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객(俠客) 청말10대무술고수(7) 두심무

 협객(俠客) 청말10대무술고수(7) 두심무

두심무(杜心武. 1869~1953).


중국 호남성 장가계 자리강오진(慈利江埡鎭) 출신으로 자(字)는 신괴(愼愧), 호는 유협(儒俠), 도호(道號)는 두미관거사(斗米觀居士)이다. 두심오(杜心五) 라고도 하는데 중국어에서 오(五)와 무(武)의 발음이 모두 '우(wu)' 로 같아서 생긴 착각으로 보인다. (아래 화보 사진의 제목 참조)
중국의 저명한 무술가로서 자연문(自然門)파의 일대 종사이다. 몸이 깡마른편이라 협골(俠骨)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또 일본유학 시절 날라차기로 상대방을 거꾸러뜨려 일명 비퇴(飛腿) 또는 신퇴(神腿)라고 불리기도 하었다. 

유명한 무술가인 무심무는 어려서 신비의 무술고수인 서왜자(徐矮子. 이름이기 보다는 키가작아 붙여진 별명임)로부터 무술을 배운다. 그 실력이 매우 뛰어나 젊어서 사천, 귀주, 운남 등 중국의 서남지역에서 보표(표국의 무술호위병)로 생활하면서 그 위명을 떨쳐 '남북대사(南北大師)' 라는 존칭을 얻기도 한다. 1900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거기서 손문과 함께 혁명운동을 하던 송교인(宋敎仁)을 만나 깊은 우의를 쌓는다. 1905년 손문이 일본에서 동맹회(同盟會)를 결성하니 송교인은 간부로 활약하고 송교인의 권유로 두심무는 이 동맹회에 참여하게 된다. 그가 무술의 고수라 곧 손문의 경호원이 된다. 그러나 상시 경호를 하는 것이 아니라 손문이 외부인과 회의시에 두심무가 몇 명의 경호원들을 배치하고 이들을 지휘하는 정도의 업무에 불과하였다.

1913년 송교인이 테러를 당한 후 무심무는 정치와 거리를 두고 급기야는 일절 외부와 연락을 끊는다. 일본이 중국을 침략 중국의 북부를 점령하자 두심무를 충동질해 그에게 화북유지회(華北維持會) 라는 유령단체를 맡기려 하였으나 그는 거절한다. 두심무는 일본군의 점령지를 떠나 호남으로 갔다가 다시 중경(重慶)으로 이동한다. 거기서 그는 전국항일군중운동위원회(全國抗日群衆運動委員會) 주임을 맡는다. 1939년 중경에서 전국인민동원회(全國人民動員會) 주임으로 다시 나서 각지를 방문하면서 국민당의 확장과 항일조직의 건설에 주력한다.  공산당 정권 수립 후 무심무는 공산당의 권유로 호남성 인민군정위원회(軍政委員會)의 고문을 맡다가 1953년 옛날의 병이 다시 발병하여 피를 토하다 죽으니 향년 84세였다.

 

<▲ 두심무의 묘지. 그의 어머니 陳씨와 합장되어 있다>

 

무심무의 무술에 있어서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은 서왜자이다. 그로부터 무술을 배우고 두심무가 나름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며 명성을 쌓으니 서왜자는 고향인 사천으로 떠난다. 제자 두심무가 이를 극구말리며 붙잡으려 하였으나 서왜자는 홀연히 떠나버린 것이다. 이후로 서왜자는 다시는 두심무에게 연락을 취하지 않는다.  

두심무는 평소 과묵하였고 그나마 무술에 대해서 몇 마디 말을 할 뿐이었다. 성격 자제도 세상의 복잡하고 번다한 것을 싫어해 내심 은거하여 살기를 원했지만 사정은 그렇지 못했다. 만년에 고향으로 은퇴해 조그만 초막을 짓고 살며 스스로 두미관거사(斗米觀居士)라 칭하며 유유자적하였다. 1930년대부터 제자들을 받기 시작해 많은 제자들을 두었다. 만속성(萬簌聲), 곽봉기(郭鳳歧), 도양학(陶良鶴), 이려구(李麗久), 호아부(胡亞夫) 등이 제자들 중에서 출중하였다. 그 절기인 내권수(內圈手)를 연마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제자 만속성에 의해 전해진 것으로 연습대상물의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면서 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한 여자 제자로부터 알려진 것으로 앞에 것과는 반대인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수련하는 방법이라 한다.      

 

 

<▲ 두심무를 주제로 씌어진 소설의 표지로 '신퇴 두심오'라고 되어 있다. > 

瓢蟲

不朽의 古典에서 찾은 智慧와 心灵, 역사적 敎訓과 省察에서 옛글의 향기에 취해 사랑에 빠지게 되었음을 밝히는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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