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구영신(送舊迎新)은 '낡은 것을 보내고 새로운 것을 맞이한다'는 뜻으로, 특히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다는 의미로 쓰이는 한자성어다. 이는 중국 관가에서 묵은 관리를 보내고 새 관리를 맞이하는 데서 유래했으며, 한국에서는 새해 맞이 행사나 예배에서 자주 사용되며, 시간의 흐름과 새로운 시작을 상징한다.
의미 상세
한자 풀이:
送(보낼 송): 보내다.
舊(옛 구): 옛날, 낡은 것.
迎(맞을 영): 맞이하다.
新(새 신): 새로운 것, 새해.
유래:
중국에서 묵은 관리(故)를 보내고 새 관리(新)를 맞이하는 '송고영신(送故迎新)'에서 유래했다.
한국에서는 음력 섣달그믐 밤의 민속 행사나 개신교의 '송구영신 예배'와 연결되어 널리 쓰이게 되었다.
사용 예시:
송구영신 예배: 한 해의 마지막 밤부터 새해 첫날 자정까지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며 드리는 기독교 예배.
일반적 사용: 낡은 것을 보내고 새로운 것을 맞이하는 모든 상황, 특히 연말연시의 시간적 변화를 표현할 때 사용된다.
요약
송구영신은 단순히 시간의 경과를 넘어, 낡고 지난 것을 정리하고 새로운 희망과 시작을 받아들이는 긍정적이고 역동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송구영신예배(送舊迎新禮拜)
송구영신예배(送舊迎新禮拜) 또는 신년예배, 신년감사예배는 대한민국 개신교에서 매년 12월 31일 심야나 1월 1일 자정, 두 날의 경계에 가까운 시각에 새해를 맞이하여 드리는 예배이다. 1월 1일이 일요일인 경우에는 송구영신예배는 따로 진행하지 않고 신정 당일에 주일예배를 겸한 신년감사예배를 대신 진행하는 일이 많다.
일반적으로 23:30분부터 시작하여 중간에 신년 카운트다운을 하고 00:30분에 예배를 마치는 형태가 많으나, 송구예배와 영신예배를 나누어서 23:00~00:00까지 송구예배를 진행하고 카운트다운 후, 영신예배를 새로 시작하여 01:00까지 진행하는 케이스도 있다.
개신교 계열 방송 채널들도 12월 31일 밤 11시부터 주요 교회의 송구영신예배 실황을 생중계한다.
2. 송구영신이란
'송구영신'이라는 말은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음' 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중국의 '송고영신'(送故迎新)에서 유래했는데, 중국 관가(官家)에서 구관(舊官)을 보내고 신관(新官)을 맞이하는 '신구관 이취임식'에 사용했던 말이라고 한다. 이 말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는 음력 섣달그믐 밤에 묵은 해를 보내고 신년의 운수대통을 기원하던 무속적인 민속 행사에 사용되었다.
3. 유래
한국 개신교에서의 '송구영신예배'의 유래는 1887년 12월 31일 새문안교회와 정동제일감리교회가 연합예배를 드린 것이 그 유래로 알려져 있으며, 당시에는 '언약갱신예배' 혹은 '언약예배'로 불렸다고 한다. 또 장로교회에서는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와 헨리 아펜젤러에 의해 '송구영신예배'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근하신년(謹賀新年) 송구영신(送舊迎新)
중앙일보
2020년 새해가 밝았다. 지금은 엽서나 편지 등을 통해 연하장을 주고받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인터넷이 등장하기 전에는 새해를 축하하는 인사를 담은 연하장을 지인들과 주고받곤 했다. 이런 연하장에 등장하는 대표적 문구가 ‘근하신년(謹賀新年)’ ‘송구영신(送舊迎新)’이다.
지금도 달력 앞 장에 ‘근하신년’이라고 큼지막하게 쓰여 있는 걸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이 뜻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근하신년(謹賀新年)의 한자를 살펴보면 삼갈 근(謹), 하례할 하(賀), 새 신(新), 해 년(年) 자로 이뤄져 있다. 글자 그대로 풀어 보면 ‘삼가 새해를 축하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삼가’는 ‘겸손하고 조심하는 마음으로 정중하게’라는 의미다. ‘근하신년’은 ‘정중히 새해를 축하한다’는 의미를 담은 새해 인사라 할 수 있다. 비슷한 표현으로 ‘공하신년(恭賀新年)’ ‘공하신희(恭賀新禧)’를 쓸 수도 있다.
‘송구영신(送舊迎新)’은 보낼 송(送), 옛 구(舊), 맞을 영(迎), 새 신(新) 자로 구성돼 있다. 옛것을 보내고 새것을 맞는다, 즉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다는 의미다. ‘송구영신’은 원래 ‘송고영신(送故迎新)’에서 유래된 말로, ‘송고영신’은 구관을 보내고 신관을 맞이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구관은 옛 관리를, 신관은 ‘새 관리’를 가리키는데, 옛 관리를 보내고 새 관리를 맞이한다는 말이 이후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한다는 뜻으로 널리 쓰이고 있는 것이다. 비슷한 표현으로 ‘송영(送迎)’을 써도 무방하다. [출처:중앙일보]
송구영신(送舊迎新)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시간을 우리는 송구영신이라 한다. 이 말 속에는 단순히 시간이 지나갔다는 사실을 넘어, 지나온 삶을 정직하게 돌아보고 다가올 날들을 새롭게 맞이하려는 믿음의 태도가 담겨 있다. 2025년의 끝자락에 서서 우리는 수많은 기억과 감정, 그리고 각자의 이야기를 안고 이 경계의 시간을 지나고 있다. 송구영신은 달력이 바뀌는 순간이 아니라, 마음의 방향을 다시 세우는 거룩한 결단의 시간이다.
개인의 삶을 돌아보면, 우리는 최선을 다했음에도 미완으로 남은 일들을 떠올린다. 이루지 못한 계획, 지키지 못한 약속, 후회로 남은 말과 행동들이 마음에 남아 있다. 그러나 신앙인은 그 모든 시간마저 하나님의 손안에 있었음을 고백해야 한다. 실패는 우리를 멈추게 했지만 동시에 겸손하게 했고, 눈물은 우리를 무너뜨렸지만, 기도의 자리로 이끌었다. 그러므로 2026년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는 자책보다 은혜를 선택하고, 좌절보다 다시 일어설 용기를 품어야 한다.
가정의 자리에서도 송구영신은 깊은 의미가 있다. 가장 가까운 관계이기에 가장 쉽게 상처를 주고받았던 시간이 떠오른다. 바쁨을 이유로 소홀했던 대화, 미안하다는 말을 미루었던 순간들이 마음을 무겁게 한다. 그러나 새해를 맞으며 우리는 다시 가정을 신앙의 첫 자리로 세우고자 결심해야 한다. 말 한마디에 배려를 담고, 침묵 속에서도 존중을 잃지 않으며,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가정이 되기를 다짐해야 한다. 신앙은 거창한 선언보다 일상의 태도 속에서 자라난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된다.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 또한 무겁다. 갈등과 분열, 불신과 불안이 일상이 된 시대 속에서 많은 이들이 희망을 말하기를 주저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 시대 앞에서 침묵하거나 냉소하지 않기로 선택해야 한다. 정의와 공의를 향한 책임을 외면하지 않고, 약자의 편에 서며, 미움의 언어 대신 화해의 언어를 선택하는 것이 신앙인의 길임을 고백해야 한다. 작은 선행과 정직한 삶이 결국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된다는 믿음을 다시 붙든다.
교회 역시 송구영신의 문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숫자와 외형보다 복음의 본질을 붙들었는지, 세상의 아픔 앞에서 충분히 울어주었는지를 질문해야 한다. 새해를 향해 교회는 더 낮아지기로, 더 기도하기로, 더 섬기기로 결단해야 한다. 시대의 요구에 흔들리기보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바로 서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해야 한다. 교회가 희망을 말하기 전에 먼저 희망이 되어야 함을 깊이 새겨야 한다.
2026년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꿈과 희망은 결코 허황하지 않다. 하루하루 하나님과 동행하며 정직하게 살아가는 삶,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마음,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을 놓지 않는 태도에 그 꿈이 담겨 있어야 한다. 송구영신의 이 거룩한 시간 속에서 우리는 지난날을 감사로 떠나보내고, 다가올 날을 믿음으로 맞이해야 한다. 그리고 새해에도 변함없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인도하실 것을 신뢰하며, 조용하지만 단단한 걸음으로 2026년을 향해 나아가기로 다짐하자.
어둠을 지나 새벽의 빛으로
김철홍(대한뉴스방송 논설위원)
'송구영신'은 아쉬움과 상처를 남기기보다 배움을 건져 올리고 조용히 내려놓는 의식이다.
어둠을 지나 새벽의 빛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극적인 변화가 아니라 시간을 통과하는 일이다. 고요한 밤을 지나며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고, 그 뒤에야 새벽의 빛을 마주한다. 그 빛은 화려하지 않지만, 다시 하루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다.
이틀 후면 붉은 말의 해, 병오년(丙午年) 2026년 새해가 밝는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새해의 평안과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나례(儺禮)’라는 국가 의례(儀禮)를 거행하며 묵은해의 사악함을 털어내고 새 기운을 맞이했다. 나례는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지난해의 어려움을 정화하고, 새 출발을 준비하는 마음의 공간이었다.
2025년은 우리 사회에도 그런 성찰이 필요했던 한 해였다. 격변의 시간을 지나며 우리는 일상의 소중함과 공동체의 의미를 다시 생각했다. 혼란을 수습하고 정상화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서로를 향한 신뢰가 회복을 이끄는 밑바탕임을 확인했다.
미켈란젤로가 로마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그려진 명작 ’천지창조‘를 완성하기까지 익숙하던 조각 도구 대신 수년 동안 낯선 기법을 배우며 수없이 붓을 들었다는 이야기는, 실수와 시행착오 또한 걸작을 만드는 과정임을 일깨워 준다. 우리의 시간 역시 그러했다.
송구영신(送舊迎新)은 달력의 교체가 아니라 지나간 시간에 대한 성찰과 다가올 시간에 대한 다짐이 만나는 순간이다. 아쉬움과 상처를 남기기보다 배움을 건져 올리고 조용히 내려놓는 의식이다.
붉은 말이 상징하는 생동과 기백처럼, 2026년은 분열을 넘어 연대의 에너지가 살아나는 해가 되기를 바란다. 다시 서려는 우리 사회의 발걸음 위에 신뢰와 책임이 자리하고, 각자의 자리에서의 노력이 서로를 비추는 빛이 되기를 소망한다. 격변의 시간을 지나며 우리는 더 단단해졌고, 서로를 이해하려는 마음 또한 자라났다. 묵은해를 정중히 보내며, 희망과 평안이 조용히 숨 쉬는 새해를 맞이한다.
송구영신가 (送舊迎新歌)
개설
목판본. 김주희(金周熙)가 지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자세한 고증이 요구된다. 1932년 경상북도 상주의 동학 본부에서 국한문 혼용본 및 국문본 2종으로 간행되었으며, 『용담유사(龍潭遺詞)』 권31에 수록되어 있다. 권31을 송구영신가라고 했으나 그 안에서 다시 「송구영신가」와 「몽경시화가(夢警時和歌)」의 두 편으로 나뉘어져 있다.
「송구영신가」는 같은 제목으로 된 작품이 『용담유사』 권32와 권39로 간행된 「운산시호가(運算時呼歌)」와 「불역(不易)」에 각각 수록되어 있으나, 이 세 편의 내용은 서로 다르다.
내용 및 형식
『용담유사』 권31의 소재본을 주로 해서 살펴보면 그 길이는 4음보 1행으로 총 294행이며, 4·4조를 주조로 하되 다소 변조가 보인다. 고금 역사의 변천 과정과 함께 송구영신의 의미로 동학이 대두하게 된 운수를 읊고 그 가르침을 잘 이해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고금의 변천은 처음에 성인이 나와 중생을 제도하여 태평을 누렸으나, 역수지운(逆數之運)이 돌아와 춘추전국의 난세가 되었다고 하였다. 이 난세는 허욕에서 나온 것으로 만승천자의 부귀도 실상은 허망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난세를 당해 처음에 석가여래가 중생을 제도했으나 그 운이 다했고, 서학(西學)이 일어났으나 역시 운이 다했고, 이제 시운이 바뀌어 최제우(崔濟愚)의 동학이 일어나 중생을 제도하게 되었으며, 최제우의 도통은 청림(靑林)에게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운의 변화를 잘 알아 안심정기(安心正氣)의 수신법을 잘 익혀야 한다는 것이 중심 내용이다.
「몽경시화가」 역시 4음보 1행으로 총 142행이며 4·4조를 주조로 하되 변조가 있다. 작중 화자는 동학의 천사성문(天師聖門)에서 배운 사람으로 잠들어서 꿈 못 깨고, 뛰면서 꿈 못 깬 사람들을 위해 이 노래를 짓는다고 하였다. 즉, 꿈을 깨어 시운이 어떠한지를 살펴보고 시절이 봄이니 때를 잃지 말고 농사를 지을 것과 시운에 맞추어 동학이 일어났으니 그 가르침을 따라 순수천리(順隨天理)하라는 것이다.
참고문헌
『가사문학대계(歌辭文學大系) -동학가사(東學歌辭) Ⅰ·Ⅱ-』(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79)
「상주동학의 배경과 가사연구」(이재호, 계명대학교석사학위논문, 1983)
「상주본(尙州本) 동학가사에 대하여」(이원주, 『계명대학보』, 1976.1.13)
「찾아진 동학가사 100여편과 그 책판(冊板)」(유탁일, 『부대신문』, 1974.11.11)
송구영신(送舊迎新)
묵은 것을 보내고 새 것을 맞이한다는 뜻으로,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한다는 말이다.
送 : 보낼 송(辶/6)
舊 : 옛 구(臼/12)
迎 : 맞이할 영(辶/4)
新 : 새 신(斤/9)
(유의어)
송고영신(送故迎新)
송영(送迎)
송왕영래(送往迎來)
출전 : 한서(漢書) 卷086 왕가전(王嘉傳)
송구(送舊)는 '묵은 것을 보낸다'는 뜻이고, 영신(迎新)은 '새 것을 맞이한다'는 뜻이다. 즉,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한다는 뜻이다. 낡은 것을 보내고 새 것을 맞이한다. 송고영신(送故迎新)에서 나온 말로 관가에서 구관(舊官)을 보내고 신관(新官)을 맞이 했던데서 유래한 말이다.
공자(孔子)가 냇가에 앉아 흘러가는 물을 보면서 세월의 무상함을 탄식했다는 천상(川上)의 탄(嘆)은 덧없이 흘러가는 세월과 끊임없이 생성하고 소멸하는 대우주의 섭리를 꿰뚫어 본 명언으로 손꼽힌다. "가는것이 모두 이와 같구나. 밤낮으로 흘러 쉬는 일이 없구나(逝者如斯夫 不舍晝夜)."
그러나 사람들은 쉼표도 없이 흘러가는 세월에 인위적인 매듭을 만들어 지난날을 반성하고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계기로 삼아왔다. 한해가 저물고 새해가 시작될 때마다 사람들은 묵은 것을 보내고 새로운 것을 맞는다는 송구영신(送舊迎新)을 다짐하며 새해에는 지난해와 뭔가 다른 한해가 되기를 기원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막상 한해가 저무는 세모(歲暮)에는 그동안 다하지 못한 숙제를 되돌아 보며 또 한해가 덧없이 흘러갔다는 감회에 젖어들곤 한다. 그래서 시인 홍영철(洪榮鐵)은 "내일이 오면 오늘보다 조금은 다른, 무엇이 다가오지 않을까, 그렇게 그때도 기다렸다, 그러나 내일은 언제나 만나지지 않았다"고 탄식하기도 했다.
조물주가 부여한 인간의 감정 중에 희노애락(喜怒哀樂)이 있다. 여기에다 애오욕(愛惡欲)을 덧붙여 칠정(七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요즘처럼 바쁜 세상에서는 그냥 희비(喜悲)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왕 조물주가 부여한 성정(性情)이므로 그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렷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이 살아가는데 늘 좋은 일만 있으란 법은 없다. 살다보면 누구나 희노애락을 두루 경험하게 되어 있다. 그게 사는 맛일 수도있다.
흰색을 느낄 수 있는 것은 검은색이 있기 때문이며 긴 것은 짧은 것이 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늘 좋은 일만 있다면 오히려 삶이 따분해질 수도 있다. 변화나 자극도 때에 따라서는 필요한 법이다.
매년 이맘 때면 느끼는 것이지만 지난 한 해에도 국가적으로 희노애락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은 흘러가고 있으며 역사의 수레바퀴는 잠시도 멈추지 않고 굴러가고 있다. 특히 진정한 21세기로 들어서는 지금은 더 없이 중요한 때이기도 하다. 그래서 세계 각국이 각오를 새롭게 다지고 있는 것이다.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사상 가운데 가장 첨예하게 대립되었던 것이 유가와 법가였다. 그야 말로 빙탄부용(氷炭不容; 얼음과 숯불은 용납될 수 없음)의 관계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대립되는 주장을 펼쳤는데 그 중의 하나가 역사를 보는 눈, 곧 역사관이다.
유가가 과거에 초점을 맞춘 복고(復古)를 주장한 데 반해 법가는 진보적인 사관을 가지고 개혁을 주장했다. 한비자(韓非子)가 변통없이 용렬한 그들을 두고 수주대토(守株待兎)라고 비난했음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렇다. 우리는 눈의 초점을 지나간 역사에만 맞추어 둘 수는 없다. 역사는 귀감으로 삼을 수 있을 뿐이다. 그것보다 21세기 새 시대에는 그에 걸맞은 새 역사를 창조해야 할 무거운 사명이 우리들 어깨에 얹혀져 있다.
송구영신(送舊迎新)의 자세가 필요하다. 낡은 것은 과감히 털어 버리고 새로운 것을 준비해야 한다. 혹 아쉬운 것이 있었다면 반성을 통해서 바로 잡아야 할 것이며 부족했던 것은 그 만큼 더 노력해 보충하도록 하자. 그렇지 않고 옛 것에만 집착할 때 우리는 진부를 면치 못할 것이다.
또한 한해를 보내면서 망년회(忘年會)라는 말을 많이 쓴다. 망년회란 풍습은 일본의 풍속으로 '한 해의 노고를 잊는다(忘年)'는 뜻이나, 우리나라에서는 '나이(歲)를 잊는다'는 뜻으로 나이는 어리지만 그 사람의 재주나 인품을 보고 사람 사귀는 것을 망년지교(忘年之交)라 했다. 일본에서는 1,400여년 전부터 망년(忘年) 또는 연망(年忘)이라 하여 섣달 그믐께 친지들끼리 어울려 술과 춤으로 흥청대는 세시 민속이 있었으며 이것이 망년회의 뿌리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연말 풍습은 수세(守歲)라 하여 섣달 그믐날이면 방, 마루, 부엌, 마구간, 측간까지 온 집안에 불을 켜놓고 조상신의 하강을 경건하게 기다리는 성스러운 밤이었다. 부엌신인 조상신은 1년 내내 그 집안 사람들의 선악을 낱낱이 지켜보았다가 섣달 스무나흗날 승천하여 옥황상제(玉皇上帝)에게 고하고 이날 밤에 하강하는 것으로 알았던 것이다. 따라서 연말 1주일은 일년 동안의 처신에 대한 심판을 기다렸던 만큼 경건함을 지켰으며, 흥청거림은 꿈에도 생각지 못할 일이었다.
또한 연말연시에 근하신년(謹賀新年)이라는 문구의 인사말을 쓰곤 한다. 우리 사회도 알고 보면 우주의 운행처럼 잠시도 쉬지 않고 운전하고 있으며 그러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변모를 거듭한다. 그래서 시대가 바뀌면 함께 바뀌는 것이 있게 된다. 지금은 달력이 홍보용으로도 사용된다. 그래서 선전을 위해 무료로 증정하기도 하며 쉬이 구할 수도 있다.
이제는 흔하다 못해 전자달력까지 출현한 상태이지만 약 30년 전만 해도 제대로 된 달력 한 권 갖는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았다. 주위의 친척 중에 버젓한 대기업에 다니는 분이라도 있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사야 했는데 그것도 6장 짜리는 힘들고 석 달이 한꺼번에 들어가 있는 4장 짜리가 대부분이었다. 주로 영화배우들의 사진이 실려 있는 것이었다.
한 10여년 더 소급하면 정말 달력이 귀했다. 자유당 시절에는 아예 달력을 나라에서 나눠주기도 했는데 12달이 한 장에 담긴 달력이었다. 그것도 대통령과 부통령의 사진이 좌우에 박혀있고 그 밑에는 두음법칙이 적용되지 않아 리승만(李承晩) 리기붕(李起鵬)이라고 적혀 있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옛날 이야기다. 물론 그 때는 기년(紀年)도 단기(檀紀)로 표기했었다. 색 바랜 가족 사진과 함께 시골 초가집 벽을 장식하는 유일한 예술품이기도 했는데 1년 내내 붙어 있다보니 연말에 가면 파리 녀석이 실례도 하고 퇴색도 되어 날짜 구별도 하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대체로 달력의 첫 장이나 연하장에 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문구가 있다. 근하신년(謹賀新年)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제는 한글로 적기도 하여 유치원생도 읽기는 읽는데 여전히 뜻은 알 수가 없어 곧잘 묻는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 대강 얼버무리지 말고 정확하게 가르쳐 주자. '삼가 새해를 축하합니다'라는 뜻이다. 줄여서 '하정(賀正)'이라고도 한다.
새해를 맞이하는 심정이야 동서고금(東西古今)에 다름이 있겠는가? 그래서 서양 사람들도 같은 내용의 인사를 주고받는다. 지난 한 해 돌아보면 참으로 어려운 일도 많았다. 우리 같은 서민들의 주름살은 또 얼마나 더 늘어났는가? 송구영신(送舊迎新)도 물론 좋지만 희망찬 새해를 맞이하여 서로 서로 축하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새해에는 정말이지 뜻했던 바가 속이 후련하도록 성취되기를 기원한다.
송고영신(送故迎新)
낡은 것을 보내고 새 것을 맞이한다는 뜻으로, 구관(舊官)을 보내고, 신관(新官)을 맞이한다는 의미였으나,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한다는 송구영신(送舊迎新)으로 변했다.
우리는 한 해를 마무리할 때 보통 새해의 희망을 보태 송구영신(送舊迎新)이라고 표현하는데, 원말은 송고영신(送故迎新)이다. 이 말은 한(漢)나라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왕가전(王嘉傳)에 이 성어가 먼저 사용됐다. 왕가(王嘉)는 자가 공중(公仲)으로 어릴 때부터 성격이 강직하고 할 말은 과감하게 하여 주위의 신망을 받았다.
그가 올린 상소문 중에 구관(舊官)을 보내고, 신관(新官)을 맞이한다는 뜻으로 쓴 예가 처음 나온다. "이전부터 관직은 대대로 맡았는데 창(倉)씨나 고(庫)씨처럼 창고 일을 맡아보던 집안에서의 성씨가 됐습니다(吏居官者或長子孫, 以官為氏, 倉氏庫氏則倉庫吏之後也). 관리가 수개월만 직책에 있다가 물러나도 보내고 맞이하느라, 서로 뒤섞여 도로가 혼잡했습니다(吏或居官數月而退, 送故迎新, 交錯道路)."
현재와 같이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다는 의미로 쓰인 것은 송(宋)나라 서현(徐鉉)의 제야(除夜)라는 시(詩)다.
제야(除夜) / 서현(徐鉉)
寒燈耿耿漏遲遲, 送故迎新了不欺.
찬 겨울 밤 등불은 깜빡이고 시간은 더디 가건만, 옛 것을 보내고 새 것을 맞는 일은 속임(어김)이 없구나.
往事並隨殘曆日, 春風寧識舊容儀.
지난 일들은 남은 날을 따라 사라지겠지만, 불어오는 봄바람이 옛 모습을 알아볼 수 있을까.
預慚歲酒難先飲, 更對鄉儺羨小兒.
새해 술을 부끄러이 여겨 먼저 마시기 어려워라, 향리의 나례(儺禮)를 다시 보니 아이들이 부럽구나.
吟罷明朝贈知己, 便須題作去年詩.
읊기(吟)를 그치니 날이 밝아 친구에게 급히 보내노라, 보내지 않으면 작년의 시로 이름 지어야 하니.
나례(儺禮)는, 음력 섣달 그믐날에 민가와 궁중에서 묵은해의 잡귀를 몰아내기 위하여 벌이던 의식이다. 원(元)나라 운창몽(雲窓夢) 제일절(第一折)에 '我想這花門柳戶, 送舊迎新, 幾時是了也呵'라 한다. 또는 석상종감(石霜宗監) 선사가 오등회원(五橙會元)에 쓴 글 '송구년 영신세(送舊年, 迎新歲)'를 줄인 말이라고도 한다.
除夜獨坐 / 李穀
(제야에 홀로 앉아서 / 이곡)
兒童此夕鬧比隣
아동들 오늘 밤 이웃에서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
春入皇都喜氣新
봄빛이 황도에 들어오니 기쁜 기색이 완연해라.
獨閱塵編過夜半
먼지 낀 책 홀로 열람하며 야반을 넘기노라니,
一燈分照兩年人
하나의 등불이 두 해의 사람을 나누어 비춰 주네.
송고영신(送故迎新)
한 해가 저문다. 느끼기에 따라 세월이 더디 가는 사람도, 살보다 더 빨리 지나간다고 아우성인 사람도 있겠다. 매년 연말이면 언론사서 국내외 큼직한 뉴스를 정리하며 다사다난(多事多難)이란 단골 표현을 사용하는데 올해도 비선실세, 대통령 탄핵 등 정치권 이야기로 얼룩졌다.
그러니 하루 빨리 지난 것을 보내고(送故), 미래의 희망을 그리며 새 것을 맞이하는(迎新) 이말이 이즈음에 딱 맞는 말이다. 원래의 뜻은 구관을 보내고 신관(新官)을 맞이한다는 뜻에서 새해맞이로 의미가 넓어졌다. 송구영신(送舊迎新), 송왕영래(送往迎來)와 써도 같은 뜻이다.
후한(後漢)시대, 반고(班固)의 한서(漢書)에 이 성어가 먼저 사용됐다. 왕가(王嘉)란 사람은 자(字)가 공중(公仲)으로 어릴 때부터 성격이 강직하고 할 말은 과감(過感)하여 주위의 신망을 받았다. 서한(西漢)의 13대 왕 애제(哀帝)에 의해 재상으로 발탁됐다.
왕가(王嘉)는 바른 의견을 제시하며 인제도 잘 골라 추천했기 때문에 왕도 크게 신임했다. 그가 올린 상소문 중에 구임자를 보내고 신임자를 맞는다는 뜻으로 쓴 예(例)가 처음 나온다. 이전부터 관직은 대대(代代)로 맡았는데 창(倉)씨나 고(庫)씨처럼 창고 일을 맡아보던 집안에서의 성씨가 됐다. "관리가 수개월만 직책에 있다가 물러나도, 보내고 맞이하느라 서로 뒤섰여 도로 혼잡했습니다(吏或居官數月而退, 送故迎新 交錯道路)."
왕가전에 실려 있다. 애제(哀帝)는 동현(董賢)이란 미소년을 사랑하여 동성애를 뜻하는 단수지폐(斷袖之嬖)의 유래가 된 바로 그 왕이다. 동현을 가까이 두고 정사를 팽개쳐 여론이 좋지 않자 왕가는 이 꼴을 보다 못해 '천 사람이 손가락질을 하면 병이 없어도 죽는다(千人所指 無病而死)'고 하며 깨우쳤다. 그러다 도리어 왕의 미움을 받아 감옥에 갇히고 20일 동안 굶어 아사했다.
남당북송(南唐北宋) 초기의 관리이자 문학가인 서현(徐鉉)의 제야(除夜)란 시에 등장하는 구절을 보자. "찬 겨울 밤 등불은 깜빡이고 시간은 더디 가건만, 옛 것을 보내고 새 것을 맞는 일은 속임이 없구나(寒燈耿耿漏遲遲, 送故迎新了不欺)."
가는 해 오는 해 마찬가지이지만 올해의 고초는 잊고 희망과 함께 새해를 맞이하려는 사람이 많다. 모두 복된 새해가 되기를 기원한다.
송구영신(送舊迎新)
옛것을 보내고 새것을 맞음으로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음에 비유하는 말이다.
우리는 매해 연말(年末)이 되면 어김없이 한해를 돌아보고, 또 다가올 한해를 맞이하고자 하는 기대감으로 마음이 설레곤 한다. 그러한 마음을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송구영신(送舊迎新)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곧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맞는다'는 뜻이다. 이는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다'는 문장으로 사용하며 흔히들 희망과 기대감에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다'는 새로움을 바라는 메시지로 널리 애용하고 있다.
본 성어(成語)는 기원전 655년 주(周)나라 정왕(定王)시대에 예악(禮樂)을 담당하는 양호자(陽虎子)가 대부들에게 말하기를 "해마다 저물고 다시 떠오르니 이는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취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묵은 해를 버리고 새해를 맞이하는 희망의 의미로 송구영신(送舊迎新)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고려사(高麗史)에 송구영신(送舊迎新)이란 말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곧 '공양왕(恭讓王) 2년에 수령(守令)들의 교체가 너무 빈번하다며 임기 3년을 채우면 조정에서는 구관(舊官)을 보내고, 신관(新官)을 맞이하는데 있어서 그 폐해가 적지 않다'는 다소 부정적인 대목이 보인다. (且送舊迎新其弊不?/ 고려사 권75)'
조선왕조실록에도 송구영신(送舊迎新)이 고려와 같은 의미로 여러 차례 등장한다. 세종실록에 '세종 26년(1444년) 수령들을 대량으로 파면(罷免)한다면 옛 수령을 보내고 새 수령을 맞이하는 폐해(弊害)가 있다'는 내용이 보인다. (非特有送舊迎新之弊)
이러한 사실로 볼 때 우리와 중국의 용어에 대한 쓰임새가 달랐고, 지금은 그 용어의 쓰임이 중국의 희망과 기대에 부응하는 의미로 함께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새것을 좋아하지 않는 경우가 있겠는가? 그런데 고전인 '
서경(書經) 상서(商書) 반경 상(盤庚 上)편에는 이러한 구절이 보인다. "사람은 옛 사람을 구하고, 그릇은 옛 것을 구할 것이 아니라 새 그릇을 쓰라(人惟求舊 器非求舊 惟新/ 인유구구 기비구구 유신)"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사람은 오래되면 직무에 익숙하면서, 그 진실된 마음을 알 수 있으나, 그릇은 오래되면 망가지니 이는 사람을 접함에는 옛 사람을 부리거나 사귀고, 그릇은 마땅히 새 것을 사용하여야 한다'라고 할 수 있겠다. 모든 것이 새것만이 꼭 좋은 것은 아니다.
어쨌든 우리는 언제부터인지는 송구영신(送舊迎新)이란 말을 한해 가는 것에 대한 서운함과 새로운 것에 대한 희망을 표현하는 말로 대신하게 되었는데, 이는 자연의 이치 가운데 매번 같은 주기로 어김없이 바뀌는 1년의 현상이 처음과 끝이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점을 관찰하여 보냄(送舊)과 기다림(迎新)의 표현으로 잘 그려내고 있다.
순자(荀子) 법행편(法行篇)편)에도 "군자는 몸을 바르게 하여 기다릴 뿐이다. 오고 싶어 하는 사람은 거절하지 아니하고,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붙들지 않는다(君子 正身以俟 欲來者不拒 欲去者不止/ 군자 정신이사 욕래자불거 욕거자부지)"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가고 오는 자연현상에 사욕(私慾)을 초월(超越)한 처세술(處世術)의 좋은 교훈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 보내는 것은 서운해하며, 오는 것은 기대가 되고 바람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1년 365일을 함께 생활한 긴 시간이 가는데 서운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추억보다는 희망이 훨씬 사람 마음을 설레고 기다리게 하지만, 한편 깊이 생각해보면 오는 것에 대한 기대보다 가는 것에 대한 돌아봄이 더 중요하다. 그 이유는 1년의 세월을 잘 돌아보고 분석해보아야 그 내용을 기초로 다가오는 새로운 1년을 유익하고 성취 가능한 계획을 수립하여 추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또 치솟는 새로운 기운의 새해를 맞게 된다. 막연히 새로운 시간이라는 희망에만 도취되지 말고 가는 지난 일을 잘 돌아보고 분석하여 새로이 맞는 1년을 알차고 유익하며 즐거움과 행복으로 보내는 준비가 더 소중하다고 생각된다.
송구영신(送舊迎新)의 마음가짐
한 해가 저물고 새로운 해가 시작되는 것은 자연의 당연한 섭리이지만,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분위기는 사회의 상황에 따라서 매우 다르다. 특히 한해의 말미에서 송구영신의 의미는 우리에게 특별하다.
우리는 지금 문명대전환의 혼란기에 살고 있다. 외부 요인들이 변화의 격랑 속에 있는 와중에서, 설상가상으로 우리는 내부적으로도 정치, 경제 등 모든 영역에서 큰 시련을 맞이하고 있다. 변화는 늘 새로운 위기를 동반하지만, 지금의 변화는 모든 악조건이 하나로 응집되어 대폭발을 앞두고 있는 최악의 상황이다. 현상의 변화이치를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역(易)에서, 대위기의 상황을 대기회의 전기로 삼는 지혜를 찾아보자.
본질적으로 보면,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아무리 큰 변화도 우주의 거대한 흐름을 막을 수 없는 티끌 같은 미미한 움직임에 불과하다. 그러나 현상적 측면에서 보면, 우리에게 현재 닥치고 있는 변화는 절체절명의 기로에서 선택을 강요하고 있는 엄청난 충격이다. 이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주역은 무엇을 선택하기보다는, 바른 이치를 추구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역(易)은 음양의 변화를 통해 세상의 흐름을 설명하고 있다. 양(陽)을 대표하는 중천건(重天乾)과 음(陰)을 대표하는 중지곤(重地坤)에서, 변화에 대처하는 마음가짐을 알려주는 대목이 있다.
먼저 중천건 용구(用九)에, "뭇 용이 머리를 감추니, 길하다(見群龍无首, 吉)"는 내용이 나온다. 용구는 중천건의 특별한 효(爻)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양(陽)의 본질적 의미와 활용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뭇 용(群龍)'은 미래사회를 이끌어갈 각계각층의 지도자를 의미한다. 여기서 핵심은 '무수(无首)'라는 말이다.
이 말의 뜻을 자세히 음미해 보면, 변화를 대하는 바른 마음자세를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첫째, 앞에 나서지 않고 일을 처리하는 것이 순리다. 이 해석은 노자가 도덕경(道德經)에서 삶의 원칙으로 내세운 세 가지 원칙 중의 하나인, "감히 세상사람 앞에 먼저 나서지 않는다(不敢?天下先)"는 말씀과 통한다. 크게 되려는 사람은 낮은 곳에 처할 줄 알아야 한다는 이치를 담고 있다.
둘째, 관념적 사고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세상을 바르게 볼 수 있다. 세상은 관념으로 존재한다. 우리가 상대하는 모든 대상에는 우리의 관념이 투영되어 있다. 사람마다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다르기 때문에, 옳고 그름에 관한 판단기준이 서로 다를 수 있다. 서로가 다른 관점으로 대치하면, 끝없는 갈등을 야기할 뿐이다. 편견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상대를 바라볼 때, 개인과 사회의 안정적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 객관성을 기르는 제일 좋은 방법은 자기중심적인 분별과 감정을 배제하고, 제3자의 입장에서 자신과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훈련이다.
셋째, 변화의 방향은 정해져 있지 않다. 변화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대세를 따라간다. 변화를 주도하고자 하는 세력들 사이에서 상호작용의 결과에 따라 변화의 방향은 달라진다. 물질과 정신의 융합이 미래사회의 화두이지만,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구현될지는 아무도 예단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변화흐름의 양면인 작용과 반작용을 동시에 고려하고, 도리에 맞게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의 자세로, 미래를 대비하며 현재를 성실하게 사는 것이 최선이다.
넷째, 음양의 율려작용(律呂作用)은 자연스런 생명현상이다. 모든 자연현상은 음양, 즉 생명력의 발산과 수렴의 양극단으로 나뉘어, 서로 갈등하는 과정을 거쳐 중화되기 마련이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나와 상대하는 편은 내가 존재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묘하게도 내 적이 나를 살리는 보호막인 셈이다. 같은 맥락에서,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은 산문 '보상'에서 "비난이 칭찬보다 안전하다"는 말을 했다. 증오는 상대의 세력을 더욱 키울 뿐이다. 상대가 진실로 잘못되었다면, 상대의 행태를 반면교사로 삼아 나의 도리를 찾는 것이 최상의 길이다.
한편 음(陰)이 대표하는 의미는 중지곤 용육(用六)에서 볼 수 있다. 공자는 용육에 대한 해설에서, "상사에서 이르기를, 용육으로 영원히 올곧으면, 위대하게 끝맺게 된다(象曰, 用六永貞, 以大終也)"고 말씀했다. 용육은 '올곧음(貞)'의 도리와 그 결과를 암시한다.
첫째, 올곧음은 변화의 위험 속에서도 바름을 지켜나가는 도리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지만, 올곧은 도리는 영원히 존재한다. 도리에 어긋난 세력들이 세상을 소유할 것 같지만, 결국 세상은 바른 도리를 따르는 쪽으로 선회하기 마련이다.
둘째, 올곧음은 변화의 흐름을 따른다. 지금 세상은 AI가 주도하는 변혁의 시기에 있다. 인류문명은 폐쇄적인 물질문명사회에서 개방적인 융합문명사회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AI가 정보통신기술, 양자물리학, 심신의학 등과 같은 첨단과학기술에 적용되어 이러한 변화를 가속화하고 있다. 선진국은 이미 문명의 대전환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는데, 우리가 작은 밥그릇 싸움 때문에 서로 미워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는 선진국 문턱을 넘어가지도 못하고, 대세의 흐름에서 낙오될 수 있다. 우리가 살길은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고, 바른 도리를 회복하는 수밖에 없다.
셋째, 올곧음은 곧 중정(中正)의 이치다. 중정이란 중도(中道)와 정도(正道)를 함께 일컫는 말이다. 그 뜻은 앞서 언급한 자연 현상으로서 음양의 율려작용과 일치하고, 정신문화로서 바른 도덕을 의미한다. 지금은 AI가 물질문명을 극단으로 몰고 가고 있다. 그러나 물질이 극에 이르면, 반드시 물질과 정신의 지나친 불균형에 대항하는 반작용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때 인간이 물질문화에 걸맞은 정신문화를 확립하지 못하면, 물질이 인간의 주인이 되는 주객전도의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변화에도 도리가 있고, 바른 도리에 역행하면 인류는 살아남기 힘들다.
넷째, 올곧음은 변화에 따른 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다. 변화의 3요소인 천지인(天地人), 즉 시간과 공간과 사람의 관계는 모두 시작하는 대로 끝나고, 끝나는 대로 다시 시작한다. 역의 시간관념은 시종(始終)이 아니라, 종시(終始)다. 이러한 이치로 '위대한 끝맺음(大終)'은 '위대한 시작(大始)'를 낳는다. 중점은 끊임없는 생명활동의 연속에 있다. 다만 3요소의 관계가 균형을 유지하는 정도는 종시(終始)와 성패(成敗)의 대소(大小)를 좌우할 따름이다. 바른 도리는 끝과 시작을 단단하게 맺어주는 역할을 한다.
역(易)이 주는 교훈은 결국 양극적 대상에 걸림 없는 지혜가 대변혁의 시기를 밝히는 등불임을 알려주고 있다. 바른 지혜는 우리 모두가 하나의 생명공동체를 이루고 있다는 자각에서 싹튼다. 미움과 편견은 우리 자신을 우물 안 개구리로 만들 뿐이다. 바른 도리에 대한 믿음이 진정한 믿음이다. 모든 성인(聖人)은 표현을 달리 했을 뿐 공통적으로 중정(中正)의 도리를 말씀했다. 모든 존재를 감싸는 하나의 생명의식으로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고, 힘차게 새날을 맞이하자.
▶️ 送(보낼 송)은 ❶회의문자로 웃으면서(笑) '떠나 보낸다'는 뜻이 합(合)하여 '보내다'를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送자는 '보내다'나 '전달하다', '배웅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送자는 辶(쉬엄쉬엄 갈 착)자와 灷(불씨 선)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灷자는 양손에 불씨를 들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불씨'라는 뜻이 있다. 이렇게 불씨를 그린 灷자에 길을 그린 辶자가 결합한 送자는 불씨를 들고 길을 나서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손님이 돌아가는 길을 밝혀 안내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送(송)은 ①보내다 ②전달(傳達)하다 ③전송(餞送)하다, 배웅하다 ④다하다 ⑤알리다 ⑥쫓다, 쫓아버리다 ⑦선물(膳物)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보낼 견(遣), 보낼 수(輸), 보낼 전(餞), 보낼 궤(饋),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받을 수(受), 맞을 영(迎)이다. 용례로는 헤어지거나 멀리 떠나는 사람을 보냄을 송별(送別), 떠나는 사람을 보내는 일과 오는 사람을 맞아들이는 일 또는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음을 송영(送迎), 제자리에 되돌려 보냄을 송환(送還), 돈을 부쳐 보냄을 송금(送金), 편지나 전보 등의 통신을 보냄을 송신(送信), 서류나 물건 등을 보냄을 송치(送致), 전기를 보냄을 송전(送電), 묵은 한해를 보냄을 송년(送年), 송별을 위하여 베푸는 연회를 송연(送宴), 물건을 운반하여 보냄을 운송(運送), 기차나 자동차 등의 운송 수단으로 물건을 실어 보냄을 수송(輸送), 물건을 부침을 발송(發送), 사진이나 그림 따위를 전기의 작용에 의하여 먼 지역으로 보냄을 전송(電送), 도로 돌려 보냄을 반송(返送), 떠나는 사람을 축복하고 기쁜 마음으로 보냄을 환송(歡送), 때를 헛되게 그저 보냄을 허송(虛送), 간접으로 남의 손을 거쳐서 물건을 보냄을 전송(轉送), 다른 곳으로 옮겨 보냄으로 재판하기 위하여 죄수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을 말함을 이송(移送), 물건이나 편지 따위를 우편으로 보냄을 우송(郵送),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다는 뜻으로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함 또는 구관을 보내고 신관을 맞이함을 이르는 말을 송구영신(送舊迎新), 가는 사람을 배웅하고 찾아오는 사람을 맞이한다는 말을 송왕영래(送往迎來), 세월을 헛되이 보냄을 이르는 말을 허송세월(虛送歲月), 눈 속에 있는 사람에게 땔감을 보내준다는 뜻으로 급히 필요할 때 필요한 도움을 줌을 이르는 말을 설중송탄(雪中送炭), 비 온 뒤에 우산을 보낸다는 뜻으로 이미 지나간 일에 쓸데없는 말과 행동을 보태는 경우를 이르는 말을 우후송산(雨後送傘), 한 고을이나 한 동네에서 풍속을 어지럽힌 사람을 사회적 제재로서 그 집을 헐어 없애고 동네 밖으로 내쫓음을 일컫는 말을 훼가출송(毁家黜送) 등에 쓰인다.
▶️ 舊(예 구/옛 구)는 ❶형성문자로 旧(구)는 간자(簡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동시(同時)에 음(音)을 나타내는 절구구변(臼; 절구)部와 머리에 갈대털인 초두머리(艹=艸; 풀, 풀의 싹)部와 같은 귀를 가진 새 추(隹; 새)部인 부엉이의 뜻이 합하였으나 久(오랠 구)와 음(音)이 같다고 하여 '오래다'로 뜻한다. ❷상형문자로 舊자는 '오래되다'나 '옛'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舊자는 萑(풀 많을 추)자와 臼(절구 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舊자는 본래 ‘수리부엉이’를 뜻하기 위해 만든 글자였다. 수리부엉이는 짙은 눈썹이 특징이다. 그래서 갑골문에서는 새를 뜻하는 隹(새 추)자 위로 눈썹을 그려 넣었었다. 또 아래로는 口(입 구)자가 있었는데, 이것은 둥지에 있는 수리부엉이를 묘사한 것이다. 이러한 모습이 후에 萑자와 臼자의 결합으로 표현되었다. 다만 이러한 유래와는 관계없이 舊자는 久(오랠 구)자와 음이 같다는 이유로 '오래되다'라는 뜻으로 가차(假借)된 글자이다. 획이 복잡한 글자로 뜻이 옮겨지는 경우는 흔치 않기에 매우 이례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그래서 舊(구)는 어떤 명사(名詞)의 어간(語幹)에 붙어서 '옛날의, 묵은, 낡은' 따위의 뜻을 나타내는 말로 ①예, 옛 ②오래 ③늙은이 ④친구(親舊) ⑤구의(舊誼: 예전에 가까이 지내던 정분) ⑥묵은 사례(事例) ⑦오랜 집안 ⑧평소(平素), 일상(日常) ⑨부엉이(올빼밋과의 새), 올빼미(올빼밋과의 새) ⑩오래다 ⑪오래되다, 묵다,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새 신(新)이다. 용례로는 옛 모습을 구태(舊態), 이전부터 알고 있는 사람을 구면(舊面), 먼젓번의 수령을 구관(舊官), 이전에 들은 소문을 구문(舊聞), 옛적 버릇이나 예로부터 내려오는 습관을 구습(舊習), 옛스러운 방식을 구식(舊式), 오래 사귄 친구를 구교(舊交), 예로부터 내려 옴을 구래(舊來), 오랫동안 여러 대로 살던 집으로 옛 사람이 살던 집을 구택(舊宅), 오래 전에 간행된 출판물을 구간(舊刊), 오래 두고 가깝게 사귄 벗을 친구(親舊), 그전 모양으로 되게 함을 복구(復舊), 진보적인 것을 따르지 않고 예부터 내려오는 관습을 따름을 수구(守舊), 새 것과 헌 것을 신구(新舊), 오래 오래 사귀어 온 친구를 고구(故舊), 옛날과 같음을 여구(如舊), 옛 모양과 변함 없음을 의구(依舊), 지난 일을 생각함을 감구(感舊), 옛날과 비교함을 비구(比舊), 옛 자취를 돌이켜 생각함을 억구(憶舊), 오래 전부터 사귀던 사이를 이르는 말을 구교지간(舊交之間), 오랫동안 헤어져 있는 친구를 이르는 말을 구년친구(舊年親舊), 옛 친구와 새 친구를 일컫는 말을 구우금우(舊友今友), 옛 모양 그대로를 이르는 말을 구태의연(舊態依然), 묵은 활과 새 화살이란 뜻으로 그래야만 잘 맞는다는 데서 나온 말을 구궁신시(舊弓新矢), 오래 전부터 배어 든 나쁜 풍속을 이르는 말을 구염오속(舊染汚俗), 제사 지내 줄 자손의 대가 다한 위패를 땅에 묻음을 이르는 말을 구주매안(舊主埋安),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다는 뜻으로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함 또는 구관을 보내고 신관을 맞이함을 이르는 말을 송구영신(送舊迎新), 경개는 수레를 멈추어 깁양산을 기울인다는 뜻으로 한번 만나보고 친해진다는 말로 잠시 만났어도 구면처럼 친함을 이르는 말을 경개여구(傾蓋如舊), 남의 잘못이나 개인적인 원한을 마음에 새겨두지 않는 것을 이르는 말을 불념구악(不念舊惡), 처음으로 만났을 뿐이지만 마음이 맞고 정이 들어 옛날부터 사귄 벗같이 친밀함을 이르는 말을 일견여구(一見如舊) 등에 쓰인다.
▶️ 迎(맞을 영)은 ❶형성문자로 迊(영)과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책받침(辶=辵; 쉬엄쉬엄 가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同時)에 우러러 본다는 뜻을 가진 글자 卬(앙, 영)으로 이루어졌다. 오는 사람을 우러러 맞이한다는 뜻을 나타낸다. ❷회의문자로 迎자는 '맞이하다'나 '영접하다', '마중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迎자는 辶(쉬엄쉬엄 갈 착)자와 卬(나 앙)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卬자는 서 있는 사람과 무릎을 꿇은 사람을 함께 그린 것으로 이전에는 '우러르다'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迎자는 이렇게 우러러 모신다는 뜻을 가진 卬자에 辶자를 결합한 것으로 길에서 누군가를 정중히 맞이한다는 뜻을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迎(영)은 ①맞다 ②맞이하다 ③영접(迎接)하다 ④마중하다 ⑤맞추다 ⑥~를 향하여 ⑦~쪽으로 ⑧마중,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보낼 송(送), 보낼 전(餞)이다. 용례로는 맞아 들임을 영입(迎入), 남의 마음에 들도록 힘씀을 영합(迎合), 손님을 맞아서 대접함을 영접(迎接), 설을 맞는 일을 영세(迎歲), 한 해를 맞이함을 영년(迎年), 제사 때 신을 맞아 들임을 영신(迎神), 달이 뜨는 것을 구경하거나 맞이하는 일을 영월(迎月), 손님을 맞음을 영빈(迎賓), 새로운 것을 맞아 들임을 영신(迎新), 맞아들이어 만나봄을 영견(迎見), 맞음과 보냄을 영송(迎送), 남의 마음에 들도록 노력함을 영의(迎意), 기쁜 마음으로 맞음을 환영(歡迎), 떠나는 사람을 보내는 일과 오는 사람을 맞아들이는 일 또는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음을 송영(送迎), 남의 뜻을 맞추어 줌을 봉영(逢迎), 마중 나감을 출영(出迎), 오는 사람을 바라보고 맞음을 목영(目迎), 새로 맞이함을 신영(新迎), 친히 맞이함으로 신랑이 신부네 집에 가서 신부를 직접 맞음 또는 그 의식을 친영(親迎), 성문 밖에 나가서 마중함을 교영(郊迎), 인도하여 맞이함을 도영(導迎), 귀인이나 덕망이 높은 이를 맞이함을 봉영(奉迎), 칼날에 맞아 실올처럼 잘게 해체된다는 뜻으로 하는 일이 막힘 없이 순조롭게 잘 되어 감을 이르는 말을 영인루해(迎刃縷解), 일이 스스로 아주 쉽게 해결된다는 말을 영인자해(迎刃自解),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다는 뜻으로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함 또는 구관을 보내고 신관을 맞이한다는 말을 송구영신(送舊迎新), 자기의 주견이 없이 남의 말에 아부하며 동조한다는 말을 아부영합(阿附迎合), 문을 열어 반가이 맞아 들임을 이르는 말을 개문영입(開門迎入), 온화한 기색으로 남의 환심을 사는 일을 이르는 말을 도영화기(導迎和氣), 윗사람이나 반가운 사람을 높이는 뜻으로 방에서 마당으로 내려와서 맞이한다는 말을 하당영지(下堂迎之), 가는 사람을 배웅하고 찾아오는 사람을 맞이한다는 말을 송왕영래(送往迎來) 등에 쓰인다.
▶️ 新(새 신)은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날 근(斤; 도끼)部와 木(목)과, 음(音)을 나타내는 辛(신)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辛(신; 바늘)과 木(목; 나무)으로 이루어진 진(榛; 개암나무, 잡목숲)의 옛 글자에 斤(근; 나무를 베는 도끼)을 더한 글자이다. 나무를 베어 땔나무를 하는 일을 말한다. 나중에 나무를 하다가 되었다. 땔나무의 뜻은 초목(草木)을 나타내는 초두머리(艹=艸; 풀, 풀의 싹)部를 더하여 薪(신)이라 쓰고, 新(신)은 베다, 새롭다, 새롭게 하다의 뜻으로 쓴다. ❷회의문자로 新자는 ‘새로운’이나 ‘새롭게’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新자는 辛(매울 신)자와 木(나무 목)자, 斤(도끼 근)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런데 갑골문에 나온 新자를 보면 辛자와 斤자만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나무를 잘라 땔감으로 만든다는 뜻이었다. 여기서 辛자는 발음요소이고 斤자가 ‘자르다’라는 뜻을 전달하고 있다. 금문에서는 여기에 木자가 더해지게 되면서 지금의 新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新자는 본래 나무를 잘라 ‘땔감’을 만든다는 뜻이었지만 후에 나무를 자르고 다듬어 ‘새로운 물건을 만든다.’라는 뜻이 확대되면서 ‘새로운’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新자가 ‘새롭다’라는 뜻으로 가차(假借)되면서 소전에서는 여기에 艹(풀 초)자를 더한 薪(섶나무 신)자가 ‘땔감’이라는 뜻을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新(신)은 (1)어떠한 명사(名詞) 뒤에 붙이어 새로운의 뜻을 나타내는 말 (2)중국(中國) 나라 이름의 하나. 왕 망(王莽)이 전한(前漢)을 쓰러뜨리고 세운 나라. 주례(周禮)에 따라 복고적인 개혁(改革)을 했으나, 적미(赤眉)의 난으로 망(亡)하여 광무제(光武帝)의 후한(後漢)으로 바뀜 (3)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새, 새로운 ②새로, 새롭게, 새롭게 다시 ③처음, 처음으로 ④새로움, 새것, 새로운 일 ⑤새해, 신년 ⑥새롭개 안 사람 ⑦새로 개간(開墾)한 땅 ⑧나라의 이름 ⑨새로워지다, 개선되다 ⑩새롭게 하다, 새롭게 고치다 ⑪친하다, 친하게 지내다,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옛 고(古), 옛 구(舊)이다. 용례로는 새로운 세계를 신세계(新世界), 예술계나 체육계나 어떤 사회에 새로 등장한 신진의 사람을 신인(新人), 관직 같은 데에 새로 임명됨을 신임(新任), 새로 지어 만듦을 신작(新作), 새로 들어옴을 신입(新入), 출판물을 새로 인쇄하여 내놓음을 신간(新刊), 새로운 물품을 신품(新品), 새로운 형을 신형(新型), 새롭고 기이함을 신기(新奇), 새로운 소식이나 비판을 신속하게 보도하는 정기간행물을 신문(新聞), 완전히 새롭게 어떤 일을 하는 일을 신규(新規), 새롭고 산뜻함 또는 채소나 생선 따위가 싱싱함을 신선(新鮮), 새로 설치함을 신설(新設), 새로 건축함을 신축(新築), 늦은 봄이나 초여름의 초목에 돋은 새 잎의 푸른 빛을 신록(新綠), 갓 결혼한 남자 또는 결혼하여 새서방이 될 남자를 신랑(新郞), 갓 결혼한 색시 또는 결혼하여 새색시가 될 여자를 신부(新婦), 일체의 묵은 제도나 방식을 고쳐서 새롭게 함을 혁신(革新), 묵은 것을 없애고 새롭게 함을 쇄신(刷新), 모든 것이 개혁되어 새롭게 됨 또는 묵은 제도를 아주 새롭게 고침을 유신(維新), 취향이 매우 새로움을 참신(斬新), 옛 것을 고쳐 새롭게 함 또는 종전의 기록을 깨뜨림을 경신(更新), 가장 새로움을 최신(最新), 묵은 것을 새롭게 고침을 개신(改新), 새로운 것을 앎을 지신(知新), 새로운 것을 맞아 들임을 영신(迎新), 아주 새로워짐을 일신(一新), 묵은 것이 없어지고 새것이 대신 생기거나 들어서는 일을 이르는 말을 신진대사(新陳代謝), 새로 정이 들어 얼마 되지 아니할 때를 이르는 말을 신정지초(新情之初), 새 것과 헌 것이 교대한다는 말을 신구교대(新舊交代), 새 것이 들어오고 묵은 것이 나간다는 말을 신입구출(新入舊出), 새로 두각을 나타낸 신인으로서 의기가 날카롭다는 말을 신진기예(新進氣銳), 땔감을 동나서 불이 꺼진다는 말을 신진화멸(新盡火滅), 새봄 좋은 명절이라는 말을 신춘가절(新春佳節)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