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택동(毛澤東)이 주은래(周恩來)를 끝까지 타도하지 못한 이유는...?.

 모택동(毛澤東)이 주은래(周恩來)를 끝까지 타도하지 못한 이유는...?.


글: 만윤남(萬潤南), <청화세월(淸華歲月)>

['육사흑수(六四黑手)'중 한명으로 칭해지는 전 쓰통공사(四通公司) 총경리 만윤남은 문혁기간 청화대학에서 공부했고, 그 동안 그는 3차례에 걸쳐 청화대학 캠퍼스에서 그리고 천안문광장에서 주은래와 근거리에서 접촉한 바 있다. 이 세 차례의 관찰을 통해, 만윤남은 주은래에게서 그가 여러 해동안 모택동에게 타도당하지 않은 진정한 원인을 찾아냈다. 아래 글을 만윤남의 회고록 <청화세월(清華歲月)>에서 발췌한 것이다]

나는 정식으로 군대에도 들어가고, 공청단에도 들어가고, 당에도 입당했다. 다만 나는 정식으로 홍위병(紅衛兵)에 가담한 적은 없다. 첫째는 나의 출신이 그다지 좋지 못해서이고, 둘째는 문혁이 시작되자 나는 혁명군중에 의해 "소파충(小爬蟲)"으로 규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문혁초기의 일들을 나는 그저 작벽상관(作壁上觀)할 수밖에 없었다.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주변으로 밀려나 있었던 것이다. 다만 먼 곳에서 보면, 어떤 때는 그 안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욱 잘 보이는 법이다. 예를 들어, 그때 중앙지도자들은 모두 대학으로 와서 강연을 했다. 청화대학에 온 사람은 주은래(周恩來, 저우언라이), 박일파(薄一波, 보이보)같은 '노관료(老官僚)'들이었다. 북경대학으로 간 사람은 강청(江靑), 진백달(陳伯達)같은 문혁신귀족들이었다. 

이것이 모택동의 안배인가? 아니면 각자의 시험인가? 아니면 불문의 묵계였을까? 명백한 업무분장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인가? 아니면 취향이 맞아서일까? 거기에는 분명 어떤 비밀이 숨어있을 것이다. 듣기로, 1966년 7월 30일부터 8월 22일까지 1달도 되지 않는 기간내에, 주은래는 전후로 20여차례에 걸쳐 청화대학의 사생대표(師生代表)를 접견했고, 4차례에 걸쳐 직접 청화대학으로 가서 회의에 참가했다. 내가 참가하고 기억하는 것은 주은래가 두 차례 학교의 동쪽 대운동장에서 소집한 대회에서의 강연이다. 한번은 1966년 8월 4일이고, 다른 한번은 1966년 8월 22일이다. 중간에 8월 18일 위대한 지도자는 천안문에서 최초로 홍위병을 접견했고, 주은래는 현장에서 지휘를 했다. 이 3차례에 나는 모두 그 자리에 있었고, 근거리에서 주은래를 관찰할 기회를 얻었다.

문혁의 전과정에서, 나는 주은래에 대해 경의(敬意)가 충만하다. 또한 아주 자연스럽게 문혁신귀족에 대하여는 적의(敵意)가 충만하다. 내 생각에 이는 당시 청화대학 상당한 사생들의 잠재의식이었을 것이다. 모택동은 이런 점까지 아주 세밀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그렇게 안배했던 것일가? 모택동은 문혁후기에 사인방에게 이렇게 경고한 바 있다: "반주필란(反周必亂, 주은래를 반대하면 반드시 혼란이 올 것이다)". 이를 보면, 모택동은 민심을 잘 파악하고 있었고, 민의를 조종(操縱)하는데 아주 정교했다. 그래서 그가 모택동인 것이다.

8월 4일의 일을 얘기해보자. 주은래는 소매가 짧은 흰색 와이셔츠를 입고, 청화대학으로 와서 군중대회에 참가했다. 함께 온 사람은 동필무(董必武), 등소평(鄧小平), 이부춘(李富春)이었다. 대회에 참가한 사람은 청화대학의 교수, 학생, 직원이었고, 그외에 외지에서 북경으로 온 교수, 학생들도 있었다. 총인원수는 만명이 넘었다. 주은래의 보통화는 약간 소북(蘇北, 강소북부) 사투리가 있었고, 오른쪽 팔을 들고, 힘을 주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우며, 풍도(風度)가 있었다. 연설을 시작하자마자, 바로 중앙, 당중앙의 상무위원회와 모주석이 그로 하여금 청화대학의 문화대혁명에 인사를 전했다고 말한다. 그후 청화대학은 공작조가 학교에 들어온지 23일동안 발생한 크고 작은 일들을 하나하나 설명했다. 원고를 보지 않고 모두 기억에 의존하여 말했는데, 정확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감탄해 마지 않을 수 없었다. 대국의 총리는 머리 속에 얼마나 많은 일들을 담고 있을까! 주은래는 발언에서 공작조를 파견한 것은 방향성의 착오를 범한 것이라고 인정했다. 잘못은 투비개(鬪批改, 투쟁, 비판, 개혁)를 하지 않고, 군중이 군중과 투쟁하도록 도발했다는 것이다. 이는 노괴(老蒯, 청화대학 홍위병지도자 蒯大富를 가리킴)에 대한 초보적인 면책(免責)을 준 것이다. 초보적이라고 하는 것은 대회에서 괴대부의 발언도 준비되어 있었지만, 반괴대부파의 발언도 역시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반괴대부파의 대표는 한 여학생이었다. 그녀가 사용한 말은 매우 과장되었다. 그녀는 발언중에 괴대부가 "우리의 폐까지 화가 나서 터지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나중에 이 말은 청화대학캠퍼스에서 유행어로 된다. 우리는 매번 기분나쁜 일을 당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나의 폐가 화가 나서 터졌다"고 말하곤 했다. 나중에 나의 폐는 화가 나서 몇 차례나 터지긴 했다. 그날 등소평도 발언을 했다. 분명하면서 부드러운 사천사투리이다. 말을 많이 하지는 않았고, 한가지 뜻을 담고 있었다: 모주석이 여러분을 배불리 먹이면서 공부를 하지 말라고 했다. 뭘 해야 하는가. 바로 문화대혁명을 해야 한다.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동필무의 발언이었다. 동필무는 공산당의 창당원로(創黨元老)이고, 당시 국가부주석이었다. 당시 나이가 팔십여세였다. 목소리는 이미 떨리고 약했다. 그러나 발언은 실질적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왜 문화대혁명을 해야 하는가? 이 문제는 우리도 잘 알지 못한다. 다만 주석이 해야 한다고 하면, 우리는 해야 한다. 역사의 경험은 증명한다. 주석은 우리보다 높은 곳에 서서, 더 멀리 보고 있다. 새로운 사물을 만나서, 우리가 돌연 생각해서 말하는 것은 자주 잘못일 경우가 많다. 주석이 말한대로 하면, 나중에 모두 정확하다고 증명되었다. 당시에는 비록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중에는 이해할 수 있다." 아...동필무는 나중에 문혁에 대해 이해했을지 모르겠다!

8월 18일의 그 날, 모택동은 천안문에서 최초로 홍위병을 접견한다. 청화대학의 학생들은 금수교(金水橋) 옆에 있었고, 천안문성루와 매우 가까웠다. 그 위의 인물, 동작을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나는 주위의 광열(狂熱)에 전염되지 않고, 차가운 눈으로 방관했다. 그리고 나는 상당히 재미있는 장면들을 볼 수 있었다. 두 가지 장면이 나에게 아주 선명하게 기억된다. 하나는 그들이 등장하는 장면이다. 금방 8기11중전회를 개최했기 때문에, 중앙지도자의 서열(序列)에 변화가 있었다. 가장 큰 변화는 임표(林彪)가 서열2위로 올라가고, 유소기(劉少奇)가 서열7위로 내려간 것이다. 등장장면은 이런 변화를 반영했다. 모택동은 파천황(破天荒)격으로 군복을 입었고, 배를 내밀고 가장 앞서서 등장했으며, 마른 몸매의 임표가 그 뒤를 따랐다. 모택동의 발걸음은 매우 느릿했고, 임표의 발걸음은 매우 서둘렀다. 나중에 나는 다큐멘터리화면을 보고 다음과 같은 세부사항도 확인할 수 있었다: 임표는 잠깐 부주의하여 하마터면 모주석을 앞서갈 뻔했다. 그때 주은래가 손을 내밀어, 임표 군복의 뒤를 붙잡고, 힘을 주었다. 뒷목 칼라가지 꼿꼿이 설 정도여서 임표는 거의 비틀거린다. 모택동이 한 걸음을 더 나가자, 주은래는 비로소 손을 놓는다. 그후 임표는 스스로도 깨닫고 모주석과 한걸음 간격을 유지한다. 더욱 감탄할만한 일을 그 뒤에 일어난다. 이때 주은래는 발걸음을 멈춘다. 주은래는 움직이지 않았고, 그의 뒤에서 아무도 감히 추월하지 못한다. 모택동과 임표가 7, 8걸음 걸어나가고 나서 비로소 주은래는 뒤의 인원들을 이끌고 천천히 따라간다. 나는 마음 속으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은래라는 인물은 정말 대단하구나!

두번째 장면은 모택동이 홍위병에게 손을 흔드는 외에, 아주 긴 시간동안 유소기를 한쪽으로 데려가서 얘기를 나누었다. 두 사람의 몸의 동작을 보면, 친구 사이에 얘기를 나누는 것같았고, 마치 어머니가 자식에게 얘기하는 것같았고, 선생과 학생이 얘기를 나누는 것같았다. 주로 모택동이 얘기하고, 유소기는 듣고 있었다. 말하는 것으로 봐서는 인내심(忍耐心)을 가지고 성심껏 하는 것처럼 보였으며, 듣는 사람은 마음을 비우고 겸허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도대체 무슨 말을 했는지 호기심이 일었다. 나중에 유소기 가족으로부터 들은 바에 따르면, 모택동은 유소기에게 사상공작을 했다고 한다. 모택동은 이렇게 말했다: "중앙에서 이렇게 큰 잘못(공작조를 파견한 잘못을 가리킴)을 저질렀는데, 어쨌든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느냐. 너는 현재 당을 위해 일하고 있으니, 돌아가서 광미(王光美, 유소기의 부인) 동지와 아이들에게 분명하게 말해줘라. 이것때문에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다. 대충 위로하는 내용이었고, 마음을 편하게 가지라는 말이었다. 유소기는 그의 말을 진심으로 생각했다. 유소기도 잔혹한 당내투쟁을 거친 사람이고, 지능도 낮지 않다. 그런데도 그는 모택동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났다. 진정 대단한 인물은 역시 모택동이라는 사람이다.

8월 22일 밤, 주은래는 다시 청화대학으로 와서 대회에 참가한다. 대회전에 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듣기로 일부 군중이 이미 입장했고, 주은래는 회색의 중산복(中山服)을 입고 있었는데, 비를 무릅쓰고 와서 회의에 참가했다. 간이로 만든 주석단에는 비를 막을 시설이 없었고, 주은래는 3시간동안 비를 맞았다. 그 동안 누군가 우산을 씌워주려고 했지만, 그는 끝까지 사양한다. 대회에 참석한 교수, 학생들과 동고동락(同苦同樂)하겠다는 것이다. 그때 대회장에서는 이런 고함이 나온다: "총리, 타산(打傘, 우산을 쓰십시오)!" "총리, 타산!" 그때 많은 사람들의 얼굴에는 빗물과 눈물이 섞여 있었다. 그날 밤, 주은래가 반복하여 말한 것은 사람은 계속하여 스스로를 되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죽을 때까지 일하고, 죽을 때까지 배우고, 죽을 때까지 개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교수학생에 대해 하는 말이었을까? 아니면 자기 내심의 독백(獨白)이었을까? 기실 이런 경우에 무엇을 말하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주은래가 사람들에게서 얻어낸 것은 바로 감정이었다.

8월 4일의 '박문강기(博聞强記)'부터, 8월 18일 주은래의 세밀함과 분촌(分寸, 행위나 말의 적당한 정도나 범위), 그리고 8월 22일 주은래가 목숨을 내걸고 사람들의 감정을 얻어내는 것까지. 이를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왜 모택동이 평생동안 진정 타도하지 못한 인물은 오직 주은래 한 사람뿐이었는지를...

주은래(周恩來): 장정(長征)이후 딴 사람이 되었다.

글: 온백릉(溫伯陵)

1) 눈을 감고 한번 상상해보자. 만일 당신이 이런 인생이력을 지녔다면 니래에 대해 어떤 기대를 가지겠는가?

당신이 관료집안에서 태어났고, 조부와 외조부는 모두 현장(縣長)을 지냈으며, 착실한 부친도 공무원을 지냈으며, 급여는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일가족을 먹여살릴 만했다. 이런 집안환경에서, 당신에게 많은 재산을 물려줄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좋은 가풍과 개척적인 안목(眼目) 그리고 다른 사람들보다 못하지 않다는 자신감은 줄 수 있을 것이다.

가정여건으로 보면 출발선부터 남들보다는 앞섰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어렸을 때, 조부와 외조부가 사망하면서 가정이 몰락(沒落)하였지만, 개인능력은 여전히 우수하고, 다른 성으로 가서 소학교를 다닐 때에도 선생님에게 인정을 받았다. 선생님은 이렇게 감탄했다: "가르친시 수십년이 되었지만, 이렇게 뛰어난 학생은 본 적이 없다. 내가 좀더 심혈을 기울여서 가르쳐야 겠다. 구심역혈(嘔心瀝血)도 마다하지 않겠다."

당신은 은사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아, 16살에 명문고등학교에 입학했고, 학교장은 "재상지재(宰相之才)"라고 인정했다. 그리고 자주 당신을 집에 초대해서 식사했고, 아직 학생인 당신과 국가대사를 논의했다.

만일 당나라때였다면, 이런 사람은 "신동(神童)"으로 불렸을 것이다. 당신은 계속하여 노력했고, 20살에 출국유학한다. 비록 그 어느 대학의 졸업장도 받지 못했지만, 일본, 프랑스, 독일, 영국등 세계선진국을 구경했고, 각국의 풍토인정(風土人情)을 아주 깊이 이해했다. 경력은 같은 나이의 청년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부했다.

유학기간, 당신은 친구들과 하나의 이념을 믿었고, 이념을 추구하는 조직을 만든다. 이때 국내에도 동일한 유형의 조직이 성립되었다. 당신은 금방 친구들을 설득하여 국내의 조직과 연락하여 그 하급기구가 된다. 이 일로 인하여, 당신은 국내대형조직의 창시자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무수한 동지들을 갖게 되었으며 사업에는 더욱 큰 발전공간이 생겼다.

조직을 창립하는 동시에, 당신은 독일에서 전쟁터를 근 10년간 누빈 장군을 만난다. 그는 이상을 추구하기 위하여 당신을 찾아왔고, 당신들은 막역지교를 맺고, 평생 우의를 유지한다.

현재로 보면 대학을 졸업할 나이에 삼교구류의 사람들과 교류했으며, 인격적인 매력은 말할 것도 없고, 청년중의 준걸이었다.

유협이 활동하던 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라면, 강호를 떠돌아다니는 조조, 조적(祖逖), 유곤(劉琨)같은 인물이다. 그들은 젊은 나이에 성취를 이루었고, 금방 조정에 들어가 관료가 되었다. 그러나 당신은 은사의 추천으로 귀국했고, 광주의 한 사관학교로 가서 지도자중 한명이 된다. 장군의 계급을 수여받고, 휘하에는 전국에서 몰려든 우수한 청년들이 있었다. 이때의 당신은 겨우 27살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하루 세끼를 걱정할 때, 당신은 이미 부족한 것이 없었다. 조직, 사휘적 지위, 신앙, 업무 그리고 애정까지 당신은 모든 것을 가졌다.

너무나 신기하다. 마치 소설속의 남자주인공같다. 좋다. 지금 눈을 떠서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이런 인생이력에 대하여 자신과 닮았다고 여기는가?

만일 닮았다고 여기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이런 것은 보통사람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직 한명의 전설적인 인물에게 속하는 것이다: 주은래(周恩來) 그를 식사에 초대했던 교장은 장백령(張伯苓)이다. 그가 참여하여 조직한 것은 중국공산당(中國共産黨)이고, 평생 교분을 맺은 장군은 주덕(朱德)이다. 그가 귀국하여 재직한 사관학교는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이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다. 이때의 주은래는 자신만만했다. 특히 풍운이 격탕하는 시대에 자신의 사업을 개창하고, 자신의 포부를 실현하고자 했다.

만일 당신이라면, 아마 매우 자신이 넘쳤을 것이다. 일종의 "하늘이 나에게 큰 임무를 맡겼다"는 사명감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운명은 롤러코스트와 같다. 주은래에게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강대한 것을 주었지만, 그에게 연이은 실패도 맛보게 했다. 운명은 정상에서 심하게 나락으로 떨어져버린다. 이런 실패가 청년인재 주은래에게 준 타격은 세상사람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컸다.

2) 주은래의 첫번째 중대한 실패는 남창의거이다. 1927년 4월, 장개석이 혁명을 배신하고, 공산당원과 국민당좌파를 도륙하기 시작했다. 그후 영미열강을 배경으로 삼아, 강소절강재벌과 힘을 합쳐 남경매판정부를 조직한다.

당은 생존을 위하여, 그리고 혁명을 위하여, 섭정, 하룡의 2만부대를 기초로, 남창에서 무장의거를 일으킨다. 주은래는 전적위원회서기(前敵委員會書記)로 의거의 모든 사정을 지휘했다.

8월 1일 새벽, 남창의거가 발발한다.

격전은 날이 밝을 때까지 이어지고, 의거부대는 이미 수비군 3000여명을 섬멸했고, 탄약 70만발, 각종 총기 5000여점을 노획했다. 대승을 거두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때, 주은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은 의거가 기본적으로 성공했다고 여긴다. 이후 무슨 큰 파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았다. 그리고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남창을 떠나 광동으로 진군하여, 바다로 나갈 항구를 확보한 다음 소련의 원조를 받고, 그후 실력을 키워 제2차북벌을 진행하고자 했다.

다만 얼마후 그들은 알았다. 의거가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남창성을 떠나자 의거부대는 고립된다. 기본적으로 안정된 후방의 보급이 없었다. 천리행군이 의미하는 것은 우군의 협조가 없어 언제든지 적군의 기습에 노출된다는 것이다.

1달도 되지 않아, 남창의거부대는 병력과 장군을 잃어 군심에 동요가 일어날 정도였다. 많은 사람은 부대를 떠나 다른 살길을 찾아갔다.

주은래는 부득이 삼하파(三河壩)에서 부대를 나누어야 했다. 주덕에게 4000명을 남겨주어 그들에게 후방을 막도록 하여, 주력부대가 도망칠 시간적 여유를 벌려고 했다.

그러나, 주력부대도 실패한다.

10월 3일, 주은래는 남창의거후 마지막 회의를 주재한다. 그는 의거실패원인을 검토한다. 전술실수, 정보소홀, 경적 등등.

한 마디로 하자면 의가에 실패한 것이다.

섭정은 말했다. 앞으로 유구(流寇, 떠도는 도적)이 되자. 뭐 할 말이 있는가. 하룡이 직접 데려온 부대도 없어졌으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는 안하겠다고 하면서 상서(湘西)로 돌아가 권토중래를 노리겠다고 한다.

그런데, 회의를 끝내기도 전에 적군이 들이닥쳤고, 회의장은 혼란에 빠진다. 주은래와 섭정, 섭영진(聶榮臻)은 포위망을 돌파했고, 도중에 산두지위서기(汕頭地委書記) 양석혼(楊石魂)을 만났고, 겨우 작은 배 하나를 타고 홍콩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섭영진은 밧줄로 돛대에 매달려 있어서 바다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이를 보면 항해가 얼마나 위험했는지 알 수 있다. 이때의 주은래는 고열에 시달리며 혼미상태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섭정과 섭영진이 들어서 홍콩까지 갔다.

왜 고열에 시달렸을까? 주로 두 가지 원인이다. 하나는 연속된 급행군으로 먹고 마시고 자는 것을 제대로 하지 못했으니, 무쇠로 만든 몸이라고 해도 버티기 힘들었다.

둘은 실패로 인한 심리적 타격이 너무 컸다. 당당한 2만대군이 두 달도 되지 않아 겨우 3명만 남았다. 의거의 최고지도자였던 주은래로서는 심리적으로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혁명을 성공시켜 전중국을 해방하겠다고 말했지만, 현재 수만명이 부추베이듯이 죽어버렸다. 그는 어떻게 그들의 열혈에 보답하고, 어떻게 수만의 남편과 자식을 잃은 가정에 얘기할 것인가.

그리고 남창의거는 당의 중요행동이었는데, 자신의 손으로 실패했으니 이후 혁명사업을 어떻게 진행한단 말인가?이런 문제는 모두 주은래를 괴롭힌 날카로운 칼날이었다.

남창의거의 실패는 주은래로 하여금 스스로에게 묻게 만들었다: 나는 도대체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주은래는 중국의 손가락에 꼽히는 청년인재였다. 한번의 실패로 그의 의지가 꺾이지는 않았다. 홍콩에서 몸을 추스린 후 주은래는 상하이로 돌아가서, 당중앙의 일상업무를 주재한다.

한번 실패했을 뿐이다. 다시 시작하자. 1928년 4월, 주은래는 모스크바로 가서 "6차당대회"에 참석하고, 정치국상위로 당선된다.

정치국주석 향충발(向忠發)은 거친 사람이고, 노동자신분때문에 소련이 그를 고른 것이다. 그는 중앙의 업무를 주재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 그리하여 연말에 귀국한 후, 주은래가 당중앙의 실질적인 책임자가 된다.

그후 1년반동안이 주은래가 당내에서 가장 지위가 높았을 때이다. 그는 북방을 영도하는 순직성위(順直省委)를 재건하고, 섭영진과 하창(賀昌)을 보내어 순직의 업무를 주관하게 한다. 그리고 정강산의 홍사군에게 "구월래신"을 보내어, 모택동의 농촌포위도시와 유격전사상에 긍정적인 입장을 표시한다. 그리고 다른 근거지에 인원을 파견하여 당의 영도를 확립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주은래는 상하이에서 전국의 혁명국면을 총괄했다.

상하이에서, 그는 그 유명한 중앙특과(中央特科)를 조직한다. 중앙특과(中央特科)는 비밀부서이고, 비선업무를 했으며, 공개적으로 하기 힘든 일을 처리했다. 그 아래에는 4개의 과가 설치되어 있었다:

물자조달을 책임지는 총무과.
정보수집과 반간첩업무를 하는 정보과
동지를 구해내고 반도를 정리하는 행동과
무선전신을 당담하는 교통과

소련에서 귀국한 이후, 향충발, 주은래와 고순장(顧順章)은 특별위원회를 조직하여 공동으로 중앙특과를 영도한다. 다만 향충발은 이름만 걸려 있었고, 고순장은 명령을 받아 집행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중앙특과의 최고책임자는 주은래였다.

그가 가장 믿었던 것은 진갱(陳賡)이 과장으로 있는 정보과와 고순장이 과장으로 있는 행동과였다.

한명은 정보를 책임지고, 한명은 암살(暗殺)을 책임졌다. 이들이 천의무봉으로 협력하면서 중앙특과는 상하이에서 신속히 성과를 내기 시작한다.

중앙특과의 실력을 바탕으로, 주은래는 중앙기관을 영도하고, 상하이에서 자리잡아, 전국의 혁명운동을 지휘할 수 있었다.

바로 이것 때문에, 1930년초의 이입삼(李立三)의 턀권과 1931년 왕명(王明)의 탈권에서도 모두 혁명업무를 처리하려면 주은래를 필요로 했다.

방법이 없었다. 주은래가 없으면 그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만 혁명형세가 좋았을 때인 1931년 4월, 고순장은 장국도(張國濤)를 악예환(鄂豫皖)으로 보내준 후, 국민당특무에 체포된다. 그리고 금방 배신하여 국민당에 모든 비밀을 털어놓는다. 이어서 향충발도 체포된 후 배신한다.

상하이의 중앙기관은 이제 비밀이랄 것도 없게 된다. 모든 사람의 생명이 위협을 받는 상황이다. 중앙은 계속하여 상하이에 머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누어 이전해야 한다. 같은 해 왕명은 모스크바로 가서 코민테른대표가 된다. 남은 박고(博古)등이 그의 명령을 집행했다. 연말 주은래는 소비에트구로 들어가 소비에트구중앙국의 업무를 주재한다. 다시 1년반이 지나, 임시중앙은 철저히 상하이를 떠나, 중앙소비에트구로 옮겨간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아주 큰 타격이었다. 고순장은 그의 오른팔이었다. 그런데 아무런 망설임없이 배신해버린 것이다. 다른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없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것인가. 상하이의 중앙기관이 무너진 것에 내가 가장 큰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주은래를 괴롭힌 두번째 날카로운 칼날이었다.

남창의거실패후, 상하이공작도 실패했다. 도대에 무엇때문인가? 이 일련의 문제가 주은래의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혁명의 형세는 그에게 너무나 많은 반성의 시간을 주었다. 중앙소비에트구로 들어간 주은래는 다시 해보고 싶었다. 자신의 방식으로 중국혁명에 공헌하고 싶었다.

그는 항영(項英)을 대신하여 소비에트구중앙국서기가 되고, 중앙소비에트구의 최고지도자가 된다. 그는 모택동을 주변으로 밀어내는데 동의하지 않았고, 임시중앙에서 모택동을 비판할 때, 그는 일어나서 모택동의 편을 들었다.

심지어 "영도회의(寧都會議)"에서 모택동을 정식으로 비판할 때, 그는 "온화유한"한 비판을 하여 여지를 남겼다.

이렇게 한 이유는 그가 기실 소비에트구창시자의 위망을 깍아내리고, 자신을 중심으로 주덕, 모택동등의 도움을 받고자 했기 때문이다. 내생각에 이것이 주은래의 중앙소비에트구에서의 업무계획이었다.

나중에 이 계획도 실패한다.

1933년 1월, 임시중앙이 소비에트구로 옮겨온다. 소비에트구중앙국과 임시중앙이 합쳐져서 직접 소비에트구의 모든 업무를 지휘한다.

주은래의 소비에트구중앙구서기직도 취소된다.

박고는 군사를 몰라서, 이덕(李德)을 군사고문으로 임명하여, 홍군을 지휘하는 작전행동의 전권을 준다. 나중에 다시 군사위원회를 설립하지만 항영을 주석으로 임명한다.

총정위(總政委) 주은래와 총사령(總司令) 주덕(朱德)은 의사결정권을 잃었고, 집행권만 갖게 된다.

주은래는 정치국상위였기 때문에 그는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최고집행자가 된다. 실적을 내면 임시중앙이 영도를 잘한 것이 되고, 실패를 하게 되면 주은래가 집행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되니, 지위가 너무 난감하게 되어버렸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임시중앙은 실적을 내지 못했다는 것을.

소비에트구로 옮겨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장개석의 "제5차위초(圍剿)"를 당하게 된다. 전문성이 없는 이덕이 마구잡이로 지휘했고, 박고는 생각이 없었다. 이덕이 하자는대로 했다.

모택동이 후방으로 돌아갔을 때, 전방에서 전보가 오면 바로 달려오겠다고 했는데, 명쳔간 아무도 그를 부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중앙소비에트구가 붕괴된다. 8.6만명의 홍군은 기나긴 장정의 길에 오르게 된다.

상강전투이후, 8.6만명의 홍군은 겨우 3만명만 남는다. 당시의 중앙지도자들의 심리상태는 이미 붕괴되어 있었다.

중국혁명가들을 항상 무시하던 이덕은 기운이 빠져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박고는 자주 권총을 꺼내 머리에 대며 자살연습을 했다. 그래도 섭영진에 그에게 총으로 장난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여, 박고는 방아쇠를 당기지 않을 수 있었다.

주은래는 유사한 이야기를 남기지 않았다. 그건 그의 수양이 뛰어나기 때문이지, 그가 대범하여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닌 걸로 여겨서는 아니다.

어쨌든 수만명의 목숨이 걸려 있고, 천만인구의 근거지가 사라지는 것이다. 의사결정에 참여한 최고집행자로서 주은래는 아마도 심리적 부담이 없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에 세번째 날카로운 칼날이다. 그리고 이는 주은래의 의지를 철저히 꺾어버린다.

3) 주은래는 처음부터 엄마친구아들이었다. 동시에에 발군이었고, 전체 중국을 놓고 보더라도 그만큼 우수한 사람을 찾기 힘들 정도이다.

업무를 시작한 후, 주은래는 큰 뜻이 있었다. 중국혁명에 길을 찾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길에서 자신의 사업을 세우고,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자신의 동포에게 좋은 일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남창의거(南昌義擧)때 주은래는 지휘를 마다하지 않았고, 상하이에서 전국혁명을 지휘할 때도 매우 자신있었따. 소비에크구로 들어아 창시자모택동을 그의 조수로 삼았다.

그는 굳게 믿었다. 자신의 선택이 옳은 것이라고. 그러나 그의 선택은 모두 실패했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결국 실패로 끝난 것이다.

이 일련의 실패는 다른 사람에 있어서는 그저 업무를 바꾼 것뿐이지만, 주은래같은 인물에게 실패는 자신의 생각을 부정하는 것이고, 더더구나 자신이 여러 해동안 쌓아온 자신감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판타지소설의 세계관으로 말하자면 맨붕이 온 것이다. 앞의 길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주은래가 주재한 업무가 왜 실패했는지, 그러나 모택동은 잘 알고 있었다.

1957년, 모택동(毛澤東)은 후르시쵸프와 얘기할 때, 국가주석의 직위를 내려놓겠다고 말한다. 후르시쵸프가 후계자가 있는지 물어보자, 모택동은 몇몇 당내동지를 거명한다.

첫번째는 유소기(劉少奇)이다. 정치적으로 원칙을 견지하지만 신축성이 없다고 했다. 두번째는 등소평인데, 원칙성과 신축성을 겸비하고 있어 발전전망이 좋다고 말한다. 세번째는 주은래(周恩來)인데 각종 복잡한 갈등을 잘 처리하는데, 약점은 호인(好人)이라는 것이다. 네번째는 주덕인데 덕망이 높지만, 나이가 너무 많다고 했다.

모택동은 "호인(好人)"이라는 한 마디로 주은래를 평가했다.

주은래의 일생의 공적을 보면, 그는 확실히 호인이다.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고, 함께 고통을 견디며,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한다. 국가와 인민체 충성한다. 이런 중국에서의 미사여구는 모두 주은래에게 붙여도 부끄럽지 않다.

그러나 지도자로서, 특히 최고지도자로서, 왕왕 보살심장에 벽력수단을 가져야 한다. 눈앞의 허명에 신경쓰지 않고, 그저 만세의 공업만을 생각해야 한다. 곤란을 만났을 때 회피하지 말고, 용감하게 일어나서 비바람에 맞서야 한다.

전통의미에서의 "호인"은 이런 일을 해낼 수 없다.

남창의거샐피로 2만명이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는데, 그는 홍콩으로 갔다. 분명히 코민테른과 생각이 달랐음에도 그는 반박하지 않았고, 그저 집행하면서 완벽하게 해내려 했다. 그는 임시중앙의 의사결정에 반대했지만. 기치를 선명하게 내걸고 반대하지 않았다.

정치라는 것은 영원히 극단(極端)이 더욱 흡인력이 있다. 중간에서 조화롭게 하려면 양쪽 모두에게 좋은 소리를 못듣는다.

기치선명하게 극단에 서는 것이 지도자이다.

중간에서 조화를 추구하는 "호인"은 그저 집행자가 될 수밖에 없다. 모택동은 주은래를 잘 알았다. 장정의 길에서 주은래도 자신을 잘 알게 되었다. 그는 내심으로 이런 생각을 한다: "나는 총사령관의 재목이 아니다."

수재(帥才, 총사령관재목)는 아니지만, 총사령관이 될 수 있는 사람을 선택할 수는 있는 사람이다. 그리하여 주은래는 여평회의(黎平會議)에서 모택동을 지지하여, 홍군을 지휘하여 귀수서부로 간다.

준의회의(遵義會議)에 이르러, 주은래는 박고, 이덕과 철저히 갈라서고, 심각한 자아비판을 한다. 그후 정치국상위의 신분으로 모택동을 지지하여 나서도록 한다. 비록 모택동의 신분은 "주은래의 조수"였지만, 사도적수(四渡赤水)"이후, 모택동과 주은래의 지위는 철저히 뒤바뀐다.

"사도적수"같이 소라껍질 속에서 돌고돌면서 싸우는 것같은 걸 주은래는 할 수 없다. 조수가 할 수 있는데, 총사령관은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조수가 총사령관이 되고, 총사령관이 조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현재의 사람들이 당사를 읽으면 그저 주은래가 준의회의때 손을 들어준 것만 본다. 그러나 그렇게 뛰어난 사람이 왜 거기에 앉아서 손을 들었을까는 생각하지 못한다.

3차례의 중대한 실패는 주은래의 자신감을 완전히 꺾어버렸다. 그후 폐허위에서 주은래는 열반부활한 것이다. 진실한 자신을 새롭게 만들어갔다.

만일 모택동이 천생천재라면 나 주은래는 그냥 보통사람이다.

학교에서 항상 천하를 내려가보던 영웅도 사회에 나가서 얻어터진 후에 자신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듯이, 그리고 새로운 인생단계를 걸으면서 자신의 능력이 미치는 범위내에서 최대한 일을 벌이듯이. 장정은 모택동성장의 연옥로(炼狱路)이고, 주은래에게는 부활의 열반로(涅槃路)였다.

4) 장정은 주은래가 자신을 새로 수립하는 기점이 된다. 그러나 자신을 어떤 모양으로 만들 것인지, 이후의 인생에서 어떤 포지셔닝을 할 지는 그도 몰랐다.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한 대답을 얻으려면 주은래도 시간이 필요했다. 그가 생각을 끝낸 것은 마땅히 1940년일 것이다. 그때의 주은래는 "서안사변"을 겪었고, 국공통일전선의 이견을 겪었으며, 모택동의 <논지구전>도 읽었고, 항일근거지의 번영도 직접 목호하고, 소련으로 가서 부상치료도 근 1년동안 했다.

아마도 이 해에, 그는 중국의 번잡한 업무에서 벗어나 개인문제를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인생포지셔닝을 모택동을 보좌하는 "재상"으로 자리잡은 것같다.

소년웅싱(少年雄), 천지교자(天池轎子)는 다 버렸다. 허황한 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다. 현실을 직시해야 혁명이 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리고 개인의 작은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모택동에게 방법이 있으면, 모택동을 보좌하는 것이 맞지 않은가.

1940년, 소련에거 귀국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은래는 중경으로 가서 일을 한다. 그가 인원을 데리고 남하할 때, 섬서남쪽을 지나면서, 주은래는 운전기사에게 차를 멈추게 하고, 인원들에게 함께 가서 유적을 구경하자고 한다.

그 인원들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런 시골에 무슨 볼만한 유적이 있단 말인가? 주은래도 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혼잣말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유후(留侯)가 영예리록(榮譽利祿)을 모두 버리고, 말년에 이곳에 은거했었다." 인원들은 그제서야 알았다. 이곳이 바로 유후묘(留侯廟)라는 것을.

유후는 한나라초기의 장량(張良)을 가리킨다. "운주유악지중(運籌帷幄之中), 결책천리지외(決策千里之外)"의 조사이다. 그는 전쟁터에서 싸우는 대장이 아니고, 진나라를 멸하고 항우를 멸한 지도자도 아니다. 그는 한고조 유방의 모사이다.

매번 유방이 잘못을 저지르거나 어떻게 해야할지 모를 때, 장량이 앞장서서 유방에게 국면을 분석해주고, 괜찮은 건의를 내놓아, 유방으로 하여금 선택할 수 있게 했다.

마지막으로 유방은 장량의 계책을 써서 천군만마를 지휘하여 천하를 얻었다. 그리고 사백년대한왕조를 열었다. 장량은 유방을 매개로 하여 자신의 공업을 이루었고, 살아서 그리고 죽어서 명성을 남긴다.

주은래는 장량을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수재(帥才)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수재가 아니라는 것을 얘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더 이상 분명하게 얘기할 수 없다.

주은래는 특별히 유후묘를 찾아가서, 장량의 상과 패위를 보고 아마 자신과 같은 유형의 인물이라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이천년의 시공을 넘어서.

유후묘에서 나온 다음, 주은래는 인원을 이끌고 다시 소하가 한신을 추격한 유적지를 본다. 비록 진짜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주은래는 고고학자가 아니고, 그저 옛 고사를 되새긴 것일 뿐이다.

한초삼걸이 유방을 보좌하여 대한왕조를 열었다. 장량과 소하가 각각 한 자리를 차지한다. 한명은 기획을 한 명은 집행을 책임진 것이다.

현재 주은래가 회의에서 계책을 내고, 국면을 붆석하는 것은 가능하고, 강력한 집행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마치 장량과 소하를 합쳐놓은 것같다.

소하와 장량은 2천년전의 주은래이고, 주은래는 2천년후의 소하와 장량이다. 이렇게 하여 주은래의 열반부활은 완성되었다. 마치 봉황(피닉스)이 날개를 펴고 하늘에서 울부짖는 것처럼. 이제 모택동이라는 진룡을 보좌하여 사해를 뛰어다닐 것이다.

중경업무이후, 주은래는 성도로 간다. 그리고 제갈량의 무후사를 찾는다. 무후사의 관광객들 틈에 서서 주은래는 두보의 시를 읊었다:

승상사당하처심(丞相祠堂何處尋)
금관성외백삼삼(錦官城外柏森森)

그 국궁진췌 사이후이(鞠躬盡疩, 死而後已)의 제갈무후도 마찬가지로 제갈량이 그리워하는 인물이다.

5) 주은래가 사망한지 이미 수십년이 지났다.

그의 후반생은 업무가 장량과 소하의 결합체와 같았다. 한편으로 의사결정에 참여하고, 다른 한편으로 집행했다. 모택동과 서로 파트너가 되어 신중국을 건립하는데 큰 공을 세운다.

그의 인격과 유산은 그러나 제갈량과 더욱 유사하다. 죽은 후 아무런 재산도 남기지 않고, 사심없이 공헌한 것은 따로 말하지 않겠다. 여기에서는 한가지 작은 에피소드만 언급하기로 한다.

동진연간 환온(桓溫)이 촉을 정벌하러 갔다. 정벌을 마친 후, 환온은 성도에서 제갈량의 아래에서 하급관리로 있던 백세노인을 만난다. 그는 노인에게 물었다: 지금 누가 제갈승상과 비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그 사람이 대답한다: "제갈승상이 살아계실 때는 특별하다고 느끼지 못했는데, 돌아가시고 나니 그에 비견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은래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총리로 있을 때, 중국인들은 모두 국가총리와 간부는 마땅히 저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은래 총리가 죽은 후, 다시는 그런 총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런 간부도 본 적이 없다.

한 세대의 사람에게는 한 세대의 장정의 길이 있고, 한 사람에게는 한 사람의 장정의 길이 있다. 만일 주은래가 보통사람에게 무슨 유산을 남겼다면 그것은 마땅히 이러할 것이다: 이전의 노력을 배신하지 말고, 자신의 이상을 포기하지 말고, 좌절과 고난을 겪은 후에는 인생의 포지셔닝을 새로 하고, 자신의 장정의 길을 걸으면서 새로운 생명을 찾아서 살아라.

1963년 저우언라이(周恩來)와 장징궈(蔣經國)의 비밀회담

글: 촉인삼지안(蜀人三只眼)

저우언라이가 생전에 남해(南海)로 간 일이 있는가? 당시 국민당 지도자와 비밀리에 회담을 진행한 바 있는가? 국공양당의 회담내용은 무엇인가? 이 문제는 40여년이후에도 여전히 연구가 필요한 이슈이다.

1996년 1월, 홍콩의 <South China Morning Post(南華早報)>에는 돌연 중국대륙에서 온 뉴스가 실렸다. 그 글에 따르면: 1963년 겨울, 국공양당의 고위지도자가 중국 남해의 어느 섬에서, 절대기밀의 고위층 회담을 진행한 바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 비밀회담에 참가한 중국공산당의 지도자는 당시의 국무원 총리 저우언라이이고 수행인원은 2명이었다. 한 명은 당시 국방위원회 부주석, 전인대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이며 장제스 부자와 모두 인연이 있는 국민당 장군출신 장즈중(張治中) 선생이고, 또 다른 한 명은 국무원 대만판공실주임인 뤄칭창(羅靑長)이다. 국민당에서 참여한 사람은 장제스, 장징궈 부자중의 한 사람 혹은 두 사람이다.

곧이어 홍콩의 또 다른 잡지인 <개방>ㅡㄴ 1996년 4월호에서 "문시벽(文時碧)"이라는 이음으로 기고한 글이 발표되었다. 제목은 <저우언라이는 확실히 남해의 어느 섬에서 장징궈와 비빌회담을 했다>이다. 이 글은 저우언라이가 남해로 갔다는 것을 확인시켜주었을 뿐아니라, 국민당의 비밀회담 참가자가 장제스도 아니고 또 다른 국민당 원로인 천청(陳誠)도 아니며, 장제스(蔣介石)의 아들이자, 당시 국민당 '정치위원', 대만국방부 정전부 부주임을 맡고 있던 장징궈였다는 점을 밝혔다. 이 글에 따르면, 이 중요한 정보는 국공 쌍방에게 모두 핵심기밀이다. '문시벽'은 최소한 반년의 시간을 들여서 이를 취재했다. 그리고 '문시벽'의 글은 처음으로 저우언라이와 비밀회담을 한 국민당 인사가 장징궈라는 사실을 밝혔다. 또한 회담장소는 남해 동사군도(東沙群島)에 있는 동사도(東沙島)라고 밝혔다. 셋째로, 글에서는 처음으로 정보원이 북방의 군측인사인 펑쉬이(彭緖一)임을 밝혔다. '문시벽'의 글에 나오는 이 세 가지로 그녀는 저우언라이가 국민당인사과 비밀회담한 역사적 사건을 확인해주었고, 신뢰도가 아주 높았다.

저우언라이가 1963년 12월, 뤄칭창의 수행하에 남해함대사령관 우뤼린(吳瑞林)중자의 호위하에, 광저우에서 출발하여, 남해 모 섬으로 가서 국민당 주요지도자와 정치대화를 한 사실이 있는가에 대하여 1997년 마침내 추가로 확인이 이루어졌다.

1997년 겨울, 북경개혁출판사는 <가장 귀여운 사람>이라는 책을 출판한다. 이 책은 남해함대사령관 우뤼륀이 편찬한 기념문집이다. 이 기념문집에서, 특히 주목을 끄는 글이 있었다. 제목은 <그는 일찌기 저우총리의 항해를 호위한 바 있다 - 우뤼린동지의 두 세가지 일을 회고하다>이다. 이 글은 약 5천여자로, 작자는 바로 뤄칭창이다.

뤄칭창은 이 글에서 홍콩매체가 보도한 사실이 진실이라고 인정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1995년 설날, 나는 우뤼륀의 집으로 찾아가서 그를 만났다. 옛 전우를 만나니 특히 기뻤고, 서로 무릎을 맞대고 길게 얘기를 나누었다. 옛날에 함께 일하고 전투했던 광경을 회고했다. 1963년 12월초, 저우언라이 총리와 장즈중 부위원장이 광동성 변경으로 왔고, 두 사람은 국공양당관계를 소통할 수 있는 사람과 비밀리에 회담을 했다. 나는 당시 중앙에서 대만판공실 주임을 맡고 있어서,이번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활동에 참가했다..."

뤄칭창의 말은 간략하다.그러나 그 속에서 소문이 무성했던 그 비밀회담이 사실이라는 것을 밝혔다. 동시에 국공양당고위층 인사가 당시 남해에서 비밀회담을 하였다는 것에 대한 권위있는 방증이 되었다. 뤄칭창은 저우언라이가 남해로 간 이유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총리의 안전을 보위하기 위하여, 나는 명을 받들어 당시 광저우군구 부사령관 겸 남해함대사령관인 우뤼륀 동지를 찾아갔다. 그에게 이번 일의 중요성과 기밀유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전달하고 설명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표시한다. 중앙이 부여한 사명을 견결히 집행하겠고, 즉시 배치하겠다고."

저우언라이가 비밀리에 광동으로 온 이후의 상황에 대하여 얘기하면서 뤄칭창은 이렇게 말했다: "회담 전날, 저우총리, 장즈중 부위원장은 광동성의 일부 지방을 순방했다. 황포군관학교 부지를 참관한 후 황포항으로 갔다. 우뤼린의 배동하에, 남해함대의 일부 관병을 검열한다. 그 후, 저우총리, 장즈중 부위원장은 해군의 호위함 1척을 타고 비밀항해를 시작했다... 광저우에서 변경의 예정회담지점까지, 해상으로 하루이상의 항해거리였다. 저우총리의 휴식을 위하여, 우뤼린 동지는 호위함을 저속으로 몰았고, 엔진소음을 최저로 감소시켰다. 마침 그날 밤에 바다는 파도가 없이 고요했다. 다음 날 목적지에 도달한 후, 저우총리는 기운있는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밤은 몇년동안 가장 편안하게 잔 밤이었다.' 상륙한 후, ㅓ우총리는 전체 함대의 관병들에게 친절하게 감사를 표했다....."

이것을 보면 아래의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저우총리는 1963년 12월초, 확실히 장즈중과 뤄칭창이 두 사람을 배동하고 광동성의 변경으로 갔다.둘째, 확실히 당시 남해함대사령관인 우뤼린 중장이 친히 호위함을 이끌고 '에정된 회담장소'로 갔다. 셋째, 해상이 항해일저이 최소한 하루밤의 시간이상이다. 그리고 뤄칭창은 글에서 저우언라이가 야간항해중 편안하게 하룻밤을 잔 것을 기록했다. 이를 보면, 모든 것은 진실이고 구체적인 사실임을 알 수 있다.

뤄칭창은 저우언라이를 수행하여 시종 정확한 명칭을 말하지 않는 '회담예정지점'으로 갔다. 그후 그는 이렇게 적었다: "저우총리는 이번의 중요한 비밀변경회담의 며칠동안, 우뤼린 동지가 친히 3척의 군함을 이끌고 와서 부근의 해역에서 수분대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이렇게 회담의 순조로운 진행을 엄호했고, 저우총리 일행의 안전을 확보했다."

뤄칭창의 이상 회고에서, 저우언라이와 국민당 고위인사는 모 섬에서 비밀회담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확실히 이전에 홍콩의 매체에서 분석한 바와 같이, 회담시간은 확실히 "며칠"이었다(펑쉬이는 4일이라고 생각했고, 홍콩매체는 3일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뤄칭창은 시종 구체적인 시간을 말하지 않고 그냥 '며칠'이라고만 말했다). 그외에, 뤄칭창의 글에서, 여전히 저우언라이가 만난 국민당측이 인사가 도대체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회담의 구체적인 내용도 말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두 명의 국공양당관계를 소통할 수 있는 사람"과 비밀회담을 진행하였다고만 하였다.두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지에 대하여는 30여년후에도 뤄칭창이 여전히 공개하기를 꺼렸다. 이를 보면, 이번 회담의 비밀정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저우언라이의 이번 국민당인사와의 회담내용은 뤄창칭의 이 글에서 단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뤄칭창은 글에서 이런 말은 했다: "31년후인 1995년 설날, 나는 우뤼린 동지와 만났을 때,이 때의 역사를 이야기 했다. 나는 그에게 이번 회담이 당시의 대만당국(장제스, 천청, 장징궈)와 대륙이 의사소통하여 모두 하나의 중국문제에서 사실상 묵계를 달성했고, 국공양당이 일정한 기초적인 컨센서스를 이루었다고 설명했다."

"당시에는 고도의 비밀이어서, 중앙은 우뤼린 동지에게 이번 회담의 상세한 내용을 말해주지 않았다. 우리가 이 역사를 회고한 후, 우뤼린 동지는 아주 기뻐하며 말했다. 그는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1963년 12월의 호항으로 그는 중요한 정치적 사명을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이 일은 역사적인 의의가 있을 뿐아니라, 중요한 현실적인 의의도 있다. 그는 당중앙, 저우총리가 그를 높이 신뢰하여준 것에대하여 감격해 했다."

저우언라이는 남해의 모 섬에서 국민당인사와 회담을 했다. 그 일이 있은 지 수십년이 지난이후에도 여러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있다. 1992년 뤄칭창은 중국공산당 제14차당대회이후 은퇴하고, 여러해동안 그는 역사사건의 당사자로서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방문했지만, 그는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그저 우뤼린이 병ㅅ한 후에 쓴 한편의 글에서 처음으로 1963년 12월 그가 저우언라이, 장즈중과 남해로 가고, 국민당의 2명의 국공양당관계를 소통할 수 있는 사람과 비밀회담을 진행한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다만, 이번 국공고위층회담에서 논의한 이슈는 여러해후에도 국공양당의 그 어느 측에서도 공개되지 않고 있다.

저우언라이와 당시 국공양당관계를 소통할 수있는 "두 사람"은 남해의 모 섬에서 며칠간 회담을 한다. 당시에 이는 기밀유지가 필요한 사항이었다. 남해의 국공고위층회담내용에 대하여 펑쉬이는 죽기 전에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저우언라이와 국민당대표는 당시 컨센서스와 묵계를 달성했다. 나중에 대륙의 '문혁' 영향으로, 컨센서스와 묵계는 실현될 수 없었다." 그 외에, 당사자인 뤄칭창은 30여년후에 공개적으로 발표한 글에서 저우언라이가 남해에서 국민당 인사와 회담을 진행한 것을 "당시의 대만당국(장제스, 천청, 장징궈)와 대륙이 의사소통을 하고, 모두 하나의 중국 문제에서 묵계를 달성했으며, 국공양당이 일정한 기초적인 컨센서스를 이루었다."고 하였다. 이를 보면, 저우언라이의 남해행은 성과가 많았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주은래 사망당일의 중국고위층동향

글: 여위(余偉)

1976년 1월 8일 9시경, 주은래가 입원해있는 병실 바깥의 벨이 돌연 울렸다. 이는 긴급상황을 대비하여 만들어놓은 벨이다.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한 것이다. 모두 빠른 걸음으로 병실로 달려갔다. 거의 동시에 계기상의 심박수가 나타났다: 70여회. 계속하여 100여회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돌연 70여회로 내려갔다. 진재가(陳在嘉) 의사는 마음이 조급해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주은래의 심박수는 계속 내려갔다. 60회, 50회, 30회....

의사들은 원래 정해놓은 응급조치방안에 따라, 모든 조치를 취했다. 부르고, 인공호흡을 하고...모니터 위로, 가끔 심박이 표시되었는데, 점점 심박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직선만 한 줄로 이어졌다. 78년간 뛰던 심장은 1976년 1월 8일 9시 57분에 멈추었다.

이날 오전, 정치국에서는 또 다시 '방조'등소평회의가 거행되었다. 참가자들중 어떤 사람은 심각한 표정으로, 정좌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고개를 들고 기대고 두 눈을 감고 마음을 가다듬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차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면서 느긋하게 있었다. 장춘교가 조리있게 발언하고 있었다. "....요 며칠 나는 반복해서 주석이 최근에 한 중요한 강화를 학습했는데, 아주 친절하게 느꼈고, 깨달은 점이 많았습니다. 나는 주석의 이들 말씀을 정리하여 문건으로 만들기를 건의합니다. 적당한 시기에 전 당에 인쇄하여 발간하고, 광범위하고 깊이있게 학습을 진행하여야 겠습니다."

강청은 주먹을 휘두르며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받았다. "주석의 이 말씀은 1966년의 <나의 1장 대자보>에 못지 않습니다. 이번 말씀은 참 잘하셨습니다."

요문원이 느리고 가는 목소리로 보충했다. "나에게 생각이 있습니다. 소평 동지의 반성문도 문건의 뒤에 붙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소평동지는 주석의 비판에 대하여 자신의 착오에 대하여 비교적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습니까. 전당에 무슨 말씀을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모두 생각해 주십시오."

등소평은 얼굴을 굳히고, 굵고 강한 어투로 말했다. "여러분이 하는 말은 나도 모두 지지합니다. 만일 주석께서 동의하면, 나의 반성문도 당연히 인쇄하여 전당에 발간할 수 있습니다."

진석련이 웃는 얼굴로 완곡하게 말한다. "주석의 말씀에 담긴 정신은 전당에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평동지의 반성문은 급히 인쇄하여 돌릴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주석의 어떤 비판은 경향을 겨냥한 것이고, 구체적인 어떤 사람이나 구체적인 어떤 일을 지적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혼란이 쉽게 조성될 수 있습니다..."

쌍방의 다툼이 한창 무르익을 때, 왕동흥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얼굴표정이 엄숙하게 한 켠에 섰다. 회의를 주재하던 왕홍문은 의아하게 여기며 그를 바라보았다: "동흥 동지.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왕동흥은 두 눈을 들어 천천히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목소리는 나지막했다. "주은래동지가 오늘 오전 9시 57분 서거하셨습니다."

오래된 대전안은 침묵이 흘렀다. 등소평은 "휙"하고 몸을 일으켜 바깥으로 나가려 했다. 장춘교가 차갑게 말한다. "홍문동지. 아직 회의가 끝나지 않았지 않습니까." 왕홍문은 일시적으로 어찌해야할 지를 몰랐다. "아. 총리께서 서거하셨는데, 여러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문앞까지 걸어간 등소평이 돌연 몸을 돌려, 차갑고 강한 어투로 말했다. 거기에는 여러 사람을 누르는 위엄이 있었다. "첫째, 즉시 주석에 보고하고 치상위원회를 구성할 것. 둘째, 중앙의 명의로 부고를 발표하고, 외국주재대사관에 반기를 게양하도록 통지할 것. 셋째, 해변방부대에 명령하여 일급전투대비태세에 들어가게 할 것" 이때, 섭검영이 몸을 일으키며 말한다: "제가 가서 작전부에 통지하겠습니다."

오전 10시, 모택동은 병상에서 옆으로 누워 있었다. 업무인원이 그에게 문건을 읽어주는 것을 듣고 있었다. 어제 저녁 그는 거의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모택동의 신변업무를 책임지는 장요사는 급히 모택동의 침실로 들어갔다. 그가 가져간 것은 주은래가 서거했다는 나쁜 소식이었다.

방안은 조용하여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모택동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주은래의 서거는 일찌감치 예견하고 있던 일이다. 몇년동안, 의사들이 보내는 계속된 진단보고에서 그는 좋지 않은 예감을 느꼈다. 이때 아무 말도 않는 것이 무슨 말을 하는 것보다 나았다.

당시 주덕도 몸이 좋지 않았고, 퇴원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조직에서는 주덕이 지나치게 비통해할까봐, 즉시 그에게 총리서거소식을 알리지 않았다.

그날 오후, 주덕은 외빈을 접견한다. 벨기에의 신 주중국특명전권대사 슈마커로부터 국서를 접수했다. 돌아온 후, 강극청은 그가 총리서거소식에 마음의 준비를 갖출 수 있도록, 천천히 그에게 말했다: "촐이의 병세가 최근 또 악화되었다." 주덕은 그 말을 들은 후, 한동안 침묵하더니 말했다. "그럴리가 없지 않느냐. 그의 수술은 아주 성공적이었는데, 어찌 이렇게 빨리 악화된단 말인가?"

"어쨌든 상황은 아주 좋지 않습니다." 강극청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주덕은 강극청의 뜻을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 총리가 이미 죽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는 생각했다. "그렇게 많은 좋은 의사들이 총리의 병을 보살피고 있는데, 병세가 그렇게 빨리 발전할 리는 없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아주 무거워졌다. 그는 생각한다. "총리의 병세가 악화된 것이 어느 정도인가? 고칠 수 없는 정도는 아닌가?"

저녁 8시가 되자, 라디오에서 주은래가 서거했다는 소식이 나왔다. 주덕은 깜짝 놀라서 멍해진다. 그는 이미 병세가 악화되었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총리가 서거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라디오에서 계속하여 흘러나오는 애도음악과 가족들이 모두 눈물로 범벅이 된 것을 보고는 이것이 진짜라는 것을 알았다. 눈물이 그의 얼굴에 흘러내렸고, 옷깃을 적셨다. 그는 쇼파에 앉아서 한동안 침묵한다...

업무인원은 주덕에게 말했다. 총리의 임종유언은 유골을 조국의 대지와 강물에 뿌려달라는 것이었다. 이때 주덕이 말한다. "과거 사람들은 죽은 후에 관에 넣어져 땅에 묻히고자 했다. 나중에 발전하여 사후에 화장을 한다. 이것도 하나의 혁명이다. 총리는 당을 위하여, 국가를 위하여, 인민을 위하여 국궁진췌, 사이후기하였다. 정말 진정하고 철저한 혁명가이다." 그는 한편으로 말하면서 한편으로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물었다. "너희는 총리의 혁명역사를 알고 있느냐?" 그리고 주덕은 주은래의 혁명일생을 이야기한다. 당시 가족들은 그가 지나치게 상심하여 몸이 견디지 못할까봐 그에게 너무 많은 말을 하지 못하도록 말렸다. 그러나 그는 계속 하여 혼잣말처럼 말했다. "허희가 총리의 혁명역사를 아느냐?" 그 자신은 깊은 회고에 빠진다.

1월 11일 오전 북경의원, 태평간 로비. 애도음악이 낮게 깔리고, 곡성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주은래는 평온한 모습으로 하얀 천이 깔린 테이블위에 누워있었다. 똑바로 편 몸은 붉은 당기에 덮여 있었고, 사방에는 깨끗한 마제련이 놓여 있었다. 두 명의 총을 든 전사가 엄숙하게 좌우에 서 있었다. 검은리본을 단 정치국위원이 차례로 들어온다. 사람들은 모두 주은래의 유해 앞에서 묵념하고, 절을 했다. 그후에 유해를 반바퀴 돌고는 옆문으로 물러났다.

나이 많은 주덕은 지팡이를 집고 영상(靈床) 앞에 섰다. 눈물을 흘리면서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은래! 은래!" 그는 절을 하고나서, 몸을 곧게 편다. 그리고 천천히 떨리는 오른팔을 든다. 그리고 장엄하게 주은래에게 경례를 한다. 그후에 사람들의 부축하에 천천히 자리를 떠났다.

검은 리본을 단 등소평은 낮게 깔리는 애도음악을 따라 천천히 대청으로 들어왔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없었다. 표정은 침중하고 평정했다. 그는 영상의 앞으로 걸어가서, 묵묵히 눈을 감고 누워있는 주은래를 바라본다. 한참동안 떠나려 하지 않았다. 따라왔던 비서는 낮은 소리로 말해주었다. "수장. 갑시다. 뒤에 많은 사람들이 총리에게 고별인사하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과 국가지도자들의 뒤에는 당, 정, 군기관과 북경시의 각계대표들이 새카맣게 줄을 서서 장사진을 이루었다. 좁은 태평간의 복도를 천천히 이동하고 있었다.

정치국위원들은 옆에 있는 휴게실로 들어갔다. 강청은 들어가자 마자 쇼파 위에 기대었다. 다리를 주루르며 신음했다. "아이쿠. 내 두 다리는 오래 서 있어서 부어올랐네." 섭검영이 그녀의 앞으로 가서 목소리를 엄숙하게 질책한다. "강청 동지. 금방 총리에게 고별할 때, 왜 모자를 벗지 않았습니까?"

강청은 목을 빼고는 웃으며 말한다. "나는 감기에 걸렸고, 지금 열이 나서, 찬바람을 쐬면 안되요." 주덕은 힘을 주어 지팡이를 치면서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감기에 걸렸으면 오지 말 것이지. 너의 그 모습을 군중들이 보게 되면 아주 좋지 않다."

강청은 교만하게 눈을 치켜떴다. "이게 뭐 좋지 않다는 말입니까. 총리가 서거했는데, 나까지고 애를 먹여서 죽여야겠습니까?"

주은래의 서거는 전당, 전군 및 전국인민에 강렬한 충격을 주었다. 인민영웅기념비의 주위에는 꽃다발, 만련, 추도사가 가득 찼다...인민군중의 이 탁월한 지도자를 잃은데 대한 비통함과 그리움을 나타냈을 뿐아니라, 사람들의 중국의 앞날과 운명에 대한 초조한 심정을 드러내주기도 하였다. 이해의 청명절을 전후하여, 전국에서 주은래총리를 추도하고, 사인방에 반대하는 강력한 항의운동이 일어난다.

주은래는 왜 후손을 두지 못했는가

글: 중은우시

1924년 7월 고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떠난 주은래는 , 9월 광주에 도착했다. 비록 귀국전에 등영초(鄧穎超)와 서신을 통하여 사랑을 확인하였지만, 귀국후 반년동안 등영초와 한번도 만나지를 못했다. 1925년 1월, 주을내는 북방구위원회 위원 고군우에게 부탁하여 멀리 천진에서 천진지방위원회 부녀부장을 맡고 있던 등영초에게 편지를 가져가달라고 부탁해서, 사랑의 정을 나타냈다.

1925년 8월초, 21세인 등영초는 상해에서 광주로 왔다.

5년동안 만나지 못했던 애인이 자신을 만나러 왔지만, 당시 광동구위원회에서 대파업을 조직하고 있던 주은래는 시간을 내서 항구로 애인을 만나러 나갈 수가 없었다. 할 수없이 비서인 진경(陳庚)에게 등영초의 사진을 주어 항구로 나가서 맞이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사람이 붐비는상황에서 등영초가 진경을 만날 수는 없었다. 물설고 낯선 그녀는 할 수 없이 통신주소를 가지고 주은래의 주소지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애정관계는 자기가 결정하는 것이다. 혼인대사는 주은래와 등영초도 무슨 결혼식같을 것을 준비하지는 못하였다. 전부 간단하게 처리했다. 그러나, 황포군관학교의 많은 동료들은 이 일을 알고 있었고, 신부를 만나고 싶어 하였고, 한번 손님들을 불러서 회식을 하자고 요구했다. 그래서, 8월 8일, 주은래는 입당소개인인 장신부가 광주 북경로상의 태평관 2층에서 사람들을 초청하여 서양식의 간단한 도시락을 먹었다. 이 서양식 도시락은 바로 주은래와 등영초의 결혼피로연이 되었다. 그러나, 결혼피로연에 참여했던 사람들중에는 당시와 나중에 아주 이름을 날린 사람들이 많았다. 국민당의 등연달, 하응흠, 전대균, 장치중등이 있었고, 공산당의 혼대영, 진새, 장완화등이 있었다. 금방 광주에 도착한 이부춘과 채창고 황급히 와서 참석하였다 .결혼피로연때, 모두 신혼부부를 위하여 술을 권하고, 주은래도 3병의 브랜디를 마셔서 술에 대취하였다.

6년간 서로 사랑했고, 5년간 헤어져 있었는데, 이제 서로 뜻과 의기가 투합한 전우는 마침내 한 쌍의 부부로 맺어졌다. 이 때 그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아마도 그저 크게 취함으로써 그들의 내심의 행복과 기쁨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결혼후 다음 말, 주은래는 대파업을 지휘하느라고 바빴다. 등영초는 당조직의 명에 따라 공산당 광동구위원회에 근무했다. 혁명의 길은 위험이 충만하다. 1927년 4월, 중국에는 풍운의 변화가 막측했다. 국민당, 공산당의 양당은 장개석의 배신으로 인하여 돌연 관계가 악화되었다.

명을 받아 공산당 상해구위원회 서기로 이동한 주은래는 짧은 3개월의 기간내에 상해노동자의 3번에 걸친 의거를 성공적으로 조직하고 이끌었다. 전력을 다해서 노동자를 조직하여 장개석의 피의 진압에 항거했고, 혁명의 곤경을 겪고 있었다. 그이 처인 등영초는 광주에서 독일인이 운영하는 병원에서 힘든 난산의 고통을 겪고 있었다. 그녀는 또 다른 인생의 곤경을 겪고 있었다. 이번은 그녀와 주은래 사이의 두번째 아이였다.

이 전에 그들은 결혼후 얼마되지 않아. 등영초는 자기가 임신한 것을 알게 되었다. 주은래의 업무가 너무 바쁜 것을 보고, 그녀 또한 광주에 와서 일을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고 임무도 많아서, 아이를 낳을 시간이 없다고 생각학, 스스로 결정해서 그녀는 탕약을 먹고 아이를 유산시켰다. 낙태에 대하여 주은래의 동의를 받지 않았고, 탕약을 먹은 후 출혈이 심하여 하마터면 생명이 위험할 뻔했다. 등영초는 주은래로부터 심하게 질책을 받았다. 주은래는 그녀에게 아이를 낳는 것과 혁명업무가 대립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다. 아이는 죄가 없고, 혁명가의 아들도 생존의 권리는 있다고 하였다.

등영초는 주은래가 아이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아이를 반드시 낳으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누가 알았겠는가. 뱃속의 아이는 정상체중을 넘어섰다. 그녀는 침대위에서 삼일 밤낮을 누워 있었다. 당시의 산부인과는 아직 개복수술을 하는 단계가 아니었고, 아이를 집게로 산도를 통하여 강제로 꺼내는 방법만을 쓰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아이는 머리에 손상을 입어서, 낳자마자, 땅바닥에 발을 디디기도 전에 불행히 요절하고 말핬다.

이번 난산의 대가는 컸다. 등영초의 마음에 극도의 고통을 안겨주었을 뿐아니라, 그녀의 몸을 철저히 상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다시는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었다.

중국인의 전통관념에는 "불효에는 세가지가 있는데, 후손을 두지 못하는 것이 제일 크다". 주은래는 속세를 떠난 사람도 아니고, 정이 없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도 집안에 후손을 두기를 매우 원했고, 대대로 이어지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일생에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등영초를 위로했다. "아이가 없으면 그냥 아이없지 지내지 뭐."

친아들이 없던 그는 온천하의 아이를 자기의 아이로 생각했다. 그는 일생동안 사랑을 더 많은 아이들에게 나눠주었다.

중국공산당 제9차대회에서의 주은래의 발언

1969년 4월 14일

동지여러분:

나는 우리의 위대한 영수 모주석이 개막식에서 한 아주 중요한 말씀을 완전히 옹호합니다. 나는 임표 부주석이 당중앙을 대표하여 한 정치보고를 완전히 옹호합니다. 나는 모주석의 무산계급 건당노선의 지도하의 신 당장(黨章, 공산당정관)의 탄생을 열렬히 축하합니다.

모주석은 말씀중에서, 우리들에게 48년간의 당의 역사를 되돌아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자주 당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당내의 두개노선간의 투쟁의 역사를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흑히 진독수의 우경기회주의를 반대하고, 왕명의 좌우경기회주의를 반대하고, 유소기등의 반혁명수정주의를 반대한 투쟁의 역사를... 당이 48년간 쌓아온 승리와 실패의 정반 두 측면의 투쟁경험을 되돌아보고, 당이 국제관계에서의 투쟁경험을 되돌아보고, 우리가 왜 20년전에 신민주주의혁명의 승리를 했는지, 이어서 사회주의혁명과 사회주의건설의 위대한 승리를 했는지를 되돌아보고, 20년후의 지금 또 직면한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은 더욱 큰 승리를 가져올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알아야만이, 비로소 당의 역사는 바로 모택동사상의 승리의 역사라는 것을 알 수 있고, 모주석이 어떻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계승, 보위, 발전시켰는지를 알 수 있고, 모주석이 당대의 가장 위대한 마르스크레닌주의자라는 것을 알 수 있고, 모택동사상이 제국주의가 전면적인 붕괴로 들어서고, 사회주의가 전면적인 승리의 길로 들어서는 시대의 마르스크레닌주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주석은 말씀중에서, "우리는 이번 대표대회가, 단결의 대회, 승리의 대회로 열리기를 희망한다. 대회이후에 전국에서 더욱 큰 승리를 취득할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결심을 하고, 견결히 믿습니다. 모주석의 이 위대한 호소는 반드시 실현될 것이라고.

임표 동지가 이번 대회에서 한 정치보고는 마르크스주의, 레닌주의, 모택동사상의 위대한 붉은 깃발을 높이 들자는 것이며, 모주석의 무산계급독재하의 계속혁명의 학설을 날카롭게 설명하였고, 모주석의 이 위대한 학설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부단혁명에 관한 이론을 천재적이고 창조적으로 발전시킨 것이라는 점을 논증하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사회주의혁명과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실천과정에서 증명은 완전히 필요한 것입니다. 만일 모주석이 친히 억만군중을 이끌고 일어나서 이번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을 진행하지 않았다면, 반도, 내부간첩, 노동자의 적인 유소기를 대표로 하는 자산계급사령부는 타도할 수 없었을 것이고, 우리 당과 국가의 앞길은 모주석이 일찌기 지적한 바와 같이: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짧으면 몇년, 십몇년이고, 길어야 몇십년이면, 불가피하게 전국적인 반혁명복벽운동이 벌어질 것이고,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당은 수정주의의 당으로 바뀔 것이고, 파시스트당으로 바뀔 것이고, 중국 전체는 색깔을 바꾸게 될 것이다" 임표동지는 보고에서 핵심적이고 계통적으로 이번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의 경험을 종합하였고, 국내외형세를 분석하였으며, 이후 발전의 방향과 전투의 임무를 제기하였습니다. 그는 보고서에서 적절하게 모주석의 무산계급혁명노선을 견결히 집행하는 중앙문화혁명소조에 응분의 평가를 내렸습니다. 조별토론에서, 모두가 임표동지의 이번 보고서는 중국사회주의혁명과 사회주의건설의 위대한 강령이라는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이것은 완전히 정확한 것입니다.

이번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의 과정에서, 임표동지는 시종일관하게 모주석을 따랐습니다. 역시 광대한 혁명군중이 공인하는 바와 같이 위대한 지도자 모주석을 영수로 한 무산계급사령부의 부사령관다웠습니다.

임표동지는 군사위원회업무를 주재하면서, 그의 창도하에 1961년 먼저 준내에서 <<모주석어록>>이 출판되었습니다. 그리고 빠른 시일내에 전국 심지어 전세계로 보급되었습니다. 이것은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의 준비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조치의 하나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 붉은 보배같은 책은 모택동사상이 발전시킨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대중화하였고, 모택동사상이 중국인민 내지는 세계혁명인민에게 전례없이 널리 전파되도록 하였습니다. 사상적으로 억만혁명군중을 무장시켰습니다. 이것은 무산계급문화대혁명에 대한 가장 유력한 여론동원수단이며, 가장 깊이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1965년말, 모주석이 <<해서파관>>에 대한 비판을 제기한 이후, 임표동지는 나서경(羅瑞卿)의 반당, 반군의 반혁명음모를 적발하고, 그의 창도하에 팽진의 <<2월제강>>과 맞서는 부대문예좌담회를 개최하였고, 그의 좌담록을 발표하였는데, 이것은 문화대혁명의 전진을 추진하는 유력한 도구였습니다.

1966년 5월 18일, 임표동지는 중앙정치국화대회의에서 중요한 말씀을 하였습니다. 모택동이 친히 주재하여 제정한 1966년 5월 16일의 <<통지>>를 설명하였습니다. 언제든지, 어떤 상황하에서도 누구라도 모주석을 반대하면, 누구라도 모주석의 사상을 반대하면, 전체 당은 함께 그를 토벌하고, 전국은 함께 그를 죽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임표동지의 이 중요한 말씀은 모택동사상의 위대한 붉은 기치를 높이 들고,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의 나팔이 되었습니다.

최근 3년간의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의 과정에서, 많은 중요한 시기, 예를 들어 1966년 8월 8일 제11차중전회의폐막후의 중앙공작회의, 1966년 10월의 중앙공작회의, 1966년 12월의 공업회의, 1967년 3월의 군이상간부회의, 1968년 3월 24일 양성무, 여입금, 부숭벽문제를 제기하는 대회, 1968년 8월 제8기 12중전회에서 임표동지는 중요한 말씀을 하였습니다. 그는 모주석의 일련의 최근 지시에 근거하여 유소기를 대표로 하는 반혁명수정주의를 철저히 폭로하고, 우파와 좌파의 두 방면에서의 역류와 사풍을 엄정하게 비판하였고, 모주석이 제출한 무산혁명문화대혁명의 갈길을 견지하였습니다. 임표동지의 이런 말씀은 위대한 영도자 모주석의 지지와 찬양을 받았고, 모주석을 영수로 하고, 임부주석을 부영수로 하는 무산계급사령부가 되었고, 억만혁명인민, 특히 모주석이 친히 만들고 영도하셨으며, 임부주석이 친히 지휘한 인민해방군이 '삼지' '양군' 공작중의 전투개시명령이 되었습니다.

팽덕회의 당찬탈음모가 밝혀진 후, 임표동지는 친히 군사위원회업무를 주재하였습니다. 임표동지는 모주석의 고전회의의 건군사상을 받들어, 네개의 제1, 38작풍, 4호연대, 5호전사, 3대규율재정비, 8항주의를 제출하였고, 인민해방군을 붉은 모택동사상대학교로 만들었습니다. 임표동지는 항상 계급투쟁을 잊지 않고, 무산계급독재를 잊지 않으며, 돌출정치를 잊지 않고, 모택동사상을 붉은 기치를 높이 받들 것을 잊지 않으며, 모택동사상을 선전하는데 힘썼습니다. 특히 임표동지가 제출한 일련의 효과적인 군중성의 모택동사상학습의 방법은 바로 <<모택동어록>> '재판전문'에서 말한 바와 같디 "모주석의 저작을 학습하고, 가지고 다니면서 문제를 배우고, 살아있는 배움으로 살아있게 활용하며, 배움과 활용을 결합하며, 쓸 곳이 급하면 먼저 배우고, '활용'하는데 주력하여야 한다"는 내용을 설파하였는데, 이 방법은 모택동사상을 전당, 전군, 전국인민 내지 세계혁명인민에 보급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번 새로운 당장에서는 명확하게 "임표동지는 일관되게 모택동사상의 위대한 붉은 깃발을 높이 들었으며, 가장 충성스럽고, 가장 굳건하게 모택동동지의 무산계급혁명노선을 집행하고 보위하였다. 임표동지는 모택동 동지의 친밀한 전우이며 후계자이다"라고 기재하였습니다. 이것은 임표 동지가 40여년의 혁명분투중에서 자연스럽게 이끌어내어진 가장 정확한 결론이며, 완전히 사실에 부합합니다. 그것은 전당, 전군과 전국각족혁명인민의 열렬한 옹호를 받고 있으며, 전세계의 광대한 혁명인민의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위대한 영수, 당대의 가장 위대한 마르크스레닌주의자인 모주석이 계심으로 인하여 무한한 행복을 느낄 뿐아니라, 우리는 또한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모주석의 후계자 임부주석으로 인하여 크나큰 행복을 느낍니다.

현재 국내외의 형세는 인민에게 유리하고, 적들에게 불리합니다. 우리 전당과 전국인민은 긴밀하게 단결하여, 마르크스주의, 레닌주의, 모택동사상의 위대한 붉은 깃발을 높이 들고, 위대한 영수 모주석을 지도자로, 임부주석을 부영수로 하는 무산계급사령부의 주위에 단결하여 정책을 실시하고, 용감하게 전진하여 반드시 승리에서 승리로 나가도록 하여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소리높여 외칩시다.

무산계급문화대혁명승리만세!
위대한, 영광된, 정확한 중국공산당만세!
백번백승의 마르크스주의, 레닌주의, 모택동사상만세!
우리의 위대한 영수 모주석 만세! 만세! 만만세!

주은래(周恩來)의 이름, 호칭, 가명, 칭호등.

1. 대란(大鸞)

유명(乳名). 1898년 3월 5일 강소성 회안부 산양현(현재의 회안시)의 성내 부마항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대란이라고 하였는데, 생모인 만씨(萬氏)의 태몽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또한 회안의 방언중에는 란(鸞)과 람(攬)이 발음이 비슷한데, 쉽게 무럭무럭 잘 크라는 의미가 있다고도 한다.

2. 란(鸞)

대란을 간략하게 부르는 것. 1942년 7월 6일, 9일, 10일, 12일 주은래는 중경에서 병으로 입원해있던 기간동안 등영초(鄧潁超, 주은래의 부인)에게 4통의 편지를 보냈는데, 편지에 모두 란(鸞)이라고 서명되어 있다.

3. 은래(恩來)

학명(學名). 1903년에 가내학교에서 글을 읽기 시작할 때, 학명을 은래로 지었다. 부친인 주이능(周貽能)이 지어준 것이다. 문장을 발표하거나 편지를 쓸 때 자주 썼다.

4. 상우(翔宇)

자(字). 5살때 글을 읽시 시작했을 때, 스승인 추(鄒)선생이 지어준 것이다. 1927년 가을에 편찬한 <<남계동학록>>에 1917년 6월의 제10차 졸업생 명단이 기재되어 있는데, 주은래의 이름 아래에 "상우"라고 주석을 달았다. 청년시절에 유럽유학시기에 자주 이 이름으로 천진의 <<익세보>>에  <<여우통신>>을 발표하였다. 1959년 3월 18일 등영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도 "상우"라고 서명하였다.

5. 비비(飛飛)

필명(筆名). 청소년기에 글을 쓸 때 이것을 사용했다. 1914년 천진 남개학교 경업락군회의 잡지인 <<경업>>창간호에 발표한 소설 <<건국영웅>>과 시작 <<춘일우성>>등에 사용했다.

6. 비(飛)

비비를 줄여쓴 것. 1916년 9월 4일 출판한 천진남개대학의 학교간행물 <<교풍>> 제36기에 "비"라는 이름으로 <<특별계사>>와 <<교문>>을 발표하였다.

7. 양우자(羊羽子)

가명. 1917년 8월 30일 학교친구 곽사녕에세 써준 글에 "양우자"라고 쓴 바 있고, 국공2차합작시에 주은래가 비서 손사의에게 보낸 서신에서소 "양우자"라고 쓴 바 있다. "양우"를 합치면 "상(翔)"이 되므로 상우라는 글자를 나눠서 사용한 것이다.

8. 오호(伍豪)

가명 겸 필명. 1919년 12월 21일 각오사(覺悟社) 전체모임에 참석했고, 전체 구성원들은 추첨의 방식으로 숫자를 뽑아 가명을 정하였고 이름을 대신하여 쓰기로 하였는데, 주은래는 오호(五號)를 뽑았다. 그래서 발음이 같은 "오호"를 가명 겸 필명으로 사용했다. 1922년 9월 1일 <<소년>>지에 발표한 <<공산주의와 중국>>, 1924년 11월 19일 출판한 <<향도>> 제92기에 발표한 <<최근2월광주정치상황의개관>>등에 "오호"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9. 오(五)

필명. 1920년 1월 20일 출판한 <<각오>> 창간호에서 "오"라는 서명으로 <<우중람산-일본경도>>, <<우후람산>>과 <<일본경도원산공원을 유람하며>>라는 시를 발표하였다.

10. 오(伍)

필명. <<생별사리>>라는 시는 1922년3월에 지었고, 1923년 4월 15일에 출판한 천진의 <<신민의보>>의 <<각우부간>> 제2기에 실렸다.

11. John Knight

영문명. 주은래가 1921년 2월 8일 남개대학 동사장인 엄수에게 보낸 편지에서 영국여권상의 이름이 John Knight라고 말한 바 있다.

12. 주상(周翔)

필명. 1922년 2월 23, 24일 천진의 <<익세보>>에 <<런던통신>>을 발표하면서 이 이름을 사용한다.

13. 상(翔)

필명. 1924년 2월 1일 출판한 <<적광>> 제1기에서 "상"이라는 필명으로 <<혁명을 배양하는 각단체연합회>>라는 글을 발표한다.

14. 관생(冠生)

가명. 대혁명실패후, 당내에서 사용한 이름이다. 1930년 8월 30일 중공중앙기관지 <<홍기일보>>에 팽배, 양은을 추도하는 글을 발표할 때 쓴 바 있다.

15. 관(冠)

관생의 약칭.

16. 신광(晨光)

가명. 1930년 3월 초. 중공중앙은 주은래를 모스크바에 보내어 국제공산당에 보고를 하도록 하는데, 이 때 독일에 들어 독일공산당의 <<홍기보>>에 사론을 쓰면서 신광이라는 이름을 쓴다.

17. 스트레리조프

가명. 30년대. 국제공산당에서 활동할 때 쓴 이름이다. 이 이름으로 국제공산당 간행물에 글을 썼다.

18. 소산(少山)

가명. 대혁명실패후 당내에서 사용한 이름이다. 1930년 출판한 <<당의 생활>> 제6기에 발표한 글 등에 사용하였다.

19. 호(豪)

오호의 약칭. 곽말약에게 편지쓸 때 "호"로 서명한 바 있다.

20. 이지범(李知凡)

가명. 등영초는 양일(楊逸)을 가명으로 썼고, 사람들이 이지범부인으로 불렀다. 청화대학 학생이었던 호행분이 쓴 글에 <<이지범부인>>이라는 글이 있고, <<신화일보>>에 실린 적이 있다.

21. 호필성(胡必成)

가명. 1947년 4월 11일. 섬북에 있던 중공중앙의 업무인원들은 임필시(任弼時)를 사령(司令)으로, 육정일(陸定一)을 정치위원으로 하고 아래에 약간의 부대를 두었다. 기밀을 위하여 부대와 사람들은 암호를 사용하였는데, 모택동은 이덕승(李德勝), 주은래는 호필성(胡必成), 임필시는 사림(史林), 육정일은 정위(鄭位)를 사용하였다.

22. 철인(鐵人)

당내의 존칭.

23. 염계선생(濂溪先生)

주은래의 조상인 주돈이의 호가 염계이다. 국민당 원로인 우우임은 주은래를 염계선생으로 칭했다.

24. 호공(胡公)

별명. 국민당 통치하의 상해에서 비밀공작을 하면서 상인으로 변장하고 나중에는 수염을 길렀다. 그래서 당내 사람들이 호공이라고 불렀다.

25. 불공(佛公)

호와 불이 사천성 중경 사람들에게는 발음이 같아 불공이라고도 불렀다.

26. 주공(周公)

다른 사람이 부르는 명칭. 특히 민주인사들이 주은래를 부를 때 많이 사용한다.

27. 삼공(三公)

팽덕회가 59년 여산회의때 말하면서 모택동, 유소기, 주은래는 일공, 이공, 삼공으로 부른 바 있다.

이외에, 새락천(賽樂天), 주(周), 은(恩), 래(來), 상(翔), 비비(非非), 대미(大美), 유사(維思), 조래(趙來), 서유(西遊), 왕양(汪洋), 임경한(林庚漢)등의 이름도 사용했다.

주은래(周恩來)의 육무(六無)

주은래(쩌우언라이)는 중국 인민의 가슴 속에 영원한 총리로 남아 있다. 그와 관련한 얘기나 그의 영향은 중국 곳곳에 남아 있지만, 그러나 그는 또한 다른 사람이 가진 여러 가지를 가지지 않고 있다.

첫째, 사불유회(死不留灰)

죽어서 유골을 남기지 않았다. 주은래가 사망한 시점은 역사의 격변기였다. 임표(林彪) 집단이 막 분쇄되고, 강청(江靑)의 사인방은 여전히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1976년 1월 주은래가 사망하였다는 소식과 슬픈 음악이 라디오에 흘러나왔고, TV로 간략한 고별의식이 중계되었다. 이때 강청은 모자도 벗지 않고 고개를 숙여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었으며, 며칠 지나서 팔보산(八寶山)에서 화장하였다. 1월 15일 추도회가 끝난 후, 부인 등영초는 생전에 유골을 남기지 말고 대지에 뿌리라고 하였다는 얘기를 전하고, 주은래의 유골을 그가 대학을 다니고 혁명을 시작했던 천진에서 황하입구까지 농업용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뿌렸다. 유골이 없으므로, 유골을 묻은 장소나 비석도 당연히 없다.

둘째, 생이무후(生而無後)

살아서 후손을 남기지 않았다. 중국인의 습관에는 후손을 잇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누구의 후예라는 것은 생활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가진다. 불효에는 세가지가 있는데, 후손을 두지 않는 것이 가장 크다라는 말도 있다. 후손들이 선인을 기리는 것에는 첫째, 고거(故居, 거주하던 집), 둘째, 묘지, 셋째, 후손인데, 그 중에서 후손이 가장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은래는 혁명과정에서 희생된 열사들의 자손들을 보살피고(총리를 지낸 이붕은 주은래의 양자이다), 자신은 후손을 두지 않았다.

셋째, 관이무형(官而無型)

관직에 있었지만 드러내지 않았다. 수천년 이래로 관직은 권력과 연결되어 있었고, 관직이 높을 수록 특수한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주은래는 외교, 공무를 수행할 때는 관리였지만, 일상생활에서는 보통의 백성과 같이 생활했다. 그는 중국유사이래 처음있는 평민재상이었다. 그의 검박한 생활에 관해서는 여러가지의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넷째, 당이무사(黨而無私)

당에 있으며 사사로움이 없었다. 레닌은 사람은 계급으로 나누어지고, 계급은 정당이 영도하며, 정당은 영수가 주재한다고 하였다. 사람이 있으면 당은 있다. 정당외에 붕당, 향당등의 당이 있는 것이다. 모택동 주석도 일찌기 당외에 또 당이 있으며, 당내에도 파벌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서로 좋아하는 사람끼리 당을 이루고, 서로 이익이 맞는 사람끼리 당을 이루며, 당을 이룬 뒤에는 이익을 취하고, 권력을 취하고 영화를 취하는 도구로 쓴다. 그러나, 주은래는 당내에 파벌을 이루지 않았다.

다섯째, 노이불원(勞而不怨)

고생을 해도 원망하지 않는다. 주은래는 혁명사업 및 이후 국가건설에 많은 고생을 한 사람이다. 그는 해방전에는 상해노동자기의, 팔일기의, 만리장정, 삼대전역, 지하투쟁등으로, 해방후에는 정치, 경제, 문화등의 업무를 수행하면서 무척 고생을 많이 한다. 업무량으로만 계산한다면 주은래의 업무량이 당시 당원들중에서 가장 많았을 것이다. 주은래는 1974년 6월 1일에 입원하는데, 입원하기 전인 1월부터 5월까지 139일간의 자료를 보면, 12시간 내지 14시간 업무를 본 날이 9일, 14시간에서 18시간 업무한 날이 74일, 19시간에서 23시간을 업무한 날이 38일, 24시간 내내 일을 한 날이 5일이었고, 단지 13일만 12시간이내로 업무를 보았다. 3월중순에서 5월말까지만 보더라도 중앙회의에 21번 참석하고, 외교활동이 54회, 기타 회의나 면담이 57회였다.

여섯째, 사불유언(死不留言)

죽으면서 유언을 남기지 않았다. 1976년 주은래가 죽기 전에 모택동도 매일 한번씩은 주총리의 병세를 물어보고, 부인 등영초는 매일 병석에서 같이 있었다. 당시, 사인방에 의하여 거의 다 타도되고 유일하게 남은 사람이 섭검영(葉劍英) 원수였는데, 섭검영은 백지를 비서들에게 주고, 혹시 주은래 총리가 무슨 말씀을 하시면 하나도 빼지 말고 기록해두라고 하였는데, 결국 사망시에 다시 받아본 백지는 원래 그대로인 상태였다고 한다. 주은래가 죽을 때 할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말해야 할 것은 모두 말하지만,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단 한 글자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부인인 등영초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등영초는 혁명동지이고 고위관료였지만, 총리의 업무와 관련되는 일은 부인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총리사무실의 열쇠도 그가 한 개, 비서가 한 개, 보안인원이 한 개를 가지고 있었을 뿐, 등영초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한다.

瓢蟲

不朽의 古典에서 찾은 智慧와 心灵, 역사적 敎訓과 省察에서 옛글의 향기에 취해 사랑에 빠지게 되었음을 밝히는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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