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객(俠客) 청말10대무술고수(4) 연자이삼(燕子李三)

 협객(俠客) 청말10대무술고수(4) 연자이삼(燕子李三)


우리나라에서 홍길동이나 장길산 같은 유명한 도둑이 횡횡하던 시절 그 이름을 모칭하는 도둑들이 전국에 들끓었다. 하여 낯에는 과천에 나타난 장길산이 저녁에는 부산 동래에 나타났다는 식의 황당한 소문이 늘 퍼지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이미 당사자가 죽고 없는데도 후대에까지 그 이름을 도용하니 죽지않고 모처에 살아있다 던가 불사(不死)한다는 식의 터무니없는 소문이 돌기도 하였다.

 

중국의 경우도 이러한 상황이 비일비재하였는데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도적 '연자이삼(燕子李三)' 이다. 그 이름을 뜯어보면 연자(燕子. 제비라는 뜻)는 말 그대로 제비처럼 날렵하다는 의미(즉, 경공술이 뛰어났다)이며 이삼(李三)은 이름으로 본명이라기 보다는 중국에서 신분이 낮은 집안에서 특별한 이름이 없이 항렬을 따져서 부르곤 하는데. 이삼 역시 3번째(셋째 아들이거나 서열상 3번째 제자 등)에 해당하기에 성(姓) 옆에 석삼(三)을 붙여 불리었을 것이다. 아울러 이 연자이삼 이라는 명칭도 한두명이 사용한 것이 아니고 도처에서 상당수 도적들이 사용하였으므로 딱히 한 사람을 지목할 수 없는 실정이다. 대체적으로 중국의 화북지역(양자강 이북지역)에서 활약하던 유명한 도둑을 지칭하는 대명사로 통한다고 보면되겠다. 이 연자이삼은 남아있는 기록이 적은 것도 그렇거니와 민간에 구전되면서 과장되거나 각색되 허황한 것도 적지않다. 아래는 그 중 비교적 기록이 전하는 대표적인 연자이삼으로 지목되었던 인물들이다.       

 

(1) 큰 도둑으로서의 연자이삼

이름은 이홍(李鴻)이며 字는 경화(景華)로 1898년 계현(薊縣. 천진시 북쪽에 있는 마을)에서 출생했다. 어려서 아비를 따라 창주(滄州. 대도왕오의 고향이기도 하며 당시 표국 소속의 무술인들이 특히 많은 지역이었음)로 이사하고 워낙 가난한 탓에 갖은 고초를 겪었다. 무술을 배우는 자들이 많은 고장인 관계로 이홍 역시 자연스럽게 무술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 자질이 뛰어나고 특히 몸이 민첩해 경공에 능하여 무술이 경지에 이르러서는 왠만한 높이의 담장이나 나무는 손쉽게 뛰어넘을 수 있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탓에 성장하면서 도둑질을 하기 시작했고 호북(湖北)과 하남(河南) 등지가 초기의 주 활동 무대였다. 낙양의 주둔군 사령관인 백견(白堅)의 집을 털면서 그 이름을 세간에 널리 알리게 된다.

이홍은 본래 전반산(田盤山)에 있는 절 만송사(萬松寺)에서 한 승려로부터 무예를 배웠으며 후에는 스승의 동문사제인 오대산(五臺山)의 법혜(法慧)에게 무술을 배웠다. 법혜가 이홍을 보니 그가 어려서부터 산이 많은 지역에서 자라서인지 특히 험한 산이나 골짜기를 다니는 것이 평지를 다니듯이 날렵하였다. 하여 무기를 쓰는 18반무예는 빼고 그 민첩함을 살릴수 있는 경공이나 관련 무예를 전수하였다. 그것이 바로 팔보등공(八步登空)과 연자삼초수(燕子三超水)였다. 팔보등공은 지면에서 허공으로 상당히 높이 뛰어올라갈수 있는 무예이며 연자삼초수는 (물에 빠지지 않고)수면을 박차고 뛰어오른다는 무공으로 그 모습이 바다제비가 물속으로 뛰어들었다가 다시 날아오르는 모습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로 수 년간의 수련을 통해 이를 습득한 이홍에게 사형들이 붙여준 별명이 '연자이삼' 이었던 것이다.

 

사실 사람이 수면에서 물에 빠지지않고 뛰어오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 연자삼초수는 그 정도로 도약(跳躍)하는 능력이 뛰어난 무공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홍의 도둑질 내력을 보면 그의 이러한 무공이 결코 허황된 것이 아님을 알수 있다. 그가 뛰어넘은 담장이 여염의 허접한 것이 아닌 대부호, 정부고위관료, 관공서 등 대부분이 삼엄한 경계와 높은 담을 자랑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 수법을 보면 갈고리가 달린 밧줄과 맨손을 이용하여 나무를 타거나 또는 벽을 기어올라 가서 장애물을 돌파하는 식이다. 그는 마치 곤충들이 날카로운 발톱을 이용해 나무나 벽을 기어울라 가듯이 맨손으로 높은 벽을 탈 수 있었다고 한다.

당연히 높고 험한 담장을 넘으니 상상을 초월한 곳으로의 침투에 집주인들은 쉽사리 물건을 털릴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당한 사람들을 보면 임시집정 단기서(段祺瑞), 단기서의 비서 양홍지(梁鴻志), 국무총리 반복(潘復), 황족 애신각라(愛新覺羅) 중서(中瑞)  등이다. 혼란스러운 시대이고 또 정치가들이나 부호들이 하나같이 평판이 않좋은 인물들이어서 백성들은 오히려 이홍의 도둑질을 반겼다고 한다. 그의 도둑질이 대범해질수록 그의 이름도 점점 유명해진다. 그럴수록 백성들의 그에 대한 호감도는 올라갔고 이홍 역시 일부러 부호들이나 귀족들의 집을 골라 털면서 현장에 흰 종이로 접은 제비를 남김으로써 누가 한 짓인지 암시를 남김으로써 부호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으로 일반 백성들에게는 대리만족과 '의적(義賊)' 같은 이미지를 심어주게 된다.            

실지로 훔친 돈을 백성들에게 종종 나누어 주었다고 하며 백성들은 그런 그를 양산박에 비유하곤 했다고 한다. 모 신문에는 그의 이런 행위와 관련한 기사가 나기도 하였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연자이삼, 도둑질로 모은 돈이 수천원에 이르는 부자이다. 초 겨울 성황묘로 놀러갔는데 그 부근 백성들의 생활이 궁핍한 것을 보고 가여운 마음에 일인당 1元 씩 나눠주었다. 이를 수상히 여긴 경찰들이 그를 미행해 붙잡았다."

 

이홍의 무공에 대해서는 원래 뛰어났다고 하는 주장과 아예 무공은 하지 못하고 몸도 허약했지만 그의 장애물을 뛰어넘는 능력은 탁월했다는 의견이 엇갈린다. 장성하여 대부분을 북경과 천진 일대에서 활동했는데 그 때에는 북경의 우안문(右安門) 밖 관상(關廂)에서 살았다. 몸이 병들고 다쳐 신기의 기예(技藝. 담을 뛰어넘는 기술)를 발휘할 수 없게 되자 직접 개발한 약물이나 더욱 철저한 목표물에 대한 사전조사를 통해 이를 극복해갔다고 하니 그의 도둑질에 대한 집념을 알수 있다.

전기소설속의 유명한 대도(大盜)인 화호접(花蝴蝶)이나 백국화(白菊花)를 모방해 그 자신 좀도둑에서 대도로 인정받기를 원했고 또 그런 경지에까지 이르렀지만 제자의 배신으로 경찰이 특별히 그를 위해 설계해 만든 포위망(큰 광주리)에 걸려 잡혀 참살 당하고 만다.        

               

(2) 정인군자(正人君子)로서의 연자이삼

위의 이홍이 최근에 밝혀진 연자이삼의 전형적 인물이라면 그 기원(起原), 즉 원형적인 인물이 또 하나 있으니 그가 바로 이분(李芬) 이다. 청나라 말기 지금의 천진시(天津市) 계현(薊縣) 상창진(上倉鎭) 정가장(程家庄)에서 태어났으며 집안에서는 자녀들 중 맏이지만 지역 무림계에서는 항렬이 세번째여서 사람들이 그를 분삼야(芬三爺)라 불렀다. 기록에 나타난 이분은 한마디로 청말의 충의지사(忠義志士) 였다. 뛰어난 무공을 소유한 그가 옳은 일을 위해 물불을 안가리고 남을 도와주며 늘 약자의 편에서서 행동하니 그에 대한 지역사람들의 칭송은 대단했다고 한다. 하여 그에 대한 이야기가 구전되다가 창극으로까지 만들어지기도 하였다고 한다. 

비록 이분의 무예가 뛰어나다고 하나 전설속의 연자이삼 처럼 엄청난 경공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에 대한 영웅담이 구전되면서 이분과 그와 친한 동료 무술인들의 무술기예가 모두 이분 한사람에게 집중되어 과장되게 표현되어 전래되었다고 한다. 흔히들 뛰어난 무술인들의 실전(實戰) 모습을 보고 '그 사람 날라 다니더라' 식으로 표현하듯이 이분 역시 그렇게 무술기예가 가미되고 포장이 과장되게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이 대목에서 '연자이삼' 과의 연관성은 지역 무림계의 항렬이 두 번째인 초상비(草上飛) 양영이(梁英以)와 관련이 깊다. 그가 당시 경공에서는 가장 뛰어난 기예를 보유했다고 하며 그외에 여러명 고수들의 기예가 후세대들에게는 이분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소위 '연자이삼' 이라는 하나의 인물형으로 탄생된 것이다.     

 

이분의 명성에 대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그가 남을 도와주다가 억울하게 잡혀 급기야는 사형을 언도 받는다. 감옥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그에게 뜻밖의 구명운동이 시작된다. 당시 황제인 광서제의 후궁 중에 이분의 명성을 익히들어 알고 있었서(혹자는 그를 흠모했었다고도 한다) 그를 억울한 죽음에서 구해야 되겠기에 황제에게 직접 간청하여 이분을 살려낸다. 죽음을 면한 이분은 후궁을 찾아가 무릅을 꿇고 평생  어머니 처럼 대하며 그 은혜를 갚겠다고 서약한다.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후궁이었지만 부모 다음으로 자신에게 큰 은혜를 베푼 것에 대한 이분이 할수 있는 최대한도의 정성을 표시한 것이다.     

 

이분이 고향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니 당지의 군벌인 오패부(吳佩孚)가 평소 그를 흠모하여 부하들을 이끌고 직접 문상을 와서 조상하고 유리로 만든 영붕(靈棚. 영구를 안치해 두는 막)을 기증하였는데 그 길이가 무려 100m에 달하였다. 이러한 후인들의 고인에 대한 추도의 정은 발인을 통해 드러난다. 즉, 1km가 채 못되는 장지로 운구를 하는데 당시 운구풍습이 1보를 전진하고 3보를 조금씩 후퇴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물론 들고있는 관은 땅에 절대 떨어뜨려서는 않된다. 이렇게 운구가 진행되니 1km를 무려 7일 밤낯을 갔다고 전해진다. 이렇듯 각지에서 존경을 받아온 이분이었기에 혼란스러운 시기를 틈타 도굴범이 날뛰던 시기나 문화혁명기에 홍위병들이 무자비하게 옛유적을 파괴하고 날뛸때도 이분의 묘지는 고향 사람들의 보호로 안전할 수 있었다. 80년대 묘지가 속한 토지를 불하받은 자가 묘지를 파보니 이분의 시체 밑에 동전이 관 바닦의 절반 정도를 덮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오래되다보니 동전들은 녹아 한 덩어리 처럼되었고 이것은 후일 팔아버리고 만다. 지금도 그의 고향에는 후손들이 모여 살고 있으며 마을의 뜻있는자들과 함께 이분을 기리는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3) 괴도(怪盜) 연자이삼

이성오(李聖五)는 가명이 이화천(李化天)이고 아명은 길순(吉順)이었다. 30년대 초에서 40년대 말까지 주로 중국의 산동지역에서 활동한 유명한 도둑이었다. 경공(輕功)의 고수로 그래서 얻은 별명이 '이연자(李燕子. 이제비 라는 뜻)'였으며 민간에서는 '연자이삼'으로도 통하였다. 이성오는 산동의 우성현(禹城縣) 이가장(李家庄) 출신이었다.(일설에는 우성현이 아닌 肥城縣 이라고도 함)  산동 제남(濟南)의 도교사원인 천태관(天台觀)에서 도사(道士)로 있으면서 천지자(天池子)를 스승으로 모셨다. 천지자가 병으로 죽자 이성오는 각지를 떠돌다가 산서(山西)의 오태산(五台山)에서 한 도사를 만나 그에게 10여년이 넘게 무공을 전수 받는다. 특히 경공과 내공이 뛰어나 앞으로는 일장오척(약 5m)을 뒤로는 1장2척(약 4m)를 능히 뛰어오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성오는 그 본성이 악날하고 정도를 벗어나 도둑질을 일삼고 그 돈으로 기방을 들락거리면서 즐거움으로 삼았는데 그가 이렇게 본격적인 도둑으로 행세한 것은 오대산을 떠나 1936년 제남으로 돌아가면서 부터이다. 그가 목표로 삼은 것은 대담하게도 산동성(山東省) 주석(主席)인 한복구(韓復榘)의 관저였고 공교롭게도 물건을 훔치던 중 한복구에게 발각된다. 추격하는 호위병들의 그물망을 그 신기(神技)를 이용해 탈출하였으나 결국 그 흔적을 찾아가며 수사하던 한복구의 수하들에게 잡히게 된다. 비록 감옥에 잡혔지만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도가비전(道家緋傳)의 '탈골술(脫骨術. 팔다리의 뼈를 일부러 탈골시켜 몸을 묶은 포승이나 좁은 틈을 빠져나가는 기술)'을 활용해 감쪽같이 도망치니 이로써 세상에 그 이름을 떨치게 된다.

일본군이 침략해 제남을 점령한 후 이성오는 다시 천성(泉城)에서의 도둑질로 채포령이 떨어지고 점령지의 경찰에 붙잡힌다. 그러나 사람을 매수해 그를 통해 경찰고위층에 압력을 행사해 이성오는 혐의를 벗는다. 이후 비교적 조심하며 도둑질을 계속하니 마침내 경찰도 쌓이는 민원에 다시금 수사를 시작하고 이성오를 잡아들인다. 이성오는 일본을 위해 일하겠다는 서약을 하고 난후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된다. 그러나 이것이 후회가되어 1945년 일본군사령부에 잠입하여 도둑질을 하다 붙잡히나 다행이 일본이 패망하고 그는 다시 탈출하게 된다.  전쟁은 끝나고 공산당이 대륙을 접수한 후에도 이성오는 그 손버릇을 버릴줄 몰랐다. 지하교통시설 등을 절도하고 여러차례 체포령이 떨어져 추격하나 그때마다 번번히 이성오의 놀아운 경공술만 구경하고 말 뿐이었다. 1948년 제남을 점령한 중국공산당의 제남시공안국은 이성오의 사건을 가장시급한 사안으로 취급하여 수사하던 중 마침내 그를 체포하게 된다. 그러나 포박하여 압송 중 다시 한번 이성오는 내공을 이용하여 포승을 풀고 경찰의 총을 빼앗아 총을 쏘며 달아난다. 마침 그의 압송을 구경하는 인파가 길에 가득하여 이성오는 경공술을 이용해 손쉽게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1949년 이성오는 강소(江蘇)의 서주(徐州)에 잠입하여 한 기방에서 기거하였다. 첩보를 입수한 경찰이 이성오가 숨은 집을 포위하고 체포에 들어가니 탁트인 밖이 아닌 실내인지라 저항하던 이성오는 그의 장기를 발휘할 수 없었고 마침내 체포되고 만다. 같은해 10월 제남에서 총살당하니 그가 받은 혐의는 35건의 절도 및 10명을 살해한 것이었다.

瓢蟲

不朽의 古典에서 찾은 智慧와 心灵, 역사적 敎訓과 省察에서 옛글의 향기에 취해 사랑에 빠지게 되었음을 밝히는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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