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정치 운동과 한인 사회의 변화

 사회주의 정치 운동과 한인 사회의 변화

<“무산계급 문화대혁명 만세!” 마오쩌둥 어록을 손에 쥐고 텐안먼 광장에 몰려든 군중, 1967-69년 경/ https://allthatsinteresting.com/cultural-revolution#4>

사회주의 정치 운동과 한인 사회의 변화

해방과 중국의 건국, 그리고 6·25전쟁의 역사적 격랑을 거치면서 이루어진 중국 내 한인 사회의 사회주의 개조는 그러나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중국 구역 자치의 한 지역으로, 그리고 중국 내 조선족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하게 되는 한인들의 삶은 중국의 중앙차원에서 벌어진 정치 운동의 영향을 받아 요동치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어느 정도의 자치가 허용되었던 한인 사회는 정치 운동의 혼란과 소용돌이에 휩쓸려 급격한 변모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개혁·개방이 선언된 1978년 이전까지 반우파 투쟁과 문화대혁명이라는 커다란 두 개의 정치 운동이 발생하였다. 중국에서의 정치 운동은 정치 노선을 둘러싸고 이루어지는 집단 내 파벌 갈등이라 할 수 있지만, 그 결과는 항상 다른 파벌의 제거로 연결되었다. 반우파 투쟁은 4개의 주요 정치 운동으로 나뉘어 발생하였다. 1957년 봄부터 시작된 반우파 투쟁, 반우파 투쟁의 소수 민족 지역에서의 정치 운동인 1957년과 1958년의 지방 민족주의 반대 투쟁, 그리고 이것이 더욱 발전되어 1958년에서 1960년까지 이루어졌던 본격적 정풍 운동, 그리고 1964년에서 1966년까지 이루어진 사회주의 교육 운동이 그것이다. 즉, 문화대혁명을 10년 동란이라고 하지만 소수 민족 지역에서는 반우파 운동 역시 10년에 걸친 정치 운동이었던 것이다. 문화대혁명은 1966년에 발생하여 1976년까지 지속되었지만, 여기에서는 초기라 할 1968년까지만 살펴본다. 문화대혁명은 한인 지역에서 더욱 특이한 양상을 띠고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이는 크게 세 시기로 나뉘는데, 지방 정권 타도 시기, 선명성 경쟁 시기, 그리고 계급 대오 정리 시기가 그것이다. 20여 년 동안 지속된 이런 정치 운동의 결과 중국 내 한인 사회는 한반도의 한인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중국 조선족 사회로 변모하게 된다.

반우파 투쟁기의 정치 운동과 한인 사회

1957년 2월 마오쩌둥은「인민 내부의 모순을 해결할 데 대하여」라는 문건을 발표하였다. 이는 곧 4월의 정풍 운동으로 연결되었다.註 036 공산당은 지방 간부들이 당무에서 관료주의, 분파주의, 주관주의를 타파하고 노동자와 농민과 더욱 밀접히 하라고 요구하였다. 그 결과 자유주의와 개인주의를 배격하는 방침을 내놓았다. 물론 이 시기의 정풍 운동은 공산당 역사에서 처음이 아니었다. 1942년 옌안에서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57년의 정풍 운동은 건국 과정에서 급격하게 충원된 공산당 간부들의 관료주의적 행태를 배격하고 인민들의 불만을 무마하려는 차원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중앙 차원에서의 정풍은 4월과 6월의 백화제방(百花齊放) 식의 자유 토론을 거치면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중앙의 지시에 의한 한인 지역에서의 정풍 운동은 반우파 투쟁으로 변모하게 된다.

(1) 한인 지역에서의 반우파 투쟁의 시작

1957년 6월 22일『인민일보』의 사설인‘모든 인민의 투쟁을 통해 우파를 분쇄하자’가『연변일보』에 보도되면서 한인 지역의 반우파 운동은 시작되었다. 한인 지역의 반우파 운동은 우파 지식인층에 대한 배격 운동으로 시작되었는데, 특히 민족 문학이나 언어를 중심으로 논쟁이 시작되었다. 즉, ‘민족어 규범 논쟁’으로 시작하여‘문학에서의 진실’논쟁으로 발전되는 것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민족어 규범 논쟁은 한국어에서의 중국어 사용과 관련된 내용이다. 한인 교사와 학자들은‘조선어 규범’을 정의하면서, “새로운 어휘가 필요하면 먼저 조선어에서 해당 어휘를 찾아보고, 없다면 한어나 외국어에서 빌려 온다”고 하였다. 해방 후 한국어는 일본어나 중국어, 혹은 기타의 영향으로 혼란하여 중국 내의 한국어를 통일할 필요성이 있었고, 이는 민족 교육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註 037 즉, 한국어의 문법과 활용 예에 따라 중국어를 사용하는 것을 규범화한 것이다. 그러나 반우파 운동이 시작되면서 논쟁은 다른 방향으로 변질된다.

먼저 연변의학원의 정규창, 작가 최정련, 연변대학 노성균, 연변인민출판사의 김동기와 김현채가 우파로 낙인찍혔다. 곧이어『연변일보』와 정규창이 주도가 된 반혁명적 행위가 적발되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반우파 투쟁은 우파에 대한 적극적인 제재와 색출로 나아가게 된다. 초·중등 민족 학교의 교사나 지방 기층 간부들, 민족 문화를 담당하는 가수, 무용수, 배우들도 반우파로 낙인찍혔다.

곧이어 문학에서의‘진실성’논쟁으로 들어가면서 반우파 투쟁은 적극적으로 민족 작가들에게 그 칼날을 향하게 된다. 김학철이나 최정련 등 항일 운동과 혁명 운동을 하였던 작가들이 우파로 낙인찍혀 글 쓰는 것을 금지당하였다. 사회주의 문학에서 진실성이란 있는 그대로의 사회를 묘사하여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발전할 수 있는 방향으로 쓰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의 어두운 면을 부각시키는 것은 사회주의 국가의 단결을 해치는 반인민적 책동이라는 것이다.註 038 또 인류애에 기초한 문학은 부르주아 우파의 문학 경향으로 매도되었다. 우파로 낙인찍힌 작가들은 글 쓰는 것이 금지되었고, 나머지 작가들의 경우 극좌적인 글쓰기가 허용되었다.

우파로 낙인찍힌 사람들은 정치적 권리를 박탈당한 것은 물론, 노동 개조를 위해 강제 노동 수용소로 추방당하였다. 일부는 농촌으로 추방당하였고, 일부는 북한으로 도망쳤다. 아직 민족 지역 전체로 정치적 투쟁의 초점이 모아지지는 않았으나, 이는 단지 반우파 투쟁의 시작이었을 뿐이다.

(2) 지방 민족주의 반대 운동

소수 민족 지역에서 반우파 투쟁 운동의 가장 주요한 부분은 지방 민족주의 반대 운동이었다. 지방 민족주의란 소수 민족의 민족주의를 의미한다. 민족주의는 그것이 한족 중심의 대한족주의건 소수 민족의 민족주의건 다 배척되어야 한다고 중국공산당은 주장하였다. 특히 소수 민족의 민족주의는 조국을 분리시킬 수 있는 분열주의 책동으로 여겨져 강력한 탄압을 받았다. 문제는 반우파 투쟁 과정에서 중공당이 한인 지방 간부들 중 일부가 우파적 행위를 했다며 지방 민족주의자로 낙인찍었다는 점이다.註 039

1958년 4월 중국공산당 연변지위 부서기인 김명한은「지방 민족주의에 반대하여 민족 단결을 강화하자」는 문건을 제출하였다. 여기에서 그는“옌볜은 조선족의 민족 지역이므로, 이런 특별한 상황을 고려하여 정풍 운동을 실시하여야 한다”면서, “지방 민족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투쟁”이고, “일부 민족주의적인 조선족들이 자기 민족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당과 사회주의를 공격”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註 040 지방 민족주의자들은“민족 문제에 대한 당의 지도력과 국가의 사회주의 체제를 반대하고 (중략) 민족 소요를 부추기며, 민족 관계를 분쇄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런고로, “모든 조선족 간부들은 민족 문제에서 명확한 입장을 가지고 프롤레타리아 민족주의 노선을 따르라”고 하였다.

여섯 가지가 지방 민족주의적인 표현으로 제기되었다.

첫째, 일부 조선족은 옌볜을 자치주가 아니라 성급의 자치구로 공산당이 약속했는데 지키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는 역사적·실제적 상황을 모르는 민족주의적인 표현이다.

둘째, 일부 조선족은 다른 민족이 자치주의 장이 되는 것은 조선족 문제를 처리하는데 바람직하지 않으며, 민족 간부인 조선족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셋째, 다른 민족의 이익을 침해할지라도 일부 조선족들은 조선족의 이익이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당에 대해 반감을 가진다.

넷째, 지방 민족주의자들은 당의 민족 정책을‘동화 정책’이고‘대한족주의’로 주장한다. 그래서 조선어의 규범은 지켜져야 한다며 중국어 배우기를 거부한다. 더군다나 한족을 후진적인 민족으로 생각한다.

다섯째, 민족 지역에서 새로 충원되는 간부는 조선족이어야 하며 한족이어서는 곤란하다고 주장한다. 그럴 경우 조선족의 자치권이 침해받는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조선족은 다중 조국론을 제멋대로 해석한다.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사용하는데, 조국(한국), 첫 번째 조국(한국)이니 법적 조국(중국), 인민 조국(중국), 혈연 조국(한국) 등의 용어를 쓴다는 것이다.註 041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 조선족은“지방 민족주의자로, 이 지방 민족주의자들은 우파”라는 것이다.註 042

즉 해방 전부터 중국공산당이 약속한 사항인 자치 및 자치권의 범위, 조선어 사용에서의 규범화 등 민족 문화에 대한 부분, 조국론 등이 공산당의 현재 정책과 부합되지 않는 경우에 우파이자 지방 민족주의자로 매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방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구체적인 반대 투쟁은 대자보 운동에서 시작되었다. 연변대학에 1958년 4월에서 5월까지 4만 5,000장 이상의 대자보가 붙고, 9월부터는‘지방 민족주의 반대’라는 표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註 043 그리고 언어, 교육, 지방 기관에 대한 공격과 처벌로 나타나게 된다. 조선족으로서의 정체성이 강하게 나타나는 기층 민족 간부층을 겨냥하여 지방 민족주의 반대 투쟁이 이루어진 것이다.

(3) 지방 민족주의 반대 투쟁의 양상과 한인 사회

제일 먼저 지방 민족주의 반대 투쟁이 시작된 곳은 한국어 등 언어 부분이었다. 앞서 살펴본 조선어 규범화 논쟁에 대한 반대로 이루어졌다. 가령, “조선어 규범화를 반대한다”“한족을 통하여 한어를 배우자”“한어를 완전히 배우고, 한어 어휘를 차용하여 조선어를 발전시키자”“한어를 배우는 것은 애국적 의무이다”“한어 강의가 미래 교육 방향이다”“한족이 주체 민족이고 선진 민족이라는 것을 인식하자”등의 구호가 대자보에 씌어져 한국어보다 중국어를 배울 것을 요구하였다.

1958년 8월 19일부터 11월 6일까지『연변일보』는 언어 문제에 대한 일련의 사설을 실었다. 사설에서는“당은 언어 문제에 대한 기본 노선”을 제공했고, 기본 노선에 의해, “미래 언어 문제는 위대한 조국 대가정의 단결과 발전을 따라 이루어져야”하고,“ 새로운 어휘가 필요하면 한어에서 빌려야 하며”, 이를 통해서“조선족과 한족은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특히“조선어에 한어 어휘를 받아들이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조국의 안정과 단결을 해치는 행위”라고 주장하였다.註 044 그 결과 중국어를 하지 못하는 민족 간부나 중국어를 사용하지 않고 조선어로만 이야기하는 민족 간부들은 모두 우파로 낙인찍혔다.註 045

지방 민족주의 반대 투쟁이 발생한 두 번째 주요한 부분은 민족 교육이었다. 공산당은 민족 혼합 학교를 장려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랴오닝 성의 경우 1961년에 21개 중·고등학교 중 2개가, 220개 초등학교 중 31개가 민족 혼합 학교로 변경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족 중 일부는 자녀들을 민족 학교로 전학시키기도 하였고, 민족 학교 소멸을 우려하는 입장들이 나타났다.註 046

그러나 지방 민족주의 반대 투쟁은 점차 민족 간부들 중의 핵심이라 할 기층 민족 간부를 겨냥하기 시작하였다. 길림성교육국 민족 교육 부분은 1954년에 설립되었는데, 5명의 조선족과 1명의 몽골족으로 간부층을 구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2명의 조선족이 지방 민족주의 반대 투쟁 기간에 직위 해제되어 우파로 낙인찍혔고, 1명은 1960년에 우파로 분류되고, 또 1명은 창춘의 학교로 쫓겨났다.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있는 길림성교육국의 민족 교육 부분은 조선 민족 교육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서인데, 사실상 괴멸 상태가 된 것이다. 1961년 마침내 부서는 폐지되고 나머지 두 사람도 농촌 지역으로 하방된다. 즉 민족 교육은 일선 민족 학교는 민족 혼합 학교로 전환하도록 요구받는 상황에서, 기획 및 행정을 하는 부분이 모두 없어지는 상태가 된 것이다.註 047

여러 학자들은 문화대혁명을 중국 정치에서 10년 재난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중국 동북 지역 한인에게 민족 정체성과 관련된 재난은 이미 1957년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어나 민족 교육, 그리고 민족 간부에 이르기까지 정체성과 연관된 부분은 지방 민족주의로 매도되어 배척받게 된 것이다. 이는 사실상 동화 정책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런 시도는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더욱 강화된다. 반우파 투쟁을 결산하면서 중국공산당은“조선족 지역에서 민족 자치에 대한 논쟁은 종료되었고, 조국에 대한 애국주의가 고양되었으며, 한족이 주도하는 민족 단결이 강화되었고, 한어 교육을 강조하는 사회주의 노선에 의해 민족 언어 교육이 집행되고 있다”고 자체 평가하였다.註 048 당의 이런 평가는 민족 지역에서의 언어와 민족 자치가 사실상 동화 정책에 초점을 두고 이루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註 049 왜냐하면 지방 민족주의에 반대한다면 한족의 민족주의라 할 대한족주의(大漢族主義)도 반대해야 하지만, 조선족 자치주에 거주하는 한족에게 조선어를 배우도록 요청하지도, 교과에 포함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대약진운동과 한인 사회

정치적 운동은 아니지만 중앙 차원의 정책 방침의 변경에 따라 한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 운동이 대약진운동이다. 1958년 중공당은 사회주의 건설 총 노선을 방침으로 정하고, 지금까지 이루어진 사회주의 개조 과정을 총결하는 정책을 작성하게 된다. 3면홍기(三面紅旗)로 칭해지는 이 노선은 총노선, 대약진, 인민공사를 지칭한다. 왜냐하면 이 세 폭의 붉은 깃발은 1958년과 1959년의 좌경적인‘총 노선’의 결과 이루어진 것으로 대약진운동으로 칭해졌고, 사회적으로는 인민공사 제도를 전국적으로 도입했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반우파 투쟁이 진행되는 동시에 대약진운동도 진행되었다. 그러나 대약진운동의 결과는 참혹했다. 중국 전체에서 2,000만 명이 굶어죽는 1959년에서 1961년까지의 이른바‘3년 곤란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이 시기 이후, 잠시간의 조정기라 할 휴지기가 있었고, 1964년에서 1965년에는 이른바 4개 현대화가 사회주의의 새 노선으로 선언되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의 발발로 4개 현대화 노선은 10년이 지나 개혁·개방이 선언되면서 다시 적용되어 개혁·개방의 초기 방침이 되었다.

한인 지역에서의 대약진운동은 소유에 있어 집단화를 그 특징으로 하고, 공동 노동을 통한‘심경 고조, 강철 고조, 수리 고조’라는 구체적인 운동을 통해 표출되었다.註 050 소유에 있어 집단화란 1945년 이후 토지 개혁으로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분배된 토지를 인민공사의 체계 속에 흡수시켜 인민 개인(개체)이 아닌 집단(집체)의 소유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주지하다시피, 한인들에게 농토의 소유는 그들의 꿈이자 경제 행위의 표현이었다. 그래서 토지 개혁의 결과 농토를 얻은 한인 농민들은 공산당을 지지하고 참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 토지를 국가에 환수시키고, 농민들은 집단농장화한 인민공사 체제 속에서 공동으로 노동해야 하는 체제가 된 것이다. 1958년 8월 13일 중앙의 인민공사화 방침이 나오자, 옌볜 지역에서도 인민공사 건립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한 달 남짓한 기간에 자치주에서 78개의 인민공사를 만들어 인민공사화를 완료한 것이다.註 051 즉, 사회주의의 최종 목표인 공동 생산, 공동 소유의 공산주의가 완성된 것이다.

제도적인 인민공사화가 완성되자 생산량을 초과 달성하기 위한 심경 고조가 일어났다. 심경 고조는 인민공사 전 조직원이 대대, 중대, 소대로 재편하여 군인처럼 새벽에 일을 나가 붉은 기를 꽂고 집단적으로 열심히 일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조직의 군사화, 행동의 전투화, 생활의 집단화를 통한 생산량 초과 달성이 목표였다. 심경 고조에 이어서는 강철 고조가 일어났다. 강철 고조란 민간에 용광로를 만들어 자체적으로 강철을 만드는 운동이다. 또 수리 개발 고조는 농사에 필요한 물을 얻기 위해 수로를 만들고, 토목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한인 지역에서의 인민공사화는 다른 의미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한족 농민이 인민 공사에 유입되는 민족 혼합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이에 따른 공동 노동은 다른 측면도 포함하였다. 가령 인마허(飲馬河) 고급농업합작사는 인민공사화를 추진하면서 당의 지시로 한족 농민 1,200호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 결과 한족 농민은 연 수입이 80% 증가한 반면, 조선족 농민은 오히려 내려가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더군다나 다음 해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자 두 민족 간의 대립이 첨예해지는 결과를 가져오고, 일부 조선족 농민은 도시나 공장 혹은 북한으로 이주해 가는 현상마저 나타났다.註 052

표 3 ▶ 연변조선족자치주의 한족과 조선족 인구 증감(1957~1961년)

1957년 1958년 1959년 1960년 1961년
총계 984,728 1,019,077 1,056,199 1,127,542 1,153,320
한족 385,035 421,346 457,841 523,909 544,804
조선족 581,885 579,906 579,264 584,280 589,239
출전: 延邊朝鮮族自治州計劃生育委員會 編, 1990,『延邊人口統計資料彙編』, 연변대학출판사, 123∼125쪽을 재구성

〈표 3〉을 보면 인민공사화가 시작된 1958년부터 1959년까지 조선족 인구는 2,621명 감소한 반면, 한족 인구는 7만 2,806명이 증가하여 약 20%나 증가한 것을 알 수 있다. 대약진운동 기간에 한족 인구의 증가는 매우 활발하여 5년간 15만 명이나 증가하였다. 반면에 조선족 인구는 7,000명에 불과하여 자연 증가 정도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특히 수리 개발 고조는 한인 노동력을 거의 강제적으로 집단 공사장으로 내몰았다. 옌지와 허룽 두 개 현에 걸친 구둥 하(古洞河) 인수로 공사와 훈춘의 제방 공사가 이에 해당한다.註 053 그러나 한인 지역의 인민공사화는 한족 지역에 비해 비교적 풍족하게 살던 한인들의 생활을 저하시켰다. 물론 3년의 곤란 시기(1959∼1961)에 모든 중국이 어려웠으나, 이는 급격한 인민공사화에 의한 사실상 인재로, 당시 한인들은 헐벗은 삶을 살아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끼니를 잇는 정도가 된 것이다. “우리 민족의 절대 부분이 그것과 운명을 같이해 온 인민공사가 건립된 때부터 1980년 초까지 20여 년 간 줄곧 평균주의와 공산풍의 시달림을 받았다”는 표현은 이 시기 이후 한인들의 삶의 피곤함을 잘 나타내고 있다.註 054

문화대혁명과 한인 사회

그러나 정치 운동 중 무엇보다도 한인 사회의 정체성에 영향을 준 운동은 문화대혁명이었다. 물론 문화대혁명은 모든 중국인에게 큰 영향을 주었지만, 소수 민족 지역에서는 그 피해 정도가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극좌적 운동인 문화대혁명이 소수 민족 지역에서는 한족 중심주의라는 민족적이고 극우적인 행태를 보였기 때문이다. 중국 한족의 문화대혁명에 대한 기억과 정리는 상흔문학(傷痕文學)이라고 칭할 정도로 여러 형태로 출판되었지만, 소수 민족의 그것은 여전히 정리되지 않았고 기록도 거의 없다. 이는 곧 소수 민족 지역에는 문화대혁명기의 정치 운동에 대해 자유롭게 발표할 수 있는 시기가 도래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한인 지역의 문화대혁명도 예외가 아니다. 다만 제한된 회고담과 연구를 기준으로 문화대혁명기의 한인 사회를 조명할 수밖에 없다.

한인 지구에서의 문화대혁명은 크게 세 시기로 발전하여 소멸하였다. 첫 시기는 지방 정권 타도 시기로, 1966년 6월부터 1967년 1월 말까지 약 반년의 운동 시기이다. 두 번째 시기는 마오쩌둥의 조카인 마오위안신이 결부되어 문화대혁명 추진 세력 사이에 대립이 일어난 시기로, 1967년 2월부터 1968년 3월까지 1년 정도의 기간이다. 마지막으로는 이른바 계급 대오 정리 운동 기간으로, 한인의 정체성이 훼멸되는 시기인데, 1968년 4월에서 12월까지 8개월간 집중적으로 이루어진다. 1969년부터 개혁·개방이 시작하는 1978년까지 10년간 중국 한인 사회는 문화대혁명의 뒤처리로서 군에 의한 계엄 상태가 일부 유지되고, 사실상 자치권은 복구되지도 행사되지도 않는 상황을 맞이한다. 1966년에서 1968년까지 3년간 이루어진 문화대혁명의 정치 운동이 워낙 강렬하여 그 영향이 지속되었던 것이다.

한인 지역에서의 초기 문화대혁명은 당연히 중앙 정치의 영향으로 발생하였다. 하지만 중앙에서의 홍위병 운동과 연관되어 이루어진 옌볜의 정치 운동은 바로 인민해방군에 의해서 종료되었다. 그러므로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중심으로 한 한인 지역에서의 문화대혁명은 순전히 지방적 차원에서 발생한 것으로, 중앙의 다른 지역과의 직접적인 연대가 없었다. 물론 양상에 있어서는 비슷한 점이 있었다. 먼저 대학에서 시작되고, 홍위병이 뒤를 이으며, 반란 그룹을 결성하여 지방 정권을 공격하는 문화대혁명기의 발전 양상은 비슷하였다. 그러나 처음 시기에는 민족 문제가 전면에 나오지 않았다. 이후 민족 문제로 운동이 점차 변질된 것이다.

(1) 지방 정권 타도 시기(1966년 6월∼1967년 1월)

1966년 6월 1일 베이징대학의 당 서기를 비판하는 대자보가 붙고, 6월 16일 난징대학 총장이‘혁명적’인 교직원과 학생들에 의해 비판받은 후 쫓겨났다. 이 소식을 들은 한족과 조선족 옌볜 대학생들은 연변대학을‘반혁명 교육 기지’로 비판하면서 연변대학 부총장을 공격하였다. 중공연변주위에서는 길림성위의 지시를 따라,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부주장인 조용호가 인솔하는 문화혁명공작대를 연변대학교에 보냈다. 공작대는 부총장 박규찬을‘검은 선 인물(자산 계급, 반사회주의적인 인물을 의미)’로 규정하고, 죄상을 적발하는 대자보를 쓰라고 학생들에게 요구하면서 한인 사회에서의 문화대혁명은 시작되었다.註 055 1개월 정도의 투쟁 기간 동안 대자보를 붙이고 비판 대회를 열려는 즈음, 공작대를 철수시키라는 지시가 내려와 이들은 철수하였다.

그러나 8월 18일 베이징에서 마오쩌둥이 홍위병 대표를 접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주로 한족을 중심으로 한 중·고등학생들이 옌볜에서 홍위병을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중국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이들은 이른바‘4고(四古: 낡은 네 가지, 즉 사상, 문화, 풍속, 습관)’를 타파하는 운동을 진행하였는데, 옌볜에서의 운동은 다르게 진행되었다. 먼저 민국 시대의 성격이 남아 있는 이름이나 지역의 이름, 민족적 특색이 강한 이름이 남아 있는 상점, 식당, 미용실, 여관 등의 이름을 변경하였다. 복흥(福興), 인천냉면, 함흥식당 등이 그 예인데, 이를 동방홍(東方紅), 홍위(紅衛), 영홍(永紅) 등으로 변경한 것이다. 또 이들은 명승고적과 교회나 절 같은 종교 시설을 부수고 성직자들을 공격하였다. 이런 행동은 중국의 다른 지역에 비해 크게 다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진정한 홍위병 운동은 연변대학과 타 지역에서 공부하고 있던 옌볜 출신 대학생들이 옌볜으로 돌아오면서 시작되었다. 이 학생들은 1966년 8월 27일 8·27혁명반란단을 조직하였다. 이들은 군중 집회를 주관하면서 자치주 부주장 조용호, 연변대학 당위서기 이희일 등 14명의 간부에게 고깔모자를 씌우고 자산 계급 반동분자로 공격하였다. 또 연변대학을 접수한다고 선언하면서 모든 기능을 정지시켰다. 그러나 외지에서 온 학생들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 학생들은 홍련이라는 조직을 결성하여 8·27혁명반란단과 대립하였다. 두 단체는 자기들만이 진정한 반란파라고 주장하면서 경쟁적으로 자치주의 행정·교육·경제·문화 기능을 정지시키고, 책임자들을 비판하는 활동을 벌였다. 1967년 1월『연변일보』등 선전 기관을 접수하는 과정에서 두 단체는 충돌하게 되고, 결국 옌볜에는 군에 의한 계엄이 실시된다.

(2) 한족 세력의 등장과 민족 문제화(1967년 2월∼1968년 3월)

그러나 옌볜에서의 문화대혁명의 특이점은 마오위안신이 개입하여 민족 문제를 제기하였다는 것이다. 하얼빈에 있던 마오쩌둥은 1967년 초 옌볜으로 내려와 계엄사령부의 협조 속에 8·27혁명반란단 분파를 재구성하여 홍색파를 만들고, 자치주의 주장인 주덕해를 타도하는 것을 그 목표로 설정하였다. 그러자 주덕해를 보호하는 세력이 노혁(노동자혁명위원회)파를 조직하면서 홍색과 노혁의 대립은 심해졌다.

현재의 허난(河南) 지역은 홍색파가, 옌지(延吉) 북부 지역은 노혁파가 장악하였다. 한족이 중심이 되어 한족파로도 불린 홍색파는註 056 수시로 자치주 민족 간부를 불러 이른바 계급 투쟁을 진행하였고, 그 결과 일부 간부는 자살하거나 불구가 되었다.註 057 또 접경지에서 충돌이 자주 발생하다가, 홍색파는 8월 2일과 4일 변방 초소의 기관총 등을 탈취하여 노혁파를 공격하기에 이르러 30여 명이 죽고 200여 명이 부상당하는 유혈 충돌이 일어났다.註 058 그러나 계엄을 실시하고 있는 중국군은 이것을 노혁파가 만든 반혁명 폭란이라고 규정하고, 홍색파에게 추가로 무기를 공급하고 노혁파의 거점을 점령하였다. 또 홍색파는「불! 불! 불! 피! 피! 피! 조국의 변방 옌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라는 삐라를 만들어 노혁파를 우파, 민족주의자, 방화범으로 묘사하여 중국 각지에 발송하였다.註 059 다른 곳으로 거점을 옮긴 3,000여 명의 노혁파는 군의 도움을 받은 홍색파의 폭파 후 공격으로 모두 체포되었다. 이 과정에서 53명이 죽고 13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노혁파 일부가 총격을 피해 두만강을 넘어 북한으로 도망가게 되면서 민족 문제는 더욱 첨예한 쟁점이 되었다.註 060

(3) 계급 대오 정리 운동과 한인 정체성의 훼손(1968년 4월∼12월)

좌적인 문화대혁명은 한인 지역에서는 점차 우적인 민족주의 경향을 띠기 시작하였다. 이제 목표는 자치주의 간부가 아니라 조선족 간부 전부였다. 이들은 지방 민족주의자이자 우파 분자이고, 그래서 조국을 분열시키려는 반동 집단으로 매도되며, 계급 대오에서 우적인 부분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정리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대립하던 군중 조직들은 1968년 6월에 해산되었다. 대신 8월에 연변조선족자치주 혁명위원회가 성립되었다. 계엄군을 이끌던 한족이 주임을 맡고, 조선족 최해룡이 부주임을 맡았다. 각 현과 시, 그리고 인민공사에도 혁명위원회가 성립되었다. 다시금 당을 조직하는 것과 같은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는 곧 혁명위원회의 주도로 정풍이라 할 계급 대오 정리 운동이 일어났다.

계급 대오 정리 운동은 3단계를 거치면서 이루어졌다. 첫 번째는 이른바 정법 계통의 조선족 간부들에 대한‘외국 특무(간첩)’누명 씌우기, 두 번째는 일반 민족 간부에게‘지하 국민당원’누명 씌우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각 사업 기관에 대한‘계급의 적 확산’운동이 그것이다.

먼저 이루어진 것은 공안, 검찰, 경찰, 법원 등 이른바 정법 기관에 근무하는 조선족 간부들을 대상으로 외국 간첩이라는 누명을 씌워 계급의 적으로 몰아 정리하는 것이었다. 175명의 조선족 정법 간부가 외국 간첩으로 몰렸는데, 이는 전체 간부의 70%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중 12명이 맞아 죽고 82명이 불구가 되었다. 지하 국민당원 찾아내기는 더욱 억지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한인들 중 국민당원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453명을 찾아내었고, 이 중 148명은 맞아 죽거나 자결했다. 계급의 적 확산 운동은 계급대오 정리 운동이 주요 간부들만이 아닌 일반 기층 간부들에게도 확산된 것이었다. 농촌, 공장, 학교, 기관, 인민공사 등 모든 사업 단위에서 계급 대오 정리 운동 회의를 열고 계급의 적을 찾아내는 작업을 강요하였다. 또 이 회의에서는 한인의 정체성을 이루는 언어나 문화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그 결과 조선족 민족 간부의 대부분은 외국 간첩으로 몰렸다. 가령 옌지 현 이란(依蘭) 인민공사에서는 170명을 찾아내어 이 중 20여 명이 살해되거나 자살하였다.註 061 연변조선족자치주만 하여도 수만 명이 계급의 적으로 분류되고, 2,000명이 죽고 3만여 명이 구속되거나 조사를 받고 피해를 입었다. 이는 계급 대오 정리 운동이 전체 한인 가구의 20%에 직접적인 피해를 입혔음을 의미한다.註 062 특히 민족 간부들의 대부분이 피해를 입었다. 한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훼멸되는 가장 큰 억압적인 시기였던 것이다.

註) 036

: 안철호, 1987,「 해방 후 40년 동안의 조선어문사업」, 1945. 8.∼1986」,『 조선어연구』, 250쪽바로가기
註) 037
: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편집위원회 편, 1993, 『풍랑』(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7), 민족출판사, 140∼151쪽; 정경연, 1987, 「해방 후 중국의 조선어 규범화 사업에 대한 개관」, 『조선어문학국제토론논문집』, 459∼468쪽바로가기
註) 038
: 안철호, 앞의 논문, 251쪽바로가기
註) 039
: 송관덕, 앞의 논문, 60∼61쪽바로가기
註) 040
: 오태호, 1993, 「연변에서의 반우파투쟁」,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편집위원회 편, 앞의 책, 129쪽바로가기
註) 041
: 오태호, 위의 논문, 130∼333쪽바로가기
註) 042
: 오태호, 위의 논문, 4쪽바로가기
註) 043
: 안철호, 앞의 논문, 252쪽바로가기
註) 044
: 오태호, 앞의 논문, 143∼145쪽바로가기
註) 045
: 오태호, 위의 논문, 137쪽바로가기
註) 046
: 김광세, 1993, 「굽은 길을 걸어온 민족교육」,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편집위원회 편, 앞의 책, 160∼161쪽바로가기
註) 047
: 채규옥,「 반우파 투쟁 전후의 길림성 민족교육 기구와 간부상황」, 앞의 책, 163∼165쪽바로가기
註) 048
: 오태호,「 민족정풍운동 가운데 생긴 역사적 오해」, 앞의 책, 137쪽바로가기
註) 049
: 같은 기간 신장 위구르자치구에서도 한어 교육에 대한 강조를 하였지만, 실제적인 정책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한어 교육이 강화된 것은 개혁·개방 후인 1977년부터이다. 즉, 같은 소수 민족 지역이지만 그 적용은 다른 것이다. 이진영·장혜련, 2010, 「신장 위구르자치구의 이중 언어교육정책과 그 사회적 영향」,『 한국동북아논총』제56호, 110∼111쪽바로가기
註) 050
: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편집위원회 편, 1993, 앞의 책, 178∼179쪽바로가기
註) 051
: 오태호,「 연변지구 인민공사가 겪은 불운」, 앞의 책, 181쪽바로가기
註) 052
: 채재봉·김철룡,「 만약 그 맹동만 아니었더라면」, 앞의 책, 192∼193쪽바로가기
註) 053
: 이해식,「 화집령 심장을 뚫고」, 앞의 책, 196∼203쪽바로가기
註) 054
: 이해식, 위의 책, 179쪽바로가기
註) 055
: 정판룡, 1993, 「연변의 문화대혁명,」,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편집위원회 편, 앞의 책, 293∼294쪽바로가기
註) 056
: 이들은 조선족은 조선어를 배우지 말고 한어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안철호, 앞의 논문, 255쪽).바로가기
註) 057
: 정판룡, 앞의 책, 301쪽바로가기
註) 058
: 김광휘, 1993, 「미리 꾸며낸 반역 폭동」,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편집위원회 편, 앞의 책, 344∼346쪽바로가기
註) 059
: 노동문, 1993, 「동북의 태상황 마우위안신이 연변에서 저지른 죄행」,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편집위원회 편, 앞의 책, 401쪽바로가기
註) 060
: 정판룡, 앞의 책, 303∼304쪽바로가기
註) 061
: 정판룡, 위의 책, 306∼307쪽바로가기
註) 062
: 송관덕, 1995, 「연변의 민족간부 양성사업에 대한 회고」, 김동화·김승철 편, 앞의 책, 61쪽바로가기

瓢蟲

不朽의 古典에서 찾은 智慧와 心灵, 역사적 敎訓과 省察에서 옛글의 향기에 취해 사랑에 빠지게 되었음을 밝히는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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