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참마속(泣斬馬謖) 사자성어 의미

 읍참마속(泣斬馬謖) 사자성어  의미

                                                      읍참마속(泣斬馬謖) - 고사성어 - jang1338

읍참마속(泣斬馬謖 ‘울며 마속을 베다’) 또는 휘루참마속(揮淚斬馬謖)은 중국 삼국시대에 촉의 제갈량이 평소 중용했던 부하인 마속이 명을 어기고 위에 대패(大敗)한 것을 두고 울며 참형에 처했다는 (또는 울며 참형을 명했다는) 〈촉지〉 마속전(馬謖傳)의 고사(故事)로부터 유래한 성어로, 규율을 지키기 위해 설령 아끼는 이라 할지라도 위반자는 엄격하게 처분해야 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촉의 무장인 마속이 가정 전투에서 제갈량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패전을 초래했다. 제갈량은 가정 전투에서의 대패로 인해 한중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 이막(李邈)이 마속의 구명을 청했음에도 하옥했다가 죽였다. 나이 39세였다. 마속은 아버지와 아들처럼 지내던 제갈량에게 자식을 부탁한다는 유서를 남겼다. 제갈량은 우는 장병들 앞에서 같이 눈물을 흘리며 친히 제사 지내고 그 자식을 돌보아 주었다. 참수했다는 서술은 없지만 성어는 이러한 고사에서 유래했으며 제갈량휘루참마속(諸葛亮揮淚斬馬謖)이라고도 한다.

처형 후에 장완은 마속과 같이 유능한 장수를 처형한 것을 아쉽게 여겼으나, 제갈량은 ‘군율(軍律)의 준수가 최우선’이라고 답하였다.

'울면서 마속을 베다'라는 뜻으로, '규율과 원칙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아끼는 사람을 눈물을 머금고 처단한다'는 의미의 고사성어이다.

삼국지에 나온다. 마속이 군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서 장합에게 대패하자, 제갈량이 법을 바로 세우기 위해 자신이 아끼는 마속을 울면서 참수했다는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 해당 이야기가 나오는 삼국지연의의 소제목이 '공명이 눈물을 뿌리며 마속을 베다 (孔明揮淚斬馬謖)'여서, '읍참마속 (泣斬馬謖)'이라는 고사성어로 불리게 되었다. 단, 해당 이야기를 기록한 삼국지 정사의 내용과 삼국지연의의 내용이 조금 다르다.

良弟謖,字幼常,以荊州從事隨先主入蜀,除緜竹成都令、越嶲太守。才器過人,好論軍計,丞相諸葛亮深加器異。先主臨薨謂亮曰:「馬謖言過其實,不可大用,君其察之!」亮猶謂不然,以謖為參軍,每引見談論,自晝達夜。襄陽記曰:建興三年,亮征南中,謖送之數十里。亮曰:「雖共謀之歷年,今可更惠良規。」謖對曰:「南中恃其險遠,不服乆矣,雖今日破之,明日復反耳。今公方傾國北伐以事彊賊。彼知官勢內虛,其叛亦速。若殄盡遺類以除後患,旣非仁者之情,且又不可倉卒也。夫用兵之道,攻心為上,攻城為下,心戰為上,兵戰為下,願公服其心而已。」亮納其策,赦孟獲以服南方。故終亮之世,南方不敢復反。

建興六年,亮出軍向祁山,時有宿將魏延、吳壹等,論者皆言以為宜令為先鋒,而亮違衆拔謖,統大衆在前,與魏將張郃戰于街亭,為郃所破,士卒離散。亮進無所據,退軍還漢中。謖下獄物故,亮為之流涕。良死時年三十六,謖年三十九。襄陽記曰:謖臨終與亮書曰:「明公視謖猶子,謖視明公猶父,願深惟殛鯀興禹之義,使平生之交不虧於此,謖雖死無恨於黃壤也。」于時十萬之衆為之垂涕。亮自臨祭,待其遺孤若平生。蔣琬後詣漢中,謂亮曰:「昔楚殺得臣,然後文公喜可知也。天下未定而戮智計之士,豈不惜乎!」亮流涕曰:「孫武所以能制勝於天下者,用法明也。是以楊干亂法,魏絳戮其僕。四海分裂,兵交方始,若復廢法,何用討賊邪!」習鑿齒曰:諸葛亮之不能兼上國也,豈不宜哉!夫晉人規林甫之後濟,故廢法而收功;楚成闇得臣之益己,故殺之以重敗。今蜀僻陋一方,才少上國,而殺其俊傑,退收駑下之用,明法勝才,不師三敗之道,將以成業,不亦難乎!且先主誡謖之不可大用,豈不謂其非才也?亮受誡而不獲奉承,明謖之難廢也。為天下宰匠,欲大收物之力,而不量才節任,隨器付業;知之大過,則違明主之誡,裁之失中,即殺有益之人,難乎其可與言智者也。

마량의 동생 마속(馬謖)은 자(字)가 유상(幼常)이다. 형주에서 좇아 섬김으로써 유비를 따라 촉(蜀)에 들어왔고, 면죽(緜竹) · 성도령(成都令)과 월수태수에 임명되었다. 재주와 기량이 남을 뛰어넘었고, 군사 계획을 논하는 것을 좋아해서, 승상 제갈량은 더더욱 달리 소중하게 여겼다. 유비가 죽음에 임해서 제갈량에게 말하길, "마속은 말이 실제보다 지나치니 크게 써서는 안 되오. 그대는 그걸 살피시오!"라고 했다. 제갈량은 오히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고는 마속을 참군(參軍)으로 삼고 매번 불러서 낮부터 밤까지 담론을 나누었다. 《양양기 襄陽記》에서 말하길, 건흥 3년(서기 225년), 제갈량은 남중(南中)[2]을 정벌하였는데, 마속(馬謖)은 수십 리를 배웅하였다. 제갈량이 말했다. "비록 함께 상의한지가 몇년이 지났지만 오늘도 좋은 방법을 다시 베풀어 보시오." 마속이 대답했다. "남중은 험하고 먼 것을 믿고 복종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으니, 비록 오늘 격파하여도 내일 다시 배반할 뿐입니다. 이제 공께서 장차 나라를 기울여 북벌하여 굳센 도적을 다스리려 하시는데, 저들은 관부(官府)의 힘이 안에서 빌 것을 알아서 그 반역 또한 빠릅니다. 만약 남은 무리를 다 죽여서 후환을 없앤다면 이미 어진 자의 뜻이 아니고, 또한 급작스럽게 할 수도 없습니다. 무릇 군대를 쓰는 도리는 마음을 공격하는 것이 상책이고, 성을 공격하는 것은 하책이며, 심리전을 하는 것이 상책이고, 군대로 싸우는 것은 하책이니, 원컨대 공께서는 그 마음을 복종시켜야할 뿐입니다." ​제갈량은 그 계책을 받아들여 맹획의 죄를 사면함으로써 남방을 복종시켰다. 그러므로 제갈량의 시대에 남방은 감히 다시 반란을 일으키지 못했다.

건흥 6년(228년), 제갈량은 기산(祁山)을 향해 군대를 출동시켰다. 이때 나이 많은 장수로 위연과 오일 등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모두 이들을 마땅히 선봉으로 명해야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제갈량은 사람들을 거스르고 마속을 뽑아 대군을 거느리고 앞에 있게 했다. (마속은) 위나라 장수 장합과 가정에서 싸워 장합에게 격파당했고, 병사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제갈량은 진군에 거점을 잃어, 군대를 한중으로 돌려 퇴각했다. 마속은 하옥되어 죽임을 당했다. 제갈량은 눈물을 흘렸다. 마량이 죽을 때의 나이는 36세였고, 마속은 39세였다. 《양양기 襄陽記》에서 말하길, 마속이 죽기 전 제갈량에게 준 글에서 "승상께선 저를 아들처럼 대하셨고, 저는 승상을 아버지처럼 대했습니다. 원컨대 곤(鯀)을 죽이고 우(禹)를 흥하게 한 뜻을 깊이 생각하시어 평생의 사귐이 이 때문에 무너지지 않도록 하시면, 저는 비록 죽지만 황천에서도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으니, 당시 십만의 군중들이 눈물을 흘렸다. 제갈량은 스스로 제사에 임했고, 유족을 평생 홀로 모셨다. 장완(蔣琬)이 후에 한중에 와서 제갈량에게 말했다. "옛날에 초나라가 성득신(成得臣)을 죽인 뒤에야, 진문공이 기뻐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는데, 지혜로운 계책을 세우는 선비를 죽이는 것이 어찌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제갈량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손자가 이른바 천하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법을 운용하는 데 밝았기 때문이오. 이 때문에 양간이 법을 어지럽히자 위강이 그의 노복을 죽였소.[3] 온 세상이 분열되고 군대의 교전이 막 시작되었는데, 만약 다시 법을 폐한다면, 무얼 써서 적을 토벌하겠소?" 습착치(習鑿齒)[4]는 말한다. 제갈량이 나라에 올림(上國)[5]을 겸할 수는 없으니 어찌 마땅하지 않으리오! 무릇 진나라 사람은 순림보(荀林父)가 강을 건넌 일을 바로잡았기 때문에 법을 폐하고도 공을 거두었고, 초성왕은 성득신이 자신을 이롭게 함을 덮었기 때문에 그를 죽임으로써 거듭 패하게 되었다. 지금 촉나라는 구석의 거친 땅으로 재능이 나라에 올려지는 것이 적은데 그 준걸을 죽이니 은퇴한 둔한 말을 사용하는 셈이고, 밝은 법을 재능보다 앞세우는 것은 세 번 패할 수 있다는 군대의 도리가 아니니, 장차 일을 달성함에 있어서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또 유비가 마속을 경계하며 크게 사용하지 말라고 했는데 어찌 그 재능이 아님을 일컫지 않는가? 제갈량은 경계를 받고도 뜻을 이어 받지 못했으니, 명백히 마속을 내쫓기 어려웠던 것이다. 천하의 재상이 되어 사물의 힘을 크게 거두길 바래서 재능을 헤아려 절도 있게 맡기지 못하고 소중함에 따라 일을 맡겼으니, 크게 잘못된 것을 안다면 유비의 경계를 어기는 것이고 절제를 못한 것이니, 곧 유익한 사람을 죽임에 있어서 지혜로운 자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삼국지 三國志》〈촉서구 蜀書九ㆍ마량전 馬良傳〉

정사 삼국지에서는 단지 "마속은 하옥되어 죽임을 당했다. 제갈량은 눈물을 흘렸다.(謖下獄物故, 亮為之流涕)"라고만 하고, 더 자세한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정사 삼국지가 지어진지 약 2백 년 후 송나라 때의 배송지(裵松之, 372~451)가 송 황제의 명을 받아 서기 429년에 정사 삼국지에 누락된 내용을 보완하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배송지주(裵松之註)이다. 이 배송지주는 습착치의 《양양기 襄陽記》를 인용하고 있는데, 여기서 제갈량이 울었던 구체적인 이유가 나온다.

《양양기 襄陽記》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장합에게 대패하고 감옥에 간 마속이 제갈량에게 글을 써서 "승상은 저를 아들로 대하고 저는 승상을 아버지로 대했습니다."라고 말하며 우 임금의 고사를 들어 자식을 부탁했고, 이에 제갈량은 마속이 죽은 뒤 유족들을 돌보아 주었다. 한중에 와서 마속이 죽은 것을 알게 된 장완이 제갈량에게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는데, 지혜로운 선비를 죽이는 것이 애석합니다."라고 말하자, 제갈량은 눈물을 흘리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손자가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법을 운용하는 데 밝았기 때문이오. 온 세상이 분열되고 군대의 교전이 막 시작되었는데, 만약 다시 법을 폐한다면, 무얼 써서 적을 토벌하겠소?" 이 내용을《양양기》에 실은 습착치는 제갈량이 대략 두 가지 잘못을 저질렀다며 비판하는데, '첫째, 촉나라는 인재가 별로 없어서 실수를 저질러도 3번의 기회를 줘야 하는데 죽였다. 둘째, 유비가 크게 사용하지 말라고 주의를 줬는데도 제갈량이 그를 너무 아껴서 크게 사용하였다.' 즉, 제갈량은 마속을 크게 사용하지 말라는 유비의 당부를 어긴 셈이 되므로 이 실책을 덮기 위해 훗날 촉에 유익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마속을 죽일 수밖에 없었으므로, 근본적인 잘못은 제갈량에게 있다는 것이 습착치의 지적이다.

삼국연의[편집]

忽報馬謖、王平、魏延、高翔至,孔明先喚王平入帳責之曰:「吾令汝與馬謖同守街亭,汝何不諫之,致使失事?」平曰:「某再三相勸,要在當道築土城把守。參軍大怒不從,某因此自引五千兵離山十里下寨。魏兵驟至,把山四面圍合,某引兵衝殺十餘次,皆不能入。次日土崩瓦解,降者無數。某孤軍難立,故投魏文長求救。半途又被魏兵困在山谷之中,某奮死殺出。比及歸寨,已被魏兵占了。及投列柳城時,路逢高翔,遂分兵三路去劫魏寨,指望克復街亭。因見街亭並無伏路軍,以此心疑。登高望之,只見魏延、高翔被魏兵圍住,某即殺入重圍,救出二將,就同參軍併在一處。某恐失卻陽平關,因此急來回守。非某之不諫也。丞相不信,可問各部將校。」

孔明喝退,又喚馬謖入帳,謖自縛跪於帳前。孔明變色曰:「汝自幼飽讀兵書,熟諳戰法。吾累次叮嚀告戒街亭是吾根本,汝以全家之命,領此重任。汝若早聽王平之言,豈有此禍?今敗軍折將,失地陷城,皆汝之過也!若不明正軍律,何以服眾?汝今犯法,休得怨吾。汝死之後,汝之家小,吾按月給與祿米,汝不必挂心。」叱左右推出斬之。謖泣曰:「丞相視某如子,某以丞相為父。某之死罪,實已難逃,願丞相思舜帝殛鯀用禹之義,某雖死亦無恨於九泉!」言訖大哭。孔明揮淚曰:「吾與汝義同兄弟,汝之子即吾之子也,不必多囑。」

左右推出馬謖於轅門之外,將斬。參軍蔣琬自成都至,見武士欲斬馬謖,大驚,高叫留人,入見孔明曰:「昔楚殺得臣而文公喜。今天下未定,而戮智謀之士,豈不可惜乎?」孔明流涕而答曰:「昔孫武所以能制勝於天下者,用法明也。今四方分爭,兵交方始,若須廢法,何以討賊耶?合當斬之。」

須臾,武士獻馬謖首級於階下。孔明大哭不已。蔣琬問曰:「今幼常得罪,既正軍法,丞相何故哭耶?」孔明曰:「吾非為馬謖哭。吾思先帝在白帝城臨危之時曾囑吾曰:『馬謖言過其實,不可大用。』今果應此言,乃深恨己之不明,追思先帝之明,因此痛哭耳!」大小將士,無不流涕。馬謖亡年三十九歲。

갑자기 마속, 왕평, 위연, 고상이 왔다고 알리니, 공명이 먼저 왕평을 천막 안으로 불러들여 꾸짖으며 말했다. "내 그대에게 마속과 더불어 가정(街亭)을 지키라 하였거늘, 어찌 제대로 간언하지 않아 일을 그르치기에 이르렀소?" 왕평이 말했다. "제가 거듭 길목에 토성을 쌓고 지켜야 한다고 권고했습니다. 그러나 참군이 크게 화를 내며 따르지 않기에, 이로 인해 저 스스로 5천 병력을 이끌고 산에서 십 리 떨어진 곳에 목책을 세웠습니다. 위나라 병사들이 몰려와, 산을 사방으로 포위하므로, 제가 병력을 이끌고 십여 차례 나 돌격하였으나, 번번이 진입할 수 없었습니다. 다음 날 마치 흙이 무너지고 기와가 깨지듯이 무너져, 항복한 이들이 무수하였습니다. 저의 군대는 고립되어 버티기 어려운지라, 위문장(위연)에게 구원을 요청하러 갔습니다. 도중에 산골짜기 안에서 위나라 병사들에게 포위되었으나, 제가 죽을힘을 다해 뚫고 나왔습니다. 이윽고 목책으로 돌아갔을 때에는, 이미 위나라 병사들이 점령한 뒤였습니다. 다시 열류성으로 가고 있을 때, 도중에 고상을 만나, 병력을 셋으로 나누어 위나라 목책을 습격하러 가면서, 가정을 되찾고자 희망 하였습니다. 그러나 가정으로 가는 길에 적의 복로군이 전혀 보이지 않아, 이 때문에 의심이 들었습니다.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니, 위연과 고상이 위나라 병사들에게 포위되어 있어서, 제가 즉시 두터운 포위를 뚫고, 두 장수를 구출한 뒤, 곧 참군과 함께 군대를 한 데 합쳤습니다. 저는 양평관마저 빼앗길까 두려워서, 서둘러 돌아와 수비하고자 하였습니다. 제가 간언하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다. 승상께서 믿지 못하시겠다면, 각부 장교들에게 물어보십시오."

공명이 물러나라고 외치고는, 또 마속을 천막에 불러들이니, 마속이 스스로 몸을 결박한 채 천막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공명이 낯빛을 바꾸며 말했다. "그대는 어려서부터 병서를 충분히 읽고 전법을 외우는 것에 익숙하오. 내가 누차에 걸쳐 신신 당부하기를 가정(街亭)은 우리의 근본이라고 간곡히 경고를 하였고, 그대도 온 집안의 목숨을 걸고 이러한 중임을 맡았소. 그대가 일찍이 왕평의 말을 들었다면, 어찌 이런 재앙이 있었겠소? 이제 패전하여 장수를 꺾고 땅을 잃어 성이 함락된 것은, 모두 그대의 잘못이오! 만약 군율을 분명하고 바르게 하지 않는다면, 어찌 사람들을 복종시키겠소? 그대가 이제 법을 어긴 것이니 나를 원망하지 마시오. 그대가 죽은 뒤, 그대의 가족에게는 내가 월급을 살펴 녹미를 줄 것이니, 그대는 마음에 걸릴 필요가 없소." 좌우의 사람들에게 소리쳐 마속을 끌어내어 베라고 하자, 마속이 울면서 말했다. "승상께서 저를 아들처럼 보시고, 저는 승상을 아버지처럼 여겼습니다. 저의 죽을 죄는 실로 이미 피하기 어려우니, 원컨대 승상께서 순 임금이 곤(鯀)을 죽이고 우 임금을 썼던 뜻[9]을 생각하신다면, 저는 비록 죽더라도 구천에서 한이 없을 것입니다!" 말을 마치고는 크게 소리내어 울었다. 공명이 눈물을 뿌리며 말했다. "나와 그대는 그 뜻이 형제와 같소. 그대의 아들은 곧 나의 아들이니, 많은 걸 부탁할 필요는 없소."

좌우의 사람들이 마속을 군영 밖으로 끌고나가 베려고 하였다. 참군 장완이 성도에서 오다가, 무사가 마속을 베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큰 소리로 외치며 사람들을 제지한 뒤에, 들어와 공명을 보고 말했다. "지난날 초나라가 장군 득신을 죽이자 진나라 문공이 기뻐했습니다. 지금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는데, 지모 있는 선비를 죽인다면, 어찌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공명이 눈물을 떨구며 답했다. "지난날 손자가 이른바 천하에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법을 분명하게 시행했기 때문이오. 지금 사방이 나누어져서 다투고, 병사들의 교전은 막 시작하는데, 잠깐 법을 폐한다면 무엇으로 도적을 토벌하겠소? 베는 것이 합당하오."

잠시 뒤 무사가 마속의 수급을 섬돌 아래 갖다 바치니, 공명이 크게 소리내어 울기를 그치지 않았다. 장완이 물었다. "이제 유상(마속)이 죄를 지어, 이미 군법대로 엄정히 다스렸거늘, 승상께서는 무슨 까닭으로 소리내어 우십니까?" 공명이 말했다. "나는 마속을 위해 운 것이 아니오. 나는 선제께서 백제성에서 위기에 처하셨을 때 일찍이 내게 당부하시며, '마속은 말이 실제보다 과하니, 크게 써선 안 된다.'고 말한 것을 생각하였소. 이제 과연 그 말씀대로 됐으니, 이에 나의 현명하지 못함을 심히 뉘우치며 선제의 현명하심을 떠올린 것이오. 이로 인해 통곡할 뿐이니!" 지위가 높고 낮은 장수와 병사들이, 눈물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마속은 39세에 죽었다.

《삼국연의 三國演義》〈96. 공명이 눈물을 뿌리며 마속을 베다 孔明揮淚斬馬謖〉

제96회에서 다루며, 전개는 대체로 정사와 비슷하다. 몇몇 차이점을 들자면,

연의에서는 가정에서 패배한 마속이 순순히 군영으로 와서 죄를 달게 받는다. 하지만 정사에서는 〈상랑전〉에 마속이 도망쳤다는 기록이 있어서 체포인지 자수인지는 알 수 없으나, 순순히 잡히지 않은 건 확실하다.

연의에서는 제갈량이 다른 장수들이 보는 앞에서 마속을 직접 취조한 후 참수형을 명한다. 하지만 정사에서는 주살되었다(왕평전)[거나 옥에 갇혀서 죽었다(마량전)는 등 기록이 갈린다.

연의에서는 참수형이 결정되자 마속이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 죄는 인정하지만 가족을 부탁한다고 직접 제갈량에게 말한다. 하지만 정사에서는 마속이 옥중에서 편지를 보냈으므로 직접 대면했을 가능성은 낮다.

연의에서는 마속이 죽은 후 제갈량이 눈물을 흘리며 주위 사람들에게 유비의 충고를 뒤늦게 언급하면서 자신은 마속을 위해 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책을 탓하기에 우는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정사에서는 유비의 충고와 제갈량의 눈물을 직접적으로 관련짓지는 않으며, 단지 마속이 죽자 제갈량이 눈물을 흘렸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연의에서는 마속이 죽기 전 이를 본 장완이 만류하지만 제갈량이 군법을 준수하기 위해 마속을 참수한다. 정사에서는 마속이 죽은 뒤에야 장완이 한중에 와서 제갈량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고 제갈량은 군법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한 정사의 다른 편 주석에서 이막도 마속을 죽이지 말라고 했다며 추가로 언급된다.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진상
글: 생활문적(生活文摘)

마속의 죽음을 얘기하자면, 역대이래로 사람들은 마속이 가정(街亭)의 패배이후, 제갈량의 본영으로 돌아와 부형청죄(負荊請罪)한다. 결국 제갈량은 눈물을 흘리며 마속을 벤다. 경극 <실가정(失街亭)>이 바로 이 이야기이다.

이런 인상은 기실 나관중의 <삼국연의>에서 왔다. 그중 95회에서는 마속이 군령장을 쓰고 왕평을 부장으로 하여 병력 2만5천을 이끌고 가정으로 가서 지킨다. 가정에 도착한 후, 병법에 이르기를 "거고임하(居高臨下), 세여파죽(勢如破竹)"(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싸우면, 그 기세가 파죽지세이다)라는 말 및 "사지에 놓아두어서 산다(置之死地而後生)"등의 이유로, 제갈량이 길입구에 군영을 설치하라는 분부를 따르지 않고, 왕평의 "위군이 우리의 수원(水源)을 끊을 수 있다"는 경고도 귓등으로 흘려듣고, 병력을 산위에 주둔시킨다. 나중에 왕평이 계속 간언핮, 병력5천을 왕평에게 주어, 산을 내려가 군영을 설치하라고 한다. 위나라의 명장 사마의와 장합이 군대를 이끌고 도착한 후, 처음에는 한편으로 왕평을 견제하며, 다른 한편으로 마속을 포위하고 공격하지 않으며, 수원을 끊어버린다. 마속이 싸우기도 전에 스스로 혼란에 빠지면서, 항복할 자는 항복하고, 도망갈 자는 도망간 후, 사마의가 마지막에 화공을 펼친다. 마속은 참패하고 돌아온다. 왕평은 이때 병력이 적어 장합의 맹공을 견디지 못하고 마속과 함께 퇴각한다.

가정을 잃은 후, 전방 촉군은 거점을 잃게 되어, 물러나서 지킬 곳이 없게 된다. 부득이 이미 점령한 농우3군을 포기하고, 한중으로 물러나서 지킨다. 이에 제갈량은 상소를 올려 스스로 3등을 강등당하고, 마속은 대영에서 자수하여 죽음을 맞이한다. 참수할 때, 전체 병사들이 눈물을 흘리고, 제갈량도 실성통곡한다. 이것이 바로 소위 "읍참마속"이다.

다만, 이는 모두 소설가의 예술적 가공이다. 역사적 사실은 이런 내용과 차이가 크다. 진(晋)나라때 진수가 쓴 <삼국지> 및 그 후에 배송지가 달아놓은 주석에는 이 일에 대한 묘사가 여러 열전에 흩어져 있다. 그것들을 종합해보면 사서의 '읍참마속'의 진상을 알 수 있다.

먼저, <향랑전>에는 이런 기술이 있다. 당시 향랑은 승상장사이며, 부대를 따라와서 전투에 참가했다. 향랑은 마속과 잘 지냈는데, "마속이 도망치고, 향랑은 그 사실을 알고도 보고하지 않았다. 제갈량은 그를 미워하여, 관직을 박탈하여 성도로 돌려보낸다." 이 내용은 의미가 명확하다. 가정의 전투이후, 마속은 스스로 자수한 것이 아니라, 죄를 받을까 두려워 도망친 것이다. 그리고 향랑은 그 사실을 알고도 보고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갈량에 의하여 면직된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제갈량의 사후에 향랑은 다시 관직에 나왔다고 한다. 그동안 수십년을 놀면서 보낸다.

두번째는 <마속전>에 붙은 배송지의 주석이다. <양양기>의 기록을 언급하고 있는데, 거기서 마속은 죽기 전에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낸 바 있다고 한다. "공께서 나 마속을 아들처럼 여겨주었고, 나 마속도 공을 부친처럼 여겼다. 원컨대 곤이 죽어 우가 흥한 뜻을 깊이 살려, 평생의 교분을 여기에서 부끄럽게 하고 싶지 않다. 마속은 비록 죽지만 땅에 아무런 여한이 없다." 그 후에 제갈량은 마속의 자식을 자신의 자식처럼 여겼다. 이 내용을 보면, 마속이 죽기 전에 제갈량과 만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서신을 적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제갈량이 곤을 죽이고 우를 기용한 이야기를 들어, 제갈량에게 자신의 자식을 부탁한 것이다.

그리고 뒤에는 다시 "십만의 무리가 눈물을 흘렸고, 제갈량은 제사를 지내준다. 그리고 마속의 자식을 평생 돌봐준다." 마속은 확실히 죽었다. 다만 이상에서는 마속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제갈량전>에는 제갈량이 "육속이사중(戮謖以謝衆)"이라고 하여, 마속을 죽였다고 한다. <왕평전>에는 다시 이렇게 기록한다: "승상 제갈량은 마속 및 장군 장휴(張休), 이성(李盛)을 주살했다" 이 두개의 전을 보면, 마속은 확실히 제갈량에 의하여 처형당했다. 다만 도대체 어떻게 실시했는지에 대하여는 언급이 없다. 이는<마속전>에서 명확히 기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속하옥물고(謖下獄物故)" 마속은 옥에서 병사한 것이다.

이상의 사료를 종합하면,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마속은 가정에서 군율을 어기는 행동을 한다. 제갈량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것이다. 그리하여 참패하고 돌아온다. 그리고 직접 이번 출격에서 얻은 소득인 농우3군을 얻었다가 다시 빼앗기게 된다. 어쩔 수 없이 대군은 한중으로 돌아간다. 마속은 자신이 실패한 결과가 얼마나 엄중한지 잘 알았다. 그래서 죄가 두려워 도망친다. 그리고 승상장사인 향랑은 그와의 안면때문에 혹은 그의 재주를 아끼는 마음에서 이를 알고도 보고하지 않는다. 일이 누설된 후 그는 집으로 돌아가서 이십년간 관직에 나가지 못하고 한량으로 지낸다. 마속은 결국 체포되어 제갈량에 의하여 극형에 처해진다. 그러나 형을 집행하기도 전에 마속은 옥중에서 병사한다. 이것이 바로 사서에 기록된 마속의 죽음이다.

그후 제갈량은 친히 제사를 지내고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십만의 병사들도 같이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마속의 자식을 평생 돌봐준다. 이렇게 그를 참하면서, 그를 안타까워하는 방법은 복잡한 원인이 숨어 있는 것이다. 먼저, 마속이라는 사람에 대하여 사람을 알아보는 혜안을 지녔던 유비가 제갈량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말이 실제보다 지나치다. 크게 쓸 수 없는 자이다." 그러나 제갈량은 그렇지 않다고 여겨 마속을 참군으로 하고 매번 그를 불러 얘기를 하면 밤을 새우곤 했다. 그래서 제갈량은 상소를 올려 스스로 강등당한 것이다. 첫째는 마속이라는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것이고, 둘째는 유비의 당부를 중시하지 않은 것이며, 이로 인해 기산을 나서서 한 전투의 공로를 모조리 헛수고로 만들고 아무런 공도 없이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제갈량의 법집행은 상벌이 분명하여 신명과 같았다. 그를 극형에 처한 것은 필연적이다.

다만 마속은 제갈량이 남정하여 맹획을 얻을 때, 일찌기 출병전에 제갈량에게 "마음을 공략하는 것이 상책이고, 성을 공격하는 것은 하책이다. 마음을 싸우는 것이 상책이고, 병력으로 싸우는 것은 하책이다"라는 전략방침을 제시한다. 제갈량도 이 전략방침을 충분히 실행한다. 결국 남강은 촉이 망할 때까지 다시 전투가 일어나지 않는다. 이는 마속의 공로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씨형제는 형양(荊襄)일대에서 명성이 높았다. 그중, "백미(白眉) 즉 눈썹이 흰 사람이 가장 뛰어났다." 바로 이 백미라 불리는 마량(馬良)은 제갈량과 교제하는 중에 제갈량을 '존형(尊兄)'이라 부른다; 배송지는 '마량이 아마도 제갈량과 결의형제일 것이다, 혹은 친인척관계일 것이다. 제갈량의 나이가 많으므로 마량이 제갈량을 '존형'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마씨형제는 제갈량과의 교분이 남달랐다. 그리고 모두 재능이 있었다. 그래서 제갈량은 비록 마속을 '주살'했지만, 어쨌든 사람을 쓰는데 있어서는 깊이 안타까워했을 것이다. 그래서 '읍참마속'한 것이 비교적 역사적 사실에 부합한다. 이는 그가 마속의 자식들을 잘 보살핀 일에서도 그의 마속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단지 소설가의 가공과정에서 마속이 죄를 두려워하여 도망쳤던 일은 언급하지 않고, 약간의 가공을 거친 것이다. 예술적인 각도에서 보자면, 역사적 시실보다 훨씬 감동적이고 호소력이 있다.

중국의 사대명저중 하나인 <삼국연의>의 영향력은 아주 크다. 현재는 이미 무수히 많은 서로 다른 판본, 유형의 게임 및 영화 드라마가 있다.  단지 이들은 대부분 <삼국연의>를 기초로 한다. 역사적 원인으로 소설에서 유비를 높이고 조조를 낮추는 경향이 심각했고, 또한 많은 인물, 사건에 대하여 예술적으로 가공하여, 역사적 사실과는 차이가 크다. <삼국연의>와 <삼국지>를 비교대조하면 아마도 더욱 완벽하고, 진실되게 이 대목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泣斬馬謖(읍참마속)의 한자적 의미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서 때로는 희생양이 필요한 법이다. 전체를 위해서는 소수가 희생된 사례는 역사 속에서 숱하게 많다. 위정자들이 알아야 될 덕목이기도 하다. 전체를 위한 질서와 기강확립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울 泣(읍)의 구성은 물줄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모양을 상형한 물 수(水)의 간략형인 수(氵)와 설 립(立)으로 이루어졌다. 立(립)은 사람(大)이 땅(一) 위에 서 있는 모습을 그려낸 상형글자이다. 나중에는 그 뜻이 확대되어 사람에 국한하지 않고 서거나 ‘세우다’라는 의미를 담게 되었다. 따라서 泣(읍)의 의미는 대성통곡한다는 뜻이 담긴 哭(곡)과는 달리 서서(立) 눈물방울(氵)을 뚝뚝 흘리며 소리 없이 눈물짓는다는 데서 ‘울음’ ‘울다’를 뜻하게 되었다.

벨 斬(참)의 구성은 수레 차(車)와 도끼 근(斤)으로 이루어졌다. 車(차)는 우마차의 모양을 본뜬 상형글자이다. 갑골문을 보면 현재의 자형보다 훨씬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현재 자형에서는 하나의 바퀴(曰)만을 그려놓았는데, 중앙의 ‘丨’은 굴대를 나타냈고 아래위의 ‘二’는 바퀴가 빠지지 않도록 고정시킨 굴대의 빗장이다. 갑골문에 보이는 것처럼 고대의 수레는 두 바퀴로 만들어졌는데, 두 마리의 말이 끄는 게 일반적이었다. 斤(근)의 모양에서 가로획(一)은 도끼의 머리와 날을, 세로획(丨)은 자루를 본뜬 것이며 좌변(厂)은 도끼날을 받는 나무와 같은 대상물을 본뜬 상형글자이다. 따라서 斬(참)의 전체적인 의미는 고대에 행해진 형벌에서 칼이나 도끼(斤)로 목을 베거나 사지를 마차(車)에 묶어 능지처참하였다는 데서 ‘베다’ ‘끊다’는 뜻을 지니게 되었다.

말 馬(마)는 말의 특징인 갈기와 몸통 그리고 꼬리를 본떠 만든 상형글자이다. 馬(마)에 대해 『說文』에서는 “馬는 성내다, 용맹하다는 뜻이다. 말의 머리와 갈기 털, 그리고 꼬리와 네 다리의 모양을 본떴다.”라고 하였다. 갑골문의 자형은 보다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일어날 謖(속)의 구성은 말씀 언(言)과 날카로울 측(畟)으로 이루어졌다. 言(언)은 입(口)에서 나온 소리(辛)를 나타낸 글자로써 다른 부수에 더해지면 대부분 언어적 행위와 관련된 뜻을 지니게 된다. 畟(측)은 밭 전(田)과 쟁기의 보습을 나타낸 모양(儿), 그리고 천천히 걸을 쇠(夊)로 구성되었다. 田(전)은 경작지를 두둑으로 경계 지은 모양을 그대로 본뜬 상형글자이다. 대륙의 경작지는 끝없이 펼쳐진 대지(大地)여서 논보다는 밭이 대부분일 뿐만 아니라 산도 없이 구릉으로 이루어져 ‘사냥터’라는 뜻도 지니게 되었다. 夊(쇠)에 대해 허신은 『說文』에서 “夊는 느릿느릿 발을 질질 끌면서 걷는 것을 말한다. 사람이 양 발로 신을 끌고 가듯 걷는 모양을 본떴다.”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畟(측)은 천천히 발걸음 놓으며(夊) 날카로운 쟁기의 보습(儿)을 이용해 밭(田)을 가는 모습을 그려내 ‘보습 날카롭다’는 뜻을 부여했다. 따라서 謖(속)의 전체적인 의미는 쟁기의 날카로운 보습(畟)을 이용해 밭을 갈 때 말이나 소에게 채찍을 가하며 소리(言)낸다는 데서 ‘일어나다’ ‘일어서다’는 뜻을 지니게 되었다.

泣斬馬謖이란 눈물을 머금고 마속의 목을 벤다는 뜻으로, 사사로운 감정을 버리고 엄정히 법을 지켜 기강을 바로 세우는 일에 비유하는 말이다. 『삼국지三國志』「촉지蜀志·마속전馬謖傳」에서 유래하였다. 유비의 군사 제갈량은 유능한 장군 마속을 중용하였으나, 그가 가정(街亭)의 싸움에서 제갈량의 명령을 어기고 싸우다 패하였다. 이에 제갈량은 마속을 아끼는 마음을 억누르고 군율에 따라 목을 베어 전 군사의 기강을 확립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우리의 정치현실을 볼 때, 제갈량의 지혜가 필요한 때인 것 같다.

"읍참마속(泣斬馬謖)"은 역사적 사실인가?
글: 이자지(李子遲)

"제갈량휘루참마속(諸葛亮揮淚斬馬謖)"음 명청(明淸) 장회소설(章回小說) <삼국연의>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중 하나이다. 여기에 앞의 '실가정(失街亭)'과 뒤의 '공성계(空城計)'까지 합쳐서 3부분을 합치면 희곡(특히 경극) 무대에서 가장 많이 공연되는 대표적인 프로그램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이렇다. 제갈량이 대군을 이끌고 기산(祁山)을 나가 북벌을 시도하는데 의도는 관중등지를 통일하는 것이었다. 마속은 적극적으로 나서서 가정(지금의 감숙성 진안의 동북쪽)을 지키겠다고 하고, 군령장을 쓴다. 당시 제갈량은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있어서, 일찌기 유비가 그에게 말해주었던, "마속은 말하는 것이 실제보다 과장되니, 크게 쓸 수는 없다"는 말을 잊고, 마속을 가정이라는 중요한 군사요새를 지키는 주장으로 삼는다. 마속은 가정에 가서는 오만하고 자기가 옳다는 생각에 빠져 제갈량의 지시도 어기고, 부장인 왕평의 권고도 듣지 않고, 산꼭대기에 군영을 차리는 전략적인 실수를 저지른다. 그리고 산아래의 강을 버려둔다. 그리하여 위나라의 맹장 장합이 기회를 틈타 공격하지 참패하고 가정을 잃고 만다. 그리하여 대군은 어쩔 수 없이 한중으로 되돌아가야 했고, 촉국은 위나라와의 전쟁에서 수세에 몰리게 된다. 제갈량은 한편으로 임시로 각종 조치를 취하여 적군을 막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군기를 엄중히 하고, 조야를 다독이고 민심을 다스리기 위하여 그자리에서 마속을 참한다. 다만 어쨌든 마속은 장수의 인재였기 때문에 죽이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리고 자신이 선제 유비의 당부를 잊고 사람을 잘못쓴 잘못을 저질러 이런 결과가 나온 것에 대하여도 회한이 밀려왔다. 그래서 눈물을 흘렸고, 마음은 칼로 도려내는 듯했다.

"제갈량휘루참마속"의 이야기는 소설 <삼국연의>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서인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에도 유사한 기록이 있다: "제갈량이 서현의 천여가를 데리고 한중으로 돌아온다. 마속을 죽여서 사람들을 달랬다.(亮拔西縣千餘家,還於漢中,戮謖以謝衆)". 이렇게 보면 읍참마속은 분명한 사실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같은 사서에는 이런 기록도 있다: "마속이 하옥된 후 사망하니, 제갈량이 그를 위하여 눈물을 흘렸다(謖下獄物故, 亮爲之流涕)"(<삼국지. 촉서. 마량전>). 즉, 마속은 옥중에서 병사했다는 말이다. 제갈량이 죽인 것이 아니라. 그렇지만 제갈량은 역시 그를 위하여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삼국지. 촉지. 향랑전>을 보면 이렇게 적혀 있다: "마속이 도망갔고, 향랑이 그 사실을 알면서도 보고하지 않았다. 제갈량은 그리하여 향랑을 미워하여, 관직을 파면하고 성도로 돌려보냈다."(謖逃亡, 朗知情不擧, 亮恨之, 免官還成都)" 즉, 가정의 전투이후, 마속은 자수한 것이 아니라 도망쳤고, 장사관인 향랑은 이를 알고서도 마속과 관계가 좋아서 보고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제갈량은 향랑의 파직시키고, 그후 이십년동안 조정에 등용하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제갈량이 마속을 참수하지 않았다고 분명히 쓰고 있다.

이건 아주 재미있는 내용이다. 같은 작자가 같은 저작에서 같은 사건에 대하여 세 가지 서로 다른 이야기를 쓰고 있다. 도대체 어느 것이 맞는 것일까? 기실 이 세 가지 이야기는 모두 합쳐서 볼 수도 있다. 즉, 마속이 당초 패배한 후 확실히 벌받을 것이 두려워 도망을 친 바 있다. 다만 나중에 촉한의 장병들에게 붙잡힌다(혹은 스스로 자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제갈량은 확실히 그를 참수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형을 집행하기도 전에(아니면 제갈량이 고의로 형집행을 늦추었을 수도..), 마속은 감옥에서 병사하고 만다. 또 다른 설에 따르면 가정에서 패배한 후, 마속은 아예 제갈량을 다시 보지도 못했고, 왕평이 그를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다고도 한다.

어찌되었건, 마속은 제갈량이 직접 죽인 것이 아니다. 즉, "제갈량휘루참마속"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읍참마속'의 속사정
이현우기자

흔히 사사로운 정에서 벗어나 대의를 위해 측근을 쳐내는 일을 두고 '읍참마속(泣斬馬謖)'이라는 사자성어를 쓴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제갈량이 1차 북벌 실패의 결정적 요인인 가정전투 참패의 책임을 물어 총애하던 장수인 마속의 목을 베었다는 고사에서 나왔다. 보통 자신이 믿던 측근조차 눈물을 머금고 쳐낸 제갈량의 결단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실제 읍참마속이 벌어졌던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제갈량의 결단보다는 애초 전투경험이 전무한 마속을 선봉장으로 세운 제갈량의 실책이 더 두드러진다. 제갈량이 이런 무리한 인사를 단행한 이유에는 마속이 갖고 있는 정치적 기반이 한몫 했다. 마속은 제갈량과 함께 촉한 정권 구성에 혁혁한 공을 세웠던 '형주(荊州)'란 지역을 대표하는 인물로, 동향인 제갈량과 이전부터 매우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실제 유비가 세운 촉한이라는 나라는 당대 중국의 다양한 지역 사람들이 함께 힘을 모아 만든 연립정권이었다. 일단 유비와 관우, 장비 삼형제는 오늘날 베이징(北京) 일대인 탁군에서 온 사람들이다. 이후 유비세력의 이동경로를 따라 다양한 지역 사람들이 등용됐다. 오늘날 장쑤성(江蘇省) 일대인 '서주(徐州)', 후난성(湖南省) 일대인 '형주', 쓰촨성(四川省) 일대인 '익주(益州)' 등 수천킬로미터씩 떨어진 지역 인사들이 유비 휘하로 들어와 촉한을 세웠다. 오늘날에도 이들 지역은 통역없이 대화가 안될 정도로 말과 문화가 천양지차다.

제갈량 또한 마속과 같은 형주사람이었다. 제갈량은 마속의 형인 마량과도 형제처럼 지냈다. 이런 배경을 대신들이 모두 알고 있는 상황이었고 심지어 유비가 마속을 두고 말만 앞서는 인물이라 크게 쓰면 안된다는 유언까지 남겼으나 제갈량은 유비 사후 마속을 중용했다. 가정전투는 마속이 제갈량의 계획대로 수비만 했다면 승리 가능성이 매우 높았고, 공을 인정받기 좋은 선봉장 자리였다. 야전 경험조차 전무하고 행정만 도맡았던 인물을 선봉장으로 썼던 만큼 의도적인 자기 지역의 측근 챙기기로 비춰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1차북벌 실패 당시 제갈량은 마속을 죽이지 않고는 단순히 군율이 서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향후 국정운영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제갈량이 북벌 실패 이후 자신의 벼슬 또한 3등급 깎고 한동안 칩거에 들어갔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능력이나 경험을 무시하고 무리하게 벌인 측근챙기기용 인사가 얼마나 무서운 실패로 돌아올지 보여줬다는 점이 읍참마속의 진정한 교훈으로 남았다. | 출처 : 아시아경제 

읍참마속(泣斬馬謖)

눈물을 머금고 마속의 목을 벤다는 뜻으로, 사랑하는 신하를 법대로 처단하여 질서를 바로잡음을 이르는 말이다.

泣 : 울 읍(氵/5)
斬 : 벨 참(斤/7)
馬 : 말 마(馬/0)
謖 : 일어날 속(言/10)
(유의어)
일벌백계(一罰百戒)

아끼는 사람을 큰 목적을 위해서 버릴 수 있는가. 사사로운 감정을 버리고 엄정히 규율을 지켜 기강을 바로잡는 일은 그만큼 어렵기에 이 성어는 잘 알려진 유래와 함께 오늘날 많이 인용된다.

마속(馬謖)은 삼국지(三國志)의 천재 전략가 제갈량(諸葛亮)의 막역지우(莫逆之友) 마량(馬良)의 동생인 장수다.

마량은 재주가 뛰어난 사람을 일컫는 흰 눈썹 백미(白眉)의 주인공으로 유명하다. 그런 마속을 벌줘야 하니 아무리 냉철한 제갈량이라도 울며 베지(泣斬) 않을 수 없겠다. 일어날 속(謖)은 일어난다는 뜻으로 잘못 읽기 쉬운 글자다.

진(晉)나라의 학자 진수(陳壽)가 편찬한 중국의 위(魏), 촉(蜀), 오(吳), 3국의 정사(正史) 삼국지보다 원말(元末) 명초(明初)의 나관중(羅貫中)이 쓴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를 더 읽어 흥미진진한 역사를 꿰뚫고 있는 사람이 많으니 간단하게 정리해 보면.

서기 227년 촉나라 제갈량은 대군을 이끌고 위나라를 공격하며 장안(長安)으로 진군하던 중 지략이 뛰어난 사마의(司馬懿) 20만 대군과 대치했다.

제갈량은 군량 수송로인 가정(街亭)을 수비하는 것이 고민이었는데 이곳을 방비하기 위해 마속이 목숨을 걸고 자원한 것.

마속은 이곳을 지켜 접근만 막으라는 지시를 어기고 적을 유인하여 역습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 위군을 통과시켜 포위당한 촉이 참패하고 말았다.

후퇴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제갈량은 패전의 책임을 물어 참수형을 내렸다. 마속이 비록 이번에 전략을 실패했지만 다시 구하기 힘든 장수라며 주위에서 만류했지만 엄정히 법을 지켜야 하는 제갈량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읍참마속(泣斬馬謖)

울면서 마속의 목을 벤다는 뜻으로, 공정한 처리를 위해 사사로움을 버림을 일컫는 말이다.

삼국지는 위·촉·오 세 나라가 천하통일을 꿈꾸는 얘기다. 전술과 지략, 음모와 술수가 얽히고 설켜 있다.

북벌에 나선 제갈량이 위나라 군사를 크게 무찔렀다. 조조는 이를 갈았다. 천하의 명장 사마의에게 20만 대군을 내주며 설욕을 명했다.

제갈량도 사마의 군대를 깰 계책을 세웠다. 문제는 보급로였다. 군량 수송로인 가정(街亭)을 지켜야 제갈량이 마음 놓고 계책을 펼 수 있었다.

마속(馬謖)이 자청하고 나섰다. 마속은 제갈량과 문경지교를 맺은 마량의 친동생이다. 제갈량도 누구보다 그를 아꼈다. 하지만 제갈량은 썩 내키지 않았다. 사마의 군대를 대적하기에는 아직 어리다고 판단한 것이다.

마속이 비장의 카드를 썼다. “만약 명을 지키지 못하면 저는 물론 일가권속까지 참해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가정의 지형을 살핀 마속은 욕심이 생겼다. 제갈량이 '지키기만 하라'고 수차 명했지만 적을 잘만 유인하면 몰살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마속은 수하 장수들의 진언을 무시하고 산꼭대기에 진을 쳤다. 하지만 사마의 군대는 마속의 생각대로 산위로 올라오지 않았다. 결국 식량과 물이 끊긴 마속은 사마의 수하 장합이 이끄는 군대에 대패했다.

제갈량이 마속의 죄를 묻는 자리는 숙연했다. 제갈량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마속은 정말 아까운 장수다. 하지만 사사로운 정에 끌려 군율을 저버리는 것은 마속이 지은 죄보다 더 큰 죄가 된다.”

마속이 형장으로 끌려가자 제갈량은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마룻바닥에 엎드려 울었다. 눈물로 마속을 참한(泣斬馬謖) 것이다.

공정해지려면 사사로움을 버려야 한다. 가까운 곳을 제대로 보려면 멀리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세상사 사사로움이 일을 망친다.

▶️ 泣(울 읍, 바람 빠를 립/입, 원활하지 않을 삽)은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삼수변(氵=水, 氺; 물)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立(립, 읍)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立(립, 읍)은 물건이 몇 개나 줄지어 서 있는 일을 말한다. 큰소리를 내어 우는 것을 哭(곡)이라는데 대하여 泣(읍)은 소리 없이 눈물을 여러 줄기 흘리는 일을 나타낸다. ❷회의문자로 泣자는 '울다'나 '눈물'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泣자는 水(물 수)자와 立(설 립)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立자는 땅을 딛고 서 있는 사람을 그린 것이다. 泣자는 이렇게 홀로 서 있는 사람을 그린 立자에 水자를 더한 것으로 사람이 울고 있음을 표현했다. 그러니 여기에 쓰인 水자는 '눈물'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泣자는 소리 내지 않고 눈물을 흘린다는 뜻이다. 반면 소리 내어 우는 것은 哭(울 곡)이라고 한다. 그래서 泣(읍, 립/입, 삽)은 ①울다 ②울리다, 울게 하다 ③근심하다(속을 태우거나 우울해하다), 걱정하다 ④울음 ⑤눈물 ⑥별자리의 이름, 그리고 ⓐ바람이 빠르다(립) ⓑ바람이 빠른 모양(립) ⓒ바람이 거세게 부는 모양(립) 그리고 ㉠원활하지 않다(삽) ㉡(피가)통하지 아니하다(삽)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울 곡(哭), 울 제(啼), 서러워할 통(慟)이다. 용례로는 눈물로써 간절히 하소연 함을 읍소(泣訴), 소리내어 슬피 울음을 읍곡(泣哭), 느껴서 욺을 읍감(泣感), 눈물을 흘리면서 욺을 읍체(泣涕), 어버이 상사를 당하여 눈물을 흘리며 슬프게 욺을 읍혈(泣血), 울면서 간절히 청함을 읍청(泣請), 눈물을 흘리며 기도함을 읍도(泣禱), 소리내어 슬피 욺을 곡읍(哭泣), 감격하여 욺을 감읍(感泣), 눈물을 흘리며 욺을 체읍(涕泣), 소리 없이 슬피 욺을 비읍(悲泣), 소리를 내어 부르짖으며 욺 또는 그 울음을 호읍(號泣), 목이 메어 욺을 오읍(嗚泣), 원한을 품고 욺을 원읍(怨泣), 매우 슬퍼서 애 타게 욺을 초읍(焦泣), 구름이 한 점도 없는 하늘에서 비나 눈이 오는 일을 천읍(天泣), 눈물을 머금고 마속의 목을 벤다는 뜻으로 사랑하는 신하를 법대로 처단하여 질서를 바로잡음을 이르는 말을 읍참마속(泣斬馬謖), 우는 아이에게 젖을 준다는 뜻으로 무엇이든 자기가 요구해야 얻을 수 있다는 말을 읍아수유(泣兒授乳), 하늘을 놀라게 하고 귀신을 울린다는 뜻으로 세상을 놀라게 할 만큼 뛰어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을 경천읍귀(驚天泣鬼), 원통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비는 마음을 참을 수 없다는 뜻으로 청원하는 글 끄트머리에 쓰는 말을 무임읍축(無任泣祝), 울음소리를 내지 않고 눈물을 감춘다는 말을 탄성엄읍(呑聲掩泣), 비 오듯이 눈물을 흘리면서 울고 우레 같이 큰 소리를 내어 부르짖는다는 말을 우읍뇌호(雨泣雷號), 때로는 슬퍼서 울고 때로는 즐거워서 노래 부른다는 말을 비읍가락(悲泣歌樂), 여우의 죽음에 토끼가 운다는 뜻으로 동류의 불행을 슬퍼한다는 말을 호사토읍(狐死兔泣), 묵자가 실을 보고 울었다는 뜻으로 사람은 습관이나 환경에 따라 그 성품이 착해지기도 악해지기도 함을 이르는 말을 묵자읍사(墨子泣絲), 백유가 매를 맞으며 운다는 뜻으로 늙고 쇠약해진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 슬퍼한다는 말을 백유읍장(伯兪泣杖) 등에 쓰인다.

▶️ 斬(벨 참)은 회의문자로 斩(참)은 간자(簡字)이다. 車(차)와 斤(근; 도끼)의 합자(合字)로 참죄(斬罪)의 뜻이 있다. 그래서 斬(참)은 (1)참수(斬首) (2)참형(斬刑) 등의 뜻으로 ①베다 ②끊다 ③끊기다 ④재단(裁斷)하다 ⑤다하다 ⑥도련(刀鍊)하지 않은 상복(喪服: 상중에 있는 상제나 복인이 입는 예복) ⑦가장 ⑧매우 ⑨심히,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벨 할(割), 벨 작(斫), 벨 주(誅)이다. 용례로는 취향이 매우 새로움을 참신(斬新), 목을 자름을 참수(斬首), 칼로 베어 죽이는 것을 참륙(斬戮), 목을 베어 죽임 또는 그러한 형벌을 참형(斬刑), 참형에 해당한 죄를 참죄(斬罪), 짤러 죽이거나 또는 생으로 잡음을 참획(斬獲), 중죄인에 대하여 참형으로 재결함을 참결(斬決), 전투 과정에서 적병의 목을 베고 사로잡음을 참로(斬擄), 죄인을 참형에 처함을 참벌(斬伐), 칼에 맞아 죽음을 참사(斬死), 목을 베어 죽임을 참살(斬殺), 머리를 깎음을 참발(斬髮), 악인을 베어 죽임을 참간(斬奸), 목을 베고 손발을 끊음을 참절(斬截), 참형의 형률을 적용함을 의참(擬斬), 그 자리에서 바로 베어 죽임을 입참(立斬), 참형을 당함을 이참(莅斬), 죄인을 꿇어 앉히고 그의 목을 벰을 궤참(跪斬), 갈고리로 잡아 당겨서 목을 벰을 구참(鉤斬), 바로 그 자리에서 목을 베어 죽임을 즉참(卽斬), 목을 베어 죽이는 형벌에 처함을 처참(處斬), 중죄인의 허리를 베어 죽이던 형벌을 요참(腰斬), 잡아서 자름을 포참(捕斬), 사로잡아 베어 죽임을 금참(擒斬), 풀을 베어 내고 뿌리를 뽑아버린다는 뜻으로 화근을 아주 없애버림을 이르는 말을 참초제근(斬草除根), 큰 죄를 저지르고 죽은 사람에게 극형을 추가하여 관을 꺼내서 시신의 목을 베고 대역죄를 범한 사람의 집을 헐어버리고 못을 만드는 일을 참관저택(斬棺瀦宅), 추분 이후 춘분 이전의 시기가 될 때까지 기다리지 아니하고 즉시 목을 베어 죽이는 형벌을 참불대시(斬不待時), 묘를 쓸 때 풀을 베어 내고 땅을 파는 일을 참초파토(斬草破土), 법으로 정한 시기를 기다리지 않고 참형을 집행하는 일을 부대시참(不待時斬), 무덤을 파 헤치어 시체를 꿇어 앉히고 그 목을 벰을 발예기참(發瘞跽斬), 중죄인을 일단 죽인 뒤 그 시신을 토막쳐서 각지에 돌려 보이는 형벌을 능지처참(陵遲處斬), 눈물을 머금고 마속의 목을 벤다는 뜻으로 사랑하는 신하를 법대로 처단하여 질서를 바로잡음을 이르는 말을 읍참마속(泣斬馬謖), 그 자리에서 참수하여 무리의 본보기로 경계함을 입참이순(立斬以徇),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라는 뜻으로 항상 말조심을 해야함을 설참신도(舌斬身刀) 등에 쓰인다.

▶️ 馬(말 마)는 ❶상형문자로 말의 모양으로 머리와 갈기와 꼬리와 네 다리를 본떴다. 개는 무는 것을, 소는 뿔을 강조한 자형(字形)이지만 말의 경우에는 갈기를 강조하고 있다. 부수로 쓰일 때 말과 관계가 있음을 나타낸다. ❷상형문자로 馬자는 ‘말’을 그린 글자이다. 갑골문에 나온 馬자를 보면 말의 특징을 표현하기 위해 큰 눈과 갈기가 함께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소전으로 넘어오면서 머리와 갈기는 간략화 되었고 해서에서는 다리가 점으로 표기되면서 지금의 馬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말은 고대부터 사냥과 전쟁에 이용되었지만 주로 먼 거리를 달리는 용도로 쓰였다. 그래서 馬자가 부수로 쓰인 글자들은 주로 ‘(말을)타다’나 ‘가다’, 말의 행위, 동작과 관계된 의미를 전달하게 된다. 그래서 馬(마)는 (1)성(姓)의 하나 (2)말 등의 뜻으로 ①말(말과의 포유류) ②벼슬의 이름 ③산가지(수효를 셈하는 데에 쓰던 막대기) ④큰 것의 비유 ⑤아지랑이 ⑥나라의 이름, 마한(馬韓) ⑦크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마구간을 마사(馬舍), 말의 똥을 마분(馬糞), 말을 타는 재주를 마술(馬術), 말이 끄는 수레를 마차(馬車), 말을 부리는 사람을 마부(馬夫), 말을 타고 떼를 지어 다니는 도둑을 마적(馬賊), 말의 몇 마리를 마필(馬匹), 말의 다리를 마각(馬脚), 말을 매어 두거나 놓아 기르는 곳을 마장(馬場), 경마할 때에 파는 투표권을 마권(馬券), 말을 타고 나감으로 선거에 입후보함을 출마(出馬), 수레와 말을 거마(車馬), 자기가 사랑하는 말을 애마(愛馬), 타는 말이나 말을 탐을 기마(騎馬), 걸음이 느린 말이나 둔한 말을 노마(駑馬), 걸음이 썩 빠른 말 한마를 준마(駿馬), 말에서 떨어짐을 낙마(落馬), 말이 빨리 달리는 것을 겨룸을 경마(競馬), 말을 탐으로 사람이 말을 타고 여러 가지 동작을 하는 경기를 승마(乘馬), 대나무를 가랑이 사이에 끼워서 말로 삼은 것을 죽마(竹馬), 기차를 말에 비유한 일컬음을 철마(鐵馬), 말의 귀에 동풍이라는 뜻으로 남의 비평이나 의견을 조금도 귀담아 듣지 아니하고 흘려 버림을 이르는 말을 마이동풍(馬耳東風), 말의 다리가 드러난다는 뜻으로 숨기려던 정체가 드러남을 이르는 말을 마각노출(馬脚露出), 말의 가죽으로 자기 시체를 싼다는 뜻으로 옛날에는 전사한 장수의 시체는 말가죽으로 쌌으므로 전쟁에 나가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는 뜻의 마혁과시(馬革裹屍), 말이나 소에 의복을 입혔다는 뜻으로 학식이 없거나 예의를 모르는 사람을 조롱해 이르는 말을 마우금거(馬牛襟裾), 달리는 말은 말굽을 멈추지 않는다는 뜻으로 지난 성과에 안주하지 말고 더욱 발전하고 정진하자는 뜻의 마부정제(馬不停蹄), 말도 갈아타는 것이 좋다는 뜻으로 예전 것도 좋기는 하지만 새것으로 바꾸어 보는 것도 즐겁다는 말의 마호체승(馬好替乘) 등에 쓰인다.

▶️ 謖(일어날 속)은 형성문자로 谡(속)은 간자(簡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말씀 언(言; 말하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畟(측, 속)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謖(속)은 ①일어나다 ②일어서다 ③뛰어나다 ④여미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제사를 마치고 나서 시동이 자리에서 일어남을 시속(尸謖),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장수로 마속(馬謖), 눈물을 머금고 마속의 목을 벤다는 뜻으로 사랑하는 신하를 법대로 처단하여 질서를 바로잡음을 이르는 말을 읍참마속(泣斬馬謖) 등에 쓰인다.

瓢蟲

不朽의 古典에서 찾은 智慧와 心灵, 역사적 敎訓과 省察에서 옛글의 향기에 취해 사랑에 빠지게 되었음을 밝히는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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