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객(俠客) 청말10대무술고수(3) 대도왕오(大刀王五)
김용의 작품 '천룡팔부'를 보면 의리, 의협 이런 것들이 정말 얼마나 남자들에게 중요한 것인지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무술인들에게 특별히 강조되는 이유에 대해서 그 해답은 주지않나 하는 생각이다. 특히 주인공 '교봉(喬峰)'을 보면 그가 일관하며 걷는 길이 바로 그것이니 보통 사람의 눈으로야 아둔하기까지 보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까지 지키고 싶은 것은 분명 그만한 가치가 있으리라 본다.
실제로 청말의 무술가 왕정의를 보면 이런 류의 인물에 속한다. 의리와 협기에 죽고살며 자신의 목숨 또한 초개 처럼 여기는 그런 뜨거운 삶을 보여주는데 여기 그에 대한 소개를 간략히 해보고자 한다.
대도왕오(大刀王五. 1844~1900).
왕정의는 사부의 기대를 저버리지않고 열심히 수련한 결과 이미 사부 이봉강의 수준을 넘어서자 이에 이봉강은 그를 자기의 스승인 유사용(劉仕龍)에게 추천한다. 다시 여기서 수년간의 수련을 마치고 마침내 그는 천진을 거쳐 북경으로 상경한다.
북경에서 그는 지인의 추천으로 한 표국(鏢局. 여객 또는 화물의 안전을 위해 주로 산동 사람에 의해 경영되었던 운송창고업)의 표사(鏢師. 표국에서 물건의 호송을 맡은 자로 직무상 무술을 할줄 알아야 함)로 취직한다. 1873년 왕정의는 그동안 표국에서 일하며 모은 돈과 친구들로부터 빌린 돈으로 반벽가(半壁街. 崇文區)에 '원순표국(源順鏢局)'을 개업한다. 순원표국이 담당했던 지역범위는 북으로는 산해관에서 남으로는 강소(江蘇) 회안(淮安)의 청강포(淸江浦)까지로 비교적 광범위 하였다. 가격은 합리적 수준에서 그리고 성실과 최선을 다하는 영업으로 사업은 날로 번창하였다.
청일전쟁에서 패한 청나라가 일본과 굴욕적인 시모노세키조약(1895. 4월)을 체결하자 온 나라안이 들끓었다. 누구하나 패전의 책임을 지지않는 사태에 백성들은 격분하였으나 관리들은 서태후의 눈치만 볼 뿐이었다. 어사(御史) 안유준(安維峻)이 이에 상소를 올려 패전의 책임과 조약체결 전권대사인 이홍장을 탄핵하였다. 그러나 황제보다 높은 곳에서 권력을 농단하던 서태후는 자신의 심복인 이홍장을 감싸고 오히려 안유준을 변방에 유배보낸다. 소식을 접한 왕정의는 대노하고 안유준을 유배지까지 호송하는 업무를 자청하여 완수한다.
호송을 마치고 북경으로 돌아온 왕정의는 깨달은 바가있어 향광주(香廣籌)에 학당을 만들고 '부무의학(父武義學)'이라 했다.
1898년 광서제의 지지하에 강유위(康有爲)와 양개초(梁啓超)가 주도가 되어 추진하는 무술변법(戊戌變法. 우리는 변법자강운동 이라고 부른다)이 고조에 달할즈음 담사동(譚嗣同)은 조정의 부름을 받고 상경해 4품의 군기장경(軍機章京. 황제를 보좌하고 관리의 상소문을 검열하며 왕의 칙서를 작성하는 요직)이라는 벼슬을 제수받고 변법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이이 담사동과 호형호제하는 사이인 왕정의는 담사동이 수도에서 활동하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그에게 의식주와 경호원을 제공한다.
청일전쟁의 패배와 시모노세키조약 체결로 궁지에 몰린 서태후가 정치에서 물러선 틈을 타 광서제가 젊은 관료와 혁신주의자들을 등용하여 추진한 이 변법운동은 서태후를 등에 엎고 있는 보수주의자들의 반반로 벽에 부딪히는데 결국 군사적 물리력의 동원이 국면을 결정할 핵심으로 부각되었다. 당시 군권은 원세개(袁世凱)가 장악하고 있었는데 담사동은 그를 찾아가 지원을 요창하였으나 원세개는 오히려 서태후를 지지하면서 변법운동은 막을 내린다. 복귀한 서태후는 광서제를 폐위시키고 대대적인 개혁세력의 탄압에 들어간다. 강유위와 양개초는 일본으로 망명하였으나 담사동은 이를 거부하고 스스로 개혁운동을 위한 순교를 결심한다.
이 소식을 접한 왕정의는 초초하여 직접 옥사를 찾아 담사동을 면담하고 또한 광범위한 무림계의 인사들을 불러모아 담사동을 구할 방법을 모색하나 담사동은 이를 결연히 거절한다.결국 1898년 9월 27일 무술변법을 주도한 소위 무술육군자(戊戌六君子. 담사동,양예,유광제,임욱,양심수,주광인)들은 강의(剛毅)의 집행아래 선무문(宣武門) 밖 채시구(菜市口.청대 공개사형이 주로 집행된 곳)에서 처형되었다.담사동 사후 왕정의는 그의 유지를 받들고 그의 복수를 위해 여러차례 보수주의 정객들의 암살을 도모하기도 한다.
1900년 의화단사건이 일어난다. 북경지역은 외국대사관이나 교회들이 습격을 당하는데 왕정의는 사람을 모아 직접 참여하여 외국인을 죽이고 교회를 습격하였다.그러나 이 사건은 열강의 침입을 위한 빌미만 제공하여 다시 한번 8개국연합군에 의해 북경은 함락되고 서태후는 서안(西安)으로 피신을 떠나야할 지경이었다. 사건이 진정되고 8개국연합과 체결된 신축조약의 결과 사건을 주도한 세력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령이 떨어졌고 10월 25일 순원포국에 들이닦친 청군에 의해 체포된 왕정의는 10월 25일 전문(前門. 천안문 광장의 자금성 반대편에 있는 성루)에서 8개국연합군에 의해 총살형에 처해지니 56세 였다.처형 후 그 머리를 잘라 성문에 걸어놓았으나 왕정의의 가족들은 감히 그 시체를 수습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이 소식을 접한 천진의 대협(大俠) 곽원갑은 그길로 북경으로 상경하여 깊음 밤 그의 머리를 수습하여 매장한다.
<▲ 영화 대도왕오 중에서>
왕정의 생전에 그 의기(義氣)와 협기(俠氣)에 많은 이들이 존경하여 '德容感化'와 '義重解驂' 이라는 현판을 기증하자 왕정의는 그것을 문의 동과 서에 각각 걸어 놓는다.허나 그의 사후 집을 수리하면서 이 현판은 침대를 만드는 재료로 충당되고 만다.그가 심혈을 기울여 키워온 원순표국 앞에는 커다란 공터가 있어 늘 표국의 깃발이 펄럭였으나 지금은 공공화장실이 차지하고 있고 그가 평생을 사용한 백근짜리 청룡언월대도(靑龍偃月大刀)는 1958년까지 전해졌으나 대약진운동 당시 화로속에 던저져 녹아 사라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