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記 ㅣ 지리산-섬진강 품에자식, 하동의 비밀
- 여순 반란 때도 여기 계셨나요?
그럼. 열여덟 살이었지. 제일 큰 첫 전쟁을 여기서 치렀어. 3개 대대가 여수에서 순천으로 해서 올라와 경찰 병력과 섬진강에서 대치를 했어. 나는 어려서 군인들 심부름을 했지. 마을에서 밥을 해서 전쟁 하는 반야봉으로 지고 올랐지. 멸치, 갈치같은 걸 조려가지고 말야. 올라가보니 전나무에다가 속옷을 주렁주렁 걸어놓고 추우니까 불을 쬐고 앉았더군. 그게 전쟁이야. (빈섬, 의신마을 인터뷰 중에서)
[더뷰스 핫리뷰] 섬진강과 지리산, 그리고 그곁에 사는 사람들
#1 장이불수(壯而不秀), 늙은 어머니같은 산
지리산은 오래전 두류산이라 불렀다. 두류(頭流)는 ‘두르다’ ‘둥글다’는 의미도 있지만 ‘백두(頭)가 여기까지 흘러왔다(流)’는 뜻도 지닌다.
백두산에서 부르르 떨며 솟아난 힘찬 기운이 동쪽 해안에 벼랑을 만들며 반도를 쿵쿵 뛰어내려오다가, 태백산에 이르러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경북 문경 어귀에서 숨을 고르는듯 하다가 다시 뛰어 지리산까지 치닫는다.
“금강산은 빼어나되 장하지 못하고 지리산은 장하되 빼어나지 못하다. 구월산은 빼어나지도 장하지도 못하고 묘향산은 빼어나고도 장하다.” 이렇게 말한 이는 서산대사였다.(최남선 ‘조선의 산수’(1947))
지리산은 왜 장이불수(壯而不秀)이던가. 땅의 큰 줄기가 굽이치며 내달은 백두대간이 여기에 와서 장엄한 종지부를 찍는 곳이니, 굳이 빼어날 이유가 없다. 대단원이란 호쾌한 힘자랑이 아니라, 삶과 죽음을 깊이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너른 품을 벌리는 일일 수 밖에 없다.
모든 것을 품에 안아들이는 늙은 어머니가 그렇지 않은가. 우람하게 돋아올라 구름 눈썹을 걸친 산들이 느리게 흘러가는데 섬진강이 굽이치며 달려와 그 발을 씻는다.
지리산이 섬진강을 낳은 것도 아니고 섬진강이 지리산의 갈 길을 말린 것도 아니다. 그저 백년해로한 부부처럼 산의 자락과 강의 하류가 어깨를 겯고 흘러간다.
섬진강 껴안으며
서쪽으로 오래 누운 포즈 때문에
물의 동쪽이라는 이름을 가진
마을이 있다. 몸을 펴고 오그리듯
섬진강 줄기따라 뒤척이는 땅,
지리산 자락을 고침(高枕)으로 베고눕고
발은 남해바다에 살짝 묻었으니
물소리와 바람소리가 웅크린 잠을 다독이다.
살아있는 어떤 길에서는 눈이 멀도록
흔들리는 붉노란 나무
너무 선연해 오히려 캄캄한
대봉시 박힌 하늘
바지춤 슬쩍 껍질 닦아 한 입 베물면
떫고도 단 그리움 목끝까지 감돌다
갈수록 쓸쓸한 날
쌍계사 한켠 바위
노스님같은 감불(龕佛) 앞에 앉으면
축축한 은행잎 무릎에 서늘하다
내려가는 길 문득 눈에 들어온
칡즙 한 잔 내미는 여인
쓰린 속을 달래는 데는 그만이라고
흙묻은 고운 손이 향긋한 지리산 한 뿌리
곁들여 건넨다. 흙빛의 컵 속에
어둑한 내 얼굴 풍경처럼 뜬다
헤어지기 섭섭하여 오래 멈춰선 버스 창
노을이 묻었다가 어둠이 묻었다가
부처 얼굴이 꾸벅 절을 하고
그래도 다 못 보내
화개까지 따라와 다시 손을 흔든다
그러고다 한 가슴 남는 섬진강이다
빈섬 '섬진강 표류기'



#2 천하가 열리다...단군의 시간을 감춘 산
단군의 아들과 진시황의 신하가 지리산을 돌아다녔던 사실을 아는가. 쌓인 시간을 말하려면 이쯤은 돼야 천왕봉의 기개에 값한다.
BC 2234년 10월에는 단군의 태자였던 부루가 단풍 좋은 산색을 구경하고 있었다. 서른 즈음에 그는 천하를 다스릴 이채로운 지혜를 얻기 위해서 이곳에 왔을 것이다.
청학동의 삼성궁은 환인, 환웅, 단군을 모신 전당이다. 현재의 궁주(宮主)인 한풀도사(강민주)가 일대를 정비하기 이전에는 삼성사가 있었다. 한풀궁주는 지리산 일대에 이 사당을 포함해, 민족신화의 가장 오래된 영역인 마고의 성까지를 구축해 겨레의 참된 뿌리를 되찾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 땅에 불로초가 있다면 아마도 지리산이 감추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 깊고 그윽한 품의 끝을 알 수 없어 사람이 감히 가닿지 못하기 때문이다.
BC 219년(진시황 28년), 진나라의 방사(方士)였던 서불도 그런 생각을 했나 보다. 불사약을 구하러 이곳에 왔다. 배 아홉 척에 어린 남녀 300명과 군인, 뱃사람을 싣고 산동성에서 출발해 남해를 타고 들어와 섬진강(당시엔 ‘다사강’)을 거슬러올라 지리산(당시 ‘방장산’)으로 들어간다.
여기서 그는 약초를 구하지 못하고 가마솥은 남해에 버리고는 바위에 ‘서불, 여기를 지나가다’라고 새기고 탐라와 일본으로 가게 된다. 섬진강 서시천은 서불천을 잘못 읽은 것이다.

#3 한번 그을린 불로장생초가 하동차가 되다
하동에는 녹차의 전설이 있다. 옛날 지리산에 살고 있던 한 부족장의 어머니가 큰 병으로 앓아눕자, 효자였던 족장은 약초를 찾아 산을 헤맸다.
그러다가 길을 잃고 심산유곡의 선국(仙國)에 들어섰다. 자초지종을 들은 신선들은 그에게 불로장생초를 주었다. 그들은 “이것은 귀한 것이니 꼭 어머니를 위해서만 쓰고, 다른 이에게 줘선 안된다”고 당부한다.
그것을 받아서 들고오던 족장은 산적떼를 만나 불로장생초를 빼앗길 위험에 처했다. 문득 신선들의 당부를 기억해낸 그는 그것을 불에 태우고 말았다. 그가 겨우 집에 돌아가서 보니 이미 어머니는 돌아가신 뒤였다.
무덤 앞에서 족장은 며칠 동안 하염없이 울고 있었는데, 이때 그의 옷자락에 묻어있던 불로장생초의 재 하나가 눈물에 함께 흘러내려서 무덤 앞에 떨어졌다. 순식간에 나무 하나가 자라났는데 족장은 이 나무가 어머니의 환생이라고 생각하고 정성껏 가꿨다.
이 나무가 하동 녹차였다. 녹차는 한번 불에 타버렸던 불로장생초이기에 영생(永生)의 효능까지는 없지만 그것에 버금가는 영차(靈茶)라는 것을 강조한 이야기인 셈이다.
하동에 녹차가 처음 재배된 기록은 삼국사기에 나온다. 신라 흥덕왕(? - 836) 3년 12월에 당나라에 조공하기 위해 김대렴을 사신으로 보낸다.
당의 문종은 인덕전에 그를 불러 잔치를 벌이고 당의 차나무 씨를 선물한다. 흥덕왕은 지리산에 그것을 심어 기른 뒤 왕실 차로 진상하라고 명한다. 하동군이 ‘왕의 녹차’라고 표현하는 것은 바로 이 대목에서 나온 것이다.
* 신라의 하동차가 중국 차보다 더 오래 됐다?
진덕여왕(? - 654)의 넷째 아들 김교각은 24세때 불가에 입문해 법명을 지장이라 불렀다. 지장은 지리산의 녹차 종자와 볍씨, 그리고 흰 개 한 마리를 데리고 당나라 구화산에 올라가 화성사라는 절을 짓는다.
그는 거기서 제자들에게 차 재배법과 달이는 법을 가르쳤다. 99세로 입적한 뒤 돌로 된 함에 안치하였는데 3년이 지나도 육신이 썩지않고 뼈마디에서 쟁반을 흔드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보살이라고 믿었다.
한편 경덕왕(? - 765)때 화랑인 충담사가 미륵세존에 차를 바쳤다는 기록도 있다고 한다. 따라서 흥덕왕 때인 9세기가 아닌 7세기 내지 8세기에 이미 지리산에 차나무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당나라 육우가 ‘다경(茶經)’을 펴낸 것이 760년 경인 것을 감안하면 신라의 차가 중국보다 앞섰을 수도 있다고 한다.
하동 출신의 차 연구가이자 사회운동가인 석한(石漢) 하상연(1934-2000)은 하동차가 중국에서 온 것이 아니라 자생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중국과 인도, 일본의 산은 신생대에 생긴 것으로 빙하 침식 때문에 차의 자생이 불가능했지만, 한반도는 중생대 이전에 생겨났기에 차의 생장에 적합했을 것이라는 의견이다.
잎의 크기는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진화하는 것을 보더라도, 우리나라의 소엽(小葉)이 아열대 지역에서 생산되는 대엽(大葉)으로 나아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도 했다.
#4 불교 역사 271년을 까먹었구나
이 땅에 불교가 언제 들어왔는가. 고구려 소수림왕 2년이며 372년이라고 우리는 달달 외웠다. 전진의 왕 부견이 보낸 순도라는 사람에 의해서라고 말이다.
지리산의 칠불사 사지(寺誌)에는 그보다 271년 전인 101년에 김해가야 수로왕의 일곱 아들이 이 절에서 불도(佛道)를 닦았으며 성불하여 일곱 부처(七佛)가 되었다고 한다. 고구려로 들어온 것은 북방불교이며 가야로 전파된 것은 남방불교일 가능성이 높다. 기록에는 왕과 왕비 허황옥이 왕자들을 만나러 방문했다는 것도 나와 있다.
왜 교과서에는 이 이야기들이 실리지 않았을까. 친일사학자들이 일본의 주장인 임나일본부설을 지원해주기 위해 가야사를 축소하거나 왜곡했기 때문이라고 하동 문화원장인 정연가 선생(향토사학자)은 설명한다. 가야를 지우개로 지워버렸으니 칠불사에서 공부하던 수로왕의 왕자들도 설 데가 없어진 셈이다.
#5 피보다 붉은 철쭉이 피는 뜻은
지리산은 선혈을 많이 먹은 산이다. 섬진강도 그렇다. 해마다 붉어지는 철쭉과 단풍은 그래서 더 고운 것인지 모른다. 군사를 감출 수 있는 깊은 산이기에, 전쟁을 비켜갈 수 없었다.
하동군 진교면에는 발꾸미라는 곳이 있다. ‘군사를 냈던 곳(發軍尾)’라는 의미인데 광개토대왕 시절에 만들어진 이름이다. 고구려 군사들은 396년 3월에 말을 타고 일본을 정벌하러 이곳까지 달려왔다. 여기서 머물며 배를 만들어 왜(倭)를 공략한다.
200여년 뒤(622년)에는 신라의 김유신이 이곳에 들어온다. 스물 여덟살의 이 화랑은 석굴에 살면서 7년간 무술 연마를 한다. 이곳에서 천룡검과 활, 신책(神策)을 얻고 용소 옆에서 말을 얻은 다음 원단원, 지경개 등 50명의 산적을 부하로 삼아 낭비성으로 출전해 고구려병 6천명을 무찌르니, 지리산은 굳이 누구의 편이 아니다. 모두를 품어 시세(時勢)와 의지를 돕는다.
칠불암 아자방에서 좌선 수도한 서산대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 1만을 이끌고 평양성을 탈환하러 달려갔고, 왜병에 쫓기던 정씨 여인은 딸을 들처 업은 채 섬진강에 뛰어들며 “왜놈들 듣거라, 나 조선 박인립의 처 이곳에서 죽겠노라”하며 고함을 질렀다.
1894년 동학혁명 때는 관군과 동학군이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여 교전하여 수백 명이 죽었다. 또 한국전쟁 무렵 남부군 이현상이 최후를 맞은 빗점골에 흐른 피는 7년 동안 이곳에서 죽어간 10만 유혼(幽魂)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6 하동 최참판댁에서 - 저물어가는 '박경리 스토리' 속으로
허겁지겁 달려가, 무딤이들을 빠져나가려는 햇살을 보았다.
최참판댁 주련 사이를 거닐며 유호인의 시 '악양정(岳陽亭)'을 읽는다. 이 시는 두보 '복거(卜居)'의 운을 빌어 쓴 정여창의 시를 다시 차운한 작품이다.
악양정은 정여창의 정자였다 한다.
하늘 끝머리로 돌아가고 싶은 한 움큼의 마음
해드는 산(악양)엔 맑고 그윽하지 않은 곳이 없다네
구름과 물은 환하디 환하여 오로지 흥을 돋우고
벼슬 감투는 멀고멀어 근심을 불러 일으키는데
두보 골짜기(종남산) 못숲은 봄날이 따스했고
왕유 별장(망천)의 는개비는 저무는 산에 아른거렸지
그대(정여창)는 세자가 하루 세번 보기를 원하니
그 탓에 악양정 앞에 뜬 배에는 달빛만 가득 타고 있겠네
일국귀심천진두(一掬歸心天盡頭)
악양무처불청유(岳陽無處不淸幽)
운천력력편공흥(雲泉歷歷偏供興)
헌면유유야기수(軒冕悠悠惹起愁)
두곡림당춘일난(杜曲林塘春日暖)
망천연우모산부(輞川烟雨暮山浮)
서연매피최삼접(書筵每被催三接)
고부정전월만주(辜負亭前月滿舟)
세자의 총애를 독차지하는 바람에 세자시강원을 떠나지 못하는 악양정 주인 정여창에 대해, 안타까워한 시다.
유호인은 평사리에 와본 것이 아니라, 정여창의 이야기를 듣고 그 정경을 그렸을 것이다. 두보의 종남산과 왕유의 망천에 방불하는 아름다운 곳으로, 악양을 그렸으니, 최참판댁 문설주에 걸릴 만하리라.
#7 바다와 뭍이 만난 화개장터
가수 조영남이 ‘화개장터’를 불렀을 때 사람들은 영남과 호남이 서로 넘나드는 그 정서의 교역(交易)을 인상깊게 생각했는지 모른다. 하기야 ‘영(嶺)의 지역’인 산과 ‘호(湖)의 지역’인 물이 서로를 잘 감싸는 게 화개(花開) 만한 곳이 있으랴?
하동사람, 구례사람, 혹은 진주사람과 광양사람이 재첩국을 함께 말아먹는 고장이니 동서화합을 말하는 장소로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있으랴? 김동리의 소설 ‘역마’는 이렇게 그려놓고 있다.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길이 고래로 허다하지만 화개협 시오리를 끼고앉은 화개장터의 이름이 높았고 경상 전라 양도 접경이 한두 군데일 리 없지만 또한 이 화개장터를 두고 있었다.
장날이면 지리산 화전민들의 더덕, 도라지, 두릅, 고사리들이 화개골에서 내려오고 전라도 황화물 장사들의 실, 바늘, 명경, 가위, 허리끈, 족집게, 골백분들이 또한 아랫길에서 넘어오고, 하동길에서는 섬진강 하류 해물장사들의 김, 미역, 청각, 명태, 간조, 간고등어들이 들어오곤 하여...”
지금은 박경리 소설 ‘토지’ 속의 월선네가 장이 서는 아침마다 주막에서 용이를 기다렸던 그 자리는 가늠할 수도 없는, 엉거주춤한 간이 장터가 썰렁한 채로 옛 정취를 그리워하는 길손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어쩌겠는가. 시장이란 필요와 욕망이 만나야 하는 것이니, 옛 것이 그립다고 자동차와 대로의 세상에서 화개장터를 온전히 불러올 수야 없는 것 아니겠는가.
섬진강은 쉽게 깎여들지 않는 지리산의 편마암을 관류하고 있기에 잘 깎이는 화강암과는 달리 좁은 강폭과 수심을 유지하면서 흘러갈 수 있다. 이 긴장된 물줄기는 하동군을 훑으며 남해의 포구 부근에 다다라서야 넓은 강물길을 내준다.
하동포구는 강으로서는 출구이고 바다로서는 입구이다. 예로부터 섬진강 물길은 최고 속도의 유통을 보장하는 곳이었으니, 지리산 저쪽의 풍성한 물건과 산물들을 받아서 뱃길로 수송하는 것이 가능했고, 그 값에 걸맞는 해산물들을 뭍으로 들이기가 좋았다.
물목에 장터를 차렸으니, 화개장터는 경제의 꽃이 피는 화개(花開)였고 뭍과 물이 만나 서로 인사하는 자연과 인간의 공동장터였다. 시장이 힘을 잃어가게 되는 것은, 뱃길 유통보다 더 빠른 도로와 자동차들이 생겨나면서부터였고, 거기에 섬진강 윗목에 댐이 생기는 바람에 흘려보내는 수량이 줄어 배가 드나드는 것조차도 어려워졌다.
#8 60전 60승, 정기룡장군을 아는가
하동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 2명의 기억을 아로새긴 고장이다. 두 사람 모두 임란영웅이다.
이순신은 백의종군 당시 이틀간 여기에서 머무른 뒤 권율의 명령을 받고 합천으로 간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권력과 불화(不和)하면서까지 그가 택한 충(忠)은 ‘올바른 정치’에 대한 소신이었다.
이순신이 바다의 신화였다면, 정기룡은 육지의 신화였다고 할 만하다. 18세기의 홍양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크고 작은 60여회의 전투에서 언제나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적을 무찔러 한 번도 진 적이 없었다. 그가 가는 곳에는 주민 중에서 한 명의 사상자도 없어서 백성들이 그를 존경하고 따랐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뒤 왜군이 퇴각할 때 정기룡장군이 무서워 육로를 이용할 수 없었다. 그들은 험한 해로를 감수하며 어렵사리 도망쳐 갔다. 정기룡 장군의 전술은 기습과 유인과 매복돌격이 핵심이었다고 한다. 적의 허를 찌르는 과감한 기병 습격으로 왜군이 따라오면 한참 끌어들인 뒤 보병과 기병의 주력군을 뿌려 덫에 걸린 짐승처럼 적을 섬멸했다.
이토록 빼어난 구국 영웅이면서 이순신에 비해 조명받지 못한 까닭은 무엇일까. 논란이 구구하지만, 전후 공신 책정이 밝지 못했음을 뜻하는 것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하동군은 이곳 금남면 중평리 태생인 정기룡(1562년생)을 지역을 대표하는 역사인물로 내세우고 그의 공훈에 걸맞는 ‘위인’으로 자리매김하려고 애쓰고 있다. 임란의 호랑이가 지자체 시대를 맞아 마침내 제 목소리로 포효하려는가.


#9 ‘메이드인 하동’ 팔만대장경의 비밀
무신집권을 한 최충헌은 권력을 남용하여 지탄을 받았는데, 특히 불교왕국이었던 고려에서 승려들이 이에 반발하자 대학살을 저질렀다. 이후 그의 아들 최이가 집권한 뒤 불교계와 화해하기 위해 대장경 재판각 사업을 벌였다.
이렇게 하도록 최이를 설득한 사람은 하동 사람인 정안(鄭晏)이란 사람이었다. 정안은 최이의 처남이었다. 정안은 최이의 대장경 판각을 돕기 위해 자신의 식읍 땅(선대로부터 물려받은 토지)인 하동, 남해, 진양을 내놓고 거기에 분사도감을 만들어 경을 제작하게 했다.
강화도에 대장도감이 있었지만 실제로 대장경을 판각한 곳은 분사도감이 있는 남해 일대였다. 대장경에 쓰인 나무들을 분석해본 결과 지리산의 산벚나무와 돌배나무가 쓰인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팔만대장경은 하동 사람 정안이 하동 일대의 작업소에서 지리산의 목재로 만든 것인 셈이다. 그렇다면 왜 정안의 공적이 철저히 가려졌을까.
권력자 최이의 뒤를 이은 사람은 최항이었는데 의심이 많고 포악했다. 한때 그가 아버지로부터 쫓겨났을 때 계모가 말리지 않았다 하여 계모의 친인척들을 모두 죽였다. 정안은 “사람 죽이기를 어찌 이같이 하는가”하고 말을 했는데, 이에 최항은 “정안이 딴 마음을 먹었구나”라고 말한 뒤 백령도로 유배를 보내 바다에 수장(水葬)시켜버린다. 그는 역적으로 몰렸고 대장경을 판각한 공로의 기록조차도 지워진 것이다. 하동의 정안봉이란 산은 최근까지도 역산(逆山)으로 전해왔다.
#10 118년 하동초등학교의 저력
1907년에 세워진 하동초등학교는 이 고장의 교육열이 예부터 만만치 않음을 말해준다. 구 한말의 이승두 하동군수가 군립 하동학교를 향교의 공자 묘사에 설립한다.
첫 해에는 남학생 10명과 여학생 6명이 입학을 했다. 섬진강과 화개장터, 남해포구 주위의 풍부한 물산과 재력과 더불어 사람들과의 빈번한 접촉 속에서 길러진 지적 갈증이 어려운 시기에도 학교 창설을 가능케 했을 것이다.
1972년이 446명으로 졸업생이 가장 많았고 정구영 전검찰총장(39회), 김광석 참존화장품 회장(41회), 엄상주 복산약품 회장(29회)등이 있으며 박희태 의원의 부친(작고, 8회) 또한 이곳 출신이다. 동창회장은 첫 여성회장으로 김경연(전 시의원, 53회)씨이다.
#11 지리산도 식후경, 야강산해(野江山海) 진미
금강산도 식후경이라지만 지리산도 마찬가지다. 하동의 식탁은 산, 들, 강, 바다에서 나는 음식들의 경연장이다.
섬진강은 숙취에 시달리는 속을 시원하게 달래주는 재첩국과, 싱싱한 은어회와 은어튀김, 그리고 밥도둑이라 할 만한 참게장과 참게탕을 내놓는다.
지리산은 일등 산채비빔밥을 내놓고 갖은 나물 곁반찬에도 올라온다. 녹색 바둑판처럼 잘 정리된 논과 밭에서는 따순 밥과 고추나 깻잎 따위를 아끼는 법이 없고, 가끔 청국장같이 구수한 것도 차릴 줄 안다. 냄새가 나지 않는 솔잎 돼지도 명물이다. 바다에선 해물들이 종류를 가리지 않고 들락인다.
한 상 잘 먹고나면 이곳의 배나 감이 디저트로 나오고 지리산 안개와 햇살이 키운 녹차 한 잔이 마음마저 배부르게 한다.
여기에 와서야 맛이 생겨나는 비밀을 조금 알게된다. 섬진강이 키운 것은 강처럼 맑고 개운하다. 지리산이 키운 맛은 순박하고 청순하며 풋풋하다. 평사리 들녘이 키운 것들은 대개 달고 짜고 맵고 싱겁고 남해가 키운 것은 우물거리고 오물거리며 서늘하고 비릿하다.


조문환의 '하동역'
조문환은 하동사람이다. 하동군에서 일하는 젊은 면장이다. 시 쓴다고 땡땡이치는 공무원이 아니라, 일 잘하고 창의력 있고 예술감각 뛰어나 사람 몰고 다니는 그 읍내 스타다. 그 분이 처음으로 냈다는 시집 속에 이 시가 들어있다.
늘 어깨에 걸고 다니는 카메라는 지리산 아래 섬진강이 통째 흘러다닐 만큼 무시로 작품을 만들어냈지만, 하나하나에 들어있는 미감은 늘 감탄사를 연발케 했다. 오래 봐야 보이고 자주 봐야 보이고 보고도 처음 보는 듯 봐야 깨닫게 되는 아름다움이 그의 렌즈 속에는, 그리고 풍광을 중얼거리는 언어 속에는 점점이 숨어있다. 그 솜씨가 이 시행에 들어오면서 읽는 이의 눈을 닦게 한다. 부연 안경을 닦듯 시야가 맑아지는 저 행행의 진전을 보라.
하동 역사가 장소를 옮겨 신장개업했다. 역이란 교통시설의 일부이니, 세상의 변화나 필요에 따라 그럴 수 있는 일이다. 공무원 조문환이 머리띠 두르고 역사 앞에서 농성을 해도 하동역은 기어이 넓은 집으로 이사갔다. 우선 '간단다'로 어이 없는 심사를 털썩 풀어놓는다. 화산마을 앞에 있던 작은 역사가, 너뱅이들 광활한 땅 언저리로 간단다. 이건 엄연한 사실이다.
조문환은 이때 관청의 점퍼를 슬쩍 벗고 시의 옷을 입는다. 시인이 되어 '감정의 고리'를 저 엄연한 사실의 뒷덜미에다 턱 잡아 걸어보는 것이다. 그게 '가는 것은 좋다 치자'다. 막걸리 한 사발 쩍 걸치고, 한판 붙으려 무릎을 세워앉으며 하는 소리다. 기차역 하나 떠나는 게 건물이 떠나는 것인줄 아느냐? 그대 눈에는 그것 밖에 안 보이는가? 기차역 하나가 떠나가면, 하동사람 마음 속에 있는 수많은 하동역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사월 초순 벚꽃열차 지나갈 때 쏟아지던 그 꽃비는 어쩌라고? 그것도 가져가야지. 그것 보러 남해에서 달려온 어느 처녀의 벌럭이는 심장은 어쩌고? 완행열차 타러 달려오는 통학생들 낡은 운동화가 부산하던 풍경은 또 어쩌라고? 기차가 서는 곳이 역인줄 아느냐? 기차가 떠나가면서 레일에 남는 그 애잔하고 서러운 울림까지 다 가져갈 수 있냐고?
세상의 변화는, 그저 큰 것들에 주목한 무뚝뚝한 결정들이 남기는 상처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하동역 하나 떠나는 것. 그래서 편리해지고 말쑥해지고 그럴 듯 해지는 것. 그걸 말릴 엄두조차 못내지만, 그래도 이 가슴 속에 있는 하동역이 자꾸 아우성을 치는구나. 하동에는 드러난 마을이 있고 드러난 마음이 있지만, 이렇듯 드러나지 않은 마을과 숨겨진 마음이 있다는 걸, 아름답고 서럽게도 드러내는 시 한편. 이 오후를 괜히 눈물지게 한다. 불쑥 그곳으로 내려가 그와 막걸리 한 잔 마시며 낄낄 대고 싶어지지 않는가.

#13 지리산 골짜기 의신마을 사람들, 빈섬 인터뷰
- 여기 맹수들이 아직 살고 있나요?
범은 다 없어졌어. 몇 마리 있었으나 번식이 안되어 사라졌지. 곰도 거의 사라졌어. 서울대에서 한 일 주일 외국학자들과 함께 와서 조사하고 했는데....곰이 남아있으려면 50마리는 넣어야 돼. 그래야 보존이 되지. 40대 곰박사라는 사람이 오긴 했는데 탁상공론이었어. 자기가 곰을 키워는 봤지만 산에 사는 곰을 봤어야 말이지. 60년대까지는 많았어. 저기 빗점골 올라오는데 새까만 것이 길에 서있는 거야. 인부들도 많고 여자들도 있었는데 집에서 개를 몰고온 줄 알았지. 개인줄 알고 부르는데 딱 돌아서니 곰이더라고. 또 벌채를 하는데 나무 비어있는 속에 곰이 들어앉아 있을 때도 있었어. 나무를 때리니까 어슬렁어슬렁 나가더군. 그때는 곰 때문에 총도 가지고 다녔어.
- 곰이 사람 공격도 합니까?
맹수라는 게 놀라면 달려들지. 산에 가서 “야호 야호”하는 건 맹수들 보고 저리 가라고 하는 소리다. 요즘 그거 하지 말라고들 한다는데 우스운 일이지. 새들이 조금 놀라는 게 대수인가. 맹수가 야호 소리를 들으면 사람을 피해서 가지. 자다가 갑자기 사람이 닥치면 짐승들은 확 달려들거든. 멧돼지는 새끼도 달려들어.
- 의신마을이 예전에 전쟁터였습니까?
여기가 산이 깊어서 전쟁을 하다가 힘이 약해지면 항상 이리로 들어와요. 의병들이 들어와 정월 초하룻날 큰 교전이 벌어졌는데 아무런 기록이 없어. 의병 대장이 누구인지 사상자가 몇 명인지도 남아있지 않아. 거창성에서 온 의병들이라고 하는데... 눈 내린 이곳으로 올라와 설을 쇠려고 섣달 그믐날 들어왔는데 왜병들이 승려로 가장해서 따라온 거야. 거의 다 죽고 몇 사람 못 살아났어. 저쪽에 왕릉 만한 의병 무덤이 있었는데 이제 흔적도 없어졌어. 진실규명위원회에서 일본에 가서 조사해보니, 여기서 14명인가 사살됐다는 기록이 있었다더군.
- 여순 반란 때도 여기 계셨나요?
그럼. 열여덟 살이었지. 제일 큰 첫 전쟁을 여기서 치렀어. 3개 대대가 여수에서 순천으로 해서 올라와 경찰 병력과 섬진강에서 대치를 했어. 나는 어려서 군인들 심부름을 했지. 마을에서 밥을 해서 전쟁 하는 반야봉으로 지고 올랐지. 멸치, 갈치같은 걸 조려가지고 말야. 올라가보니 전나무에다가 속옷을 주렁주렁 걸어놓고 추우니까 불을 쬐고 앉았더군. 그게 전쟁이야. 그때 14연대 월남 중대장이 여기서 죽었잖아. 저쪽 공원 돌 앞에 묘지가 있지. 24살이라던데, 참 잘생긴 사람이었지. 키가 6척 장신이고 얼굴이 둥글둥글하고 빨간 개목걸이 이런 걸 딱 해가지고는...술을 많이 먹고 술바람에 총질하다가 죽었어.
- 6.25 때는 어땠나요?
빨치산 동부지구 한 부대가 저쪽을 넘어오다가 전투를 벌였는데, 그 부대가 절단이 났지. 그때 조금 더 했으면 이현상이도 그때 죽었을 거야. 5분만 더 교전했으면... 내가 제일 자랑하는 건 10년 간을 전란 속에 살아도 이념이나 사상에 휩쓸려가서 인생 망한 일이 없다는 거야. 마을 이장 하다가 저 사람들한테 잡혀가서 죽고, 향토 방위 전쟁하다가 쌍계사 다리에서 죽고, 반장하다가 밥 지어줬다고 죽었지. 세 사람이 희생됐어.

#14 이현상이 떠오르는 밤
체 게바라 같다고 했다가, 아니 피델 카스트로를 더 닮았다고 말했는데, 그는 고개를 흔들며 이현상을 닮지 않았느냐고 말한다. 지리산은 그냥 지리산이 아니라 산태골 뒤쪽으로 이현상의 피를 들이킨 산이며, 섬진강은 그냥 섬진강이 아니라 송림 곁 젖은 사구로 이현상의 뼈를 갈아마신 강이다.
이곳을 몇번 들락이면서, 혁명을 배태하는 토양이나 산세(山勢)에 관한 생각들을 하게 된다. 공기의 문제이며, 바람의 문제이다. 꿈꾸기의 문제이며, 생각하기의 문제이다. 온도의 문제이며, 시야의 문제이다. 그런 생각들을 하게 된다.
어쩌면 현실과의 온도 차이, 머리가 가슴을 데워 마침내 임계치에 이르러 터져버린 꽃의 발화점같은 같은 것일까. 100년도 더 지난 시간의 남부군 총사령관은 지리산 국립공원 연하천 대피소를 지킨다. 장총 대신 등산 지팡이를 짚고 눈보라치는 세상에서 피난 내려온 사람들을 보듬는다.
혁명이 이토록 지지부진해지고 희멀금해진 것은 시절 탓이 아니라, 혁명의 방법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B급 좌파나 겉멋 진보가 생겨나는 것도 생태적인 원인이 왜 없겠는가. 이현상이 왔어도 그때처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땅의 진보가 '환경 문제'를 진지로 삼는 것은 산 속에 갇히고 강과 바다 위로 떠밀렸기 때문일까. 어쩌면 그게 마지막 진지이니까.
발언의 기회를 빼앗겼을 뿐 아니라 마음을 사로잡는, 할 말이 없다는 것. 대중의 심장을 뛰게하는 언어를 잃어버렸다는 것. 지리산에 깊이 앉아 진인(眞人)의 도래를 믿는 까닭은 자신에게 열쇠가 없다고 믿기 때문일까.
70년대 80년대 노래들 속에서만 혁명이 가쁜 숨을 쉬고 있다는 생각이 밤을 쓸쓸하게 한다. 하동에서.
#15 섬진강변, 한 여자가 온다
멀리, 한 여자 온다
섬진강 허리 틀며 이슬비 맞는 날
잊었던 장면처럼 한 여자 온다
강가를 걸으면 잊었던 것들 다 생각난다
끊긴 필름 이어지면서 그저 서럽던 이유
섬진강처럼 죄 풀린다
느릿느릿 연착한 첫사랑
멀리, 한 여자 걸어온다
나뭇잎 길 위에 팔랑이며
젖은 생각 하나 닥쳐온다
어찌 하여 이토록 붉어졌느냐
취하지 않으면
지나갈 수 없는 길이었느냐
어질어질 돌아가는 오후
진메 들녘 처음 떨어진 나뭇잎 하나,
여자 하나가 세상의 길이다
이빈섬 '가을길'

더뷰스 하동 탐사취재 빈섬 이상국 isomis@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