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객(俠客) 청말10대무술고수(8) 한모협

 협객(俠客) 청말10대무술고수(8) 한모협

한모협(韓慕俠. 1877~1947).


본면은 한금용(韓金鏞)으로 같은 고향의 무술고수인 곽원갑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던 당대 최고의 무술고수 중의 한 사람이다. 1877년 1월 12일 천진 서청구(西靑區) 왕은장향(王隱庄鄕) 대박촌(大泊村)의 한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원래 무술과는 거리가 먼 무지랭이 농투성이어서 조부 한양모(韓良模)나 부친 한장은(韓長恩)은 해가 뜨면 들에 나가고 해가지면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전형적인 농군이었다.  

 

12세 때 부모를 따라 천진시내로 들어가 땔나무를 팔며 생계를 꾸려가던 중 우연히 장금문(張文錦) 집안의 경호원으로 성이 주(周)씨인 사람을 만나 3년 동안 무예를 배우게 된다. 그후 한모협은 천진의 중화무사회(中華武士會)에서 무술을 지도하던 장점규(張占奎. 또는 張占魁라고도 함)와 이존의(李存義)를 스승으로 무시고 팔괘장(八卦掌), 형의권(形意拳)을 배운다. 장점규는 동해천으로부터 팔괘장을 배웠고 유기란(柳奇蘭. 1819~1889)으로부터 형의권을 배웠다. 이존의(李存義)와는 결의형제 지간이다.

20세까지 무술을 배웠지만 여전히 부족하다고 느껴 남방의 각지를 돌아다니며 스승을 찾아다녔다. 그가 이시기 스승으로 모신자는 이광정(李廣亭), 송약제(宋約齋), 차의재(車毅齋), 응천문(應天文) 등 9명에 이른다. 이렇게 수련을 마치고 천진으로 돌아온 한모협은 팔괘장과 형의권의 장점을 취하고 여기에 남방에서 배운 무술을 결합한 남북 양파(兩派) 무술의 합체(合體)인 자신만의 무술을 만들어 낸다.   

그 자신감으로 1913년 천진의 주위로(宙緯路) 보흥리(寶興里)의 한 사합원(四合院) 가옥에 무술관을 열어 무료로 무술을 가르쳤다. 당시 여기서 무술을 배운 학생중에는 후일 중국총리가 된 주은래(周恩來)를 비롯해 우문지(于文志), 양경요(梁鏡堯), 하수신(何樹新), 곽윤동(郭潤東)이 있었으며 여학생으로는 북양여자사범학교의 유청양(劉淸揚), 직예여자사범학교의 교영국(僑咏菊), 교영하(僑咏荷) 자매가 있었다. 주은래는 무술을 배우러 갈 때 늘 중국식의 기다란 두루마기를 입고 갔는데 두 사람은 나이를 넘어서 깊은 우의를 쌓게 된다. 주은래는 후일 한모협에게 '한구사당(韓九師堂)' 이라는 휘호를 주기도 한다. 1917년 그가 일본으로 간후 한모협에게 무술을 배울 당시 함께 찍은 사진을 스승인 한모협에게 우편으로 붙여주기도 한다. 이를 받아본 한모협은 "상우(翔宇. 주은래의 자)는 어린 나이지만 그 품은 뜻이 높고 깊다 --- 내가 그에게 신체를 단련하는 방법을 가르쳤다면 그는 나에게 사람이 되는 법을 가르쳤다" 고 하며 매우 기뻐하였다.   

 

<▲ 가장 키큰 사람이 한모협이고 좌로부터 6번째가 주은래이다> 

 

이처럼 한모협의 무술관에서 배양된 학생들은 그 면면이 뛰어났지만 그는 보다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애국충정의 방도를 고민해왔다. 그래서 50이 다된 나이에 동북군벌 장학량(張學良)의 초청을 받고 그 16軍에 소속된 1000명의 병사들로 구성된 무술단(武術團. 大刀隊)의 교관이 된다.     

무술단의 병사들에게 한모협은 팔괘도(八卦刀)와 연환창(連環槍)을 응용한 무술을 가르쳤다. 검술에 있어서는 순보감(順步砍), 유보감(拗步砍), 좌우감(左砍)을 가르쳤고 창술에 있어서는 형의권의 오행연환창(連環槍)의 벽(擘), 붕(崩), 찬(鑽), 포(炮), 횡(橫)을 보병이 사용할수 있는 창술(槍術)인 자(刺), 발(拔), 도(挑), 붕(崩), 벽(擘)의 5개 자살동작(刺殺動作)으로 변형하였는데 형의권의 오행원리가 잘 가미된 실전가치가 높은 방법이었다. 이렇게 한모협은 당시 양유청(楊柳靑)에서 무술단에게 전력을 다해 무술지도를 하였지만 무술단은 오래지않아 군량이 제대로 배급되지못해 그만 중단되고 만다. 즉, 공급된 군량이 상층부에서부터 빼돌려 정작 병사들에게 제대로 공급이 않되니 한모협은 자산을 팔아 이를 보충하여보기도 하였지만 결국 무술단은 해체되 송철원(宋哲元)이 지휘하는 29군에 편입되고 만다. 동북을 점령한 일본군이 북경으로 진군을 하는 77사변(노구교 사건)이 벌어지기 전 이 지역을 수비하던 29군 사령관 송철원은 일본군과 자신들이 구비한 무기를 비교한 결과 열세라고 판단해 일종의 백병전을 벌일 결사대를 조직하기로 한다. 즉, 한모협으로부터 무술을 배운 병사들을 각 사단에 배치하여 사단별로 대도대(大刀隊. 敢死隊라고도 하였음)를 조직하여 훈련시킬 것을 명령한다.

송철원 휘하의 사단장 중 장자충(張自忠)이 있었는데 그는 천진시의 시장을 겸하고 있었다. 상부의 명에따라 그도 대도대를 구성하여 천진시내의 중산공원(中山公園)에서 훈련을 시켰다. 이 당시 시내의 모든 칼갈이꾼들을 공원으로 불러모아 대도대가 사용할 칼을 갈게 하였는데 10개 동전을 쌓아놓고 한 칼에 모두 베어야 합격을 하였다고 하니 그 예리함을 능히 짐작할수 있겠다. 그러나 원세개가 일제와 맺은 협약에 의해 중국인은 정식군대를 양성할 수 없었다 그래서 대도대 역시 군복없이 상의는 파란색, 하의는 검은색의 바지를 입어야 했다. 또한 당시 중산공원에서 장자충 휘하의 대도대에게 무술을 가르쳤던 사람은 한모협이라는 목격자의 증언이 있어 그의 애국충정을 능히 가늠할수 있다.    

 

어느날 한모협에게 한 군벌이 무술을 가르쳐 달라고 청하였는데 그 조건은 매월 大洋200元이었으며 단 자신만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화가 치민 한모협은 스스로 손목을 부러뜨려서 접골도 일부러 제대로 맞추지않아 이것을 핑게로 군벌의 제의는 물론 무술교습을 그만두었다. 그후 침구사로 생계를 꾸려나가며 청빈한 생활을 하다가 1947년 사망한다. 60여년의 생애 동안 한모협은 국권을 회복하는데 앞장섰으며 무술인으로서 정의로운 삶을 추구하는 시대의 대협(大俠)으로 큰 귀감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한모협을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같은 천진 출신의 곽원갑이다. 동시대에 천진에서 활약했고 전국을 떨게 했던 무술고수였지만 당시에 비해 후대에서 평가는 늘 곽원갑이 우위에 있던 것이다. 그 이유는 대개 아래와 같은 사정이 제시되곤 한다.

두 사람 서양의 거한들을 거꾸러 뜨리며 일약 전국적인 무술스타로 부각되었지만 그 정도가 달랐다. 곽원갑은 영국의 大力士인 오피언을 시합에서 이겼는데 당시는 1908년으로 의화단의 난으로 촉발된 8개국연합군에 침입이 있은지 불과 8년이 경과한 시점이라 대중의 서양에 대한 반감이 상당한 시기였다. 이에반해 한모협이 러시아의 역사에게 승리한 1918년은 이미 곽원갑 이후 등장한 무술스타가 많았고 또 시국의 관심추는 군벌들간의 혈투였기에 그의 승리가 비록 익세보(益世報)나 순천시보(順天時報)에 대서특필되었으나 곽원갑과 비교해 대중들에게 크게 각인되지 못하였다. 

무술사업면에서도 한모협은 곽원갑에게 뒤처진다.  한모협은 1918년의 러시아 장사와의 대결이후 스승인 장점규가 연 중화무사회에서 무술을 가르치지만 그후 천진을 떠나 얼마간 소식이 끊어진다. 그러나 곽원갑은 애국주의자 진공철(陳公哲)과 함께 상해에 '정무체육회'를 만들어 신체를 단련한 후 애국의식을 함양하자는 뚜렷한 의지를 표방하며 수련생들을 모집하며 사회적으로 큰 호응을 얻게 된다. 이러한 정신은 곽원갑이 죽은 후에도 그 후학들에게 전승되어 특히 홍콩이나 동남아에서 크게 번성하는데 그 이름 '정무(精武)'는 중국무술을 의미하는 대명사로 인식되기도 한다.

그 후손들의 재능도 달랐다.  곽원갑은 재능있는 아들 곽동각(霍東閣)이 있었다. 딸 곽동금(霍東琴)의 증언에 의하면 곽동각은 그 무예도 아비 곽원갑 보다 뛰어나면 뛰어났지 부친보다 못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뿐만아니라 영어, 불어를 구사하였다고 한다. 1923년 곽동각은 동남아를 돌아다니며 아버지의 혼이 담긴 무술관('정무')을 전파하기 위해 분회(分會)를 5개 조직한다. 이후로 해외조직은 급속히 증가하며 이는 특히 홍콩연예계에 큰 영향을 미친다.

문인들의 곽원갑에 대한 관심이 더 컸다.  '화소홍련사' 라는 소설을 써 이를 영화로 만듬으로싸 중국전역을 무술의 도가니로 빠뜨리는 단초를 제공한 소설가 겸 무술가 향개연(向愷然)은 이미 1925년에 대도왕오와 곽원갑을 모델로 '협의영웅전(俠義英雄傳)'을 쓰고 나중에는 아예 곽원갑전 을 쓰기도 한다. 바야흐로 곽원갑이 문예(소설, 영화)의 소재로 등장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처럼 일반이 뿐만아니라 문예인들의 관심도 곽원갑이 후한대 그것은 그 죽임이 주는 인상의 깊이가 달랐기 때문이가. 한모협은 병으로죽었으나 당시로서는 장수힌 68세의 천수를 누렸으나 곽원갑은 일본인들에게 매수된 제자가 몰래 약을 섞어놓은 차를 장기간 마시다가 죽고 만다. 곽원갑은 원래 몸에 신열이 많이 나는 체질(지병 이라고도 함)이었는데 이를 악화시키는 약이라고 알려져 있다. 결국 일본인들에게 의해 죽음으로써 항일의 열기가 가득했던 시기에 또다시 대중들에게 일제에 항거하다 죽은 인물로 부각된 것이다.

瓢蟲

不朽의 古典에서 찾은 智慧와 心灵, 역사적 敎訓과 省察에서 옛글의 향기에 취해 사랑에 빠지게 되었음을 밝히는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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