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문자학개설]중국문자의 초조(初造)1~3

 [중국문자학개설]중국문자의 초조(初造)1


박종민 기자
중국문자학개설 <5>

중국문자의 초조(初造, 처음 만듬)를 논하자면, 우선 허신의 『설문해자서』중의 한 문장을 인용하여 토론의 기초로 삼고자 한다. 『설문해자서』에서 이르기를 

"옛날 포희씨(包犧氏)가 천하에 왕 노릇을 하고 있을 적에 우러러 하늘에서 상(象)을 관찰하고 굽어서 땅에서 법(法)을 관찰하며, 새와 짐승의 무늬와 땅의 모양새를 살펴보았는데, 가깝게는 (사람의) 몸에서 취하고 멀리는 여러 사물에서 취하여, 이에 비로소 『주역(周易)』의 팔괘(八卦)를 만들었다. 신농씨(神農氏)에 이르러 결승(結繩)으로 다스리고, 그 일을 통괄하였는데, 많은 일들이 극히 번잡해지면서 꾸밈과 거짓이 생겨나게 되었다. 황제의 사관(史官) 창힐이 새와 짐승의 발자국을 보고 그 무늬가 서로 다른 것을 알게 되어, 처음으로 서계(書契)를 만들었다.[古者庖犧氏之王天下也, 仰則觀象於天, 俯則觀法於地, 視鳥獸之文, 與地之宜, 近取諸身, 遠取諸物, 於是始作易八卦, 以垂憲象. 及神農氏, 結繩爲治, 而統其事, 庶業其緐, 飾僞萌生. 黃帝之史倉頡, 見鳥獸蹏迒之迹, 知分理之可相別異也, 初造書契.]"

라고 하였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를 포괄하고 있는 것으로, 첫째 의미는 근본을 미루어 본 즉, 조자(造字)의 근원이 팔괘(八卦)와 결승(結繩)이라는 것이고, 둘째 의미는 황제의 사관 창힐이 처음으로 서계(書契)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조자의 근원인 팔괘에 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 팔괘 창조의 시대

'팔괘'는 전해져 오는 말로 포희씨가 천하를 다스릴 때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주역』 「계사(繫辭)」와 『설문해자서』에 모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른바 포희씨라 함은 중국 상고사에 있어서 어렵시대(漁獵時代)의 대표라고 여길 수 있겠다. 그러므로 팔괘는 중국 어렵시대에 제작되고 사용되었던 간단한 표의부호(表意符號)라 할 수 있겠다.

-팔괘가 취법한 대상

어렵시대의 원시인들은 "가깝게는 (사람의) 몸에서 취하고[근취저신近取諸身]"라고 하여, 인류 중에는 남성과 여성이 있으며 생리적으로 전혀 다르다는 점을 발견했으며 또 "멀리는 여러 사물에서 취하여[원취저물遠取諸物]"라고 하여 하늘은 모두 서로 연결되어 끝이 없으나, 땅은 자주 하천(河川)으로 인하여 격리되어 틈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을 그려 남성, 천상(天象), 그리고 일체의 양강지물(陽剛之物)을 나타내고, '--'으로 여성, 지상(地象), 그리고 모든 음유지물(陰柔之物)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천지간(天地間)에는 사물이 매우 많아서 음양의 두 부호로써 다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원시인들은 또 '-', '--'의 부호를 나란히 중첩하였는데, 이리하여 팔괘가 생겨난 것이다.

- 팔괘가 대표하는 의미

팔괘가 대표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지금은 이미 그것을 상세하고 정확하게 알 수가 없지만 『주역』 십익(十翼)의 설괘(說卦)에는 팔괘가 나타내는 뜻이 다음과 같다고 하였다.

☰   건(乾), 위천(爲天); ☷   곤(坤), 위지(爲地);
☳   진(震), 위뢰(爲雷); ☴   손(巽), 위풍(爲風);
☵   감(坎), 위수(爲水); ☲   이(離), 위화(爲火);
☶   간(艮), 위산(爲山); ☱   태(兌), 위택(爲澤).

 당연히 이것은 오로지 후세인들이 유추하여 넓힌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결코 팔괘의 진정한 의미는 아닌 것이다.

- 팔괘에 대한 정리

1) 팔괘는 결승과 같이 문자가 만들어지는 근원이다.
2) 팔괘의 모양은 하늘의 상(象)과 땅의 법(法)을 관찰해 주로 새와 짐승들의 무늬와 땅의 모양새를 묘사하였다.
3)  '-' 부호는 남성, 천상(天象), 그리고 일체의 양강지물(陽剛之物)을 나타내고, '--' 부호는 여성, 지상(地象), 그리고 모든 음유지물(陰柔之物)을 나타내는데, 이 둘이 조화를 이루어 팔괘가 만들어졌다.

<참고 문헌>

지은이 임윤, 옮긴이 권택용,『중국문자학개설』, 형설출판사, 2002


[중국문자학개설]중국문자의 초조(初造)2

박종민 기자
중국문자학개설 <6>

중국문자의 초조(初造, 처음 만듬)를 논하기 위해서 허신의 『설문해자서』에는 '옛날에 포희씨는 하늘과 땅의 모양을 살펴서 팔괘를 만들고, 신농씨는 결승을 만들어 다스렸고, 황제의 사관인 창힐은 새와 짐승의 발자국의 무늬를 보고 서계(書契)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여기서는 창힐이 만든 서계(書契)에 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서계의 의미

'서(書)'란 무슨 뜻일까? 『설문해자』에 "서(書)는 저(著, 나타냄)이다."라고 하였고, 『설문해자서』에도 "대나무와 비단에 (문자를) 나타내는 것을 '서(書)'라고 말한다.[著之竹帛謂之書]"고 하였다. 그러므로 '서(書)'란 바로 죽백(竹帛, 대나무와 비단) 위에 쓰였거나 그려졌을 부호임을 알 수 있다. 그 내용에는 '문(文)'과 '자(字)'가 포함되어 있는데, 『설문해자서』에서 말한 바 "창힐이 처음 서(書:글)를 만들었는데, 대개 종류에 의거해 형상을 본뜬 것이므로, 문(文)이라고 말한다. 그후 형태와 소리가 서로 더해져, 곧 자(字)라고 말한다.[倉頡之初作書 蓋依類象形 故謂之文 其後形聲相益 即謂之字]"라 한 것이 그것이다.

'계(契)'란 무엇인가? 『설문해자』에서 "계(契)는 큰 약속이다.[契, 大約也]" 또 "권(券)은 계(契, 계약서)이다. 증서는 서(書:글)를 나누는데, 칼로 그 옆을 잘라 계약하므로 '계권(契券)'이라고 말한다.[券, 契也. 券別之書,以刀判契其旁,故曰契券]"고 하였다. 그러므로 계(契)는 곧 계약의 증서(=계권契券)인 것이다.

서계(書契) 두 자를 합쳐 보면 당나라의 공영달의 『상서정의(尙書正義)』에는 동한(東漢)의 정현(鄭玄)의 말을 인용하여 "나무에 문자를 적는데 나무 측면을 깍아 ‘계(契, 계약)’를 만들어 각각 그 하나씩을 가졌다가 뒤에 서로 상고해 맞추어본다.[書之於木, 刻其側爲契, 各持其一, 後以相考合.]"고 하였다. 이것은 또한 허신이 말한 바 있는 '계권'의 의미와 서로 부합되는 것이다.

이상 여러 설을 종합해서 보면 문자를 그 내용으로 하고, 계약을 그 효용으로 하는 것이 바로 서계인 것이다. 『설문해자서』에 나타나 있는 "처음으로 서계(書契)를 만들었다.[初造書契]"의 서계는 서계의 내용, 즉 문자에 치중하고 있는 것이므로 그 아래에서 다루고 있는 '서계' 또한 모두 문자를 가리키고 있는 말이다.

서계(書契)
-서계가 처음 만들어진 시대

처음으로 서계를 만든 사람은 창힐(倉頡)이라고 전해진다. 이는 『설문해자서』에서 뿐만 아니라 『세본(世本)』·『한비자』·『여씨춘추』·『회남자』·『한서』「예문지」·『논형』등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면 창힐은 어느 시대의 인물일까?

『설문해자』에서는 『세본』을 근거로 "황제지사(黃帝之史)" 즉, 황제의 사관이라 하였고, 『상서』 공영달의 소(疏)에는 또 전국 시대 신도(愼到)의 말을 인용하여 "창힐재황제지전(倉頡在黃帝之前)"이라고 하였는데 즉, 창힐은 황제 이전의 사람이라고 하였다. 

『설문해자서』에는 또한 "서(書)는 '같다[如]'는 뜻이다. 오제(五帝)와 삼왕(三王)을 거치는 동안 고쳐지고 바뀌어 글자체가 달라졌다. 태산(泰山)에서 봉선(封禪)을 한 것이 72대였는데, (문자가) 같은 것이 없었다.[書者,如也。以迄五帝三王之世,改易殊體,封於泰山者七十有二代,靡有同焉.]"라고 하였다. 

이 말은 본래 『관자(管子)』에서 나오는 말로서 『관자』에 이르기를 "(과거에는 태산(泰山)에서 봉(封) 제사를 지내고 양보(梁父)에서는 선(禪) 제사를 지낸 이들이) 72개 가문이 있었고 이중 12개 가문만 직분이 있었다. 12개 가문의 수장은 곧 무회씨(無懷氏)가 되었다. 대저 무회씨 다음 황제시대에 이르는데 곧 먼 선조이다. 하물며 무회씨 이전도 있지 않으랴? [七十二代, 職其十二. 十二之首, 乃爲無懷, 夫無懷下距黃帝, 已爲遠矣, 況又在無懷以前乎?]"라 하였는데, 이 말에 따르자면, 문자의 발생은 포희씨보다 훨씬 이전이라는 말이 된다.

(생각컨데 관자에서 말한 72대 중 포희씨의 이름은 마지막에서 11번째로 그의 앞에 태산(泰山) 꼭대기에 글을 남긴 선왕, 선제들이 61명이나 되는 것이다. 당연히 이것도 완전히 믿을 만한 것은 못되지만 ···)

그리하여 신도의 "창힐재황제지전(倉頡在黃帝之前)"이란 설이 나온 것이다. 창힐의 시대를 앞으로 추정하는 이유는 아마도 황제 때에 도달해서야 비로소 문자가 처음으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순자(荀子)』「해폐(解蔽)」에 "글을 좋아한 자는 많았지만 창힐이 홀로 전하게 된 것은 그가 한 가지에만 마음을 쏟았기 때문이고, 농사를 좋아한 자는 많았지만 후직(后稷)만이 홀로 전하게 된 것은 그가 한 가지에만 마음을 쏟았기 때문이다.[好書者衆矣, 而倉頡獨傳者壹也; 好稼者衆矣, 而后稷獨傳者壹也.]"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창힐 이전에 벌써 글을 만든 이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후직 이전에 신농(神農)이 경작(耕作)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다만 창힐 이전에는 각 부락의 의사를 표시하는 부호들은 결코 한 곳으로 가지 않았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창힐은 중국 역사상 최초로 문자 통일을 주재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장태염(章太炎) 선생은 『검논(檢論)』 권1 「조자록기설(造字綠起說)」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123개 문(文)의 가로나 세로는 본래 정해져있지 않았다. 말, 소, 물고기, 새의 모든 형체 곧 누워있거나 일어나있거나 날고있거나 엎드려있는 것은 다 본뜬 것이다. 몸체 곧 비늘, 깃털, 털, 갈기는 다 더하거나 없앤 것이다. 자(字)가 각기 형태가 다른 것은 곧 부계(符契, 계약의 신표)를 합쳐보는데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창힐이 대게 처음 글자를 정리해 획일하게 하였고 붓을 대서 더하거나 빼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소홀하거나 젓가락 형태의 부호는 비로소 약속을 정해 풍속이 이루어지는 서계가 만들어졌다.[一二三諸文, 橫之縱之, 本無定也; 馬牛魚烏諸形, 執則臥起飛伏, 皆可則象也;體則鱗羽毛髯, 皆可增滅也: 字各異形, 則不足以合契. 倉頡者, 蓋始整齊畫一, 下筆不容增損. 由是率爾箸形之符號, 始為約定俗成之書契]"

위의 인용문은 가장 확실하게 창힐이 처음으로 서계를 만들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설명이다. 장태염의 제자 황계강(黃季剛)은 스승의 말을 드높이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문자의 통일은 사관(史官)의 임무라 하였다. 창힐은 기실 황제의 사관이었기에 '동서문자(同書文字)'는 바로 그의 직무상의 일인 것이다. 황계강은 『설문략설(說文略說)』중 『논문자초기지시대(論文字初起之時代)』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살펴보니 문자의 탄생은 필히 잠겨져 있다가 점점 약속을 정하는 풍속이 이루어지면서 대중들이 공인한 바가 있게되었다. 그런 연후에 행해졌지만 이름은 없었다. 아주 먼 옛날의 처음을 생각해보니 이미 문자가 있었고, 시대가 매우 멀고 아득했는데 여러번 고쳐졌다. 국토가 정해지지않고 다시 하나로 통일하기가 어려워졌는데 황제가 염제를 대신하는 시대에 이르러 하나의 중국과 같아졌다. 사관은 문자를 만들어 정하였는데 이 또한 주나라의 사주(史籒), 진나라의 이사(李斯)가 있는 것과 같았다.  그런 즉 창힐이 글자를 만들었다고 말하는 것은 마땅히 곤(鯀, 하나라를 창건한 우임금의 부친)이 성곽을 만들었다는 예와 같다. 반드시 전에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갑자기 (문자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자 곧 이름이 지어졌다. 『주례』「대행인」에 '왕이 크고 작은 나라의 제후들을 위무하는 방법은 9년마다 악사와 사관(史官)을 소집하여 서명(書名)을 깨우치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정현(鄭玄)의 설에 의하면 '명(名)은 곧 자(字)'라고 하였다. 이것에 근거하면 주나라의 다스림을 융성하게 했고, 글자를 통일했으며, 그 직분은 사관에게 있었다. 이것은 분명히 황제가 정리한 이래로 오래되었을 뿐이다.[按文字之生,必以寖漸,約定俗成,衆所公仞,然後行之而無閡。竊意邃古之初,已有文字,時代綿邈,屢經變更; 壤地離,復難齊一. 至黄帝代炎,如一方夏; 史官制定文字,亦如周之有史籒、秦之有李斯。然則倉頡作書云者,宜同鯀作城郭之例; 非必前之所無,忽然刱造,乃名作也. 周禮大行人: 王之所以撫邦國諸侯者, 九歲屬瞽、史,諭書名; 依鄭君說, 名卽字也. 據此, 隆周之治, 同書文字, 職在史官; 是赤循黃帝以來之舊而已.]"

이 말은 오래된 설의 모순을 통일하여 문자 창작의 참된 모습을 잘 파악할 수 있다.

고대 중국 호부(虎符).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기 위해 한 부분은 궁정에 보관하고 다른 한 부분은 궁정 밖 장군들이 보관해서 이 호부를 가진 장군이 황제를 대신해 군을 지휘하였다. 호부를 통해서 계약의 전통이 이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대 중국 호부(虎符).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기 위해 한 부분은 궁정에 보관하고 다른 한 부분은 궁정 밖 장군들이 보관해서 이 호부를 가진 장군이 황제를 대신해 군을 지휘하였다. 호부를 통해서 계약의 전통이 이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 서계(書契) 정리

1) 서계는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최초 문자이다.
2) 서계는 황제의 사관인 창힐이 창조하였다.
3) 서(書)란 바로 죽백(竹帛, 대나무와 비단) 위에 쓰였거나 그려진 부호이다.
4) 계(契)란 큰 약속을 말하는데 주로 증서에 쓰여진 글과 관련이 있다.

<참고 문헌>

지은이 임윤, 옮긴이 권택용,『중국문자학개설』, 형설출판사, 2002

[중국문자학개설]중국문자의 초조(初造)3

박종민 기자
중국문자학개설 <7>

오늘날에는 갑골문자의 연구가 이미 충분하게 발달되었으므로 중국 문자가 처음 만들어질 때의 상황을 추측 판단해 보고자 한다.


갑골문

갑골문자(甲骨文字)는 은(殷)·상(商)시대에 귀갑(龜甲, 거북이 껍질)이나 소의 갑골(胛骨, 어깨뼈)에 새긴 문자이다. 은나라 사람들은 귀신을 믿어 점 치기를 좋아하였다. 점을 칠 때 먼저 귀갑에 구멍을 뚫고 나서는 태워서 그 갈라진 무늬를 보고 길흉(吉凶)을 정하였으며, 점치는 사람은 다시 점친 일을 갑골 위에다 기록하였다. 대부분 새기고 나서 다시 먹이나 주사(硃砂, 붉은 모래)로 칠하지만, 새기지 않고 붓으로 쓴 것도 있다.

갑골문은 수(隋)·당(唐)시대에 이미 출토되었지만, 사람들의 주의를 끌지는 못하였다. 청나라 광서제(光緖帝) 때 어떤 사람이 갑골을 귀판(龜版)·용골(龍骨) 두 가지로 나누어 약재로써 약방에 팔았는데 광서 25년(1899) 왕의영(王懿榮)이 갑골에서 문자를 발견하자 그때부터 사람들이 중요시하게 되어 개인이 파내어 판 것이 무척 많았다. 국민(國民) 17년(1928) 중앙 연구원과 하남 박물관에서 공동으로 발굴하였는데 하남성(河南省) 안양현(安陽縣) 소둔촌(小屯村)(은허)에서 전후로 11만 편(片)의 갑골을 얻었다. 동작빈(董作賓)의 추정에 의하면 총 글자 수는 약 3,000자 이내 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효정(李孝定)은 알아 볼 수 있는 글자를 모아 1,377개라 하였다. 그 중에는 의류상형(衣類象形)한 초문(初文)도 있고, 형성상익(形聲相益)한 글자도 있었다.

상형자(象形字)는 고정된 구조가 없어서 임의로 증멸(增滅)할 수  있었다. '귀(龜)' 자의 경우는 꼬리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으며, 혹은 바로 되었고 혹은 옆으로 되었으며, 발도 어떤 것은 하나, 어떤 것은 둘, 어떤 것은 없었다.


고대 문명지인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중국의 상형문자

회의자(會意字)는 지금보다 더 명확하여 '목(牧)' 자의 경우는 목우(牧牛)이면 곧 우방(牛旁)을 가하였고, 목양(牧羊)이면 곧 양방(羊旁)을 더하였다. 견(犬, 개)·시(豕, 돼지)·마(馬, 말)·양(羊)·녹(鹿, 사슴) 자 등은 비(匕) 또는 토(土)를 더하여 자웅(雌雄)을 구별하였다. 형성자는 초문(初文)에다 산(山)·수(水)·토(土)·부(阜, 언덕)·인(人)·목(木) 등의 편방(偏旁)을 붙여서 만들어 졌으며, 그 중의 한 부분은 초문의 번문이체(繁文異體, 허례적으로 붙인 글자)라 할 수 있다.


회의자 예시

안양은 은나라 반경(盤庚)의 옛 도읍이었다. 소둔촌의 동북 그리고 서북방에 모두 원수(洹水, 현 안양하)가 둘러져 있었는데 바로 『사기(史記)』「항우본기(項羽本紀)」에서  "항우는 이에 원수 남쪽 은허 부근에서 만날 것을 약조하였다.[項羽乃與期洹水南殷虛上]"라고 말한 은허가 은나라 수도인 것이다. 반경이 은으로 천이(遷移)할 때가 약 서기전 1384년으로 황제(黃帝) 건국과 대략 1,200여 년의 간격을 두고 있다. 은허에서 얻은 갑골문은 3,000여 개에 가깝고, 초문과 자유자(孳乳字)까지 포함하고 있는 것을 보면 짧은 기간에 창조될 수 없었음이 분명하여 필경 오랜 시간의 진화 과정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황제 때에 중국 문자가 이미 생겨났음을 믿을 수 있다. 그러므로 『설문해자서』에서 말한 황제의 사관 창힐이 서계를 만들었을 가능성은 매우 큰 것이라 하겠다.

<참고 문헌>

지은이 임윤, 옮긴이 권택용,『중국문자학개설』, 형설출판사, 2002

瓢蟲

不朽의 古典에서 찾은 智慧와 心灵, 역사적 敎訓과 省察에서 옛글의 향기에 취해 사랑에 빠지게 되었음을 밝히는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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