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詩 - 한문의 바다 ㅣ 古詩感賞 . 태공조어도(太公釣魚圖)

 漢詩 - 한문의 바다 ㅣ 古詩感賞 . 태공조어도(太公釣魚圖)

古詩感賞 . 태공조어도(太公釣魚圖)

朝鮮. 鄭氏

-조선 연산군때의 관리 정인인(鄭麟仁)의 모친.

鶴髮投竿客(학발투간객) 낚시 던지는 백발 나그네.

超然不世翁(초연불세옹) 초연함이 이 세상 노인이 아니로다..

若非西伯獵(약비서백렵) 만일 주 문왕이 찾아내지 않았다면.

長伴往來鴻(장반왕래홍) 오 가는 기러기와 벗하며 지냈겠지.


강태공이 낙싯줄 드리우고 낙시 하는 모습의 그림을보고 읊은시로서, 문왕은 은(銀)의 포악한 주왕(紂王)을 쳐서 주(周)나라를 세운 서백으로, 어느날 사냥을 나갔다가 강태공을 만났는데 첫눈에 강태공의 사람됨을 알아보고 높이 등용하였다.


그 당시 강태공의 나이 팔십 세였다. 강태공은 문왕과 무왕을 도와 주나라를 창건하는데 큰 공을 세워 무왕은 중국의 천자가 되고, 강태공은 주나라 창건 후 산동 반도 지방을 봉지로 받아 제(齊)나라의 시조가 되었다.

정인인은 조선 초기 문신으로 1498년 종부시주부로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홍문관 전한을 거쳐 1503년 당상관이 되면서 제주목사(濟州牧使)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 때 앞서 홍문관·사헌부 재직 시 왕의 잘못된 정치를 비판한 것과 제주목사의 부임을 기피한 것이 원인이 되어 참수되었다./

강태공 (姜太公)
글 교무부 ▲ 조어대에서 낚시하는 강태공. 후세 사람들이 멋지게 그렸다.(중국 섬서성陝西省주릉周陵) 상제께서 “강 태공(姜太公)이 십년의 경영으로 낚시 三천 六백개를 버렸으니 이것이 어찌 한갖 주(周)나라를 흥하게 하고 제나라 제후를 얻으려 할 뿐이랴. 멀리 후세에 전하려함이니라. 나는 이제 칠십 이둔으로써 화둔을 트니 나는 곧 삼이화(三火)니라”고 말씀하셨도다.(예시 20절) 강태공은 3,000년 전의 인물로 중국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역사적 인물 중 한 명이다. 그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많이 남아있지 않지만 『사기(史記)』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에서 보면 원래 동해(東海)01 근처 사람으로, 그의 선조가 우(禹) 임금 시절에 치수사업을 도와 그 공로로 여(呂) 땅을 받아서 제후가 되었다고 한다. 강태공은 그 후손으로 원래 성은 강씨(姜氏)이고 이름이 상(尙)인데, 봉해진 지역을 성(姓)으로 해서 ‘여상’이라고도 한다. 위수(渭水)에서 주문왕(周文王)과의 만남으로도 유명한 강태공은 상제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낚시 3천 6백 개를 버려가며 문왕을 기다렸다. 여기서 잠깐, 요즘 시대에 낚시 3천 6백 개를 버린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켜켜이 쌓여있을 낚싯대를 보고 진작에 누군가가 환경보호단체에 신고하고도 남을 일이다. 다행히 강태공이 살았던 시대의 낚싯대는 친환경적인 나뭇가지였을 테니 ‘위수가 멀쩡 하려나…’하는 걱정은 일단 접어두어도 좋을 것 같다. 여하튼 이를 빗대어 중국에는 ‘태공조어 이수삼촌(太公釣魚 離水三寸)’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태공의 낚시 바늘이 수면에서 세치가 떨어져 있었다는 뜻이다(강태공이 낚시하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중국인들이 흔히 인용하여 사용한다). 즉, 강태공은 자신의 뜻을 알아 줄 현자가 나타나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도술을 닦으며 문왕을 기다렸고 마침내 부국강병술02을 천하에 내어 놓아 많은 사람들이 대업을 이룰 수 있도록 했다. 문왕과 만나기 전까지 강태공이 어떻게 살았는가에 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고 다만 여러 가지 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그 중 한 가지를 살펴보면 은(殷)나라 주왕(紂王) 때에 이르러 집안이 몰락한 강태공은 천문, 지리, 병학 등의 온갖 학문에 능통한 희대의 천재였다. 그러나 그의 견문과 학식 그리고 웅지(雄志)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오로지 책만 읽으며 현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강태공이 집안 살림에 도통 관심이 없어 그 책임을 부인 마씨(馬氏)가 모두 떠맡게 되자 그녀는 찢어지게 가난한 살림 속에서 매일매일 남편을 닦달하면서 근근이 살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강태공은 여느 때처럼 책에 파묻혀 있었다. 그래서 비가 오거든 마당에 널어놓은 갱피(곡식의 한 종류)를 꼭 거두라고 신신당부하던 아내 마씨의 말을 까맣게 잊은 채 소나기에 갱피를 모두 쓸려 보내고 말았다. 이에 진저리가 난 아내는 그 길로 이혼을 선언하고 집을 나갔다. 하지만 강태공은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될 것을…”이라고 말할 뿐이었다. 혼자서 살림까지 책임져야 했던 강태공은 50세가 넘도록 여관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힘들게 살았고, 그 후엔 조가(朝歌, 당시 은나라의 도읍)에서 70세가 넘을 때까지 백정 일을 했는데 도마 위에 놓은 고기가 썩을 때까지 그를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 후 위수가로 옮겨 낚시를 시작했고03 오랜 세월 끝에 문왕과 만나게 되었다. 출세한 강태공이 어느 마을을 지나는데 가난한 남자와 재혼해 여전히 들판에서 갱피를 훑고 있던 마씨 부인과 만났다. 마씨는 지난날을 생각해서 자신을 다시 아내로 받아 달라고 사정했지만 “한번 엎지른 물은 다시 그릇에 담을 수 없고, 한번 떠난 아내는 돌아올 수 없는 법이다.”라고 말하며 강태공은 마씨 부인의 말을 거절했다. 엎지른 물은 다시 그릇에 담을 수 없다는 말(覆水不返盆)이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중국의 정세를 살펴보면 은나라의 마지막 왕이었던 주왕(紂王)이 달기(己)의 치마폭에 쌓여 폭정을 일삼자 민심이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이와 반대로 덕망이 있었던 문왕은 자신을 도와 천하를 다스릴 인재를 찾고 있었다. 어느 날 문왕이 사냥을 나가기 전 사관 편(編)에게 점을 보게 했는데 편이 말하기를 “위수에서 사냥을 하면 장차 큰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용도 이무기도 아니고, 호랑이도 곰도 아닙니다. 장차 패왕을 보필할 스승이며 그 공이 3대(代)에까지 미칠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문왕은 3일 동안 목욕재계를 한 후 위수로 사냥을 떠났고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보계현(寶鷄縣) 남쪽, 위수 상류에 있는 반계(磻溪)에서 강태공과 극적으로 만났다. 비록 낡은 옷의 초라한 늙은이가 낚시를 하고 있었지만 문왕은 한 눈에 그가 비범한 사람임을 알아보았다. 강태공이 70여 년 세월 동안 그토록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문왕이 조심스레 다가가 말을 걸었다. “낚시를 즐겨하시나 봅니다.” “군자는 뜻이 이루어지기를 즐거워 하지만 소인은 결과가 이익을 남기 기를 바랍니다. 제가 낚시를 하는 것도 그와 같습니다.” 문왕과 강태공은 계속해서 천하를 다스리는 법과 병법에 관해서 서로의 생각을 밝혔는데 이는 『육도(六韜)』에 자세히 나와 있다. 『육도』는 후대에 정리된 병법서로 강태공이 문왕을 도와 여러 나라를 정벌해 나갈 때 썼던 치세 철학과 계책, 용병술을 정리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 그 내용이 현대의 정치, 경영, 윤리에 적용해도 손색이 없어 이를 통해 강태공의 뛰어난 지략과 시공을 초월하는 치세(治世)의 대도(大道)를 알 수 있다. 그후 강태공을 수레에 태우고 주나라로 함께 돌아온 문왕은 그를 국사(國師)로 임명했고, 강태공의 눈부신 활약으로 천하의 2/3가 주나라에 귀순하면서 문왕은 차차 은나라를 정벌할 준비를 해나갔다. 그러나 곧 문왕이 죽었고 그의 아들 발(發)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무왕(武王)이었다. ▲ 춘추전국시대 전도( 『평전 열국지』표지, 김영사) 무왕 역시 강태공을 국사로 삼고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 동쪽 정벌을 해 나갔는데 이때 은나라를 버리고 주나라로 귀순한 제후가 무려 800명이나 되었다. 마침내 무왕11년 2월 갑자일(甲子日)에 목야(牧野)에서 출정선언을 하고 무왕이 은나라를 쳤는데, 이미 주왕의 악정에 지칠 대로 지쳤던 군사들은 무기를 버리고 앞 다투어 무왕에게 투항하는가 하면 창을 거꾸로 들고 오히려 무왕에게 길을 내주며 함께 주왕에게 쳐들어갔다. 결국 주왕은 보석이 박힌 옷을 입고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내려 자살했고 이로써 600년 간의 은나라는 막을 내렸다. 이후 주왕조(周王朝)가 건국되었고 무왕은 혁혁한 공을 세운 강태공을 제(齊)나라 영구(營丘,현 산동성 치박시 동북쪽)에 봉했다. 자신의 봉지인 영구에 도착한 강태공은 그 지역의 풍습을 유지하면서 의례를 간소화했고, 상공업을 장려하여 나라를 크게 부흥시켰다. 이를 본 많은 제후들이 제나라로 귀순하였다. 무왕이 죽자 왕위에 오른 어린 성왕(成王)은 강태공에게 주위의 제후를 징벌할 막강한 권한을 주었으며 강태공은 160여 세까지 제나라를 다스렸다.

01 대략 지금의 강소(江蘇), 산동(山東) 바닷가 일대를 말한다.
02 예시 21절, 예시 22절.
03『사기』「제태공세가」에서는 강태공의 나이가 72세였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위의 글은 여러 설 중 하나이기 때문에 시기가 정확하지 않음을 밝혀둔다.

강상(姜尙)
강상(姜尙)은 기원전 1211년(은나라 경정(庚丁) 8년)에 출생하여 기원전 1072년(주강왕 6년)에까지 나이가 139세에 달했다. 또다른 기록에서 강상은 기원전 1140년 9월 12일(음력 8월 3일)에 태어났다고 한다. 기원전 11세기 상나라를 멸망시킨 인물 중 한 명으로 염제 신농씨(炎帝 神農氏)의 후손이다.즉 동이족의 후예이며 동해가 고향이다. 동해는 동해상으로도 불린다. 성(姓)은 강(姜), 씨(氏)는 여(呂), 이름은 상(尙), 자는 자아(子牙)이며, 호는 비웅(飛熊)이다. 주 문왕의 선조 고공단보(태공)가 꿈에서라도 바라던 인물이 비로소 나타났다 하여 태공망이라고도 불렸다 강태공의 본관은 천수 강씨(天水姜氏)이며, 염제 신농씨의 후손이다. 강태공은 주나라 문왕,무왕을 도와 주나라를 건국한 일등공신이고 공을 인정받아 산둥 지역을 분봉받고 제나라(齊國)를 건국하였다. 강태공의 자손들(강급, 강소백 등)이 대대로 제나라를 이끌어왔으며, 이 시기에 강(姜), 고(高), 노(盧), 여(呂), 구(丘,邱), 정(丁), 최(崔), 시(柴), 허(許), 사(謝), 하(賀), 경(慶), 장(章), 제(齊), 신(申), 악(岳), 기(紀), 상(尙), 두(钭), 강(强)씨 등 총 102개의 수많은 성씨가 강태공의 자손으로부터 갈라져나갔다. 강태공 사당에는 해마다(매년 9월 12일 산동성/제나라 문화축제) 강태공의 후손과 강씨에서 분파된 성씨가 대거 참례를 온다. 현재 강태공의 후손은 분성 성씨 외에 한국의 진주 강씨와 천수 강씨가 있다. 한국의 강태공(姜太公)의 후손 8개 성씨로는 진주강씨(姜氏), 노씨(盧氏/교하노씨 등), 구씨(丘氏/평해구씨), 여씨(呂氏/함양여씨 및 성산여씨), 최씨(崔氏/충주최씨 및 전주최씨 대다수), 정씨(丁氏/압해정씨 및 나주정씨), 시씨(柴氏/태인시씨), 장씨(章氏/거창장씨)가 있다.

생애 강상은 염제(炎帝) 신농(神農)의 51세손이다. 주나라 문왕, 무왕, 성왕(成王), 강왕(康王) 4대에 걸쳐 태사(太師)를 지냈으며, 춘추전국 시기의 제(齊)나라의 창시자요, 딸은 주 무왕의 왕후이다. 때는 기원전 1046년 2월 겨울, 상나라 주왕의 흉폭한 정치가 계속되어 천하가 비탄에 젖어 있을 시 홀연히 나타나 주 문왕의 스승이 되었고 문왕 사후 문왕의 둘째 아들인 무왕을 보필하여 4만 5천의 군사로 72만의 상군을 대파하는 기적적인 전쟁을 일구어낸 동이지사(東夷之士)이며 기인(奇人)이다. 이 전쟁을 목야 전쟁(牧野戰爭)이라 하며, 목야 전쟁이 주는 의의는 적은 수로 많은 적을 섬멸한 기적의 전쟁이요, 아무리 불리하더라도 정의(正義)는 반드시 필승(必勝)한다는 정법을 확립시킨 정의필승의 전쟁이기도 하다. 이후 제나라의 초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제나라는 32대 근 800여 년을 존속하였다. 강태공은 주나라 문왕, 무왕의 스승이자 장인이며 천하의 스승국의 위치로 군림하여 제나라의 임금(제 태공)이 되었다. 제나라 2대 군주의 지위를 큰아들 강급(姜及)에게 물려주었고, 강급은 제 정공(齊 丁公)이라고 불렸다. 강태공을 이어 제나라가 가장 흥한 시기는 제나라 15대 임금인 제 환공 강소백(姜小白) 시기로 강소백은 춘추시대 첫번째 패왕(覇王)이 되어 강태공의 얼을 이었다. 제나라 최전성기에는 사방 5000리를 이룩한 대국으로 성장하기도 하였다. 강태공이 남긴 유명한 명언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복수불반분”(한 번 엎질러진 물은 다시 주워담을 수 없다)이다. 강태공의 전 부인 마씨(馬氏)는 강태공이 주문왕을 만나기 전 생활고에 견디다 못해 강태공 곁을 떠났는데, 이후 강태공이 제나라 왕이 되었을 때 다시 돌아와서 아내로 맞아주길 요청했다. 이에 강태공은 하인더러 물을 떠오라고 한 후 그 물을 땅에 엎었다. 그리고 돌아온 아내에게 지금 바닥의 그 물을 다시 항아리에 담는다면 아내로 맞이 해주겠다고 했다. 즉, 한 번 떠난 마음은 두 번 다시 되돌리기 어렵다는 유명한 명언을 남긴 것이다. 강태공은 기원전 1072년에 신선계에 들었으며, 그때 연세는 139세였다. 의관을 서주(西周) 호경(鎬京)에다 안장하였다. 제나라 사람들은 강태공의 덕을 생각하여 제나라에다 강태공 의관총(衣冠塚)을 세웠다. 강태공은 주역의 확립자이며, 강태공이 저술한 육도삼략(六韜三略)이 현재에도 전해져 오고 있다. 육도삼략은 고대 병서의 최고봉인 무경칠서(武經七書) 중의 둘을 차지한다. 후대인 손무의 손자병법도 강태공의 육도삼략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후일 대륙을 정복한 청나라 황실에서조차 강태공을 무성왕(武成王)으로 칭하여 천하통일을 이룬 군주로 인정하였다.

봉신연의 중국 소설 《봉신연의》에서는 본명은 강자아이며, 곤륜산의 도사가 되어 신선들의 살겁을 깨기 위한 봉신을 주도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강태공의 이야기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의 대명사이자 내 성씨의 시조인 강태공(姜太公)에 대해 알아보자. 그는 중국의 상고시대인 은주혁명기(기원전 11세기 경)의 정치가이자 전략가. 성은 강(姜)이고, 씨는 여(呂), 이름은 상(尙). 자는 자아(子牙), 호는 비웅(飛熊)이다. 그 외에도 강자아, 여상, 여망 그리고 태공망(太公望)으로도 부른다. 태공망이란 '주 문왕의 아버지 태공(太公)이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望) 사람'이란 뜻이다. 기록에 따르면 문왕을 따랐을 때 이미 70대의 노인이었으나, 주나라가 성립되고도 한참을 더 살았다. 이 강태공의 장수에 대하여 나온 말이 궁팔십달팔십(窮八十達八十). 태어나서 여든 살이 되도록 궁하게 살았으나, 나이 팔십에 훗날 주 문왕이 되는 서백(西伯) 창(昌)을 만나 등용되면서 주나라를 세우고 영화롭게 80년을 더 살았다는 것. 저서로는 병법서인 육도와 삼략이 있다고 한다. 다 아는 대로 낚시와 부인에 관한 두 일화가 가장 유명하다. 그는 공부를 대단히 좋아했던 모양으로 70세까지 관직에는 나가지 않고 공부만 했다고 한다. 부인인 마씨는 계속 뒷바라지하다 견디지 못하고 가출하였고 식량이 떨어진 그는 위수가에서 낚시를 했다. 이 때 휘어있지 않은 바늘로 낚시를 하고 있었다고 하여 강태공이 '물고기를 낚은 것이 아니라 세월을 낚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지만, 실제로는 곧은 낚싯바늘도 낚시용 도구로 사용했었다. 또는 낚시를 하긴 하였는데, 그 낚싯대가 수면에서 세치는 높은 곳에 있었다고 해서 나온 말이 '태공조어 이수삼촌(太公釣魚 離水三寸)'. 어쨌든 백수로 지내며 낚시를 하던 중 그 근처에서 사냥을 하던 서백 창의 눈에 뜨여 중용된다. 이후 문왕과 아들 무왕을 보좌하여 은나라를 무너뜨리는 역성혁명을 달성했다. 이런 공으로 개선하는 그의 앞에 과거 도망갔던 그의 아내가 폭삭 늙어서 돌아와 받아달라고 엎드리자 그는 그릇에 담긴 물을 바닥에 쏟은 후 "엎어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다(복수불반분, 覆水不反盆)"라고 하며 내쳤다는데 평생 백수 옆을 지켜준 은혜를 모르는 행동 아닌가? 그는 인의와 덕이 아닌 극형으로 나라를 다스렸기 때문에 인의 중심의 이상적인 정치를 중시하는 유가 계열이 득세하는 후세엔 공자 등에게 밀리긴 하지만, 유가, 법가, 도가, 병가 등 다수 학파들이 강태공을 선조로 모시는 관계로 백가종사(百家宗師)라 불린다. 강씨에 대한 태백일사의 내용에 따르면 염제신농(炎帝神農)씨의 성으로 현전하는 최고(最古)의 성씨. 신농씨는 삼황오제의 한 분으로 경농과 의학의 시조이며, 태호복희씨와 더불어 인류문화의 개조(開祖)이다. 동이족인 소전(少典)씨가 8세 안부련(安夫連)환웅의 명으로 중국 섬서성 강수(姜水)에 가서 살았으므로 성을 강(姜)씨라 했다. 물론 워낙 고대의 일이고 또 태백일사의 위서설도 있어 이 이야기의 진실은 확인할 수 없지만. 어쨌든 강태공은 한국과 중국의 강씨와 여씨의 시조로 여겨진다. 우리나라에는 진주 강씨와 함양 여씨, 성산 여씨가 있다.

천하를 얻은 강태공의 지혜
세월을 낚으며 때를 기다린 강태공
낚시에 숨겨진 심오한 이치
뛰어난 모략을 가진 강태공과 인재를 등용한 문왕

주周나라 문왕(기원전 1152~1056년)은 성이 희姬요, 이름은 창昌이다. 둘째 아들 희발姬發이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주나라를 세운 군주가 되고 난 뒤, 아버지를 문왕文王으로 추숭하였다.* (추숭追崇 : 왕이 되지 못하고 죽은 왕족이나 왕의 조상에게 사후에 왕의 지위를 주는 것. 나라를 새로 세운 경우, 왕은 위로 4대를 왕으로 추존하는 것이 일반적인 예법이었다.) 일명 ‘서백창西伯昌’이라고도 불리는 문왕은 중국 역사상 첫 번째 명군明君으로 평가받는다. 공자는 춘추시대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주대周代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공자가 말한 ‘주대’가 바로 ‘주 문왕의 시대’이다. 주 문왕은 노인과 어린아이를 중히 여겼고 현자賢者를 정중히 대접하는 등 어진 정치를 펼쳤다. 그러다 보니 인재들이 많이 모여들었으며, 이웃 제후들 간에 분쟁이 생기면 그에게 와서 판결을 구하곤 했다. 세월을 낚으며 때를 기다린 강태공 ‘서백창’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주나라 건국의 기초를 만든 강태공이다. 서백창과 강태공이 처음 만날 당시, 은의 마지막 임금 주紂는 애첩에게 빠져 나라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고 간신의 말만 들으며 폭정을 일삼고 있었다. 어느 날 서백창이 사냥을 나가려고 하자, 사관이 귀갑龜甲으로 점을 쳐보았다. “점괘가 어떻게 나왔는가?” 사관이 대답했다. “저의 조상인 사관 주가 우임금을 위하여 점을 쳐서 명재상인 고요를 얻었다고 합니다. 이 점괘는 그에 견줄 만합니다. 이번 사냥에서 얻게 될 것은 용도 곰도 호랑이도 아닌, 패왕霸王(춘추전국 시대에 황제라는 뜻으로 쓰인 호칭)을 보필할 신하입니다. 장차 임금에 버금가는 위치에 오르거나 제후가 될 그런 인재이지요. 이는 하늘에서 폐하께 스승을 보내시어 국사를 보좌토록 하신 것이니, 이 나라를 3대에 걸쳐 돕게 될 것입니다.” 훌륭한 인재를 얻게 될 것이라는 사관의 말에 서백창은 내심 기뻤다. 그는 사흘 동안 목욕재계를 한 뒤 사냥용 수레와 말을 타고 위수의 북쪽으로 사냥을 나갔다. 그날따라 잡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발길을 돌리려던 차에, 나이 일흔이 넘은 한 노인이 오고가는 사람을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 강가에 앉아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것이 보였다. 노인을 발견한 순간, 서백창은 첫눈에 그가 비범한 사람인 것을 직감했다. 이 노인이 바로 강태공이었는데, 그는 서백창을 만나기까지 10년 동안 위수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주나라의 기초를 닦은 명군으로, 후세 유가로부터 성천자聖天子로 숭앙 받은 문왕.(사진 위키피디아) 하지만 강태공은 낚시를 하고 있던 것이 아니라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낚시 바늘은 굽은 것이 아니라 일자였다고 한다. 서백창이 가까이 가서 물었다. “낚시를 즐기시는가 보군요.” 노인이 대답했다. “예, 나는 물고기를 낚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월을 낚고 있습니다. 먹이로 물고기를 낚는 것은 녹봉을 주어 인재를 취하는 것과 같습니다. 군자는 자신의 이상이 실현됨을 즐거워하고, 소인은 눈앞의 일이 이루어짐을 기뻐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제가 낚시질하는 것은 그와 매우 비슷합니다.” “그와 비슷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근원이 깊어야 강물이 흐르고, 물이 흘러야 물고기가 생기지요. 뿌리가 깊어야 나무가 잘 자라며, 나무가 우거져야 열매가 잘 열리지요. 낚싯줄이 가늘고 먹이가 작으면 잔고기가 이를 먹고, 낚싯 줄이 약간 굵고 먹이가 향기로우면 중치의 고기가 이를 먹으며, 낚싯줄이 굵고 먹이가 풍성하면 큰 고기가 이를 먹습니다. 좋은 먹이를 주면 크고 살찐 고기가 잡히는 것과 같이, 녹봉祿俸으로 천하의 훌륭한 인재들을 불러 모아 임금에게 복종시킬 수 있습니다. 동양의 수많은 화가들이 그린 강태공의 이미지는 주로 긴 낚시대를 드리운 노옹 老翁의 모습이다.(사진 대한은퇴자협회) 낚시에는 세 가지의 심오한 이치가 숨어 있습니다. 첫째는 미끼로 고기를 낚는 것인데, 이는 녹祿을 주어 필요한 인재를 취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두 번째는 좋은 미끼가 큰 고기를 낚듯이, 인재에게 녹을 많이 줘서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는 충성스런 신하가 나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물고기는 크기와 종류에 따라 요리법이 다른데, 이는 인재의 성품과 됨됨이에 따라 벼슬을 달리 맡기는 이치가 담겨 있습니다. 겉이 아무리 번지르르해도 군주가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반드시 모였다가도 흩어지게 마련입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군주가 덕이 있으면 반드시 멀리까지 비칠 것입니다. 성인聖人의 덕이란 보통 사람은 가늠하여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고 그윽한 것이라서 사람들의 마음을 저절로 모여들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여든 인재를 소홀히 대하면 곧 떠나버릴 겁니다.” “어떻게 하면 천하 만백성의 민심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천하는 군주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라 천하 만민의 천하입니다. 천하의 이익을 백성들과 함께 나누려는 마음을 가진 군주는 천하를 얻을 수 있고, 이와 반대로 천하의 이익을 독점하려는 자는 반드시 천하를 잃게 됩니다. 하늘에는 춘하추동 네 계절이 있어 음과 양이 순환하고, 그로 말미암아 대지에는 생산이 이루어져 재물과 보화가 있게 됩니다. 이 하늘의 시時와 땅의 재財를 백성들과 함께 누리는 것을 인仁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인仁이 있는 곳에 모이게 마련인지라 어진 사람이 정치를 하면 그 덕이 저절로 나타나 어렵지 않게 천하의 민심도 얻을 것입니다. 죽을 처지에 놓인 사람을 건져주고, 재난을 당한 사람을 도와주며, 위급한 사람을 구제해주는 것은 덕德입니다. 천하 인심은 덕이 있는 곳에 돌아가는 것입니다. 뭇사람들과 시름을 같이 하고, 뭇 백성들과 즐거움을 같이 하며,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같이 좋아하고, 그들이 싫어하는 것을 함께 꺼리면 이것은 의義입니다. 천하의 인심은 의가 있는 곳으로 쏠리게 됩니다. 본래 사람은 죽는 것을 싫어하고 살기를 좋아하며, 덕을 좋아하고 이득을 따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살리며 그들에게 이익을 돌려주는 데 힘쓰는 것을 도道라고 합니다. 천하의 인심은 도가 있는 곳으로 귀의하는 것입니다.” 노인의 말을 다 듣고 난 서백창은 기뻐하며 두 번 절하고 말하였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조부께서 ‘한 성인聖人이 나타나 주나라를 융성하게 이끌어 갈 것이다. 주나라는 이로 인해 흥할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실로 이를 두고 하신 말씀인 것 같습니다. 노인이야말로 그 성인임에 틀림없습니다. 제가 어찌 하늘이 내리신 명령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삼가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라고 하며 노인을 수레에 태워 궁으로 돌아와 스승으로 모셨다.

위대한 인물이 위대한 역사를 만들고 문왕 서백창이 위수에서 만난 이 노인은 문왕의 조부인 태공이 꿈에서 기다리던 인물이라 하여 ‘태공망太公望’이라고 했으며, 그의 성이 강씨였기에 후세에 ‘강태공’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때부터 강태공은 문왕의 스승이 되었고, 정승을 겸하며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된다. 강태공은 탁월한 지혜로 문왕에게 뛰어난 모략과 부국강병책을 제시하여 은나라 제후들이 주나라를 따르게 하고, 기원전 11세기 주나라 건국에 절대적 공을 세운다. 그러나 문왕이 그 뜻을 펴보지 못한 채 전쟁 중에 죽자 둘째 아들 희발이 왕위를 계승하여 무왕에 올랐고, 강태공을 역시 스승으로 모시게 된다. 강태공은 정치를 개선하고 풍속을 존중하며 예법을 간소화하는 등 백성을 위하여 올바른 정치를 펴나 갔으며 어업 외에 제염업 등 상공업을 진작하고 수산을 장려함으로써 나라를 부강하게 하였다. 또한 강태공은 병법과 군사의 시조로 볼 만하다. 역대 황제들은 강태공을 무성武聖으로 봉하였고, 당나라 때에는 무성왕武聖王으로, 송나라 때에는 조열무성왕照烈 武聖王에 봉했다. 그는 부국강병을 도모할 방법을 알았다. 그것이 바로《육도삼략六韜三略》이라는 책에 집약돼 있다. 이 책은 최초의 병서兵書로서 후대의 전략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후대의 손자, 오자 등 중국의 제가諸家가 만든 병법도《육도삼략》을 기초로 한다. 위대한 인물이 위대한 역사를 만든다는 변치 않는 사실을 강태공의 행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시대에 필요한 강태공과 문왕 생전에 강태공은 아래와 같은 말을 남겼다. “해와 달이 아무리 밝더라도 엎어 놓은 항아리의 밑은 비추지 못하고, 칼날이 아무리 날카롭다 해도 죄 없는 사람은 베지 못하며, 뜻밖의 재앙도 조심하는 집 문안에는 들어오지 못한다.” “현명한 지도자는 다음의 세 가지 조건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눈은 밝아야 하고, 귀는 총명해야 하며, 마음은 지혜로워야 한다. 지혜가 보통 사람과 같으면 국사國師가 아니다. 장수가 지혜롭지 못하면 군대 전체가 의심한다.” “물고기는 물속에 있으면 살고, 물을 벗어나면 죽고 만다. 그러므로 성인과 군자는 언제나 조심하고 두려워하여 자연의 도리를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 그의 말에 비추어 오늘날의 정치인들을 보면 철학도 소신도 없고, 민생이나 나라의 장래를 깊이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얄팍한 처세술과 공명심에 빠져 나라꼴이 어찌 되든 개의치 않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안타깝다. 이 어지러운 시대에 강태공처럼 남다른 통찰력과 혜안을 가진 인재가 나타날 수 있을까? 또한 그 뛰어난 인재를 낚아 백성들을 평안하고 행복하게 해 줄 성인이 나타날 것인가? 강태공도 지혜와 덕이 뛰어났지만, 강태공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었던 문왕의 겸손과 도량, 그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은 무왕의 마인드는 이 시대 지도자들과 경영자들이 본받아야 할 마음가짐이다.

글쓴이 이한규 어릴 때 선생님을 통해 교사의 꿈을 갖게 된 그는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선생님이 되었다. 교사의 길을 걸어온 자신을 일컬어 ‘마음 밭에 농사를 짓는 농사꾼’이라고 한다. 국어교사와 여러 대안학교 교장을 역임했고, 전국대안학교총연합회 서울시 지부장을 맡았다. 현재 여러 매체에 인문학과 교육철학에 관한 글을 계속 기고하고 있다. 국내외 여러 교육기관에서 특강을 하고, 교육 관계자 및 학부모, 학생들과 상담도 하고 있다.

출처 : 데일리투머로우(https://www.dailytw.kr)

瓢蟲

不朽의 古典에서 찾은 智慧와 心灵, 역사적 敎訓과 省察에서 옛글의 향기에 취해 사랑에 빠지게 되었음을 밝히는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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