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의 독서의 기술》
대부분의 사람은 독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며, 왜 책을 읽는지조차 정확히 모른다. 어떤 이들은 독서를 ‘교양을 쌓기 위해 힘들지만 부득불 걸어야 할 길’로생각해, 잡다한 독서를 통해 상당한 ‘교양을 쌓는다.’ 또 누구는 독서란 그저 시간을 죽이기 위한 가벼운 소일거리라고 여기니, 무슨 책을 읽든지 간에 지루하지만 않으면 어차피 다 똑같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뮐러라는 사람은 교양을 갖추고 자기 지식에서 부족하게 느껴지는 부분을 채우려고, 괴테의 <에그몬트>도 읽고 어느 백작 부인의 회고록도 본다.
이렇듯 결핍된 면에 초조해하며 애를 쓴다는 사실 자체가 교양이라는 것을 외부 로부터 끌어들여 와야 하는 것, 그러니까 교양을 노력을 기울여 습득해야 할 어떤 것으로 본다는 얘기다. 결국 그가 아무리 열심히 공부한들, 그러한 교양은 생명력이 없고 아무 결실도 맺지 못할 공산이 크다.
한편, 마이어 씨는 ‘재미로’, 말하자면 무료해서 책을 본다. 생계는 보장되어 있고, 시간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넘친다. 그러니 그가 긴긴 하루를 잘 때울 수 있도록 작가들이 도와주어야 한다. 그는 향이 좋은 차를 즐기듯 발자크를 읽고, 신문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와 정반대로, 책은 오직 삶으로 이끌어 주고, 삶에 이바지하고, 소용될 때만 가치가 있다. 독자들에게 불꽃 같은 에너지와 젊음을 맛보게 해 주지 못하고 신선한 활력의 입김을 불어넣어 주지 못한다면, 독서에 바친 시간은 전부 허탕이다.
피상적으로 봐도 독서는 정신 집중을 요하는 일인데, 정신을 ‘풀어 놓으려고’
책을 읽는다는 것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다. 정서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라면 정신을 분산할 게 아니라, 오히려 집중해야 한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건,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건 간에 온 힘을 기울여야 마땅하다. 하물며 독서는 더욱 그러하다. 제대로 된 책이라면 언제나 복잡다단한 현상들의 단순화, 응축과 함축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짧은 시 한 편이라도 인간의 감정이 단순화되고, 집약된 형태로 담겨 있다. 주의를 집중하여 이 감정들에 적극적으로 몸을 맡기고 함께 겪고자 하는 뜻이 없다면, 불량 독자이다.
잘못된 독서는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부당하다. 무가치한 일로 시간을 허비하고, 자신에게 하등 중요하지도 않고, 금방 잊어버릴 일에 시력과 정신력을 소모 하며, 일절 도움도 안 되고, 소화해 내지도 못할 온갖 글들로 뇌를 혹사하는 짓이 아닌가?
이런 잘못된 독서가 다 신문 탓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천만의 말씀 이라고 생각한다. 신문이나 다른 온갖 잡다한 글을 매일 읽더라도 온전히 집중된 상태로 즐겁게 독서할 수 있다. 어쩌면 새로운 정보들을 선택하고 신속하게 조합해 내는 건전하고 중요한 훈련으로 삼을 수도 있다. 반면에 괴테의 명작 《친화력》이라 할지라도, 교양 때문에 읽는 사람이건 심심풀이로 읽는 사람이건 간에, 그야말로 아무 생각 없이 읽을 수가 있다.
인생은 짧고, 저세상에 갔을 때 책을 몇 권이나 읽고 왔느냐고 묻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니, 무가치한 독서로 시간을 허비한다면 얼마나 미련하고 안타까운 일인가?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책의 수준이 아니라 독서의 질이다. 삶이 한걸음, 한 호흡마다 그러하듯, 우리는 독서에서 무언가 기대하는 바가 있어야 마땅하다. 더 풍성한 힘을 얻으려고 온 힘을 기울이고, 의식적으로 자신을 재발견하기 위해 스스로를 버리고 몰두할 줄 알아야 한다. 한 권 한 권 책을 읽어 나가면서 기쁨이나 위로, 혹은 마음의 평안이나 힘을 얻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인가? 아무 생각 없이 산만한 정신으로 책을 읽는 건 눈을 감은 채 아름다운 풍경 속을 거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또한 우리는 자신과 일상을 잊으려고 책을 읽어서도 안 된다. 이와는 반대로 더의식적으로, 더 성숙하게 우리의 삶을 단단히 부여잡기 위해 책을 읽어야 한다. 우리가 책으로 향할 때는, 겁에 질린 학생이 호랑이 선생님께 불려가듯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알프스를 오르는 산악인과 같은 마음가짐, 또는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이 무기고 안으로 들어설 때와 같은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 것이다. 살 의지를 상실한 도망자로서가 아니라, 굳은 의지를 품고 친구와 조력자들에게 나아가듯이 말이다.
만약에 정말 이럴 수만 있다면, 지금 읽는 것의 10분의 1가량만 읽는다고 해도, 우리는 모두 열 배는 더 행복하고 풍족해지리라. 그래서 우리 같은 작가들의 책이 더는 팔리지 않는다고 해도, 그 결과 작가들이 작품을 열 배쯤 적게 쓴다고 해도, 세상에 해가 될 일은 결코 없으리라. 아무렴, 쓰는 게 문제인가. 읽는 게 훨씬 중요하지.
헤르만 헤세의 책이라는 세계 / 1911
글: 야옹이
시간 때우기나 기분전환을 원하는 독자건 교양을 중시하는 독자건 간에 책에는 활력과 정신적 고양을 주는 뭔가 숨겨진 힘이 있다고 짐작은 하되, 그게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거나 평가할 줄은 모르는 것이다. 이는 마치 어떤 환자가 약국에는 좋은 약이 많다면서 칸칸마다 뒤져 온갖 약들을 돌아가며 다 먹어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그러다 보면 요행히 자기한테 딱 맞는 약이 걸려, 약물 중독이나 남용에 이르는 대신 활력과 원기를 얻을 때가 있는 것처럼 서점이나 도서관에서도 간혹 그러는 것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감히 주장한다. 남독은 결코 문학에 영예가 아닌 부당한 대접이란 말이다. 책이란 무책임한 인간을 더 무책임하게 만들려고 있는 것이 아니며, 삶에 무능한 사람에게 대리만족으로서의 허위의 삶을 헐값에 제공해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와 정반대로 책은 오직 삶으로 이끌어주고 삶에 이바지하고 소용이 될 때에만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독자들에게 불꽃 같은 에너지와 젊음을 맛보게 해주지 못하고 신선한 활력의 입김을 불어넣어 주지 못한다면, 독서에 바친 시간은 전부 허탕이다.
제대로 된 책이라면 언제나 복잡다단한 현상들의 단순화, 응축과 함축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짧은 시 한편에도 인간의 감정이 단순화되고 집약된 형태로 담겨있다. 주의를 집중해 이 감정들에 적극적으로 몸을 맡기고 함께 겪고자 하는 뜻이 없다면, 불량독자인 것이다. 잘못된 독서는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부당하다. 무가치한 일로 시간을 허비하고, 자신에게 하등 중요하지도 않고 그러니 금방 잊어버릴 게 뻔한 일에 시력과 정신력을 소모하며, 일절 도움도 안되고 소화해내지도 못할 온갖 글들로 뇌를 혹사하는 짓 아닌가?
인생은 짧고, 저 세상에 갔을 때 책을 몇 권이나 읽고 왔느냐고 묻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니 무가치한 독서로 시간을 허비한다면 미련하고 안타까운 일 아니겠는가?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책의 수준이 아니라 독서의 질이다. 삶의 한걸음 한 호흡마다 그러하듯, 우리는 독서에서 무언가 기대하는 바가 있어야 마땅하다. 그리고 더 풍성한 힘을 얻고자 온 힘을 기울이고 의식적으로 자신을 재발견하기 위해 스스로를 버리고 몰두할 줄 알아야 한다. 한 권 한 권 책을 읽어나가면서 기쁨이나 위로 혹은 마음의 평안이나 힘을 얻지 못한다면, 문학사를 줄줄 꿰고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인가? 아무 생각 없이 산만한 정신으로 책을 읽는 건 눈을 감은 채 아름다운 풍경속을 거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얼마나' 보다 '무엇을', '어떻게', '제대로'가 중요합니다.
내가 존경하는 신영복 선생님의 <나무야 나무야>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당신은 유적지를 돌아볼 때마다 사멸하는 것은 무엇이고 사람들의 심금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를 돌이켜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오늘 새로이 읽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라고 하였습니다. '과거'를 읽기보다 '현재'를 읽어야 하며 '역사를' 배우기보다 '역사에서' 배워야 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겉표지가 닳고 손때가 묻었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궁극적인 목적은, 역사적 사실을 그저 달달 외워서 지식을 뽐내는 것이 아니라 그 역사적 사실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더 나아가 어떻게 현실에 반영할 것인지 알고 실천하는 것이다.
작가를 준비하기 이전부터 책을 꾸준히, 그리고 많이 읽어왔던터라 종종 주위에서 책을 추천해달라거나 어떻게 하면 책을 많이 읽을 수 있는지 물어본다. 내 나름대로의 경험과 지식을 토대로 이러저러한 조언을 해주면서, 또 주변의 나름 책을 읽는다는 사람들을 보며 깨달은 건 독서도 역사를 배우는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책을 어떤 이유에서 읽든 - 스펙을 쌓기 위해서든, 자기계발을 위해서든, 그저 흥미에 의해서든, 그 무엇이든 - 상관없이 책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 자체는 매우 중요하다. 동기가 어떠하든 책을 읽어야겠다는 마음 자체는 매우 훌륭한 자세이고 동기야 읽다보면 변하기도 하니까, 딱히 상관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조언을 할 때 말하는 몇 가지 주의사항 중 하나는 그저 '다독'을 위한 독서는 가급적 지양하라는 것이다.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통상적인 말과는 사뭇 다른 말이다. 그럼 나는 왜 '다독'을 경계하듯 말하는 걸까?
물론, 내 나름대로 세운 독서의 단계에 비춰보면 일정 수준에 이를 때까지 다독, 즉 다방면의 책을 고르게 많이 읽는 것이 필요하다. 흔히 독서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이 '고전이니까, 베스트셀러니까, 주위 사람들이 좋다니까 무조건 읽어야지' 하고 생각하는데, 이는 너무 원대한 목표이자 금방 독서에 대한 흥미를 잃을 수도 있는 접근법이다. 고전이라고 해서 누구에게나 고전이 아니고 오히려 독서를 고전하게 만드는 책일수도 있다. 따라서 자기 수준에 맞는 책, 흥미를 유발하고 비교적 읽기 쉬운 책을 선택하되 반드시 완독할 필요는 없다. 독서의 재미를 알아가는 수준에서는 그 정도면 적당하다. 차차 독서의 '맛'을 알게 되면 완독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다 읽게 된다(어떤 책을 읽는데 너무 진도가 안나가고 읽기가 싫다면 그건 그 책의 수준이 너무 높거나 읽을 준비가 안된 경우다. 그럴 때는 잠시 내려놓고 나중에 다시 읽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술술 읽어질 때가 있다).
입문의 단계에서는 독서의 폭을 넓히는 단계다. 이른바 '저변의 확대'인데 건축으로 말한다면 기초공사에 해당한다. 대부분의 수준 높은 책들은 기초적인 내용을 알아야 읽기 쉬운 경우가 많다. 독서 입문자가 무작정 달려들기에는 어려운 책들을 읽기 위해서는 그전에 기본적인 책들을 읽으면서 배경지식을 쌓아야 한다.
학습심리학에서는 기억과 학습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새로운 내용을 기억하려면 새로운 정보를 기존의 정보와 연결지어야 하며 기존의 정보가 많고 다양할수록 기억이 더 빠르고 쉽게 이뤄지며 더 오래 간다. 학습도 마찬가지인데 새로운 지식과 연결할 수 있는 배경지식이 많을수록 더 많은 지식을 쉽고 빠르게 배울 수 있다. 독서도 이 같은 과정을 거친다. 입문자가 다양한 책을 읽을수록 심화된 내용을 읽을 때 이해하기 쉬워진다.
예를 들어, 제2차 세계대전에 관련된 역사서를 읽을 경우, 예전에 그 당시 상황을 다룬 소설을 읽었다면 그 내용을 기반으로 더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독서의 시작에서는 대게 '다독'이 권장된다.
그러나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렀다면 - 적어도 3가지 분야의 책을 기초 단계를 거쳤고 나름의 주관과 취향을 가졌다면 - 다른 접근법이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과정이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고 지식을 습득하는 단계였다면, 그 다음은 알게 된 지식에 깊이를 더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무엇을 '안다'는 말에는 단순히 어떤 개념이나 대상에 대해 지식적으로 이해했다는 의미도 있지만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 이해를 적용함으로써 체험한다는 의미도 있다. 이것을 있어보이는 표현으로는 '지행합일'이라고도 하는데 - 원래는 더 깊은 철학적 의미가 있지만 여기서는 단순히 '앎과 행동은 하나'라는 의미로 씁니다 - '아는 것'이 그저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앎과 행동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 철학에 대한 책을 읽다가 스토아 학파의 주장에 매력을 느끼고 그것이 옳다고 여겼다면 그들의 주장을 이해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단계까지 나아가야 한다. 순간의 격정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훈련을 하고 절제의 미덕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저 책을 많이 읽기만 하는 '다독'은 이런 깊은 이해와 실천을 등한시 할수도 있는 위험이 있다. 배고픔에 아무 음식이나 폭식하다보면 소화불량을 비롯한 각종 문제가 생기듯. 독서의 목적 - 단순히 책을 읽는 행위 자체를 뛰어넘어 생각과 감정, 행동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 - 을 상실한 다독은 아무런 소용이 없을 뿐더러 오히려 해가 된다. 우리는 지식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표리부동함과 자칭 엘리트라는 자들이 저지른 일들을 역사를 통해서, 그리고 주위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런 사례들은 지식이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은 대표적인 경우이며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에게 해를 입히게 된다.
따라서 어느 정도 다독을 통해 독서에 흥미를 붙이고 방향을 잡았다면, 그때부터는 이전에 비해 느리고 적게 읽더라도 깊고 제대로 읽는 과정이 필요하다.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책을 자세히 뜯어보고 씹고 먹고 그것을 영혼의 밑거름으로 삼아야 한다. 책을 읽고 난 후에 마음과 생각, 행동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그건 그저 시간만 낭비한 것에 불과하다. 책의 모든 내용을 소화시켜서 실천에 옮기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나조차도 그러지 못하기에 감히 완벽한 실천을 이야기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작은 것 하나라도 실천하도록 노력하고 실제로 그런다면, 삶이 변할 뿐만 아니라 독서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이런 과정을 '삶을 변화시키는 읽기'라고 부르며 스스로도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는데 이것이 무슨 인류 평화를 위한 공헌 같이 어마어마한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말하는 방법의 중요성에 대해 읽었다면 오늘부터 말하는 방법을 바꿔보는 것(<심리학이 이렇게 쓸모 있을 줄이야>, 류쉬안), 매일 조금씩 운동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았다면 당장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가는 것(<1일 20분 똑똑한 운동>, 그레첸 레이놀즈), 스마트폰이 인지능력과 학습수행능력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읽었다면 짜투리 시간에 스마트폰 대신 책을 펴는 것(<딥 워크>, 칼 뉴포트), 이런 것들도 삶을 변화시키는 읽기의 결과다.
책을 읽긴 읽는데 뭔가 모를 공허함과 부족함이 느껴진다면, 그때는 '삶을 변화시키는 읽기'가 필요한 시간일지도 모른다. 양손 가득히 들고 있는 책을 내려 놓고 한 권의 책을 펼쳐 저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문장들을 음미해보라. 그리고 그 가운데서 단 하나라도 삶 속에서 배어 나오기 전까지는 다른 책을 잡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