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객(俠客) 청말10대무술고수(6) 왕자평

 협객(俠客) 청말10대무술고수(6) 왕자평

왕자평(王子平. 1881~1973)


자 영안(營安)으로 회족(回族)이며 하북(河北) 창주시(滄州市) 의화가(義和街) 출신이다. 별호가 천근왕(千斤王)이며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무술가이고 그의 집안 자체가 중국에서 유명한 무술세가(武術世家)이다. 즉, 조부는 평행봉을 잘하기로 유명하였고 부친인 왕복광(王福宏)은 "조각박왕(粗胳膊王. 무술로 단련된 팔뚝이 굵어 붙여진 별명)"으로 불리었다.

 

선대로부터 무술을 계승하여왔지만 집안은 매우 가난하였다. 왕자평 대에 이르러 이러한 가풍을 바꿔보려했으나 그래도 혹여 무술로 집안의 형편이 나아질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평소 성격이 활달하고 낙천적인 모친은 왕자평이 무술을 배우는 것을 마침내 허락하였다.  무술 잘하는 사람들 중에서 굶어 죽는 이는 없다는 막연한 기대감이 작용했다고 하니 자식을 걱정한 소박한 모친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왕자평은 무술을 가르쳐줄 스승을 찾아나섰지만 누가 알았으랴! 아무도 그에게 무술을 가르쳐주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에게  "얻어터지기만할 나무토막 같은 놈" 이라고 평하며 그가 무술을 익히기에는 그 자질이 전혀 없다고 판단해 제자로 받아주지않는 것이다.  그게 왕자평이 7, 8세 될 무렵이었으니 어린 나이었지만 왕자평은 어떻게든 무술을 배워 자신을 비웃는 사람들에게 본때를 보여주리라 마음 먹는다.

그러나 그에게 무술을 가르치려 하지않으니 별수없이 몰래 훔쳐보며 혼자 익히기 시작한다.  비록 독학으로 익히는 무술이었지만 깊고 넓게 그 무술의 경지에 대해 연구하고 반복해 익히니 그 발전속도가 결코 늦지 않았다. 아침에 세수를할 때부터 무술연마는 시작되는데 그 방식은 다음고 같다. 무을 가득 부은 나무로 만든 세수대야에 손을 펴서 넣은 후 물구나무를 서고 난 후 세수를 시작하였다. 밤에도 잠을 아껴가며 주로 뜀뛰기와 경공을 익히곤 하였다. 

그는 매우 일찍 일어났는데 이경(二更) 쯤 일어나 별빛을 받으며 이른 새벽의 적막하고 고요한 환경에서 정신을 집중하요 무술을 연마하거나 또는 오경(五更)에 일어나 새벽이슬에 젖은 대지를 밟으며 신선한 아침 공기를 호흡하고 해가 솓아 오를때까지 무공을 연하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옛사람들이 말하던 '북두공(北斗功)'과 '로수공(露水功)'이었다. 무더운 여름에는 옷을 남보다 더입고 햇볓 아래서 연마하고 추운 겨울에는 웃통을 벗고 연마하였다. 그의 독특한 수련방법은 여기에 그치지않았다. 급류에 뛰어들어 물길의 흐름을 연구하거나 높은 성벽위를 뛰어다니며 경신법(輕身法)을 연습하곤 하였다.

각고의 노력끝에 자신만의 무예적 기반을 마련하자 비로소 스승을 모실수 있었는데, 창주에서는 사보흥(沙寶興), 마운룡(馬雲龍)에게 골권(滑拳)을 배웠고 산동의 대협 양홍수(梁鴻修)에게서는 사권(査拳)을 배웠다. 왕자평이 배우기를 청하는 방식은 멀고 험한 것과 그 무예가 보잘 것이 있고 없고를 가리지 않았다. 만일 전수하기를 거부하는 자가 있으면 자기가 익힌 무예와 교환하는 조건으로 익히곤 하였으니 그 열의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그가 '천근왕' 이라고 불리며 세상에 이름을 알리게 된 내력은 이렇다. 1900년 의화단의 난이 8국연합군에 의해 진압되고 의화단의 난에 동조한 무술가들로 인해 여기에 참여하지않은 다른 무술인들까지 동조자로 혐의를 받게 되는데 왕자평도 그 중의 하나가 되니 체포를 피해 산동의 제남(濟南)으로 은신한다. 제남은 본디 샘(泉)으로 유명한데 왕자평이 하루는 그런 샘물이 있는 유원(柳園)에서 차를 마시던 중 사람들이 물레방아를 보며 모여있는 것을 발견한다. 왕자평이 보니 그 회전하는 모양이 거세고 힘차 흡사 화륜선의 커다란 바퀴같았다.  사람들이 그 거센 모양에 찬사를 보내니 몸이 근질거리던 왕자평은 자신이 저것을 멈추게 하겠노라고 큰소리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쳐다보며 코웃음을 칠뿐 도무지 믿으려하지않자 왕자평이 일어나 사람들을 밀치고 다가가 마침내 물레방아를 잡아 정지시키니 사람들은 놀랄수 밖에 없었다. 물레방아로부터 힘을 받아 돌아가는 돌맷돌이 받는 동력(動力)이 천근이라고 하여 당지 사람들이 왕자평에게 '천근왕(千斤王)' 이라는 칭호를 붙이게 된다. 이로서 왕자평의 명성이 제남에서 알려지기 시작한다.

 

                                                            <▲ 가운데가 왕자평>   

 

1918년 9월 제정러시아의 역사 강태아(康泰兒)가 북경을 방문해 그 기예를 선보이게 된다. 순천시보(順天時報)에 광고가 연일 나기를 "세계최고의 무예로 전지구를 놀라게 하다 ----중략--- 자고이래로 이런 力士는 없었노라!!" 라고. 이 광고를 본 중국의 무술인들은 자신들을 폄하하고 모욕하는 처사라고 격분하며 그에게 도전할 자를 모집하니 그 수가 20여명 이었다. 이런 도전에 강태아는 겁을 먹고 '무대가 좁아 사람들이 다칠것 같다' 라거나 '이런 행사에 대해 영사관의 허가를 받지못했다' 둥 하며 대결을 회피하였다. 그러나 대결에 대한 세인의 관심이 워낙커 흥행을 고려해 결국 9월 14일부터 16일까지 대결을 하기로 한다. 이것이 북경 중앙공원(中央公園)에서 벌어진 '제2회 만국새무대회(萬國賽武袋會)'인 것이다. 9월 11일 대회 개최를 알리는 소식이 북경의 각 신문에 보도되자 전국각지에서 무술인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당시 정권을 쥐고 외국의 눈치를 보고 있던 북양정부의 수반 단기서(段琪瑞)는 혹시 이것이 빌미가 되어 외세의 간섭을 초래할까 두려워 대회를 무술시합이 아닌 무술시연으로 변경한다. 

당시 왕자평은 북경에서 군대의 무술교관으로 있었는데 그 역시 무술대회 소식을 듣고 참가하려고 준비하던 중 정부의 간섭으로 무술시연으로 변경한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개의치않았다. 9월 14일 첫날 강태아가 무대로 나오자 무대 앞에 자신이 가르치던 군인들과 서있던 왕자평이 무대로 뛰어올라 강태아에게 주먹을 날리니 그는 이미 쓰러졌고 관중들의 환호성에 놀라 급히 일어난 강태아는 어디론가 숨어버린다. 당시의 정황은 1918년 9월 16일자 순천시보(順天時報), 신종(晨鐘) 그리고 무술사가 당몽(唐蒙)의 국기대관(國技大觀)에 나와있다.

1921년 미국인 사리문(沙利文)이 상해에 무술대회장을 열었다. 미국인 조지, 팅커, 독일인 피터 같은 거구의 역사들을 대동하고 와서 대회를 개최하며 광고하기를 누구든지 이들을 때리는 자가 있다면 한 대에 500불을 만일 다운을 시키면 1000불을 주겠노라고 하였다. 이 광고에 격분한 중국인들이 왕자평에게 나갈것을 권한다. 왕자평은 어떠한 돈도 필요없다고 하며 오직 대결만을 원하다고 밝히고 시합 전날 합의서를 작성하니 그 내용중에 쌍방은 우호적인 분위기 조성을 위해 시합적 각자 관중들에게 인사말을 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다음날 먼저 무대에 오른 왕자평이 인사말을 하는데 돌연 뒤에서 거한이 나타나 왕자평에게 주먹을 날렸다. 그러나 시합 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왕자평이기에 그는 재빨리 몸을 피할수 있었다. 피하고 몸을 상대방을 향애 몸을 돌이키니 다시 주먹이 날라왔다. 이를 피한 왕자평이 뛰어올라 걷어차니 상대방은 바닦에 쓰러지고 만다. 그날 밤 왕자평은 한 장의 통지서를 받는데 합의는 무효로 경기가 취소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왕자평이 쓰러뜨린 자는 자신들이 준비한 사람이 아니라는 말을 덧붙인다. 이에 왕자평은 통역을 대동하고 찾아가 "당신들이 대결을 않하겠다고 하지만 난 반드시 해야겠소. 승패를 가리지않고는 절대 않된다구!" 라며 일갈하니 그들은 꽁무니를 빼고 도망쳐 버린다.     

1928년 중앙국술관(中央國術館)은 그를 소림문(小林門)의 문장(門長)으로 초빙하고 공산당전권이 수립된 후 중국무술협회부주석, 중화전국체육총회 위원, 상해중의학회이사(上海中醫學會理事) 및 학회소속 상과학회부주임(傷科學會副主任) 등을 역임하였다.

말년에 자신의 무술일생과 중의학관련한 것을 정리한 책으로 '권술20법(拳術二十法)', '겁병연년20세(劫病延年二十勢)' 등을 저술하였다.

瓢蟲

不朽의 古典에서 찾은 智慧와 心灵, 역사적 敎訓과 省察에서 옛글의 향기에 취해 사랑에 빠지게 되었음을 밝히는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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