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실행론 설법 -관행금계(觀行禁戒)

 33. 실행론 설법 -관행금계(觀行禁戒)


밀교신문   

삼밀선정법(三密禪定法)은 각자(各自) 매일 정(定)한 시간, 간궐(間闕)하지 말 것이니, 만약 간궐하게 되면 법을 성취 못 할지며, 금강진언 세워두고 다른 태장잡진언(胎藏雜眞言)을 염송하지 못함같이 육자진언 세워두고 다른 염송 못 할지라.

불교 수행은 관법에 있습니다. 관행은 각자의 근기와 덕성과 서원에 맞추어 행합니다. 관에는 현(顯)의 사무량심(四無量觀)과 밀(密)의 오상성신관(五相成身觀)을 비롯하여 많은 종류가 있습니다. 이 가운데 쉽게 행하는 관행이 탐욕을 다스리는 부정관(不淨觀), 성냄을 다스리는 자비관(慈悲觀), 어리석음을 다스리는 인연관(因緣觀), 번뇌를 다스리는 수식관(數息觀), 집착과 애착을 다스리는 백골관(白骨觀), 참선하는 선관(禪觀), 생활 속에서 삼세인과를 증득하는 육자선정의 삼밀관행이 있습니다.

진각성존은 불의 진리와 자연의 이치와 만물 운행을 하나로 표현한 육자관념도의 만다라를 제시하였습니다. 육자관념도를 표본으로 삼밀관행을 하는 데는 지켜야 할 법이 있습니다.

“진언은 반드시 옴마니반메훔을 염송합니다.”

진언은 부처님의 진실함 마음을 표현하는 것으로 8만4천 종류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첫 음을 ‘옴’으로 시작하면 금강계(金剛界) 진언과 여타의 음으로 시작하는 태장계(胎藏界) 진언이라 합니다. 진언은 진언마다 공능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서원에 따라 진언을 다르게 염송해야 합니다. 이러한 불편을 없애기 위하여 진각종은 ‘옴’자로 시작하는 금강계 진언 가운데 비로자나불의 본심이요 일체 불보살의 본심이며, 일체중생의 본심을 뜻하는 옴마니반메훔을 수행본존으로 하는 밀교종단입니다.

옴마니반메훔은 비로자나불의 청정성을 바탕으로 영원성·견고성·불변성·항상성을 담은 총지(總持)진언으로 비로자나불의 좌우보처인 행원을 상징하는 보현보살과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의 공능을 모두 갖춘 관세음보살의 본심을 표현합니다. 중생계는 소리로 다스려지는 세계입니다. 진언 염송 속에 서원을 담고 있습니다. 세상의 소리를 관하는 관세음보살은 서원의 염송 소리를 관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깨달음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진언의 소리를 관한다는 것은 잠자는 자신의 마음을 일깨우기 위함입니다. 마음을 일깨우려면 울림의 소리로 염송해야 합니다. 울림의 소리에 밝음과 맑음과 강함과 부드러움이 있어 잠자는 세포들을 깨워 사악한 기운을 몰아내고 정미하고 슬기롭게 활동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자신의 염송 소리를 듣고 하는 음성염송과 입을 다물고 입안 소리를 하는 금강염송과 진언 자를 관하면서 하는 삼마지 염송과 진언의 의미를 관하는 진실염송 등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어느 하나를 택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하는 방법이 있고, 처음 음성염송으로 시작하여 금강염송⇒ 삼마지염송⇒ 진실염송⇒ 다시 음성염송으로 회향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어느 방법이든 깨달음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서원 있어 육자진언 염송할 때는 금강지권을 결하여야 합니다.”

비로자나불의 청정성을 가지 받으려면 비로자나불과 부합하는 금강 합장과 금강지권을 결하고 염송해야 합니다. 금강지권을 결하는 것은 오로지 비로자나불에 귀명하여 서원을 약속하는 신밀(身密)입니다.

결인은 부처님도 설법하실 때는 전법륜인, 선정에 들 때는 법계정인, 원을 들여 줄 때는 여원인, 마를 항복시킬 때는 항마촉지인, 두려움을 없앨 때는 시무외인을 결합니다. 금강지권인은 이 모든 것이 결집해 총지 결인입니다. 금강지권을 결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몸 중앙으로부터 ‘옴 비로자나불,’ 왼편으로 ‘마 아축불,’ 명문으로 ‘니 보생불,’ 오른편으로 ‘반 아미타불,’ 단전으로 ‘메 불공성취불,’ 인후에 ‘훔 금강보살’을 부르며 가지(加持)합니다. 가지는 자기 몸에 정확한 위치에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결인 중에는 남과 말을 하지 못하며, 정한 시간 동안 결인(結印)를 깨지 않아야 합니다.

“관행자는 다른 이에 비방되게 하지 말며, 수원(讐怨) 맺지 않아야 합니다.”

중생계는 상대성입니다. 상대성은 비교하는 마음에서 강하게 일어납니다. 사바세계는 혼자 살아가는 세상이 아닙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나의 인연으로 모였습니다. 어느 생에서는 부모였고, 형제였고, 부부였고, 친구로 지내면서 도움을 주고받고 고통을 나누면서 함께한 인연이 있습니다. 그 속에는 좋아하는 사이, 미워하는 사이, 빚진 사이, 은혜로운 사이 등 다양한 사이로 엮어졌을 것입니다. 이러한 인연이 현생에 같은 국토에 태어나 같은 행동을 하고 같은 말을 하고 같은 생각으로 좋은 관계만 유지하면 즐겁고 행복할 텐데, 나쁜 관계로 미워하고 싫어하고 원수지는 마음으로 또 다른 악의 인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진언행자는 인과 이치를 깨달아 나쁜 것은 참회로 녹이고, 좋은 것은 더욱 좋은 인을 지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비방을 멈추고 시기와 질투를 멈추고 수원을 맺고 원수 맺는 일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만일 비방과 시기와 질투와 수원심으로 원수 맺음을 멈추지 않으면, 내가 가장 필요할 때, 사회로부터 도움받지 못하며, 가장 외로울 때 이웃은 나를 멀리하며, 성공을 눈앞에 둔 상태에서 장애가 일어나며, 가장 행복할 때 모진 병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진각성존은 실행론에서 “은혜는 평생으로 잊지 말고 수원은 일시라도 두지 말라.” 하는 실천법을 말씀하였습니다.

“수행 공덕으로 얻은 재보, 널리 단시 행할지요. 간린(慳吝)하지 말지니라.”

진언 수행은 좋은 공덕을 쌓아 현생에서 가난과 병고와 불화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구경에는 윤회가 없는 부처 세계로 귀향하는 것입니다. 부처 세계는 본래 나의 고향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삼계 가운데 욕망으로 이루어진 욕계(欲界)에서 주인 노릇을 하면서 탐욕에 맛이 들어 이곳을 고향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세계는 탐욕을 근본으로 하는 세상이므로 탐욕에서 성이 나고, 성이 나면 어리석어지고, 어리석음에서 교만이 생기고, 교만에서 의심을 낳아 집착으로 제2 고향이라 합니다. 이곳에서는 마음 밝히고자 수행하면서 욕망을 채우는 기복적(祈福的)인 수행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욕망의 탐심은 아끼는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탐욕심과 아끼는 마음을 다스리는 행이 보시입니다. 특히 기복 불공으로 얻은 공덕이 있다면 반드시 보은하는 마음으로 희사부터 해야 합니다. 육바라밀 실천이 보시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이익과 대가를 바라지 않는 청정한 보시행이 계행이 되고, 인욕행이 되며, 정진행이 되고, 선정행이 되며, 지혜행이 되기 때문입니다. 싯다르타 태자도 과거 인행(忍行)시에 몸을 아끼지 않은 보시행으로 현생에 원만한 부처 몸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공덕으로 얻은 것을 보시하면 이 보시는 일회성의 공덕이 아닌 장원한 공덕으로 이어지는 보시가 되는 것입니다.

“관행하여 얻은 묘득(妙得), 자랑하지 말 것이며,”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장점과 상대의 단점을 태산처럼 들추고, 자신의 잘못과 상대방의 잘함은 티끌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상대와 비교하는 가운데 일어납니다. 상대의 잘한 것을 보고 그 자리에서 칭찬하고 박수를 보내지만 돌아서서 배 아파하고 있습니다. 다만 아파하는 마음이 얕고 깊고, 늦고 빠르고, 숨기고 나타냄이 다를 뿐 누구나 다 지니고 있습니다. 지난 역사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권력은 부자간도 나누지 않으며, 재물은 형제간도 다툼이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이 있는 충만한 세상에 살면서 특히 수행으로 얻은 공덕을 자랑하면 안 될 것입니다. 자랑하는 순간 상대로 하여금 칭찬보다는 비방하는 인을 짓게 하여 공덕이 감해지게 됩니다. 수행자가 중생에게 해탈공덕은 주지 못할지언정 고통의 인을 지을 여건을 만들어줄 수는 없습니다. 삼가고 삼가야 합니다.

“시간 정진할 때는 시간을 넉넉하며, 수마(睡魔)를 끊어야 합니다.”

시간 정진할 때는 첫째 정한 시간을 여유롭게 마쳐야 합니다. 비유하면, 익지 않은 열매를 추수하는 것과 같이 시간이 부족하게 마치면 서원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둘째 정진 중에는 수마(睡魔)를 빠지지 않아야 합니다. 졸음은 자성을 잃게 하는 마원(魔怨)으로 서원성취의 제일 큰 장애물입니다. 정진 중에 오는 졸음이 한편으로는 공덕성취의 어려움을 알려주는 법문이기도 합니다. 졸음이 법문으로 나타나는 것은 간밤에 잠을 적게 잤거나 피곤하여 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졸음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는 졸음을 겁내지 말고 용맹심으로 다시 희사법을 세우고 염송하면 졸음은 자연히 물러가게 됩니다. 이상과 같은 금계법을 실천하여 오상성신(五相成身)이 구비한 서원이 성취하여 복지구족한 삶을 이룩하기 바랍니다.

34. 실행론 설법 -불공과 마장

밀교신문   

“불공 중에 마장(魔障) 옴은 공덕성취 근본이라. 그를 걱정하지 말고 육행으로 막을지라. 만약 말로 변명(辨明)하고 현실(現實)로써 막는다면 그 일 점점 번거롭고 마장은 곧 크게 된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무수한 겁 동안에 의식주(衣食住) 인(因)을 지어 한평생 사용해도 모자람이 없도록 지니고 태어납니다. 만일 옷 입을 복을 짓지 않았으면 축생으로 태어날 것이요, 입을 옷도 먹을 음식도 짓지 않았다면 아귀로 태어날 것이요, 입을 옷, 먹을 음식, 쉴 곳의 복을 짓지 않았다면 지옥에 들어갈 것입니다. 의식주의 복이 충분한 가운데 욕망이 없으면 천상에 태어날 것이요, 의식주를 갖추었지만 투쟁하는 마음이 강하면 수라도(修羅道)에 환생하게 됩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중음신(中陰身)으로 머물게 됩니다. 이처럼 과거에 지은 선악의 업보에 따라 육도를 윤회하는 것입니다. 중음신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것도 저것도 짓지 않은 상태요, 다른 하나는 다음 생이 결정될 때까지 기다리는 기간 중음으로 머무는 것입니다. 

육도 윤회에서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의식주에 연연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타고난 의식주에 상급 중급 하급의 차별이 있어 인간으로 살면서도 천상처럼 수라처럼 축생처럼 아귀처럼 지옥처럼 삶의 차별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타고난 의식주를 사용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현상입니다. 상급에도 상중하가 있고 중급에도 상중하가 있고 하급에도 상중하가 있습니다. 같은 급이지만 재물을 중심으로 하거나, 권력을 중심으로 하거나, 명예를 중심으로 하거나, 건강을 중심으로 하거나, 수명을 중심으로 하거나, 지혜를 중심으로 하는 것에 따라 각각 다른 삶을 살아갑니다. 장소도 복잡한 곳, 한가한 곳, 밝은 곳, 어두운 곳, 산간벽지, 들이나 강가, 바다와 숲속에 따라 다릅니다. 그리고 만남도 다릅니다. 은혜로 만난 것인지, 빚쟁이로 만난 것인지, 원수로 만났는지, 이처럼 의식주를 사용하는 데도 다양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천상·수라·축생·아귀·지옥과 달리 인간계는 의식주를 돕는 덤의 힘이 있습니다. 그것이 탐욕으로 이루어지는 오욕칠정(五欲七情)입니다. 한평생 사용하여도 모자람이 없는 의식주를 활용에 따라 길흉화복(吉凶禍福)이 생깁니다. 타고난 의식주로 살면 될 것인데 탐욕으로 인하여 받지 않아도 될 것을 받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젊었을 때는 호화로운 집과 좋은 음식과 좋은 옷을 입고 살다가 나이가 들수록 누추한 집으로 바뀌기도 하고, 젊었을 때는 좁고 누추한 집에 살다가 나이 들어 화려한 집에서 살기도 합니다. 원인을 살펴보면, 보통 복을 지은 사람이 복 많은 부모를 만나 자기가 받을 복 이상을 누리게 되면 복이 소모되어 정작 자신의 살림을 살 때는 좁고 누추한 곳에서 살 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복보다 부모덕이 높아서 미래에 받을 복까지 당겨서 받은 결과입니다. 반대로 큰 복으로 태어난 사람이 복이 엷은 부모를 만나 좁은 집, 남루한 옷, 거친 음식으로 살 게 되면 받을 복이 저축되어 자신이 가정을 이룬 후에는 화려하고 넓은 집에서 살 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래 받을 복을 젊을 때 받지 않고 뒤로 미루어진 결과입니다. 

이것이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 하는 말의 진리입니다. 의식주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살림살이가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탐욕이 주관하는 세상[속계(欲界)]에 살고 있습니다. 이곳은 욕심이 끝을 모르고 일어나므로 유혹의 대마(對魔=魔障)도 끝없이 나타납니다. 마장은 자기중심으로 질서를 깨뜨려 재촉하고, 안정을 깨뜨려 불안을 조성하며, 쌓고 허물기를 좋아하면서 즐거움보다는 고통을 즐깁니다. 사람들은 한평생 마장으로부터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본래 이렇게 사는 것으로 당연시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지혜로움이 있으면 마장에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장은 정신적으로는 지조가 없을 때, 신심이 약할 때, 지나치게 좋아할 때, 자만심이 있을 때, 지나치게 영리할 때 나타납니다. 물질적으로는 새로운 것을 하려고 할 때, 일의 성공이 가까워질 때, 이익이 많아질 때, 높은 자리에 오를 때, 좋은 일이나 즐거움이 있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납니다. 이것을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합니다. 서원 불공 때도 마장이 나타납니다. 이때 마장은 허물과 부족함의 그림자입니다. 빚이 많은 사람, 은혜 입고 갚지 않은 사람, 자기만을 생각하는 사람, 탐진치가 치성한 사람에게 잘 나타납니다. 모든 것이 원만하여 부족함이 없고 바랄 것이 없으면 마장은 없습니다. 

서원 불공 중에 나타나는 마장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좋은 일은 더욱 좋게, 실패를 성공으로 바꿀 기회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장애가 있으므로 새로운 각오와 용기를 가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장을 법문으로 보고 깨달으면 곧 공덕 성취의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불공 중에 나타나는 장애를 마장으로 보면 괴로움이 따르고 법문으로 보면 해탈을 이룹니다. 선악에는 인과가 있고, 인과에는 길흉이 있고, 길흉에는 화복이 있고, 화복에는 마장이 있습니다. 마장을 법문으로 다스리게 되면, 과보(果報)를 받기 전에 과보의 경중과 받는 시기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법문 가운데 좋은 것은 희사로 장원하게 하고, 나쁜 것, 실패하는 것, 좌절하는 것, 슬픈 것은 법대로 참회하고 법대로 희사하고 법대로 염송하여 소멸 시켜 좋은 방향으로 바꾸면 됩니다. 법문으로 나타나는 것은 실지 받아야 할 길흉화복을 1/10, 1/100, 1/1000로 보여줍니다. 수행자는 보여준 법대로 참회와 희사와 염송을 실천하면 좋은 것은 장원하여지고 흉한 것은 소멸하게 됩니다. 실천하지 않으면 서원성취는 이루어지지 않으며 공덕 또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실천하지 않아도 벌을 받거나 재앙 되는 일은 없습니다. 꿈에서 깨어나면 없었던 것처럼 불공 중에 보여준 법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교에서 “인생난득(人生難得)이요 불법난봉(佛法難逢)이라.” 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렵다는 두 가지를 만났으니 행운아입니다. 이 좋은 기회를 어영부영 보내지 말고 굳은 신심을 일으켜 지금까지 혹여 잘 못 된 것이 있고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전마위공(轉魔爲功) 하는 기회로 삼아 불공하시기 바랍니다. 

서원 불공은 마음 그릇을 키우는 수행입니다. 자신의 수용 능력과 공덕 받을 능력을 시험하는 것이 법문입니다. 법문은 불공자가 실천할 수 있는 만큼 보여줍니다. 만일 큰 서원이라면 여러 번 보여줄 수도 있습니다. 비유하면, 씨뿌리고 3개월에 추수하는 것도 있고, 6개월에 추수하는 것도 있고, 1년이나 3년 뒤에 추수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리고 1회 추수하는 것도 있고, 10~20년 동안 추수하는 것도 있듯이 서원성취도 이와 같습니다. 서원의 크기와 수행자의 근기에 따라 1시간 정진, 3시간 정진, 7시간 정진, 3일 정진, 1주간 정진, 49일 정진, 100일 정진, 1000일 정진이 있습니다. 혹자는 서원불공은 법문이 두려워서 못하는 분도 있습니다. 법문이 나타날까 두려운 것은 욕심과 게으름이 많다는 뜻입니다. 욕심과 간인(慳吝)하는 마음 때문에 보이는 희사법이 두렵고, 잘못이 있고 게으름이 많으므로 보여주는 염송법이 두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약한 것이며 용맹심이 부족한 탓이며, 아상(我相)이 있는 허물입니다. 

불공 중에 오는 법문[마장(魔障)]은 수행자가 실천할 수 있는 만큼 나타난다는 것은, 예를 들면 예방접종과 같은 것입니다. 약간의 통증과 불편함으로 장차 침투할 병마를 막아내는 힘이 생기는 것과 같습니다. 법문은 약간의 물질과 약간의 시간으로 악을 막고, 선을 증장하게 하는 것입니다. 희사법을 실천하다 보면, 때로는 한 달분의 생활비를 보시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겁내지 말고 실천하면 반드시 그 이상의 재물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불가사의한 공덕은 증험해보면 알게 됩니다. 법신불로부터 받는 가르침과 자비와 불가사의한 공덕은 법문을 실천해보지 않은 분은 헤아리기 어려운 현상입니다. 병을 낫게 하고자 병원을 찾았다면 의사의 진찰과 처방전을 믿고 약을 복용해야 합니다. 약을 먹고 먹지 않고는 환자 자신에게 있듯이 법문의 실천도 불공하는 자신에 있습니다. 믿음으로 실천하면 서원은 자연히 성취되며 복덕이 구족하게 될 것입니다. 

35. 실행론 설법 -소아(小我)와 대아(大我)

밀교신문   

아라 함은 자기가 곧 이익(利益)하고 안락(安樂)하고 자기명예(自己名譽) 자기 지위(地位) 자기의견(自己意見) 세움이라.

아(我)는 것은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을 말하며, 상(相)이라는 것은 글자를 해석하면, 나무 위에서 보는 눈, 나무의 나이테, 나무의 마디 등을 말하는 것으로 자연과 만물과 시간에서 보여주는 것을 살핀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뜻으로 자기중심으로 살피는 것이 아상(我相)입니다. 아상은 자신이 만든 업이며, 업은 곧 윤회의 씨앗이 되는 것입니다. 이 아상을 잘 이용하면 윤회의 틀에서 벗어나기도 합니다. 

우리 사는 이 세상은 본래 없던 세계였는데 무시겁에 생겨났습니다. 처음 생겼을 때는 물질도 탐욕도 존재하지 않은 무색계(無色界)였습니다. 무색계가 수 없는 세월을 지나면서 물질이 생성하여 색계(色界)로 변천하였습니다. 다시 많은 겁이 지난 뒤 물질에서 탐욕이 생기면서 욕계(欲界)로 변천하였습니다. 무색계와 색계는 하늘[天空]로 선정적(禪定的)인 세계요, 욕계는 하늘과 땅이 공존하는 세계입니다. 이 셋을 삼계(三界)라 합니다. 삼계는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욕계에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무색계는 4개의 선정(禪定) 세계로 나누어지고, 색계는 정묘한 물질로 이루어져 18천으로 나누어졌으며, 욕계는 6천을 포함하여 육도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28천의 천상과 5도[인간, 수라, 축생, 아귀,지옥]로 이뤄진 것이 삼계입니다. 

이루어진 것은 언젠가는 본래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진리에 따라 삼계도 생긴 순차대로 본래 없던 것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돌아간다는 것은 소멸하거나 부서지는 것이 아니라 변천하여 바뀌는 것입니다. 바꿀 수 있는 장소가 아상을 뿌리로 하는 욕계이며 바꾸는 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좋은 방향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점점 고통스러운 방향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그 잘못된 바뀜이 아상에서 인상(人相)을 일으키고, 인상에서 중생상(衆生相)을 나오게 하며, 중생상에서 수자상(壽者相)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욕계에 살면서 한 생각 바로 세우면 극락정토에 살게 되고, 한 생각 잘못하면 지옥예토(地獄穢土)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아상의 근원은 욕심이며, 욕심 때문에 뭇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싯다르타는 출생할 때 일곱 걸음을 옮기시고 사방을 돌아보며 한 손은 하늘을, 한 손은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天上天下唯我獨尊 三界皆苦我當安之)”라고 선언을 하였습니다. 태자가 선언한 ‘유아독존’의 아는 대아적인 말씀이며, ‘삼계개고’의 약속은 이 세계를 극락정토로 정화하겠다는 맹세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욕계가 삼계를 지배할 수 있다는 것과 소아를 대아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증명의 말씀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날 때부터 자기중심 생각이 있습니다. 탐욕을 뿌리로 자기의 이익만을 앞세우는 아상(我相), 겉으로는 계율을 지키는 것 같지만 지키지 않는 인상(人相), 삼계의 고통을 괴로워하면서도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도리어 하늘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중생상(衆生相), 한번 잡은 것은 영원하기를 바라면서 놓지 않으려는 수자상(壽者相)으로 이어가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아상은 자신을 가리키고 인상은 상대를 말하며, 중생상은 자연과 만물과 뭇 생명을 말하며, 수자상은 시간을 뜻합니다. 이것이 4상과 삼간(三間)의 변천 작용입니다. 그리고 4상은 다시 8상이 됩니다. 아상은 소승적 아상과 대승적 아상으로 나누며, 이를 소아 대아라 하고, 인상은 소승적 인상과 대승적 인상으로 나누며, 이를 소인 대인이라 하며, 중생상은 소승적 중생상과 대승적 중생상으로 나누며, 수자상은 소승적 수자상과 대승적 수자상으로 나누어집니다. 

‘아상’ 중에 소아는 오로지 자신의 이익과 안락만을 위하여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이며, 대아는 자신의 위치를 바로 지키는 ‘다움’을 말합니다. 즉 아버지다움, 어머니다움, 남편다움, 부인다움, 자식다움, 남자다움, 여자다움, 아이다움, 어른다움, 선생님다움, 학생다움, 정치인다움, 법조인다움, 경제인다움을 말합니다. 자기다움이 성취될 때, 윤회하지 않는 해탈을 얻게 되면, 첫 깨달음 자가 성문(聲聞)입니다. 

‘인상’ 중에 소인은 모든 것을 상대와 비교하는 마음을 가지고 우열과 빈천을 분별하면서 항상 자신의 유리한 부분과 잘하는 부분은 크게 나타내면서 유세하고 뽐내며, 상대의 좋은 부분과 잘하는 부분을 감추면서 시기와 질투로 사사건건 허물 보고 부정하면서 방해하는 것이 소인상입니다. 특히 입으로는 윤리 도덕을 말하면서 행동은 하지 않고 자만심만 가득하며, 권력과 재물에 아부하고 빈천한 이를 멸시하며, 혹 남에게 도움을 줄 때도 좋은 것을 베풀지 아니하고, 쓰다 남은 것을 주되 아까워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소인상입니다. 대인은 자신보다 먼저 상대를 생각하여 양보하고 배려하면서 상대방이 어렵고 힘들어함을 항상 걱정하고 상대의 행동을 좋은 마음으로 말하면서 항상 은혜롭게 생각하는 것이 대인상입니다. 상대로 인하여 자신의 존재를 깨달아 해탈한 자를 불교에서 인연법을 성취한 연각(緣覺)입니다. 

‘중생상’ 중에 소승적 중생상은 자연과 만물에 고마움을 모르고 모든 것은 자신의 힘으로, 자신만의 공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면서 함부로 자연과 만물을 훼손하고 파괴하는 것입니다. 특히 동식물이 주는 혜택의 고마움을 생각하지 않고, 함부로 대하고 낭비하는 것입니다. 혹 애완동물은 사랑하고 보호하는 자비심을 지녔다 하여도 부모와 형제와 이웃을 소홀히 생각한다면 이것은 소승적 중생상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여행을 떠나면서 집에 계시는 부모님은 걱정하지 않으면서 애완동물을 걱정하는 것, 부모와 생활하는 것은 싫어하면서 애완동물과 산책하고 돌보는 것, 유명브랜드와 귀중품을 소중하게 하면서 부모 형제와 친척과 이웃에 소홀하게 하는 것 등이 모두 소승적 중생상입니다. 대승적 중생상은 자연과 만물을 위하여 그들과 함께하면서 어려움과 고통을 들어주며, 베풀고 감싸주고 의지처가 되어 줌에 항상 은혜롭게 생각하는 것이 대승적 중생상입니다. 자연과 만물과 뭇 생명과 함께하면서 육행 실천하는 것이 동체대비를 성취한 보살(菩薩)입니다. 

‘수자상’은 시간의 활동상입니다. 소승적 수자상은 연륜과 경력과 출생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은 영원하기를 바라면서 상대방의 부귀영화는 곧 사라지기를 바라거나, 자리가 높고 낮음과 오래되고 늦음을 분별하여 따지는 것이 소승적 수자상입니다. 특히 나는 ‘왕년에……’, ‘나는 젊었을 때……’, ‘내가 시집살이를 할 때……’를 말하면서 누구보다도 부지런했고, 똑똑했고, 고생했고, 힘들었다는 것을 앞세우면서 자신을 자랑하고 선전하는 사람이 소승적 수자상입니다. 또한, 시대의 변화는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시대만을 생각하면서 아랫사람과 젊은 사람을 가르치고자 한다면, 이들은 ‘애 늙은이’ ‘만년 상사,’ ‘꼰대’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소승적 수자상입니다. 대승적 수자상은 무상의 이치를 깨닫고 순간에 일어나는 일에 마음 두지 않으며, 순서와 질서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루는 아침, 낮, 저녁, 밤의 순서가 있고, 1년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순서가 있으며, 세월에는 어린시절, 학창시절, 청년, 장년, 노년의 순서가 있습니다. 서두르지 않고 조급하지 않으며, 기다리고 준비하면서, 말할 때 삼사일언(三思一言)하고, 행동은 코끼리처럼 움직이며, 생각은 일체중생의 이익과 안락을 먼저 서원하는 것이 대승적 수자상입니다. 이것을 실천하신 분이 인간 세상에서 가장 용감하게 사상을 바꾼 대영웅으로 존경받는 불세존입니다. 

우리는 별로 잘나지도 않았고, 아름답지도 않으며, 원만하지도 않고, 능숙하지도 못한 재주를 믿고, 하늘 높이 모양을 뽐내면서 무수한 겁을 흘러오면서 습관적으로 자기중심의 소승적 아상과 소승적 인상과 소승적 중생상과 소승적 수자상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습관을 바꾸려면 다시 삼아승지겁을 수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일념만년(一念萬年)이 되게 하는 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참회이며 진실한 참회라면 찰나에 중생 습관을 불보살의 모습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무상(無相)이며 무주상(無住相)으로 참회하며, 자연과 만물과 뭇 생명을 평등하게 생각하는 마음으로 무주상 보시를 성취하면 됩니다. 산은 높을수록 수풀은 낮아지고, 수풀이 낮아질수록 나무는 외로워집니다. 

쓸 곳도 없고, 쓸 때도 없고, 쓸 수도 없는 인아상(人我相)을 끊고, 법성산(法性山) 정상에 무주상의 법계일상(法界一相)을 세우는 진실한 참회를 합시다. 

36. 실행론 설법 -추선불사

밀교신문   

무릇 사람 열반 후에 칠일부터 사십구일 추선불사(追善佛事) 짓게 되고 조여부모(祖與父母) 기제일과 내지 누대(累代) 추복(追福)하면 조상불(祖上佛)의 가지력을 그 집에서 입게 되어 그 자손의 복업공덕 한량없게 되느니라. 

이것은 나만이 알고 있거나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다만 생각이 나지 않을 뿐입니다. 오대서원 가운데 “여래가가 없는지라 섬기기를 서원이라.” 하였습니다. 이때 여래는 인간 세상에 나타난[如來] 모든 것을 말합니다. 모든 생명은 법신 비로자나불의 청정한 자성(自性)을 근원으로 형성되었습니다. 자성이 무시겁에 진리와 법에 맞게 삼계로 옮겨온 것입니다. 법답게 오고 법답게 돌아가는 것을 여래요 여거(如去)라 합니다. 과거에도 왔다 갔으며, 현재에도 오고 갈 것이며, 미래에도 그러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는 것을 좋아하고 가는 것을 싫어하는 마음 때문에 여거란 말은 사용하지 않고 여래란 말만 사용하는 것입니다. 옮겨 오고 옮겨 가는 가운데 언젠가는 해탈과 열반을 지나 성불할 것입니다. 중생은 다만 윤회에 맛을 들여 성불 시기를 늦추고 있을 뿐입니다. 

옮겨 오고 옮겨 가는 가운데 가장 인연이 깊은 사이가 부모요 조상입니다. 과거 7세 부모님과 현재세의 부모님도 모두 법답게 왔다가 법답게 갔습니다. 옮겨가는 중간에 중음의 귀신(鬼神)이 되기도 합니다. 조상이 귀신이 되어 환생하지 못한다면, 그 집안은 후손이 태어나지 않아 집안이 번창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조상과 부모가 어디엔가 환생하므로 그 인연으로 우리 가문에 후손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중음신은 환생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조상을 귀신으로 섬기는 것은 잘못하는 일입니다. 부모와 조상은 여래하고 여거하는 것이므로 불보살처럼 생각하여 불위(佛位)로 공경하여야지 신위(神位) 모시는 것이 안됩니다. 위(位)는 자리를 뜻하는 것이며, 이 자리는 고정된 자리가 아닌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사회의 직위도 언제든지 바뀔 수 있으므로 회전의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언제든지 바뀌는 자리므로 좋은 이름의 자리로 옮겨갈 수도 있고, 나쁜 이름의 자리로 옮겨갈 수도 있습니다. 불위는 영원한 자리로써 힘이 있고 자유롭고 존경받는 자리입니다. 이러한 뜻으로 부모님과 조상을 신위가 아닌 불위로 공경해야 합니다. 

부모와 조상은 은혜로 만난 사이입니다. 몸을 받은 자체가 이미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태어나 성장하는 과정에서 다시 은혜를 더하였습니다. 부모는 평생 자녀들에게 아낌없이 주면서도 항상 자녀들이 부족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가진 것 중에 최고의 것을 주고자 합니다. 이에 반하여 자식들은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부모가 늙을 때까지 도움받고자 합니다. 자신이 받을 때는 좋고 나쁨과 많고 적음을 탓하면서 부모를 생각할 때는 아까워하고 주저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이렇게 끝없이 도움만을 생각하다가 부모님이 열반하면 생각이 바뀝니다. 부모님이 살았을 때는 소홀히 하고 때로는 귀찮게 생각하였으나, 열반한 뒤에는 두려워하고 겁내는 마음으로 바뀝니다. 왜 그럴까요? 행여나 잘못한 것에 대하여 벌이라도 내릴까 하는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두려운 마음에서 길한 시간을 택하고 양지[明堂]를 찾아 모시면서 보호의 음덕(陰德) 입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물이 흐를 때는 낮은 곳으로 흐르고, 불이 탈 때는 위로 향합니다. 물과 불은 자연의 섭리에 따라 아래로 흐르고 위로 타는 것이지, 물과 불이 마음대로 방향을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 세상에 오고 가는 우리도 자연과 만물이 얼기설기 얽히어서 성장하는 것처럼 주고받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 역시 자연과 만물과 사람이 가진 힘의 섭리가 같다는 뜻입니다. 좋은 과를 받으면 행복할 것이요, 나쁜 과를 받으면 불행하게 살 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타의 힘을 빌려서라도 행복을 원합니다. 그러면서도 원에 맞추지 않는 행동과 말을 하고 있습니다. 타의 힘 가운데 가장 쉽게 받을 수 있는 것이 부모님의 힘입니다. 그러나 부모님의 힘 받기가 쉬운 것은 아닙니다. 부모님의 은공과 음덕을 입으려면 평소에 은혜하는 마음으로 보은행을 행하여 빚이 없어야 받을 수 있습니다. 

빚이 있으면, 부모의 은공과 음덕을 마음으로만 받고 현실로는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부모가 가진 공덕이 없고, 자식 또한 받을 복이 없으면 이때는 마음으로만 받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부모가 자녀들을 평등하게 사랑하면서도 베풂에서 평등하게 베풀지 못하는 것은 받을 자녀들의 인지음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같은 자식이라도 정이 가고 정이 가지 않는 자식이 있습니다. 이것이 보이지 않는 깊은 인연과 낮은 인연, 복으로 맺어진 인연과 화(禍)로 맺어진 인연의 차이입니다. 만일 복으로 맺어진 인연이라면 자연히 좋은 것을 주면서도 더 많이 주고자 할 것이요, 화로 맺어진 인연이면 좋은 것을 주고자 하나 마음대로 주지 못할 일이 생깁니다. 예를 들면 재산을 주고자 하지만,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 소모한 연후에 자식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수중에 한 푼도 없다가도 복으로 맺은 자식을 만날 때가 되면 우연히 재물이 생겨 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치가 살았을 때는 인정으로 약간의 바꿈이 가능하지만, 열반 후에는 터럭만큼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고 인 지은 대로 주고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과 이치며 자연의 섭리입니다. 

이 땅에서 지은 것은 이 땅에 언제나 남아 있습니다. 이 땅에 떨어진 빗방울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웅덩이를 채우고 넘쳐 개울이 되고 강이 되어 바다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다시 허공으로 올라 빗물이 되어 떨어집니다. 시간에 따라 머무는 장소가 다를 뿐, 언제나 이 땅에서 옮겨 오고 옮겨 가는 것입니다. 물의 흐름과 불의 태움에 방편을 쓰면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게 하고 타게 할 수 있습니다. 방죽을 만들어 필요할 때 수문을 열고 물길의 방향을 조정하여 사용하듯이, 이 땅에 있는 부모님과 조상의 음덕도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자유자재할 수 있습니다. 자유자재 하는 법이 추선(追善)과 추복(追福)불사입니다. 부모님이 가진 공덕과 열반 후 음덕을 자신에게 향하도록 여건을 만드는 불사입니다. 이것은 욕심도 아니며, 기복(祈福)도 아닙니다. 부모님과 조상을 불위로 공경하면서 그분들이 지은 악행의 업은 대신 소멸시키고, 선행의 업은 지어 미루므로 화복은 자연히 인연을 찾아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게 될 것입니다. 열반하신 부모님이나 조상은 이미 알 수 없는 곳에 환생하였습니다. 후손이 부모님과 조상이 남긴 음덕을 입을 때, 부모님과 조상은 환생한 그곳에서 무주상보시를 행한 것이 되므로 이곳의 후손이 음덕을 입을 때, 그곳에서 함께 복덕을 누리게 될 것이며, 부모와 조상이 남긴 악행을 소멸시켜 재화(災禍)가 사라질 때, 그로 인하여 부모님과 조상은 그곳에서 악업의 고통이 소멸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추선하고 추복하는 상호공양으로 바꿔 나타나는 공덕입니다. 

자신이 어느 가문에 태어나 부모님과 조상을 만나는 것은 받을 것이 있거나 갚을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몸을 받고 양육을 받은 것은 받을 것을 이미 받은 것이 됩니다. 이제 자신이 할 일은 받을 일이 아닌 보은할 일만 남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계속하여 받고자 생각합니다. 사회도 불효의 벌은 없지만, 보은한 효자에게는 빚을 갚았다는 증서로 효자문을 내리면서 덤으로 영광을 누리게 합니다. 진각성존은 은혜를 아는 마음으로 보은하는 법을 실행론에 “비로자나 대비원력(大悲願力) 삼세 중에 꿰었으니 사람에게 의뢰(依賴) 말고 귀신에도 빌지 말고 부처님의 가지원력(加持願力) 조상불(祖上佛)이 입게 하여 자손만대 드리우게 추복불사(追福佛事) 할지니라. 부모를 위해 추복하면, 삼복전(三福田)을 짓게 되니 보은복전(報恩福田), 공덕복전(功德), 회향하여 빈궁복전(貧窮福田)”이라 하였습니다. 

인간세계에는 인간보다 7.5배의 중음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중음이 이렇게 많다하여 두려워할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하늘보다는 약하지만, 부모로부터 받은 힘은 중음의 귀신보다 강합니다. 그러므로 귀신의 덕으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 성스러운 강한 힘을 가지고 좋은 기회를 만났으니, 이제부터 부모도 복되고 자신도 복된 길, 부모도 선행하고 자신도 선행의 길로 향하는 추선과 추복의 상호공양을 실천하면 됩니다. 지나간 과거는 바꿀 수 없으므로 참회로 대처하고, 머물지 않는 현재는 넓은 마음과 평등한 자비를 베풀며, 아직 오지 않은 미래세상에 희망의 복된 씨앗을 넉넉하게 뿌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효순행이며, 추선 추복의 불사입니다. 

37. 실행론 설법 -유위(有爲)와 무위(無爲)

밀교신문   

유위법(有爲法)은 각종 인연 화합(和合)하여 조작하고 있는 모든 현상이니 배워 일을 알게 되고 무위법(無爲法)은 분별조작(分別造作) 하나 없이 일이 자연 이뤄짐을 말함이니 깨쳐 이치(理致) 알게 된다. 

진각성존께서 유위 무위를 말씀하시면서 참회문에 “유위 무위 일체 일과 이치(理致)에 지혜가 밝고 대비 결정코 용예(勇銳)하여 육행으로 내 종지를 굳게 세워 마군(魔軍)을 항복 받고 외도를 제어(制御)하여 구경성불하겠나이다.” 지비용으로 목적을 밝혔습니다. 

인간의 삶 중에 가장 큰 관심사가 ‘있다, 없다.’ ‘있어 보인다, 없어 보인다[有無]’와 ‘할’, ‘함’, ‘바람[爲]’입니다. 유위(有爲)는 인연에 의하여 생긴 삼라만상으로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 위작(爲作)하고 조작(造作)한다는 뜻입니다. 법을 적용하면, 의보(依報)로 윤회하는 근본입니다. 무위(無爲)는 본래의 것, 본래의 모습, 진리로써 생주이멸(生住異滅)의 변화를 초월하여 언제나 상주하는 절대적인 진실이며, 법을 적용하면 공(空)·법성(法性)·진여(眞如)·실상(實相)·열반(涅槃) 등의 정보(正報)를 이름합니다. 유위법으로 성립한 만유(萬有)는 변천하는 속성이 있어 반드시 생멸하지만, 무위법은 인연을 떠나서 존재하므로 영구불변하여 상주하는 것입니다. 사바세계는 유위법과 무위법의 방편이 필요하므로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은 후 무위법의 ‘화엄경’으로 삼칠일간 자수법락 하였습니다. 중생제도를 위하여 보살이 되어 제1차 ‘아함경’과 ‘방등경’을 설하였으니, 이것이 유위경(有爲經)입니다. 제2차 설한 ‘금강경’은 무위경(無爲經)이며, 제3차 법화와 열반으로 회향하였습니다. 제3차 설법 중에 유무경(有無爲經)인 밀법(密法)으로 진실한 삶의 가치를 깨닫게[즉신성불(卽身成佛)] 하신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는 모든 것이 상대성으로 작용합니다. 복(福)이 있으면 화(禍)가 있고, 즐거움이 있으면 괴로움이 있고, 밝음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큰 것이 있으면 작은 것이 있고, 높은 곳이 있으면 낮은 곳이 있고, 밤과 낮이 있고, 춥고 더움이 있으며, 잘하면 잘못하는 것이 있으며, 보이는 것이 있으면 보이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 삶의 평등입니다. 이 평등한 작용을 유위(有爲)와 무위(無爲)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위(爲)란 ‘할’, ‘함’, ‘위하여’, ‘행위’ 등을 뜻합니다. 위(爲)자를 풀어보면, 손톱으로[爫] 할퀴어 밑바닥에 있는 것을 찾아내는 형상으로서 원숭이를 모본(模本)으로 만들어진 글자입니다. 어미 원숭이가 새끼를 위하여 먹을 것을 찾는 형상을 표현한 것으로 ‘반드시 한다’, ‘꼭 한다’ 하는 간절함과 함께 강한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며, 또 하나는 평소에 손톱으로 털을 헤치면서 무엇인가를 제거하는 형상을 표현한 것입니다. 잠시도 놀지 않고 먹이를 찾고, 장애를 제거하려는 어미 원숭이의 행위를 반영한 것입니다. 또한, 간곡한 바람[願]의 뜻도 담고 있습니다. 제가 출판한 서적에 “위(爲) 여의성취(如意成就)”, “위(爲) 만사형통(萬事亨通)”, “위(爲) 복지구족(福智具足)”이라, 첫머리에 위(爲)자를 둔 것도 바람의 뜻을 담은 서명(署名)이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모임을 할 때도 “위하여”를 외치는 것도 같은 뜻입니다. 

우리는 유무(有無)에서 위(爲)를 첨부하면 ‘있다, 없다,’ 구분하는 말이 아닌 삶의 가치를 말하는 것으로 알아야 합니다. 삶의 가치는 좋은 것 나쁜 것, 옳은 것 그른 것을 구분하여 가치의 기준을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행위(行爲)는 행위 자체 그것만으로도 이미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행위는 다양하지만, 그 가치는 평등한 것입니다. 악을 행하면 악의 가치가 있고, 선을 행하면 선의 값어치가 있습니다. 사냥하는 분은 사냥을 즐기는 가치가 있고, 놀음하는 이는 놀음에서 가치를 느끼며, 거짓말하는 이는 거짓말에서 즐기고, 남을 속이는 사람은 속는 모습을 보고 즐기며, 남을 해치는 사람은 해치는 것을 즐기는 등 좋지 못한 삶의 가치를 지닌 자도 있습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에서 자신만을 위하여 상대에게 피해를 주고 위해(危害)를 준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 다만 안타까울 뿐입니다. 좋은 방향의 가치를 깨닫게 하고자 유위법과 무위법을 설하는 것입니다. “매를 맞은 사람은 발을 뻗고 잠자고 때린 사람은 웅크리고 잠을 잔다.”고 하는 속담이 있듯이 나쁜 가치를 권장할 수는 없지만, 서로가 좋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참다운 가치를 알고자 노력은 해야 할 것입니다. 

중생으로 태어나는 것은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진 것과 같이 본래 적정(寂靜)한 자성(自性)에 번뇌의 돌을 던져 윤회의 소용돌이를 만들었습니다. 이 번뇌의 돌을 던진 것이 삶의 첫 행위(行爲)입니다. 소용돌이가 삶의 가치(價値)입니다. 가치는 평등하여 선악(善惡)이 없지만, 사람이 보기에 따라 좋고 나쁨으로 평가합니다. 삶의 가치 가운데 한계가 있어 보이는 것을 ‘유위’라 하고, 한정이 없어 보이지 않는 것을 ‘무위’라 하는 것입니다. 한정이 있는 유위법은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가르치며, 한정이 없는 무위법은 종교기관에서 자율적으로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가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볼 수 있고 볼 수 없을 뿐입니다. 볼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어 언제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볼 수 없는 것은 한계가 없어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볼 수 있는 것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하여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고 불행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제 부처님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법으로 유위의 행과 무위의 행을 깨달을 수 있도록 방편의 말씀을 잘 잘 살펴야 할 것입니다. 불(佛)은 본래 ‘있다, 없다.’ 분별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자연법이(自然法爾)입니다. 아름다운 가을 단풍을 보고 “아” 하는 한 마디로써 그 아름다움을 표현할 뿐입니다. 우리들은 지나칠 정도로 ‘있다[有], 없다[無]’로 구분하면서 ‘한다[有爲], 못한다[無爲].’ 집착하고 있습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전해진 진실을 바르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문자에 집착하면서 또 하나의 번뇌를 일으켜서 ‘있었다, 없었다’라는 역사를 논하고 ‘할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문제를 분석하면서[哲學], 쓸데없이 낮과 밤을 지새우면서 모으고 흩고를 수없이 반복하고 있습니다. 현실의 삶에 집착한 마음으로는 좋고 나쁨을 분별하여 행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행동하고[爲], 말하고[爲], 생각하고[爲], 준비하고[爲], 바라는[爲] 그 속에 삶의 가치가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유위법으로 행하면, 은혜도 만들고 빚도 만들어 받고 갚느라 윤회를 하게 되지만, 무위법으로 행하면 은혜도 빚도 없음으로 윤회도 자연이 없는 것입니다.

무위는 하지 않는다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쓸데없는 일이나 불필요한 것을 하지 않는다는 뜻도 됩니다. 먼저 상대의 일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각자에게 맡기고 흐르는 대로 지켜보면서 간섭하지 않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다음으로 상대가 행한 일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은 그렇게 하여야 할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잘하는 것이든 잘못하는 것이든 그것들이 모여 조화로운 세상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고추의 매운맛과 수박의 단맛은 모두 빛과 물과 허공에 있습니다. 그것을 고추는 매운맛만, 수박은 단맛만을 골라 자기 것으로 응집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 것이 좋다, 매운 것이 좋다고 고집할 수가 없습니다. 자연의 운행과 만물의 활동을 자신의 좁은 소견으로 어찌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모든 것을 자신의 좁은 유위 속에 넣고 지배하려고 합니다. 지배하려면 중도의 이치를 깨닫고 하십시오. 산하대지는 본래 청정한 것입니다. 유위와 무위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래 평등일여(平等一如)하며, 융통무외(融通無畏)한 자리로 청정무위(淸靜無爲)하며, 무위법신(無爲法身)이요 진여법신(眞如法身)입니다.

이 세상에는 허물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의 지혜로 유위 무위의 일체 일의 이치를 깨달아 자신의 허물을 참회하며, 일체중생을 포용하는 큰마음을 일으켜서 육행으로 종지를 굳게 세우는 대 선지식이 되기를 바랍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염송하면서 일편무위(一片無爲)의 진묘향(眞妙香)을 마음으로 사루며, 무위자성(無爲自性) 진묘락(眞妙樂)을 즐기는 가치 있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38. 실행론 설법 -불공정진법(佛供精進法)

밀교신문   

소원(所願)있어 정진할 때 제일시간(第一時間) 빼지 말고 용맹(勇猛)으로 성공하며 성취됨을 알지니라.

불공(佛供)을 진각성존은 공양이라 하였습니다. 공양의 첫째가 마음으로 행하는 귀명입니다. 삼보에 서원을 세우고 공양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에게 귀명하는 것은 믿음을 맹세하는 불공이요, 법에 귀명하는 것은 법 실천을 맹세하는 법공이요, 승에 귀명하는 것은 화합을 맹세하는 승공입니다. 현실에서 돌·나무·물·산신·수신·목신·용왕·서낭당·조왕신에 향·초·꽃·과·차를 올리면서 정성을 다하는 것도 자연공(自然供=功)이 되고 신공(神供=功)이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통칭하여 불공이라 합니다.

정진(精進)은 습관(習慣)을 익힌다는 것으로 승(僧)의 습관을 익히는 것은 삼고(三苦)를 해탈하기 위한 정진이요, 보살의 습관을 익히는 것은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열반을 위한 정진이며, 부처의 습을 익히는 것은 성불하기 위한 정진입니다. 정진의 정(精)은 ‘자세할’, ‘깨끗할’, ‘정성스러움’의 뜻이며, 진(進)은 앞으로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진을 해자하면, 진(進)은 새[隹]가 날아가는[辵] 형상을 표현한 것입니다. 새는 허공을 날되 뒤로는 날지 못하고 반드시 앞으로만 날아갑니다. 그러므로 진은 물러섬이 없이 앞으로만 간다는 뜻입니다. 시간의 흐름과 같이 머무를 수도 없고 되돌릴 수 없으므로 쉬엄쉬엄[辵] 가더라도 잘 살피고 최선을 다하면서 자신이 하는 일에 후회가 없도록 올바른 길로 나가는 것이 정진입니다. 

세간에서 말하는 불공은 재물 얻기를 바라고, 건강과 명예를 얻으려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사바세계는 욕심이 근본이 되어 살아가는 세계입니다. 없는 것을 가지려 하고, 높은 자리에 오르려 하고, 아픔에서 벗어나려 하며, 사랑받기를 바라는 것이 인간의 본능처럼 알고 있습니다. 욕계에 태어난 중생은 이 본능을 가지는 것이 삶의 정해진 길[定道]이라 생각합니다. 사용할 만큼만 가지고, 노력한 만큼 높은 직위에 머물고, 베풂 만큼 사랑받으려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게을러 노력하지 않고, 남이 가진 것에 시기하고 질투하며, 스스로의 욕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함부로 사용하며, 자기 의견을 고집하여 상대를 무시하고, 화합을 깨트리는 것은 악이 되고 죄업이 되는 것입니다. 중생의 정도(定道)는 익힌 습관에 따라 반드시 결과가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질 만큼 가지지 못하거나, 누릴 만큼 누리지 못하거나, 받을 만큼 받지 못하는 것은 현재의 노력한 인이 아니라, 지난날의 허물임을 알아야 합니다. 인과법을 믿고 정진을 하면 좋은 인은 언젠가는 받게 된다는 것을 믿고 불공하시면 됩니다. 

불공, 정진, 법을 세분하면 불공은 청정공양으로 서원을 표하는 것이요, 정진은 가르침에 수순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간곡한 서원으로 정성을 다하여 희사하고 용맹심으로 정진하면서 시간을 엄숙하게 지키는 것이 불공정진법입니다. 희사는 탐심을 버리고 바라는 것 없이 하여 자비심을 키우는 것이요, 염송은 진실한 마음이 모아질 때, 지혜가 열리는 것입니다. 농사짓는 것에 비유하면, 희사는 밑 걸음이 되고, 염송은 씨뿌리고 가꿈이 되며, 시간은 추수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가운데 소홀히 생각하기 쉬운 것이 시간 지키는 법입니다. 때아닌 때에 추수하고, 영글지 않은 때에 추수한다면 성실하지 못하며 장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시간을 지킨다는 것은 희사보다 염송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정한 시간보다 일찍 심인당에 자리하고, 언제나 정한 시간보다 넉넉하게 염송하며, 시간 중에는 잡말을 하지 말고 오로지 일심으로 염송할 때 서원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불공에는 해탈을 위한 정진 불공과 깨달음을 얻는 수행 불공이 있습니다. 재가인은 정진 불공을 많이 해야 하고, 출가인은 수행 불공을 많이 해야 합니다. 진각종 불공은 일상생활 속에서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의궤를 정하여 서원을 위한 정진 불공과 깨달음을 위한 수행 불공을 동시에 하는 불공입니다. 교화하는 스승은 먼저 수행 불공으로 법을 증득한 연후에 정진 불공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해탈을 위한 불공(佛供), 습관을 익히는 정진(精進)을 통합한 말이 불사(佛事)입니다. 불사는 일상을 부처님처럼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불사(佛事)와 반대되는 말이 마사(魔事)입니다. 불보살과 동류 되는 것을 방해하고, 마(魔)와 함께하기를 바라는 것이 마사입니다. 중생의 서원과 불의 습관을 익히지 못하도록 방해하면서 악의 습관을 즐기도록 사탕발림을 하는 것이 마군이가 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마사(魔事)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수행자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욕심과 성냄과 무지와 교만과 의심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사는 베푸는 마음이 사라지게 하고, 조급한 마음을 일으키며, 자기를 높이고, 믿음을 약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구니들의 최종언어는 ‘불공을 하지 않아도 편안하게 사는 방법이 있고, 불공하는 사람보다 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하는 등의 사탕발림으로 게으름을 일으키게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불공 하는 사람보다 하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마군(魔軍)이 하는 말을 인정하고 찬성할 수도 있습니다. 복이 많아 부족함이 없고 서원할 것이 없으면 불공하지 않아도 됩니다. 복 많은 사람은 깨달음을 얻는 수행만 하면 됩니다. 복이 엷어 부족함이 많고, 하는 일마다 손해나고 실패가 거듭되는 사람은 반드시 서원 정진[佛供]을 해야 합니다. 중국의 방거사(龐居士)는 가족과 함께 수행길을 떠나면서 전 재산을 동정호에 버리고 떠났다는 일화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온 가족이 복이 많아 재물과 명예에 초연한 사람들입니다. 싯다르타 태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왕의 가문에 태어났거나 부호의 집안에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해탈 불공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불공 정진과 수행 정진은 모두 마음 고치는 것이 목적입니다. 마음 고친다는 것은 중생의 습관에서 불보살의 습관으로 돌아가는 방편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자기만의 서원을 위해 소승적 불공을 하였습니다. 이제부터 세끼 밥을 얻기 위한 불공 정진은 중단하고 인류와 자연을 위하여 수행 정진해야 할 것입니다. 첫째 중생으로 태어난 원인을 깨닫는 정진, 둘째 원인을 소멸하는 참회 정진, 셋째 삼고(三苦)을 벗어날 수 있는 수행 정진을 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수행법을 가장 잘 갖춘 정진법이 비로자나불과 하나 되는 수행이 진언 염송의 삼밀관행(三密觀行)입니다. 참회로 시작하여 참회로 회향하는 수행이 진언수행입니다.

불보살의 위에 오르는 제일 좋은 불공이 참회입니다. 참회도 시대 따라 다름이 있습니다. 정법시대와 상법시대의 참회는 현생에 지은 업을 참회하여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앙굴리마라, 제바달다, 주리반특가와 같은 분들이 그 한 예입니다. 그러나 중생업이 두꺼운 말법에는 현생에 지은 업보다도 숙세(夙世)에 지은 업과가 두텁고 무거우므로 깊은 참회를 하지 않고는 해탈도 깨달음도 얻지 못합니다. 깊은 참회를 하는 것은 작은 것에서도 큰 허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틈새의 의심이 생기지 않도록 하며, 자신의 본성을 되찾는 것입니다. 공간으로는 혼자 있으면서도 대중과 함께 있는 것 같이 행동하며, 시간으로는 한 생만을 바라고 사는 것이 아니라, 삼세를 산다는 생각으로 정진하며, 인간으로는 뭇 중생이 함께 해탈해야 한다는 서원으로 정진하는 것입니다.

현재 자신의 눈앞에 이익에 급급하지 말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수행 정진하면서 자신의 현재의 모습을 찾는 자성 참회를 중심으로 실천하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자연 공간, 흐르는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모두 나로 인한 것이라, 생각하고 좋은 것은 접어두고, 잘못된 것은 자신이 원인 제공자라 생각하고 참회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질 때, 자신은 자연과 만물과 공간과 시간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한 부처가 성불(成佛)하면 국토 모두 성불한다.” 하는 법입니다. 자성 참회로 청정본연(淸淨本然)에 쌓였던 먼지와 번뇌와 무명의 장막이 걷히면, 밝고 맑은 본래의 천진불의 모습이 들어날 것입니다. 천진불로 살아가는 현실은 가난은 가난이 아니요, 병고는 병고가 아니며, 불화는 불화가 아닙니다. 고통이 없는 가난이요, 아픔이 없는 병고요, 반목하지 않는 불화로 해탈의 삼고로 자유자재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39. 실행론 설법 -미연(未然)에 복 심고 미맹(未萌)에 화 끊는다

밀교신문   

진리로서 이익 하는 단바라밀(壇波羅蜜) 행해가면 지혜 밝고 도량(度量) 커서 미연의 복 심게 되고 미맹의 화 끊게 된다.

미연은 씨 뿌리기 전을 뜻하며, 발심하기 전을 말합니다. 이때 선(善)·본(本)·정(正)·시(是)·명(明)에 기준을 둔 발심으로 준비하고 계획을 세우는 것을 말합니다. 미맹은 씨가 뿌려진 이후 싹이 나기 전을 뜻합니다. 발심하기 전에 이미 뿌려진 씨앗이 있다면 그 씨앗이 싹이 나기 전에 살펴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미연은 현재의 행위를 살피고 미맹은 과거의 행위를 살피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는 준비, 시작, 진행, 활용, 마침이 있습니다. 다섯 가지 변화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소홀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준비<계획(計畫)> 없이 성급하게 시작부터 하는 사람도 있고, 시작은 거창하면서 진행은 흐지부지 할 수도 있고, 진행은 살피지 않으면서 결과만을 독촉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즉 앞은 챙기지 않으면서 결과를 중요시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입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과 같이 시작이 반이 되려면, 철저한 준비가 된 연후에 시작하면 시작 자체가 이미 반의 성공이 된다는 뜻입니다. 준비 없는 시작은 백번을 한들 반에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에 새로운 것을 만드는 사람은 준비 잘한 사람입니다. 농부는 추수가 끝나면 편안하게 겨울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추수한 씨앗 중에 가장 좋은 씨앗을 갈무리하고, 농기구를 손질하며, 둑을 쌓고 땅을 돋우고 밑거름을 준비하면서 겨울을 보냅니다. 야구선수는 한해 시즌이 끝나면 다음 시즌이 될 때까지 지구력 키우기 위하여 몸을 단련하며, 공 던지기와 방망이 휘두르기를 수없이 반복할 것입니다. 이것이 미연(未然)이 되는 것입니다. 중생은 완전한 것보다 허물과 흠집이 많습니다. 허물과 흠집을 찾아 원만하게 만들어 가는 것이 미맹(未萌)의 작업입니다. 미맹이란 잘못 뿌려진 씨앗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밑거름으로 삶듯 베풂으로 교체하는 작업입니다. 잘못의 원인을 바로 찾는 것이 미맹의 밀교 수행입니다. 주머니 속에 감춰진 송곳이 주머니를 뚫고 나오듯이 염송하는 과정에서 잘못이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중생은 자연과 만물에 비하여 강인한 것 같지만 나약한 존재입니다. 나약하게 된 것은 욕망 욕심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만을 생각하는 우둔함이 욕망의 불에 부채질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탐욕과 날카롭지 않은 무딤이, 오히려 용맹심이 되어 좋은 방향으로 돌리는 새로운 힘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고자 하는 욕망이 자성을 찾는 발심으로 희사하며, 현실 일은 무디게 하고, 진리에 밝아 자신의 허물을 참회하고 정진한다면 악의 습관이 정화되어 바른 습관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습관을 고치는 방법은 일상생활 속에 있습니다. 존재하는 삼라만상은 우리 삶을 윤택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현재 사용하는 만물은 과거에 자신이 지어 나타난 결과물입니다. 사용하는 가운데 다시 미래로 이동합니다. 옷을 예를 들면, 과거의 익힌 습관에 따라 그 옷을 선택하게 됩니다. 이것이 인의 결과입니다. 입은 후에 좋고 나쁨을 판단합니다. 이것이 현재 다시 인이 되어 미래의 옷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과거 인으로 선택된 옷을 현재에 불평과 불만을 표시하면, 미래의 옷은 현재 옷보다 못한 것으로 결정될 것이요, 고맙게 생각하고 좋게 생각하면 내일은 현재의 옷보다 더 좋은 옷이 결정될 것입니다. 입은 사람 마음이 밝고 맑으면 값싼 옷도 귀하게 보이지만, 입은 사람 마음이 불평과 불만이 가득하면, 값비싼 옷도 싸구려로 보이게 됩니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은 본인의 마음가짐입니다. 

오늘 잘 통하는 것이 내일은 막힐 수도 있고, 이달은 잘 될 것 같지만 다음 달은 안되기도 합니다. 분명히 지금 가진 것으로 평생을 편안하게 살 것 같은데 그렇지 못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자연과 사람은 산 순간도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가 무상(無常)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무상한 변화는 자신의 마음으로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영원하리라 집착하는 것이 가장 어리석은 것입니다. 눈이 어리석으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베풀지 않고 도움을 받으려 하고, 성내면서 웃기를 바라며, 작은 그릇에 큰 것을 넣으려 하고, 붉은색이 푸르기를 바라는 것은 원인이 탐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나는 그럴 리가 없다고 웃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은 욕심도 없고 성 낼 줄도 모르고 똑똑하여 모든 것을 베풀면서 잘하고 있다고 하지만, 막상 어려운 일이나 놀라는 일이나 다급한 일을 당하면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고, 손발이 멈추며, 갈팡질팡 방향을 잃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도 모르게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잘못하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좋고 즐거운 것은 더디게 들어오지만, 빠져나갈 때는 빠르게 빠져나갑니다. 이것 역시 자신의 행위 가운데 선보다 악을 많이 행한다는 것입니다. 재물·권력·건강은 많은 사람이 바라지만, 이것은 한정이 있으므로 자신의 차례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반대로 흩어지고 사라지고 잃어버리기를 바라는 사람은 드물기에 차례를 기다릴 필요 없이 곧바로 막아야 합니다. 막는 방법이 삼밀 수행입니다. 삼밀은 자신의 행동과 말의 습관<행위(行爲)>을 살펴서 선악을 가리고, 선후를 가리고, 시비를 가리고, 본말을 가리면서 일체 중생에게 괴로움을 주지 않고 도움을 주는 생활을 하는 것인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진각성존께서 교화자에게 2/10 희사법을 실천하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1/10은 보은(報恩)의 희사요, 1/10은 무상(無相)의 희사입니다. 보은의 희사는 미맹의 희사법이요, 무상의 희사는 미연의 희사법입니다. 정송도 보은의 정송과 무상의 정송이 있습니다. 보은의 정송은 자신이 해탈하고, 무상의 정송은 이웃과 사회가 해탈하여 살기 좋은 불국정토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차별 희사와 차별 염송은 무상희사와 무상염송에 속합니다. 그러므로 대가를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 희사와 염송이 습관이 되도록 법을 세운다면 이것이 미연의 복심고 미맹에 화 끊는 법을 실천하는 것이 됩니다. 

사람은 본래 청정하고 순수의 마음의 소유자입니다. 보이지 않는 청정의 습관으로 뭉쳐져 있습니다. 청정 습관은 기회가 되면 언제든지 활동합니다. 우리가 마음만 세우면 자연히 착함이 증익되고 탁함이 사라지게 됩니다. 평소대로 행동하고 평소대로 말하는 습관을 숙명처럼 받아들이지 말고 미연의 복 심는 보시하는 마음과 미맹의 화를 끊는 참회하는 마음이 습관이 되게 하는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40. 실행론 설법 -정(情)과 성품(性品)

밀교신문   

인정이 곧 사정(私情)되고 사정이 곧 외도 되어 널리 중생 사랑하는 그 성품에 도적(盜賊)이라. 정이 발전하게 되면 모든 사(私)가 일어나고 성품 발전하게 되면 공의(公義)가 곧 일어난다.

인간 세상은 정으로써 다스려지는 세상이라 하여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천상·수라·축생·아귀·지옥에는 인간계만큼 정이 없습니다. 인간계가 정으로 움직이다 보니 많은 사사로움이 일어나서 진정한 즐거움보다 고통받음이 많습니다. 그래서 인간세계는 사바세계라 하여 그 고통을 감인(堪忍)하고 살아가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정은 좋은 듯 하지만 잘못 사용하여 고통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정으로 살지 말고 성품으로 사는 길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정(情)은 봄철에 푸른 싹이 돋아나듯 마음이 생동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습니다. 사람과 자연의 돌봄의 정으로 사는 것입니다. 돌봄을 연결해주는 것이 정인지만, 정이 때로는 해침을 주기도 합니다. 아무리 정을 사용하여도 해롭지 않으려면 정을 좋은 방향으로 승화시켜 성품으로 바꾸는 것이 좋습니다. 정은 밖으로 나타나기를 좋아하는 것이라면, 성품은 숨어 있는 덕입니다. 정은 만들어 가는 것이라 하고, 성품(性品)은 천생으로 타고난 것이라고도 합니다. 성품과 정은 사람에게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만물에도 존재합니다. 정과 성품은 사람이든 자연이든 같지만, 다만 사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만지거나 잡을 수 없지만, 밝은 마음, 맑은 마음, 청빛 찬란한 마음이 본성의 성품입니다. 본성의 성품에서 삶을 작동하는 정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용하는 정에는 크게 인정(人情)과 물정(物情)으로 나눕니다. 도의(道義) 시대는 정을 사용하여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삶을 살았지만, 도의가 없는 물질 시대는 본성의 정은 없어지고 탐욕과 집착의 물정을 주인으로 삼아 모든 평가를 물질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는 진실한 행복은 얻을 수 없습니다. 마음을 기준으로 하는 시대는 인정을 버릴 수 없고, 물질을 기준으로 하는 시대는 물정을 멀리할 수 없습니다.

진각성존께서 인정과 물정은 한꺼번에 세울 수는 없다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정은 고집스럽고 집착이 강하므로 정을 세울 때는 성품은 저절로 무너진다는 것도 동시에 말씀하였습니다. 정은 밖으로 보기에는 성품보다 강하게 보이지만 실상은 약합니다. 성품은 나타낼수록 강하게 되면서 평안해지지만, 정은 많을수록 고통이 더욱 짙어질 뿐입니다. 정이 많으면 성품은 메마르게 되고 성품이 메마르면 고집이 세어집니다. 마치 검은 염소와 같습니다. 힘 있는 사람이 염소의 두 뿔을 잡고 턱을 땅에 닿도록 눌려도 턱은 쉽게 땅에 닿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고집으로 뭉쳐진 힘의 작용입니다. 이러한 강한 고집은 부드러운 물을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염소는 환약 같은 동글동글한 변을 배설하는 것입니다. 

부처의 성품과 중생의 성품은 같습니다. 본래부터 영원하고 무상한 성품이 중생으로 태어나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사용하면서 유한(有限)한 정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생은 정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이왕지사 정을 떠나 살 수 없다면, 그 정을 좋은 방향으로 활용하여 고통 없는 삶을 살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일까요? 자신은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까지 지니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탐욕을 멈추고 성냄을 멈추고 어리석음을 멈춘다면 가능합니다.

사람은 곧 사라지는 인정은 쓸 줄 알면서 영원한 성품을 보존하는 공부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성품 찾는 공부만 한다면 불가사의한 힘을 얻어 고통으로 흐르는 방향을 행복으로 흐르도록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성품 찾는 수행으로 공덕을 얻게 되면 재앙의 바람이나 고통의 물결도 멈추게 되며 눈앞의 서원은 차 한 잔 마시는 것처럼 쉽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정에 집착하지 않고 성품 찾는 마음공부를 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밝고 맑은 성품으로 교체됩니다. 이것을 하루아침에 이루려 하지 말고 끝없는 시간 속에서 습성이 될 때 묵은 정의 습관까지 닦아내어 본래의 성품이 보이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차별하는 마음이 있고, 간사한 마음이 있고, 아끼는 마음이 있어 자신의 이익이 없으면 정을 나누려 하지 않습니다. 특히 물정에 있어서는 더욱 심합니다. 인정이 두터운 사이면 허물을 보더라도 용서하는 마음이 있지만, 물정은 두터우면 두터울수록 티끌 같은 허물도 태산처럼 보고 용납하지 않습니다. 인정은 내리사랑이라 부모가 자식 사랑하는 것과 같고, 물정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무시하는 마음이 있어 부모 형제조차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물정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흔히 “부(富)는 3대를 잇기 어렵고 권세는 10년을 넘기기가 어렵다<권불십년 화무십일홍(權不十年 花無十日紅)>.”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중생은 청정한 성품은 찾지 않고 곧 사라질 정에 이끌러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정이 난무(亂舞)하면 가난하기가 쉽고, 물정이 난무하면 병고가 끓일 날이 없습니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타파할 수 있는 것이 성품 찾는 수행입니다. 중생의 자성에 심인(心印)으로 본구점시(本具點示) 하면 찰나에 정화된 성품으로 바뀝니다. 우리는 만나기 어려운 인간의 몸과 만나기 어려운 부처님 정법을 만났습니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기 바랍니다. 자연과 사람이 조화를 이루면서 행복만이 존재하는 만다라의 세상을 세울 힘이 성품입니다. 이제 그 힘을 일깨워 주는 것이 마음공부를 합시다. 밀교의 수행은 성불을 목적하지 않습니다. 성불하기 이전에 넉넉하게 살아 보아야 합니다. 건강하게 살아 보아야 합니다. 화목하게 살아 보아야 합니다. 자신만의 이익을 놓아야 합니다. 자신만의 명예를 놓아야 합니다.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하지 않아야 합니다. 자신만의 고집을 자신만의 고정관념을 버려야 합니다. 방하착(放下著)합시다. 

산과 계곡은 높고 낮음이 있지만 언젠가는 높은 곳이 낮아지고 낮은 곳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불<화(火)>의 본성이 따뜻함이라면 불꽃은 정입니다. 사납던 불꽃도 희미해질 수 있고 희미하던 불꽃도 사나워질 수 있습니다. 어느 것이든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특히 인정이든 물정이든 똑 같습니다. 자신만을 위하는 정이 아닌 일체중생과 자연이

다 함께 할 수 있는 마음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자성을 찾는 공부를 하여 인정과 물정에 대한 공부를 하기 바랍니다.

41. 실행론 설법 -이원(二元)에서 자유평등(自由平等)

밀교신문   

땅에 솟는 맑은 물은 흐르는데 탁(濁)해지고 못에 모인 탁한 물은 넘는 데서 맑아진다.

이원(二元)이란 상대성을 말합니다. 상대성은 나누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마주함을 말하며 평등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원(二元)의 이치를 차별적 대립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원에는 부처<진리(眞理)>의 이원과 중생<현실(現實)>의 이원이 있습니다. 부처의 이원은 불이(不二)의 이원입니다. 중생의 이원은 차별적 상대성 이원이지만, 이것 역시 불이의 이원으로 돌아갑니다. 일천 강물이 바다로 흘러 모두 한 맛이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중생의 이원이 평행을 이룬다는 것은 하늘을 향한 수백의 산이 높고 낮음이 각각 다르지만 모두 하나의 흙과 같은 것입니다. 물이 어디에 있으나 물은 물일 수밖에 없고, 산이 높고 낮음이 다르지만, 한낮 흙일뿐입니다. 이것이 불이의 이원이 되는 것입니다.

일원주의, 이원주의는 좋고 나쁨, 옳고 그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차별성으로 배대하면서 일원은 옛날 군주 봉건시대로 좁고 모나게 사는 것으로 생각하고, 이원은 현재 자본 자유시대로 넓고 둥글게 사는 시대라 규정짓기도 합니다. 이것은 일원과 이원의 근본 이치를 잘 모르고 좁은 소견으로 구분한 것입니다. 일원과 이원은 같은 것으로 활용에 따라 다르게 논하는 것입니다. 일원을 잘못 활용하면 종속(從屬)이 되는 것이며, 이원을 잘못 활용하면 차별적 상대가 되는 것입니다. 종속은 상하가 분명하여 군림하고 억압하기 좋은 것이며, 쉽게 갑질을 일으키기 좋게 되어 있습니다. 종속적 일원에 물들면, 이원의 차별심이 더욱 강하여 영원히 합일하지 못하고 고립적 배타적 현상이 일어납니다. 인도의 계급제도와 우리의 양반제도가 이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종교에서 일원을 잘못 활용하여 사람은 절대로 신이 될 수 없으며, 신에게 절대복종하지 않으면 벌을 내린다는 위협을 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神)과 믿는 자는 영원히 하나로 합일하지 못하고 희생만 강조하는 결과로 나타납니다. 

불교는 부처의 일원을 근본으로 이원을 제시하면서 부처와 중생이 하나로 합일하는 불이를 설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종속적인 일원을 강조하여 절대적 믿음과 희생을 요구하는 것과는 확연하게 다릅니다. 절대의 믿음과 희생을 강요하지 않고 자신이 곧 신과 같다는 불이의 이원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가 곧 둘이요 둘이 곧 하나를 이루는 물방울의 평등성과 공(空)을 세워 무아(無我), 무상(無相), 무작(無作)을 깨닫게 하여 자성, 자연, 자주(自主)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상의 법신일불(法身一佛)의 체에서 다신(多神) 다불(多佛)로 출현하여 자주의 용을 보이면서 부처와 중생이 상대가 아닌 진실 불이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일원과 이원은 조화를 이루어 원융무애한 불이를 이루어 차별을 벗어나 평등이 되는 것입니다. 

중생은 자기중심 강할수록 차별하는 마음으로 자기에 맞춘 알음알이로 해석하여 정과 사, 밝음과 어두움, 선과 악, 옳고 그름, 앞과 뒤, 근본과 지말<본말(本末)>의 대립각을 세우고 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상대의 잘못을 사정도 모르고 무조건 질타(叱咤)하고 멸시하며 괴롭힙니다. 대립을 고집하는 마음은 시간 따라, 사람 따라, 장소 따라 이해타산(利害打算) 하는 기준만 조금씩 바뀔 뿐입니다. 특히 현금의 지혜로운 사람들만 모인 법율계에서 내린 판단을 보십시오. 상대적이고 대립적인 것을 벗어난 판별은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우리들 자신이 불이의 이치를 모르고 고질화한 차별심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어리석은 비유 들어보겠습니다. 이 비유는 어떠한 부류를 비난하거나 비방하려는 것이 아님을 먼저 밝힙니다. 

치매에 걸린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좋고 나쁨, 아름다움과 추함, 기쁨과 슬픔, 부끄러움 싫어함의 차별을 모릅니다. 시간 개념, 숫자 개념도 모르며 생사까지도 구애받지 않습니다. 어쩌면 본인은 가장 편안한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가족과 주변 사람들은 어떠합니까? 답답하게 생각하고, 안타깝게 생각하고, 불쌍하게 생각하면서 괴로워할 것입니다. 자기 때문에 가족이 불편하다는 생각조차 없습니다. 또 하나 시간을 들어보겠습니다. 같은 시간인데 느끼는 바가 다를 수 있습니다. 즐겁고 재미있는 일을 할 때는 1시간이 1분처럼 빠르게 느껴지고, 괴롭고 하기 싫은 일을 할 때는 1분이 1시간처럼 더디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릴 때는 1분이 1시간처럼 더디게 가는 것 같고, 만나서 이야기할 때는 1시간이 1분처럼 빠르게 지나감을 느낄 것입니다. 이것이 같은 듯 다른 불이의 이원입니다.

불이의 이원은 자신의 차별심을 평등한 마음으로 바꾸는 방편의 실천으로 증득할 수 있습니다. 먼저 자신의 몸부터 이원평등의 불이임을 알아야 합니다. 부처와 선지식은 중생의 상대성 이원이 불이임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진각성존도 물과 심의 이원 진리도 이와 같습니다. 물과 심에 어느 하나에 집착하지 말고 모두를 포용하면서 서로 다른 일을 하지만 상대의 하는 일을 인증(認證)하여 상부상조의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게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상대방을 자유로운 마음으로 대하는 행동과 언어로 상호공양 하는 평등행을 실천하도록 가르친 것이 진각성존의 상대성 이원입니다. 부처와 자신이 불이가 되는 귀명 합장, 부처와 자신이 평등을 이루는 불이의 참회, 자비심 가득한 불이의 희사, 용맹심 깊은 불이의 염송으로 부족함이 없고, 아픔이 없고, 어긋남이 없는 해탈의 얻은 다음 구경에 법신일불로 돌아갑시다. 

선인은 선의 물질이 악인은 악의 물질이 일어나는 것이 인연이 평등한 불이의 인과법입니다. 선의 물질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많아져서 즐거움으로 가득하게 되고, 악의 물질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무거워져 고통이 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물심의 이원입니다. 선은 자비로 시작되고 악은 탐욕으로 시작됩니다. 자비와 탐욕은 하나의 마음에서 나오므로 본래 일원인데, 활용하는 과정에서 자비와 탐욕의 이원이 된 것입니다. 사람은 물과 심의 이원 속에 어리석게 소중하고 귀한 생명을 함부로 연명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살아가면 될 것을 차별적인 눈이 있고 차별적인 귀가 있고 차별적인 코가 있고 차별적인 입이 있고 차별적인 몸이 있고 차별적인 생각이 있어서 상대와 비교하면서 지나치게 욕심과 집착으로 상대보다 많고 좋고 나은 것을 채우느라, 스스로를 괴롭게 하면서 상대방에게까지 피해를 주고 있습니다. 남을 의식하지 않으면 자연 절로 차별하는 마음이 사라질 것이며, 그 자리에 상대와 내가 하나라는 부처의 싹이 돋아날 것입니다.

상대와 비교하는 권력과 명예와 물질에 집착하지 않고 놓아버리는 수행을 합시다. 부처와 자신이 하나이듯이 자신이 곧 부처임을 깨닫는 수행을 합시다. 차별심을 내려놓는 불이의 수행을 한다면 만물인 상대와 나의 심성이 평등하여 하나 되는 불이의 자리에서 무한한 해탈 공덕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날마다 좋고 좋은 날이요 달마다 좋고 좋은 달이며 해마다 좋고 좋은 해가 될 것입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좋고 좋은 사람을 만날 것이며, 하는 일마다 좋고 좋은 일만 할 것입니다. 이것이 이원에서 자유평등입니다.

42. 실행론 설법 -십선참회(十善懺悔)

밀교신문   

무자(無慈) 살생(殺生) 금일참회. 비리(非理) 투도(偸盜) 금일참회. 외색(外色) 사음(邪淫) 금일참회. 거짓 망어(妄語) 금일참회. 꾸민 기어(綺語) 금일참회. 이간(離間) 양설(兩舌) 금일참회. 모진 악구(惡口) 금일참회. 간린(慳吝) 탐심(貪心) 금일참회. 함독(含毒) 진심(瞋心) 금일참회. 사견(邪見) 치심(癡心) 금일참회. 

참회에는 지은 업을 참회하는 것과 행하지 못한 선을 참회하는 두 가지 참회법이 있습니다. 십악 참회는 지난 과거의 잘못을 참회하는 것이요. 십선 참회는 현재까지 행하지 못한 선을 참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참회는 대부분 과거 잘못을 참회하는 십악 참회를 행하고 있습니다.

십악 참회는 지난날의 잘못을 참회하면서 앞으로는 그와 같은 악을 행하지 않겠다고 맹세를 겸하면 승화된 대승의 십악 참회가 됩니다. 만일 지은 악업만 소멸하려 참회하면 이것은 기복 참회가 됩니다. 기복 참회에 둘이 있습니다. 지난날의 잘못을 기억하는 참회와 기억하지 못하는 참회입니다. 기억하는 참회는 적으면서도 공덕이 쉽게 일어나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참회는 많으면서도 공덕은 쉽게 얻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기억하는 힘은 있으면, 상실하는 힘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남의 흉은 사흘이다.’ ‘작심삼일(作心三日)’ 이란 말이 생긴 것입니다. 상실심 때문에 지난날의 잘못을 완전하게 소멸하지 못하고 깊숙한 곳에 습관으로 남아 있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시 죄업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스스로 인정하면서 ‘그러니까 사람이지!’ 하는 말로 위로하며 은근슬쩍 넘기며 회피하고 있습니다.

십선 참회는 선을 행하지 못한 것을 찾아 참회하는 것은 자기 자신보다 남을 생각하는 자비의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나쁜 습관을 바꾸고자 하는 마음도 함께 있습니다. 부처님은 현재를 중심으로 과거와 미래를 깨닫게 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과거를 중심으로 참회하고 서원을 세워 불공하는 것은 부처님의 본의를 약간 벗어난 것입니다. ‘과거가 없는 현재가 없고, 현재가 없는 미래는 없다.’ 하는 것은 현생을 기준으로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가리키는 말이며, 과거 현재 미래를 삼세를 뜻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삼세를 말한 것은 어느 한 생에 집착하여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삼세를 관통하는 마음을 깨닫게 하고자 삼세를 설하신 것입니다. 시간으로 보면, 과거 생의 마음이나 현재 생의 마음이나 미래 생의 마음이 모두 머무름이 없는 같은 한마음입니다. <금강경>의 대가인 규봉 선사가 떡 파는 노파에게 떡을 구할 때 노파는 경을 인용하여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 하였는데 스님은 어느 마음에 점심(點心)을 하려 합니까?’라는 선문답이 있습니다. 

한마음의 작용을 바르게 점검하지 못하면 점심은 먹을 수 없을 것입니다. 중생의 마음도 부처의 마음과 같아 본래 맑고, 밝고 청정한 마음이 본연인데, 그렇지 못한 것을 찾아 참회하는 것이 십선 참회입니다. 심악 참회가 일회성이라면 십선 참회는 영원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보살의 자비행입니다. 

밀교에서는 삼매야계단에서 십선계를 설합니다. 

첫째 “자비한 마음으로 살생을 하지 말라.” 보살은 항상 대비심으로 모든 생명을 살리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자신은 오늘도 모든 생명을 존중하고 보살필 것을 맹세하는 것입니다. 둘째 “청정한 마음으로 투도하지 말라.” 보살은 항상 지족하는 마음을 가지고 남의 것을 탐하지 않아야 합니다. 자신은 오늘도 남이 가진 것에 시기심과 질투심 없이 모두 인증하기를 맹세하는 것입니다. 셋째 “정결한 마음으로 사음하지 말라.” 보살은 청정하고 바른 생활을 해야 합니다. 자신은 오늘도 청정하고 맑은 행동으로 상대방에게 즐거움만을 줄 것을 맹세하는 것입니다. 넷째 “정직한 마음으로 망어하지 말라” 보살은 항상 진실한 말을 해야 합니다. 자신은 오늘도 상대방에게 거짓 없는 말만 할 것을 맹세하는 것입니다. 다섯째 “진실한 마음으로 기어하지 말라.” 보살은 항상 법으로서 말하고 미혹시키는 말을 꾸미지 않아야 합니다. 자신은 오늘도 이치에 맞는 말만 할 것을 맹세하는 것입니다. 여섯째 “부드러운 마음으로 악구하지 말라.” 보살은 항상 험한 말과 거친 말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자신은 오늘도 부드럽고 아름다운 말만 할 것을 맹세하는 것입니다. 일곱째 “화합하는 마음으로 양설(兩舌)하지 말라.” 보살은 항상 화합하는 말을 하여야 합니다. 자신은 오늘도 공손한 말과 화합하는 말만 할 것을 맹세하는 것입니다. 여덟째 “보시하는 마음으로 탐욕하지 말라.” 보살은 욕심 없이 베풀어야 합니다. 자신은 오늘도 일체중생에게 베푸는 마음으로 살 것을 맹세하는 것입니다. 아홉째 “환희하는 마음으로 진애(瞋恚)내지 말라.” 보살은 어느 때라도 법열을 가지고 성내는 마음이 없어야 합니다. 자신은 오늘도 기뻐하는 마음과 기뻐하는 마음으로 살 것을 맹세하는 것입니다. 열 번째 “지혜로운 마음으로 사견내지 말라.” 보살은 항상 정법의 가르침만 생각해야 합니다. 자신은 오늘도 바른 견해를 가질 것을 맹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선 참회입니다. 

진언수행은 십선 참회를 생활화하는 것입니다. 

사회생활에서 1일 좌우명처럼 실천하는 것입니다. 

매월 1, 11, 21일은 “무자살생 금일참회”의 날로, 2, 12, 22일은 “비리투도 금일참회”의 날로, 3, 13, 23일은 “외색사음 금일참회”의 날로, 4, 14, 24일은 “거짓망어 금일참회”의 날로, 5, 15, 25일은 “꾸민기어 금일참회”의 날로, 6, 16, 26일은 “이간양설 금일참회”의 날로, 7, 17, 27일은 “모진악구 금일참회”의 날로, 8, 18, 28일은 “간린탐심 금일참회”의 날로, 9, 19, 29일은 “함독진심 금일참회”의 날로, 10, 20, 30일은 “사견치심 금일참회”의 날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1주간 불공 때는 육바라밀을 병행하여 월요일은 “무자살생 금일참회, 비리투도 금일참회”를 하면서 보시바라밀을 실천하고, 화요일은 “외색사음 금일참회 거짓망어 금일참회”를 하면서 정계바라밀을 실천하고, 수요일은 “꾸민기어 금일참회”를 하면서 인욕바라밀을 실천하고, 목요일은 “이간양설 금일참회, 모진악구 금일참회”를 하면서 정진바라밀을 실천하고, 금요일은 “간린탐심 금일참회, 함독진심 금일참회”를 하면서 선정바라밀을 실천하고, 토요일은 “사견치심 금일참회”를 하면서 지혜바라밀을 실천하며 자성일은 십선 참회와 육바라밀의 실천을 살핍니다. 이러한 수행 방편은 49일, 100일, 1,000일 불공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수행법을 실천하면, 진각성존이 이 시대에 진언을 중심으로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였는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진각성존의 참회를 중심으로 진언 염송과 희사법을 가르쳤습니다. 진언 수행에 참회가 없거나, 희사심이 없으면 완전한 수행이 될 수 없습니다. 염송과 희사에 관한 법 가운데 참회법은 염송을 시작하고 마칠 때 하는 삼종 참회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생활불교는 일상생활에서 십선행이 될 때 제대로 된 생활불교가 되는 것입니다. 진각성존은 하지 말라는 십악 참회가 아닌 하라는 십악 참회를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도록 하신 것도 이러한 뜻에서 설하신 것입니다. 이법을 세분한 것이 48심인계입니다. 몸과 언어와 생각의 습관을 바꾸어 윤회의 업이 되는 근본을 소멸하는 것이 십악 참회입니다. 육자 진언의 진리의 꽃, 육바라밀의 지혜의 꽃, 십선 참회의 자비의 꽃을 피워 진각성존의 깊은 은혜에 보답합시다. 

43. 실행론 설법 -팔위소멸법(八危消滅法)

밀교신문    

“하루라도 옳게 쓰면 그날 중에 팔위 없고, 한달 동안 옳게 쓰면 그달 중에 팔위 없다.”

불보살의 세계는 마음을 중심으로 하는 해탈 세계요, 중생계는 물질을 중심으로 하는 윤회의 세상입니다. 중생계도 처음에는 마음을 중심으로 살았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물질 중심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시대가 바뀔 때마다 성인이 출현하여 자성 찾는 해탈법을 전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가까운 분이 싯다르타 태자입니다. 출가, 수행, 깨달음, 전법, 열반의 모습을 보이면서 중생 스스로 본성을 깨달아 해탈하도록 법을 전하였습니다. 이 시대를 정법시대(正法時代)라 하며, 그 후 상법시대(像法時代), 말법시대(末法時代)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정법, 상법, 말법은 다시 초·중·장(初中長)으로 나눕니다. 싯다르타 탄생 후 제1 결집까지 100년간을 초(初) 정법시가 되고, 제2 결집을 중심으로 200년간을 중(中) 정법시가 되며, 제3 결집을 중심으로 불멸 500년까지를 장(長) 정법시가 됩니다. 상법시대는 정법시 이후 첫 500년간을 초 상법시가 되고, 다음 500년간을 중 상법시가 되며, 마지막 500년간을 장 상법시가 되는 것입니다. 말법시대는 불멸 2,000년부터 시작하여 첫 1,000년간을 초 말법시가 되고, 다음 2,000년간을 중 말법시가 되며, 부처님 열반 5,000년 후부터 미래불이 오실 때까지를 장 말법시대가 됩니다. 지금 우리는 초 말법시대의 살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정법 상법이 흐른지 오래지 않아 좋은 습관이 아직 남아 있어서 큰 고통과 어려움이 없는 희망이 있는 시대입니다. 상법시에 출현한 선지식은 매장경(埋藏經)을 찾아 전하면서 조금만 노력해도 쉽게 해탈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진각성존의 ‘말법 시대 불교는 다라니로써 흥왕한다.’ 말씀은 초 말법시대에 맞는 당체설법(當體說法)입니다. 인과를 깨달아 참회하고 수행하여 중생성취를 이루게 하는 말씀으로 “깨쳐보라”, “참회하라”, “염송해보라” 하였습니다. 당체설법의 중심은 빈궁(貧窮), 병(病), 불화(不和)의 삼고에서 해탈하는 것입니다. 삼고에서 받는 고통의 무게는 같습니다. 여기서는 빈궁고에 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사람은 한평생 사용할 수 있는 의식주(衣食住)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다만 인(因) 지음에 따라 좋고 나쁨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인과를 깨친 분은 자신의 분복(分福)을 인증하여 옷은 몸을 가리면 족하고, 집은 추위와 더위를 피하면 족하고, 음식은 활동할 에너지를 채우는 것으로 만족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상대와 비교하여 욕심과 애착으로 본분에 넘치게 쌓고 집착하면서 갖은 고통을 만들며 살아갑니다. 

인간은 욕망을 가진 동물이라 쌓고 집착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쌓고 집착하는 재물이 복 되기도 하고 재앙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좋은 인을 지은 사람은 재물을 쉽게 취득하고 어렵게 나가지만, 복이 엷은 사람은 어렵게 취득하고 쉽게 나가게 됩니다. 나갈 때는 기존의 재물까지 함께 나가기도 합니다. 이러한 이치에서 주고받는 선물도 복이 되고 재앙이 될 수 있습니다. 덕이 없는 사람은 선물을 받음과 동시에 고통도 함께 받을 수 있으며, 덕이 높은 사람은 선물을 받았는데도 자신이 가진 재물이 줄지 않고 도리어 불어나기도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복과 덕을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자기 물건은 아끼고 남의 물건을 탐내는 마음을 일으킵니다.

초 말법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탐욕과 집착만을 생각하는 마음이 강하여 스스로 위험한 고통을 불러들이고 있습니다. 특히 부정(不淨)한 재물로 인하여 받는 고통이 심합니다. 덕이 없고 자격 없는 사람이 높은 지위에 오르기 위하여 남의 자리를 빼앗고, 그 직위와 권력을 이용하여 모은 재물, 속임수로 아름답게 포장하고 조작하여 상대방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 착취한 재물, 노력 이상의 급여로 챙긴 재물이 그 사람의 집 문턱을 넘는 순간부터 집안에는 먹구름에 감싸이게 됩니다. 그리고 사용하는 즉시 우환과 질병으로 가족이 위태하게 됩니다. 이러한 이치를 진각성존은 팔위법(八危法)을 설하여 깨우치게 하였습니다. 

부정한 재물, 검은 재물, 악하게 취득한 재물로 받는 팔위는 장차 받을 복덕을 차단하며, 이미 받은 것을 파괴합니다. 첫째 자신과 가족이 사고를 일으켜 관(官)에 몰수되며, 다른 사람의 사고에 휩쓸리어 억울한 고통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국록을 받던 가족이 불명예를 얻게 되며, 둘째 필요할 때 물건이 없으며, 있던 것도 도적에게 겁탈(劫奪)되고 잃어버리고 파손되는 것이요, 셋째 화상(火傷)을 잘 입고, 화마(火魔)의 재앙이 자주 일어나며, 마음의 화병(火病)으로 괴로움이 끝이 없으며, 넷째 물에 유실되고 파손되며, 재물이 모이지 않으며, 혹 모이면 고통의 문이 열려 우환과 질병으로 나가며, 다섯째 원수(怨讐)와 빚진 사람에게 뺏기면서도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지도 못하고 도리어 원수 맺는 일이 생기며, 여섯째 농사가 흉년들어 하는 일마다 좋은 결실을 거두지 못하며, 자녀의 교육에 올바른 성적을 얻지 못하여 원하는 진로로 나아가지 못하며, 일곱째 사업의 실패가 잦아지며, 혹 새로운 사업을 하여도 막차를 타게 되는 것입니다. 여덟째 가족은 올바른 생활을 하지 못하고 자식들은 노름을 즐기며, 서로 어긋나 반목하여 화합한 가정을 이루지 못하게 됩니다. 

이러한 팔위를 막으려면, 먼저 자신의 분복을 깨닫고, 지족(知足)법을 배워 욕심없이 올바르게 취득해야 하며, 재물과 명예를 얻게 되면 정화법을 행하면서 은혜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옛날에는 흐르는 물을 그대로 마셨지만, 지금은 약품으로 정화하여 마시는 시대입니다. 지금은 올바르고 청정한 재물을 취득하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이때는 재물을 취득하면 반드시 정화한 연후에 사용하여야 위험하지 않습니다. 물질 정화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매일 보은(報恩)의 마음으로 정시(定施)하는 것입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이웃과 사회에 감사한 마음으로 베푸는 것입니다. 둘째 취득에 따라 정화(淨化)의 보시를 합니다. 이것은 재물과 함께 들어오면 화(禍)를 복(福)으로 바꾸는 법입니다. 수입에서 1/10이나, 1/20이나, 1/100 가운데 실천할 수 있는 법을 세워 청정한 곳에 보시하는 것입니다. 만일 노력하지 않고 횡재한 것은 3/10 이상의 법을 세워야 합니다. 이러한 정화법을 세우지 않으면 결국 탁한 물질에 의하여 우환과 질병으로 온전한 가정을 보존하기가 어렵습니다. 

정화할 수 있는 곳은 청정한 곳이어야 합니다. 가장 청정한 곳은 정시(定施)를 정시(淨施)로 변화시키는 불법승삼보입니다. 대가 없이 정시(淨施)를 실천하여 자신과 가족과 이웃과 사회가 함께 고통 없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세월은 흐르고 있습니다. 힘없고 능력 없을 때 후회하지 않는 법을 미리 세워 모두 해탈의 진맛을 즐기시기 바랍니다.

44. 실행론 설법 -불공공덕(佛供功德)

밀교신문   

불(佛)에 공양(供養)하는 자는 큰 복덕을 얻게 되며, 속히 보리성취(菩提成就) 하여 일체중생들이 안락(安樂)함을 얻게 하며, 법(法)에 공양하는 자는 지혜가 곧 증장(增長)하여 법의 자재(自在) 증득(證得)하고 모든 법의 그 실성(實性)을 능히 깨쳐 알게 되며, 승(僧)에 공양하는 자는 한량없는 복덕성(福德性)과 일체 자량(資糧) 증장하고 불도성취(佛道成就) 되느니라. 

부처님께 귀명 함은 믿음의 불공이요, 법에 귀명 함은 깨달음의 불공이요, 승에 귀명 함은 화합의 불공입니다. 자성의 믿음을 공양하고 자비의 가르침을 깨우쳐 공양하고 모든 것과 하나 되는 화합을 공양하는 것이 불법승 삼보에 불공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뜻을 세운 불공은 기복불공(祈福佛供)이 아닌 자성을 찾아 밝히는 불공이 될 것입니다.

불공은 하나 되는 행위입니다. 불공은 동화되는 수행입니다. 불공은 평등하게 나눔을 실천하는 행위입니다. 이를 밀교에서는 상호공양(相互供養)이라 합니다. 불과 보살이 상호 공양하여 여래를 이루고, 보살과 중생이 상호 공양하여 응공(應供)을 이루고, 중생과 불이 상호 공양하여 즉신성불 하는 것입니다. 

즉신성불은 곧 선지식입니다. 선지식은 자신이 곧 여래임을 깨닫는 것이요, 자신이 곧 응공임을 깨닫는 것이요, 자신이 곧 정변지(正徧智)임을 깨닫는 것이요, 자신이 곧 명행족(明行足)임을 깨닫는 것이요, 자신이 곧 선서(善逝)임을 깨닫는 것이요, 자신이 곧 세간해(世間解)임을 깨닫는 것이요, 자신이 곧 무상사(無上士)임을 깨닫는 것이요, 자신이 곧 조어장부(調御丈夫)임을 깨닫는 것이요, 자신이 곧 천인사(天人師)임을 깨닫는 것이요, 자신이 곧 불세존(佛世尊)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불공이란 용어 속에 법공(法供) 승공(僧供)의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통일하여 불공이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불공은 곧 즉신성불을 이루는 선지식으로 승공이 되는 것입니다. 승공은 또한 화공(化供)으로 교화를 뜻합니다. 

싯다르타 태자도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은 다음 열반에 드시지 않고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바라나시로 향하였습니다. 승공하는 수행자는 일체중생을 위하여 서원하고 참회하고 희사하고 정진하면서 바른 생각으로 공양하고 바른 말씨로 공양하고 바른 행동으로 공양하여야 합니다. 부처님은 보살이 되어 중생을 교화하지만, 수행자는 선지식으로 일체중생을 해탈의 길로 이끌어야 합니다. 화엄경에 선재동자가 문수보살을 친근하고 법을 물었을 때, 선재동자의 수행력을 보고 선지식을 찾는 길로 덕운비구를 찾도록 하였습니다. 이로부터 52선지식을 찾아 법을 배우고 익히고 깨달음을 얻은 다음 다시 문수보살을 찾아 해탈의 법을 완성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법을 청할 때는 선지식을 찾아야 하고, 법을 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선지식이 되어야 합니다.

선지식은 일체중생을 이익과 안락을 주면서 만물에까지 편안함을 줍니다. 화려하지도 않고, 뛰어나지도 않고, 군림하지도 않고, 자연과 함께하면서 흙에 있으면 흙과 하나가 되고, 물에 있으면 물과 하나가 되고, 불에 있으면 불과 하나가 되고, 나무에 있으면 나무와 하나가 되고, 바람에 있으면 바람과 하나가 되고, 허공에 있으면 허공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어느 장소 어느 시간에 있으나, 그 시간과 그 장소와 동화되어 하나 되는 것입니다. 재물을 구하면 재물과 하나 되고, 명예를 구하면 명예와 하나 되고, 건강을 바라면 건강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지식의 삶입니다. 자연과 멀리하지 않고 시간따라 움직이는 모습이 선지식입니다. 악지식은 자연과 상대를 믿지 않은 것이며, 시간의 흐름에 순응하지 않은 것이며, 만물과 동화되지 않고 역순(逆順)으로 흐르는 것입니다. 혼자만이 오롯하면 악지식입니다. 자기만을 생각하면 악지식입니다. 자기만의 일을 하면 악지식입니다. 악지식의 마음으로 하는 불공은 올바른 불공이 될 수 없고, 공양하여도 올바른 공양이 될 수 없습니다. 다른이보다 몇 배의 힘을 쏟아도 공덕 성취는 한미(限微)하게 될 것입니다. 

세간에서 말하는 불공은 가난한 사람이 재물을 구하기를 바라고, 헐벗은 자가 옷을 구하기를 바라고, 병든 자가 병의 쾌유를 바라면서 자리를 구하고 명예를 구하기 위하여 불공합니다. 희사하고 기도하는 불공을 합니다. 이러한 불공은 곧 기복 불공이 되는 것입니다. 기복 불공은 자신의 원과 같은 본존을 찾습니다. 삼세의 행복과 성공을 위하여 천불(千佛)도량과 오불(五佛)도량을 찾고, 병고 해탈을 위하여 약사(藥師) 도량을 찾고, 이고득락(離苦得樂)을 위하여 미타(彌陀)도량을 찾고, 보은의 마음으로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도량을 찾고, 지혜를 얻기 위하여 문수도량을 찾고, 행원을 성취를 위하여 보현도량을 찾고, 현실의 복락을 위하여 관음도량을 찾고, 자녀를 얻기 위하여 칠성도량을 찾고, 신통함을 얻기 위하여 나반도량을 찾고, 풍어와 바다의 안전을 위하여 용왕도량을 찾고, 재앙을 소멸하기 위하여 신중도량을 찾고, 지옥을 면하기 위하여 지장도량과 시왕도량을 찾습니다. 

이 모든 도량을 찾는 중심은 자신의 마음입니다. 자신의 마음에 천하의 서원도량이 총지(總持)하여 있습니다. 낱낱의 부처와 낱낱의 보살과 낱낱의 명왕을 찾아 불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제 자심에 총지한 도량을 찾아 귀명하고 참회하여 비로자나불의 본심진언을 염하고 송하면서 자신의 바라는 마음으로 상호공양하면, 나의 바라는 마음을 불보살이 알고, 자연 법계가 알고, 삼라만상이 알게 되어 자연 절로 모든 서원이 성취될 것입니다. 

자신이 인을 짓고 부모를 찾아 함께 동업을 지어 태어난 이 몸은 소중한 것입니다. 소중한 몸은 모두 상호공양으로 이루어진 즉신성불의 몸입니다. 즉신성불한 몸은 비로자나불과 마왕 파순이가 함께 존재합니다. 선지식의 마음으로 생활하는 것은 비로자나불의 힘을 가지 받음이요, 악지식의 마음으로 생활하면 마왕 파순이의 힘을 가지 받은 것입니다. 가지 받는다는 것은 주인공을 정하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반드시 상호공양의 올바른 불공으로 비로자나불을 주인공으로 하는 가지를 받아 해탈의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불공은 자신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최대한 배려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공하지 않는 가족에게 불공을 핑계 삼아 불편을 주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이 서로에게 공양하는 마음의 시작입니다. 

진각성존은 “한 사람이 정기불공을 하여 자기가 이익하고 행복함은 물론이요, 또한 교도 전체에게 그 이익과 행복이 1/10, 1/100, 1/1000이라도 회향하게 되어 개개인이 모두 이익된다.” 하셨습니다. 이러한 법이 내가 사는 마을과 사회와 국가도 그 해택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법승 삼보에 상호공양 하는 불공 공덕입니다.

45. 실행론 설법 -염혜력(念慧力)은 신통(神通)함

밀교신문   

다라니의 염혜력(念慧力)은 듣는 바를 잊지 않고, 염혜력은 익힘 없는 무량경전 뜻을 알며, 염혜력은 일찍 듣지 못한 바를 들어 알며, 염혜력은 보지 못한 때와 곳의 일을 알며, 염혜력은 소리 듣고 본(本)과 말(末)을 분별하여 그 실상(實相)을 관하므로 그의 생멸 알게 된다.

염혜력은 진언 염송으로 얻어지는 힘입니다. 염혜력은 염력과는 다릅니다. 염력은 사람의 성격이나 어느 순간에 생기는 힘으로 오래지 않아 곧 사라지는 것으로 흔히 초능력이라 합니다. 염혜력은 오랜 시간 진언 수행에 의한 공덕으로 불가사의(不可思議)하며 장원한 힘을 말합니다. 법력도 이에 속합니다.

염혜력은 염송한다고 하여 무조건 얻어지는 힘이 아닙니다. 청정한 마음과 자비한 마음이 성숙될 때 얻을 수 있습니다. 물론 약간의 염혜력은 얻을 수 있습니다. 염혜력은 청정과 자비한 마음만큼 얻게 됩니다. 즉 자신의 마음 그릇에 맞는 염혜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큰 염혜력을 얻으려면 먼저 자신의 마음 그릇부터 크게 넓혀야 합니다. 덕이 높고 자비한 마음으로 염송하여야 합니다. 염송 소리에는 가난한 소리가 있고 부(富)한 소리가 있으며, 건강한 소리가 있고 아픈 소리가 있으며, 기쁜 소리가 있고 슬픈 소리가 있으며, 승차의 소리가 있고 하락의 소리가 있습니다. 마음이 울리도록 염송할 때 본래 가진 염혜력이 잠에서 깨어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광대원만한 마음을 가져야 광대원만한 염혜력이 들어 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마음에 잡동사니가 꽉 차 있다면 염혜력은 들어오지 못합니다. 이때는 먼저 잡동사니를 제거하는 작업을 하여야 합니다. 그 작업이 굳건한 믿음으로 참회하는 것입니다.

중생계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은 신비롭거나 예언적인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인과에 의하여 일어나는 현상일 뿐입니다. 인과를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바라보면 나타나는 현상들이 모두 불가사의하고 신비롭게 보이는 것입니다. 예언은 신비로운 것이 아닙니다. 인과를 깨달아 혜안과 법안과 불안이 열리면, 자연히 과거를 알고, 현재를 알고, 미래에 일어날 현상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법화경>의 수기설법도 이와 같습니다. 현재까지 자신과 상대방과 만물의 생성과정(生成過程)과 조락과정(凋落過程)의 나타난 인과를 보고 그것에 준하여 어느 때 어디에서 성불할 것이라는 예언의 수기(授記)를 하신 것입니다.

염혜력은 아무나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부귀영화와 이익과 안락을 위하지 않는 사람, 이웃과 사회에 해로움을 주지 않는 사람, 자연의 질서를 파괴하고 혼란하게 하지 않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습니다. 이웃을 보십시오. 횡재로 큰 재물이 생기면 마음이 변하여 부모 형제를 배은하고, 부부가 결별하여 가정이 파괴되며 자녀들은 돌보지 않고 자신의 안위(安位)만을 위하여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직장을 버리고 명예가 실추되어 사회에 따돌림을 받다가 이름 모를 사고와 모진 병으로 재물을 사용해보지도 못한 채 패가망신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재물 얻음도 이와 같은데 하물며 염혜력이겠습니까? 만일 이런 사람이 염혜력을 얻는다면 인과법칙은 없는 것입니다.

염혜력은 마음 모으는 정성에도 나타납니다. 서낭당의 나무와 마을 입구 돌무더기도 지나는 사람이 잠시 합장하며, 한 개의 돌을 정성으로 올려놓고도 묘득을 봅니다. 한 번의 합장과 한 개의 돌로도 공덕을 보는데 하물며, 청정도량에서 청정한 마음으로 희사하고 정좌하여 금강지권인을 결하고 염송하게 될 때 일어나는 공덕은 무엇에도 비유할 수 없이 무량한 공덕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것은 본래 자신의 마음속에 잠재하여 있는 힘이 부처님의 가지력에 의하여 발휘한 것입니다. 염혜력이 발휘되면 혜안이 열려 옛날에 듣고 배웠던 일들을 잊지 않을 것이며, 법안이 열려 한 번 들은 것을 기억하게 되며, 불안이 열려 앞으로 일어나는 일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바세계에 태어난 우리는 큰 것을 바라지도 않습니다.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라고, 병 없고, 가난 없고, 전쟁 없기를 바라며, 화목하고, 즐겁고, 편안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나만의 행복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가족과 이웃과 사회가 모두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조금 욕심을 부린다면, 현생의 행복이 다음 생까지 이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은 영원한 해탈이 무엇인지 모르고, 영원한 열반이 무엇인지 모르며, 성불도 모릅니다. 오로지 하루하루 즐겁게 살아가는 단순한 행복입니다. 불보살이 보았을 때 순간의 행복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위대한 힘을 지닌 불보살이 중생들의 이 정도의 서원도 못 들어 주겠습니까? 불보살은 우리에게 바라는 것도 요구하는 것도 없습니다. 작은 것에 연연하는 우리를 연민의 정으로 바라보면서 자성을 찾아 영원한 해탈을 얻도록 도움을 주고자 합니다. 청하지 않아도 고통받는 중생을 찾아 마음에 맞추어 환생하여 원인을 깨달아 고통에서 벗어나게 자비를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금만 마음을 모으면 불보살의 자비를 가지관정(加持灌頂) 받아 자신의 마음에 잠재한 염혜력을 사용할 수 있도록할 것입니다. 옴마니반메훔 한 번만 불러도 얻을 수 있습니다. 정성으로 한 닢만 보시하여도 얻을 수 있습니다. 잘못을 깨닫는 참회로도 얻을 수 있습니다. 허심한 마음으로 법문을 청하여도 얻을 수 있습니다. 새벽 잠자리에서 일어나 첫 마디로 ‘옴마니반에훔’이라 하면 얻을 수 있습니다. 밥상 앞에서 수저를 들기 전에 합장하고 진언을 외우면 얻을 수 있습니다. 세수할 때, 옷을 입을 때, 신발을 신을 때, 걸어갈 때, 멈추고 앉을 때도 마음 모아 ‘옴마니반메훔’ 부르면 얻을 수 있습니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 때, ‘옴마니반메훔’ 한 번만 불러도 얻을 수 있습니다. 일상에 습관 되어 생각없이 불러도 그때 그 순간, 그 일에 맞도록 염혜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한 마디의 염송을 가볍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바닷물도 한 방울 물에서 시작되고 태산도 한 줌의 흙이 모여 이루어졌습니다. 작은 정성 하나에서, 짧은 한순간의 정성에서, 미약한 중생의 마음에서 삼라만상을 다스리는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염혜력은 불보살이 준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마음속 본래 잠재되어 잠자고 있던 힘을 깨운 것입니다. 본래 지닌 불가사의한 염혜력은 각자의 마음 따라 열립니다. 마음이 좁으면 좁게, 넓으면 넓게, 작으면 작게, 크면 크게 활동할 것입니다. 마음 따라 귀명하고 참회하고 희사하고 염송하여 모든 서원이 성취되어 뜻과 같이 생활하기를 바랍니다.

46. 실행론 설법 -생활 중에 깨달아라<각(覺)>

밀교신문   

일은 복지전수(福智全修)이니, 삼밀행과 희사(喜捨)로써 복덕지혜(福德智慧) 구족(具足)하게  부지런히 닦을지요. 이는 사리필구(事理必究)이니, 내가 당한 모든 일에 그 이치를 연구하고 판단하여 볼 것이라.

진리와 현실은 같은 것입니다. 본체와 그림자 사이와 같아서 본체가 곧 그림자요 그림자가 곧 본체입니다. 다만 본체는 변함에 없지만, 그림자는 빛에 의하여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면서 모양도 빛의 각도에 따라 변화무상할 뿐입니다. 진리와 현실을 사람에 비유하면, 자성불(自性佛)과 자성중생(自性衆生)입니다. 진리의 불인 자성불은 영원한 것이요 현실의 중생인 자성중생은 일시적 머물다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본래 자성불<육대(六大)>이 어느 때부터 형상의 업을 지어<사만(四曼)> 자성을 감춘 중생으로 태어난 것입니다<삼밀(三密>. 이를 자성중생이라 합니다. 

보통의 눈으로는 자성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냥 중생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자성의 본성을 잃어버리고 형상의 업이 시키는 대로 활동하며 즐거움보다는 괴로움을 더 많이 받으면서 육도를 오르내리면서 윤회하고 있습니다. 윤회하는 중생이 바라는 것은 복과 지혜의 구족입니다. 중생은 복지 구족을 바라면서 얼마든지 즐겁게 행복하게 안락하게 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괴로움을 더 많이 받으며 살아갑니다.

진각성존은 자성 중생의 바라는 근본을 알았기에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는 법으로 복지전수, 사리필구, 생활취사(生活取捨), 결과내증(結果內證)의 실천법을 말씀하셨습니다. 앞의 둘은 자성 중생을 제도하는 근본이요, 뒤의 둘은 응용 실수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현교 사홍서원과 밀교 오대서원에서 “가가 없는 중생을 제도하기 서원합니다<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는 곧 자성중생<자성중생서원도(自性衆生誓願度)>의 재도를 뜻하는 것입니다. 

현교는 자성중생 제도 방법으로 “다함이 없는 번뇌 끊기를 서원합니다<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로 이어집니다. 방법으로 자성번뇌<자성번뇌서원단(自性煩惱誓願斷)> 끊는 법을 가르친 것입니다. 밀교는 자성 중생 제도의 방법으로 “가가 없는 복과 지혜를 모으기를 서원합니다<복지무변서원집(福智無邊誓願集)>”로 바뀝니다. 이것은 복지 구족한 즉신성불을 밝힌 것입니다.

이왕지사(已往之事) 중생으로 태어나서면 복지 구족하게 살아야 합니다. 부처님은 복지 구족하지 못한 중생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자비한 마음으로 화현하셨습니다. 중생과 같은 몸으로 태어났지만, 32상과 80종호 복지 구족한 모습으로 화현하신 것입니다. 32상은 복덕구족의 모습이요, 80종호는 지혜 원만한 모습입니다. 32상과 80종호는 한 생에 닦으신 것이 아닙니다. 무한한 생을 윤회하면서 복과 지혜를 닦아 나타난 즉신성불의 모습입니다. 연등불이 지나가는 진흙 길에 몸과 머리를 풀어 진흙을 밟지 않게 하셨고, 굶주린 호랑이에게 몸을 보시하였으며, 사슴무리의 죽음의 난을 없애기 위하여 인왕 앞에 몸을 희생하고자 하였고, 한 구절의 정법을 얻기 위하여 나찰에게 몸을 보시하였으며, 바라문의 요구에 두 아들을 보시하고 아내마저 보시하였습니다. 이렇게 쌓은 공덕으로 32상과 80종호가 갖추어진 것입니다. 다시 32상은 하나의 상마다 100가지의 선행이 모여서 3000 위의가 구족하였으며, 80종호는 하나의 종호마다 1,000가지 슬기로운 행이 모여서 8만 세행이 갖춰진 것입니다.

자성불을 바탕으로 태어난 자성 중생은 이 몸 이대로 즉신성불의 몸입니다. 중생이 참고 살아간다는 감인(堪忍)의 사바세계에 태어났다 하여도 괴로움을 참아가면서 살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자성 중생이므로 즐겁게 행복하게 살아갈 자격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 자격을 활용하지 않고 고통을 참으면서 살아갑니까? 불보살은 우리들에게 그렇게 살지 말라고 희망의 말씀으로 방법을 자세하게 경전 곳곳에 밝혔습니다. 

반야심경에 “보살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마음에 걸림이 없고 두려움 없고 잘못된 생각을 떠나 완전한 열반에 들었으며,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여 위가 없고 견줄 바도 없는 올바른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셨습니다. 완전한 열반이 복지구족이요, 올바른 깨달음이 지혜 성취입니다. 이와 같이 화신불이 보이신 일대사인연의 가르침이 모두 자성 중생의 복지구족을 성취하도록 가르친 것입니다.

중생 생활은 복잡하고 변화가 무상하여 8만 4천의 다양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다양한 흐름의 길 가운데 복덕과 지혜로 향하는 길이 제일입니다. 이 길을 복지전수(福智全修)의 길입니다. 허물할 것이 없는 완전한 복과 지혜, 모자람이 없이 원만한 복과 지혜, 비교할 수 없이 평등한 복과 지혜, 변함이 없이 영원한 복과 지혜를 닦는 길입니다. 이러한 길은 자성을 찾는 참회 수행을 하였을 때 비로소 보일 것입니다. 나만의 이익과 나만의 안락과 나만의 건강과 나만의 행복과 나만의 권력과 나만의 명예를 방하착(放下著)하고, 일체중생의 이익과 안락과 건강과 행복하기를 바라는 서원을 세우고 참회하고 희사하고 염송하면 됩니다.

중생은 자성불이면서도 어리석음이 만연하여 비록 용맹심을 발휘하여 정진하여도 복지 구족을 성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일 힘들인 만큼의 공덕을 얻지 못하였으면,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사리필구(事理必究)입니다.

수행하기 전에 먼저 진리와 현실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옳고 그름, 맞고 틀림, 잘하고 못함의 분별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자신의 판단에 집착하거나 연연하지 않아야 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전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말이 전부 정답이 아닙니다. 자신의 수준으로 상대를, 사회를 판단하려 하지 마십시오, 자신은 해결사도 아니며, 판사도, 검사도, 변호사도 아닙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았을 때 불보살의 가르침을 바르게 듣게 되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도 자신을 버린 수행으로 복과 지혜를 닦아 양족존(兩足尊)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도 자성 중생에 맞는 복과 지혜를 닦아 자성 중생으로써 양족존의 즉신성불을 하십시오.

자신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면, 자신의 생각, 행동, 언어를 방하착 하고 선지식을 찾고, 성인이 남긴 가르침을 열람하며, 그 분의 행적을 본받아 가르침에 순응하면 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챙기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고집하지 않는 행동과 말과 생각을 할 때, 자연히 진리와 하나 되고, 자연과 하나 되고, 사회와 하나 되고, 다섯 가지 복과 하나 되고, 다섯 가지 지혜와 하나 되어, 복지 구족을 이룰 것입니다. 원만하고 완전한 복과 지혜를 닦아 가난 없고, 병 없고, 전쟁 없는 세상을 만들어 다 함께 해탈의 삶을 살아가는 도반이 되기를 바랍니다.

46. 실행론 설법 -생활 중에 깨달아라<각(覺)>

밀교신문   

일은 복지전수(福智全修)이니, 삼밀행과 희사(喜捨)로써 복덕지혜(福德智慧) 구족(具足)하게  부지런히 닦을지요. 이는 사리필구(事理必究)이니, 내가 당한 모든 일에 그 이치를 연구하고 판단하여 볼 것이라.

진리와 현실은 같은 것입니다. 본체와 그림자 사이와 같아서 본체가 곧 그림자요 그림자가 곧 본체입니다. 다만 본체는 변함에 없지만, 그림자는 빛에 의하여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면서 모양도 빛의 각도에 따라 변화무상할 뿐입니다. 진리와 현실을 사람에 비유하면, 자성불(自性佛)과 자성중생(自性衆生)입니다. 진리의 불인 자성불은 영원한 것이요 현실의 중생인 자성중생은 일시적 머물다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본래 자성불<육대(六大)>이 어느 때부터 형상의 업을 지어<사만(四曼)> 자성을 감춘 중생으로 태어난 것입니다<삼밀(三密>. 이를 자성중생이라 합니다. 

보통의 눈으로는 자성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냥 중생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자성의 본성을 잃어버리고 형상의 업이 시키는 대로 활동하며 즐거움보다는 괴로움을 더 많이 받으면서 육도를 오르내리면서 윤회하고 있습니다. 윤회하는 중생이 바라는 것은 복과 지혜의 구족입니다. 중생은 복지 구족을 바라면서 얼마든지 즐겁게 행복하게 안락하게 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괴로움을 더 많이 받으며 살아갑니다.

진각성존은 자성 중생의 바라는 근본을 알았기에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는 법으로 복지전수, 사리필구, 생활취사(生活取捨), 결과내증(結果內證)의 실천법을 말씀하셨습니다. 앞의 둘은 자성 중생을 제도하는 근본이요, 뒤의 둘은 응용 실수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현교 사홍서원과 밀교 오대서원에서 “가가 없는 중생을 제도하기 서원합니다<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는 곧 자성중생<자성중생서원도(自性衆生誓願度)>의 재도를 뜻하는 것입니다. 

현교는 자성중생 제도 방법으로 “다함이 없는 번뇌 끊기를 서원합니다<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로 이어집니다. 방법으로 자성번뇌<자성번뇌서원단(自性煩惱誓願斷)> 끊는 법을 가르친 것입니다. 밀교는 자성 중생 제도의 방법으로 “가가 없는 복과 지혜를 모으기를 서원합니다<복지무변서원집(福智無邊誓願集)>”로 바뀝니다. 이것은 복지 구족한 즉신성불을 밝힌 것입니다.

이왕지사(已往之事) 중생으로 태어나서면 복지 구족하게 살아야 합니다. 부처님은 복지 구족하지 못한 중생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자비한 마음으로 화현하셨습니다. 중생과 같은 몸으로 태어났지만, 32상과 80종호 복지 구족한 모습으로 화현하신 것입니다. 32상은 복덕구족의 모습이요, 80종호는 지혜 원만한 모습입니다. 32상과 80종호는 한 생에 닦으신 것이 아닙니다. 무한한 생을 윤회하면서 복과 지혜를 닦아 나타난 즉신성불의 모습입니다. 연등불이 지나가는 진흙 길에 몸과 머리를 풀어 진흙을 밟지 않게 하셨고, 굶주린 호랑이에게 몸을 보시하였으며, 사슴무리의 죽음의 난을 없애기 위하여 인왕 앞에 몸을 희생하고자 하였고, 한 구절의 정법을 얻기 위하여 나찰에게 몸을 보시하였으며, 바라문의 요구에 두 아들을 보시하고 아내마저 보시하였습니다. 이렇게 쌓은 공덕으로 32상과 80종호가 갖추어진 것입니다. 다시 32상은 하나의 상마다 100가지의 선행이 모여서 3000 위의가 구족하였으며, 80종호는 하나의 종호마다 1,000가지 슬기로운 행이 모여서 8만 세행이 갖춰진 것입니다.

자성불을 바탕으로 태어난 자성 중생은 이 몸 이대로 즉신성불의 몸입니다. 중생이 참고 살아간다는 감인(堪忍)의 사바세계에 태어났다 하여도 괴로움을 참아가면서 살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자성 중생이므로 즐겁게 행복하게 살아갈 자격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 자격을 활용하지 않고 고통을 참으면서 살아갑니까? 불보살은 우리들에게 그렇게 살지 말라고 희망의 말씀으로 방법을 자세하게 경전 곳곳에 밝혔습니다. 

반야심경에 “보살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마음에 걸림이 없고 두려움 없고 잘못된 생각을 떠나 완전한 열반에 들었으며,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여 위가 없고 견줄 바도 없는 올바른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셨습니다. 완전한 열반이 복지구족이요, 올바른 깨달음이 지혜 성취입니다. 이와 같이 화신불이 보이신 일대사인연의 가르침이 모두 자성 중생의 복지구족을 성취하도록 가르친 것입니다.

중생 생활은 복잡하고 변화가 무상하여 8만 4천의 다양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다양한 흐름의 길 가운데 복덕과 지혜로 향하는 길이 제일입니다. 이 길을 복지전수(福智全修)의 길입니다. 허물할 것이 없는 완전한 복과 지혜, 모자람이 없이 원만한 복과 지혜, 비교할 수 없이 평등한 복과 지혜, 변함이 없이 영원한 복과 지혜를 닦는 길입니다. 이러한 길은 자성을 찾는 참회 수행을 하였을 때 비로소 보일 것입니다. 나만의 이익과 나만의 안락과 나만의 건강과 나만의 행복과 나만의 권력과 나만의 명예를 방하착(放下著)하고, 일체중생의 이익과 안락과 건강과 행복하기를 바라는 서원을 세우고 참회하고 희사하고 염송하면 됩니다.

중생은 자성불이면서도 어리석음이 만연하여 비록 용맹심을 발휘하여 정진하여도 복지 구족을 성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일 힘들인 만큼의 공덕을 얻지 못하였으면,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사리필구(事理必究)입니다.

수행하기 전에 먼저 진리와 현실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옳고 그름, 맞고 틀림, 잘하고 못함의 분별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자신의 판단에 집착하거나 연연하지 않아야 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전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말이 전부 정답이 아닙니다. 자신의 수준으로 상대를, 사회를 판단하려 하지 마십시오, 자신은 해결사도 아니며, 판사도, 검사도, 변호사도 아닙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았을 때 불보살의 가르침을 바르게 듣게 되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도 자신을 버린 수행으로 복과 지혜를 닦아 양족존(兩足尊)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도 자성 중생에 맞는 복과 지혜를 닦아 자성 중생으로써 양족존의 즉신성불을 하십시오.

자신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면, 자신의 생각, 행동, 언어를 방하착 하고 선지식을 찾고, 성인이 남긴 가르침을 열람하며, 그 분의 행적을 본받아 가르침에 순응하면 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챙기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고집하지 않는 행동과 말과 생각을 할 때, 자연히 진리와 하나 되고, 자연과 하나 되고, 사회와 하나 되고, 다섯 가지 복과 하나 되고, 다섯 가지 지혜와 하나 되어, 복지 구족을 이룰 것입니다. 원만하고 완전한 복과 지혜를 닦아 가난 없고, 병 없고, 전쟁 없는 세상을 만들어 다 함께 해탈의 삶을 살아가는 도반이 되기를 바랍니다.

47. 실행론 설법 -밀교의 회향(廻向)

밀교신문   

원하건대 이 공덕이 널리 일체 미쳐져서(願以此功德 普及於一切)/ 나와 모든 중생들이 함께 불도 이뤄지다(我等與衆生 皆共成佛道)

밀교의 회향은 유상복덕(有相福德)을 무상공덕(無相功德)으로 바꾸는 회향입니다. 스승에게 배운 것을 실천하여 제자에게 돌려주는 것이 회향입니다. 실천하여 돌려주지 않는 것은 자신만이 해탈일 뿐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자신의 세끼 밥을 얻기 위한 불공은 중단하십시오. 자신의 좋은 옷 입으려고 불공하지 마세요. 밥과 옷은 불공하지 않아도 사람으로 태어나면 의식주는 갖추어 태어납니다. 심인당을 시계추 모양 왔다 갔다 하면서 녹화된 소리처럼 ‘옴마니반메훔’을 부르지 마십시오, 마음 문을 열 수 있도록 염송하십시오. 남을 위하여 베푸는 마음으로 염송하십시오.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나 많은 법을 들었습니다. 이제 대오각성(大悟覺醒) 할 때가 되었습니다.

모든 씨앗은 싹을 내지만, 싹을 내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이 더 많습니다. 그리고 싹이 나도 인연이 맞아야 좋은 결실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이와 같습니다. 무슨 서원이든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고통의 씨앗이 아닌 행복의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일회성이 아닌 영원성의 열매를 추수하여야 합니다. 마음의 눈을 크게 뜨고 영원한 행복의 씨앗을 뿌릴 수 있는 방향을 생각해 봅시다.

건강을 바라고 원만한 가정을 바라며, 학문을 배우고 재주를 익혀 권좌에 오르는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업하고 노력하며 물질은 왜 모읍니까? 몸을 아름답게 꾸미고 가꾸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모든 일에는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목적은 미래를 위하는 희망적이어야 합니다. 자신만의 것이 아닌 대중적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자신만을 위한 건강, 아름다움, 재물, 권력, 명예를 위하여 노력하였습니다. 이 몸이 살아 있을 동안 사용한 일회성이었습니다. 죽음의 길에서는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쓰다 남은 것은 후손들의 투쟁 꺼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오늘 얻은 것은 오늘에만 필요하며, 이달에 얻은 것은 이달에만 필요하며, 올해에 얻은 것은 올해에만 필요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학창 시절에 배운 것은 시험점수에만 필요한 것은 아니었는지요? 장년 시절에 얻은 것은 장년 시절에만 필요하고, 부부가 얻은 것은 부부에게만 필요하고, 부모와 자식 간에 얻은 것은 부모와 자식 간에 필요합니다. 놀음으로 얻은 것과 도적으로 얻은 것과 남을 속이고 얻은 것은 놀음과 도적과 사기에만 필요합니다. 좋은 곳, 즐거운 곳, 행복한 곳에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아니 그렇게 사용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렇게 구하고 사용한다면 좋은 세상이 아닙니다. “콩<놀음> 심은데 콩<놀음꾼>이 나고, 팥<도적> 심은데 팥<도적>이 난다.”가 정답입니다. 이것이 인과법칙입니다. 영원한 놀음, 영원한 도적, 영원한 사기꾼이 되지 않는 것만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일회성이라 천만다행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좋은 것을 바라면서 살고 있습니다. 한 번의 바람이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원 없이 살 수는 없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나쁜 것은 일회성으로 바꾸고 좋은 것은 영원하게 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 방법은 얻은 뒤에 어떻게 하는가에 답이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바라고, 얻는 것에 온갖 정성을 쏟았습니다. 그리고 사용할 때는 함부로 사용하였습니다. 슬기로운 농부와 어리석은 농부의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슬기로운 농부는 추수한 씨앗 가운데 가장 좋은 씨앗을 남겼다가 봄에 뿌립니다. 어리석은 농부는 추수한 것 가운데 좋은 것은 먹고 가장 못한 씨앗을 남겼다가 뿌립니다. 이렇게 십 년을 반복한다면, 결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답은 각자에게 맡기겠습니다. 이것이 농부의 회향법입니다.

중생으로 복과 지혜를 얻어 영원히 행복을 누리려면 반드시 회향법을 올바르게 실천해야 합니다. 불공을 마칠 때마다 “원하건대, 이 공덕이 널리 일체에 미쳐져서 나와 모든 중생들이 함께 불도 이루어지이다.”로 회향합니다. 수없이 독송하고 암송하면서도 회향의 참뜻을 믿지 않았고<십계(十信)>, 회향의 참뜻에 머물지 않았고<십주(十住)>, 회향의 참뜻을 행하지 않았고<십행(十行)>, 회향의 참뜻을 실천하지 않았습니다<십회향(十廻向)>. 믿고 머무르고 수행하면서 회향의 참뜻을 성취하면, 비로자나불의 일생 보처가 되어 최고의 영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화신 석가모니불을 모신 곳이 대웅전(大雄殿)이라 합니다. 얻을 것도 없고, 베풀 것도 없고, 이름도 형상 없이 적적한 빛의 비로자나불을 모신 곳을 대적광전(大寂光殿)이라 합니다. 대웅전은 중생 회향의 적멸보궁(寂滅寶宮)이요, 대적광전은 부처님 회향의 금강법계궁전(金剛法界宮殿)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하나입니다. 깨달음을 얻은 선지식이 중생 근기와 시대와 장소에 맞추어 회향의 교화문을 열어 다양한 종파가 생겼습니다. 선지식의 회향심이 일어날 때 종파가 생기고, 사라질 때 종파가 사라졌습니다. 부처님 열반 2,600여 년이 흐르면서 참으로 많은 종파가 생기고 사라졌지만, 불법은 영원하여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중생을 생각하는 부처의 회향심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도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실천하여 자신만을 위하는 일회성의 서원과 참회와 희사와 정진을 버리고 일체중생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는 회향 발원문을 실천하여 습관을 기릅시다.

욕심이 있어 나누지 못하고, 부끄러운 일이라 함께 하지 못하고, 숨기고 감추며 남몰래 행하였습니다. 좋은 마음으로 불공하여 얻은 것을 좋은 곳에 쓰지도 못하고 탕진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또 얻으려고 불공하였습니다. 청정하고 밝은 마음으로 불공하여 얻어진 것을, 사용할 때도 부끄럽지 않은 당당하게 좋은 곳에 사용하는 회향의 복을 짓기를 바랍니다. 회향으로 베푸는 마음은 당당하고 부끄러움이 없는 마음입니다. 큰마음이며 큰마음으로 베풀었기 때문에 되돌아오는 것도 클 것입니다.

좋은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합시다. 만물의 주인인 사람이 축생처럼 산다면, 사람으로 태어난 보람이 없습니다. 얼마나 더 윤회하여야 깨닫겠습니까? 얼마나 괴로움을 받아야 바꾸겠습니까? 사람으로 태어났고, 만나기 어려운 불법도 만났을 때 바꾸어봅시다. 부모로부터 받은 은혜도, 회향의 갚음으로 돌려드려야겠습니다. 힘들여 모은 재산은 영원해야 합니다. 영원하게 하고자 이웃과 사회에 베풂의 회향을 하는 것입니다. 서원도 일체중생의 이익과 안락을 위한 서원을 세웁시다. 참회도 회향하지 못한 것을 참회합시다.<끝>

瓢蟲

不朽의 古典에서 찾은 智慧와 心灵, 역사적 敎訓과 省察에서 옛글의 향기에 취해 사랑에 빠지게 되었음을 밝히는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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