는 배고픔의 힘, 지옥은 고통받는 힘이 위신력입니다. 이 위신력은 하나로 통제되기도 하고 나누어 활용하기도 합니다.
비유하면, 대통령이 지닌 힘을 각부서의 장관들이 나누어 활동하고, 회장이 지닌 힘을 사장들이 나누어 활용하고, 사장이 지닌 힘을 부장들이 나누어 활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불법(佛法)이 세간법과 같아서 부처님의 위신력도 보살과 천신들이 나누어 활용합니다. 비로자나불의 위신력 가운데 금강 견고한 자성의 위신력은 아축불이, 공덕장엄의 위신력은 보생불이, 수용 지혜의 위신력은 아미타불이, 변화의 위신력은 불공성취불이, 보리심 공덕취 지혜문 대정진의 위신력은 16대보살이, 내외공양의 위신력은 팔공양이, 교화 방편의 위신력은 사섭지보살이 활용하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비로자나불의 위신력을 나누어 활용하게 한 것은 기도자들이 곧바로 부처님의 위신력을 감당할 힘이 없음을 알고 대자대비의 마음으로 누구나 다 근기에 맞추어 수행하여 각각의 해탈을 성취하게 하신 것입니다. 즉 보살에게 기도하여 보살이 지닌 위신력을 받게 하고, 연각에게 기도하여 연각의 위신력을 받게 하며, 성문에게 기도하여 성문의 위신력을 받게 하며, 관세음보살, 보현보살, 문수보살, 지장보살에게 기도하여 그 보살들이 가진 위신력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위신력을 받을 수 있는 세계는 십 법계 가운데 인간세계뿐입니다. 천상, 수라, 축생, 아귀, 지옥은 과보를 받기만 하는 곳입니다. 오로지 인간세계만 가지기도 하고, 모으기도 하고, 지배하기도 하고, 누리기도 하고, 벗어나기도 하는 세계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세계에 태어난 이 좋은 기회를 놓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부처님이 가진 불가사의한 무량한 위신력을 가지고 있지만, 무명에 가리어 알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서 도리어 자연과 시간의 도움을 받고자 기도합니다. 태양의 힘, 물의 힘, 불의 힘, 나무의 힘, 산의 힘, 바위의 힘을 얻기 위하여 정성 모아 기도합니다. 이러한 만물들은 하나의 능력만을 지니고 있습니다. 태양의 따뜻한 힘, 물의 습기와 흐르는 힘, 불의 태우는 힘, 나무의 자라나는 힘, 산의 부동의 힘, 바위는 단단한 힘만을 지니고 있을 뿐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가운데 이들이 지닌 힘이 필요하지만 받을 수는 없습니다. 혹 자연이 준다고 하여도 자기가 가진 힘만을 줄뿐 기도자가 원하는 것을 주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자는 원에 따라 본존을 바꿔가면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자연들이 지닌 힘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부처님과 같은 위신력을 가지고도 가난하고 병들고 불화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법화경의 비유처럼 옷 속에 무가보의 보배를 지니고 있으면서 걸식하는 친구와 같고, 장자의 아들이면서 집을 나가 떠돌이 생활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 자신의 내면에 갖추고 있는 위신력을 필요할 때마다 찾고 꺼내어서 소멸할 것은 소멸시키고, 장려할 것은 장려시키면서, 고통의 바다에서 벗어남을 얻고자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위신력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은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부처님 금색광명의 위신력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금생광명을 받기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신앙의 대상에 대하여 의뢰의 기도가 대부분입니다. 이것은 「무엇인가를 원하면 신(神)이 줄 것이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태양, 물, 불, 바다, 산, 바위, 나무, 폭포수는 우리에게 자연의 환경을 제공하지만, 권력과 물질과 명예 등은 가지고 있지 않기에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의 기도도 의뢰하는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에게 기도하면 현세의 복덕을 성취할 수 있고, 문수보살에게 기도하면 지혜 총명함을 얻을 수 있고, 보현보살에게 기도하면 모든 행원을 성취할 수 있고, 아미타불에 기도하면 극락세계에 환생할 수 있고, 지장보살에게 기도하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고, 칠원성군에 기도하면 자식을 얻을 수 있다는 등의 기도를 가르치기도 합니다. 밀교의 기도는 이와 다릅니다.
밀교의 기도는 모두를 구비한 법신 비로자나불에 기도합니다. 이것은 비로자나불이 가지고 있는 위신력과 나의 위신력이 하나임을 알게 하고 그 위신력을 활용하는 법을 배우기 위한 기도입니다. 밀교의 기도 가운데 하나가 진언염송(眞言念誦)입니다. 진언 염송은 자신의 불성(佛性)을 부처님으로부터 가지(加持) 관정(灌頂)을 받는 수행입니다. 가지관정의 가(加)는 ‘더하다.’ ‘붙치다.’이며, 지(持)는 ‘가지다.’ ‘보존하다.’입니다. 비유로 해석하면, 불상(佛像)에 도금(鍍金)하는 것처럼, 먼저 불상이 있어야[持] 도금할 수 있습니다[加]. 이처럼 가지(加持)는 중생이 본래부터 가진 위신력[持]을 부처님이 알려준다[加]는 뜻입니다. 내가 가지지 않는 것은 가지 받을 수 없습니다. 관정(灌頂)은 그 위신력을 활용할 수 있는 자격을 인증(認證)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가지관정(加持灌頂)은 먼저 나에게 있는 부처님의 위신력이 알게 하고, 다음으로 그 위신력을 사용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認證)하는 불사를 말합니다. 진언 수행자는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한 가지관정으로 자내증(自內證)을 하게 되어 원하는 바를 성취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이 없으면 자내증은 할 수 없습니다. 비유하면 임신하지 않은 여인이 어떻게 아기를 출산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가진 부귀영화를, 잠자고 있는 권력과 명예를, 숨겨져 있는 건강을 스스로 찾아내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은 이렇게 자신이 지닌 많은 위신력 가운데 필요에 따라 활용할 자격을 부여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성껏 기도하였는데도 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원인이 있습니다. 첫째는 아직 위신력을 활용할 때가 되지 않으면 가지(加持)만을 받고 관정(灌頂)을 받지 못한 것이요, 둘째는 원(願)보다 정진이 부족하여 못 받기도 합니다. 이러한 원인을 알 수 있는 것이 기도하는 중에 나타나는 비로자나불의 당체법문입니다. 당체법문에 관하여는 다음 기회에 상세하게 말씀드리고 여기서는 간략하게 설하겠습니다. 당체법문은 자연과 시간과 사람을 통하여 비로자나불이 설법하는 것입니다. 이때의 만물은 하나의 능력만을 지녔지만, 비로자나불의 방편으로 우리의 마음도 부처님의 마음과 같이 모든 위신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누구나 자성을 위신력을 깨우치고자 비로자나불의 본심 진언을 염송하면, 비로자나불이 수행자의 낱낱 원에 맞는 금색광명의 위신력을 비밀한 가운데 입게 하여 그 힘으로 낱낱의 법문을 깨달아 수행자 스스로 장소와 시간과 사람의 화합하는 위신력을 활용하여 일체 고통이 소멸하는 해탈의 공덕을 얻게 될 것입니다.
11.청정 법신에 귀명(歸命)
밀교신문
“불(佛)에 귀명(歸命)하는 자는 대서원(大誓願)을 발(發)하여서 법신불(法身佛)에 귀명하여 공덕법신(功德法身) 얻을지니, 응신불(應身佛)은 찰나(刹那)에도 머물 쟎고 변천(變遷)하며, 화신불(化身佛)은 무상(無常)하여 속히 열반(涅槃) 들게 되고, 공덕법신(功德法身) 담연(湛然)하여 상주불변(常住不變)하심이니, 이런 고로 법신불에 일심귀명(一心歸命) 할지니라. 법신불에 귀명 하면, 이것이 곧 과거불(過去佛)과 현재(現在) 미래(未來) 제불(諸佛)에게 귀명함이 되느니라.”
비로자나불은 우주 법계의 주인입니다. 불 세계와 보살 세계와 연각 세계와 성문 세계와 무색계와 색계와 욕계의 주인으로 십 법계를 다스리는 왕입니다. 중생세간과 기세간(器世間)과 지정각세간(智正覺世間)에 존재하는 주인입니다. 가장 밝고 가장 맑은 청정한 빛으로 법계를 건립하였습니다. 불·보살·연각·성문은 평등하므로 출현하지 않지만, 육범세계(六凡世界)인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에 청정의 빛으로 건립하였습니다. 육범세계에 청정 빛을 근본으로 청황적백흑(靑黃赤白黑)의 만물을 출현시켜 건립하였습니다. 푸른빛은 물[水]로 표현하였고, 붉은빛은 불[火]로 표현하였고, 누른빛은 땅[地]으로 표현하였고, 검은빛은 바람[風]으로 표현하였고, 흰빛은 허공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빛으로 건립된 모든 만물은 모두 비로자나불의 본심의 건립이므로 비로자나불이 주인공입니다. 그러므로 비로자나불에 귀명 하는 것은 만물에 귀명 하는 것이요, 우리 자신에게 귀명 하는 것이 됩니다.
비로자나불은 법왕이며, 십 법계는 비로자나 법왕이 통치하는 통일된 세계입니다. 통일된 세계가 넓고 광대하여 구석구석 법왕의 법이 미치지 못할까 보아 자비로 지역마다 법왕의 권한을 부여하여 왕을 내려보냅니다. 불보살 세계와 연각과 성문 세계를 제외하고 욕계와 색계와 무색계에 천왕(天王)과 제왕(帝王)과 인왕(仁王=人王)을 내려보내 다스리게 합니다. 4무색계에 4명의 천왕이 다스리게 하고, 18색계는 18명의 천왕이 다스리게 하고, 욕계 중에 6욕천의 41명의 천왕이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욕계 천상의 최고 왕은 타화자재천을 다스리는 마왕 파순(波旬)입니다. 인간계는 현재 석가모니불이 비로자나불의 화신으로 다스리는 세계입니다. 인간계는 석가모니불 이전에는 가섭불이 비로자나불을 대신하는 법왕이 되었고, 미래세계는 미륵불이 비로자나불을 대신하는 법왕이 되어 다스릴 것입니다. 인간계를 통일할 수 있는 분은 법왕(法王=轉輪聖)인 석가모니불 뿐이기에 영웅이라 하여 그분을 모신 전각을 대웅전이라 이름하는 것입니다. 인간 세상의 법왕인 석가모니불은 비로자나불의 권속 보살들과 함께 청정을 바탕으로 전법을 합니다. 보살들은 비로자나불의 권속이지만 석가모니불과 함께할 때는 과거불인 가섭불의 법을 잊고, 석가모니불의 가르침으로 교화할 것이며, 미륵불과 함께할 때는 석가모니불의 법을 잊고, 미륵불의 법으로만 교화 활동을 돕고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은 비로자나불의 청정성을 벗어난 법은 아닙니다. 그리고 삼계에는 두 분의 부처님이 동시에 출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현재를 살아가는 중생들은 모두 석가모니불의 인연을 가진 권속이 되는 것입니다.
비로자나불의 청정성은 우주 대 생명의 빛이며, 삼세에 화현 하는 제불의 근본으로써 수행자의 최종 목표가 되는 불자성(佛自性)의 빛입니다. 삼라만상 두두물물(頭頭物物)에 있어 일체여래(一切如來)의 빛이 됩니다. 이 빛은 비로자나불의 금강법계(金剛法界)에 무형으로 상주하면서 중생들의 원력에 따라 나타납니다. 법신불의 청정 빛은 가장 청정하고 가장 고요하며 변조(遍照)가 무상하여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불구부정(不垢不淨) 하며, 부증불감(不增不減)의 빛입니다. 이 빛은 뭇 생명체들의 절대적 신앙처가 되고, 의지처(依支處)가 되며, 영원히 윤회하지 않는 해탈의 빛입니다. 영원불변의 빛이므로 금강에 비유하며,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지는 만다라입니다. 누구나 가진 불자성(佛自性)의 빛이지만 아무나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성을 깨달은 자만이 볼 수 있습니다. 부처만이 부처를 알 수 있고, 보살만이 보살을 알듯이 자신의 자성을 깨닫지 않고는 불자성을 볼 수가 없습니다. 이제 그 불자성(佛自性)의 빛을 보기 위하여 빛의 근원인 법신 비로자나불에 귀명하고 삼밀수행 하는 것입니다.
귀명과 수행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화신 석가모니불이 중생의 원에 따라 베푼 법에 귀의하고 그 방편의 가르침에 수행하는 것을 현교(顯敎)라 하고, 비로자나불에 귀명하고 진실 법을 따라 수행하는 것을 밀교(密敎)라 합니다.
귀명이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은 뜻으로 귀의(歸依)·나무(南無)·귀경(歸敬)·귀례(歸禮) 등이 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뜻이 약간씩 다릅니다. 귀의는 ‘맡긴다. 의지한다.’라는 뜻이요, 나무는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나무묘법연화경’ 등 존경의 뜻으로 사용합니다. 귀의와 귀경과 귀례는 자칫 잘못하면 의뢰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귀명은 공경과 수행의 의미를 가장 잘 표현한 말입니다. 합장에도 연화 합장과 금강 합장이 있습니다. 연화 합장은 귀경(歸敬)의 대표적인 합장으로 두 손바닥을 하나로 모으면서 두 손바닥에 공간을 두어 꽃봉오리처럼 하는 공경의 합장입니다. 귀명 합장은 금강 합장으로 두 손바닥 사이를 공간 없이 합하면서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왼손 엄지손가락을 누르면서 두 손의 손가락이 서로 교차하여 부채 모양으로 하는 합장입니다. 이 합장은 법신불과 수행자가 하나가 되어 환귀본명(還歸本命) 하는 수행의 합장입니다.
법신 비로자나불에 환귀본명 하는 금강 합장은 5분 법신에 귀명 하는 것입니다. 비로자나불의 청정한 공덕을 5분 법신으로 표현한 것으로 삼취정계(三聚淨戒)를 모으고[戒蘊=戒香], 일체의 고요함을 모으고[定蘊=定香], 일체 지혜를 모으고[慧蘊=慧香], 일체 고통에서 벗어나며[解脫蘊=解脫香], 해탈의 일체 실지를 모아[解脫知見蘊=解脫知見香], 법신으로 돌아간다는 뜻의 귀명입니다. 이것을 향에 비유하여 법계에 널리 퍼지게 한다는 의미로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5분 법신의 귀명을 셋으로 나눈 것이 삼귀명(三歸命)이며 이것은 삼귀명계(三歸命戒)를 실천하겠다는 맹세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불(佛)에 귀명 하는 계(戒)는 의심하는 마음 없이 청정실지(淸淨實知)를 스승 삼음이며, 법(法)에 귀명 하는 계는 탐욕 하는 마음을 떠나 평등한 진여(眞如)의 해탈약(解脫藥)을 스승 삼음이며, 승(僧)에 귀명 하는 계는 일심법계(一心法界)를 성불의 도반으로 삼아 귀명 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이 귀명 자체가 실지(實知)와 진여(眞如)와 일심(一心)을 깨달아 홀연히 비롯함이 없이 일어난 무명을 제거하여 본래 청정으로 돌아가게 하는 수행의 맹세입니다. 맹세 다음으로 자비심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청정 법신불에 귀명 함은 자기 자신의 자비심을 깨달은 것이며, 모든 생명에 베푸는 것이요, 만물에 자비 귀명 하는 것이며, 시간에 자비 귀명 하는 것이 됩니다. 자신에 향하여 자비 귀명 하는 것은 자신이 곧 법신불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요, 만물에 자비 귀명 함은 삼라만상에 고마움을 갖기 위함이요, 시간에 자비 귀명 함은 생(生)에서 죽음[死]으로 향하는 길이 소중하고 감사하다는 마음을 갖기 위함입니다. 소중하고 고맙고 감사하는 마음은 은혜를 깨닫는 마음입니다.
은혜를 깨달으면 믿음은 더욱 강하게 되며, 믿음이 강해질 때 수행의 마음이 일어나며, 수행의 마음이 용맹스러울 때 비로자나불의 진실법을 깨닫게 되며, 깨달음을 얻었을 때 영원한 해탈의 공덕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수행하여도 공덕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여려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그 가운데 가장 큰 원인은 믿음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약하면 진정한 귀명이 아닙니다. 자신의 믿음이 굳건하면, 시간(時間)과 공간(空間)을 초월(超越)하여 형상 없이 이치(理致)로 계시면서 설하는 당체법을 들을 수 있습니다.
청정한 믿음으로 귀명하고 수행하여 자신의 청정능력을 찾는 데 최선을 다하기 바랍니다. 일상생활에서 자비의 귀명으로 상호공양(相互供養)을 실천할 때 이 땅은 비로자나불의 만다라 세계가 될 것입니다. 진각성존의 불심인(佛心印)에 귀명 하여 해탈 공덕을 성취하여 이 세상이 곧 비로자나불의 만다라 세계가 되도록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12.삼륜신(三輪身)의 법문
밀교신문
“밀교에는 본래부터 삼륜신(三輪身)이 있는지라./자성신은 부처위라 지비이덕(智悲二德) 갖췄으며/정법신은 보살위라 대비로써 섭수(攝受)하며/교령신은 명왕위라 대지(大智)로써 절복(折伏)한다.”
삼륜신이란 비로자나불이 중생의 원에 따라 가르침을 내리는 방법을 말합니다. 석가모니불과 비로자나불의 가르침의 방법이 다릅니다. 석가모니불은 삼승(三乘)에서 일승(一乘)으로 나아가는 가르침이요, 비로자나불은 일승(一乘)에서 일승(一乘)으로 들어가는 법입니다. 석가모니불은 한 생을 방편의 삼승법으로 교화하시면서 몸으로는 출생ㆍ출가ㆍ수행ㆍ성불ㆍ전법ㆍ열반의 모습으로, 강요(綱要書=契經)를 담은 간곡함으로, 산문형(散文=應頌)으로, 성불 예언[授記]으로, 게송(偈頌)으로, 무문자설(無問自說)로, 인연 연기로, 비유나 우화로, 과거 생의 업을 보임[本事]과 생에 받은 인연[本生]을 보이며, 방정하고 방대한 뜻을 담기도[方廣] 하고, 불가사의한 미증유(未曾有)와 문답으로 판단[論議]하시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하시고, 뜻으로는 삼처전심(三處傳心)을 보이면서 8만4천의 법을 전하였습니다. 석가모니불은 진언법은 설하시지 않았습니다. 진언법을 설할 때는 비로자나불을 대신하여 설하였으며, 진언이 나타난 경전은 대승경전과 밀교경전입니다.
비로자나불은 진실 법을 생명[人間]으로, 삼라만상[空間]으로, 일월성신[時間]으로 당체설법(當體說法)을 하셨습니다. 당체설법은 간접적인 법과 직접적인 법으로 구분합니다. 간접적 법은 비로자나불처럼 형상 없이 실지 상황이 아닌 소문으로, 지나가는 대화로, 꿈으로 펼쳐지는 설법이요, 직접적인 법은 삼라만상을 통하여 현재 일어나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법을 말합니다. 삼라만상으로 직접 보여주는 법은 다시 유정(有情) 설법과 무정(無情) 설법으로 나누어집니다. 유정 설법은 생명 있는 것으로 설하는 법이요, 무정 설법은 생명 없는 무정물과 일월성신(日月星辰)이 설하는 법입니다. 이것을 밀교에서는 삼간(三間)으로 설하는 삼륜신의 법이라 합니다. 삼간에서 설하는 법이란 일상생활 가운데서 그 시간, 그 장소, 그 상황을 만나는 것은 모두 내가 지은 인연의 결과를 알려 주는 비로자나불이 설하는 당체설법으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는 이러한 가르침을 법으로 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삼라만상 운행과정에서 좋고 나쁜 일, 성공과 실패, 행복하고 불행한 일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들은 모두 인과로 운행되는 법칙입니다. 세상에는 ‘갑자기’나 ‘우연’이란 없습니다.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눈이 오고, 꽃이 피고, 열매 맺고, 잎이 떨어지는 현상들은 과거 현재 미래의 인연의 법칙을 알리는 비로자나불의 법륜(法輪) 굴림입니다. 과거를 보면, 세상에는 수 없는 나라들이 세워지고 패망하였습니다. 모헨조다로가 사라지고, 소돔과 고모라가 파괴되고, 부처님 성지가 파괴되었습니다. 세워지고 파괴되는 것은 그만한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덕이 있는 사람이 다스리면 우순풍조한 세상이 되지만, 덕이 없는 사람이 다스리면 시기 질투를 좋아하는 간신들이 가득하여 장마와 가뭄과 역병과 전란의 일어날 것입니다. 덕 있는 자가 다스릴 때 간혹 가뭄이 오면, 치정 자는 자신의 덕이 없음을 참회하면서 기우제를 지낼 것입니다. 현재로는 꽃이 필 때 꽃이 피지 않고, 바람이 불어야 할 때 바람이 불지 않고, 비가 와야 할 때 비가 오지 않고, 눈이 와야 할 때 눈이 오지 않고, 더워야 할 때 덥지 않고, 추워야 할 때 춥지 않은 등, 평소와 다르게 좋고 나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우연이 아닙니다. 미래를 보면, 명마(名馬)가 태어나고 명검(名劍)이 만들어지고, 아이들이 전쟁놀이를 좋아하면, 장차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려 주는 법으로 모두 비로자나불의 당체설법입니다.
삼라만상을 통하여 나타나는 당체설법을 중생들이 쉽게 깨달을 수 있도록 하는 법이 비로자나불의 삼륜신(三輪身) 법입니다. 삼륜신이 활동하는 세계는 비로자나불의 만다라 세계입니다. 첫째 부처 자리[佛位]인 불자성(佛自性)에서 보이지 않는 무언(無言)으로 설하는 자성륜신(自性輪身)과 둘째 보살 자리[菩薩位]인 보살자성(菩薩自性)에서 자비한 마음으로 유정이 설하는 정법륜신(正法輪身)과 셋째 명왕 자리[明王位]인 명왕자성(明王自性)에서 지혜의 조복으로 일월성신과 무정물로 설하는 교령륜신(敎令輪身)입니다. 륜신(輪身)이란 비로자나불로 시작하여 중생으로 이어지고, 중생으로 시작하여 비로자나불로 이어져 끝없이 돌아가는 법을 바퀴에 비유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가장 많이 접하는 법이 유정으로 보이는 법을 설하는 지혜를 이면(裏面)으로 자비를 베푸는 보살 법과 자비를 이면(裏面)으로 지혜를 베푸는 명왕의 법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계는 지혜와 자비로 윤원구족(輪圓具足)한 청정의 만다라 세계라 하는 것입니다.
삼륜신이 보여주는 법을 깨달을 수 있는 수행이 신구의(身口意) 삼밀(三密) 수행입니다. 심밀(心密)은 부처님이 지닌 지혜와 자비를 자신에게도 있음을 깨닫는 수행이요, 어밀(語密)은 보살의 가진 자비행이 자신에게도 있음을 깨닫는 수행이며, 신밀(身密)은 명왕의 지혜 조복 행이 자신에게도 있음을 깨닫는 수행입니다. 특히 서원이 있을 때 삼륜신의 법이 잘 나타나고 잘 보입니다. 서원을 가지게 하는 부족한 원인을 알려주는 법문입니다. 장애적 요소와 잘못된 상황들을 보고 고치고 제거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부처와 보살과 명왕은 차례대로 지혜와 자비와 용맹심을 가지도록 세 번의 기회를 줍니다. 세 번의 기회는 허물을 알게 하고 참회하게 하고 용맹심을 일으켜 실천하게 하여 반드시 공덕성취 하도록 법을 설합니다.
첫 번째 기회를 주는 자성륜신의 법입니다. 자신에게도 수행하면, 부처가 가진 지혜와 자비가 희박함을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알게 하여 희박한 원인을 찾아 참회(懺悔)하고 보리를 일으켜 정진하게 하는 것입니다. 즉 발심에서 수행으로, 수행에서 보리로, 보리에서 열반으로, 열반에서 방편으로 이어지면서 그때마다 참회할 기회를 주어 발심 공덕, 수행 공덕, 보리 공덕, 열반 공덕, 방편 공덕을 얻게 하는 갓입니다. 이러한 자비와 지혜의 덕으로 설하는 법을 알아듣지 못할 경우, 자성륜신은 물러가고 정법륜신이 나타나 법을 설하게 됩니다.
두 번째 기회를 주는 정법륜신의 법입니다. 자신에게도 보살의 자비가 동등하게 있음을 알게 하여 서원서원을 하게 된 원인인 장애 요소가 무엇인지를 일상생활에서 직접 좋고 나쁨을 경험하게 하거나 유정들을 통하여 보여주면서 잘 잘못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나타나는 법문에 따라 참회할 것은 참회하게 하고, 희사할 것은 희사하도록 하고, 정진할 것은 정진하도록 하여 모든 허물과 장애 요소를 제거하여 서원성취를 이루게 하는 법입니다. 자비로 베푸는 법을 알아듣지 못할 경우, 정법륜신은 물러가고 교령륜이 나타나 법을 설하게 됩니다.
세 번째 기회를 주는 교령륜신의 법입니다. 자신에게도 명왕이 가진 절복(折伏)의 지혜가 있음을 믿고, 명왕과 동등하다는 생각으로 수행하면, 서원성취의 장애 요소가 무엇인지 무정물을 통하여 자신이 받게 하여 잘못을 깨닫게 하는 법입니다. 이때는 앞의 두 번의 기회에서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일들을 당하게 됩니다. 법문으로 고통을 받지 않으려면 날카로운 지혜, 필요 없는 지혜, 아만(我慢)이 높은 지혜를 절복(折伏) 시켜 가르침의 법을 믿고 실천해야 합니다.
삼륜신이 보여주는 좋은 법이나 고통의 법문은 실지 내가 받아야 할 법의 1/100, 1/1.000, 1/10.000 정도로 줄여 보이는 것입니다. 법문을 받을 때는 무심코 넘기지 말고, 장애의 원인과 잘못을 참회하면서 물질로 보여주는 법은 희사로, 병으로 보여주는 법은 계행으로, 권력과 명예로 보여주는 법은 인욕으로, 나태와 요행으로 보여주는 법은 정진으로, 시끄러움과 불화로 보여주는 법은 염송으로, 시간으로 보여주는 법은 실천으로 깨닫기를 바랍니다. 법문을 잘 모를 때는 스승을 찾아 질문하시기 바랍니다. 질문하기가 뭣하면 불사 시간에 동참하여 대중법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삼륜신의 법은 원망하고 미워하며 불평과 불만이 가득한 자는 깨닫지 못합니다. 은혜를 알고 고마움 알며 자비를 가질 때 깨달을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일어나는 수원심(讐怨心)을 버리고 은혜로운 마음으로 법을 받고 실천하여 삼고(三苦)에서 해탈하기를 바랍니다.
13.삼밀수행을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밀교신문
“이 뜻으로 주송(呪誦)하되 급(急)하게도 하지 말며, 더디게도 하지 말고 고성(高聲)으로 하지 말며, 염송하는 글자마다 분명하게 소리 내어 자기 귀에 듣기 도록 관념하는 그 본존과 자기 몸의 그 글자와 염송기수(念誦記數) 펼지니라.”
밀교 수행을 하기 위해 먼저 비로자나불로부터 가지 관정을 성취하여야 합니다. 가지 관정을 받는 이유는 중생의 신구의 삼업을 불(佛)의 삼밀(三密)로 바꾸기 위한 불사입니다. 삼밀가지란 첫째 도량을 청정하게 가지 관정[身密灌頂] 하고, 두 번째 본존과 서원문을 가지 관정[口密灌頂] 하며, 세 번째 수행자 자신을 가지 관정[意密灌頂] 합니다. 가지 관정은 염송 기수를 펼치기 위하여 신구의를 청정도량을 조성하는 불사입니다.
첫째 수행자의 몸을 정화합니다. 신상(神像), 부적(符籍), 살생도구 등을 몸에 지니지 않으며, 나찰, 야차의 형상을 짖지 않고 자비한 모습으로 귀명단(歸命壇)을 조성합니다. 추위와 더위, 배고픔과 헐벗음, 모기나 해충의 침범에서 흔들리지 않는 자세가 가지 관정을 받은 신밀(身密) 성취입니다. 둘째 진언과 서원문 정화입니다. 서원문을 작성할 때 본존에 귀명하고, 자신의 허물을 참회하며, 사대 은혜에 보답하고, 불법(佛法)이 흥왕하기를 서원하며, 자연의 재해와 역병과 전란이 일어나지 않는 불국토를 건설하고자 서원합니다. 불충(不忠), 불의(不義), 불효(不孝), 불선(不善), 지나친 욕심, 원수를 갚고자 하는 마음, 자기만을 이익되게 하지 않는 서원이 가지 관정을 받은 구밀(口密) 성취입니다. 셋째 자성의 심인(心印) 정화입니다. 욕심, 성냄, 어리석음, 교만심, 의심을 없애고 지혜와 자비와 용맹심을 갖추는 것입니다. 이기주의적 소망이나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을 버리고, 흔들림 없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도록 가지 관정을 받는 것이 의밀(意密) 성취입니다. 신구의(身口意)의 삼업을 비로자나불로부터 가지 관정으로 삼밀 성취한 후에 염송기수를 펼치면서 정진하면 쉽게 해탈의 공덕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염송기수를 펼치는 법은 수행자 몸의 여섯 부위를 불보살이 머무는 도량으로 정하고 진언과 함께 머물도록 오른손으로 포자(布字) 하는 작법입니다. 방법은 오른손 모양은 엄지손가락을 약지 밑에 두고 편 상태로 몸의 중앙인 배꼽 부위를 포자하면서 ‘옴, 비로자나불’을 송(誦) 합니다. 다음으로 왼편 옆구리 부위를 포자하면서 ‘마, 아축불’을 송하며, 다음으로 명문(命門) 부위를 포자하면서 ‘니, 보생불’을 송하며, 다음으로 오른편 옆구리 부위를 포자하면서 ‘반, 아미타불’을 송하며, 다음으로 단전(丹田) 부위를 포자하면서 ‘메, 불공성취불’을 송하며, 끝으로 인후(咽喉) 부위를 포자하면서 ‘훔, 금강제보살’을 송합니다.
포자하는 위치가 분명하게 하여야 합니다. 염송기수를 포자한 다음 금강지권을 결인(結印)하고 염송합니다. 관하는 방법은 ‘옴’, ‘마’, ‘니’, ‘반’, ‘메’, ‘훔’을 포자한 위치마다 ‘옴마니반메훔’을 한 번씩 부르면서 회전시키는 방법이 있고, ‘옴마니반메훔’을 한번 부르면서 여섯 위치 전체를 회전시키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러한 염송법은 마음을 일경에 모으기 위한 법입니다. 수행자가 염송할 때마다 쉽게 마음이 일경이 되면 굳이 이러한 회전방법을 행하지 않아도 됩니다.
염송(念誦)이란 입으로 내는 소리를 송(誦)이라 하고, 마음으로 내는 소리를 염(念)이라 합니다. 이로써 오불[佛] 포자의 신밀과 소리[法]의 구밀과 마음[僧]의 심밀이 성취로 불법승 합일의 염송이 되는 것입니다. 염송(念誦)의 묘미(妙味)는 입으로 소리 내어 마음의 울림으로 진언이 온몸에 스며들어 쌓여 있는 업(業)을 밀어내듯이 하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목구멍소리 내면서 울림이 없는 염송은 도(道)를 이루는데 아무런 이익이 없습니다. 염송의 종류로는 하나의 진언을 본존으로 정하여 염송하는 정염송(正念誦)이 있고, 본존을 정하지 않고 서원마다 진언을 다르게 염송하는 산염송(散念誦)이 있습니다. 진각종은 선종(禪宗)에서 하나의 화두(話頭)로 공부하는 것처럼 육자진언만 염송하는 정염송법을 행합니다. 육자진언인 ‘옴마니반메훔’을 염송함은 육행 실천하여 육도윤회에서 벗어나 해탈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같은 여섯자이지만 ‘나무아미타불’은 지옥을 벗어나 극락세계로 향하는 칭명(稱名)염송이요, ‘옴마니반메훔’은 육도윤회를 벗어나 불보살 세계로 환귀본처(還歸本處)하는 정염송입니다. 육자진언 수행 방법으로 음성염송·금강염송·삼마지염송·진실염송이 있습니다. 이러한 4종 염송을 서원염송(誓願念誦)에 배대하면, 식재(息災)염송·증익(增益)염송·항복(降伏)염송·경애(敬愛)염송이 됩니다.
염송 공덕에 관하여는 ‘실행론’의 <육자관행법>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구경해탈(究竟解脫)하기 위해 육자관행하는 자는 ……,” 여기에서 구경해탈은 구경열반과 구경성불을 이루는 첫 관문을 말합니다. 해탈 없이는 열반을 얻을 수 없고, 열반을 얻지 못하면 성불할 수 없습니다. 해탈은 가난과 병고와 불화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부족함이 있고 건강하지 못하고 만물과 화합을 이루지 못하면, 비록 출가하여 수행하여도 열반의 경지에 오르지 못할 것입니다. 구경 성불하려면 32상을 갖추어야 합니다. 가난에서 해탈할 때 8상이 성취되고, 병고에서 해탈할 때 8상이 성취되며, 불화(不和)에서 벗어날 때 8상을 얻음으로 해탈의 24상 성취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열반묘심(涅槃妙心)의 상락아정(常樂我淨)에서 8상을 성취하여 32상이 갖추어지면 구경에 성불하게 됩니다.
“몸과 입만 깨끗하게 가작(仮作)으로 하지 말고 ……”는 자신의 몸을 청정도량으로 장엄함을 말합니다. 우주 법계와 이 땅과 이 몸은 본래 청정도량입니다. 우주법계는 영원한[常] 진리의 청정도량이요, 이 땅은 해탈[樂]의 자비 청정도량이며, 이 몸은 주인[我]으로서 청정도량이 됩니다. 가작으로 하지 말라는 말씀은 법신불이 화신불의 열반묘심(涅槃妙心)을 통하여 보여준 청정도량을 갖추도록 진실한 염송을 하라는 강조의 말씀입니다.
“어느 때나 그 마음을 다라니에 전일(專一)하여 ……”는 육자진언으로 수행 본존을 세운다는 뜻입니다. 금강진언 세워두고 다른 태장 잡 진언을 염송할 수 없음을 강조하신 가르침입니다. 진언의 첫 자가 ‘옴’으로 시작하는 진언이 금강진언이라 하며, 그 외의 진언은 태장진언이며 잡진언입니다.
“오불에게 귀명(歸命)하며 지심으로 참회하고 ……”는 비로자나불의 가지 관정을 받기 위한 마음의 자세를 뜻합니다. 오불 귀명은 지계(持戒)로 참회 실천을 뜻합니다. 비로자나불에 귀명은 불(佛)의 참회 귀명이요, 4불의 귀명은 법(法)의 참회 귀명이며, 금강보살의 귀명은 승(僧)의 참회 귀명입니다. “지심귀명례공양 운운……”으로 시작하는 불교의 대예참례(大禮懺禮)도 같은 의미를 지닌 예참문입니다.
“반가(半跏)로써 그 마음이 편안하게 정좌하여 일체 망상 모두 끊고, 다만 오직 관(觀)하기를 ……”은 반가부좌는 밖으로 치닫는 교만심을 조복시키는 자세입니다. 반가부좌는 결가부좌하기가 어려운 수행자에게 권하는 자세입니다. 중생을 표현하는 왼발을 아래로 하고 부처를 상징하는 오른발을 왼발 무릎 위에 올려놓는 길상좌를 취하면서 허리를 반듯하게 세우는 사상(四相)과 모든 번뇌를 조복 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육도중생 무시이래 생사해중(生死海中) 윤회함을 원하건대 이제 모두 보리심을 발(發)케 하고 보살행을 행하여서 벗어남을 얻어지다 ……”는 수행자의 발심과 서원을 올바르게 세우라는 뜻입니다. 자신이 세운 강도발원(講度發願)이 올바름과 그릇됨을 살피는 가르침입니다. 수행의 구경 목적은 성불이지만, 중생 수행의 첫 목적은 일체중생이 모두 해탈성취하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보살의 자비심을 일으켜 육행을 실천하여 중생이 함께 육도윤회를 벗어나는 해탈 공덕을 얻기를 서원하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먼저 행주좌와 어묵동정에서 신구의를 청정하게 하여 비로자나불로부터 가지 관정을 받아 청정도량을 성취한 다음 진언으로 염송기수를 펼치면서 염송 정진하는 것입니다. 아침부터 저녁 잠자리에 들 때까지 무시 항송(恒誦) 하면서 육자진언을 마음으로부터 놓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항송의 공덕이 쌓였을 때, 서원이 있어 정진한다면 그 원은 속히 성취될 것입니다. 오로지 육자진언의 정염송으로 일상생활에서 잘못된 습관을 버리고 좋은 인을 지어 해탈하기를 바랍니다.
14.당체 법문
밀교신문
“시방 삼세 나타나는 일체 모든 사실들과 내가 체험(體驗)하고 있는 좋고 나쁜 모든 일은, 법신불의 당체(當體)로서 활동하는 설법이라. 밀(密)은 색(色)을 이(理)로 하여 일체 세간 현상(現象)대로 불(佛)의 법(法)과 일치(一致)하게 체득(體得)함이 교리이니, 체험(體驗)이 곧 법문이요 사실(事實)이 곧 경전(經典)이라.”
당체 법문은 진각종의 교화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법문은 진각성존이 창안한 법이 아닙니다. 인연으로 나타난 우주 자연법칙의 현상을 법신 비로자나불의 가르침으로 받아들이는 법문입니다. 우리들 눈앞에 보이는 현상들은 단순히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삼세(三世=時)와 삼계(三界=空)를 통하여 비로자나불이 몸으로 소리로 뜻으로 전하는 설법입니다. 이 설법은 우리에게 삶의 지혜를 주기 위한 알림으로 마음이 맑고 밝은 지혜로운 자만이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고, 꽃이 피고 지고,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눈이 오며, 춥기도 하고, 덥기도 하며, 이루어지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하는 변화 속에서 사랑하고 미워하며, 베풀기도 하고 뺏기도 하며, 은혜 되고 수원 맺기도 하는 삶으로 살고 있습니다. 모두 인과에 의하여 생겨난 변화무상으로 피하거나 버릴 수 없이 당연하게 겪고 받아야 하는 것들입니다. 이러한 변화무상한 현상들은 그냥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알리고자 함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침에 가득한 운무는 낮에 햇빛의 측도를, 저녁 하늘에 붉게 물든 노을의 색상에서 가뭄과 장마, 낮게 나는 새들에서 비오는 징조, 아침 동쪽 나무에서 지저귀는 까치에서 반가운 손님과 소식에 미리 대비하라는 알림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주어진 생명이, 주어진 공간이, 주어진 시간에서 즐거움을 받는 것보다 고통받는 사람이, 넉넉한 사람보다 부족한 사람이 많은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만약 그 원인을 미리 알고 바꾸어간다면 실패하는 것보다 성공하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는 능력의 주인공입니다. 주어진 인과에 매달려 나그네처럼 살지 말고, 옷 속에 감추어진 여의주를 찾아 문전걸식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주인으로서 지혜롭고 넉넉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자연과 하나가 되어 자연이 미리 가르쳐주는 법문을 깨달으면 됩니다. 법신 비로자나불과 자연과 중생은 본래 하나였습니다. 하나였기에 중생이 마음의 문을 열기만[法門] 하면, 법신불이 시간과 공간으로 내리는 생명의 가르침을[說法] 깨닫게 됩니다. 부족함을 넉넉하게, 아픔을 건강으로, 실패를 성공으로 나쁨을 좋은 것으로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로자나불은 과거의 인(因)과 현재의 받음과 미래에 일어나는 현상에서 잘못의 원인을 알게 하고, 잘못을 고치는 방법을 알게 하여, 좋은 방향으로 실천하도록 진언 염송을 통하여 설법하십니다.
당체 설법을 보면, ‘실행론’에서 “시방 삼세에 나타나는 일체 모든 사실들과 내가 체험하고 있는 좋고 나쁜 모든 일은 법신불의 당체로서 활동하는 설법이다.” 하였습니다. 우리 눈앞에 나타나는 현상과 체험하는 신체적 활동과 들리는 소리는 모두 마음을 깨닫게 하는 비로자나불의 설법입니다. 그러므로 흐르는 시냇물 소리에 법열(法悅)을 느끼고, 지저귀는 새소리에서 진리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산 아래 사는 사람이 어느 날 많은 비로 계곡이 범람으로 산사태가 일어나 집이 압사될 상황임을 알지 못하고 잠자다가 변을 당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집에 살고 있던 쥐, 동물, 개미 등은 미리 알고 피난하였습니다. 사람은 쥐와 동물과 개미보다 뛰어난 IQ와 예지력을 가지고도 왜 몰랐을까요? 탐진치에 물들어 순수성의 본성을 잃었기에 자연이 주는 알림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비로자나불의 알림은 특별한 법이 아닙니다. 순수성만 가진다면 일상생활 속에서 얼마든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生活之中覺]. 보여 주는 가르침을 억지로 들으려 하거나 알려고 하지 말고 순수한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를 보면 됩니다. 가식이나 위선을 버리고 티끌 하나 없는 본심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물이 맑으면 물속을 확연하게 볼 수 있듯이 탐진치가 사라지면, 저절로 비로자나불의 당체 설법을 보고 깨닫게[顯證] 될 것입니다.
서원이 있거나 결과를 깨닫고자[顯證] 할 때 다시 순수성을 찾는 염송 정진법이 있습니다. 정진에 들어가기 전에 마음 자세는 1)법문을 볼 것을 구체적으로 정하고, 2)정진 시간과 현증(顯證)보는 시간을 정하며, 3)서원문을 작성하고 삼종시(三種施=檀施, 經施, 濟施)를 합니다. 4)염송 정진 시간은 10분~1시간 정도로 하고, 현증(顯證) 보는 시간은 정진 후 1시간, 2시간, 3시간, 5시간, 24시간 중에 정하면 됩니다. 5)첫 번 정진에서 법문이 나타나지 않을 때는 두 번, 세 번까지 할 수 있습니다. 6)같은 서원을 세 번 하고도 결과가 나타나지 않으면 서원을 변경해야 합니다. 7)법문을 본 후에는 다른 서원으로 정진하여도 좋으나, 결과를 보지 않고 다른 서원을 거듭할 수 없습니다. 8)시간 정진에는 반드시 서원의 방향을 세워야 합니다. 점(占) 보듯이 좋으면 하고 나쁘면 않겠다는 흑백 판단은 금물입니다.
정진 중과 현증(顯證) 보는 법은 기후의 변화, 사람과 관련한 일, 사물의 변화 등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기후 변화로 보는 법은, 평소 날씨와 다른 점을 살핍니다. 맑은 하늘이 갑자기 어둡거나, 어둡던 하늘이 갑자기 밝아지거나, 예고 없던 비바람이 불거나, 천둥 번개가 일어나고, 때아닌 소나기와 눈이 내리는 현상들을 보면서 현시점에서 이로운지 해로운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에서 좋고 나쁨을 판단하여 결과에 따라 결정하는 것입니다.
둘째 사람과 생활 사이에서 보는 법은, 반가운 사람과 불쾌한 사람이 찾아오는 것, 즐거운 일과 걱정되는 일, 기쁜 소식과 나쁜 소식, 칭찬받고 허물 보며, 이로움과 손해됨을 보거나, 다투는 일을 보고 듣거나, 사고 난 것을 보고 듣거나, 좋은 질문과 나쁜 질문, 질병에 관한 이야기, 새와 동물들이 떼로 날아오거나 시끄러움 등을 살피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에서 좋고 나쁨을 판단하여 결과에 따라 결정하는 것입니다.
셋째 공간과 사물을 통하여 보는 법은, 선물을 받거나, 생각지도 않는 이익과 손해, 물건이 파손과 고장, 수돗물이 중단, 전깃불이 꺼지거나, 신문과 방송에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 등을 살피는 것입니다. 이러한 설법을 판단하여 결과에 따라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 밖에도 많은 종류의 좋고 나쁜 변화로 고칠 것, 버릴 것, 세울 것, 멈출 것 등을 보여 주기도 합니다. 법문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기 어려울 때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정진하여도 법문이 나타나지 않을 경우가 있습니다. 서원에 비교하여 염송과 희사가 부족하면 나타나지 않습니다. 염송이 부족하다는 가르침은 염송 중 결인(結印)이 풀리거나, 졸음이 오거나, 불이 꺼지거나, 주위가 시끄러운 법문이 나타납니다. 특히 결인이 풀릴 때는 다시 정한 시간을 염송해야 합니다. 세 번까지 하였는데도 계속하여 결인이 풀리면 그 서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희사법이 부족하다는 가르침은 선물을 받거나, 물건들이 파손되거나, 물건이 쏟아지거나, 잃어버리거나, 손해 되는 말을 듣거나, 빌려달라거나, 빌려준 돈을 가져오는 등의 법문이 나타납니다. 이렇게 나타난 법문은 현실로 생각하고 대응하지 말고 법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다스리는 방법은 나타난 액수에 1/10, 또는 1/100, 또는 1/1000을 희사합니다. 한번 법을 세웠는데도 같은 현상을 보게 되면, 그 현상이 사라질 때까지 희사합니다. 부처님이 주는 법문은 실천하기 어려운 법이 아닙니다. 어렵게 생각함은 의심과 욕심 때문입니다. 상처받을 인(因)이 있고, 손해 보는 일이 있고, 우환 질병을 받을 일이 있으면, 그와 꼭 같은 일들을 1/100, 1/1000, 1/10000로 줄여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여 주는 법문은 마치 꿈속에서 본 것을 깨고 나면 없듯이 정진이 끝나면 없었던 일로 돌아갑니다. 그러므로 보이는 법문을 두려워하거나 싫어하지 말고, 환희한 마음으로 받아들여 믿고 실천하면 반드시 재앙이 사라지고 원하는 서원이 성취될 것입니다. 비로자나불이 자비로 보여 주는 당체 법문을 믿고 실천하기를 바랍니다.
15.마가 도로 공덕 된다
밀교신문
“정진 중에 일어나는 마장(魔障)은 곧 법문이라. 우리 밀교 삼륜신은 행자에게 법(法)을 주어, 자기 허물 결점(缺點) 등을 체험(體驗)으로 알게 하고, 육행 실천하게 함이 법신불의 서원이라. 아직 증득(證得) 못한 이는 마장이라 하지마는, 모든 지혜 밝은 이는 법문이라 하느니라.”
마(魔)는 우리 주변에 함께 공존하면서 삶을 어렵게 하며, 심하게는 목숨을 뺏기도 하지만, 때로는 삶의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마는 마장(魔障)으로 외마(外魔)와 내마(內魔)가 있습니다. 외마는 자연의 마장, 시간의 마장, 사람으로부터 받는 장애요. 자연으로부터 받는 마장은 자연에 고마움을 모르고 훼손하는 응보요, 시간의 마장은 게으름에서 오는 것이요, 사람으로 받는 마장은 은혜 입고 갚지 않은 것이 근본입니다. 내마는 귀신마(鬼神魔), 귀매(鬼魅), 망양魍魎), 산정요괴(山精妖怪), 음란마(淫亂魔), 천마(天魔) 등으로 팔만사천의 마가 있다고 합니다.
수행자의 내마는 신심(身心)에서 일어나는 자심마(自心魔)를 말합니다. 종류는 오음마(五陰魔), 번뇌마(煩惱魔), 음난마(淫亂魔), 사마(死魔), 천마(天魔)를 근본으로 산란마(散亂魔), 탐욕마(貪欲魔), 진심마(嗔心魔), 기쁨마[喜魔], 슬픔마[悲魔], 조금 깨쳐 족한 마(魔), 깨달았다는 마[知解魔], 아만마(我慢魔), 마음 내지 않는 마, 희론마(戱論魔), 인과(因果) 없다 하는 사견마(邪見魔) 등이 있습니다. 외마이든 내마이든 자심마든 잘 다스리면 장애가 되는 것이 아니라, 공덕으로 바뀌게 됩니다.
육도(六道) 중에 천상·수라·축생·아귀·지옥은 받기만 하는 세상이라 자유가 없습니다. 인간계만 인을 짓기도 하고 과를 받기도 하는 세상으로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반반으로 공존하는 세상입니다. 이것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영원하지 않다는 의미도 됩니다. 즉, 좋은 일에는 반드시 마가 따르고, 나쁘고 어려움 뒤에는 반드시 좋은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세상에 사는 우리는 좋은 것과 나쁨을 조정할 수 있어 마장을 공덕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바꾸는 방법은 마장을 장애로 보지 않고 사정에 알려주는 법문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마장과 법문은 같은 것이지만 받아들이는 마음에 따라 다릅니다. 마를 마장이라 하면 장애를 뜻하는 것으로 고통이 뒤따르게 되고, 법문이라 하면 받아야 할 고통을 복이 되게 깨달음을 주는 예언으로 받는 것입니다. 이 이치를 알고 좋은 일과 나쁜 일에 너무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말며, 두려워하거나 싫어하지도 말고 좋은 법문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마가 도로 공덕 된다.’는 진리를 가장 잘 보여주신 분이 싯다르타 태자입니다. 인간세계의 주인공이 인간이듯이 하늘의 주인은 천상계에서 가장 높이 있는 타화자재천의 마왕 파순(波旬)입니다. 싯다르타는 보리수 아래 정진 마지막 새벽, 잠자는 마왕 파순(波旬)을 깨워 마군(魔軍)을 항복시키고 성불 공덕을 얻었습니다. 마왕을 성불의 증명자로 만든 것입니다.
마는 사람들이 좋은 인을 지어 공덕 받는 것을 싫어하며, 악을 지어 고통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진언 수행자는 과거의 지은 악업이 고통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려주는 마의 기뻐하는 모습을 법신불이 보여주는 법문으로 받아들여 공덕으로 돌릴 수 있습니다. 법문으로 받아들이면 나타나는 현상은 본래 내가 받을 업(業)을 축소하여 보여주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축소된 업에서 좋고 나쁜 업을 판단하여 좋은 업은 장려하는 법을 세우고, 나쁜 것은 미리 막아 받지 않도록 법을 세우면 됩니다. 특히, 서원 있어 불공할 때 마장이 잘 나타납니다. 그것은 받아야 할 악업(惡業)을 공덕으로 바꾸기 위한 불공이기 때문에 받을 업이 축소되어 나타납니다. 이때 보여주는 법을 잘 판단하여 실천하는 것입니다. 법문은 들어올 때는 기세등등하지만, 신심으로 용맹을 세우면 마장이 나갈 때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서원 불공하면 왜 마장이 일어나는지 궁금할 것입니다. 실지로는 불공하지 않아도 마장은 나타나지만, 모르고 지날 뿐입니다. 우리의 불공은 없는 것을 얻고자 하거나, 가지기 어려운 것을 가지려 하거나, 부족한 것을 채우고자 하고, 명예와 권력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갖추어지지 않을 때는 그 어떤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를 알려주는 것이 법문인데 우리는 마장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만일 서원할 것이 없으면 불공하지 않을 것이요 법문도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복을 구하는 불공이 아닌 마음을 닦는 수행을 하는 사람이 많으면 법문 마장 같은 것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지혜와 능력을 갖추고도 얻지 못하고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갖지 못하고 이루지 못하는지 원인을 안다면, 누가 가난하게 살고, 누가 병들며, 누가 불화의 고통을 받겠습니까? 누가 있어 그 원인을 알려주겠습니까? 자연이 조짐을 보여주지만, 우리의 알지 못하고 안타까워합니다. 이제 불공으로 얻고 채우고자 하지만, 얻고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나의 것을 뺏거나 벌을 주는 분이 아닙니다. 다만 인과응보를 보여줄 뿐입니다. 보여준 법문은 서원에 장애가 가장 많은 원인부터 나타납니다. 욕심이 많거나 집착이 강하면 물질로부터 나타나고, 교만심과 남을 업신여기면 불상사로 보여주고, 성냄이 많으면 투쟁하는 모습으로 보여주고, 방일하고 게으름이 많으면 아프거나 슬픈 일들로 나타나며, 마음이 불안하고 산란하여 중심을 잡지 못하면 사기를 당하는 상황이나 헛된 꿈으로 보여주고, 어리석음이 많으면 부서지고 실패하는 현상들이 주변에 나타나게 됩니다. 가장 많이 나타나는 법이 의심과 욕심과 게으름과 어리석음입니다. 막는 방법은 희사와 염송법을 중심으로 잘못을 참회하고 용맹을 세워 정진하는 것입니다.
법문은 수행자의 능력에 맞추어 자비로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믿음만 확실하면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습니다. 자비로 보여주는 법문조차도 실천하지 않는다면 서원은 이루어지지 않으며 성공적인 삶은 살지 못할 것입니다. 자비로 보여주는 법문은 실지 상황이 아닙니다. 본래 지은 인(因)으로 크게 받아야 할 고통을 축소하여 보여주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나타나고 보여주는 법문은 꿈속에서 일어난 상황이 꿈을 깨고 나면 없었던 것처럼 실지가 아닙니다. 실지 받아야 할 큰 고(苦)가 약간의 금전과 약간의 시간과 약간의 물질로써 사라지게 됩니다. 법문의 가르침대로 실천만 하면 고통이 공덕으로 바뀌게 됩니다. 누구나 불공하여 증득해 보면, 불가사의함을 확연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마장이 도로 공덕으로 변하는 불가사의한 이치를 진각성존은 ‘실행론’에 밝혔습니다.
“난행고행(難行苦行) 단련(鍛鍊)하여 몸과 마음 금강같이, 인격완성하게 하는 제일 좋은 방법이라. 애착심(愛着心)이 화하여서 평등심이 되게 하고, 탐욕심(貪慾心)이 화하여서 희사심이 되게 하고, 진에심(嗔恚心)이 화하여서 화합심(和合心)이 되게 하고, 우치심(愚癡心)이 화하여서 일체 지혜 밝게 하며, 사견집착(邪見執着) 끊어져서 일체 무애(無礙) 되게 하니, 마(魔)가 되지 아니하고 도로 공덕 되는지라.” 하였습니다.
‘실행론’은 일상생활에서 체득한 법이므로 한글을 아는 사람이라면 어느 항목이든 7번 이상만 독송하면 깨달을 수 있습니다.
마장을 장애로 보고 법문을 공덕으로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자유입니다. 고통을 받고 공덕을 받는 것도 우리의 자유입니다. 모든 것들이 나의 마음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므로 무엇을 받아도 불평과 불만의 마음을 가지지 않고 항상 고마움과 감사의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자연이 고맙고 시간이 고맙고 상대방이 고맙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불평하고 불만을 가지는 것은 자신을 불평하고 자신에 불만을 품는 것이 됩니다. 일반 신앙자(信仰者)는 무엇인가를 구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윤회의 업(業)을 짓는 것입니다. 윤회의 업에서 자유자재할 때까지 복덕이 필요합니다. 진언 수행자는 복덕(福德)과 공덕(功德)을 동시에 쌓기를 바랍니다. 복덕을 쌓는 것은 업장(業障)을 녹여 현실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것입니다. 인과의 업장이 완전하게 사라질 때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굳건한 믿음으로 비로자나불이 보여주는 법문을 볼 수 있는 혜안(慧眼)을 열어야 합니다. 혜안이 열리면 육행 실천을 바탕으로 용맹정진하시기 바랍니다.
‘마가 도로 공덕 된다.’ 하는 말씀을 다시 한번 생각하시면서 윤회의 업에서 자유자재할 수 있을 때까지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16.은혜경
밀교신문
“은혜는 평생으로 잊지 말고 수원은 일시라도 두지 말라.” 은혜 가운데 4은이 으뜸입니다. 여래의 몸을 이루고자 하는 보살은 부모의 은혜, 중생의 은혜, 국가의 은혜, 삼보의 은혜를 갚을 것을 맹세하여야 합니다. 맹세한다는 것은 은혜를 마음 깊이 새겨 청정한 보시를 실천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진언 수행자는 일체 유정 보기를 어머니가 자식 생각하듯 하여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자식보다 귀중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잘났던 못났던, 영리하든 어리석든, 착하든 악하든 구분하지 않고 모두 평등하게 사랑하고 돌보아주는 것이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불보살이 중생을 연민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부모님이 없었으면 이 몸이 없고 이 몸이 없으면 불법을 만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부모를 만난 것과 불법을 만난 것이 최고의 공덕임을 알아야 합니다. 불법을 만났으면 가르침을 받아야 하며, 가르침을 받았으면, 실천해야 합니다. 실천하지 않고는 윤회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인간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은 크나큰 은혜입니다. 태어나고 살아가고 죽음에 이르는 모든 삶이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축생과 다른 것은 은혜를 아는 마음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은혜라는 말은 은(恩)은 마음으로 사랑하고 예쁘게 보려는 인(因)을 마음으로 품음이요, 혜(惠)란 조심스럽게 되돌려 준다는 뜻입니다. 즉, 대가 없이 돌보아주면서 공덕을 쌓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 가르침은 은혜를 베푸는 편에서 보면 큰 공덕을 짓는 것이지만, 받는 편에서 보면 큰 빚을 지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베풀면서 공덕을 쌓는 것보다 은혜를 입으면서 빚지는 것이 더 많습니다.
물질의 빚은 보이는 빚이라 알 수 있지만, 은혜의 빚은 보이지 않아 빚진 줄조차 모릅니다. 물질의 빚으로 받는 고통은 가볍지만, 은혜의 빚은 무겁습니다. 은혜의 빚이 있으면 부모를 일찍 여의게 되어 외로우며, 설혹 부모가 계셔도 보호를 받지 못하며, 몸은 항상 병마에 시달리고, 사회가 도와주지 않아 하는 일마다 실패하여, 가난하게 살아도 국가가 보호하지 않으며, 올바른 가르침을 받지 못하여 명예와 권력과 존경과 사랑을 받지 못하고, 비난과 원망의 소리를 항상 듣게 됩니다. 설사 서원을 세우고 정진하여도 쉽게 이루어지지 않으며, 믿음은 약해지고 배은하는 마음이 강하여 해탈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빚은 반드시 갚아야 합니다.
살생의 빚, 도둑질한 빚, 잘못된 음행의 빚은 몸으로 갚을 수 있고, 거짓말한 빚, 실없는 말의 빚, 이간한 말의 빚, 거친 말의 빚은, 진실한 말과 바른말과 화합하는 말과 아름다운 말로 갚을 수 있고, 욕심낸 빚, 화낸 빚, 어리석음의 빚은 베풀고 화합하고 슬기로움으로 갚을 수가 있지만, 은혜 입은 빚은 오로지 청정한 마음으로 베풀 때 갚아지는 것입니다.
은혜의 빚이 많으면서도 갚지 않으면 고마움을 모르게 되고 감사할 줄 모르게 되며, 도움받기만을 바라고 나눌 줄을 모릅니다. 은혜의 빚이 없으면, 모든 것이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큰 병이 있습니다. 서원 병입니다. 자신의 잘못과 자신의 빚은 갚으려 하지 않으면서 세우는 서원 병입니다. 서원 병이 짙으면 짙을수록 고통과 재난이 크게 일어납니다. 서원 병을 다스리는 묘약은 모든 것을 은혜로 생각하는 마음뿐입니다. 주어진 것에서 만족을 느끼면서 항상 고마우며 감사하다는 마음으로 모두가 은혜로구나 하는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은혜의 빚을 갚지 않을 때 가난하고 병들고 외로움의 고통만 받는 것이 아니라, 수원심이 일어나게 됩니다.
부모를 미워하고 사회를 원망하고 국가에 반역하고 스승을 비방하면서 원수를 맺습니다. 수원심은 배은하는 마음의 뿌리에서 싹이 납니다.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수원심은 언제든지 자신을 악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어떠한 문제가 생겼을 때 미워하는 마음이나 원망하는 마음이 있으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미워함은 최대의 악(惡)이요, 감사하는 마음은 만능의 약(藥)입니다. 자신이 상대를 미워하고 원망하면, 상대방은 여전히 나를 미워하면서 악의로 대할 것입니다. 상대방을 칭찬하고 축복하며 감사한 마음을 가질 때 상대방의 마음이 은혜로움으로 바뀔 것입니다. 환경도 이와 같습니다. 환경을 파괴하면 결국 자신이 설 자리가 없어지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진각성존의 깨달음 장면을 보면, “五月 十六日 새벽에 심신(心神)이 상연(爽然)하여지고 문득 동천(東天)에 솟은 태양을 보시매, 불은(佛恩)의 무변(無邊)함과 천지(天地)의 은혜가 지중(至重)함을 몸에 사무치게 느끼신 후 활연히 대각(大覺)을 성취” 하였습니다.
은혜의 지중함을 앎으로써 깨달은 얻으신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으신 후 농림촌을 떠나 7월 15일 계전의 제실에 머물면서 참회 정진과 설법의 보림을 하였습니다. 이것 역시 부모님과 조상을 생각하는 은혜에 보답하는 보림이었습니다.
농림촌에 들어가시기 전, 선지식을 찾는 수행에서 처음 형산을 찾아 가르침을 받고 집으로 돌아오신 새벽, ‘육방예경’ 말씀을 따라 동서남북 상하에 절을 하신 것도 4은의 지중함에 예를 올리신 것입니다. 이렇게 수행과 깨달음과 첫 설법을 모두 은혜 갚음이었습니다.
성존의 법은 은혜를 지중하게 깨닫고 실천할 때 올바른 법통승수가 이룩될 것입니다. 은혜를 저버리면 성존의 법을 이어갈 자격이 없습니다. 교화의 흥왕도 마찬가지며, 서원성취도 공덕도 모두 은혜를 바탕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물속에 들어가려면 물의 법을 익혀야 하고, 불을 사용하려면 불의 법을 익혀야 하며, 더운 곳에서는 더운 곳의 법, 추운 곳에서는 추운 곳의 법, 봄은 봄의 법을, 여름에는 여름의 법을, 가을에는 가을의 법을, 겨울에는 겨울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성존의 법인 진언을 수행하여 해탈의 공덕을 얻으려면 반드시 은혜의 지중함을 먼저 알아야 할 것입니다. 법을 따른다는 것은 곧 실천을 의미합니다. 은혜 갚음을 실천하지 않으면, 진각권속이 될 수 없으면, 진각권속이 아니면 진각의 권리를 행할 수 없습니다.
염송 수행도 희사 수행도 은혜를 깨닫지 않고는 어떠한 공덕도 이룰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은혜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면 배은이 됩니다. 배은 자는 악지식입니다. 악지식이 응보를 받을 때 그를 따르는 무리도 악의 응보를 받게 됩니다. 응보는 자신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와 배은은 서로 연관 관계가 있어 나와 인연이 가까운 자가 함께 받게 됩니다. 나와 가장 가까운 인연은 부모와 자식입니다. 가장 먼저 받는 것은 정을 많이 준 자녀들이 받고, 다음은 부부가 받고, 다음으로 부모가 받고, 다음으로 친척과 이웃의 순으로 받게 됩니다. 받는 시기는 오늘 받지 않으면 내일 받을 것이며, 올해 받지 않으면 다음 해에 받을 것이며, 10년을 넘기지 않고 받게 될 것입니다. 받다가 남은 업이 있으면 다음 생까지 가져가게 됩니다.
우리는 은혜로 살아가는 존재임을 인식하고 반드시 은혜를 갚기를 서원해야 합니다. 은혜를 갚는 길에는 마음으로부터 일으키는 마장이 있습니다. 자신이 아니면 안된다는 교만심, 상대의 좋은 것을 보지 못하는 질투심, 자기의 지식과 자기의 수준과 자기의 그릇으로 측량하는 명예, 자신의 권력만을 생각하는 마음을 조복 받아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키운 배은심이 상대방의 진정성을 왜곡하여 스스로 수원 맺는 마음을 항복시켜야 합니다. 한 발자국만 뒤로하고 한순간만 마음을 돌이켜 생각한다면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성존의 법을 전하는 자는 은혜의 지중함을 깨닫는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모(模)가 모답지 못하고 범(範)이 범답지 못하면 덕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지비용의 가르침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라 위해 의무(義務) 다해 동업 은혜 서로 갚고, 조상(祖上) 위해 추선(追善)하여 부모 은혜 모두 갚고, 믿음 항상 굳게 세워 삼세불은 갚으리다.” 하였습니다.
법은(法恩)을 갚는 길이 나를 인도해준 분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입니다. 스승의 가르침인 법은을 입고 갚을 줄 모르면, 은혜 빚지는 인연을 짓게 되므로, 은혜의 법을 실천하여 정진하는 것이 제일의 길입니다. 은혜를 지중하게 생각하면서 진실한 진언수행을 하기 바랍니다.
이제부터 “부모님 고맙습니다.”, “일체중생 고맙습니다.”, “부처님 고맙습니다.”, “가르침 고맙습니다.”, “스승님 고맙습니다.”, “삼라만상 고맙습니다.”는 생각으로 살아가기 바랍니다.
17. 진호국가(鎭護國家) 불사
밀교신문
“진호국가(鎭護國家) 하는 데는 네 가지 법 있음이니, 식재법(息災法)과 증익법(增益法)과 항복법(降伏法)과 경애법(敬愛法)이 진호국가 법이니라.”
진각성존은 교화 초기부터 진호국가 불사를 하였습니다. 자성일 시간에 진호국가 불사로 악하고 삿된 기운을 진압하여 국민과 국가의 안정을 위하고 평화로운 나라가 이룩되기를 서원하였습니다. 강도의 서원은 “내 허물을 고치고 법신불과 진각성존의 끝없는 서원이 성취되기 위하여 진호국가 불사합니다.”로 기록하였습니다.
부처님 정법으로 국가를 수호하고 국민을 평안케 하는 가지기도법(加持祈禱法)에 사종수법(四種修法)이 있습니다. 첫째, 식재법(息災法)은 재난과 재앙이 멈추고 죄업장(罪業障)을 소멸하는 법입니다. 큰 서원으로는 천재지변, 한재(旱災), 수해(水害), 흉년, 역병, 전란을 막고, 작은 것으로는 개인의 병고, 불상사의 원인을 깨달아 참회하는 가지 수행법입니다. 둘째, 증익법(增益法)은 식재법으로 일어난 공덕이 장원하기를 가지 받는 수행법입니다. 셋째, 항복법(降伏法)은 증익법 뒤에 다시 소생하는 일체 장애를 조복(調伏)하고 절복(折伏)시키는 힘을 가지 받는 수행법입니다. 넷째, 경애법(敬愛法)은 일체중생을 부처로 존경하고 만물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실천의 가지 수행법입니다. 식재법과 증익법은 불국토를 건설하는 법이요, 항복법과 경애법은 자신의 지혜를 깨달아 일체중생에게 자비의 실천을 나타내는 가지기도법입니다.
진호국가 가지기도법의 중심은 정도 실천입니다. 믿음도, 목적도, 수행도, 깨달음도, 교화도 모두 정도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삿된 목적으로 사도를 믿고, 삿된 가르침을 받아 기복(祈福)의 뜻으로 수행하면, 깨달음의 법도 삿된 법이 되며, 공덕도 삿된 것이 되어 불행한 결과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의 본심은 바른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부모님과 스승은 자녀와 후학들을 훈육하고 가르칠 때 권선징악(勸善懲惡)을 중심에 두었습니다.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가르침에도 정도를 중심으로 하였습니다. 충효와 정열을 강조하는 가운데 종속적인 뜻을 가진 권선징악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반하여 불교는 수평의 권선징악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평등과 불평등, 일원과 이원, 봉건과 자유시대로 나누는 상대성이 아니라, 어느 편으로도 기울지 않는 중도의 길을 제시하는 정도의 가르침입니다. 종속적 가르침에는 정도와 사도의 구분이 애매모호(曖昧模糊)하기도 합니다. 정도와 사도를 판단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있습니다. ‘모든 생명은 평등하다. 생명과 만물도 평등하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자신만을 생각하지 않고 이웃과 사회를 생각하는 것이 정도가 되고,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상대의 잘함과 이익에 시기와 질투심을 가짐이 사도입니다. 보통 일반인에게 정도인가 사도인가를 물어보면, 자신의 행동이나 말들은 모두 정도라고 답합니다. 정도 실천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특히 학문의 수준이 높은 사람일수록 이론을 밝은 데 실천이 희박하기도 합니다.
중국 당송 팔대 문장가 꼽히는 백낙천이 새의 둥지처럼 나무 위에서 수행하는 도림 선사에게 “부처님은 무엇을 가르칩니까?” 물음에 “어떠한 악도 행하지 말고 좋은 착한 일만 하여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맑히면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라고 하였다. 백낙천은 “그것은 세 살 먹은 어린이도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라고 하였다. 도림선사는 “세 살 된 어린이도 알고 있는 것을 80이 된 노인도 행하지를 못하니 알고 있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고 답하였다. 이 말씀에 백낙천이 불법에 귀의하였다 한다.
사람은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시절에 배운 착함을 나이가 들수록 실천하지 못하고 욕망을 쌓아 우둔하게 삿된 길을 익히고 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정도의 길을 인도하는 밝은 스승을 찾고, 천진난만한 시절의 마음으로 돌아가 몸소 실천하는 행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과나무에 사과가 열리고 배나무에 배가 열립니다. 사과나무는 배가 열리지 않고 배나무는 사과가 열리지 않습니다. 부처님을 만나면 자비를 배우게 되고 예수님을 만나면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자비는 기쁨과 슬픔을 평등하게 행할 수 있지만, 사랑은 미움과 함께 하지 못합니다. 정도의 스승을 찾아야 정도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석가불이 깨달은 법은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의 법이며 첫 설법이 8정도[四諦法]로 시작하였습니다. 진각성존의 깨달은 법은 정도의 육자진언으로 정도의 참회문을 열었습니다. 모두 정도 실천의 불작불행(佛作佛行) 하는 스승의 모습입니다.
정도는 곧 중도(中道)입니다. 중도가 되지 않는 정도는 정도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선악시비선후본말(善惡是非先後本末)의 8풍(八風)을 말하면서 좋고 나쁨을 분간하고, 옳고 그름을 분간하며, 앞과 뒤를 구분하고, 근본과 지말을 나누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느 한 편을 세우고 치우치는 법으로 중도의 생명인 영원성과 평등성이 없는 중생의 법입니다. 이렇게 나누고 구분하면, 천상이나 인간이나 축생으로 태어나며, 지옥이나 아귀로 윤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선악 시비 선후 본말을 고집하면 고정관념의 병이 생기게 됩니다. 고정관념은 모두 자기중심 생각을 표준으로 삼은 것입니다. 사람은 고집과 집착함이 있어 이익도 즐거움도 행복도 누릴 수도 있으며, 악함도 손해도 괴로움도 불행도 받게 됩니다. 이것은 선과 악이 공존하며, 행과 불행이 공존하는 세상에 살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것이 옳고 어떠한 것은 잘못이라는 확실한 기준을 세울 수 없는 것이 또한 우리들의 세상입니다. 나에게 착한 것이 상대에게는 악이 될 수도 있고, 나에게 옳은 것이 상대에게는 그른 것이 될 수도 있으며, 나의 즐거움이 상대방의 괴로움이 될 수도 있고, 나의 이익과 명예가 상대방에게는 손해가 되고 치욕스럽고 고통이 될 수도 있습니다. 편협한 마음을 가진 우리는 마음대로 선택할 수도 없습니다. 어떠한 행동과 어떠한 말과 어떠한 생각도 모두에게 공평할 수 있는 법을 잘 말씀하신 분이 성인이며, 우리에게는 부처님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초전법륜의 4성제법과, 12연기, 6바라밀, 37조도품은 정도의 말씀이라 맛이 무미건조(無味乾燥)하여 쉽게 접근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외도(外道)나 사도(邪道)는 달콤한 맛으로 유혹하며 정도를 방해합니다. 싯다르타 태자가 성불 직전에 마왕의 방해가 있었고, 교화할 때는 육사외도(六師外道)와 바라문들의 방해가 있었습니다. 진각성존도 초기 교화시에 국가에는 사상의 혼란이 있었고, 종단은 외도지마(外道智魔)가 있었습니다. 이때 진호국가 사종수법을 행하여 사상을 정화하고 외도지마를 참회시켰습니다. 탐진치가 치성하여 정신문화가 황폐하고 선입견과 고정관념으로 판단이 흐려질 때 식재되고 증익하고 항복받고 경애하는 법의 가지기도로써 모근 상황을 바꾸어 정도로 향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정도는 팔정도 실천입니다. 올바른 견해[正見], 올바른 생각[正思惟], 올바른 언어[正語], 올바른 행동[正業], 올바른 생활[正命], 올바른 정진[正精進], 올바른 마음가짐[正念]입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심은 올바른 견해이며, 다음으로 올바른 마음가짐입니다.
올바른 견해는 마음 깊이 도사리고 있는 선입견(先入見)과 고정관념(固定觀念)을 버리고, 거울이 비춰주듯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미리 작성한 선입견이나 자기만의 답을 지닌 고정관념도 내려놓고, 친소(親疏)를 차별하지 않는 평등한 마음으로 보아야 합니다. 자기의 이익과 명예와 권력만을 생각하는 마음으로는 세상의 이치나 물정의 운행을 올바르게 볼 수가 없습니다. 자연으로부터 만물로부터 사람으로부터 허심청법(虛心聽法)의 자세를 갖추어야 바른 견해를 가질 수 있습니다. 올바른 견해를 갖춘 다음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진언을 염송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견해를 바탕으로 하지 않은 진언 염송은 기복(祈福)하는 염송이므로 영원한 진언의 묘득, 영원한 진언의 공덕, 영원한 깨달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부처의 본래 지혜를 일깨우는 수행에는 정견이 으뜸임을 알고, 자신의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초발심의 자리에서 사종의 가지 기도를 해야 합니다. 잘못을 찾아 참회 서원하는 식재법, 자비 희사의 증익법, 용맹정진의 항복법, 염송 지혜의 경애법이 원만할 때 이 땅은 밀엄정토가 되고 자신은 해탈의 즉신성불을 이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