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는 왜 분단되었는가

 한반도는 왜 분단되었는가 

분단으로 가는 길, 그것을 막아선 사람들

좌·우 합작 풍자화, 〈제3특보〉, 1946. 10. 28

모스크바 3상 회의와 신탁 통치 문제

1945년 12월, 미국과 소련, 영국의 외무 장관이 모스크바에서 회의를 열어 한국 문제를 협의하였다.(모스크바 3상 회의) 1943년 12월 카이로에서 맺은 '적절한 과정을 거쳐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약속을 다시 확인하는 자리였다.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가 열리고 있던 1945년 12월 27일, 《동아일보》가 "미국이 즉시 독립을 주장한 데 대해 소련이 38도선 이북이라도 점령할 목적으로 신탁 통치를 제안하였다."고 보도하였다. 즉시 독립을 원했던 한국인 대다수가 《동아일보》의 보도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에 좌·우 정치 세력 모두 신탁 통치 반대(반탁) 의사를 밝혔고, 특히 우파 정치 세력은 대대적인 반탁 운동을 벌였다. 김구를 비롯한 임시 정부 계열은 신탁 통치에 반대하며 임시 정부가 과도 정부 역할을 맡겠다고 나섰다. 이승만과 한민당은 소련이 신탁 통치를 주장하고 사회주의자들이 이를 지지한다며, 반탁-반소-반공 운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반탁 의사를 밝혔던 중도파와 좌파 진영은 회의 결정서를 확인한 뒤 입장을 바꾸었다.

《동아일보》의 신탁 통치 기사

모스크바 3상 회의에 대한 《동아일보》의 대대적인 보도는 전국적인 반탁 운동을 불러왔고, 한민당은 소련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1. 조선에 (통일된) 임시 민주 정부를 수립한다.
2. 이를 위해 미·소 대표자들이 공동 위원회(미·소 공동 위원회)를 구성한다.
3. 미·소 공동 위원회가 조선 임시 정부와 상의하여 최고 5년간의 신탁 통치안을 작성한다.
4. 2주 내에 미·소 군 사령부 대표들이 만난다.
- 조선에 관한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서(요약)

사실 12월 27일자 《동아일보》의 보도는 명백한 오보였다. 기사와는 달리 신탁 통치를 제안한 쪽은 소련이 아니라 미국이었다. 미국은 얄타 회담(1945. 2.)에서는 30~40년의 신탁 통치를, 모스크바 회의에서는 5년간의 신탁 통치를 하되, 협의하에 5년을 더 연장할 수 있도록 제안하였다.

반면 소련은 조선 임시 정부의 수립을 제안하였다. 임시 정부 구성에서 좌파 진영이 우세할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서는 이런 미국과 소련의 제안을 절충한 것이었다. 여운형과 안재홍 등 중도파는 신탁 통치를 반대하였다.

그러나 미·소의 분할 점령이 분단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남과 북을 아우르는 임시 정부를 서둘러 세운 뒤, 단결된 한국인의 힘으로 신탁 통치 실시 여부를 놓고 미·소와 협상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조선 공산당은 '3상 결정 절대 지지' 입장을 밝히고, 하루라도 빨리 미·소 공동 위원회를 열어 통일된 임시 정부를 만들자고 주장하였다. 모스크바 3상 회의를 계기로 우파와 좌파가 정면으로 대립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38도선 이남에서는 우파 세력이 크게 확장되었고, 이북에서는 반탁을 주장한 우파 세력이 수난을 당하였다.

미 군정이 실시한 '미래 한국 통치 구조에 관한 여론 조사'(8,000여 명 응답, 1946. 9. 10.)

많은 사람이 사회주의를 희망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은 사회주의를 '시장 경제를 유지하되 공공의 이익에 중요한 산업은 국가가 경영하고, 지주제를 폐지하자.'는 정도로 이해하였다. 당시 중도파의 주장을 연상하면 된다.

신탁 통치를 둘러싼 갈등

'신탁 통치 절대 반대'와 '매국노 처단'을 주장하는 우파의 집회(왼쪽)와 '3상 결정 절대 지지'와 '자주 독립 정부 수립'을 내건 좌파의 집회(오른쪽) 모습이다. 우파와 중도-좌파의 격렬한 대립으로 건국 사업은 벽에 부딪혔다.

분단으로 가는 길

'반탁'과 '3상 결정 지지'를 둘러싼 좌·우파 간의 공방이 전개되는 동안, 38도선 이남과 이북은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미 군정은 한국에 좌파 정권이 수립되는 것을 우려하여 우파를 지원하였고, 좀 더 수월하게 한국을 통치하기 위해 일제하의 총독부 관리나 경찰 들을 유지하였다. 이들 중에는 독립 운동가 색출에 앞장서고 우리 청년들을 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몬, 민족 반역자들도 많았다.

미 군정 경제 정책도 우파의 견해와 큰 차이가 없었다. 옛 일본인 기업을 자주적으로 관리하겠다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군정이 직접 별도의 관리인을 지명하였으며, 몰수한 일본인 소유 토지도 분배를 바라던 농민의 뜻과 달리 직접 관리하였다.

미 군정 시기 친일 경력 경찰의 수

(출처 : 군정 한·미 관계자 회의 브리핑 자료)

미 군정의 현상 유지 정책

미 군정은 군정 고문 대부분을 한민당에서 충원하였고, 한민당 간부를 경찰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경찰 조직에서는 친일 경력자가 여전히 큰 비중으로 잔존하였다. 또한, 이승만과 김구가 추천한 인사를 중심으로 민주 의원을 구성하여 임시 정부를 수립하려고 하였다.

소련이 지원하는 가운데, 이북의 좌파는 1946년 2월 8일 임시 정부 기능을 맡을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를 결성하였고, 김일성이 위원장을 맡았다. 소련과 이북 지도부는 이북을 정치·경제·군사적으로 강화하여 조선 혁명의 근거지로 만든 다음, 이남으로 혁명을 확산한다는 민주 기지 노선을 수립하였다.

지주의 토지를 무상으로 몰수하여 무상으로 분배하는 토지 개혁을 실시하였고, 8시간 노동제에 기초한 노동 법령과 남녀 평등법을 제정하는 한편, 주요 산업을 국가 소유로 만드는 국유화 조치를 잇달아 추진하였다. 이남에서는 미 군정이 우파를 지원하고, 노동자·농민의 개혁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군정에 대한 여론이 나빠졌다. 좌파는 이러한 여론을 바탕으로 미 군정을 압박하였으나, 미 군정은 도전하는 좌파를 용납하지 않았다.

남녀 평등법 제정을 축하하는 집회(1946, 북한)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가 일련의 개혁을 추진하자, 이북의 지주와 자본가, 우파 정치인 상당수가 이남으로 내려왔다. 이남의 좌파는 이북에서 실시한 것과 같은 개혁을 주장하며 미 군정을 압박하였다. 이남 우파와 위기감을 느끼고 남쪽으로 내려온 북쪽의 우파는 함께 반공을 소리 높여 외쳤다.

미·소의 대립이 본격화되기도 전, 국내 좌파와 우파의 대립이 극단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여기에 미국과 소련의 대립이 중첩되면서 한국의 통일 국가 수립은 더욱 어려운 상황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1945~1949년 주요 정당

수많은 정당이 난립한 듯 보이나, 한민당 중심의 우파와 조선 공산당-남로당 중심인 좌파, 사상과 이념의 차이를 뛰어넘어 단결하자는 중도파로 나눌 수 있다. 중도파는 좌·우 합작 위원회(1946) 이후 민족 자주 연맹(1947)을 구성하여 협력을 모색하였다. (출처 : 서중석,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좌·우 합작 위원회

좌·우 합작 운동은 조선 공산당이나 극단적 반공주의자를 배제하려는 미 군정의 뜻이 반영되어 있었고, 제2차 미·소 공위가 실패한 이후 사실상 무력화되었다. 사진은 해체될 무렵의 좌·우 합작 위원회 사진이다.

여운형과 김규식, 좌?우 합작을 위해 노력하다

1946년 3월 20일, 모스크바 3상 회의의 결정에 따라 미·소 공동 위원회(미·소 공위)가 열렸으나 순조롭지 못하였다. 우파의 반탁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고, 미·소가 임시 정부 수립 논의에 참가할 정당과 사회 단체 선정을 둘러싸고 양보 없이 대립하였기 때문이다.

두 달을 끌던 회의는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났고, 남북이 서로 다른 길을 걸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높아졌다. 이때 여운형과 김규식 등 중도파는 "진정한 통일 정부는 좌·우 합작을 통해 수립될 것이요, 결코 좌나 우 단독으로 수립되지 못할 것"이라며 분단을 막기 위한 좌·우 합작 운동을 제안하였다.

이승만의 정읍 발언 관련 신문 기사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은 처음으로 이남만의 단독 정부 수립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승만은 미 군정이 좌·우 합작 운동을 지원하자, 직접 미국에 가서 미 국무성을 대상으로 단독 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설득하고 돌아왔다.

1946년 7월 좌·우파가 두루 참가한 좌·우 합작 위원회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합작 노력은 난관에 부딪혔다. 이승만과 한민당은 반소-반공을 원칙으로 내세우면서 이남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하였고, 조선 공산당은 친일 민족 반역자를 배제하고, 중요 산업을 국유화하고 토지 개혁을 실시할 것을 거듭 주장하면서 좁혀질 수 없는 팽팽한 줄다리기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미 군정과 소련-이북도 좌·우 합작과 무관한 길을 걸었다. 1946년 말 이북은 물론 이남에서도 임시 정부(북조선 인민 위원회-남조선 과도 정부)와 임시 의회(인민 회의-입법 의원)가 구성되었다. 남과 북의 단독 정부 수립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러나 이남에서는 좌파 세력이, 이북에서는 우파 세력이 배제된 임시 정부와 임시 의회였다.

1947년 5월, 1년 만에 미·소 공위가 다시 열렸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 모두 책임을 상대에게 떠넘기려고만 하였을 뿐, 회의는 또다시 두 달 만에 성과 없이 끝났다.

미·소가 합의해서 통일 정부를 세우자던 모스크바 합의는 이렇게 해서 무효가 되고 말았다. '좌·우 합작 → 남북 연합 → 미·소를 비롯한 외세 설득'으로 통일된 민주 정부를 세우려던 중도파의 노력도 좌절되었다.

여운형 장례식

여운형은 1947년 7월 19일, 제2차 미·소 공위가 결렬된 직후 암살당하였다. 범인은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우파 청년이었다.

"38도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제2차 미·소 공위가 결렬되자, 1947년 9월 미국은 한국 문제를 국제연합(유엔)을 통해 해결하겠다고 나섰다. 소련은 이에 반대하며, 두 나라 군대가 동시에 철수하여 한국인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미국이 거부하였다.

1947년 11월, 유엔 총회는 미국이 제안한 '유엔 감시하 남북 총선거를 통한 통일 정부 수립 방안'을 다수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이 한국에 파견되었으나, 소련은 이들의 이북 방문을 거부하였다. 미국은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만이라도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유엔 소총회의 결의를 빌려 38도선 이남에서 단독 선거를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단독 선거가 분단 정부 수립으로 이어질 상황에서 분단을 막기 위한 남북 협상 운동이 다시 일어났다. 이번에는 중도파 정당 및 사회 단체를 중심으로 민족 자주 연맹을 조직하였던 김규식과 한국 독립당을 이끌었던 김구가 중심이 되었다.

제2차 미·소 공위

제2차 미·소 공위가 열리던 1947년은 이미 미·소 합의에 의해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기가 어려워진 상황이었다. 동유럽에서 사회주의 정권이 차례로 들어서자, 미국이 사회주의의 확산을 막는다며 소련에 대한 봉쇄 정책으로 마셜 계획을 실시하였다. 오른쪽 지도는 그에 따라 동서로 나뉜 유럽을 보여 준다. 1947년에는 미국과 소련이 분할 점령한 동·서독에서단독정부를 구상하기 시작하였다.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차가운 전쟁(냉전)이 본격화된 것이다.

냉전 풍자 만평
1947년 9월 16일 《만화 행진》 창간호에 실린 시사 만평이다.
평양 을밀대 앞에 선 김구와 김규식

김규식(1881~1950)은 1919년 임시 정부 대표로 파리 강화 회의에 참가하였으며, 1930~1940년대 동안 중국에서 활동하던 독립 운동 단체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해방 후에도 좌·우 협력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44년에는 임시 정부 부주석을 지냈다.

우리가 기다리던 해방은 우리 국토를 양분하였으며, 앞으로는 그것을 영원히 양국의 영토로 만들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 나는 통일된 조국을 세우려다가 38도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 협력하지 않겠다.

- 김구, <삼천만 동포에게 울며 호소함>, 1948. 2. 10.

1948년 2월 16일, 김구와 김규식은 김일성과 김두봉 등 이북의 지도자들에게 남북 협상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한 달 동안 이북은 이에 응답하지 않았다. 이북은 남조선 노동당(남로당)을 통해 단독 정부 수립 반대 운동을 이끄는 한편, 이북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준비하고 있었다.

앞선 2월 7일, 이남에서는 남로당의 제안으로 대규모 단독 선거 반대 투쟁이 일어났다. 도시에서는 노동자들이 파업과 시위를 전개하였고, 농촌에서는 무장대가 조직되어 무장 투쟁을 벌였다.

특히, 제주도에서는 무장 투쟁 형태로 단독 선거 반대 투쟁이 이루어져 선거구 세 곳 가운데 두 곳에서 선거가 치러지지 못하였는데, (4·3 사건) 군인과 경찰이 이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제주도민이 희생되었다.

김구와 김규식이 바라던 남북 협상은 4월에야 열렸다. 그리고 어렵사리 '외국 군대의 즉시 철수, 내전 방지를 위한 공동 노력, 통일 임시 정부 수립 절차 합의, 남조선 단독 선거 반대' 등의 합의를 이끌어 냈다.

그러나 미·소 모두 이 합의안을 무시하였다. 이승만과 한민당은 김구의 이북행을 소련에 한반도를 팔아넘기는 일이라며 비난하였고, 이북 역시 이남의 단독 선거를 비난하며 자기 정부 수립의 필연성을 강조하는 데 활용할 뿐 분단을 막으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협상에 의한 통일 정부 구성에 실패한다면, 통일을 명분으로 한 전쟁이 올지도 모를 일. 그래서 분단을 막는 것은 곧 전쟁을 막는 노력이기도 하였다.

38도선에 선 김구

1948년 4월 19일에 38도선을 넘은 김구는 5월 5일에 돌아왔다. 단독 선거를 닷새 앞둔 날이었다. 김구는 단독 정부 수립이 동족 간 전쟁으로 이어질지 모른다며 선거에 불참하였다.

◈ 분할 점령된 국가는 다 분단되었나요?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연합군이 분할 점령한 지역에는 독일, 오스트리아도 있었다.

독일은 자본주의 국가 서독과 사회주의 국가 동독으로 나뉘었어요. 미·소 모두 독일의 분단을 염두에 둔 정책을 폈으며, 1948년에는 미·소가 군사 충돌 직전까지 이르게 되었다. 동·서독이 각각 독립 정부를 구성한 것은 1949년의 일이었다.

오스트리아도 1945년 4월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네 나라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다. 자그마치 10년 동안이나. 독일과 함께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나라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분단되지는 않았다.

오스트리아에도 좌파와 우파, 중도파가 있었는데, 임시 정부 구성과 관련한 선거에서 좌파인 사회 민주당이 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좌파는 우파 및 중도파와 연립 정부를 구성하였고, 합의에 따라 정책을 수행하였다. 국민의 80% 지지를 받아 영세 중립국 선언도 했다. 어떤 국가와도 동맹하지 않을뿐더러, 어떤 국가의 군대도 자국에 주둔할 수 없게 하겠다는 것이다.

1955년, 드디어 오스트리아와 미·영·프·소 4개국이 참가한 오스트리아 국가 조약이 체결되었다. 분할 점령된 지 10년 만에 자유로운 독립 공화국이 된 것이다.

출처: 김육훈. 분단으로 가는 길, 그것을 막아선 사람들 -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2011. 8. 8.)

[한반도는 왜 분단되었나 ①] 한반도 신탁통치 구상과 소련의 대일전 참전

 대한민국 통일부 ・ 2022. 9. 10. 15:00

8월 15일은 우리에게 여러 의미를 지닌 날입니다. 1945년 8월 15일은 한민족이 일제 강점에서 벗어난 기쁨의 날이고, 1948년 8월 15일은 대한민국의 정부수립 기념일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정부수립이 통일이라는 민족의 염원을 이루지 못한 채 이루어진 날이라는 점에서는 안타까운 날이기도 합니다. 이번 기사를 포함한 총 5편의 기사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한반도 분단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카이로 회담: 독립에 대한 보장과 신탁통치 구상의 공존

제2차 세계대전 중이었던 1943년 11월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의 윈스턴 처칠 수상, 중국의 장제스 총통 간에 열린 카이로 회담에서는 한국의 독립에 관한 문제가 논의되었습니다.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인 신용하 교수에 따르면 카이로 선언에 한국의 독립 조항이 포함된 것은 당시 중국 국민당 정부와 장제스 총통의 공헌이 크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국민당 정부와 함께 항일운동을 펼쳤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노력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화여자대학교 정병준 교수에 따르면, 카이로 회담 중 열린 루스벨트 대통령과의 만찬 자리에서 장제스 총통은 한국의 독립문제를 제기했으며, 이것이 몇 차례의 논의와 수정을 거쳐 카이로선언의 한국 독립 조항으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이는 그동안 임시정부가 장제스 총통을 설득한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카이로 회담은 2차 세계대전 마무리를 위한 강대국 정상들의 회담이었던 만큼 그들의 이해관계와 전략이 반영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병준 교수에 따르면 당시 장제스 총통이 한국의 독립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던 것과는 달리 루스벨트 대통령은 한반도에 대한 다국적 신탁통치를 원했고 영국은 많은 식민지를 가지고 있던 자신들의 처지를 고려해 한반도의 독립에는 소극적이었습니다.

따라서 카이로 선언의 한국 독립 조항은 한국의 ‘즉시 독립’이 아닌 ‘적절한 시기에 독립’으로 명시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정병준 교수는 ‘적절한 시기’라는 표현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다국적 신탁통치 구상이 반영된 결과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처럼 카이로 회담에서는 우리 민족의 독립이 논의되고 보장되었지만, 한편으로는 강대국들 각각의 이해관계와 전략에 의한 한반도의 신탁통치 구상이 포함되기도 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얄타 회담: 소련의 대일전 참전과 한반도 분할점령

한반도 분단의 주요 원인 중 하나였던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분할점령은 독일의 패배가 확실시되고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러 가던 1945년 2월의 얄타 회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미국이 대일전을 치르는 데 있어서 자국의 피해를 줄이고자 소련에 대일전 참전을 요청하였고, 소련이 이를 수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945년 2월의 얄타 회담 직후 4월에 루스벨트 대통령이 사망합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완범 교수에 따르면 루스벨트 대통령은 국제주의자로서 소련을 국제기구의 틀 속에 참여시키고자 하였습니다. 따라서 한반도에 대한 다국적 신탁통치에도 소련을 참여시키고자 하였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사망으로 갑작스럽게 대통령직을 승계한 해리 트루먼 부통령은 국가주의자이며 현실주의자로 소련에 대한 봉쇄를 선택하였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루스벨트 대통령과는 달리 소련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취하고 있었고, 이것은 이후 대한반도 정책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1945년 8월 9일 소련군은 대일 선전포고 후 만주와 한반도 방면으로 진격해왔고, 8월 15일 일본의 패망 직전까지 파죽지세로 한반도까지 남하하게 됩니다. 이에 다급해진 미국은 소련에 38선을 기준으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할 것을 제안하게 됩니다. 이는 소련이 한반도 전체를 장악할 것을 염려해서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결국, 소련이 이를 수용하면서 38선을 기준으로 한 미군과 소련군의 한반도 분할점령이 결정되었으며 이는 이후 한반도 분단의 불행한 시작이 되고 말았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선언 이후인 9월 9일 미군이 한반도에 진주하면서 한반도의 남쪽에는 미군정, 북쪽에는 소련군정이 실시됩니다.

미국의 두 지도자: 루스벨트와 트루먼

이화여자대학교 노경덕 교수는 얄타회담까지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구상에 따라 한반도에 대한 다국적 신탁통치의 원칙이 합의된 상태였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트루먼 대통령이 루스벨트 대통령의 이상주의적 구상이 아닌 소련을 경계하는 현실주의적 정책을 펼치면서 이것이 한반도의 분단으로 이어진 측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얄타 회담까지 유효했던 루스벨트의 구상이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트루먼 대통령이 취임하게 되면서 제대로 실현되지 못한 것이 한반도 분단의 시작이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역량이 아닌 열강들의 대내외적 정치 상황이 한반도 분단의 원인이 된 것은 우리에겐 매우 안타까운 사실입니다.

이처럼 한반도 분단의 시작에는 강대국들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연합국 사이에서 우리 민족의 독립이 처음 약속된 카이로 회담에서는 한반도에 대한 강대국의 신탁통치 구상이 포함되었습니다. 얄타 회담은 한반도 분할점령과 분단을 명시하지는 않았으나 이것이 추후 한반도의 분단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민족의 분단에 있어 이러한 강대국의 영향을 극복하지 못했던 우리 민족의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동의대학교 주봉호 교수는 한반도의 분단은 외적인 요인과 내적인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평가하였습니다. 이는 한반도 분단의 책임이 오로지 외세에만 있지는 않다는 의미입니다.

②편에서는 미소 양군의 한반도 진주 이후 미군정과 소련군정이 각각 한반도의 남쪽과 북쪽에서 펼친 정책과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에서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가 결정된 이후 이를 둘러싼 좌우익의 갈등이 심화하는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를 통해 한반도의 분단 과정에서 외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분열했던 우리 민족의 과오를 함께 들여다볼 수 있을 것입니다.

<2화 보러 가기>

[한반도는 왜 분단되었나 ②]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와 좌우대립
지난 기사에서는 카이로 회담과 얄타 회담으로 한반도의 독립이 결정된 것과 동시에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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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노경덕. 2016. 얄타 회담 다시보기. 사총. 87. 317-349.
윤영휘. 2017. 카이로 회담에서 연합군의 군사전략과 전후 국제질서 구상. 군사. (105). 257-286.
이완범. 2005. 트루먼과 동북아 냉전: 미국의 원폭실험 성공에 따른 소련의 대일전 참전배제 구상, 1945년 4월~1945년 8월. 미국사연구. 21. 69-103.
이정식. 2006. 대한민국의 기원: 해방 전후 한반도 국제 정세와 민족 지도자 4인의 정치적 궤적. 일조각.
정병준. 2014. 카이로회담의 한국 문제 논의와 카이로선언 한국조항의 작성 과정. 역사비평. (107). 307-347.
주봉호. 2010. 한반도 분단의 성격 = 대내외적 요인. 통일전략. 10(3). 321-354.

[출처] [한반도는 왜 분단되었나 ①] 한반도 신탁통치 구상과 소련의 대일전 참전|작성자 대한민국 통일부

2)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분할점령과 미국의 초기 남한점령정책

(1) 한반도의 해방과 분할점령

2차대전 중에 연합국회담에서 한반도문제에 대해 합의했던 내용은 원칙적인 선언에 불과하였지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았다. 1943년 11월 이집트의 카이로에서는 일제가 패망한 뒤 조선에게 ‘적당한 시기와 절차를 거쳐’ 독립을 준다는 말하자면 조건부 독립을 약속하게 되었다.註 024 이 내용이 테헤란회담 및 1945년 2월의 얄타회담에서도 받아 들여졌다.註 025 여기서 스탈린은 한반도문제에 대해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미국이 제안한 신탁통치도 필요없지 않느냐고 반문했으나 미국과 영국 및 중국의 양해를 묵인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합의는 1945년 2월 포츠담에서 발표된 연합국 수뇌들의 공동선언(포츠담선언)에서도 다시 확인되었다.註 026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안은 하나의 구채적인 계획안으로까지 정밀화되지 못하였다.

1945년 8월 8일 미국은 일본의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려 일본 전체를 완전히 공황 속에 몰아넣었다. 바로 이날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와 한반도로 진격하였다. 두번째 원자폭탄이 떨어지자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시점에서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본격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원래 미국이 가지고 있던 계획은 4대국에 의한 한반도 신탁통치안이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실천계획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미국은 한반도에 들어가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하는 당면문제에 봉착하였다.

그런데 전후문제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미국에게는 한반도보다 일본이 더욱 중요하였으며, 일본을 점령하는 데 있어서 소련이 포함되는 연합국에 의한 공동점령보다는 미국 혼자 점령하고 싶었다. 그래서 소련을 무마할 실마리를 한반도에서 찾았다. 마침 소련군이 이미 한반도 동북부에 들어왔음에 비해 미군은 한반도에 들어갈 채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미국은 소련에게 한반도의 절반 정도를 떼어주기로 결정하고, 그 분할선을 북위 38도선으로 잡았다. 왜냐하면 38도선 이남에는 서울과 부산, 인천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중요하게 지적되어야 할 것은 이 미국의 결정초안이 매우 짧은 시간에 몇몇 군인들 사이에서 이뤄졌다는 점이다. 미국은 자신이 독단적인 결정을 소련을 비롯한 다른 연합국에 알렸다. 그들이 아무런 반대가 없었기에 당시 태평양 지역 연합군 최고사령과 맥아더 원수는 「일반명령 제1호」를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한반도에서 북위 38도선 이북의 일본군은 소련군에게 항복하고 그 이남의 일본군은 미군에게 항복하여야 했다. 이 명령의 수행을 위해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의 군사점령에 의해 분단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때에는 38도 분할선은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하기 위해서 잠시 그은 선으로 생각했을 뿐이었다. 이러한 한반도에서 분단은 어디까지나 국제정치의 힘 관계에 따른 또는 강대국들 사이의 합의에 따른 국제형 분단이었다.註 027 이 과정에서 우리겨레의 의지는 조금만큼도 개입되지 않았다.

(2) 남한의 초기 정치상황과 미군정 정책

미국이 한반도의 분할을 성안(成案)하는 그 시점에서 조선총독부의 고관들은 조선의 몇몇 지도자들을 만나 일제 패망 이후의 사태관리에 대해 협의하였다. 그 결과 8월 15일 여운형은 치안권을 비롯한 행정권을 인수받아 해방된 조국의 질서를 유지하는 한편 자신의 지하조직인 건국동맹을 모체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구성해 나갔다. 건준의 구성은 처음에는 바교적 순조로왔다. ‘임정봉대론’을 주창한 일부 우파 지도자들의 반대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많은 지도자들이 호응해 왔고 동포들도 열성을 다했다. 8월 16일 여운형(呂運亨)을 위원장으로 하고 안재홍(安在鴻)을 부위원장으로 하여 건준은 발족하였으며 약 145개 정도의 지부가 결성되어 활발히 움직였다.註 028 초기의 건준은 한반도 전체를 자신의 관할대상으로 삼은, 전한반도적인 조직으로 비교적 좌우가 고르게 손잡은 조직이었으며 해방 직후 한반도에서 ‘사실상의 정부’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다.註 029

그러나 9월 6일 미군이 인천을 상륙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남한의 정국은 크게 바뀌어 나가기 시작했다. 건준과 처음부터 손잡기를 거부했던 우파의 일부지도자들이 미군과의 협력을 염두에 두고 9월 4일 건준타도를 의치며 한민당의 창당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우파의 움직임에 맞서 건준은 ‘사실상의 정부’로서 자신의 위치를 합법화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였는데 공산당이 주도되어 9월 6일 급작스럽게 전국 인민대표자회의를 열어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이제 인공으로 대표되는 좌파세력과 한민당으로 대표되는 우파세력 사이의 투쟁은 더욱 날카로와질 수 밖에 없었다.

9월 8일 서울에 주둔한 미점령군은 9월 12일 아놀드소장을 군장 관으로 하는 미군정청을 수립해 남한을 직접통치하기 시작했으며, 자신만이 남한에서 하나 뿐인 합법정부라고 선언하여 인공과 임정 모두를 부인했다.註 030 그리고는 한민당과 손을 잡고 한민당의 건의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우선 11명으로 구성된 군정장관고문회의를 설치하였는데 여운형과 북한에 있는 조만식(曺晚植)을 빼놓은 나머지 9명은 한민당 간부이거나 지지자였다. 이 때문에 여운형은 고문직을 사퇴하였다. 또한 미군정은 2만 9천여 명의 경찰을 지휘하는 경무부장과 수도 서울의 치안을 맡는 수도경찰청장에 모두 한민당원을 임용하였으며 전국의 경찰기구에는 일제 때의 경관들이 많이 기용되었다. 이러한 일린의 조처들은 미국이 남한의 현상유지를 바라는 극우적인 보수세력과 손잡았음을 뜻했다.

이렇게 정치세력들이 분열되어 가던 중 10월 16일 이승만의 귀국과 11월 말의 김구 등 임정세력의 환국은 통합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승만이 개인자격이지만 미군정의 환영하에 귀국하자 우파세력들은 이승만을 자신들의 지도자로 떠받듬으로써 새로운 구심점을 찾을 수 있었고 좌파 세력들은 이미 인공의 주석으로 추대했던 이승만을 지도자로 옹립하여 그들의 정치적 지위를 더욱 튼튼히 다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10월 24일 좌우파 지도자들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라는 기구를 만들고 그를 이 통합기구의 지도자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반공·반소적인 입장이 명백하였기에 좌파가 떨어져 나감으로써 통합은 깨어 졌다. 김구가 귀국하였을 때에도 좌우의 통합에 대한 기대는 높았다. 그러나 임정은 건준과 인공을 만든 좌파 지도자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좌파는 좌파대로 임정의 우익적 성격 앞에 굴복하려고 하지 않아서 통합의 기대는 다시 한번 깨어졌다.

남한에서의 좌파와 우파의 대립이 굳어져 감과 동시에 남한과 북한 사이의 장벽도 역시 굳어져 갔다. 8월 말과 9월 초에 소련군은 이미 남한과 철도·전신·전화·우편을 모두 끊어버렸다. 이로써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하기 위하여 잠정적으로 그어졌던 38도선은 마치 국경선처럼 바뀌어 갔다.

(3) 북한의 정치상황과 소련군의 정책

소련군은 1945년 8월 8일 일본에 선전을 포고하면서 곧 한반도로 진공해 들어와 8월 12일에는 함경북도 청진에 상륙하였으며, 24~26일에는 평양에 진주하고 8월 말에는 38도선까지 내려와 38도선을 봉쇄하였다. 즉 소련군은 8월말까지 북한에 대한 군사적 점령을 끝낸 것이다.

소련군은 북한에 대해 직접통치의 방법을 취하지 않고 간접통치의 방식을 취하였다. 즉 소련군정청을 세우지 않음으로써 표면적으로는 북한인의 통치체를 인정해주는 한편 소련점령군사령부 안에 민정부를 설치해 이 기관이 모든 정치공작을 맡아 소련이 바라는 방향으로 북한의 정치를 이끌었던 것이다. 민정부의 장관은 로마넨코 소장이 임명되었다. 소련점령군은 간접통치의 원칙에 따라 해방직후 북한주민이 독자적으로 수립한 각도의 건국준비위원회를 대체로 인정해 주었다. 그렇지만 이를 전적으로 인정해준 것은 아니었고, 소련점령군의 의도에 맞게 친소적인 기구로 개편하는 과정을 밟았다.

각 도에서 친소적인 인민위원회의 수립을 끝내고 나서 소련점령군은 10월 8일 북조선 5도 임시인민위원회를 구성하고 10월 28일 이것을 북조선 5도 행정국으로 개편하였다.註 031 이 두 조직 모두에서 조만식이 책임자로 선발되었는데, 이것은 항일지사로서 그의 대중적인 지지가 높았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강조되어야 할 점은 이 5도 행정국이 북한의 ‘태아적(胎兒的) 정부(政府)’였다는 사실이다. 학자들은 대체로 이 5도 행정국의 창설이 ‘북한의 단독정권 수립을 향해 나간 첫걸음’이었다고 평가한다.

이와 더불어 소련점령군은 북한에 혁명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정당을 만들었다. 10월 10일 조선공산당 서북5도 책임자 열성자대회를 열고 이 대회를 통해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10월 13일에 결성하였다.

이처럼 북한만을 단위로 하는 행정부와 공산당의 구성을 각각 끝낸뒤 소련점령군은 10월 14일 그동안 시베리아에서 자신들이 지원해 온 김일성을 환영하는 평양시 군중대회를 열고 만 33세의 젊은이를 ‘민족의 태양’으로 등장시켰다. 김일성이 공개적으로 나타난 때부터 북한의 정치에는 미묘한 암투가 표면에 드러났다. 조만식을 중심하여 조선민주당으로 결집된 우파의 민족주의 세력과 김용범(金容範)이나 오기섭(吳琪變) 같은 국내공산주의 세력은 소련으로부터 들어온 김일성 지지파(甲山派), 그리고 소련점령군사령부 안에 자리잡은 한인 2세(소련파)를 의혹의 눈으로 보았다. 그러나 실권은 점점 소련에서 들어온 세력에게 쏠리고 있었다. 한편 연말경에는 중국공산당의 지원을 받았던 조선독립동맹의 지도자들도 북한으로 들어와 연안파를 형성하고 권력투쟁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남한에서와 마찬가지로 북한에 있어서도 권력투쟁의 승패를 판가름 해준 쪽은 곧 소련이었다. 소련점령군은 자신들이 지원해 온 김일성 세력을 힘껏 뒷받침한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12월 17일 조선 공산당 북조선분국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가 열렸고 김일성은 마침내 책임비서로 선출될 수 있었다. 여기서 김일성은 주요한 연설을 행하였다. 북한을 하나의 단위로 하는 ‘민주기지’를 창설하고 이 민주기지를 발판으로 해서 남한을 해방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즉 김일성은 북한에 공산주의 단독정권을 먼저 세워놓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남한마저 공산화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이에 대항한 북한주민들의 항거도 일어났다. 그 대표적인 보기가 12월에 신의주에서 학생들이 일으킨 반공의거였다. 1946년 3월 1일 평양에서 열린 3·1절 기념식에서는 김일성을 향하여 수류탄이 던져진 일 도 있다. 한편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한 인사들은 공산통치를 피해 남한으로 넘어왔다.

註 024
미국무성, Foreign Relations of United States, 1943, p.448.바로가기

註 025
FRUS, The Conference at Malta and Yalta, 1945.바로가기

註 026
FRUS, The Conference of Berlin(Potsdam), 1945.바로가기

註 027
Kamiya Fuji, “On the Probrem of Korean Unification”, The Journal of Unification Studies, Youngnam Univ., Octover 1971.바로가기

註 028
송건호,「해방직후 사회운동의 분출과 그 양상」,『한국사회 연구』제4호(한길사, 1986).바로가기

註 029
안철현,『해방직후 남한의 정치세력에 관한 연구』(서울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 석사학위논문, 1984).바로가기

註 030
최상룡,「미군정의 초기 점령정책연구」,『고대문화』22(1983).바로가기

註 031
김용복,『해방직후 북한의 정권기관에 대한 연구』(서울대 석사학위 논문, 1988).

[한반도는 왜 분단되었나 ①] 한반도 신탁통치 구상과 소련의 대일전 참전

瓢蟲

不朽의 古典에서 찾은 智慧와 心灵, 역사적 敎訓과 省察에서 옛글의 향기에 취해 사랑에 빠지게 되었음을 밝히는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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