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객(俠客) 청말10대무술고수(9) 해등법사

 협객(俠客) 청말10대무술고수(9) 해등법사

해등법사(海燈法師. 1902~1989)


본명은 범무병(范無病)으로 사천성 강유현(江由縣)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문학과 무술을 공부하였다. 19세 때 사천대학 문학원에 합격하였으나 집안이 어려워 정부에서 학비를 지원하는 사천성경감전문학교(四川省警監專門學校)에 들어간다. 졸업 후 성도(成都)로 올라가 구직을 할때 산동성의 도사 지함자(知函子)와 소림사의 승려 여봉(汝峰) 등 유명한 무술인들을 만나게 된다. 이것이 인연이되어 무술에 점점 더 빠지게 되어 결국 모든 것을 버리고 오로지 무술에만 전념하기로 결심한다.

1931년 봄 무병은 지인의 소개로 신도현(新都縣) 성(城) 남쪽 6리쯤에 위치한 진정암(鎭靜庵)에 기거하게 된다. 진정암은 보광사(寶光寺)의 말사로 명나라 시기에 건축되었으며 산문과 천왕전, 대웅전, 관음전 등이 있고 주위가 숲속이라 그 환경이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여기서 무술을 수련하며 한편으로는 동화원(東花園)에 기거하면서 글을 읽고 시를 쓰며 공부하였다. 암자에 장기간 머물며 접촉한느 승려들과 불교에 대해 얘기하거나 들으면서 나름대로 불교라는 종교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게되었고 급기야는 출가의 생각이 들기시작했다. 불태(佛泰)선사에게 문도로 드어갈 것을 청하나 불태가 생각하기를 자신이 무병을 가르치기에는 많이 부족하다고 여겨 성도의 소각사(昭覺寺) 주지 지광(智光)에게 무병을 받아줄 것을 청한다. 그러나 소각사는 대찰이라 당시의 규정에 의해 작은 암자출신의 출가인을 받아줄 수가 없었다. 지광과 불태가 상의 끝에 소각사가 아닌 성도의 오악관(五岳館)에서 수계식을 하기로 정하였다. 소각사가 아닌 다른 장소에서 편법으로 무병을 출가시켜 지광의 제자로 삼으려는 고육책이었다.

1937년 늦가을 불태가 예를 진행하며 무병을 출가시켜 지광법사에게 인도하니 지광은 무병에게 해등(海燈) 이라는 법명을 내린다. 그해 겨울 해등이 소각사로 지광을 찾아가 정식으로 수계식을 받으니 본격적인 승려가 된것이다. 이때 호를 상정진승(常精進僧) 이라 했다. 얼마후 해등은 소각사에서 승려들을 대상으로 국어와 무술을 가르쳤다. 그당시 보광사는 소각사와 더불어 사천성에서 유명한 선종(禪宗) 사찰이었는데 특히 관일(貫一) 이라는 방장이 특히 높은 덕망과 깨달음으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불태와 일관은 일관이 방장이 되기 전 보광사의 대표적인 승려로 신망이 두터웠다. 해등의 스승인 지광이나 중국불교협회부회장을 역임한 능해(能海) 모두 일관의 제자이기도 하다. 하여 해등은 출가하기 전이나 그후에도 자주 보광사를 찾아 일관법사로부터 선법(禪法)을 배우고 보광사의 승려들에게 무술을 가르쳤다.

1945년 해등은 전국의 명산대찰을 찾아다니며 권법을 시연하거나 가르쳤다. 1946년 소림사에 들렸을 때 당시 주지인 덕의(德意)의 초청으로 국술(國術. 무술)을 가르친다. 1948년 공산당 정권 수립 후 여러차례의 무술공연이나 시연에 참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고 상해시 체육궁의 무술교관을 지내기도 한다. 그는 비단 무술 뿐만아니라 불교철학, 의학, 문학에 조예가 깊었는데 특히 고전문학에 매우 정통하여서 '소림운수시집(少林雲水詩集)' 이라는 저서를 발간하기도 하였다.

1967년 늦 가을 상해에서 고향인 사천의 강유현으로 낙향해 '본원장사(本愿精舍)' 라는 초막을 짓고 은거생활에 들어간다. 여기서 해등은 무술수련과 시작에 몰두하는 한편 제자들을 받아 무술을 전한다. 1973년 제자 4명을 대동하고 소림사를 다시 방문하는데 그는 자신이 수련한 소림의 무술에 늘 자부심과 깊은 애정을 갖고 있어서 늘상 소림사를 그리워 했다고 한다. 1979년 홍콩의 장성영업공사(長城影業公司)와 성도의 아미전영제편창(峨眉電影制片廠)이 합작으로 대형다큐멘터리 '사천기취록(四川奇趣錄)'을 만들 때 해등법사도 보광사에서 그의 절기인 '이지선(二指禪. 손가락 2개로 물구나무를 서 버티는 것)', '동자공(童子孔)'을 선보인다. 당시 이모습을 지켜보던 승려들과 청소년들이 열광하며 그에게 무술배우기를 청하니 해등은 굳이 마다하지않고 그들에게 무술을 가르친다.

1982년 해등은 국내외의 초빙을 모드 거절하고 숭산 소림사로 돌아가 쇠퇴한 소림무술의 명맥을 계승하고 이를 진흥시키려는 웅대한 계획하에 소림무술 재건에 나서니 사천의 제자들이 그를 쫒아 소림사로 몰려오게 된다. 승려의 신분이지만 나라와 소림를 걱정하는 그의 우국충정을 그리고자 중앙신문전영제작창(中央新聞電影制作廠)에서 그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소림해등법사(少林海燈法師)'를 제작하니 1984년 연말에 완성된다. 아울러 이 시기에 불교승려로서의 삶과 생활을 그린 드라마 불문생애(佛門生涯)를 만들어 지기도 하였다.

1989년 입적하니 향년 87세였다.

 

후기-해등의 과욕

해등에 대해서는 그 사후 논란이 많이 일어났다. 그것은 우선 그가 소림의 무술을 했고 소림사에서 후배 승려들에게 무술을 가르쳤지만 정작 그는 소림사 출신도 아니고 소림사의 방장(方丈. 한 절의 최고 승려)은 더더욱 아니었다. 하지만 해외나 타 지역에 그에 대한 소개가 소림사 출신이라거나 또 소림사의 방장이라는 식으로 나간것이 사실이다.

그의 무술실력에 대한 의문이다. 그가 한 신문과 인터뷰를 하면서 보여준 시범이 화근이 되었는데 이는 좀 설명이 필요한 부분으로 그 진의가 잘못 전달되고 받아들여진데 기인한다고 하겠다. 그럼 이 두가지 문제를 하나씩 살펴보자.

첫째, 그와 소림사와의 관계에 대해;

80년대 말 숭산의 소림사가 위치한 중국 하남성 등봉현(登峰縣) 공산당선전부 소속의 견병호(甄炳浩)가 투서를 한다. 그 내용은 하남일보(河南日報)와 정주만보(鄭州晩報)가 싣으려는 해등관련기사(선전성 기사)를 싣지못하도록 요구한 것이다. 즉, 해등이 소림사의 방장으로 소개되는 내용의 기사를 견병호가 사실 외곡이라며 보이콧을 선언하고 나선 것인데 그는 한발 더 나아가 중국불교협회(회장 趙補初)에도 한수영(韓樹英) 이라는 사람을 통해 진정서를 낸다. 이에 대한 잡변내용은 요약하면 이렇다. "해등법사는 중국불교협회의 이사이며 무공에 능한지라 오랜동안 신문이나 영화 등을 통해 보도되고 그에 관한 프로그램들이 제작되었다. 매체들의 보도 내용이 그 정도를 넘어선 것이 분명있었으며 그 중에는 소림사의 방장으로 소개된 문제를 포함해 실수라고 보기 어려운 문제들도 역시 있었다. 그러나 그 일들은 이미 과거의 일이고 만일 관련한 내용을 본 협회에 문의해 오면 우리가 제대로된 설명을 응당 제공할 것이다."
해등이 의도했던 의도하지않았던 그와 소림사의 연관성은 알려진 것이 상당수 틀리다는 것을 협회가 인정한 것이며 그 책임은 해등을 보도하는 매체들의 과열경쟁도 있었음을 밝힌 것이다.

 

둘째, 그의 무술이 과장되었다는 것에 대해;

1978년 8월 7일 사천일보 기자 경용향은 해등법사와의 인터뷰 기사를 내고 그가 보인 무술시범 사진을 함께 개재한다. 그런데 이 사진이 문제의 발단이 된다. '이지선(二指禪. 손가락 2개로 물구나무를 서 버티는 것)을 70이 넘은 고령에 선보였으니 세상사람들은 당연히 놀랄수밖에 없고 이것이 게기가되어 그에 대한 관심이 뜨겁게 불기 시작했다. 그러다 10년이 지난 1988년 10월 경용향기자는 당시의 보도 내용이 과장되었고 사실을 왜곡한 부분이 있다는 기사를 냈고 하남일보의 주필인 하선경은 아예 해등이 사기꾼 이라는 식의 보도를 내다. 1988년 12우러 해등이 입적하고난 후 그 제자인 법응련, 엄신 등이 경용향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면서 문제는 다시 확대된다.

그러면 해등이 보인 무술을 허위인가?  해등은 1942년 사천성 무술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는데 이 대회는 대결중 목숨을 잃어도 상관없다는 서약서를 쓰고 치루는 대회였다. 1963년에는 전국무술대회에서 60세의 나이로 이지선을 선보였다. 이처럼 공개된 장소에서 선보인 그의 무술실력이 허위라거나 보잘것 없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적다. 사천일보의 보도내용은 그가 70이 넘은 고령이라는 나이를 미처 고려하지않은 경솔한 판단이다. 취재할 당시인 1978년은 해등이 이미 76세의 고령이다. 그 나이에 두 손가락만으로 물구나무를 선다는 것은 신선이 아니고는 어불성설이다. 주장이 서로 엇가리는 것은 발을 천장에 묶고 매달린 상태에서 물구나무 포즈를 취했는지 아니면 매달린 상태가 아닌 단지 넘어지지않기 위해서 양발을 붙들어 매되 그 체중은 두 손가락에 고스란히 받고 포즈를 취했는지의 여부이다.

결국 법정다툼 끝에 해등의 제자들이 승소는 햇지만 이미 그 법정다툼 과정에서 해등은 많은 타격을 받았고 아울러 위 첫번째 문제마저 불거지면서 그에 대한 평가는 야박해진다.

 

해등 자신의 과욕도 있지만 소림사 출신이 아닌 승려가 소림무술로 이름을 날리며 더욱이 소림사를 사칭하는 것도 소림사로서는 아니꼬운 일일것이고 센세이션에 굶주린 배고픈 늑대(대중)들의 사악함도 분명 이 추악한 드라마의 흥행에 일조를 하였으리라. 만일 해등이 그저 조용히 제자나 기르고 대중앞에 나서는 것을 자제했더라면 그의 전설은 아직도 유효했을 것이다.  

瓢蟲

不朽의 古典에서 찾은 智慧와 心灵, 역사적 敎訓과 省察에서 옛글의 향기에 취해 사랑에 빠지게 되었음을 밝히는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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