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원장(朱元璋)은 왜 황위를 주체(朱棣)에게 넘겨주지 않았을까?

 주원장(朱元璋)은 왜 황위를 주체(朱棣)에게 넘겨주지 않았을까?

명(明) 나라를 세운 주원장(朱元璋)은 '고려인' 이었다 : 네이버 블로그

글: 문화박문(文化博聞)

주원장은 왜 황위를 주체에게 넘겨주지 않았을까. 현재까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주체는 주원장의 적자(嫡子)가 아니라 서출(庶出)이라는 것이다. 주원장은 "유적입적"(적자가 있으면 적자를 세운다)는 전통에 따라, 서출인 주체는 고려대상에 넣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주체의 생모는 정사(正史)기록으로는 황후 마씨(馬氏)이다. 즉, 주원장의 본부인이다. 주체는 공비(碽妃), 원비(元妃), 고려비(高麗妃) 소생이라는 설이 있으나 모두 야사(野史)에 기록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주체가 황제가 된 후에 역사를 고쳐썼기 때문이라고. 다만 이런 견해에는 큰 헛점이 있다. 주체가 어떻게 태어났는가? 그의 생모가 누구인가? 이 점은 당시의 황실과 대신들이 모두 알고 있는 것이었다. 주체가 어찌 황실과 대신들이 멀쩡하게 보고 있는데, 이렇게 고칠 수 있단 말인가? 또 한가지, 만일 공비, 원비 혹은 고려비중의 누군가가 주체의 생모라면, 주체가 황제에 오른 후에 그 친어머니에게 이제 당신은 제 친어머니가 아닙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은 상리에 배치되는 것이다.

둘째, 태자 주표(朱標)가 죽었지만, 둘째아들 주상(朱樉) 셋째아들 주강(朱棡)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다. 주원장은 이 두 아들을 넘어서 주체를 후계자로 선택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에도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주상은 방탕한 자로 그는 번국에서도 여러번 잘못을 저질렀고, 주표에게 불려가서 엄하게 혼난 적도 있다. 주강도 마찬가지로 자기마음대로 하는 성격이다. 소문에는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것도 있어 주원장의 화를 돋구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인물이 되지 못했는데, 주원장이 어찌 그들에게 황위를 넘겨주겠는가. 그래서 이들 둘을 넘어서 주체에게 황위를 넘겨주어도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시 말해서, 주원장이 아들들을 놔두고 손자에게 황위를 넘겨주었는데, 왜 둘째아들 셋째아들을 놔두고 넷째아들에게 넘겨줄 수 없단 말인가?

셋째, 주원장은 주체의 성격이 자신과 같아서 잔인하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황제에 오르면 형제들을 도살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런 견해는 더욱 말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역사를 보면, 역사상 자기와 성격이 비슷한 사람을 자신의 후계자로 고르는 경우는 있지만, 자기와 성격이 비슷하다고 하여 고르지 않은 경우는 없다. 유방이 왜 유여의를 선택했을까? 왜 유영을 폐출시키려 했을까? 바로 유방은 유여의가 자신과 성격이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만일 주원장이 주체가 형제들을 죽일 것을 우려했다면 그가 황위를 주윤문에게 넘겨준 후에, 주체가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걱정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중병을 주체의 손에 넘겨주었을까? 다시 말해서 주체가 황위를 넘겨받고 안정적이 되는데도 불구하고 형제들을 죽일까? 그럴 필요가 있을까?

그렇다면, 주원장은 왜 황위를 주윤문에게 넘겨주고, 주체에게 넘겨주지 않았을까?

기실, 이 문제는 우리가 반드시 주원장 자신의 각도에서 고려해야 하고, 그의 마음을 추측해봐야 한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상식이 있다. 하나는 모든 사람은 그가 황제이건 백성이건 많은 자손이 있을 때, 모든 자식이 자신의 사랑을 받기를 원한다. '하나는 예뻐하고 하나는 미워하고' 하지는 않는다. 강희제의 후대에 왜 '구자탈적(九子奪嫡)'이 벌어졌는가? 그것은 바로 강희제가 그의 아들들을 모두 무척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들을 최대한 가르치고 길러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아들들은 하나하나 우수하고 그래서 황위를 다툰 것이다. 주원장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왜 아들들을 모두 번왕으로 봉했을까? 바로 그의 아들들이 모두 잘 지내길 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마음 속에 적출이나 서출이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좋으냐 아니냐의 구분이 있을 뿐이다.

다른 하나는 주원장은 그의 아들들이 황위를 놓고 싸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대신들이 주씨강산을 빼앗아갈까 걱정했고, 변방의 주변국이 주씨강산을 침범할 것을 걱정했을 뿐이다. 그래서 그는 악독하게 공신을 죽이고, 아들들을 각각 나누어 많은 병력을 이끌고 변방으로 가게 했다 다만 아들들이 병권을 잡은 후에 서로 싸울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이상의 두 가지 상식을 가지고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주원장이 황위를 주윤문에게 넘긴 것은 완전히 그 개인이 좋아해서이다. 주윤문은 총명했고, 효성스러웠고, 인자했으며, 능력이 뛰어났다. 이런 장점이 있으므로 자연히 황제로서는 최적의 후보이다. 아마도 그의 마음 속에는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주윤문이라는 명군이 중앙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주체와 같이 능력있는 아들들이 변방을 지켜준다면 그의 강산은 천추만대로 이어질 것이라고......  

주원장(朱元璋)은 왜 황위를 주체(朱棣)에게 넘겨주지 않았을까?

이선장(李善長)은 왜 주원장을 선택했을까?.

글: 두문자(杜文子)

원나라말기의 난세에 여기저기서 한 지방을 차지하고 왕을 칭하고 있었다. 많은 반란군세력이 신속히 일어났다. 그러나, 한 사람은 계속 관망만 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저주(滁州)를 공격하려 할 때, 이 자신만만한 문화인은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스스로 주원장을 찾아간다. 몸에 유복(儒服)을 입고, 주원장을 뵙기를 청한다. 그가 바로 이선장이다. 그러나 이때의 주원장은 이제 막 정원(定遠)을 차지한지 얼마되지 않았고, 정원이라는 자그마한 지역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이중장자(里中長者)"인 그가 왜 주원장을 선택하여 따르게 되었을까? 유백온(劉伯溫)은 주원장이 여러번 나와주기를 청하여 비로소 출산했는데, 이선장은 너무 쉽게 그를 따른 것이 아닌가?

이선장은 일찌기 안휘 영금산 일대에서 생활하며 글을 읽었다. 그는 당시에 매우 열심히 공부했다고 한다. 글을 잘 읽어서 나중에 국가를 위해 쓰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점점 자라면서 이 나라는 그를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원왕조를 사랑했지만, 원왕조는 그를 사랑하지 않은 것이다. 대원제국은 한인을 멸시하고, 유학자를 멸시했다. 몽골무인들은 과거조차도 몇번 열지 않았다. 이선장을 깨닫게 된다: 유학서적을 읽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구나. 차라리 병서(兵書)나 법술(法術)을 배우는게 낫겠다. 그렇게 하면 권모술수를 알 수 있고, 다시 관계를 통하여, 몽골왕야나 혹은 몽골고관을 알게 되면 일자리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현재는 몽골인들이 흥하니 글을 아무리 많이 읽고 학문이 아무리 높아도 배경이 없으면 고관이 될 수 없다. 관리가 되려면 하급아전부터 시작하거나 가마꾼, 요리사부터 시작해야 한다. 운이 좋으면 고관의 인정을 받아서 잘 나갈 수 있다. 이선장은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자신의 미래를 기획한다. 그러나 전혀 생각지도 못하게 이선장의 이런 인생계획은 모두 물거품이 된다. 원왕조는 아예 그와 같은 소인물을 신경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러 해를 관찰하고 활동한 다음 빈손의 이선장은 마침내 결정을 내린다. 고향을 떠나서 한번 돌아보자.

이선장은 정원(定遠)으로 간다. 거기서 술수를 써서 예측같은 것을 하고, 글을 가르친다. 혼자서 생활하는데는 괜찮았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체내의 호르몬은 마누라를 찾았다. 관찰을 거친 다음에 현지의 왕씨성의 대가족이 괜찮은 집안인 것을 알아내고, 매파를 보내어 이선장은 마침내 왕씨집안의 부잣집딸을 부인으로 얻는다. 이때부터는 중산층으로 올라섰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선장은 자신의 장기를 잊지 않았다. 사정을 예측하고, "책사다종(策事多種)"했다. 그러면서 이선장의 명성은 점차 퍼져간다.

사람이 일단 유명해지면, 더욱 자신감을 갖게 되는 법이다. 이선장은 극도로 자신감에 넘치는 인간이다. 원나라말기의 대란때, 그의 일가는 동산에 숨어서 정세를 관망한다. 1351년 영주(潁州)의거가 일어나고, 이선장의 외숙 왕렴(王濂)이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참가한다. 그러나 이선장은 총은 머리를 내미는 새를 쏜다는 생각이었다. 너무 빨리 나서봐야 좋은 결과가 없다는 것이다. 152년에는 이웃의 곽자흥(郭子興)이 호주(濠州)의거를 일으킨다. 그러나 이선장은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고 여긴 것이다. 주원장이 홍건군의거의 불길을 그가 살고 있는 정원으로 몰고 올 때가 되어서야 이선장은 더 이상 앉아있지 못한다. 기회는 잃으면 다시 오지 않는다. 이선장은 결정한다. 반드시 스스로 찾아나서야겠다고.

1354년 칠월, 홍건군의 행군방향과 노선을 알아낸 후, 몸에 유복을 입은 41세의 이선장은 일찌감치 길 중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선봉에 섰던 위병으로부터 이선장이 만나뵙기를 청한다는 말을 듣자 주원장은 즉시 명을 내려서 부르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찾아온 정원의 명사를 맞이한다. 두 사람이 만나자마자 이선장은 주원장을 쳐다보기만 하면서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비로소 놀라운 말을 내뱉는다: "이제 되었습니다. 하늘에 해가 있고, 백성들에게는 주인이 생겼습니다!" 주원장은 그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면서도 마음 속으로 무척이나 기뻤다. 그렇게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말을 나누면 나눌수록 의기투합해서 더욱 길게 얘기를 나누었다. 정원의 형세부터 호주의 군사까지, 빈민의 의군참여부터 의군의 개편까지, 모든 얘기를 나누었다. 주원장이 보기에, 이런 인재야말로 자신이 찾던 바로 그런 인재였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그를 "장서기(掌書記)"로 임명해서 군대내의 문서와 물자조달업무를 맡긴다.

주원장은 의미심장하게 물어본 적이 있다: "현재 천하는 대란에 빠져 있는데, 무기만 가지면 초두왕(草頭王)이 될 수 있다. 선생이 보기에, 이런 혼란이 언제 끝날 것같은가?" 이선장은 상대방이 묻는 뜻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대답한다: "진나라말기의 대란은 평민출신이 유방이 통이 크게 행동하면서, 사람들을 적재적소에 잘 써서 5년의 시간을 들여 제왕지업을 이루었습니다. 지금 원나라조정의 기강이 문란하여 진나라말기와 비슷하니 주공께서는 비록 호주에 있지만, 당신의 조상은 패현에 살았다고 들었습니다. 유방과 고향이 같습니다. 그 일대의 산천은 왕기를 품고 당신을 길렀으니, 당신이 잘 이용한다면, 천하는 금방 평정될 것입니다." 이선장의 말은 그가 원하는 그대로였다. 주원장은 그의 말에 크게 감동한다.

그때이후 이선장은 주원장집단의 오른팔이 된다. 물자공급과 군사참모의 중임을 담당하게 되는 것이다.

이선장의 경력으로 보면, 그는 확실히 큰 일을 해낼 사람이다. 그는 목표가 있는 사람이고, 일처리에도 모두 목적성이 분명했다. 처음에 그가 글을 읽어서 관리가 되려고 했으나 그것을 이룰 수 없게 되자, 그는 가장 실무적으로 '귀인을 찾는' 방식으로 자신의 꿈을 실현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도 실현되지 않아서 아무런 관직도 얻을 수 없게 되자, 그는 노선을 바꾼다. 부잣집 딸과 결혼해서 먼저 생활을 안정시킨다. 생활이 안정되자 그는 방향을 원나라조정의 반대편으로 향한다. 의거군을 살펴보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 의거군들 가운데, 이선장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회를 기다린다.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았다. 주원장의 잠재력을 발견한 후에 이선장은 아부와 계책을 내면서 주원장의 신임을 얻는다. 그리고 중용된다. 이처럼 주도면밀하고 세심하게 일을 해낸 것을 보면 정말 간단한 사람이 아니다.

기실 이선장의 일생은 적극적이고 진취적이었다. 그의 죽음도 그의 지나치게 강성한 진취심과 관계가 없지 않을 것이다.

이선장(李善長)은 왜 주원장을 선택했을까?.

주원장이 회족이라는 9가지 증거

글: lovesue

적지 않은 사람들은 주원장(명태조) 혹은 그의 아들 주체(영락제)의 종교속성에 대하여 의문을 나타낸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색목인(色目人)으로, 정종의 회족 무슬림이라고 한다. '한족(漢族)'이 나중에 이슬람으로 개종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타이완에서 온 중국의 한 무슬림(회족)이 있는데 그의 성은 장(張)씨이고, 이름은 약슬부(約瑟夫, Yusuf)이다. 그는 주원장 혹은 그의 아들 주체가 무슬림이라고 생각한다. 타이완에는 학자들 중에 이에 대하여 책을 쓴 사람도 있다. 장선생에 따르면, 그의 조상은 명나라의 공주를 부인으로 취했다. 그리하여 그도 주원장의 후예라고 할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명왕조 황족이 무슬림을 신앙한 비밀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사람들이 깜짝 놀랄만한 증거를 내놓아 자신의 주장을 입증했는데, 그 증거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 주원장이 어렸을 때, 그의 가족은 굶주림으로 죽었다. 주원장은 백포(白布)로 시신을 쌌다. 백포로 시신을 싼다는 것은 무슬림의 장례특징이다. 이슬람교는 무슬림망자는 반드시 "극범(克凡, 白布殮衣)"을 입은 후 매장되어야 한다.

주: 해외의 저명한 사학자 여동방(黎東方) 박사가 쓴 세설중국역사 시리즈 중 <세설명조>에는 이런 기재가 있다: "그는 빈농가정의 분수를 지키는 자제였다. 그가 17세 되던 해 원순제 지정4년(1344년) 가뭄, 메뚜기떼 및 진염병이 차례로 그의 고향을 쓸고 지나갔다. 호주 종리현(안휘현 봉양)에서 부친 주세진, 모친 진씨, 큰형 주흥륭이 며칠내에 차례로 사망한다. 집안에 현금이 거의 없어 관 3개를 살 돈이 없었다. 더더욱 묘지를 살 돈은 없었다. 다행히 이웃집의 유씨(劉氏)가 마음이 좋아서, 그와 둘째형 주흥성이 부모와 큰형 3명의 시신을 백포로 싸서, 유가분의 한쪽 귀퉁이에 묻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2. 주원장의 가장 가까운 문신무장은 주로 무슬림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므로, 명나라는 무슬림이 개창하여 건립한 왕조이다.

주: 안휘지구에는 대량의 색목인이 있었다. 민간에는 십회보일부(十回保一朱)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각각, 상우춘, 호대해, 풍국용, 풍승, 정덕흥, 남옥, 목영, 화운, 이문충등을 가리킨다. 주체가 찬탈한 후 효수된 병부상서 철현도 바로 색목인이다. 민간문학 <대명영렬전>에서 그들의 무공업적을 얘기할 때 그들을 "강렬한 회민(剛烈之回民)"이라고 불렀다.

3. 주원장은 금주령을 선포한다. 한번은 주원장의 한 심복의 아들이 이 규정에 위반하여 처형을 당했다. 이슬람신앙을 믿는 사람은 엄격히 금주한다.

4. 주원장의 황후는 마씨이다. 그녀도 무슬림이다. 그녀는 친히 주원장을 위하여 모든 음식물을 준비했는다. 주원장이 황제가 된 후에도 마황후는 여전히 주원장을 위하여 음식물을 준비해주었다.

5. 명왕조 황실의 색깔은 녹색이다. 녹색은 바로 이슬람의 상징이다.

6. 주원장이 황제가 된 후, 그는 남경에 청진사(淸眞寺)를 짓도록 명령한다. 그리고 친히 시사 <백자찬(百字讚)>을 지어 이슬람과 선지자 모하메드를 찬양한다. 이 <백자찬>의 의미는 비범하다. 무슬림은 주원장의 선서(syahada)라고 본다. 주원장의 이슬람신앙에 대한 증빙이다.

주원장이 서안 및 운남, 복건, 광동등지에 청진사를 세운다. <백자찬>은 청나라때 유지(劉智)의 저작 <천방지성실록>에 실려 있는데, 전문은 다음과 같다: "건곤초시(乾坤初時), 천적주명(天籍注名), 전교대성(傳敎大聖), 강생서역(降生西域), 수수천경(受授天經), 삼십부책(三十部冊), 보화중생(普化衆生), 억조군사(億兆君師), 만성영수(萬聖領首), 협조천운(協助天運), 보비국민(保庇國民), 오시기우(五時祈祐), 묵축태평(默祝太平), 존심진주(存心眞主), 가지궁민(加志窮民), 증구환난(拯救患難), 통철유명(洞徹幽冥), 초발영혼(超拔靈魂), 탈리죄업(脫離罪業), 인복천하(仁覆天下), 도관고금(道冠古今), 항사귀일(降邪歸一), 교명청진(敎名淸眞), 목한묵덕(穆罕默德), 지귀성인(至貴聖人)."

명무종 주후조(1506-1521년 재위)는 각 종교에 대한 평론과 <어제존진주사시>를 썼다. 명무종이 각 종교를 평론할 때 이렇게 말한다: "유가의 학문은 비록 개물성물(開物成物)할 수 있지만, 궁신지화(窮神知化)를 하는데는 부족하다. 불로지학(佛老之學)은 궁신지화에 유사하지만, 복명귀진(復命歸眞)할 수 없다. 여러 종교의 도는 각각 한쪽으로 치우처져 있다. 오로지 청진인주의 교(淸眞認主之敎)만이 정리(正理)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만세와 천지에 오래동안 지속될 수 있다." <존진주사시>에는 이렇게 적었다: "일교현현제교미(一敎玄玄諸敎迷), 기중오묘소인지(其中奧妙少人知), 불시인수인시불(佛是人修人是佛), 부존진주각존수(不尊眞主却尊誰)"

통상적인 이치대로라면, 주원장의 "화상(和尙)" 경력은 그가 불교에 대하여 특별한 호감을 가지게 해야 마땅하다. 다만 명왕조의 법률은 엄격하게 불교를 제한했다. 대량의 불교사원을 폐지하고, 매 현마다 최대 1개의 큰 절을 남기게 했다; 대량의 승려와 비구니를 환속하도록 강제했고, 남자 40세이하, 여자 50세이하는 출가할 수 없도록 했다. 동시에, 당시 세력이 그다지 강대하지 않았던 이슬람교와 회족에 대하여는 유화적인 정책을 쓰고, 많은 청진사를 칙령으로 건설한다.

7. 명왕조때 많은 무슬림들이 요직에 있었다. 명확한 증거중 하나는 정화(鄭和)가 방대한 240여척이 해선, 2만7천4백명의 선원으로 구성된 함대를 조직하여, 목적지를 아랍의 이슬람성지 메카(고대에는 '천방(天方)'이라 칭함)로 하여, 메카에서 명황족을 대신하여 성지참배하도록 했다. 명족황제가 무슬림신앙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비밀이므로, 비무슬림신도가 알게 해서는 안되었다. 그리하여 명조황제는 친히 하지(朝覲 조근)할 수 없었다.

주: (1) 하지(哈只, 영어 Hajji), 아랍의 메카 성지순례를 한 사람에 대한 회교도의 존칭이다. 즉 오선공(五善功)을 완성한 사람에 대한 존칭이다. 오선공은 증신, 예배, 천과, 재계와 조근이다. 하지라는 말의 아랍어 원래 의미는 '순례자' '조성자(朝聖者)'이다.

(2) 정화하서양의 도중에, 동남아에서 이슬람교를 전파했다. 동남아는 원래 불교위주이다. 다만 명나라가 오늘날의 이슬람기지로 바뀌었으므로, 세계인구가운데 신도수가 최다가 되었다. 물어보자. 명나라가 대량의 돈을 썼는데, 만일 황제가 비준하지 않았다면, 정화가 감히 동남아에서 이슬람교를 전파할 수 있었을까? 정화가 장거라항해중 동남아를 지나갈 때, 매번 한 곳에 도착하면 따르던 무슬림 마환(馬歡), 곽숭례(郭崇禮), 합삼(哈三)등으로 하여금 이슬람의식을 거행하고 교의를 전파하게 하였다. 그리고 중국계 무슬림사회지구를 건립하여 이슬람을 전파했다. 정화가 동남아에서 이슬람을 선전하면서, 동남아지구 특히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의 이슬람은 신속히 발전한다. 그후, 정화하서양의 자료는 명나라에서 스스로 없애버린다. 명나라는 왜 스스로 없애버렸을까?

(3) <명사.정화전>의 기록에 따르면, 정화의 항해보선은 모두 63척이다. 최대의 배는 길이 44장4척, 너비 18장이다. 당시 세계최대의 해선이다. 오늘날의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길이 151.18미터, 너비 61.6미터이다. 배는 4층으로 되어 있고, 배에는 9개의 돛대에 12장의 돛을 달 수 있다. 닻의 무게는 수천근이다. 이백명이 있어야 움직일 수 있었다. 1척의 배에는 천명이 탈 수 있었다. <명사.병지>에는 "보선의 크고 높아서 누각과 같았고, 바닥은 좁고 위는 넓었으며 천명이 탈 수 있었다." 다만, 지금 아무도 실제항행할 수 있는 44장의 '보선'을 복제하지 못한다. 그래서 진실성은 의심을 받는다. 목재의 강도에도 한계가 있고, 지나치게 큰 선체는 수밀성(水密性)을 보장할 수 없고 장기간 항행을 할 수 없다.

8. 명나라와 무슬림국가는 양호한 외교관계를 유지했다. 이것은 명왕조가 무슬림이 건립했고, 명나라황족이 이슬람신도였기 때문이다.

9. 이슬람달력이 명나라의 공식달력이 된다.

위의 9가지 이외에, 명왕조는 이슬람교의와 경문을 새긴 어용자기를 썼고 그것이 민간에 흘러들어갔다. CCTV의 감정프로그램에도 나온 바 있다. 이 진품은 국가문화재전문가의 감정을 통해서 인정받았다.

페르시아 여행가 사이드 알리 악바르 하타이는 1500년대 중국으로 여행온다. 1516년 당시의 오스만투르크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풀에서 페르시아어로 <중국여행기>라는 책을 쓴다. 이를 선물로 터키의 슐탄 수단살림 1세에게 바친다. 이 책은 당시의 중국사회 각방면의 상황을 전면적으로 소개한다. 작자는 무슬림의 종교적 감정으로, 비교적 많은 페이지를 들여 명왕조 왕실과 이슬람교의 관계를 소개한다: "궁정내에는 황제 전용의 청진사가 있고, 선례원이 있다. 주마일(금요일)에 황제는 성밖의 청진사로 가서 예를 바친다. 그리고 무슬림 문신,무장은 명왕조의 개국에 공헌을 했다. 황제는 그들을 중욯한다"는 등의 내용이 있다. 또한, "황제의 어떤 행위를 보면, 그는 이미 이슬람교를 신봉한다. 그러나 권력을 잃을까 우려하여, 그는 이를 공개적으로 선언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그의 국가풍속과 법규에서 그렇게 정해놓았기 때문이다..." 알리 악바르 하타이의 묘사는 그가 직접 본 것이다. 중국민간의 전설과 일치한다.

타이완의 마밍다오(馬明道)는 이 책 및 명나라의 정사, 야사, 사학가의 평술, 회민의 구비전설을 참조하여, 명왕조 왕실이 족속과 종교신앙에 대하여 상세히 연구를 진행한다. 그리고 1973년 <명조황가신앙초고고>라는 책을 발간한다. 주원장, 마황후 및 그 가족과 친척이 모조리 회족이라고 확인했다. 명태조 홍무제의 성은 주(朱)이고, 이름은 원장(元璋)이며, 자는 국서(國瑞)이다. 원래 이름은 흥종(興宗)이며, 안휘 봉양현에서 태어났다. 옛 이름은 호주이다. 그 주위의 각 현, 즉, 정원, 수현, 회원, 임회등이 역사상 회족의 집단거주지이다. 부친의 이름은 주세진(朱世珍)이고 모친은 진씨(陳氏)이며, 형제 4명이다. 주원장은 넷째이다. 큰형은 흥륭, 둘째형은 흥성, 셋째형은 흥조이고 온 집안이 농사를 지었다. 땅은 수 무(畝)에 불과하고 아주 빈한했다. 봉양성은 남북으로 길고, 동서로 좁은 장방형의 작은 성이고, 서문은 동문과 마주하고 있어 두 문의 사이에는 긴 거리가 있다. 이것이 봉양성을 남북으로 구분한다. 그리고 남성과 북성으로 부른다. 북성의 주민은 거의 모두 한족이고, 남성의 주민은 전부 회민이다. 그중 절대다수는 성이 주씨(朱氏)이다. 청진사가 한 곳이 있다. 남성의 중앙에서 약간 서쪽에 있다. 주원장은 남성의 주씨들 속에서 태어났다. 상리로 보자면, 주원장은 회족이다. 1935년, 마밍다오 선생은 그의 형인 마홍다오(馬宏道) 선생(1899-1968)과 봉양으로 방문하여 고찰한 바 있다. 당시 듣고 본 것과 현지 회민들이 하는 말은 위의 상황에 부합했다.

주유광(周有光)은 중국사회과학원 연구생원의 연구원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요, 금, 원, 명, 청의 5왕조의 1000년은 모두 외족이 중원으로 쳐들어와 통치한 것이다. 그중 요, 금, 원, 청은 외족이라는데 모두 동의한다. 명왕조는 외족인가 아닌가? 현재 새로 고증한 바에 따르면, 명태조 주원장은 한족이 아니라 회족이다. 이것은 이미 증명되었다.

백수이(白壽彛)의 주요저작은 <회족인물지>, <중국통사>등이 있다. 그는 저명한 역사학자이다. 1946년에 출판된 <중국이슬람사강요>라는 책에서, 각주를 통하여, "고향사람들에게 대대로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명태조는 원래 회족이다; 건문제가 떠난 것은 천방(메카)로 순례를 떠난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명무종도 이슬람교를 믿었다고 생각했다." (<민족종교논집>, 하북교육출판사 2001년판 412페이지)

주원장이 회족이라는 9가지 증거

주원장은 개국공신들을 어떻게 죽였는가?

글: 이응전(李應全)

많은 사람들은 황제가 된 후, 주원장은 사마살려(卸磨殺驢), 과하탁교(過河拆橋), 토사구팽(兎死狗烹)했으며, 항상 구실을 찾아서 공신을 도살한 마귀라는 것이다. 사실이 그러한가? 만일 공신들이 건국전과 건국후에 모두 높은 덕행을 보였다면 아마도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염라대왕도 사람을 죽이라면 이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무 이유없는 살인은 사람들을 납득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공신들이 건국후에 국가와 인민의 공적이 되었다면, 그들을 죽이는 것이 더더욱 민심에 부합하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주원장이 공신들을 무수히 죽이고도 황제의 보좌에 굳건히 앉아있을 수 있었던 이유이다.

1368년, 주원장은 남경에서 황제에 오르고 대명왕조를 개창한다.

1370년, 주원장은 자신을 따라 공을 세운 문신, 무장들에게 논공행상을 벌인다. 그는 6명을 공작(公爵)에 봉하는데, 한국공(韓國公) 이선장(李善長), 위국공(魏國公) 서달(徐達), 정국공(鄭國公) 상무(常茂, 常遇春의 아들이다. 상우춘은 이미 사망했다), 조국공(曹國公) 이문충(李文忠), 송국공(宋國公) 풍승(馮勝), 위국공(衛國公) 등유(鄧愈)이다. 이들은 모두 국가과 군대의 탁월한 지도자들이고 엘리트중의 엘리트이며 영웅중의 영웅이다.

28명의 대장군은 후작(侯爵)을 받는다. 탕화(湯和), 당승종(唐勝宗), 육중형(陸仲亨), 주덕흥(周德興), 화운(華雲), 고시(顧時), 경병문(耿炳文), 진덕(陳德), 왕지(王志), 정우춘(鄭遇春), 비취(費聚), 오량(吳良), 오정(吳楨), 조용(趙庸), 요영충(廖永忠), 유통원(兪通源), 화고(華高), 양경(楊璟), 강무재(康茂才), 주량조(朱亮祖), 부우덕(傅友德), 호미(胡美), 한정(韓政), 황빈(黃彬), 조량신(曹良臣), 매사조(梅思祖), 육취(陸聚), 곽자흥(郭子興, 이미 사망했음)등이다. 공,후,백,자,남의 작위중에서 공과 후는 가장 높은 등급이고 지위가 아주 높다. 육유가 읖었듯이, "당년에 후작에 봉해지기 위해 만리를 찾아다니고, 말을 타고 양주를 지켰다." 그러나, 이들은 육유보다 훨씬 행운아들이다. 공작 후작에 봏해졌으니,조상을 빛내고 역사에 이름을 남긴 것이다.

그들이 생사를 넘나들며 동서로 싸워주었기 때문에, 주원장의 대명천하는 건립될 수 있었다. 주원장도 이들에게 후하게 대해주었다. 높은 관직과 후한 녹봉을 주었고 그들에게 대량의 토지도 주었다. 그들에게 할만큼 했다. 한국공 이선장은 중서성 좌승상으로 있었고, 위국공 서달은 우승상이었으며, 조국공 이문충은 대도독으로 군대의 제1인자였다.

이 34명은 모두 38,194호의 전농(佃農)을 보유하고 있었다. 1인당 평균 1,124호의 소작농이 있었다. 주원장은 또한 그들과 친인척관계를 맺었다. 곽영(郭英)의 딸을 자신의 영비로 삼고, 풍승, 남옥, 서달의 딸을 황자들에게 시집보낸다. 공주는 이선장, 부우덕, 호해, 장룡등의 아들에게 시집보낸다.

이들 군사귀족들은 전공이 크고, 많은 사회적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주원장은 그들에게 하나의 신물을 준다. 철권(鐵券). 철권이 있으면 사람은 고양이처럼 목숨을 9개나 가지게 된다. 죽은 후에도 다시 한번 되살아나는 것처럼. 본인 혹은 자손이 범죄를 저지르더라도 몇몇 죽음을 면하게 해준다.

다만, 철권은 사람이 계속 부활하게 하는 신약은 아니었다. 오히려 공신들로 하여금 잘못을 저지르도록 유혹하는 물건이 되고, 죽는 시간을 앞당기는 철패가 된다. 철권을 믿고, 적지 않은 사람들은 금방 부패 변질된다. 사람을 죽이고, 사람을 해치며, 약자들을 괴롭히고, 토지를 빼앗으며, 세금을 내지 않고, 부녀를 간음하며, 먹고 마시고 계집질하고 도박까지 하며, 뇌물을 받아들인다. 심지어 도검을 만들거나 용포를 만들어 입는 자들까지 나타난다. 그들은 한 가지 상식을 몰랐다. 임금의 곁에 있는 것은 호랑이 곁에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공로가 크면 군주가 놀라서 조치를 취한다는 것이다. 공신들이 너무 강하면, 주원장이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꿈에서도 부하가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두려워한다. 강산을 빼앗기고, 자손들이 다른 사람의 죄수가 되어 감옥에 갇히는 것을 두려워한다.

주원장이 보기에, 이들 공신은 왕조의 장기적인 안정에 심각한 위협요소이다. 그러므로 무정하게 숙청해버린다. 특히 자손에 위협이 되면 반드시 제거했다. 죽여야만 그나 그의 후임황제들이 군대를 통제할 수 있고, 황제의 보좌를 빼앗기지 않을 수 있다.

그가 공신들에게 뒤집어씌운 죄명은 아주 도식화되어 있다: 모반(謀反)과 연좌(連坐)이다. 사람을 죽이고 싶으면, 누군가 그가 모반을 했다고 고발하게 한다. 그 어느 죄명도 이것보다 악랄할 수는 없고, 편리할 수가 없다. 누구든지 마음에 들지 않거나, 경우를 벗어나게 되면,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 된다. 그는 한번 죽이면 일가를 모조리 죽였다. 어떤 경우는 살인수단이 극히 잔혹했다.

숙청운동이 연이어 일어났다. 주원장은 호당(胡黨)을 숙청하고, 공인안(公印案), 곽환안(郭桓案)을 처리하며, 백성을 해친 관리들을 체포한다. 몇번의 대사건으로 관리가 근 10만명 죽는다. 다른 사람이 흘린 피로 자신의 마음 속의 분노를 끄고자 하였다.

덕경후 요영충의 면사철권은 첫번째 공수표가 되었다. 그는 많은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특히 파양호전투에서는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다. 소명왕을 강물에 익사시켜 주원장이 황제에 오르는데 장애를 없애기도 했다. 1375년, 주원장은 그를 죽인다. 이유는 그가 사사로이 용와 봉황의 무늬가 들어간 옷을 입었다는 것이다. 황제의 의복을 입는 것은 법도에 어긋난다. 이는 나라와 권력을 찬탈하려는 야심을 드러낸 것과 다름없다. 

1380년, 영가후 주량조 부자가 채찍에 맞아서 죽는다. 주량조는 원래 원나라의 맹장이었다. 전투에 용감했다. 여러번 명나라군대에 포로로 잡혔지만,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항복하지 않았다. 삶아먹든 구워먹든 너희들 마음대로 하라는 모습을 보였다. 주원장은 그의 용맹함을 좋아하여 그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긴다. 그는 사천을 평정하는 전투에 참가했다. 부하를 함부로 죽여서 황제의 상을 받지는 못한다. 그는 광동을 지켰는데, 여전히 악습을 고치지 못했고, 현지관리를 채찍으로 때렸고, 부호의 뇌물을 받았다. 이렇게 여러가지 범죄를 저지른다. 번우지현인 도동(道同)이 주원장에게 비밀자료를 보내어 주량조의 죄행을 고발한다. 주량조는 오히려 도동이 그에게 오만무례하였다고 역공한다. 대관에 오만무례한 것은 스스로 죽기를 청하는 것과 같다. 그는 도동을 사형에처하여 죽여버린다. 주원장은 주량조 부자를 남경으로 불러서 채찍으로 때려서 죽여버린다.

1384년, 임천후 호미가 죄를 범하여 처형당한다.

주문정은 채찍으로 맞아서 죽는다. 그는 주원장의 친조카이다. 강서 남창성을 85일간 굳건히 지켜서 진우량의 미친듯한 공격의 기세를 막아낸 공로가 있다. 이리하여 주원장이 파양호결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는 나중에 교만하고 법을 지키지 않게 된다. 공공연히 부녀자를 빼앗아, 실컷 데리고 논 후에는 우물에 빠뜨려 죽였다. 그리고 사람의 혀를 베기도 하여 잔혹하기 그지없었다. 또한 용봉의 도안으로 자신의 침실을 장식한다. 주원장은 친히 강서로 가서 그를 체포하고, 안휘에 유폐시킨다. 그의 50여명의 부하들은 다리근육을 절단하여 병신으로 만들어버린다.

조국공 이문충은 주원장의 외조카이다. 여러번의 전투에서 많은 공를 세운다. 그는 문무에 모두 능했다. 1383년 대도독(최고군사지휘관)과 국자감제주(국립대학총장격)가 된다. 이문충은 일찌기 황제가 너무 환관에 의존하고 관리들에게 너무 가혹하게 대한다고 비판한 바 있다. 그는 독살된다(일설에는 병사) 이유는 지식인들을 예의로 대하여 그를 따르는 지식인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죽기 전에 그는 주원장에게 사람을 적게 죽이고, 환관의 악행을 방지하라고 충고한다. 주원장은 그 말을 듣고, 이문충의 막료가 교사한 것으로 생각하여 모든 막료를 죽여버린다. 이문충의 곁에 있던 의사, 노비 60여명이 모조리 멸족된다. 그러나, 주원장은 그의 의견을 일부 받아들인다. 환관의 정치간여를 금지했고, 환관이 글을 읽고 아는 것을 금지했다. 그렇지 않으면 가죽을 벗겨서 죽였다.

개국제일공신인 위국공 서달은 충후하고 성실했다. 주원장과는 어려서부터 같이 컸고, 담량이 적었다. 주원장이 오왕으로 있을 때, 고의로 서달을 취하게 만든 후, 그를 자신의 대왕침상에 눕혀서 자게 한 적이 있다. 이를 통하여 그의 야심을 시험해보려는 것이었다. 서달은 술에서 깬 후, 놀라서 어쩔 줄을 몰랐다. 주원장의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한다. 마치 마늘을 찧는 것처럼. 주원장은 가가대소한다.

바로 이렇게 착실한 서달도 부인이 말 한마디를 잘못하는 바람에 주원장에게 죽임을 당한다. 서달의 처 사씨는 사재흥의 따리다. 주원장이 스스로 나서서 그녀를 서달에게 시집보냈다. 사재흥에게는 알려주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사재흥은 원한을 품고, 장사성에게 가버린다. 주원장은 배반한 장수(叛將)들을 극히 미워했다. 그러다보니 그녀의 딸인 사씨도 좋게 볼리가 없다.

사씨는 무술에 뛰어났다. 백근대철추를 휘두른다. 그러나, 마음씀씀이가 세심하지는 못했다. 마음 속에 있는 말을 감춰두지를 못했다. 사씨가 입궁하였을 때, 황궁이 금빛찬란하고, 멋진 것을 보고는 마황후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희 집은 정말 멋있다. 우리 집은 너희 집처럼 좋지가 못하다." 그런데, 이 말을 주원장이 듣는다. 설마 너도 황궁처럼 집을 만들어야 하느냐. 그리고 그녀의 부친이 배신한 일도 떠올렸다. 그러다보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는 궁중에 연회를 베풀어 서달을 초청한다. 술잔이 오고갈 때, 용사를 서달의 집으로 보내어 사씨를 죽여버린다. 그 용사는 솜씨가 괜찮았다. 사씨를 죽이고 돌아와서 주원장에게 보고할 때까지도 연회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주원장은 기뻐하며 서달에게 말한다: "너는 걱정하지 말라. 이후 멸문의 화는 당하지 않을 것이다." 서달은 그 말을 듣고는 무슨 말인지 몰랐다. 집으로 돌아오니 처는 이미 차가운 시체로 바뀌어 있었다. 그제서야 무슨 일인지 알았다. 처는 죽었지만 그는 감히 원한을 품지도 못했고, 불평을 할 수도 없었다.

나중에 서달은 등에 악성종양이 생긴다. 거위고기를 먹으면 안된다. 주원장은 좋은 뜻에서인지 고의인지 모르지만, 서달의 병세가 위중할 때, 찐 거위고기를 그에게 하사하여 먹게 한다. 먹지 않으면 황제의 명을 어기는 것이다. 서달은 사신의 감독하에 먹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한편으로 치명적인 찐 거위고기를 먹었다. 며칠 후에 그는 사망한다.

1392년, 성격이 인자한 주표 태자가 병사한다. 새로 황태손이 된 주윤문은 더욱 유약했다. 사후의 일은 65세된 주원장에게 골치거리였다 그래서 그는 살심이 더욱 크게 인다.

그 해, 주원장의 어릴 대 친구인 주덕흥이 자식의 행위로 인하여 피살당한다. 그의 아들은 호유용사건과 관련이 있었다.

어느 해인가, 전공을 많이 세운 섭승이 피살된다.

1394년, 영평후 사성이 피살된다.

1394년, 영국공 부우덕이 자살한다. 그는 주원장에게 33년간이나 충성을 다했다. 공로도 서달, 상우춘에 못지 않았다. 아들은 부마이고, 딸은 진왕 아들의 비였다. 남옥이 피살된 후, 정원후 왕필은 주원장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부우덕에게 말한다: 황상의 나이가 많으니, 우리는 일찌감치 출로를 찾아야 겠다. 그런데, 이 말이 불행히도 주원장에게 들어간다. 주원장은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해 겨울, 황궁에서 연회를 베풀 때, 다 먹기도 전에 부우덕은 습관적으로 일어나서 입술을 훔치고 먼저 물러갈 준비를 했다. 주원장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그에게 불경하다고 질책하고 화가 나서 그에게 말한다. "너는 네 아들 둘을 데리고 와라." 부우덕이 몸을 일으켜 막 걸어나갈 때, 경비무사를 불러서 말을 전한다: 그의 두 아들의 목을 가지고 오게 하라. 얼마 후, 부우덕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 두 개를 들고 나타난다. 연회석의 분위기는 일순 극도로 긴장된다. 공기가 굳어버린 것같았다. 주원장이 우물거리며 말했다: "너는 정말 손을 썼단 말이냐?" 그러자 부우덕은 깜짝 놀랄 행동을 보인다. 그의 넓은 소매에서 비수를 끄집어내더니, 주원장을 향하여 큰소리로 말한다: "네가 우리 부자의 머리를 달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럼 지금 가지고 가라." 말을 마치고는 비수를 목에 대고 그어버린다. 피가 백보나 흘렀고, 목숨이 끊어진다. 주원장은 노기를 억제하지 못하고, 그의 가솔을 모조리 당히에는 가장 변방인 운남과 요동으로 유배보낸다.

부우덕이 죽은지 겨우 3개월만에 왕필이 피살된다. 왕필은 1388년 남옥을 따라 전투에 참전하여 어아해를 생포하였다. 용맹하며 전투에 능했다. 1392년, 부우덕, 풍승을 따라 산서, 하남에서 군대를 훈련시키기도 했다.

1395년 이월 이십이일, 주원장은 다시 핑계를 잡아 송국공 풍승을 죽인다. 풍승은 원나라승상 하나추의 20만군대를 항복시킨 후, 항복한 장수를 압송하여 개선했다. 풍승이 돌아와서 승리를 만끽하기도 전에 그는 죄를 지엇다고 선언받고 병권을 박탈당한다. 그리고 안휘로 유배를 간다. 또 다른 견해로는 그가 남경에 돌아온 후, 주원장이 그에게 독주를 한잔내려서 독살했다고도 한다. 풍승은 인생의 최전성기때 굴러떨어진다. 아마도 그가 너무 교만하고 행동이 법도에 어긋났기 때문일 것이다. 1389년, 그의 사위인 주왕은 비밀리에 봉양으로 가서 풍승을 만난 적이 있다. 아마도 그들의 군사동맹관계가 황권에 위협이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대체로 4사람만이 주원장의 손에 죽지 않았다. 그들은 모사 유기, 대장 탕화, 장흥후 경병문 및 무정후 곽영이다.

주원장은 개국공신들을 어떻게 죽였는가?

주원장(朱元璋)은 왜 손권(孫權)의 묘를 남겨두었는가?

글: 예방육(倪方六)

남경은 중국장강유역에서 제일고도이다.

남경이 이처럼 대단한 역사적 지위를 누리게 된 것은 삼국시대 동오대제 손권에게 감사해야 한다. 손권은 도성을 남경으로 정한 첫번째 인물이다. 즉, 손권이 남경에서의 첫번째 귀인인 것이다. 현재까지 남경에서는 명나라문화포럼, 민국문화세미나등의 학술활동이 이루어졌지만, 손권 혹은 동오문화에 대한 깊이있는 연구는 없었다. 이는 손권에게 면목없는 일이고,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손권은 신봉원년(252년) 사월에 사망했고, 당시 나이 71세때였다. 중국역사상 보기드문 7순이 넘도록 생존한 황제이다. 사후에 묘지는 성의 동쪽 종산(鍾山)부근으로 정해진다. 지금의 자금산(紫金山)이다. 손권묘의 구체적인 장소는 사실 확정되지는 못하고 있고, 그저 개략적인 위치만 알고 있을 뿐이다.

<<경정건강지.풍수.고릉>>(권43)에 따르면 손권묘는 "장산(蔣山)의 남쪽에 있고, 성에서 15리 떨어져 있다"고 되어 있다. 현대의 현지고찰에 따르면 이곳은 오늘날 중산능원내의 매화산(梅花山)이다. 즉, 명태조 주원장의 명효릉의 정남향 방향에 있다.

이곳의 원 이름은 손릉강(孫陵岡)이다. 아마도 손권이 이 곳에 묻히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일 것이다. 민국시대에 매화산으로 이름을 바꾼다. 현재는 그저 높은 언덕만 남아있을 뿐이고, 지상유적지는 남아있지 않다. 현재 관광객들이 볼 수 있는 것은 석비, 주석비, 석상등이 있는데, 모두 후세인들이 세운 것이고, 당시의 유적은 아니다.

언덕 뒤에는 손권을 기념하는 석각이 새겨진 긴 복도가 있다. 모두 12개의 화상을 새겨두었는데, "강동을 차지하고 패업을 도모하다" "손권이 책상을 내리쳐 자르면서 조조와 싸우겠다고 맹세하다" "부인도 잃고 병사도 잃다" "손권이 물을 끌어들여 악독한 귀족을 징벌하다" "모녀가 바둑을 두며 손권에게 가리키다" "손권이 화가나서 마간으로 가다" "검으로 돌을 내리쳐 사업이 성공할 것인지를 시험하다" "전쟁의 성공을 도우며 각분고(북)를 두드리다" "어부가 신선탕을 전수하다" "손권이 육손을 알아보다" "장비가 과원에서 손권을 방문하다" "봉황이 백발로 혼인을 청하다"등 모두 역사전설에 있는 내용들을 돌에 새긴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손권이 강동에서 패업을 이루는 일생을 묘사하고 있다.

한때는 손권묘를 서릉(西陵) 혹은 장릉(蔣陵)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손릉(孫陵)이라고 칭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왜 그런가? 원래, 종산(鍾山), 즉 자금산은 과거에 장산(蔣山)이라고 불리웠다. 이 산의 이름에는 내력이 있다. 한나라말기에 말릉위 장자문(蔣子文)이 도적을 쫓다가 이곳에서 사망한다. 손권은 그를 위하여 묘를 세웠주고, "장후(蔣侯)"에 봉했다. 손권은 조부의 이름이 손종(孫鍾)이어서 이를 피휘하여 "종"자를 쓰지 않고 "종산"을 "장산"으로 개명했다. 손권묘는 산의 이름을 따서 후세인들이 "장릉"이라고 부른 것이다.

손권묘는 명나라초기에 이르러, 파헤쳐질뻔했다. 이것은 바로 명태조 주원장이 손권이 선택한 이 묘지를 마음에 들어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일대에 자신의 능을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식으로 독룡부(獨龍阜)를 묘혈로 정하고, 공사를 시작하기 전에, 그의 부하들은 능지 주변의 묘들을 모조리 파버렸다. 남조의 고승 양나라승려 보지(寶志)의 묘도 이때 이장된다.

당시 능공대신 이신(李新)은 손권묘도 파헤쳐 없애려고 준비했다. 하루는 주원장이 현장으로 시찰을 나왔는데, 이신의 보고를 듣고는 그러지 말라고 한다. 명나라때의 사람인 장대(張垈)가 쓴 <<도암몽억.종산>>(권1)에 따르면 주원장은 당시에 이렇게 말했다고한다: "손권도 사내대장부이다. 그를 남겨두어 문을 지키게 하라" 주원장이 이렇게 말해줌에 따라 손권이라는 동오의 제1대황제는 "제1문장"이라는 별명도 없게 되고, 황제가 황제를 위하여 문을 지키게 된다. 이는 중국제왕들 중에서는 아주 보기드문 경우이다.

주원장의 이러한 조치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은 그가 '인인효군(仁人孝君)'의 선행을 베푼 것으로 이야기한다. 당초 주원장은 안회 봉양에 자신의 부모의 묘 즉, 안휘봉양황릉을 만들 때, 넓다란 능원을 만들었다. 규정에 따라 적지 않은 백성의 묘는 이장해야 했다. 주원장은 보고를 듣고는 "이들 묘는 우리 집안과 과거에 이웃들이다. 이장할 필요가 없다" 그리하여 당시 청명제때 성묘를 할 때면, 현재 백성들이 마음대로 황릉을 들어갈 수 있었다.

주원장이 마음이 좋아서 이렇게 한 것일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은 것같다. 주로는 그의 사사로운 욕심때문이다. 이웃들의 묘를 이장하지 않은 것은, 그의 모친으로 하여금 지하에서도 같이 지낼 사람이 있게 해준 것이다. 혼자서 쓸쓸히 있지 않아도 되게 해준 것이다. 그리고 그가 손권묘를 훼손하지 않은 것에는 다른 비밀이 숨어있다. 이는 풍수적인 고려에 따른 것이라고 봐야 한다. 손권이 사내대장부이기 때문에 그를 '문지기'로 모신 것은 아니다.

풍수적으로 보아서 제왕릉은 모두 풍수상 명당이다. 뒤에는 조산(祖山)이 있고, 앞에는 안산(案山), 조산(朝山)이 있다. 가까운 곳이 안산이고 먼 곳이 조산이다. 손권묘가 소재한 매화산은 바로 효릉의 풍수상 '안산'에 해당한다. 만일 주원장이 손권묘를 파버린다면, 그것은 안산의 풍수를 해하는 것이다. 미신을 믿은 주원장은 이런 일을 꺼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효릉의 신도는 손권묘에서 한바퀴를 돌아간다. 이렇게 돌아가는 것에는 비밀이 숨어있다. 전체 능구역은 북두칠성의 모양과 비슷하고, 손권의 묘는 바로 그 북두칠성의 바가지(杓頭)안에 있다. 그리고 표두를 통제하는 자루(柄子)는 주원장의 지궁이다.

이를 보면 주원장이 손권묘를 남겨둔 의도는 손권으로 하여금 문지기를 하라는 것이 아니다. 손권으로 하여금 그의 풍수를 보존하게 하는 것이다. 가장 먼저 이런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분명히 주원장 본인이 아닐 것이다. 가장 가능성이 큰 것은 위로는 천문을 통하고 아래로는 지리에 통달한 풍수대가 유기(劉基)일 것이다.

주원장(朱元璋)은 왜 손권(孫權)의 묘를 남겨두었는가?

주원장(朱元璋)은 왜 탐관오리를 뿌리뽑지 못했을까?

글: 유앙(劉仰)

글을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다시피, 1, 2, 3, 4, 5, 6, 7, 8, 9,10을 한자로는 一, 二, 三, 四, 五, 六, 七, 八, 九, 十이라고 쓴다. 약간 회계에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듯이, 재무제도에서 숫자는 아라비아숫자로도 표시하지만, 동시에 한자로 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때 사용하는 한자는 一, 二, 三...과 같이 보통 쓰는 한자가 아니다. "壹, 貳, 參, 肆, 伍, 陸, 柒, 捌, 玖, 拾"과 같은 한자이다. 전문적인 재무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라면 글자를 잘못 써서 다시 써야 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불평하기도 한다: "누가 이렇게 복잡한 한자를 생각해 냈을까? 귀찮아 죽겠군." 역사상 처음으로 재무제도에서 "一, 二, 三..."을 "壹, 貳, 參..."으로 쓰게 한 사람은 명나라의 개국황제 주원장이다.

주원장은 왜 그렇게 하였을까? 그것은 부패방지를 위한 조치였다. 특히 회계보고서를 조작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주원장으로부터 오늘날까지, 600여년의 시간이 흘렀는데, 주원장이 정한 규정은 재무제도에서 여전히 엄격히 준수되고 있다. 약간 다른 점이라면, 주원장이 규정할 때 "百, 千"은 "陌, 阡"이었는데, 현재는 사람들이 "佰, 仟"으로 쓰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주원장은 여러가지 방법을 강구하여 부패를 방지하고자 했었다는 것이다. 주원장이 탐관오리를 몰아내기 위하여 취한 수단과 강도는 사상유례없는 것이었다. 재무제도는 그중에서 아주 적은 일부분에 불과하다.

주원장이 황제가 된 후, 사람을 많이 죽였다. 그중에서 개국공신들을 죽인 점에 대하여는 후세에 욕을 많이 얻어먹고 있다. 주원장이 공신을 죽인 원인에 대하여 이전에 유방이 공신을 죽였다는 내용을 언급할 때 잠깐 언급한 바 있지만, 이 두 사람은 모두 평민출신 황제이다. 여기에서는 주원자이 공신을 죽인 점에 대하여는 논하지 않기로 한다. 단지 주원장이 탐관오리를 죽인 점만 논하기로 하자. 주원장이 얼마나 많은 탐관오리를 죽였는가? 구체적인 숫자를 정확히 밝히기는 힘들다. 어떤 사람은 주원장이 6만명의 탐관오리를 죽였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주원장이 손에 부패문제로 죽임을 당한 사람이 10만 내지 15만에 달한다고 한다. 그중에서 연좌되거나 억울하게 죽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명나라의 관료백성비율은 오늘날보다 낮았다. 6만명의 탐관오리를 살해했다고 하더라도, 비율상으로는 아주 높은 것이다. 그리고, 주원장이 탐관오리를 죽인 수단도 아주 혹독했다. <<대명률>>에는 5가지 형벌만을 사용하도록 규정했다: 편형(鞭, 채찍), 장형(杖刑, 곤장), 감금(監禁), 유방(流放, 유배), 처사(處死, 사형). 주원장은 발견했다. 이들 수단만으로는 탐관오리를 겁주는데 부족하다는 것을. 그래서 특별히 탐관오리에 대하여는 더 많은 혹형들을 제정했다. 예를 들면, 능지(凌遲), 효수(梟首), 주족(誅族)등이 있고, 여기에 다시 개수탕(開水燙), 철쇄(鐵刷), 추장(推腸, 내장꺼내기), 얼굴에 글자써넣기, 코베내기, 궁형, 무릎뼈부수기등이 있고, 박피실초(剝皮實草)도 있다. 소위 "박피실초"라 함은 탐관의 거죽을 벗겨서 그 안에 풀을 채워넣는 것이다. 이것을 그 탐관오리의 후임자의 관청의 자리 옆에 세워두게 하고 옮겨버릴 수 없게 했다. 목적은 후임자가 항상 이를 보고 경계로 삼으라는 뜻이었다.

주원장은 탐관오리들에 대한 혹형을 공개적으로 시행했고, 여러 백성들이 볼 수 있게 하였다. 주원장은 일개 평범한 백성으로 생활하여보았으므로 탐관오리에 대하여 원한이 깊었다. 그는 다른 백성들도 마찬가지로 탐관오리를 미워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탐관오리를 그냥 죽이기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보았다. 그는 공개적으로 여러가지 혹형을 썼다. 그 목적은 한편으로는 잠재적으로 탐관오리가 될 수 있는 관료들을 겁주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백성들의 화를 풀어주는 것이었다. 주원장이 탐관오리들에게 행한 혹독한 수단은 후임자들에게도 계승되었다. 능지라는 형은 명나라이전에는 1000도(刀), 즉 칼질을 1000번이상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명나라때에 탐관오리에 대한 능지는 기본적으로 1000도를 넘어섰다. 가장 많은 경우는 3000도를 넘었다. 말그대로 천도만과(千刀萬剐)였다. 능지를 하는데 며칠간 지속되었다. 첫날은 능지를 받는 탐관이 죽지 않은 상태이다. 어떤 사람들은 고대제왕들이 잔혹하였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왕왕 명나라대의 능지를 예로 드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능지의 대상에 대하여는 생각해보지 않은 듯하다. 대다수는 죄악이 컸던 탐관오리였다. 이들은 중국고대사회가 잔혹한 사회였다고 묘사하기 위하여 능지의 과정을 두드러지게 강조하여, 능지형을 당한 사람들에게 동정심이 들도록 하거나, 혹은 그 탐관오리들이 얼마나 큰 죄악을 저질렀는지, 그리고 백성들의 원성이 얼마나 자자했는지는 잊어버리고 있다.

그렇다면,주원장이 이렇게 탐관오리들에게 혹형을 가한 효과는 어떠했을까? 아쉽지만 효과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주원장 자신도 아주 기괴하게 생각했다. 그는 말했다: 아침에 탐관오리를 가득 죽였는데, 저녁에 어떤 자는 또 다시 부정부패를 저지른다. 왜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도 다시 부정부패를 저지르는가? 주원장은 그저 혹형으로 탐관오리와 부정부패현상을 처리하려고 했다. 주원장이 탐관오리를 처리한 태도와 수단은 중국역사상 공전절후라고 하더라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우리로 하여금 두 가지 문제를 생각하게 만든다. 첫째, 왜 여러가지 혹독한 공개처벌을 당하면서도 탐관오리들은 계속 나타나는 것일까? 둘째,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한 왕조가 처음 건립될 때에는 관리들이 비교적 청렴하고 조정의 아래위의 기풍이 건전한 편인데, 왜 명나라는 중국역사상 다른 왕조들과 달리, 개국초기부터 이렇게 많은 탐관오리들이 나타나쓸까? 이러한 현상은 다른 왕조의 개국초기에는 보기 드문 현상이다.

사람들은 이상의 두 가지 문제를 해석하면서, 일반적으로 낡아빠진 이론을 들이댄다. 예를 들면, 한 서방인은 이렇게 말한다: 절대권력은 절대부패한다고. 그러나, 이 주장은 주원장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주원장의 통치하에 절대권력을 가진 자는 그 혼자 뿐이다. 그러나, 주원장은 아주 근검절약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어릴 때의 경력에서 출발하여 백성들의 고통을 아주 잘 헤아려 주었다. 그러므로, 독재로 부패하였다는 것은 주원장에게 적합한 해석은 아니다. 만일 주원장이 부정부패를 처리하면서 법률제도를 만들지 않았다고 얘기하는 것도 설득력이 없다. 주원장은 부정부패에 대한 법률을 아주 명확히 규정했다. 그리고 주원장은 부정부패를 척결하기 위한 법률을 거의 모든 백성들에게 교육보급시켰다. 관리들은 모두 잘 알고 있었다. 백성들도 글자를 아는 사람이라면 다 읽어서 외우고 있었고, 글자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이 읽어주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이 글의 맨 처음에 언급한 회계제도도 부패를 방지하기 위하여 만든 제도중 하나이다. 만일 주원장이 감독매커니즘을 두지 않았다고 얘기한다면 그것도 틀린 말이다. 주원장의 중앙정부에는 전문적으로 감독기능을 행하는 기구가 있었고 일백여명이 있었다. 이들은 고관에서부터 왕공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감독했다. 주원장은 그들에게 임의로 탄핵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어떤 사람들은 주원장의 금의위(錦衣衛)가 특무기관이라고 얘기하곤 한다. 그러면서, 금의위의 직능중 하나가 바로 탐관오리를 고발하는 것이라는 점을 놓치고 있다. 만일 주원장이 그저 고압적인 정책만 썼다고 한다면 그것도 잘못된 견해이다. 청렴한 청백리에 대하여 주원장은 자주 파격적으로 상을 내리고 발탁하였다. 이러한 여러가지 해석은 모두 설득력이 없다. 왜 명나라의 초기에 그렇게 탐관오리가 많았고, 계속 죽여도 연이어 나타났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주원장이 탐관오리현상을 소탕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현대의 어떤 사람은 그저 한가지밖에 내놓지 못한다. 주원장은 민주제도를 채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확실히 주원장은 현대서방의 민주제도를 택하지 않았다. 다만, 이걸 가지고 주원장을 곤란하게 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서방의 민주제도라는 것도 주원장이 죽은 후 500년이 지나서야 나타났기 때문이다. 주원장은 백성들에게 탐관오리를 고발하도록 장려했다. 만일 백성이 어떤 관리의 부정부패행위를 발견하면, 스스로 탐관을 붙잡아 경성으로 보내어 죄를 물을 수 있었다. 연도에 누군가 이를 저지하면, 저지한 자는 죽임을 당하게 된다. 심지어 구족이 주살될 수도 있다. 주원장이 탐관오리를 많이 죽이다보니 어떤 지방관청에는 일처리할 관리가 없게 되는 경우까지 발생했다. 주원장은 할수없이 "대죄(戴罪)"제도를 실시한다. 즉, 이미 유죄를 판결받은 탐관오리는 감옥에 가둬두지만, 일단 관청에서 일처리를 해야할 것이 있으면, 대죄관리는 칼과 족쇄 수갑을 찬 상태로 관아로 끌려나와서 대당(大堂)에서 업무를 처리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원장이 아주 잔혹하고 무수한 사람을 죽였다고 말할 때는 동시에 이런 사실도 주목해야 한다: 명나라초기에 탐관오리는 정말로 많았다. 주원장이 탐관오리를 미워한 것은 부패를 제거하기 위하여 필요했기 때문이고, 부득불 엄격하고 혹독한 수단을 썼다. 그러나, 명나라의 개국초기에 왜 그렇게 많은 탐관오리가 있었는지는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하고 있다.

필자의 생각으로, 한가지 중요한 원인은 도덕수양이 결핍된 것이라고 본다. 당송이후로 주국인의 도덕교육은 어려서부터 "사서오경"을 위주로하 서당교육이었다. 이것은 도덕교육과 서로 결합되어 있었다. 유가경전을 기초로 전국적으로 과거제도를 실시하ㅡㄴ 것이다. 그러나, 명나라의 이전에 약 100년에 걸친 원나라에서는 이러한 도덕을 주시하는 유가전통이 철저히 파괴된다. 원나라는 초기에 과거제도를 두지 않았다. 비록 후기에 과거를 실행하기는 하지만, 원ㄴ라의 전기에 과거를 폐지하였으므로, 과거에 참가하는 사람의 수가 적었다. 그리고, 원나라는 한족을 차별대우하는 정책을 썼기 때문에 한족으로 과거에 합격하는 사람의 수가 아주 적었다. 한족사회는 "사서오경"등 유가경전을 읽는데 기울이는 관심도가 아주 저하된다. 관한경과 같이 재능이 있는 인물들도 그저 극본이나 쓰게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원나라의 근 100년에 걸친 역사로 한족들의 사회도덕수준은 심각하게 퇴보하였다. 그리하여, 주원장이 황제가 된 후에, 한족들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되었지만, 주원장은 도덕수양에서 합격점을 받는 관리를 찾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중국역사상 아주 특이한 현상이 나타난다: 한 왕조의 개국초기에 부정부패현상이 만연하여, 법률도 소용이 없고, 제도도 소용이 없고, 민주도 소용이 없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익만 쫓는 소인무리들이 각급 권력을 장악하면서 하나하나 리스크를 안고 죽음을 무릅쓰고 부정부패를 벌이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주원장이 대거 사람을 죽이고, 잔혹한 형벌을 시행하고, 특무제도를 사용하는 등등의 수단도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다만, 도덕이 땅에 떨어지면 소인배들은 죽인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부패현상을 처리하면서 우리는 도덕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도덕은 반드시 법률, 제도등 기타 수단으로 보완되어야 한다. 도덕은 확실히 부정부패를 소멸시킬 수 없지만, 확실히 부정부패를 줄일 수는 있다. 주원장이 탐관오리를 대거 살해하였지만, 그래도 부정부패를 없애지 못했다. 이는 도덕이 결핍되어 있고, 타락해 있으면 심각한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동시에 그저 제도, 감독, 민주등 외부수단에만 의지하여서는 무수한 소인배들의 마음 속에서 용틀임하는 부패의 욕망, 충동과 행동을 억지할 수 없다. 도덕이 발현되면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내심에서 자제하고 자각하게 할 수 있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법률은 범죄를 처벌할 뿐이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생겨나는 범죄의 생각까지 저지할 수는 없다고. 명나라개국초기를 보면 이것은 확실히 맞아떨어진다. 각도를 바꾸어 말하자면, 원나라는 근 100년간 과거를 경시하고, 한족을 차별하는 정책을 써서 도덕수준이 하락하였고, 주원장은 그 악영향을 그대로 짊어졌다. 명나라의 개국고인들중 대부분은 평민출신의 무장이고 문신은 얼마되지 않았다. 유기(劉基)와 같은 인물이 그들인데, 대부분 계모(計謀)가 뛰어난 것으로 유명했고, 후세인들이 자주 신선과 같은 도가인물로 생각한다. 종합적으로 얘기하자면, 명나라초기는 다른 왕조초기와는 달리 위대한 유학자가 없었다.

오늘날의 중국에 있어서, 명나라개국초기의 탐관오리범람현상은 그 교훈을 깊이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당연히 현재 중국현실에서 도덕교육을 강화하는데, 단순히 "사서오경", 과거제도같은 방법에 의지할 수는 없다. 현대에 적합한 다른 방식을 찾아야 한다. 다만, 주원장이 관리를 계속 죽여도 뿌리뽑지 못했다는 점에서 후세인들은 하나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내심의 도덕적인 자율에 근거하지 않고, 그저 외부적인 제약으로만 처리하려고 해서는 이익을 쫓는 소인배들의 계속되는 부패를 뿌리뽑을 수 없다. 도덕건설을 경시하여서는 부패문제를 장기적으로 해결하기 힘들다. 도덕은 소수인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사람이 반드시 준수해야하는 원칙이다. 광범위한 도덕적요구는 한편으로 사람들을 자율적으로 만들고 다른 한편으로 사회여론의 감독을 강화한다. 이를 통하여 진정으로 유익한 민주가 실현되는 것이다. 여기에 법률, 규정, 규율, 제도등등이 추가되어야 비로소 부패는 억제될 수 있는 것이다.

주원장(朱元璋)은 왜 탐관오리를 뿌리뽑지 못했을까?

원나라 군대를 가장 적게 죽인 주원장이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던 이유는

글: 유계흥(劉繼興)

원나라 이후에 주원장이 건립한 대명황조가 들어선다. 원나라는 주원장이 무너뜨렸으므로, 원나라군대도 주로 주원장이 무너뜨린 것으로 생각하기 쉽니다. 그러나, 역사자료를 뒤져보면 원나라말기에 일어난 여러 반란군들 중에서 주원장이 이끄는 부대는 원나라군대를 가장 적게 무찌른 부대이다. 그렇다면, 원나라군대를 가장 적게 무찌른 주원장이 어떻게 하여 천하를 통일하게 되었을까? 주원장은 어떻게 가장 적은 댓가를 치르면서 개국황제의 옥좌에 오르게 되었는가?

군웅이 궐기하던 시대에 무기만 들면 왕으로 행세했다. 1356년에 여러 반란군들은 각자 자기의 지방을 지니고 있었다. 유복통은 한림아를 황제로 받들고 안휘, 강소, 하남, 산동등의 큰 땅을 차지하고 잇었고, 계속 북쪽과 서북으로 진공하고 있었다; 서수휘는 무창에서 황제에 오르고, 호북, 호남, 강서등의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장사성은 소주에서 황제에 오르고, 강소, 절강등의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명옥진은 사천, 운남으로 들어가서 역시 황제에 오르고자 하였다. 이 네 무리의 세력은 황하이남의 원나라세력을 무너뜨린 주력군이고, 그들은 이미 황하이남의 거의 대부분의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때의 주원장은 안휘중부의 제현, 화주의 작은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의 수중에는 2,3만의 병사밖에 없었다. 이것마저도 그의 장인인 곽자흥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었다. 그는 역량이 약했지만, 혜안은 지니고 있었다. 그는 남방의 한 곳이 아직 원나라의 수중에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곳은 바로 장사성과 서수휘의 세력중간인 강소중부에서 절강중서부에 이르는 장류지방이었다. 이곳은 인구가 많고, 물산이 풍부하며 그 중간에는 호거용반의 역사적인 도시 남경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주원장은 즉시 병사를 일으켜, 채석기에서 몰래 장강을 넘고, 남경을 함락시킨 후, 계속 남으로 진공했다. 4년의 시간을 들여 절강의 금화, 구주에까지 이른다.

이후 주원장은 남방에서 다른 한족무장세력과 싸웠지만, 원나라 몽고군대와는 싸우지 않았다. 원나라의 황하이남의 군대는 대부분 다른 반란군의 손에 멸망한다. 주원장이 이끄는 부대는 원나라군대를 가장 적게 무찔렀다. 이 기간동안, 유복통이 이끄는 홍건군은 대거 북벌하여, 4로로 나누어 원나라를 향하여 진공했다. 그 자신은 중로에서 하남성 전부를 차지했고, 개봉으로 천도했다. 북로는 산서에서 원나라의 대도까지 진격했다. 동로는 산동을 차지했다. 서로는 섬서성 봉상까지 치고 올라갔다. 일시에 홍건군은 백만대군을 자랑했고, 거의 원나라를 무너뜨릴 것같았다.

원래, 유복통의 역량이라면 원나라를 철저히 전복시키는 것도 가능했다. 그러나, 유복통은 전략상 큰 실책을 범한다. 그는 병력을 집중하여 북경을 치지 않고, 병사를 4로로 나누어, 4방으로 공격을 가했다. 결과적으로 역량을 분산시켰고, 원나라군대가 각개격파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다. 여기에 원나라에는 한 뛰어난 인물이 나타난다 바로 차칸테무르이다. 그는 포의(布衣) 출신으로 홍건적에 전력을 다해서 대항하고, 거의 백전백승의 기적을 이룬다. 마침내 그는 백만 홍건군을 격파하고, 원나라의 강산을 유지시킨다.

홍건군이 궤멸당한 후, 주원장의 안휘 영지는 직접적으로 차칸테무르의 위협하에 놓이게 된다. 만일, 차칸테무르가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면, 제일 먼저 부닥치는 것은 바로 주원장이다. 주원장의 당시 실력과 남방이 4분5열되어 있던 상황을 보면, 절대로 그에게 대항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늘이 주원장을 도왔다. 바로 이때, 원나라군대 내부에 분열이 일어난다. 귀족출신의 원나라 장수 볼로드 테무르는 차칸테무르와 같이 평민출신의 인물의 실력과 지위가 자기를 넘어서자, 질투하게 된다. 그리하여 병사를 이끌고 차칸테무르의 군을 공격한다. 차칸테무르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쌍방군대는 산서, 하북에서 계속 마찰을 일으킨다. 몽고인들이 끊임없이 내부투쟁을 전개하는 서막이 열린 것이다. 1362년 6월, 차칸테무르는 수하장수의 독수에 돌연 사망한다. 원나라는 대들보를 잃었다.

차칸테무르가 죽자, 주원장에게는 더 이상 무서울 것이 없었다. 전력을 기울여 남방의 각 한인무장세력들에게 공격을 가한다. 1363년, 진우량과 파양호에서 대전을 벌여, 결정적인 승리를 얻어내고, 강서 전부를 차지한다. 1364년, 무창을 함락시키고 호북을 차지한다. 1365년, 호남, 광동을 평정한다. 1367년, 장사성, 방국진을 완전히 패배시키고, 기본적으로 남방의 통일을 완성한다.

이와 동시에, 북방몽고통치자의 내분은 더욱 가중되었다. 각 군대도 서로 공격하기 시작한다. 한번 싸우면 수년간 지속되었다. 원순제도 조정할 수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원나라는 혼란상태에 빠지고, 날로 쇠약해 졌다. 더욱 중요한 점은 원나라멸망의 천고죄인인 간상 츄스젠이 나타난다. 그는 승상의 지위에 있으면서, 사람을 시켜 가짜화폐를 발행케 하여 큰 돈을 번다. 이뿐아니라, 그는 황제가 그에게 보로테무르와 쿠쿠테무르간의 갈등을 조정하라고 보냈을 때, 성지를 돈거두는 보검으로 생각했다. 그들중 누가 뇌물을 많이 주는지에 따라 성지의 내용을 조작했다. 남쪽에서 돈을 많이 보내면 남쪽에 유리하게 말해주고, 황제가 너희에게 밀지를 주었으니, 북쪽을 쳐도 좋다고 말해준다. 북쪽에서 보내준 돈이 많으면, 다시 북쪽을 향해서, 황제가 밀지를 내렸으니 남쪽을 치라고 말해준다. 국면은 점점 더 험악해지고, 내전은 끊이지를 않았다.

1367년, 남방에서 기본적으로 승리를 거둔 주원장이 고개를 북쪽으로 돌였다. 북방의 통치자들은 마치 남쪽은 잊어버리고 있는 것같았고, 내부투쟁에만 급급했다. 주원장은 바로 북벌의 명을 내린다. 10월 서달, 상우춘은 대군25만을 이끌고, 북방으로 진격한다. 공격하는 동안 거의 무기에 피를 묻히지 않았다. 산동, 하남, 섬서등지의 원나라군대는 바로 항복했거나, 도망쳤다. 전투라고 할만한 것은 낙양에서의 한번이 있을 뿐이었다. 당시 낙양의 수비장군인 토인테무르는 낙양성밖에 5만의 군대를 집결시키고 주원장의 군대와 일전을 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상우춘이 돌격하자, 즉시 궤멸했다. 당시 차칸테무르가 10년동안 회복한 섬서에서 산동에 이르는 광대한 중원지역은 주원장군대에 의하여 겨우 8개월만에 모두 점령되고 만다.

1368년 8월, 주원장의 군대는 북경으로 진공한다. 원순제는 삼궁의 후궁, 황태자등을 데리고 북경성을 버리고 도망친다. 모두 몽골대초원으로 가버린 것이다. 나머지 코케테무르, 리스치등 군대를 이끌고 있던 장군들도 더 이상 내전을 계속할 힘이 없어지고, 모두 아무런 저항없이 도망쳐버리고 만다. 주원장은 10개월만에, 아주 적은 댓가만을 치르고, 모든 북방을 차지했다. 이로써 중국은 다시 한번 통일된다. 대명황조가 건립된 것이다.

원나라 군대를 가장 적게 죽인 주원장이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던 이유는

瓢蟲

不朽의 古典에서 찾은 智慧와 心灵, 역사적 敎訓과 省察에서 옛글의 향기에 취해 사랑에 빠지게 되었음을 밝히는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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