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인과(因果)의 말씀

 18. 인과(因果)의 말씀


밀교신문    

“인(因) 지어서 과(果) 받음은 우주 만유 법칙이라. 좋은 인(因)을 지은 이는 좋은 과(果)를 받게 되고 나쁜 인을 지은 이는 나쁜 과를 받게 된다 ……. 모든 법은 인연(因緣)으로 이뤄지는 것이므로 만약 인연 없게 되면 모든 법도 없느니라.”

사람들은 원인과 절차보다는 결과를 중시합니다. 이것은 한 몸으로 원인은 지난 과거요 절차는 현재의 행위요, 결과는 미래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진각성존의 깨달음은 삼세의 인과입니다. 처음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부르는 불공으로 금생인과(今生因果)를 깨달아 병이 완쾌되었습니다. 다시 숙세(夙世) 인과를 깨닫기 위해 정진하였습니다. 정진 중에 관세음보살은 현생의 소리를 관함으로 현생의 공덕은 얻을 수는 있지만, 숙세의 인과를 깨닫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삼세에 통할 수 있는 진언을 찾았습니다. 

육자진언 옴마니반메훔이 비로자나불의 본심이요, 제불보살의 본심이며, 일체중생의 본심으로 삼세를 다스리는 진언임을 아시고, 농림촌 별도의 수행처에서 육자진언을 관하는 정진에 들었습니다. 7·7일 동안 정진 끝에 삼세인과(三世因果)를 증득하여 육자진언이 지닌 불가사의하고 미묘한 공덕(功德)을 깨달았습니다.

비로자나불은 중생과 동등하며, 불이 곧 중생이요 중생이 곧 불임을 알려주기 위하여 삼라만상의 작용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삼라만상의 작용은 삼세인과로써 티끌만치도 어긋남이 없는 진리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치를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진흙에서 연꽃이 자라지만 연꽃에는 진흙이 없습니다. 부처의 세계에는 중생이 없어도 중생이 있는 곳이면 반드시 부처가 있습니다. 불과 함께 같은 공간에서 만물과 시간을 공유하는 동업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부처는 왜 중생계에 머물까요? 중생은 동업을 버리고 별업(別業)을 지어 삼세를 윤회하는 길을 택하여 고통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는 중생의 우둔함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화신의 몸으로 출현하여 인과 이치를 설하였던 것입니다.

중생이 되는 몸과 입과 생각의 삼업(三業)을 부처가 되는 삼밀(三密)로 바꾸도록 하였습니다. 믿음이 약한 자에게는 믿음을,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지혜를, 욕심 많은 사람에게는 보시를, 성내는 사람에게는 인욕을, 게으름 사람에게는 부지런함을, 아픈 자에게는 묘약을, 고통받는 자에게는 해탈의 법을 설하였습니다. 

설법의 중심은 인과 이치를 스스로 증득하는 것으로 일상생활에서 조금만 마음을 모으면 깨달을 수 있는 법입니다. 상대와 조화를 이루고 만물과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가는 법입니다. 중생은 어리석고 단순하므로 모든 기준점을 자신이 이롭고 유익한 쪽으로만 생각하여 상대와의 조화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상대방에 나타나는 좋고 나쁜 현상에서는 인과를 인정하고, 자신에게 억울함과 불행이 나타날 때는 인과를 부정하며 불평과 원망의 잘못을 행하고 있습니다. 인과에 순응하는 마음이 없으면, 자연을 부정하고 인륜을 부정하고 세월을 부정하면서 자기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자기중심의 아집을 가진 고집불통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과 이치를 자기 편리할 대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인은 믿지 않고 과만 믿기도 하고, 인은 믿고 과는 믿지 않기도 하며, 인도 과도 믿지 않기도 하고, 인도 과도 모두 믿기도 합니다. 인색한 사람은 인은 믿고 과는 믿지 않는 사람이요, 불평과 원망심이 많은 사람은 인은 믿지 않고 과만을 믿는 사람이며, 고집스럽고 집착이 강한 사람은 인도 과도 믿지 않는 사람이요, 지혜로운 자는 인과를 모두 믿는 사람입니다. 자신은 어디에 속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인과는 상대성이며 평등한 법입니다. 나 혼자 지어 받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와 함께 짓고 함께 받는 것입니다. 상대가 미워하고 질투하면 나 자신이 상대가 질투하도록 한 원인을 찾아 참회해야 합니다. 상대가 싫어하고 미워하며 질투하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이 자신의 이익을 침범하거나 방해하거나 뺏어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상대의 이러한 마음을 이해한다면, 조심하고 또 조심하면서 행동해야 할 것입니다. 

나의 즐거움이 상대의 괴로움이 되고, 나의 잘함이 상대의 질투심을 유발하여 고통을 받게 한다면, 자신의 잘함은 진정한 잘함이 아니요, 자신의 영광 또한 진정한 영광이 아니므로 누구로부터 박수받을 수 있겠습니까? 자비한 마음으로 도와주지는 못할지언정 고통받게 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어버이가 자식을 생각하는 것처럼 자신의 행동과 말과 생각을 살피면서 상대가 좋아한다면, 손해를 보고 불편함이 있어도 양보하고 참으면서 희생해야 합니다. 나로 인하여 상대가 고통을 받을 때 자신도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 동업의 인과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스러운 일이 있을 때 원망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을 버리고 참화로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인과 이치를 깨닫는 것은 자기가 당하고 있는 것의 원인을 아는 것입니다. 세상에 나타난 모든 현상에는 원인이 있습니다. 원인 없이 일어나는 것은 없습니다. 원인을 깨닫는 길은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합니다. 

“생활 중에 각하라.”라는 말씀을 깊이 새기면서 생활하면 쉽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쉽게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은 정도 생활하는 사람이요, 깨달음이 어려운 사람은 바르지 못한 생활자입니다. 이 말씀에 덧붙여 “각(覺)보다도 체득(體得)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원인을 깨달은 연후에는 반드시 실천하여야 묘득(妙得)이 있다는 뜻입니다. 

서원을 보면, 원인을 알 수 있습니다. 서원이 있다는 것은 없는 것이 있고, 모자라는 것이 있고, 바라는 것이 있고, 가지고 싶은 것이 있고, 이루고 싶은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서원 정진 결과는 모자라는 원인, 없는 원인, 잘 안되는 원인, 장애 되는 원인, 고통의 원인이 먼저 나타나게 됩니다. 원인을 깨달은 다음, 고칠 것은 고치고 제거할 것은 제거하고 보완할 것은 보완하면 서원은 저절로 성취됩니다. 인과 이치를 깨닫고 실천한 공덕에는 일시적인 공덕과 영원한 공덕이 있습니다. 의뢰하고 기복으로 얻은 공덕은 일시적인 공덕으로 받은 뒤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지만, 자주적인 정법 수행의 공덕은 솟아나는 샘처럼 영원합니다. 

자주적 정법 수행은 인연과 결과를 조정하기 위한 수행입니다. 인을 짓는 자는 곧 나 자신입니다. 자신이 스스로 지어 받는 것이지 남에게 의뢰하여 인을 지어 과보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즉신 성불하기를 바란다면, 이 세상은 나를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불국토로 만들거나 지옥으로 만드는 것은 주인인 나 자신에게 있습니다. 내가 없다면 돌 한 조각도 풀 한 포기도 없을 것입니다. 만물과 뭇 생명이 나보다 먼저 이 세상에 와서 준비하고 나를 맞아 함께 운영하고 있습니다.

봄·여름·가을·겨울에 열(熱)이 필요하면 열을 만들고, 냉(冷)이 필요하면 냉을 만들면서 운행하고 있습니다. 부처님도 나를 위하여 정법을 남겼습니다. 선각자들도 나를 위해 먼저 경험하고 체험하면서 내가 생활하는데 쉽고, 편리하고, 편안한 삶을 살도록 남겨놓았습니다. 

내가 활동하기 좋도록 잘 꾸며진 무대입니다. 참으로 크나큰 은혜를 풀어놓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나만이 것이 아닙니다. 동업으로 함께 인을 지은 우리 모두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동업은 부모요, 형제요, 부부요, 자녀이며, 이웃이요, 도반들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고, 부처님의 정법을 만난 소중한 인연을 생각한다면, 세월을 어영부영 헛되이 보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어리석게 부처의 본성인 자성의 잃고 무명에 가리어 고락이 상반하는 세상으로 떨어져 은혜도 모르고, 불평하고 불만을 일으키면서 게으름으로 수행하지 않고 여기까지 흘러온 것입니다. 

황금의 본존과 노란 승복을 바라보면서 자신을 되돌아봅시다. 순결과 평온과 평화의 뜻을 지닌 노란 법의를 걸친 것은 무엇에 대한 맹세였습니까? 내 모양을 보는 모든 이가 증오와 분노와 악한 마음이 사라지고 평화와 안온한 마음을 가지기를 원함입니다. 이제부터 다시 초발심으로 돌아가 본분의 자리에서 너와 나의 경계를 풀고 인과 이치를 바르게 깨닫는 참 수행을 해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의 말씀과 스승님의 가르침을 믿고 수행하여 영원히 윤회하지 해탈의 참맛을 볼 그날까지 바른 마음과 바른 언어와 바른 생각의 좋은 인을 짓기를 바랍니다.

19.육바라밀(六波羅密)을 실천

밀교신문   

“좋은 결과 되는 육행 단시불공(檀施佛供) 정계불공(淨戒佛供) 안인불공(安忍佛供) 정진불공(精進佛供) 정려불공(靜廬佛供) 지혜불공(智慧佛供) 이 육행을 실천하여 저 안락에 이르도다.”

이 세상[법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부처ㆍ보살ㆍ천신ㆍ인간ㆍ 동물ㆍ식물의 마음은 본래 같습니다. 불보살이 자비를 지녔으면 중생들도 자비를 지니고 있고, 중생이 탐진치를 지녔으면, 불보살도 탐진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사람이 탐진치를 지니고 있으면, 동식물도 탐진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같은 마음을 지니지 않으면 이 세계는 형성되지 않고, 생명 또한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같은 마음을 지녔으나 다르게 부르는 것은 모양이 다르기 때문이며, 모양이 다른 것은 마음작용이 다르기 때문이며, 마음작용이 다른 것은 쓰임과 용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마음작용에서 부처는 부동의 자비심으로 존재하고, 보살은 유동의 자비심으로 존재하며, 성문과 연각은 자기의 안락만으로 존재하고 사람은 탐진치만의(貪瞋癡慢疑)와 오욕칠정(五欲七情)으로 존재하며, 축생은 우둔함으로 존재하고, 아귀는 식탐(食貪)으로 존재하며, 지옥은 고통으로 존재하고, 식물은 생존심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같은 물을 보고도 물고기는 집으로 보이고, 아귀는 불꽃으로 보이고, 지옥은 뜨거운 쇳물로 보이고, 식물은 생명수로 보일 것입니다. 우리들이 행하는 모든 행위를 내 마음에 미루어 생각하면,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알게 될 것입니다.

부처는 형상이 없습니다. 마음도 표현할 수 없습니다. 다만 빛이요, 진리요, 보리요, 지혜라 이름하며 법신이라 부를 뿐입니다. 법신불이 중생을 위해 빛을 나눌 대리자로 보낸 분이 화신불과 보살들입니다. 법계의 국토는 부처를 주인으로 하고 있습니다. 주인의 업무를 돕기도 하고 대신하기도 하는 분이 보살입니다. 

현재 이곳은 석가모니불 세상입니다. 보살로는 보현·문수·관음·세지·준제 등 영원한 보살과 출가 보살로 지장보살이 있습니다. 출가 보살은 위로는 보리를 구하고[上求菩提], 아래로는 중생교화[下化衆生]를 목적으로 공덕을 쌓고 있습니다. 상구보리는 부처가 되는 방편을 보이신 것이며, 하화중생은 육바라밀을 수행하여 32상과 80종호를 쌓기 위한 자비행을 행하는 것입니다. 보시하는 모습, 범행의 모습, 인욕 하는 모습, 고행하는 모습, 선정의 모습, 슬기로운 모습을 실천을 보여 우리들로 하여금 중생의 여섯 가지 마음을 보살의 마음으로 바꾸는 법을 설하면서 불도를 닦게 하는 것입니다.

부처 마음을 지닌 중생이 조금만 노력하면 실천할 수 있는 법이 육바라밀입니다. 

진각성존은 “세간사람 누구라도 아끼고 탐하는 마음이 있고, 악독한 마음이 있고, 성을 내는 마음이 있고, 게으른 마음이 있고, 어지러운 마음이 있고, 어리석은 마음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마음은 영원한 마음이 아닙니다. 언제든지 사라질 마음입니다. 비유하면, 땅속에 묻혀 있던 도자기와 같습니다. 물로 씻고 닦으면 본래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도자기에 새겨진 문양은 지워지지 않는 것과 같이 마음의 작용으로 생긴 여섯 마음은 흙과 먼지와 같아서 닦아 없앨 수 있지만, 본래의 불성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중생의 마음은 성불하기 전까지는 언제든지 나타나는 마음입니다. 우리의 주변은 나를 닮은 중생들이 모여듭니다. 자석에 쇠붙이가 붙듯이 모여듭니다. 

욕심이 있으면 욕심 많은 사람이 모이고, 시기 질투심이 많으면 시기 질투하는 사람들이 모이고, 성냄이 많으면 성 잘 내는 사람이 모이고, 게으르면 게으른 사람이 모이고, 마음이 산란하면 나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이 모이고, 어리석으면 어리석은 사람이 모입니다. 여섯의 중생심을 육바라밀로 다스릴 수 있습니다. 아끼고 탐하는 마음은 베푸는 마음으로 다스리고, 악독한 마음은 청결한 마음으로 다스리며, 성내는 마음은 하심으로 다스리고, 게으른 마음은 부지런함으로 다스리고, 어지러운 마음은 고요한 마음으로 다스리고, 어리석은 마음은 슬기로운 마음으로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살의 자비 활동입니다. 

육행 실천하는 방법은 쉽게 생각하기 바랍니다. 번뇌를 버리는 것이 보시가 되고, 망심에 물들지 않음이 정계가 되고, 정법을 손상하지 않음이 인욕이 되고, 법의 상을 가지지 않음이 정진이 되고, 법에 집착하지 않음이 정려가 되고, 모든 희론을 여의는 것이 지혜가 됩니다. 우리는 아침, 저녁으로 자신의 마음을 살피고 점검해야 합니다. 

자신의 주위에 좋은 기운이 모이기를 서원하면서 여섯 방향으로 예[육방예경(六方禮經)]를 하는 수행법도 있습니다. 동쪽을 향하여 예를 하는 것은 ‘단시바라밀’ 성취로 희사의 빛이 비치기를 서원함이요, 남쪽을 향하여 예를 하는 것은 ‘정계바라밀’ 성취로 순수하고 맑은 빛이 비치기를 서원함이요, 서쪽을 향하여 예를 하는 것은 ‘안인바라밀’ 성취로 인욕의 온화한 빛이 비치기를 서원함이요, 북쪽을 향하여 예를 하는 것은 ‘정진바라밀’ 성취로 불퇴전의 빛이 비치기를 서원함이요, 땅을 향하여 예를 하는 것은 ‘정려바라밀’ 성취로 화합의 빛이 비치기를 서원함이요, 하늘을 향하여 예를 하는 것은 ‘지혜바라밀’ 성취로 반야의 밝은 빛이 비치기를 서원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육방예’를 올리는 것이 새벽 염송정진입니다. 

육행 실천은 의뢰하는 마음이 있으면 실천하기 어렵습니다. 의뢰하는 마음으로 육행을 행하면 일회성의 공덕을 얻게 되지만, 자주성으로 육행을 실천하면 그 공덕은 영원할 것입니다. 

그리고 육행 실천은 연결고리로 되어있어 여섯이 모두 모여야 완전한 하나를 이룰 수 있습니다. 보시 잘하는 사람은 계행도 잘 지키게 되고, 계행 잘 지키는 사람은 인욕도 잘하게 되고, 인욕 잘하는 사람은 정진도 잘하고, 정진 잘하는 사람은 선정에도 잘 들고, 선정에 잘 드는 사람은 지혜도 잘 일깨워서 쉽게 불과 상응하게 됩니다. 

육바라밀은 어느 하나가 부족하여도 완전한 묘득을 얻지 못합니다. 부분적인 묘득은 육행 중에 하나만 행하여도 이루어집니다. 보시를 행하여 성불하는 자도 있고, 계행을 지켜 성불하는 자도 있고, 인욕을 행하여 성불하는 자도 있고, 정진만으로도 성불하는 자고 있고, 선정을 닦아 성불하는 자도 있고, 지혜를 닦아 성불하는 자도 있습니다. 이때의 성불은 응공으로 아라한 적인 성불입니다. 즉 여래 십호 중에 하나의 경지를 얻게 된 성불입니다. 

밀교의 육행 실천, 진각승의 육행 실천은 응공이 되려는 수행이 아닙니다. 불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수행이며, 본래의 부처기 지닌 지혜를 일깨우기 위한 수행입니다. 이를 육행불공이라 합니다.

육행 불공은 환경의 이치를 깨닫는 것입니다. 자신의 주변에 항상 자비롭고 맑고 순수하며, 온화하고 물러섬이 없이 용맹하며, 화합하고 슬기로운 밝은 빛이 감도는 공덕으로 비로자나불의 본마음을 일깨움을 말합니다. 본래의 지혜를 일깨운 연후에 진언으로 맹세를 합니다. ‘옴’의 청정성(자비), ‘마’의 진실성(정계), ‘니’의 유화성(인욕), ‘반’의 용맹성(정진), ‘메’의 안정성(선정), ‘훔’의 관찰성(지혜)을 원만하게 하겠다는 실천의 맹세입니다. 밝음이 나타나면 어두움은 자연히 사라집니다. 어둠이 어디로 간 것이 아니라, 밝음에 흡수되는 것입니다. 흡수된 어둠은 언제든지 밝음이 사라지면 다시 나타납니다. 웃음과 슬픔을 동시에 표현할 수 없는 것처럼, 밝음과 어둠은 동시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것을 일으키면 나쁜 것은 자연히 물러가게 되는 것이 자연의 원칙입니다.

육행불공 중에 ‘단시불공’, ‘정계불공’, ‘인욕불공’은 상대를 위한 불공이요, ‘정진불공’, ‘정려불공’, ‘지혜불공’은 자신을 위한 불공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중생계는 자신보다 먼저 남을 생각하는 ‘이타자리(利他自利)’가 되어야 합니다.

수행자가 법보시를 행하여 시은(施恩)을 갚음으로 육행 실천이 시작됩니다. 한 사람을 위하여 육행 실천하면 그 공덕이 되고, 두 사람을 위하면 공덕이 10배가 되고, 세 사람을 위하면 공덕이 100배가 되고, 네 사람을 위하면 공덕이 천배가 되고, 다섯 사람을 위하면 공덕이 만 배가 되는 것입니다. 만 배의 공덕이 쌓인다는 증거는 초전법륜에서 5비구를 아라한의 경지에 오르게 하였고, 중국에 전한 달마 선법이 5대에서 흥왕하였고, 진각 성존의 5인을 제도로 심인당을 개설하였고, 전국 교화법으로 5도 파견 불사를 하신 것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중심의 수 5에서 상승의 첫수가 6입니다. 이제 육바라밀과 육도를 벗어나는 공덕을 쌓기를 바랍니다.

20.수요(壽夭)와 인과 구분

밀교신문    

“사람이 날 때 벌써 수요(壽夭)가 결정해지는 인과구분을 말하면, 전생부터 부모태중(父母胎中)까지는 금생수명(今生壽命)을 결정하는 인기(因機)가 되고, 입태(入胎)로부터 출생하여 열반할 때까지는 결정된 금생수명(今生壽命)에 과기(果機)가 되므로 전생부터 자기가 짓고 태중(胎中)에 부모가 지은 자비와 살생은 금생수요(今生壽夭)가 되고, 출생하여 열반할 때까지 자기가 짓고 열반하여 수생(受生)할 때까지 부모 권속들이 지은 자비와 살생은 내생의 수요가 되느니라.” 

우리는 가까이 무엇을 두는 가에 따라 삶이 달라집니다. 오랜 시간 함께하려면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모두 곁에 두어야 합니다. 좋은 것만 갖고 나쁜 것을 버린다면 장원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선악을 함께 하여야 합니다. 다만 시간에 따라 빠르고 늦음이 있고, 공간에 의하여 많고 적음이 있고, 사람에 의하여 좋아하고 싫어할 뿐입니다. 이 모든 것을 피하거나 버리지 않고 감수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어둠이 있으면 밝음이 있고 밝음 뒤에는 어둠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걸음마를 처음 배운 어린아이가 불빛 아래에서 도망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는 아이가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울면서 달리듯이 도망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뛰어도 뛰어도 따라오는 자기 그림자에 화들짝 놀라서 어쩔 줄 모르는 모습입니다. 인지음 뒤에 따라오는 과보가 이와 같은데도 우리는 놀라거나 두려워하지도 않고 뛰지도 않습니다. 먼 시절부터 습관의 철이 들어 울지도 않습니다. 

사람은 원인과 절차는 생각하지 않고 결과만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원인과 결과의 중요함을 가르치는 것이 부처님의 인과설입니다. 원인과 절차와 결과로 삼세가 있고 시방이 있으며, 공평하게 평등하게 화합으로 만들어져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수명과 고락도 이와 같습니다. 자신만이 만든 것이 아니요, 시간과 공간과 만물의 화합으로 형성된 몸입니다. 현재 나의 몸은 부모가 1/3을 보태고, 권속이 1/3을 보태고 자신이 1/3을 모아 수명과 고락을 받을 수 있도록 형성된 것입니다. 인을 짓는 것은 자유지만, 받는 과는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새로운 몸을 받고자 할 때는 남겨둔 권속과 잉태해줄 부모에게 2/3의 권한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인(因) 지음을 마음대로 할 때 좋은 인을 지어서 좋은 권속을 남기고 좋은 부모를 만날 수 있게 하여야 합니다. 과가 나타나는 것을 보면, 내가 가장 좋을 때 나쁜 과가 나타날 수도 있고, 내가 가장 괴로울 때 기쁨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과보가 나타날 때는 조짐을 먼저 보여줍니다. 조짐이 나타날 때 기다렸다는 듯이 반갑게 받아 지혜롭게 응대하면 됩니다. 좋은 것은 필요할 때, 나쁜 것은 받을 능력이 있을 때 받도록 하면 됩니다. 미리 나타난 조짐에서 허물과 잘못을 아는 것은 장차 받아야 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행운을 만난 것과 같습니다. 받을 시기를 잘 조정하면, 악을 선으로 바꾸거나 가볍게 할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중생계는 나의 몸만 삼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삼합의 조화로 형성되고 운행합니다. 하루 중에 빛이 반은 밝고 반은 어둡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1/3은 아주 밝고, 1/3은 아주 어두우며, 1/3은 밝음과 어두움이 반반 섞여 있습니다. 선악도 이와 같습니다. 1/3은 좋은 것이요, 1/3은 나쁜 것이며, 1/3은 좋고 나쁨이 반반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삼위일체의 세상입니다. 시간으로 보면, 1년 360일에 1/2은 낮이요 1/2은 밤이지만, 세분하면 1/3이 낮이요 1/3이 밤이며, 1/3은 밤과 낮이 동시입니다. 앞의 1/3과 1/3은 변함이 없지만, 뒤의 반반인 1/3은 변화의 작용이 무상(無常)합니다. 변화가 무상한 혼용의 1/3을 어느 쪽으로 당겨서 활용하는가에 따라 생활의 차이가 생기게 됩니다.

선과 악, 화와 복, 행과 불행, 성공과 실패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완전한 성공과 완전한 실패는 없습니다. 성공도 실패도 아닌 중간의 빛이 항상 있습니다. 성공하고도 마음이 불안하고 실패하고도 마음에 여유가 있는 것은 중간의 1/3이 있기 때문입니다. 혼합의 1/3은 곧 희망의 업이며, 서원의 목이며, 정진의 빛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역전도 반전도 되는 것입니다. 자신과 부모와 권속이 지닌 각각 1/3의 인(因)이 연(緣)의 화합에 따라 결과도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좋은 부모, 좋은 권속을 만날 수 있도록 자신이 좋은 인을 지어야 할 것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일평생 사용할 의식주는 가지고 태어납니다. 빈부가 있고, 고통이 짙고 얕으며 강하고 약할 뿐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아픔으로 오는 모든 고통은 같습니다. 배 아픈 통증과 상처 난 통증과 가시에 찔린 통증과 머리 아픈 통증은 같습니다. 아픈 부위가 다르고 강약이 다를 뿐입니다. 통증은 통증일 뿐입니다. 즐거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승진한 즐거움이나 승리한 즐거움이나 성취한 즐거움이나 즐거움은 같습니다. 승진한 즐거움은 빨갛고, 승리한 즐거움은 노랗고, 성취한 즐거움은 파란 것이 아닙니다. 색상은 그냥 색상입니다. 즐거움은 즐거움일 뿐입니다. 다만 보는 자의 마음 따라 좋고 나쁨을 다르다고 분간할 뿐입니다. 기쁨은 같은 기쁨이요 성냄은 같은 성냄이요, 슬픔은 같은 슬픔이요, 즐거움은 같은 즐거움입니다. 

흔히 말하기를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합니다. 전쟁이 없으면 전쟁영웅은 탄생하지 않습니다. 전쟁으로 한 사람의 영웅을 만들기 위해 누군가의 욕심이 하늘을 찌를 듯 높았던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많은 사람의 희생되고 자연이 파괴된 대가로 영웅이 탄생한 것입니다. 어린이가 전쟁놀이를 좋아하는 것은 전쟁의 조짐을 보이는 것이요,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의사와 법관이 되기를 원하면, 장차 이 땅에는 병이 많아지고 범법자가 많아진다는 조짐을 보인 것입니다. 원을 한 자신이 원이 성취된다는 것은 병으로 범죄자로 고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나도 좋고 자연도 좋고 상대도 좋은 원을 세워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 이치를 알고 처음부터 올바른 원을 세울 것입니다. 올바른 원을 세운 사람은 나타난 조짐에 대하여 순응하고 받아들이지만, 우둔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인과를 부정하고 나쁜 과보가 나타나면 도리어 원망까지 합니다. 모든 과보는 한 생에 지은 것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세월에 지어 모은 것입니다. 그것도 나 혼자만이 지은 것이 아닙니다. 모든 생명과 만물이 함께 어울려 동업으로 지은 결과입니다. 이러한 인 지음으로 자신과 부모와 권속은 과거 미래 현재를 연결하는 고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연결고리를 해탈의 고리로 만들기 위하여 수행합니다. 수행 중에 삼세의 인과를 깨달을 수 있는 수행은 육자진언 수행입니다. 진언을 염송하면, 첫째 법신 부처님의 설법을 듣게 되고, 둘째 이전에 잘못한 것을 알게 되며, 셋째 마음 고치는 법을 깨닫게 됩니다. 깨달은 법대로 실천하여 부모와 권속의 은혜를 갚고 해탈하기를 서원합니다. 

우리는 참으로 용감한 사람입니다. 부모의 은혜를 입고도, 국가의 은혜를 입고도, 자연의 은혜를 입고도, 스승의 은혜를 입고도 갚을 생각을 하지 않고 도리어 계속 받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나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잘못 판단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세상에는 행복하게 사는 사람보다 불행하게 사는 사람이 많으며, 노력하지 않고 요행으로 횡재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많으며, 정직한 사람은 적고 아첨하는 사람이 많으며, 건강한 사람보다 아픈 사람이 많습니다. 수행자 가운데도 계율을 지키는 자는 적고 파계하는 자가 많으며, 정진하는 자는 적고 게으른 자가 많으며, 지혜 밝은 사람은 적고 어리석은 사람이 많으며, 깨친 사람은 적고 번뇌로 산란한 사람이 많으며, 베푸는 자는 적고 인색하고 탐착한 사람이 많은 세상처럼 보입니다. 모두 인과응보에 의한 모습들입니다. 인지어 받는 과보는 누가 있어 복을 주거나 벌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때가 되면 자연 절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고통스러운 과보를 받을 때 하늘이나 땅이나 부모나 이웃이나 상대를 원망한다면 괴로움만 더할 뿐,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러한 인과 이치를 알기 위해 지혜를 일깨우는 수행을 합시다. 자신만을 위하는 수행이 아닌 자연과 뭇 생명이 모두 해탈하는 수행을 하기 바랍니다.

21.자성일(自性日) 불공

밀교신문    

“법신불은 태양 같고 화신불은 만월(滿月) 같다. 밀교본신(密敎本身) 양(陽)인 고로 일요자성(日曜自性)날을 한다. 그러므로 일요일은 비로자나불일이라.” 

진리는 하나[一]입니다. 온천지에 가득하되 걸림[○]이 없고, 언제나 한결같이[一] 변함없는 하나입니다. 이 하나의 진리[一]를 세우고자 하는 것이 사람[人]입니다. 세운다는 진리는 세우지 못하고 자신이 먼저 서는[亻] 경우도 있고, 진리를 힘써 세우려다 뒤로 넘겨 자신이 도리어 진리 밑으로 들어가기[入]도 합니다. 자연에는 습성이 있고, 인간에는 심성이 있고, 시간에는 흐름이 있습니다. 이러한 진리가 각각 나타나되 그 중심을 자성(自性)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공간에도 자성이 있고, 모든 생명에도 자성이 있고, 시간에도 자성이 있습니다. 사람이 가진 것을 자성심이라 하고 만물이 가진 것을 허공이라 하고 시간이 가진 것을 자성일이라 합니다. 비로자나불은 밝은 빛을 자성으로 표현하여 중생의 자성과 공간의 자성과 시간의 자성을 하나로 일치시키는 법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가르침이 지혜의 빛을 일깨우는 마음 닦는 법입니다.

진각성존은 비로자나불의 가르침에 따라 일요일을 자성일(自性日)이라 하였습니다. 자성은 곧 비로자나불이 인증한 심인(心印)을 찾는 날입니다. 6일간 현실의 일을 열심히 하고, 이날 하루만은 자기를 되돌아보는 날로 사용하라는 뜻입니다. 자성일은 일요일만 한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태양이 뜨고 지는 날은 모두 자성일입니다. 그런데 유독 일요일을 자성일이라 정한 것은 중생은 은혜로 몸을 받은 업신(業身)입니다. 엿새 동안은 은혜 갚음을 위해 노력하는 날이므로 자성일이라 하지 않을 뿐입니다. 진각성존은 이를 구분하여 “자성일을 보리심의 날[發菩提心]이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보리행의 날[行願菩提心]이라.” 하였습니다. 

보리심은 마음을 닦는 날로 자성중생을 제도하는 날이며, 보리행은 일상생활에서 은혜 갚음을 실천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요일마다 각각 실천하는 의미를 밝혔습니다. 월요일은 한 자성이 시작되는 날이므로 달처럼 순수하고 원만한 마음으로 임하는 날이며, 화요일은 고치고 바꾸는 날이며, 병원을 찾거나 수술 등을 하면 좋다는 날이요, 수요일은 한 자성의 중심이며 물질이 활동하는 날이므로 새로운 것을 시작하거나 옮기는 날이며, 목요일은 성장하는 날이므로 확장하는 날이며, 금요일은 물이 맑은 날이므로 마음과 몸을 정화하고 점검하는 날이며, 토요일은 모든 것은 흙으로 돌아가듯이 가정으로 돌아가 화합하는 날입니다. 일요일은 육신을 쉬고 성품 찾는 날이므로 육일간의 일들을 되돌아보면서 참회하고 마음 맑히는 날입니다. 

진각성존은 시간의 중요성을 가르치면서 교화를 담당한 성직자는 새벽정송과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정한 낮 불사를 반드시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서원이 있어 불공할 때도 불사 시간을 엄숙하게 지킴으로 서원이 성취된다고 법하였습니다. 만일 불사 시간에 조금만 늦어도 그로부터 다시 불공을 정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요일 다음으로 수요일을 중요하게 말씀하였습니다. 

이 법은 자연의 습성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역학으로는 달에 초승에서 보름달로, 보름에서 그믐으로 이어지면서 원만하였다가 이지러지는 모습이나 하루의 시간을 12지(支)로 나누면서 동물을 정할 때 첫 시간에 쥐로 정한 것은 쥐는 앞 발가락 4개 뒤 발가락 다섯입니다. 이것은 음양(陰陽)을 함께 지닌 조화로 하루의 시작과 하루의 마침을 동시에 가지고 있음을 뜻하며, 밤 영(12)시를 자시(子時)의 시작으로 하지 않고 전날 밤 11시부터 다음날 밤 1시 이전으로 정한 것도 음양의 이치를 따른 것입니다. 진각밀교는 달을 중심으로 하지 않고 비로자나불일(佛日)인 태양을 중심으로 하였습니다. 달의 중심이 보름이듯 태양의 중심은 수요일 낮 12시를 기점으로 전요일(前曜日)과 후요일(後曜日)로 나누었습니다. 일요일,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오전까지는 전요일이요, 수요일 오후부터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까지는 후요일로 나누어 전요일 84시간 후요일 84시간이 됩니다. 불교에서 84는 가장 좋은 수, 가장 밝은 수, 가장 원만한 수, 가장 큰 수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보름달이 떠오를 때 소원을 빌 듯이 서원 있어 한 자성 불공할 때 수요일을 법문을 보는 기점으로 하는 것입니다. 월요일부터 수요일 오전까지 나타나는 법문은 첫째 정진 자의 신심과 둘째 정성의 깊고 낮음과 셋째 서원의 옳고 그름을 알려 주는 법문이요, 수요일 오후부터 토요일까지 나타나는 법문은 서원 성취의 장애 되는 원인과 막는 법을 깨닫고 실천하는 법을 알려줍니다. 전요일 동안에는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법문이 나타나고 후요일 동안은 외부의 물질로부터 법문이 들어옵니다. 먼저 마음에서 나타나는 법문은 염송으로 다스리고, 후에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법문은 희사로 다스려야 합니다. 회향일 일요일은 전 후요일이 합한 날이듯이 물과 심이 하나로 화합하는 자성일입니다. 만일 일 주간 동안 나타난 심의 법문과 물의 법문을 실천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면, 일요일에 보충적 염송과 희사법을 다시 실천합니다. 이렇게 안과 밖의 법문을 깨달아 정진하고 실천하면 서원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진각밀교의 일요일을 비로자나불일하여 자성을 찾아 밝히는 법은 미묘하고 불가사의한 법입니다. 부처님 재세시에 유일하게 세운 불탑이 미얀마 쉐다곤 황금대탑입니다. 부처님의 머리카락을 모신 94m 황금대탑은 64개 작은 불탑과 탑을 돌 수 있는 사이에 72개의 크고 작은 불탑이 싸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탑의 둘레에 8방으로 요일을 상징하는 동물의 상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동쪽에는 월요일에 태어난 사람을 수호하는 호랑이가 옥불을 모시고 있고, 서쪽에는 화요일에 태어난 사람을 수호하는 쥐가 옥불을 모시고 있고, 남쪽에는 수요일 오전에 태어난 사람을 수호하는 상아가 있는 코끼리가 옥불을 모시고 있고, 북서쪽에는 수요일 오후에 태어난 사람을 수호하는 상아가 없는 코끼리가 옥불을 모시고 있고, 남동쪽에는 목요일에 태어난 사람을 수호하는 사자가 옥불을 모시고 있고, 북쪽에는 금요일에 태어난 사람을 수호하는 두더지가 옥불을 모시고 있고, 남서쪽에는 토요일에 태어난 사람을 수호하는 용이 옥불을 모시고 있고, 북동쪽에는 일요일에 태어난 사람을 수호하는 가루라가 옥불을 모시고 있는 상이 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태어난 요일의 동물상 앞에서 좋은 인연이 맺어지도록 관욕식(灌浴式)을 행하기도 합니다. 미얀마는 성(姓)이 없습니다. 이름은 출생한 요일에 따라 미얀마 자음에 의해 정해집니다. 머리카락을 자를 때도 자신이 태어난 요일을 피합니다. 

이처럼 요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라입니다. 진각성존은 수만리 머나먼 이국땅의 풍습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진리는 어디에서나 변함없이 같습니다. 육자진언 염송으로 비로자나 불일의 진리를 깨달았기에 일주일을 한 자성으로 묶고 일요일을 자성일로 하여 생활하고 불공하는 법을 설하신 것입니다. 중생은 견물생심(見物生心) 하는 마음 때문에 탐진치에 물들기가 쉽습니다. 내면에 불성(佛性)을 가졌는데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닿음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물질과 명예와 권력에 집착하여 청정한 자성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자성일에 성품을 찾고 물질이 흐르는 수요일에 물질을 청정하게 다스리는 법을 수행하도록 자성일과 수요일의 수행법을 전하였습니다. 일요일에 심인당에서 보리심을 일으켜 심공하고, 수요일에 일상생활에서 보리행을 실천하여 해탈의 공덕을 얻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이 진각성존의 다함 없는 서원입니다. 

마음을 닦는 실천 법을 배우기 위하여 불사 시간을 지키는 것입니다. 지킨다는 것은 어떤 규범에 수순(隨順)을 뜻하는 것입니다. 수순은 자신을 내려놓는 것으로 상(相)을 버려야 합니다. 자기의 생각을 내려놓지 않으면 규범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특히 불공은 자신을 불보살에게 맡기고 오로지 정진할 뿐입니다. 진각밀교는 자성일과 수요일 불사를 빠짐없이 하면서 자기 성품을 보살피고 엿새 동안 지은 잘못을 뉘우치면서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정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자성일 하루 심공(心工)하는데 엿새 동안 수익(收益)은 칠 일간 모두 일한 것보다 더 많아지고 또 안락하게 살게 되며, 자성일 하루 일을 한 그 칠 일 동안 수익(收益)은 하루 심공(心工)한 저 육 일보다 적어지고 엿새 동안 고통(苦痛) 가운데 살게 되느니라.” 하는 법문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22. 지비용(智悲勇) 탐진치(貪瞋癡)

밀교신문    

“지혜로써 인을 하고 대비로써 행을 하고 용예(勇銳)로써 혹(惑)을 끊어 탐진치를 단제(斷除)하고 자성중생(自性衆生) 제도하여 공덕 널리 회향(廻向)하여 삼세불을 갚읍시다.”

부처님 가르침 중심은 계정혜(戒定慧)입니다. 계는 사람으로 살아가라는 뜻이요, 정은 자신을 살펴보라는 뜻이며, 혜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라는 뜻입니다. 어쩌다 순간의 잘못으로 불계(佛界)를 벗어나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본래 자리로 돌아가려면 사람의 업을 벗어나는 공부가 필요합니다. 업은 삶이며 삶에는 자연과 조화하고 상대와 화합하는 선한 삶이 있고, 수라처럼 다투고, 축생처럼 우둔하고 아귀처럼 욕심 많고 지옥처럼 고통받는 악의 삶이 있습니다. 선한 삶은 쉽게 본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지만, 악의 삶은 고통의 윤회를 반복하면서 본래의 자리와 점점 멀어질 뿐입니다. 우리들은 이러한 이치를 알지 못하고 본래의 자리와 점점 멀어지는 삶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여 멀어지는 근본이 되는 욕심내고, 성내고, 어리석음을 다스리는 계를 말씀하였습니다. 45년간 설하시고 열반하시면서도 “계로써 스승 삼아라.”라 당부까지 남겼습니다. 

계율은 자신의 마음을 밝힐 수 있는 수행의 준비단계입니다. 현실 생활을 하는 우리는 계율을 실천한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많은 세월 동안 윤회하면서 몸으로 익히고 입으로 익히고 마음으로 익힌 파계의 습관을 바꾸기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습관을 바꾸려면, 지금의 행동과 언어와 마음 씀을 살피고 관찰해야 합니다. 나는 지금 가능한 일에 말하고 행동하는지? 불가능한 일에 매달려 불필요한 망상과 헛된 꿈을 꾸면서 뜬구름 잡는 몸짓은 하지 않은지 살펴야 합니다. 티끌이 있으면 제거하고 쌓였으면 털어내고, 탁하면 맑게 하고 어두우면 밝게 하면서 사람과 자연과 시간에 순응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스스로 찾지 못하면 스승에게 물어야 합니다. 묻는 것이 진언 염송입니다. 부처님도 출가 후 많은 스승을 찾아 길을 물으면서 수행하였습니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 것이며, 최후의 길을 알 때까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계학(戒學)입니다. 계학이 원만한 연후에 정학(定學)에 들어야 합니다. 

계의 단계가 원만할 때 할 때 보리심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화엄경』에 초발심시변성정각(初發心時便成正覺)이라 하였습니다. 싯다르타의 정각산에서 피골이 상접한 고행의 모습, 진각성존이 농림촌에서 행한 수행이 두 번째 정학(定學)의 모습입니다. 정학이 무르익으면 혜학(慧學)에 들어 마원을 항복 받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 형상 없고 깨달음도 없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의 혜(慧)는 가장 밝고 가장 맑으며, 가장 크고 가장 아름다워 무엇으로도 비유하거나 비교할 수 없어 불가사의하고 미증유합니다. 그러나 중생은 알지 못합니다. 정(定)도 모르면서 혜(慧)를 어찌 알 것이며, 계(戒)도 원만하지 않은데 정을 어찌 알겠습니까? 부처님이 중생을 위하여 방편으로 계정혜를 낮추어 설한 것이 계정혜 삼학(三學)입니다. 진각성존은 방편의 계정혜 삼학 중에 계학(戒學) 실천으로 지비용 탐진치를 설하였습니다. 

중생이 사는 세상, 사람은 욕심(欲心)과 분심(忿心)과 용심(勇心)이 있어야 합니다. 욕심과 분심과 용심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세상입니다. 욕심은 생명을 유지하는 요건이요, 분심은 게으름을 막는 마음이며, 용심은 부지런함을 일으키는 마음입니다. 사람이 욕심이 없으면 무기력하기 쉽고, 분심이 없으면 나태하기 쉽고, 용심이 없으면 방일하여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욕심과 분심과 용심은 자신의 삶을 윤택하게 할 뿐 아니라, 사회를 발전시키는 동력이므로 그 자체가 죄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수행자도 욕심과 분심과 용심을 갖도록 하는데, 하물며 현실 생활하는 우리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욕심은 바라는 마음이요, 하고자 하는 욕망이므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발전시키는 힘입니다. 이러한 욕심이 죄악이 되는 것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남의 물건을 뺏고, 못 갖도록 방해하며, 가진 자를 시기하고, 잘된 자를 질투하며, 가는 길을 훼방하고 괴롭힌다면 이것이 탐욕의 죄악이 되는 것입니다. 탐욕에 집착하여 남을 해치는 마음으로 상대방에게 연속적으로 행하면 이것이 독(毒)이 되는 것입니다. 

분심(忿心)도 마찬가지입니다. 분심은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성냄입니다. 자신의 능력과 재능이 부족하여 얻지 못하고, 이루지 못하고, 채우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자신에게 성내는 것은 죄악이 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부족함, 얻지 못함, 이루지 못한 것이 상대에 있다고 말하면서 상대를 험담하고, 상대를 향하여 짜증을 내고, 상대를 원망하면서 큰소리로 성내며, 자신의 고통을 상대에게 전역시키는 것이 진심이 되는 것입니다. 진심의 분을 참지 못하고 시기와 질투심을 가지고 자리를 옮겨가면서 두고두고 상대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진심의 독이 되는 것입니다. 

용심(勇心)도 이와 같습니다. 용심은 방일함을 다스리는 용기입니다. 시간의 흐름을 알아서 거꾸로 가지 않고, 만물의 존귀함을 알고, 사람의 도리를 알아서 순응하는 것이 용심이요, 작심삼일(作心三日)의 행동, 시작이 반이다. 라는 안일한 마음을 버리는 것이 용심입니다. 능력도 없고 재주도 없고 순서도 모르고, 계획도 없고, 준비도 없이 탐심으로만 힘쓴다면 이것은 만용(慢勇)이 됩니다. 자신의 만용을 상대방에게 권유하면서 동행하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음[癡心]이며, 잘못을 고치지 않고, 고집하면서 인과 이치를 부정하고 거듭거듭 고집하면서 동행하기를 강요하여 상대방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치심의 독이 되는 것입니다. 옛 성인들은 새벽부터 정진하여 저녁에 깨닫지 못하면, 다리 뻗고 울었으며, 잠 오는 것을 성화하여 송곳으로 찌르는 분심을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욕심도 분심도 용심도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하면 탐심이 되고 진심이 되고 만용이 되며, 고치지 아니하고 바꾸지 아니하고 고집으로 거듭거듭 장소를 옮겨가면서 반복하여 자신과 상대에게 고통을 주면 독(毒)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법을 만났습니다. 탐진치를 바로 알고 다스리는 지비용의 활용법도 알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가르침대로 실천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좋은 것에 눈을 감고 좋은 말씀에 귀를 막았다면 이제부터 눈과 귀를 열고 바른 행동과 바른말과 바른 생각으로 방황의 여정을 벗어나 제자리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이익과 명예와 권력만을 구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이웃과 사회에 공존하면서 양보하고 화합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수행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제자리에 가지런하게 놓는다는 뜻입니다. 탐은 탐대로 진은 진대로 치는 치대로 각각의 제자리에 가지런하게 두고 관여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미련도 갖지 말고 집착도 하지 말고 그냥 그대로 두면 됩니다. 부처와 중생이 다른 점은 부처는 모든 것을 제자리에 두고 필요할 때 사용한다는 것이요, 중생은 오욕칠정(五欲七情)에 물들어 아무 때나 아무 곳에서나 나만의 것처럼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욕심을 자신만을 위하면 탐욕(貪欲)이 되고, 탐욕은 인정(人情)이 되며, 인정은 사정(私情)이 되고 사정은 외도(外道)가 되어 순수성을 잃고 무한한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습관이 된 탐진치(貪瞋痴)를 참회하여도 찌들은 독(三毒)은 쉽게 없어지지 않으며, 후일에 다시 범하게 됩니다. 일시적 참회로써 약간의 복은 되었지만, 다시 고통으로 돌아갑니다. 비유하면, 솥에 끓는 물을 차게 하고자 얼음덩이를 넣어도 차갑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궁이의 불이 있으면 솥의 물은 차가워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탐진치 불꽃을 없애기 위하여 행주좌와 어묵동정에 참회하고 실천하면서 좋은 행동과 좋은 말과 좋은 생각을 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눈앞에 나타난 형상을 판단하려 하지 말고 내면의 성품(性品)으로 세상을 보아야 인과가 보입니다. 인정(人情)으로 세상을 보면 탐진치(貪瞋癡)만 보일 뿐입니다. 이제 자신을 지키기 위한 대분심과 용맹심으로 수시로 일어나는 탐진치를 잠재우는 계학(戒學)을 성취하기 바랍니다. 자비와 지혜와 용맹으로 씨 뿌리고 마음 밭을 가꾸어 현득성불을 추구하기를 바랍니다.

23. 마음 닦는 방편

밀교신문   

“이 마음을 잘 닦자면 나라 위해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순하며, 가정에서 화목하고 친구에게 신(信)을 두고 남에게는 불의(不義)말며, ………. 못된 일을 하지 말고 좋은 일만 하는 것이 이 마음을 닦게 되는 효순심(孝順心)이 되느니라.”

자연과 생명체는 구성하고 태어날 때 목적이 있습니다. 목적으로 향할 때 시간이 도움을 줍니다. 이것이 자연[空間]과 생명체[人間]와 시간의 조화입니다. 이러한 조화에는 반드시 방편이 있어야 합니다. 방편(方便)의 방(方)은 모난 정사각으로 법을 뜻함이요, 편(便)은 편리함을 말하는 것으로 생활에 맞게 할 수 있고, 시간에 맞게 할 수 있고, 장소에 맞게 하여 목적달성을 이루는 뜻입니다. 방편 중에는 불(佛)의 방편과 중생의 방편이 있습니다. 불의 방편은 진실 그 자체로 오로지 중생을 위함을 말함이요, 중생의 방편은 생활 방편으로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불의 진실은 본래 방편이 없습니다. 다만 중생을 위하여 방편으로 우리와 꼭 같은 몸으로 출생하고 출가하고 고행하고 성도하고 전법하면서 80년을 일기로 열반한 모습이 모두 불의 일대사인연을 보이신 방편입니다. 한 장면 한 장면을 나타내는 방편이 구경임을 강조하였습니다. 

<대일경>에 “일체지지(一切智智)는 무엇으로 얻습니까?” 물음에 “보리를 인(因)으로 하고 대비를 근(根)으로 하고 방편을 구경(究竟)으로 한다.” 하여 여실지자심(如實知自心)이라 답하였습니다. 그리고 <금강정경>은 불과(佛果)에 이르는 순서를 발심→수행→보리→열반→방편의 오전(五轉)을 설하면서 방편을 구경에 두었습니다. 이렇게 양대경에서는 자비, 발심, 수행, 보리, 열반으로 전개되는 부동(不動)의 지혜로 방편을 구경으로 활용이 된다고 설하였습니다. 이것이 반야(般若=지혜)는 어머니가 되고 방편은 아버지가 된다는 가르침이 담겨있습니다. 부동(不動)의 반야와 활동의 방편은 마치 새의 두 날개와 같고 수레의 두 바퀴와 같아 어느 하나라도 결함이 있으면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는 지혜와 방편의 쌍륜(雙輪), 쌍익(雙翼)을 보통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특히 방편은 진리와는 무관한 것으로 보면서 요령으로 잔꾀로 얄팍한 수단쯤으로 생각하여 얕잡아보고 있습니다. 중생의 삶은 모두 방편에 의하여 이루어집니다. 몸도 언어도 마음도 방편으로 행동하고 말하고 생각하는 그 자체인 줄 모르고 가볍게 여기고 있습니다. 

방편은 곧 자신이 지혜이며, 능력이며, 활동의 꽃입니다. 공간과 시간을 자신의 마음에 맞게 활용할 수 있는 변화가 무상한 조화입니다. 인간이 처음 불을 발견하고 사용하면서 불씨를 지키기 위하여 묻어두는 것이 방편이었습니다. 그 후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는 성냥으로 시작하여 라이터가 개발되고 전기로 발전하였습니다. 

맨발에서 짚신으로 다시 가죽으로 구두를 만들었으며, 색상과 모양을 내고 추위와 더위를 이겨내도록 만들었습니다. 식량이 없고 벼는 아직 익지 않아 먹을 것이 없을 때, 익지 않은 벼를 불에 쪄서 찐쌀을 만들어 먹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편안함과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자연스럽게 변천한 것이 방편입니다. 사람에 맞추고 시대에 맞추고 장소에 맞추면서 조화를 이루는 방편은 앞으로도 편리함과 윤택함을 위해 계속 변천할 것입니다. 변천하여 조화시키는 방편을 자신만을 위하여 활용하면, 오히려 편안함이 불편함으로 윤택함이 거침으로 변하면서 자연을 파괴하고 생명체를 해쳐서 자신이 설 땅조차 잃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동업 중생입니다. 어느 하나가 잘못되면, 잘못의 파장이 온천지에 미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도미노 현상과 나비효과의 이치입니다. 

중생 방편의 구경은 인과를 다스리는 방편입니다. 인과를 다스리는 방편은 좋은 것은 더 좋게, 나쁜 것은 소멸시키며 필요한 것을 가지게 하고, 필요 없는 것을 없애는 것입니다. 중생도 불성을 지녔기 때문에 진실 방편을 활용하여 윤회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방편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즉 윤회하는 중생 인과를 영원불멸하는 불의 인과로 바꾸는 것입니다. 

문자나 언어나 형상으로 전하지 못하고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전해지는 불의 진실 방편을 중생들이 쉽게 알지 못하므로 보살과 천신, 그리고 만물을 통하여 이행전행(以行傳行), 이언전언(以言傳言)의 방편을 보여주신 분이 석가모니불입니다. 화신불이 보여준 방편을 비로자나불의 진실로 받아들여 삼밀 수행하면서 마음을 닦는 것입니다.

중생 방편 중에 최고 방편은 인과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 삼밀 수행입니다. 삼밀 수행으로 지혜를 얻으면, 먼저 잘못된 인이 보일 것입니다. 잘못된 인의 싹이 나기 전에 제거하는 것이 참회합니다. 이것이 최고의 방편인 이참(理懺)입니다. 다음 이참을 하지 않아 싹을 제거하는 시기를 놓쳐 싹이 난 것을 더 자라지 않도록 참회합니다. 이것이 방편의 사참(事懺)입니다. 지금까지 지은 인은 참회로도 어찌할 수 없지만, 과는 참회로 소멸시켜 두 번 다시 받지 않도록 정화할 수 있는 중생의 참회 방편입니다. 참회 방편으로 인과를 마음대로 못한다면, 수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수행으로 복과 명만을 구한다는 가르침은 옳은 가르침이 아닙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가진 방편의 힘을 사용하여 좋은 방향으로 변천시키지 못하고 복과 명예만을 바라는 의뢰로 수행한다면 올바른 신교도가 아닙니다. 최고의 방편을 두고 일생의 부귀영화만을 바란다면 너무도 아까운 기회를 놓치는 결과가 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중생은 본래 진실 법은 사용할 수 없고 방편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성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비유하면, 검은 물감을 칠하면서 희게 보이기를 바라는 것과 같고, 쏟아지는 빗속에서 태양 빛을 보려는 것과 같고, 타는 불꽃에서 얼음 얼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중생이 가진 고정관념입니다. 그러나 방편이 구경임을 깨달으면, 검은 물감 속에서도 흰빛을 볼 수 있고, 소나기 속에서도 태양 빛을 볼 수 있으며, 타는 불꽃에서 얼음이 솟아오를 것입니다. 보름달은 보름밤에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믐에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생은 자신의 몸과 언어와 마음의 진실을 돌아보지 않고 명분(名分)만을 내세우는 그릇된 방편을 사용하므로 달의 참모습을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방편이라는 이름으로 삿된 법과 외도법을 밀교로 포장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기도 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이익과 명예를 위한다면 영원히 윤회에서 벗어나는 방편은 보지 못할 것입니다. 지혜롭다는 중생이 수단과 방법은 잘 알아서 행하지만, 이 지혜는 하루살이의 지혜입니다. 비 오는 날에 태어난 하루살이는 비만 알고, 맑은 날에 태어난 하루살이는 맑음만 알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봉사는 색상의 아름답고 추한 것을 아무리 설명하여도 모르듯, 현생만을 고집하는 중생은 삼세 인과를 관통하는 불보살의 마음을 모를 것입니다. 인과 윤회를 모르는 중생에게 자비가 어떻고, 살생이 무엇이며, 번뇌가 무엇이고, 해탈이 무엇이라는 설명을 백천 번을 말하여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부처의 마음도 찾지 못하는 자에게 큰 것을 바라지 말고 작은 것부터 하나씩 챙기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수행한다는 생각도 마음 닦는다는 생각도 다 내려놓고 일상생활로 돌아가 봅시다.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부부간에 화목하고 형제간에 믿음 갖고 친구에 의를 지키는 당연한 인간의 삶이지만, 실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차라리 마음 닦는다는 생각을 접고, 거짓이라도 좋고 위선이라도 좋습니다. 행동을 조심하고 바르게 하며, 귀에 듣기 좋은 소리를 하며, 악독한 말을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항상 서원하기를 가난과 병고와 불화의 고통이 사라지고 배고프지 않고, 아프지 않고, 비난받지 않고, 외롭지 않고, 슬픔이 없었으면 합니다. 

어려운 출가를 하라는 것도 아니요, 법을 위해 몸을 버리라는 것도 아닙니다. 아까운 재산을 희사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남을 위하여 마음을 닦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하여 마음을 닦습니다. 시간이 있을 때, 경전 한 구절 읽으시고, 진언 한 번 외우시고 생각날 때 불법승 삼보를 생각하면 됩니다. 세상의 주인이라는 생각으로 행동하고 말하면 됩니다. 이것이 마음을 닦는 길이며, 좋은 방편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중생의 고정된 생각을 내려놓으면 그 순간에 불보살이 찾아와 나의 일을 대신하여 주므로 올바른 방편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24. 실행론 설법 -법시(法施)와 재시(財施)

밀교신문   

보시에 법시와 재시 두 가지가 있습니다. 재시(財施)는 몸을 윤택하게 하고, 법시(法施)는 정신(精神)을 바르게 합니다. 

사람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집단생활하면서 상부상조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상부상조는 서로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으면서 생활하는 것입니다. 도움을 주고받을 때 대가성 없는 도움을 주고받는 것입니다. 상부상조는 불교의 자비희사 사무량심(四無量心)을 근원으로 하는 생활 실천입니다. 자무랑심(慈無量心)은 모든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이 끝없음을 뜻하며, 비무량심(悲無量心)은 모든 생명이 고통을 받을 때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끝없음을 말하며, 희무량심(喜無量心)은 모든 생명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함께 기뻐함이 끝없음을 말하며, 사무량심(捨無量心)은 모든 생명에게 나누어주는 마음이 끝없음을 말합니다. 전자의 자비는 마음가짐이요, 후자의 희사는 행동의 실행을 말합니다. 자비심은 마음의 덕을 쌓는 보이지 않은 공덕이요, 희사심은 몸으로 실천의 덕을 쌓는 보이는 행위입니다. 

희사심을 보시하는 마음이라 합니다. 일반적으로 보시는 재물을 베푼다는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보시를 크게 둘로 나누어 마음으로 베푸는 보시와 물질을 베푸는 보시가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마음으로 행하는 보시를 법시(法施)라 하고, 물질로 행하는 보시를 재시(財施)라 합니다. 이외에도 보시의 종류와 방법이 다양하게 많지만 일일이 다 이야기할 수 없어 이 장에서는 재시와 법시만 말하는 것입니다. 재시는 재가인이 주로 행하는 것이며 자리(自利)의 보시가 되고, 법시는 출가인이 주로 행하는 이타(利他)의 보시로 일체중생을 제도하고 해탈하는 자비행입니다. 재시와 법시를 행할 때 유상(有相)의 보시가 있고 무상(無相)의 보시가 있습니다. 유상시는 일회성으로 공덕이 한계가 있으며 현생에 나타나고, 무상시는 공덕이 무한하며 삼세에 관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작함을 모르는 때부터 현생에 이르기까지 많은 은혜를 입고 태어났습니다. 입은 은혜를 갚지 못하여 수많은 고통을 받으면서 윤회하는 것입니다. 윤회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시은(施恩)을 갚아야 합니다. 시은을 갚는 법 중에 가장 좋은 법이 보은(報恩)의 보시행입니다. 현생의 복과 지혜를 얻기 위하여 행하는 보시는 대가를 바라는 유상의 보시입니다. 은혜 갚음의 보시는 대가성을 바라지 않는 무상의 법시가 됩니다. 그러므로 복과 명을 바라는 서원의 보시보다 보은의 보시를 생활화하여야 합니다. 나와 인연 있는 중생들이 다 함께 해탈하는 보은의 희사는 재시를 법시로 변화 바꿔면서 작복 희사도 되고, 해탈의 희사도 되며, 바라밀의 희사도 되는 것입니다. 

재시를 법시로 바꾸는 보은의 희사로 일어나는 공덕의 유무를 살펴보면, 평소에 염송과 희사를 잘하지 않은 사람이 어떠한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 해결을 위하여 희사하고 염송하여 어려운 문제를 쉽게 해결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평소에 열심히 희사하고 염송하던 사람이 어려운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희사하고 염송하여도 문제 해결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서원이 있어 불공할 때도 서원성취가 되지 않는 경우, 몇 년을 열심히 불공하였는데도 해탈하지 못한 경우, 스승의 가르침대로 열심히 불사에 동참하였는데도 살림살이가 좋아지지 않은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평소에 불공을 열심히 하지 않은 자가 잠시 불공하여 공덕을 보는 경우, 희사는 하지 않고 염송만 하고도 생각대로 물질이 일어나는 경우, 염송은 하지 않고 희사만 하고도 어려운 일들이 사라지고 서원성취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시은을 갚는 보은의 희사와 보은의 염송에 있습니다. 

수행자는 먼저 시은을 갚는 보은의 희사를 하여야 합니다. 시은이 있으면 깨달음도 서원성취도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서원을 위하여 용맹정진하고 정성으로 행한 보시의 공덕은 시은 갚는 것으로 빠져나가기 때문에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비유하면, 산기슭의 물이 바다까지 흐르는 중에 얕은 곳을 메우면서 흘러갑니다. 물은 얕음이 있으면 피하지 않고 그곳을 수평으로 채운 연후에 넘쳐흐릅니다. 산기슭의 물이 많다 하여도 낮은 웅덩이가 그보다 더 많다면, 물은 바다까지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평평한 벌판으로 흐르는 물은 적은 양으로도 바다에 이를 것입니다. 보시와 염송도 이와 같습니다. 은혜 입고 갚지 않은 것은 웅덩이와 같습니다. 정진하고 희사하여 일어난 공덕이 시은 갚는 곳에 먼저 흘러들기 때문에 서원성취로 돌아갈 공덕이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은혜의 지중함과 시은을 먼저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깨어있는 종교나 밝은 종교는 이 이치를 알기 때문에 4대 은혜를 가르치고, 은혜에 보답하는 길을 먼저 강조하는 것입니다. 진각성존은 은혜 갚음을 쉽게 하는 참회법을 말씀하였습니다. 

모든 서원, 모든 정진, 모든 불공은 참회로 시작하고 참회로 회향하도록 하였습니다. 참회는 패인 허물의 웅덩이를 미리 메꾸는 불사입니다. 해탈의 바다까지 펼쳐진 수없이 많은 장애와 고통의 웅덩이를 미리 메꾼다면 적은 물로도 바다까지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 태어날 때 가져온 알지 못하고 보이지 않는 잘못의 웅덩이를 평소에 행주좌와 어묵동정에 희사하고 염송하고 참회하면서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중생의 몸을 법신으로 바꾸고, 재시를 법시로 바뀔 때 해탈의 몸과 해탈의 국토가 성취되어 구경에는 육도 윤회를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재시가 법시로 바뀌는 비유가 있습니다. 

걸인 부부를 해탈시키는 가섭존자의 이야기입니다. 집도 없어 어느 집 대문 밖 헛간에서 생활하는 거지 부부입니다. 가진 것은 담요 1장과 쪽박 하나뿐입니다. 한사람이 구걸나가면 남은 사람은 발가벗은 채 벽을 향해 앉아있어야 합니다. 거지 부부는 어느 날 밥을 얻지 못하고 쪽박에 쌀뜨물을 가져와 두 부부가 먹으려는 순간에 가섭존자는 헛간의 거적을 밀고 들어와 공양을 청하였습니다. 난색을 한 부부의 생각은 아랑곳하지 않고 공양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부부는 송구한 마음으로 쌀뜨물을 보시하였습니다. 가섭은 즉석에서 쌀뜨물을 공양하고 18 변천을 보였습니다. 가섭존자는 다시 보시할 것을 권하였습니다. 부부는 18변천 하는 가섭존자를 보고 환희심이 생겨 하나뿐인 담요를 보시하였습니다. 부부는 금생을 포기한 보시였습니다. 가섭존자는 냄새나는 담요를 가사 위에 수하고 부처님회상에 갔습니다. 가섭이 지나갈 때 대중들이 코를 막고 피하는 것을 본 부처님은 가섭에게 물었습니다. 가섭은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때 그 자리에서 있던 국왕은 신하를 명하여 거지 부부를 궁으로 모셔다가 목욕시키고 평생을 편안하게 살도록 하였다는 것입니다. 가섭존자에게 담요 한 장의 재시가 법시로 변하여 시은의 빚을 모두 갚아진 공덕담입니다. 

시은에 관한 또 하나의 법이 있습니다. 탐욕심으로 베풀지 않은 응보로 받은 아귀는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면 불꽃으로 변합니다. 음식이 입에 닿으면 불꽃으로 변하는 것은 시은의 빚을 조금이나마 갚아나가는 현상입니다. 그런데도 아귀는 이러한 기회가 흔하지 않습니다. 뉘가 아귀에게 공양하겠습니까? 다만 청정 승가에서 발우공양 후 발우 씻은 물을 공양받을 뿐입니다. 이 공양물은 시은을 갚지 않아도 되는 공양물입니다. 그 이유는 발우 씻은 물은 처음 받은 물과 같이 청정하기 때문입니다. 승가는 상주물을 함부로 버리지 않아 시은을 입지 않은 청정수인 것입니다. 만일 발우 씻은 물에 부서진 밥알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공양 자가 그 물을 마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시은을 갚을 기회가 온다면 고맙게 생각하고 보은의 희사를 할 것입니다. 누군가가 자신의 자리를 뺏고 명예를 실추시키고 험담함이 있을 때 억울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시은을 갚을 좋은 기회로 생각하고 원망하지 말고, 그를 위해 보은의 희사를 하고 잘되기를 서원해야 할 것입니다.

재시를 법시로 바꾸는 법이 진각성존의 삼종시 법입니다. 단시(檀施)는 부처님에 공양하여 법시로 전환하고, 경시(經施)는 법에 공양하여 법시로 전환하고, 제시(濟施)는 승에 공양하여 법시로 전환하게 하는 희사법입니다. 이 법을 실천하게 하고자 상주물로 생활하는 교화승에게 수입의 2/10를 희사하여 시은을 입지 않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서원의 희사를 하기 전에 시은을 갚는 보은의 희사법을 생활화하여 참회하고 정진하고 희사하면서 다시 한번 재시가 법시가 되는 희사법을 깨달아 윤회에서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25. 실행론 설법 -가난 해탈법

밀교신문   

“가난 해탈하려거든 언제든지 수입(收入)할 때 갚을 것을 먼저 주고 내가 쓸 것 뒤에 쓰라. 안 갚으면 도적이라 가난 됨을 뉘가 아랴.” 

이 세상 사람들은 한결같이 건강하게 살고 싶고, 넉넉하게 살고 싶고, 화목하게 살고 싶고, 편안하게 살고 싶고, 즐겁게 살고 싶고, 오래도록 살고 싶어 합니다. 아픔을 싫어하고, 가난을 싫어하고, 불화를 싫어하고, 괴로움을 싫어하고, 슬픔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좋아하는 대로만 살 수 없고, 싫어하는 것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그래도 “건강해질 것이다. 넉넉해질 것이다. 화목해질 것이다. 편안해질 것이다. 즐거워질 것이다.”라는 바람과 “아픔은 곧 사라진다. 가난은 곧 사라진다. 불화는 곧 사라진다. 괴로움을 곧 사라진다. 슬픔은 곧 사라진다.” 하는 희망을 품고 살아갑니다.

이것은 넉넉함과 가난함, 건강함과 아픔, 화합과 불화가 하나가 되어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진각성존은 가난[貧窮]과 병고와 불화에서 오는 고통은 하나라 하였습니다. 가난에서 병고와 불화가 오게 되고, 병고에서 가난과 불화가 일어나고, 불화에서 가난과 병고가 침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가난을 중심으로 말하고자 합니다. 

가난에는 물질의 가난과 마음의 가난이 있습니다. 물질 가난에서 오는 고통은 가볍고 마음 가난에서 오는 고통은 무겁습니다. 물질 가난은 벗어나기가 쉽지만, 마음의 가난은 벗어나기가 어려운 법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물질 가난을 이야기하면서 마음의 가난을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왜?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땅 위에서 같은 시간에 숨을 쉬고 살면서, 가난하고 부한 자로 구분하여 다른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금색왕경’은 빈궁의 고통이 죽음보다 더 심하다 하면서 “어떤 것이 괴로운가 빈궁(貧窮)함이 이것이라. 무슨 고(苦)가 중(中)함이뇨? 빈궁 고가 중함이라. 죽는 고와 빈(貧)한 고(苦)가 두 고통이 같은지라. 죽는 고를 받더라도 빈궁하게 살지 말라. 세상 사람 많지마는 날 아는 자 없는 것은 내가 빈궁하여져서 향할 길이 없는지라. 비유하면, 넓은 벌판 불탄 것과 다름없이 사람들은 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며, 독사 집과 같은지라 사람들이 멀리 가며, 잡독 음식 같은지라 맛보는 자 없게 되며, 뒷간같이 더러워서 나쁜 냄새 가득 차고, 도적같이 사람에게 시기 의심받는지라. 나도 또한 이와같이 동작하면 기롱(譏弄) 받고, 말을 하면 허물 보고, 묵묵하면 비방하며, 비록 옳은 말을 하나 ‘그르다’라고 말을 하며, 하는 바가 민첩하면 ‘경(輕)하다’고 싫어하며, 찬탄하면 사람들은 ‘아첨한다.’ 말을 하고, 친근하지 아니하면 ‘교만하다.’ 말을 하며, 남의 말에 순종(順從)하면 ‘뜻 맞춘다.’ 말을 하고, 만약 수순 아니 하면 ‘제 맘대로 한다.’ 하여 이 가난한 사람에는 항상 좋은 말이 없다. 부처님도 보시하여 부귀(富貴)함을 가르쳐서 간탐(慳貪)하여 빈궁(貧窮)하게 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가난으로 위와 같은 괴로움을 받지 않으려면, 먼저 물질을 잘 다스려서 가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열치열(以熱治熱), 이냉치냉(以冷治冷)같이 물질은 물질로, 마음은 마음으로 다스리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진각성존은 “나의 재물(財物) 남을 주면 주는 그때 줄었지만, 도로 돌아 불어옴은 우주자연법칙(宇宙自然法則)이요. 남의 재물 도적(盜賊)하면 가져올 때 있었지만, 도로 가고 가난함도 우주 자연법칙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가르침은 빈궁하게 사는 것은 욕심으로 베풀지 않아 생긴 현상입니다. 그리고 보은하지 않아 빚이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자신이 베풀지도 않고 보은도 하지 않았는데 뉘가 나를 도와주겠습니까? 도움을 받았으면 반드시 빚을 먼저 갚아야 합니다. 도움받고도 갚지 않아 빚이 태산과 같으므로 그 응보로 비난과 멸시를 받는 것입니다. 베푼다는 것은 대가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대가를 바란다면, 또다시 빚지는 것이 되어 영원히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빈궁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갚을 것을 먼저 주고 내가 쓸 것 뒤에 쓰라.”는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시은(施恩)의 빚부터 갚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갚는 방법으로는 수입이 있으면 빚부터 갚는 것입니다. 

‘먹고 살기에도 부족한데 빚 갚을 여지가 없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면, 평생을 살아도 빚은 갚지 못할 것입니다. 설혹 빚을 갚으면 생활할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 다시 빌리면 됩니다. 물론 빌리면 또 빚이 됩니다. 그러나 갚고 빌리는 것이 습관이 되면 빚은 점점 탕감되어 언젠가는 완전하게 갚아지게 될 것입니다. 갚을 때 고마운 마음이 생기고 빌릴 때 겸손한 마음이 일어나게 되면, 스스로 근검절약하는 마음이 생겨 빚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빈궁하게 사는 것은 잘못 익힌 습관 때문입니다. 재물을 아끼고 모은 부자는 나가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것은 모으는 습관이 있으나 쓰는 습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쓰는 마음이 강하기 때문에 조그마한 여유만 있어도 썰 궁리를 먼저 합니다. 그러므로 부자는 나가는 가운데 고통을 느끼고, 가난한 사람은 들어오지 않는데 고통이 따릅니다. 습관은 무서운 것입니다. 

개에게 흙덩이를 던지면 개는 흙덩이를 따라가고, 사자에게 흙덩이를 던지면 사자는 던진 사람을 쫓습니다. 개는 던져 주는 음식을 먹은 습관 때문에 흙덩이를 음식인 줄 알고 따라가는 것이요, 사자는 자신에게 공격하는 줄을 알고 공격자를 쫓는 것입니다. 이러한 습관의 이치를 모르고 어리석고 지혜로움을 비유할 때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습관이 한편으로는 해탈할 수 있는 좋은 길이기도 합니다. 행동에도 빈궁의 행동이 있고 가난한 행동이 있으며, 소리에도 빈궁의 소리와 부(富)한 소리가 있으며, 건강한 소리가 있고 아픈 소리가 있으며, 기쁜 소리가 있고 슬픈 소리가 있으며, 승차(勝差)의 소리가 있고 하락(下落)의 소리가 있습니다. 아픔과 가난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모두 자신이 소리로 행동으로 생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 기본이 은혜로운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고마운 마음으로, 참회하는 마음으로, 베푸는 마음으로 바꾸면 됩니다. 그러면 행동도 소리도 자연스럽게 좋은 방향으로 바뀌게 도리 것입니다.

가난을 다스리는 법 가운데 첫째가 지족(知足) 하는 마음입니다. 지족 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자신의 능력과 습관을 깨닫는 것입니다. 남이 나의 삶을 살아주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도 부도 아픔도 건강도 불화도 화합도 모두 자신이 그렇게 묶은 것입니다. 결자해지(結者解之)라 하였습니다. 자신이 묶은 매듭은 자신만이 풀 수 있습니다. 겹겹이 매듭지은 습관은 하루아침에 풀어지지는 않습니다. 한 가닥 풀었다 하여 모든 매듭이 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옛말에 ‘가난은 임금도 해결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생사여탈(生死與奪)을 쥐고 있는 임금이지만 가난은 어찌하지 못합니다. 비유하면, 소를 물가에 끌고 갈 수는 있어도 물을 먹여줄 수는 없듯이, 의사가 처방전으로 약을 지어줄 수는 있어도, 먹고 먹지 않고는 환자 자신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모든 것을 자기 탓으로 돌리고 어리석은 사람은 남의 탓으로 돌립니다. 자신의 가난을 부모, 조상, 부부, 자식, 국가사회와 시대를 탓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만이 해결할 수 있는 법은 자신이 가지고 있습니다. 

진각성존은 빈궁함으로 인하여 생기는 고통을 육행으로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빈궁하여 하천(下賤)한 대접을 받는 것은 인색한 마음 때문이니 희사하는 마음으로 다스려야 함이요, 빈궁하여 남에게 하시(下視) 받고 스스로 낮아짐은 추악한 마음 때문이니 계행으로 다스려야 함이요, 빈궁하여 가족과 제 몸에 신고(辛苦)가 많은 것은 성내는 마음 때문이니 하심(下心)으로 다스려야 함이요, 빈궁하여 어디로 가도 할 일이 없는 것은 게으른 마음 때문이니 부지런함으로 다스려야 함이요, 빈궁하여 서로 다투고 시끄러운 것은 산란한 마음 때문이니 염송으로 다스려야 함이요, 빈궁하여 불의(不意)의 환란(患亂)과 근심걱정이 많은 것은 어리석은 마음 때문이니 지혜로써 다스려야 함”을 설하였습니다. 

나의 최고의 적은 가난이며, 나의 최고의 원수를 가난으로 알고 현생에 끝내겠다는 대분심을 발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가난이 선지식이요, 아픔이 선지식이요, 화합하지 못한 것이 은혜의 빚이 있음을 알려주는 선지식의 설법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가난이 사라지면 병고가 사라지고 불화가 사라져 건강하고 사랑받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26. 실행론 설법 -척사입정(斥邪立正)

밀교신문    

“사(邪)는 물리치고 바른 것을 세우자. 사심(邪心)은 물리치고 정심(正心)을 세우자. 사도(邪道)는 물리치고 정도(正道)를 세우자.” 

척사입정(斥邪立正)과 사필귀정(事必歸正)은 다릅니다. 사필귀정은 모든 현실은 반드시 올바름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며, 정적(靜的)인 진리를 중심으로 사용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간섭도 판단도 상관없이 자연은 본래 자리인 정리(正理)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어릴 때 할머니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권선징악(勸善懲惡)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선을 상주고 악을 벌주는 과정에서 착한 사람이 비록 사람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때 자연의 힘, 보이지 않는 진리의 힘이 반드시 도움을 준다는 희망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야기 속에서 선악구분을 가르치면서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의 인과까지 가르치는 사필귀정의 법입니다. 

척사입정(斥邪立正)은 불교의 용어로 삿된 기운을 물리치고 바른 정신을 세운다는 동적(動的)인 것을 말합니다. 척사입정을 파사현정(破邪顯正=顯正破邪)이라고도 합니다. 두 용어는 사를 물리친다는 뜻은 같으나 활동의 방법은 다릅니다. 척사입정은 사(邪)를 배척하여 흔적조차 없이 쳐부수어 완전한 자리에서 정(正)을 세운다는 뜻입니다. 털끝만큼의 사(邪)도 용납하지 아니하는 강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파사현정[顯正破邪]은 사(邪)를 변화시켜 정(正)으로 나타낸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와 정을 하나로 보고 잠시 사에 물든 마음이나 행동을 정의로 돌아가도록 자비심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척사입정이 외부로부터 일어나는 현실적인 법을 다스리는 것이라면, 파사현정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삿된 기운을 청정의 자리로 되돌려 놓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밀교의 수행법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견물생심(見物生心)으로 삿됨에 쉽게 물들게 됩니다. 또 간사한 마음으로 조금만 틈이 생기면 나태해질 수 있고, 언제든지 달콤한 말에 유혹당할 수 있습니다. 노력하는 사람도 어느 순간에 게으름이 일어나 편안함에 머물면서 힘이 드는 일을 만나면 쉽게 포기하며,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리고 결과에 대하여 긍정하는 마음보다 부정하는 마음이 강합니다. 

중생의 마음은 잠시만 한눈을 팔아도 정(正)은 날개가 달린 듯 멀리 날아가고 그 자리에 삿된 마음이 우후죽순처럼 돋아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바른 행동, 바른 언어, 바른 마음인지를 살피고 챙겨야 합니다. 운동선수가 끝없이 연습하고, 학문하는 사람이 끝없이 익히며, 재주 부리는 사람이 반복적 행동을 계속하는 것은 모두 이러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함입니다. 사(邪)는 가만히 있어도 생겨나 주변을 점령합니다. 새로 지은 집에 사람이 살지 않고 그대로 문을 닫아두면, 집안에는 먼지가 쌓이고 비치한 살림살이는 제대로 사용해 보지도 못하고 부패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예를 들면, 어리석고 욕심 많은 사람이 부지런한 이웃 사람이 시장에서 호미구입 하는 것을 보고 자신도 호미를 구입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생각하였습니다. 

‘옆집 호미를 빌려서 쓰고 내 호미는 아껴야겠다. 그러면 닳지 않아 내년에 다시 구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지혜에 흐뭇해하였습니다. 욕심 많은 사람은 호미를 사용할 일이 있을 때마다 옆집 호미를 빌려서 사용하였습니다. 한해 농사일이 끝나 호미를 손보려고 헛간에 걸어둔 호미를 보는 순간 욕심쟁이는 그만 놀랬습니다.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호미가 녹 쓸어 있었습니다. 옆집 호미는 반짝반짝 윤이 나면서 사용하기 좋게 되었는데 자신의 호미는 녹 쓸어 반쪽호미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삿된 생각의 결과입니다.

우리는 삿되다는 것이 귀신을 섬기고 귀신에 비는 것만 생각합니다. 마음과 언어와 행동을 자신의 이익과 명예만을 생각하면, 이것이 삿된 행동이요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언어는 점점 어눌해지고, 행동은 점점 둔화하며, 마음은 점점 어두우면서 좁아질 것입니다. 

사서삼경(四書三經)의 하나가 주역(周易=易經)입니다. 역(易)은 ‘바꾼다.’, ‘새롭게 한다.’ 하는 뜻으로 현재보다 미래를 좋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는 이치를 알려주는 경입니다. 공자(孔子)도 주역을 소가죽 끈을 3번이나 바꾸면서 독송하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흔히 주역은 점보는 책으로 알고 있는 분이 많습니다. 만일 점보는 책이라면 공자는 그렇게까지 독송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역은 단순하게 과거를 알고 미래를 알고자 하는 점을 보는 경이 아닙니다. 자연의 운행 섭리를 알고 행하면 자연과 충돌하지 않고, 사람과 배은하지 않으며, 하는 일마다 순리를 따라 성취할 수 있는 법을 가르치는 경입니다. 나와 남이 모두 괴로움을 당하지 않고 화목하게 살아갈 수 있는 생활의 좋은 지침서입니다. 봄이 되면 봄꽃이 피고, 여름이면 비가 오고, 가을이면 단풍이 들고, 겨울이면 눈이 오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 걸림 없고 장애 없이 안락한 삶을 살 수 있게 하면서 혹 잘못된 생각이나 방법이 있으면 고치게 하여 좋은 길로 인도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하면서 기다리는 법과 준비하는 마음을 길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일에 대하여 알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일수록 내일에 대하여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에 충실하면 내일은 자연히 뜻과 같이 이루어질 것인데, 동으로 서로 찾아다니면서 점을 보고자 하는 마음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자신을 돌아봅시다. 오늘의 게으름과 나태와 안일함으로 내일은 헐벗고 굶주림으로 밀려온다는 이치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노력하지 않고 성공을 바라며, 자기만이 옳고 상대는 그르다 하고, 자기가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모든 일에 간섭한다면, 얻고자 하는 것은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연과 사람에게 배척까지 당하게 되어 가진 수명을 중단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좋은 일은 마음에서 쉽게 잊어버리고, 나쁜 일과 해침을 당한 일은 오래도록 기억합니다. 특히 원수 맺은 일은 두고두고 기억하여 후손에게까지 미루어주기도 합니다. 정(正)은 자연과 한 몸으로 영원하지만, 사(邪)는 일시적인 것으로 오래가지 못합니다. 주변에 귀신의 접신으로 점을 보아주는 족집게란 별명까지 붙은 점쟁이가 있습니다. 족집게의 신력(神力)은 3~5년을 넘기지 못합니다. 정도라면,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빛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것은 신도 세월의 나이를 먹고, 접신자도 유명세를 타면서 재물에 집착하여 용함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정도의 길로 가기를 원합니다. 다만 정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가지 못할 뿐입니다. 정도는 물맛과 같아서 항상 마셔도 거슬리지 않지만, 사도는 꿀맛과 같아 오래도록 먹을 수가 없습니다. 솔깃한 말에 속지 말며, 달콤한 말에 유혹당하지 말고, 항상 자신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진실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면 언제나 정도의 길로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보리심론’에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노력하여 찾으려고 하지 아니하고, 주술(呪術)이나 약물로써 삶을 돕거나 그 어떤 힘이나 모양에 의지하여 찾으려는 것은 모두 사도(邪道)요 외도(外道)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자기 자성을 찾지 못하는 것은 자기의 아는 것이 최고라 착각하는 교만한 마음, 남의 잘함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 상대의 하는 일에 시시비비를 가리면서 업신여기는 마음, 요행을 바라고 횡재를 기다리는 마음, 지혜를 닦고 재주를 익히지 않는 우둔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큰 사도입니다. 

이러한 삿됨을 없애려면, 자연에서 사회에서 이웃에서 배우고자 하는 마음으로 하심하고 겸양하면서 선지식을 찾아야 합니다. 길을 도(道)라 합니다. 하나의 길에서 정도와 사도와 외도의 길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 가운데 하나를 택하여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범이 되는 길을 택해야 합니다. 성인이 갔던 길[聖道], 부처님이 갔던 길[佛道], 진각성존이 갔던 길[正道], 선지식이 갔던 길[善道]을 택해야 합니다. 우리가 찾아야 할 길은 귀신을 숭상하지 않고, 타에 의뢰하지 않는 자주(自主)의 길이며 정도의 길입니다. 우리가 배척해야 할 길은 외도의 길이며, 사도의 길입니다. 생활의 외도, 인륜의 외도, 종지(宗旨)의 외도에 빠지지 않은 정도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정도의 길은 이웃과 사회를 생각하며, 입은 은혜를 갚고, 자성의 본래 지혜를 찾게 될 것입니다.

27. 실행론 설법 -고행(苦行)과 고생(苦生)

밀교신문    

“법신(法身) 앞에 정진하면 중생고가 멸해지고 정진고개 난행(亂行)하면 소원함을 성취한다. 고생(苦生)하고 고행하는 두 고통(苦痛)이 다른지라.” 

부처뿐인 법계, 우리는 본래 법신 비로자나불과 한 몸이었습니다. 형상 없는 비로자나불로부터 언제부터인지 알지도 못하는 영겁에서 형상을 만들어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공연히 만든 형상으로 말미암아 고통받는 중생으로 윤회하면서 떠돌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체중생을 위하여 자비심 충만한 비로자나불이 중생의 형상으로 출생하고 출가하고 고행하고 성불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해탈의 법[불승법(佛乘法)]을 전하였습니다. 

말씀은 먼저 우리 자신이 본래 비로자나불과 한 몸임을 알게 하고, 다음으로 제자리로 돌아가는 방법을 제시하고, 마지막으로 열반의 모습까지 보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출현한 화신불로 석가모니불 한 분만이 아니었습니다. 

과거 장원겁(長遠劫)에 1천 불이 출현하였고, 현겁(賢劫)에 1천 불이 출현할 것이며, 미래에도 1천 불이 출현할 것입니다. 이것은 법신 비로자나불의 자비원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장원겁의 마지막 1천 번째 불이 출현하여 열반한 이후 장원겁의 법계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이 되었습니다. 다시 현겁 1천불 중에 마지막 1천 번째 화신불이 열반할 때, 현겁의 법계도 성주괴공 하면서 미래겁이 시작될 것입니다. 경전에서 말하는 과거 7불 중에 앞의 3불은 장원겁의 제998 비바시불, 제999 시기불, 제1,000 비사부불은 지구촌에 화현한 불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이곳은 현겁의 법계입니다. 현겁의 제1 구루손불, 제2 구나함모니불, 제3 가섭불이 다녀갔고, 지금은 제4 석가모니불 시대입니다. 그리고 다음은 제5 미륵불로 이어질 것입니다. 이것을 증명하듯 네팔 룸비니 동산 주변에 현겁의 3불의 출생지가 있고, 석가불이 가섭존자에게 미륵불에게 전하라는 가사와 발우의 부촉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중생은 한 번의 출생으로 윤회를 벗어나 비로자나불의 자리로 돌아갈 수 없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 자신은 중생입니다. 삼계에 머무는 모든 생명체는 중생입니다. 중생은 끝없이 윤회하면서 몇 번이나 천상에 태어났고, 몇 번이나 축생으로 태어났으며, 몇 번이나 아귀와 지옥에 태어났으며, 몇 번이나 인간의 몸을 받아 오늘을 만난 것입니다.

윤회하는 가운데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천상, 인간의 삶을 익히고 간직하면서 익숙해진 것입니다. 이렇게 익힌 습관은 몸이 바뀔 때마다 가물가물하는 중에 선과 악의 판단기능을 잃은 듯하나 인과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때가 되고 장소가 맞으면,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말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지난 생에 천상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천상이 좋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요, 지옥과 아귀 보를 받아보지 않았다면, 그곳의 고통을 모를 것이며, 축생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축생의 성품을 모를 것이요,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인간의 삶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어느 곳에 태어나든지 태어날 때, 가르침도 받지 않았고,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찌 환경에 적응하고 시간에 응함이 익숙할 수 있겠습니까? 천상의 좋음도 알고, 수라의 투쟁도 알고, 축생의 우둔함도 알고, 아귀의 목마름도 알고, 지옥의 고통도 알고, 인간의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을 안다는 것은 그곳에서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참으로 많은 생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면서도 항상 ‘현생만 존재한다.’ 생각하고 벗어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고락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가끔은 ‘내가 무슨 인을 지어서 이렇게 좋고 나쁨을 받는가?’라고 인과적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어느 생이었는지 모르지만, 부처님 법을 만나 인과 공부를 하였다는 증거입니다. 그 생에서도 악습관을 버리지 못한 것을 후회하였을 것입니다. 현재 자신의 행동을 살펴보면, 나누고 베푸는 마음보다 지니고픈 욕심이 더 많으며, 참는 마음보다 성내는 마음이 많으며, 잘하는 것보다 못하는 것이 많으며, 슬기로움보다 어리석음이 많으며, 즐거움을 누리는 것보다 고통받음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사바세계는 고생의 괴로움이 있는 세계라 말하고 있습니다. 고생을 제공하는 인은 습관입니다. 비록 사람의 몸을 받았으나 아수라처럼 투쟁하는 마음이 있고, 아귀처럼 욕심이 있고 축생처럼 어리석음이 있고, 천상처럼 교만심이 있고, 지옥처럼 고통을 감내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이면서 육도가 지닌 마음을 전부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곳에 태어나 생활하면서 익힌 습관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습관은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습니다. 익힌 세월이 얼만데 하루아침에 바뀌겠습니까? 윤회하는 가운데 사람의 몸을 받은 것은 습관을 버리는 좋은 기회를 만난 것입니다. 습관을 버리는 방법이 고행입니다. 고행은 즐거움을 동반한 윤회를 벗어나는 수행입니다. 

‘어릴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때 고생은 고행의 뜻을 담고 있는 말입니다. 고행의 인으로 말미암아 반드시 받아야 하는 고생을 스스로 찾아서 즐거운 마음으로 고통을 사라지게 하는 것입니다. 비로자나불이 중생에게 고행을 가르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최고의 고행 모습을 보이신 싯다르타 태자의 고행상을 보십시오. 괴로워하는 모습은 없고 평온하며 자비한 모습입니다. 고행이 괴로움이면 그것은 고행이 아닌 고생이 되는 것입니다. 고생은 악업을 녹이지만 해탈은 얻을 수 없습니다. 

이제 자신의 고행 모습을 봅시다. 몸으로는 결가부좌로 길상좌를 할 때 몸이 불편하여 통증이 있고 몸부림이 일어나거나, 정진을 마치고 몸이 불편하면 이것은 고행하는 몸이 아닙니다. 언어로는 염송하면서 들숨 날숨이 고르지 못하며, 소리가 잔잔하지 않고 굴곡이 있으며, 진언의 소리가 분명하지 않음은 고행하는 언어가 아닙니다. 마음으로는 답답하거나, 불안하거나, 조급하거나, 잠이 오거나, 지루함을 느끼면 고행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즉 정진하는 자세에서 몸과 입과 마음에 조금이라도 고통스러우면 고행이 아닙니다. 고행은 즐거운 것이요, 편안한 것이며, 가장 안정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상태가 이루어질 때 시간을 뛰어넘는 삼매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정진할 때나 정진을 마쳤을 때나 몸과 마음에 고통 없이 정상적이어야 합니다. 오히려 평소에 아팠던 몸이라면 건강하게 되어야 합니다. 어긋났던 뼈마디가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바른 고행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윤회의 습관이 바뀌는 고행으로 서원이 성취되는 공덕을 얻게 될 것입니다. 고행은 근기따라 각각 다릅니다. 중생은 중생의 고행이 있고, 아라한은 아라한의 고행이 있고, 연각은 연각의 고행이 있고, 보살은 보살의 고행이 있습니다. 중생의 고행은 형상이 아닌 심출가로 이루어집니다. 심출가를 하지 않은 고행은 고행이 아닌 고생이 되는 것입니다. 

고생을 고행으로 바꾸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이 분심(忿心)입니다. 부처님은 자성을 찾는 수행으로 신심을 바탕으로 일체중생을 생각하는 자비심을 일으켜 흔들림 없는 용맹심으로 발(發)하여 난행고행(難行苦行)을 가르쳤습니다. 분발은 곧 분심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는 분심, 고통에서 오는 분심, 게으름에서 오는 분심, 못난 것에서 오는 분심, 가지지 못한 것에서 오는 분심, 낮고 작다는 것에서 오는 분심을 살피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심은 상대에 향한 원망심이 없어야 하며, 남을 핑계하지 않아야 하며, 질투심이 없어야 합니다. 진각성존은 자신의 잘못을 꾸짖는 분심을 참회법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조급한 생각, 느슨한 생각, 게으른 생각, 미루는 생각, 답답함, 우둔함 허황함을 참회하는 것입니다. 중생은 별로 잘나지도 못하고 원만하지도 못하며, 능숙하지도 못한 재주를 믿고 하늘 높이 모양을 뽐내고 있습니다. 

이를 상(相)이라 하여 크게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으로 나누어 봅니다. 하나의 상에서 벗어나는데 아승기겁이 소요됩니다. 그러나 일념만년(一念萬年)이 되는 고행으로 찰나에 사상에서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곳이 난행고행의 진언 수행입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참회하고 인과로 받는 고생을 벗어버리는 고행으로 현생의 고통에서 해탈할 뿐 아니라, 나아가 비로자나불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공덕까지 얻게 될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면서 지금까지 잘못한 것이 있다면 모두 잊어버리고 이제부터 즐거운 마음으로, 편안한 마음으로, 하고 싶은 마음으로, 고행 정진하여 이루고자 하는 모든 서원을 이루기를 바랍니다.

28. 실행론 설법 -옳게 써서 정화한다.

밀교신문    

“물질시대 우리 탐심(貪心) 홍수보다 더 크므로 청백(淸白)한 법 안 서지니 옳게 써서 정(淨化)하라.” 

중생계의 청정(淸淨)은 깨끗함을 뜻합니다. 청정은 본래 법신 비로자나불의 빛의 공능(功能)입니다. 청정은 본래 변함이 없는 하나이지만, 중생의 업(業)에 의하여 심청정(心淸淨)과 국토청정(國土淸淨)으로 나누어봅니다. 심청정은 마음 청정을 말함이요 국토청정은 주변 환경을 청정을 말합니다. 본래 하나인 청정이라 마음이 깨끗해지면 국토는 자연 청정해지는 것입니다. 마음이 가장 청정해진 경지를 아뇩다라삼먁삼보리[無上正等正覺]로 표현하고, 국토[物質]의 청정을 밀엄정토(密嚴淨土)라 표현하는 것입니다.

업에 물든 중생의 마음을 청정으로 되돌리려면 정화가 필요합니다. 정화로 청정해졌다는 것은 가장 넉넉한 상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청정 법신 비로자나불은 지(智)와 덕(德)을 갖춘 진리의 빛입니다. 청정성을 지닌 비로자나불이 아축불, 보생불, 아미타불, 불공성취불과 금강의 제존보살, 일체 유정과 무정의 삼라만상에 공능을 나누어주었던 것입니다.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하는 5불과 32존의 만다라세계와 중생의 신구의 세계는 모두 비로자나불이 지닌 넉넉한 청정의 지혜와 넉넉한 청정의 덕으로 작용합니다. 비로자나불의 공능인 청정을 얻고자 중생은 업의 신구의를 정화하는 것입니다. 만일 중생의 업이 없다면 자연은 저절로 정화하여 청정해지는 것입니다. 

우주 법계의 흐름을 살펴보면, 자연 가운데 바람의 흐름은 남에서 북으로, 북에서 남으로 계절 따라 부는 계절풍(季節風)과 서에서 동으로, 동에서 서로 부는 자연풍(自然風)이 있습니다. 자연풍은 빛의 바람이라 흔하지는 않습니다. 동편에 솟는 태양 빛은 서편을 먼저 비춥니다. 이러한 빛의 바람은 서에서 시작하고 동에서 회향합니다. 이것이 자연풍의 흐름입니다. 인간의 삶은 이와 반대로 동에서 시작하여 서로 향합니다. 마을이 구성될 때, 먼저 마을 동편에 집을 짓고, 다음으로 남쪽에 집을 짓고, 다음으로 북쪽에 집을 짓고, 끝으로 서쪽에 집을 지어 완전한 마을이 형성됩니다. 진각성존의 일대사인연은 비로자나불의 진실법을 깨달아 자연에 순응하는 교화를 하였습니다. 동해(東海) 울릉도에서 탄생하여 본토 포항에서 불법에 입문하고 성서(城西)에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자연의 빛 흐름에 순응한 것입니다. 교화의 흐름은 국토의 동쪽, 계전 이송정, 관가정, 상원동, 대구에 참회원을 개설하고, 다음으로 남쪽 부산으로, 그리고 북쪽 대전과 서울로 교화하고, 마지막 오도 파견의 원을 세워 서쪽 전주, 광주로 이어졌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삶에 순응한 교화의 정화법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날 때는 자기의 고방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고방의 크고 작음은 지난 생의 인(因)으로 정해집니다. 크든 작든 자신의 고방은 한평생 살아가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소용의 물을 담을 수 있습니다. 각각의 인 지음으로 가져온 고방은 자신이 사는 날까지 항상 가득하게 채워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사용한 만큼 채워지는 것이 자신의 고방입니다. 고방이 가득 차면 담고 싶은 것이 있어도 담을 수가 없습니다. 마치 물그릇에 물이 가득한 상태에서는 다시 담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의 삶이 윤택하거나 부족함은 고방의 크고 작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방을 잘 정리하고 정돈하면 많은 물건을 쌓을 수 있지만, 아무렇게나 흩어 놓으면 다른 물건을 쌓을 수가 없습니다. 고방이 가득한 줄도 모르고 다시 넣으려고만 한다면 이것이 욕심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자신의 고방에 어떠한 소용의 물이 쌓여 있는지를 찾아보십시오. 그리고 정리하십시오. 자성을 찾는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의 그릇, 즉 마음의 고방에 무엇이 쌓였는지를 찾는 것이며 불필요한 것을 버리고 잘 정리하여 공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고방은 항상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나쁜 것을 채워도 한 고방이요, 좋은 것을 채워도 한 고방이며, 정리하고 정돈하여 쌓아도 한 고방이요, 아무렇게나 흐트러지게 두어도 한 고방입니다. 고방에 향기 나는 물건을 두면 고방 전체가 향기가 있고, 악취 나는 물건을 두면 고방 전체가 악취에 휩싸일 것입니다. 가지려고만 하지 말며, 얻으려고만 하지 말고 욕심내지 말고 자신의 고방을 살펴서 집착하지 말고 버릴 것은 버리고 나눌 것은 나누면서 정리작업을 먼저 하여야 할 것입니다. 새로운 것, 좋은 것, 필요한 것이 들어올 자리를 비워야 합니다. 채워진 상태에서는 그 무엇도 쌓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의 마음도 욕심이 가득하면 베푸는 마음은 없고, 성냄이 가득하면 웃을 일은 없으며, 우둔함이 가득하면 슬기로움은 없고, 고통이 가득하면 즐거움이 사라질 것입니다. 양손에 물건을 쥐고는 아무리 좋은 물건이 있어도 잡지 못합니다. 어느 하나를 놓고 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고방 정화법입니다. 

사람은 저마다의 한계가 있습니다. 그 한계가 자신의 고방입니다. 탁한 곳에서 가져온 물건은 정화한 연후에 사용해야 합니다. 자신의 돈으로 산 물건이라도 복 될 수도 있고 재앙 될 수도 있습니다. 기분 좋은 마음으로 선물을 했다면, 그 선물을 받는 사람도 기분 좋을 것이요, 이권과 청탁으로 선물하였다면, 그 물건은 이미 탁함을 품고 있어 받는 순간부터 재앙의 싹이 돋아날 것입니다. 능력 없이 오른 자리, 남의 명예를 뺏거나, 남을 해치거나, 남에게 상처를 주거나, 노력 없이 받거나, 욕심으로 모은 재물은 반드시 우환과 질병이 따르게 됩니다. 우환과 질병을 자신이 받지 않으면, 그 재물을 물려받은 후손이 받게 됩니다. 부정하게 벌어온 돈으로 자녀들 교육비로 사용하였다면, 자녀들은 설혹 지혜 있어 공부를 잘하여도 꼭 필요할 때 어리석음을 범하여 가고자 하는 대학에 가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사업 또한 성공하지 못하며, 삶 또한 행복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수입하는 것에 따라 법을 세워도 세운 법이 수입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실패하고 낙방하는 것입니다.

물질 시대는 올바르게 내보내는 시대입니다. 정당한 것이 아닌 비정상적이며 패악하게 들어온 것을 희사하지 않으면 병이 되고 주색잡기 등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그렇다 하여 수입할 때 가릴 수는 없습니다. 설혹 부정한 물질이라도 정화법만 바르게 세우면 오히려 복이 되어 서로가 아무런 장애도 고통을 받지 않고 서원하는 대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진각성존은 행여나 장화법을 놓칠까 염려하는 마음으로 교화하는 스승은 2/10 법을 실천하도록 하였습니다. 1/10을 더하게 한 것은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세운 법입니다. 일반인도 정상적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재물에는 수익의 2/10, 또는 3/10까지 법을 세울 때 자연히 정화될 것입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중생계는 자신의 고통이 이웃으로 전염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정화법을 바로 세워 가족과 이웃이 고통받지 않기를 서원해야 합니다. 이것이 은혜를 생각하는 정화법입니다. 정화법은 하루아침에 공덕이 나타나는 법이 아닙니다. 꾸준하게 법을 믿고 실천하면 나와 가족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물질 해탈에서 오는 행복입니다. 

정화(淨化)는 무언중(無言中)에 이루어지는 것이 최고의 정화입니다. 밀교는 비밀한 법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삼밀(三密)을 행하므로 삼업이 정화되는 것입니다. 견물생심 하는 중생의 마음을 일상생활에서 정화를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물건의 청탁(淸濁)을 모릅니다. 다만 모든 것이 청정해지도록 정화법으로 다스릴 수밖에 없습니다. 은애하는 마음으로, 보은하는 마음으로 보시하고, 측은한 마음으로 바람 없이 베풀어야 합니다. 베풂을 아무렇게나 할 수 없습니다. 뜻이 좋은 곳, 청정한 곳, 맑은 곳, 자비로운 곳, 뭇 생명에게 이로움을 주는 곳과 청정한 사람, 맑은 사람, 자비로운 사람, 꼭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좋은 마음으로 베풀 때, 정화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중생은 우둔하고 욕심이 많아 명예와 권력과 물질을 얻고 모울 줄 알지만, 베풀기는 잘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먼저 마음을 밝히고 자신의 고방을 살피면서 정시와 정송로 정화하여 공덕력(功德力)을 쌓은 연후에 부처님의 가지력(加持力)을 입고 일체중생을 이롭게 자비의 힘을 펼치는 것입니다. 비로자나불이 가진 청정성의 공능을 받아 자신의 고방을 잘 정리 정돈하여 꼭 필요한 것만을 채우는 정화법을 실천하기를 바랍니다.

29. 실행론 설법 -생활취사

밀교신문   

사사(私私)로서 공중(公衆)일에 방해되게 하지 말며, 공중법(公衆法)을 어기고서 질서문란(秩序紊亂)하게 말며, 자기 의견 고집하여 윗사람에 대항 말고, 부귀인과 권력인에 간사(奸邪)하고 아첨(阿諂) 말며, 빈천인(貧賤人)과 아랫사람 거만(倨慢)하게 경만 말라. 

진각(眞覺)의 진(眞)은 법신 비로자나불의 진실의 진이며 진언의 진이요, 각(覺)은 생활지중각(生活之中覺)을 뜻합니다. 즉 비로자나불의 진실법을 품은 진언으로 일상생활 속에서 깨달음을 가르치는 종입니다. 중생 생활을 떠난 진언이 없으며, 생활을 벗어난 설법도 없습니다. 석가모니불의 8만 장경의 말씀과 비로자나불의 당체설법이 모두 생활 가운데 있습니다. 

생활(生活)의 생(生)은 출생, 존재, 만들어짐을 뜻하며, 활(活)은 삶, 변화, 이어감을 뜻합니다. 태어났으면 살아야 하고, 존재하는 것은 변화하는 것이며, 만들어진 것은 이어가는 것입니다. 불(佛)은 무상하여 존재하지 않으므로 변화가 없지만, 중생은 유상으로 존재하므로 변화가 다양합니다. 그러므로 뭇 생명은 출생하여 존재하며 변화하고 이어지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중생은 누구도 이러한 생활을 벗어날 수는 없으며, 다만 어떻게 출생하고 어떻게 존재하고 어떻게 만들고 어떻게 변하는가가 다를 뿐입니다. 한평생 사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이왕 인간으로 태어나서 같은 시간, 같은 장소, 같은 물건을 이용하면서 굳이 괴로움으로 살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출생과 존재와 변화로 이어지는 가운데 좋은 것보다 괴로움이 많습니다. 만물의 영장으로 지각이 있는 인간은 괴로움을 받고만 살 수 없습니다. 괴로움을 최소한 줄이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 방법 가운데 하나가 자성을 찾는 진언수행입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출생부터 죽음에 이를 때까지 항상 상대가 있습니다. 태(胎)로 태어나면 부모가 있고, 알[卵]로 태어나도 어미가 있고, 습생(濕生)도 화생(化生)도 자연환경이라는 상대가 있습니다. 삶에도 자연과 시간과 인간이라는 상대가 있습니다. 상대로 인하여 출생하고, 상대와 더불어 살아가며, 상대의 관심 가운데 죽음을 맞이합니다. 윤회로 돌아갈 곳도 상대가 있는 곳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상대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다람쥐가 한번 쳇바퀴에 들어가면 달려도 달려도 쳇바퀴를 떠날 수 없듯이, 중생은 한번 출생하고 변화하면서 죽음으로 옮겨가되 윤회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만들어지고 이어지는 곳에는 천상처럼 즐거움만 있는 곳도 있고, 투쟁을 좋아하는 세상, 우둔한 세상, 굶주림의 세상, 고통만 받는 세상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사람이 사는 세상은 즐거움과 고통이 반반인 세상입니다. 반반씩인 세상에서 천상의 낙을 받는 사람이 있고, 시기 질투 욕망으로 투쟁을 즐기는 사람도 있고, 굶주림의 삶을 사는 사람도 있고, 고통으로만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진흙에서 자란 연꽃은 꽃과 열매가 동시에 피고 익으면서 꽃의 아름다움과 향기의 은은함을 열매도 함께 누리면서 존재합니다. 이것은 인과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인(因)치고 자신이 받는다는 것을 보여 주는 법문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금수저, 흙수저의 출생도 자신의 인이요, 존비귀천도 자신의 인이요, 아름다움과 추한 변화도 자신의 인이요, 장단의 이어짐도 자신의 지은 인(因)입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자기가 짓고 자기가 받으면서 왜 즐거움을 만들지 않고 괴로움을 만들어 고통받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나기가 어렵다는데 이렇게 사람으로 태어나서 고통받는다는 것이 억울하지도 않습니까? 이제 두 번 다시 괴로움의 인을 짓지 않는 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많은 종류의 법이 있지만, 그 가운데 가장 쉽게 접하는 법을 일상생활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지금까지는 자신만 좋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행동하고 말하였습니다. 그 결과가 좋으면 그대로 하면 되지만, 결과가 좋지 못하다면 바꿔야 합니다. 중생계는 자신이 중심인듯하지만, 인을 짓는 것에 최대의 도움을 주는 자는 상대입니다. 자신이 상대에게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즐거울 수도 있고 괴로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받는 괴로움에 관하여 상대방을 원망하거나 미워할 일이 아닙니다. 자신이 찾고 선택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허물이 자신에게 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우둔하여 취사(取捨)하는 법을 모른다면 선지식을 찾아 가르침을 받으면 됩니다.

선지식 또한 상대입니다. 상대의 모습을 보면, 무엇을 어떻게 취사(取捨)해야 할지를 알 수 있습니다. 상대가 즐거우면 나도 즐겁고 상대가 괴로우면 나 또한 괴롭습니다. 

진각 성존은 “항상 다른 사람들의 마음 둔 것 먼저 알아, 내 마음에 미루어서 생각하여 볼지니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 말씀을 구체적으로 나누어 보면 첫째, 사사(私私)로서 공중(公衆) 일에 방해(妨害)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은 상대도 좋아하고 자신이 싫어하는 것은 상대방도 싫어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적은 일에 투쟁(鬪爭)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둘째, 공중법(公衆法)을 어기고서 질서문란(秩序紊亂)하게 하지 않아야 합니다. 세상은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인욕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면서 질서를 지키는 것입니다. 달마 스님은 9년을 면벽하면서 혜가(慧可)를 기다렸습니다. 이것이 중국 선종의 발달이며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셋째, 자기 의견 고집하여 윗사람에 대항하지 않아야 합니다. 항상 은혜롭게 생각하면서 수순하는 법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 숙이듯이 겸손한 마음으로 상대방의 의견을 끝까지 듣고 그 속에 담긴 진의를 이해하고자 하여야 합니다. 넷째, 부귀인과 권력인에 간사(奸邪)하고 아첨(阿諂)하지 않아야 합니다. 자기의 잘함을 자랑하며 특혜를 바라는 마음으로 경쟁자를 험담(險談)하는 것과 노력하지 않고 기회만 보는 것을 말합니다. 다섯째 빈천인(貧賤人)과 아랫사람을 거만(倨慢)하게 경만하지 않아야 합니다.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을 버리고 자신의 잘함과 부모 형제 자녀들을 자랑하면서 뽐내고자 하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비로자나불로부터 화현한 부모요, 형제이며, 선지식이요, 도반이요, 동행자입니다.

이것이 생활화로 불국정토를 만드는 법입니다. 취해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의 기본은 중생을 이익하고 안락하게 하는 자비심과 모든 생명은 평등하다는 마음가짐입니다. 평등함은 적을 만들지 않으며, 차별하지 않으며, 비겁하지 않으며, 모두를 자신의 몸과 같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선한 일과 악한 일, 옳고 그릇됨,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에 할 일, 근본과 지말, 장점과 단점, 삿된 일과 바른 일, 길한 것과 흉한 것, 재앙과 복, 이익과 손해, 얻음과 잃음 등을 잘 살펴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살펴서 실천함이란 좋은 것은 가지고 나쁜 것을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나쁜 것을 모두 버린다면 생활할 수 없습니다. 나쁘고 재앙 되는 것을 바꾸는 것입니다. 취사는 전화위복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인간은 나쁜 줄을 알면서도 끊지 못하는 약점과 좋은 줄 알면서도 실행하지 못하는 약점이 있습니다. 이것은 욕심을 제어하지 못하고 습관과 애착 때문입니다. 놀음하는 사람이 손을 자르니, 발로써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험악한 고통을 겪을 때는 충격으로 발심하여 중단하지만, 편안한 시절이 오면, 습관이 되살아나서 고통받던 시절을 잊어버리고 다시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래 부처였는데 홀연히 어느 때였는지 모르지만 중생이 되었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윤회하면서 익힌 습관을 바꾸지 않으면 고통은 계속되며 윤회도 계속될 것입니다. 

8만 4천의 바꾸는 법 가운데 하나가 습관을 바꾸는 것입니다. 쉽게 바꿀 수 있는 몇 가지를 말하면, 외도에 잘 현혹되던 습관, 약한 자신의 힘을 보강하려 하지 않고 붕당(朋黨)을 만든 습관, 진리를 배반하고 현실을 선호하던 습관, 노력하지 않고 대가만 바라던 습관, 남의 이익과 자리를 탈취하던 습관,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던 습관, 횡재와 요행을 바라던 습관 등을 바꿔 비로자나불의 청정심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났고 부처님 법도 만났으며, 특히 진언 수행법을 만난 것입니다. 이처럼 좋은 것을 만났을 때 바꾸지 않으면 어느 생에서 바꿀 수 있겠습니까? 진언 염송을 하면, 자신의 허물은 자신이 제일 잘 알게 될 것입니다. 이제 그 잘못 하나하나를 참회하면서 청정습관을 익혀갑시다.

30. 실행론 설법 -복문(福門) 열면 화문(禍門) 닫친다

밀교신문   

현시대는 물질이라 만약 재물 옳게 쓰면, 복의 문이 열리므로 일체 재난(災難) 소멸되고 무량한 복 오게 되며, 만약 재물 잘못 쓰면, 화(禍)의 문이 열리므로 길상선신(吉祥善神) 물러가고 일체 재앙 모든 환난(患難) 번갈아서 드느니라. 

법계는 본래 담도 없고 문이 없어 열거나 닫음이 없습니다. 열거나 닫음이 없는 문을 부처의 기둥과 중생의 기둥을 세워 문을 만들었습니다. 부처의 기둥은 중생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이요, 중생의 기둥은 부처를 닮고자 하는 기둥입니다. 보이지 않으므로 있다는 생각조차 느끼지 못하는 문은 모든 생명과 무생물이 왕래에도 아무런 걸림이 없으므로 모두 편안함을 얻고 자유자재함을 얻게 됩니다. 이 문은 높고 낮음과 들고 남이 없는 듯하지만, 높은 곳에서 내려가면 중생이 되고 낮은 곳에서 오르면 부처가 되는 문입니다. 이를 땅 위에 형상을 만들어 세우고 그 이름을 일주문(一株門)이라 합니다. 형상의 일주문은 사찰에 있고 형상이 없는 일주문은 우리들 마음에 있습니다. 

중생은 부처를 닮고자 하는 마음으로 하나의 기둥을 세워 문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몸의 문과 입의 문과 마음의 문을 세우면서 열거나 닫음이 있는 작용의 신구의(身口意)문을 세웠습니다. 신구의의 세 개의 문은 선악, 시비, 선후, 본말, 유무, 장단, 호오, 미추, 명암, 길흉, 화복의 상대성을 가진 차별문입니다. 이 문은 자동장치를 하여 상대성이 동시 들어갈 수는 없도록 설계하였습니다. 즉 선(善)이 들어가면 악(惡)은 자동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나가 열리면 하나가 닫치는 자동장치를 부착하였습니다. 이것은 자연의 순응입니다. 비유하면, 바람이 들고 나기를 동시에 하지 못하며, 추움과 더움이 동시에 일어나지는 않는 것과 같습니다. 바다는 썰물의 간조(干潮) 현상이 일어날 때 파도가 바다로 향하면서 물이 바다로 나가고, 밀물의 만조(滿潮) 현상이 일어날 때 파도가 육지로 향하면서 물이 올라오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삶도 어느 하나의 문이 열리면 어느 하나의 문은 자동으로 닫치게 됩니다. 즉 복문이 열리면 화의 문은 자연이 닫치게 되며, 화의 문이 열리면 복의 문이 자연이 닫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화와 복이 동시에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것은 몸의 문과 입의 문과 마음의 문의 작용이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화복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현상은 몸의 복문이 열릴 때, 몸의 화문은 동시에 열리지 않지만, 입의 화문이나 마음의 화문이 열릴 수도 있고, 입의 복문이 열릴 때, 입의 화문은 동시에 열리지 않지만, 몸의 화문이나 마음의 화문이 열릴 수도 있으며, 마음의 복문이 열릴 때, 마음의 화문은 동시에 열리지 않지만, 입의 화문이나 몸의 화문이 동시에 열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화문과 복문이 동시에 열린 것처럼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몸과 입과 뜻이 동체이므로 어느 하나의 복문을 열 때 다른 둘에서도 복문이 열리도록 해야 합니다. 몸과 입과 뜻이 각각 활동한다면 서로의 배반입니다. 겉과 속이 다르고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을 살펴서 동일하게 되도록 수행해야 할 것입니다. 

복과 화는 남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천신에 기도하면 천신이 복을 주고, 지신에 기도하면 지신이 복을 주고, 수신에 기도하면 수신이 복을 주고 산신에 기도하면 산신이 복을 주고, 불보살에 기도하면 불보살이 서원을 성취시켜주는 것으로 믿습니다. 이것은 의뢰심 가진 자의 생각이요, 참 진리는 아닙니다. 불보살에게 서원을 세우고 기도 정진하면, 불보살로부터 원력을 입게 되므로 하는 일마다 용맹심이 생겨 장애를 극복하게 되어 서원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것은 수행자 자신의 마음 따라 성취할 힘이 생기게 되는 것이지, 불보살이 주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비유하면, 의사의 좋은 처방전을 받아도 그 약을 먹고 먹지 않고는 환자 자신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서원 정진하면, 부처님이 수행자에게 첫째는 보물창고 있는 곳을 알게 하고, 둘째는 창고에 가는 방법을 알려주며, 셋째는 그곳으로 인도해 줄 것입니다. 낮은 단계의 수행자는 첫째 문에 들어선 것이요, 중간단계 수행자는 둘째 문에 들어선 것이며, 높은 단계의 수행자는 셋째 문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수행자가 불보살로부터 도움을 받는 과정입니다. 보물창고의 문을 열고 열지 않고는 수행자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 보물을 사용하면서 일회성으로, 또는 영원성으로 만드는 권한은 수행자의 마음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물질로 판가름하지 않고 순수하게 살던 시대에는 인정으로 복문이 저절로 열렸습니다. 과학이 발달하고 물질이 풍부해지는 시대는 진리를 세워야만 복문이 열립니다. 물질이 풍부해지는 시대의 사람은 물질에 집착하는 마음이 작용하므로 복문을 열려고 노력해도 잘 열리지 않으며, 화문은 닫으려 해도 쉽게 닫히지 않는 시대입니다. 물질 시대 사람들은 견물생심(見物生心)으로 욕심이 치성하여 도움을 주고자 하는 마음보다 도움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강합니다. 사람은 가지면 가질수록 더 많이 갖고자 하며, 쌓은 것이 썩고 무너져도 관계하지 않고 계속 쌓고자 합니다. 평생을 사용하고도 남을 재산인데도 눈만 뜨면 모으고 쌓기를 반복합니다. 명예도 권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르고 또 올라 더 오를 곳이 없으면 그곳에 다시 누각을 짓고 그것도 모자라 발돋움까지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기도 합니다. 물질과 권력은 자신만이 가져야 한다는 욕망 때문에 네 것도 내 것이요, 내 것도 내 것이라는 마음에 부자의 인연도, 형제의 우애도 끊으려 합니다. 얼마를 가져야 끝이 나겠습니까?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정법을 만나지 않은 이상, 끝이 없을 것입니다. 이루어지는 서원도 행복이 아닌 고통으로 변할 것입니다. 

자연은 사람을 해치고자 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기의 편안함과 편리함과 욕망으로 자연을 오염시키고 파괴합니다. 사회가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자신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생활에 편리함을 주기 위하여 연구하고 개발한 품목들이 이용자가 개발자의 생각과는 달리 나쁜 방향으로 사용하여 인류와 자연을 파괴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칼은 생활을 편리하게 하기 위한 것이지만, 때로는 살상의 무기로 바뀝니다. 다이너마이트, 원자, 핵도 삶의 편리함을 주고자 연구하였으나 살상용이 되어 인류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다이너마이트를 개발한 노벨은 다이너마이트로 생긴 이익금을 참회하는 마음으로 인류평화에 사용하도록 희사하였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착합니다. 남을 해칠 줄 모르는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마음에는 복이니 화니 하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고통의 원인이 되는 악이 주인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주인공은 본래 청정심입니다. 어린아이들 보세요. 악기(惡氣)가 어디에 있습니까? 손놀림 동작 하나하나 순수하여 절대 죄를 지을 사람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복과 화가 구분되지 않은 우리들의 본래 모습입니다. 천진무구한 모습에서 언제부터인지 자기중심의 아집과 욕망과 집착으로 마음이 탁하게 되면서 청정심의 복문이 닫치고 고통의 재화의 문이 열렸던 것입니다. 

청정심을 찾지 않고 복문을 열어보겠다고 정진하지만, 워낙 굳게 닫힌 문이라 쉽게 열지 못할 것입니다. 더구나 닫친 세월이 오래되어 녹슬고, 무게 또한 태산 같아서 작은 손바닥으로 밀어보지만 혼자 힘으로는 열지 못할 것입니다. 함께하는 상대의 힘이 필요합니다. 상대의 힘은 빌리려면 공동체의 자비가 있어야 합니다. 정당하게 사는 법, 남을 해치지 않는 법, 함께하는 인연의 힘을 빌려야 합니다. 보은하며 감사하고, 양보하고 배려하면서 상대의 허물 보지 않고 칭찬하며, 용서하고 참회하는 마음으로 열 수 있습니다. 인심은 천심이라는 말합니다. 자신이 먼저 신구의 공동체의 실천행으로 복문을 열고 이웃에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내가 베푼 하나는 돌아올 때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자신은 하나지만 상대는 천지(天地)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나만의 복문이 아닌 일체중생을 위하여 열릴 때 장원한 복문이 열리게 되며 재화의 문은 자연절로 닫치게 될 것입니다. 진언수행자는 자성을 찾아 현세의 복문을 활짝 열기를 바랍니다.

31. 실행론 설법 -해탈 방법

밀교신문   

해탈하려 하는 사람 마(魔)를 먼저 알 것이니 마(魔)는 생사 좋아하여 사람 지혜 잘 끊으며 착한 법을파괴하고 오욕락(五欲樂)에 탐착(貪着)한다.

해탈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머무르는 해탈과 벗어남의 해탈과 사라짐의 해탈입니다. 머무름의 해탈은 중생계 해탈이며, 벗어남의 해탈은 중생계를 벗어나는 것을 말함이요 사라짐의 해탈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감을 뜻합니다. 머무름의 해탈은 윤회하는 가운데 이루어짐을 말함이요 벗어남의 해탈은 중생계를 벗어나는 열반의 경지를 말하며, 사라짐의 해탈은 성불을 뜻하는 것으로 성불의 자리는 중생이 아닌 부처의 자리며 이때의 부처는 본래 없는 비로자나불을 말합니다. 

중생은 본래 부처인 비로자나불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은 실지로는 요원한 일입니다. 윤회의 자리를 벗어나는 열반을 얻은 연후에 비로소 돌아갈 수 있는 자리입니다. 열반의 자리는 중생을 벗어난 자리이므로 이 자리 또한 돌아가기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중생은 고락이 머무는 윤회에서 천상에 태어나기도 하고, 수라도에 태어나기도 하고, 축생으로 태어나기도 하고, 아귀가 되기도 하고, 지옥에 떨어지기도 하고, 인간으로 환생하기도 하면서 윤회를 거듭하는 것입니다. 윤회를 하는 한, 장소가 바뀌고 형상만 다를 뿐 고락을 벗어난 것은 아닙니다. 하루살이의 하루나 나비의 일생이나 축생의 10년이나 인간의 100이나 천상의 천년이나 모두 잠시의 즐거움을 누리거나 긴 고통을 받으면서 끝없이 윤회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들은 윤회하면서 천상에 태어나 즐거움도 누려보았고, 수라도에 머물면서 투쟁도 해 보았고, 축생에 머물면서 약육강식의 삶도 살아보았고, 아귀로 머물면서 굶주림의 고통도 겪었으며, 지옥에 떨어져서 쉼 없는 고통도 맛보았습니다. 그러는 중에 이제 사람으로 태어났으며 부처님 정법을 만났습니다.

부처님은 왜? 천상이 아닌 사람 몸 받기가 어렵다 하였겠습니까? 인간계는 천상의 즐거움, 수라의 투쟁심, 축생의 우둔함, 아귀의 배고픔, 지옥의 괴로움이 모두 머무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육도의 호오(好惡)와 고락(苦樂)과 진위(眞僞)를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존재하는 이곳에서 이 몸 이대로 윤회의 업보를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치면 언제 다시 벗어날 것을 기약하겠습니까? 특히 머무는 법과 벗어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부처님의 정법을 만난 것은 금상첨화(錦上添花)의 기회를 만난 것입니다. 

인간의 업을 벗어나는 열반을 얻으려면, 먼저 사람으로서 잘 머무는 법부터 깨달아야 합니다. 해탈 없이는 열반이 없고, 열반 없이는 성불이 없습니다. 비유하면 3층 누각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해탈은 1층과 같고, 열반은 2층과 같고, 성불은 3층 누각에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열반이나 성불의 경지에는 고락이 없지만, 인간이 머무는 세상에는 고통과 즐거움이 존재합니다. 열은 열로써 다스리고 냉은 냉으로 다스려야 하듯이 고락이 있는 이곳이 고락에서 벗어나는 길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고락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열반을 얻지 못합니다. 즉 해탈 없이 열반의 문을 두드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나는 깨달아 열반의 경지에 올랐다.’  ‘성불하였다’ 말하는 도인들이 있습니다. 만일 그 사람이 괴로움을 말하거나, 분노한 마음으로 성을 내거나, 권력과 명예와 이익에 집착하거나, 시기 질투로 남을 괴롭히거나, 이웃과 사회에 불편함을 준다면 이것은 거짓 깨달음으로 해탈을 얻지 못한 사람입니다. 해탈법을 어떠한 괴로움도 없는 여여한 경지입니다. 혹 괴로움이 있다면 그것은 일체중생의 괴로움이 자신의 괴로움으로 생각하는 자비의 괴로움입니다. 

부처님이 설하신 8만 4천의 말씀은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머무름을 잘하라는 해탈의 가르침입니다. 열반과 성불의 경지로 나아가는 방편법입니다. 그러므로 45년 설법 후 쿠시나가라에서 ‘나는 한 법도 설한 일이 없다.’라고 말씀하시고 열반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열반도 성불도 아닌 해탈을 중심으로 설하였다는 뜻입니다. 

사찰은 일주문, 천왕문, 해탈문을 지나 부처님 세계로 들어갑니다. 해탈문은 중생계에서 불보살 세계로 들어가는 마지막 문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계 해탈을 지나 열반의 모습으로 불전에 청정수를 올리고 향을 올리면서 계향(戒香), 정향(定香), 혜향(慧香), 해탈향(解脫香),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의 오분향례를 올립니다. 이것이 인간계에 머물면서 정법의 삼학을 실천하여 잘 머무름의 해탈과 잘 머무름의 깨달음을 얻어 열반에 오른 보은의 듯이 담긴 귀명례입니다. 성불로 향하는 맹세의 귀명레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 100년을 머무는 동안 천상, 수라, 축생, 아귀, 지옥의 고락을 모두 받으면서 머물고 있습니다. 인간의 머무름에서 가장 모범적인 모습이 싯다르타 태자의 32상과 80종호의 원만함입니다. 이제 우리도 해탈의 공덕을 쌓기 위하여 머무름을 잘하는 법을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머무름을 잘하는 방법을 진각성존은 넉넉하게 사는 것, 건강하게 사는 것, 화합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빈궁고(貧窮苦)와 병고(病苦)와 불화고(不和苦)에서 벗어나 복지구족한 삶을 사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방법으로는 가난하게 머물지 않으려면,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하고, 병고에 시달리지 않으려면, 계행이 청정하고 인욕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하고, 불화에 머물지 않으려면, 정진하는 마음과 고요한 마음과 화합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법을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도록 인도하는 곳이 심인 도량입니다. 

해탈의 심인 도량에는 신구의(身口意)의 삼밀의 수행문이 있습니다. 생과 사. 현실과 진리를 하나로 표현하는 일주문 지나는 것처럼, 중생과 불을 하나로 하는 금강지권의 신밀문(身密門)을 갖추게 함이요, 모든 장애를 절복시키는 천왕문을 지나는 것처럼, 지수화풍 4대의 육신병과 탐진치만의(貪瞋癡慢疑)의 마음병을 조복시키는 진언을 염송하는 구밀문(口密門)이 이룸이요. 중생과 불이 둘이 아닌 불이의 해탈문을 지나는 것처럼, 오불 관행의 의밀문(意密門)을 성취하게 하는 것입니다. 삼문을 지나면 본전에 이르듯 삼밀문을 지나면 곧 법신 비로자나불의 금강법계궁에 이르러 자신이 곧 비로자나불의 진면목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진언 수행으로 삼밀행을 하면서 일상생활에서 육바라밀을 실천하여 넉넉함에 머물고, 건강함에 머물고, 평화함에 머물면서 가난과 병고와 불화에서 벗어나 복지구족한 해탈을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는 바라는 것이 많습니다. 이것이 얻고자 할 때 얻어지지 않는 서원불성취병입니다. 이 병이 짙으면 짙을수록 해탈과는 거리가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세운 서원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화합을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명예와 내가 화합하지 못하였고, 권력과 자신이 화합하지 못하였고, 건강과 화합하지 못하였고, 물질과 화합하지 못하여 가난이 생기고, 가난으로 인하여 욕심은 더욱더 많아지며, 욕심이 많으므로 서원 또한 많아지게 된 것입니다. 불화에서 가난하고, 가난에서 병이 생기며, 병에서 뭇 고통에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고통에 머물지 않으려면, 자신의 인과를 믿고 정법의 가르침을 받아 일체중생을 자기 몸과 같이 생각하는 베풂의 자비로 살아야 합니다. 

싯다르타 태자의 32상은 보시행으로 이루어진 상이요, 80종호는 청정계를 실천으로 이루어진 모습입니다. 3천위의는 인욕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8만세행은 정진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모두 육바라밀을 근본으로 수행한 결과입니다. 첫째 베풂의 보시와 자신의 허물을 찾는 계행과 욕망에서 벗어나는 인욕과 몸에 대한 애착을 끊는 정진과 명예와 권세에 초연한 선정과 슬기로운 생활을 하는 겁입니다. 끝없이 축적하고자 하는 간탐심, 이로 인해 일어나는 성냄과 우둔함이 해탈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소입니다. 가장 큰 것으로는 욕심을 버리고 성내지 말며, 어리석지 않은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많은 수행자가 성불을 목적으로 수행정진 하지만, 진언행자는 해탈을 목적으로 염송해야 합니다. 인간으로 머무는 동안 잘 머물다 가야 할 것입니다. 싯다르타 태자는 출생게에 분명하게 밝힌 ‘중생을 괴로움에서 편안하게 하리라’는 말씀과 진각성존의 삼고해탈 법을 깨달아야 합니다. 편안함이란 행복입니다. 행복은 괴로움이 없이 머무는 것입니다. 이제 자성을 찾는 참회염송을 하면서 티 없이 맑은 마음으로 잘 머무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32. 실행론 설법 -심본색말(心本色末)과 색심불이(色心不二)

밀교신문   

심본색말은 마음을 기준으로 물질을 바라보는 일원논리(一元論理)를 말함이요, 색심불이(色心不二)는 마음과 물질이 둘이 아니며 일치하여 평등하다는 이원논리(二元論理)를 말합니다.

현상의 색[物質]을 삶의 중심으로 삼고 있는 중생에게 마음이 기준이 된다는 일원논리를 가르친 것이 심본색말입니다. 심본색말의 이치를 깨달은 다음 마음과 현상[(색)色], 어느 것으로도 기준을 세우지 않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이원논리를 깨닫게 됩니다. 이원논리가 색심불이의 가르침입니다.

심본색말과 색심불이는 같은 이치입니다. 다만 특정한 하나로 기준을 세우는 것과 모든 것이 기준이 된다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현실의 눈으로 보면 심본색말이요, 진리의 눈으로 보면 색심불이가 되는 것입니다. 우주 법계와 중생계는 동체로써 색심불이에서 시작하여 심본색말로 이어지고, 심본색말에서 다시 색심불이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현실을 살아가는 중생은 먼저 심본색말의 이치를 알아야 합니다. 심본색말의 이치를 모르면서 색심불이를 논하면 1층이 없는 2층과 같아 세상 바라봄이 넓지를 못할 것입니다. 다시 비유하면, 하나의 뿌리에서 줄기와 잎, 꽃과 열매가 생기는 것과 같습니다. 뿌리가 없으면 줄기와 잎이 없고, 꽃이 없으면 열매 또한 없습니다. 어느 하나를 중심으로 좋고 나쁨을 말할 수 없습니다. 모두 한 뿌리에서 파생하여 같은 성품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품에서 나누어진 심본색말이며, 각각 다른 모양을 가졌으나 같은 성품이므로 색심불이입니다. 마음이다, 물질이다. 차별하지 않고 보이는 그대로 다르다는 것을 인증하고 긍정하면서 어느 것은 소중하고, 어느 것은 필요 없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이 색심불이입니다. 우리는 흔히 심본색말은 낮은 진리요, 색심불이는 높은 진리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평등의 이치를 모르는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뭇 강물이 모이는 바다, 맑은 물, 탁한 물, 개울물, 강물을 분별하지 않고 받아들여 둥근 한 방울로 수평을 이루면서 한 맛을 냅니다. 이것이 색심불이입니다. 그리고 바람에 맞추어 강약의 파도를 일으킵니다. 물과 파도의 관계가 심본색말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은 곧 물과 같이 변함없는 불심(佛心)이요, 색은 바람같이 무한하여 헤 아릴 수 없이 작용하는 성품[중생심(衆生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품을 변하지 않는 마음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음이 아닌 성품입니다. 불(佛)의 마음은 사용불가(事用不可)지만, 사용이 가능한 것은 성품입니다. 성품은 아침저녁으로 변하며, 작심삼일(作心三日)의 작용을 보이고 있습니다. 성품인 마음은 땅을 보면 땅을 닮고자 하고, 불을 보면 불을 닮고자 하며, 물을 보면 물을 닮고자 하고, 나무를 보면 나무를 닮고자 합니다.

성품은 또한 권력을 생각하면 권력에 맛 들여지고, 재물을 생각하면 재물에 맛 들여지게 변합니다. 그러므로 성품은 시간과 장소와 물건에 따라 언제든지 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변하는 성품을 크게 말하면 생을 바꾸어 육도를 윤회하는 것입니다. 중생이 자성을 찾는다는 것은 곧 성품을 찾는 것이요, 수행한다는 것은 성품의 변화를 종요롭게 하기 위함입니다. 만일 중생이 성품을 바꿀 수 없다면 고행 정진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또한 생활의 삼고인 가난과 병고와 불화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도 없습니다.

성품을 다스리는 법이 8만 4천 종이나 됩니다. 성품을 잘못 사용하면 8만 4천의 번뇌가 되고, 바르게 사용하면 8만 4천의 보리가 되는 것입니다. 

‘화엄경’에 ‘일체는 오직 마음으로 만든다<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하고, ‘대일경’에 ‘진실한 자신의 마음을 알아라<여실여자심(如實知自心)>.’ 하였습니다. 모두 중생의 성품을 설한 것으로 자신의 행(幸)과 불행(不幸)은 자신의 성품을 어떻게 사용하였는가에 있다는 뜻입니다. 성품을 다스리는 가장 쉬운 법이 일상생활 속에 있습니다. 만물을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 보는 법입니다. 자연을, 사람을, 시간을 그대로 보면서 자신의 기준으로, 자신의 수준으로 판단하지 않고, 비교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간섭하지 않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다름을, 보이는 그대로의 다름을 인정하면서 다름의 원인과 다름의 값을 찾는 것입니다.

중생은 괴로움과 즐거움이 상반하는 세상에 살면서 즐거움이 많기를 바랍니다. 동업(同業)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은 상대성에 의하여 이루어집니다. 착함은 생각을 모아 짓게 되고, 악(惡)은 무심결에 짓게 됩니다. 무심결에 짓는다는 것은 자신과 상대를 비교하는 습관 때문입니다. 자신의 수준으로 판단하며, 남이 가진 것을 시기 질투하고, 자신의 큰 허물은 감추고 상대의 작은 허물을 들추어내기 좋아하면서 이것이 악인 줄 모르고 행하고 있습니다. 항상 자신의 지식을 기준으로, 자신의 능력을 기준으로 상대를 평가하고 비교하고 판단하는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우물 안의 개구리의 눈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마음은 본래는 무형(無形) 무색(無色) 무명(無名)인데 물질을 첨부하여 유형 유색 유명의 형상으로 만들었습니다. 유상의 몸으로 출생하였기에 유상의 삶을 살면서 물질에 애착을 품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러한 성품에서 물질에 대한 애착을 가지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가지는 순간부터 선악 시비, 선후 본말, 호오 장단을 분석하고 판단하는 자체가 그릇된 것입니다. 중생의 삶에서 이것을 벗어나기란 어렵습니다. 이루는 것도 성품이요 변화시키는 것도 성품입니다. 사용하는 방향이 다를 뿐입니다. 이제 그 “다를 뿐이다.”를 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하면 됩니다.

우리는 다행스럽게도 괴로움과 윤회를 벗어날 좋은 기회를 만났습니다. 봄과 가을을 비교할 수 없고 여름과 겨울을 비교하지 못합니다. 봄이면 새싹이 나고, 여름의 강한 햇빛, 가을의 서늘함, 겨울의 찬바람, 이것이 사계절의 다름입니다. “다르구나.” “다를 뿐이다”하는 생각이 곧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이며, 여실지자심(如實知自心)이며, 비로자나불과 합일하는 색심불이(色心不二)입니다. 각각 특색을 가지고 작용하므로 좋고 나쁨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중생계도 같은 것은 없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다르구나”, “소년과 노인이 다르구나”, “아름다움과 추함이 다르구나”, “가난한 사람과 부자가 다르구나”, “아픈 사람과 건강한 사람이 다르구나”, “원만한 사람과 장애인이 다르구나”,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이 다르구나”,  “웃는 사람과 성내는 사람이 다르구나”, “인색한 사람과 자비로운 사람이 다르구나”, “어리석은 사람과 지혜로운 사람이 다르구나” 등 8만 4천의 다름이 있습니다. 다르다고 생각할지언정 좋고 나쁨을 판단하지 마십시오. 긴 것과 짧은 것, 검고 희고 붉고 푸르고 빨갛고 노란 것에서 아름다움과 추함으로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모두 그대로의 모습에서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불쌍하다. 안타깝다. 귀하다. 천하다. 비굴하다. 훌륭하다가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다를 뿐이다.”입니다. 한 물건이 모든 것을 갖출 수 없듯이 한사람이 모든 것을 갖출 수 없고, 한사람이 모든 일을 할 수 없고, 한사람이 모두가 될 수는 없습니다.

각각 맡은 것이 다르고, 가진 것이 다르고, 능력이 다르고, 배움이 다르고, 하는 일이 다르고, 좋아하는 부분이 다르고, 취미가 다르고, 습관이 다릅니다. 자신이 하지 못하는 일을 상대가 대신하고,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상대가 가졌고, 자신의 부족함을 상대가 채워주고, 자신의 부덕을 상대가 가졌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존중하고, 긍정하고, 고맙게 생각하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색심불이입니다. 이생에서는 나와 남으로 나누어졌지만, 우리는 한때 부모였고, 형제였고, 부부였고, 자매였고, 친구였습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불이법(不二法)의 실천입니다.

이제 자신만의 생각을 내려놓고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보고 들으면서 “다르구나”를 익히는 것입니다. 자신 수준의 선악 시비 선후 본말의 차별을 없애고, 자신 수준의 호오 장단 상하 고저를 버리고 다만 “다를 뿐이다”, “다를 뿐이다”, “다를 뿐이다”를 반복하는 공부를 화두를 탐구하듯이 행주좌와 어묵동정에 “다르구나”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를 뿐이다”를 관조(觀照)하는 삼밀묘행(三密妙行)을 실천하는 가운데 낱낱의 서원을 세우지 않아도 불보살이 수행자의 마음을 알아서 부족함을 채워줄 것입니다.

瓢蟲

不朽의 古典에서 찾은 智慧와 心灵, 역사적 敎訓과 省察에서 옛글의 향기에 취해 사랑에 빠지게 되었음을 밝히는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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