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논어』(해제) 학문을 해야 고루해지지 않음

 공자 『논어』(해제) 학문을 해야 고루해지지 않음

공자가 이렇게 말하였다. "인(仁)을 좋아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不好學) 어리석음(愚)의 폐단이 생기고, 지혜(知)를 좋아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허풍(蕩)의 폐단이 생기고, 믿음(信)을 좋아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해침(賊)의 폐단이 생기고, 정직(直)을 좋아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박정, 각박(絞)의 폐단이 생기고, 용기(勇)를 좋아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난동(亂)의 폐단이 생기고, 강직(剛)을 좋아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고상한 체함(狂)의 폐단이 생긴다."(17-8 子曰 : "好仁不好學, 其蔽也愚; 好知不好學, 其蔽也蕩; 好信不好學, 其蔽也賊; 好直不好學, 其蔽也絞; 好勇不好學, 其蔽也亂; 好剛不好學, 其蔽也狂.")

이것이 이른바 육언육폐(六言六蔽)를 논한 부분이다. 처음 우리가 '인'·'의' 등을 배우는 것도 '학(學)'이다. 우리는 인(仁), 의(義), 사랑, 자비 등(이른바 "진리")에 대해 배우면 그에 대한 열정을 가지게 된다. "인을 좋아한다"는 표현이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진리에 대해 가지는 열정이 강하면 강할수록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안의 울타리(자기만의 생각)에 갇히기 쉽다. 울타리에 갇히면 진상을 올바로 보지 못한다. 우리는 어떤 진리에 대한 열정("생각") 상태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열정에만 머물면 그것에 사로잡혀 자신의 한계를 깨닫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생각에 갇혀 자신의 잘못을 보지 못하는 것이 곧 여기서 말하는 폐단(蔽)이다."(蔽, 謂蔽塞不自見其過也.)(『論語注疏』) 그러므로 자신의 열정에 대해 끊임없이 비판적 성찰을 계속해야 한다. 올바른 성찰을 하려면 객관적인 자료에 근거하여 자기 열정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객관적인 자료에 대한 끊임없이 계속되는 공부가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자기가 터득한 사상에 대하여 계속해서 객관적인 자료에 근거한 비판적인 성찰 작용을 하지 않으면 곧 폐단을 낳는다. 인(仁), 지(知), 용기(勇) […] 등에 대해 열정(생각)만 가지고 있지, 그것에 대해 비판적 성찰을 하지 않으면(不好學), 자기의 열정으로 표출되는 仁, 知, 勇 […] 등의 덕목은 곧 (다른 사람의 눈에는) 愚, 蕩, 亂 […] 등으로 보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폐단(蔽)은 비판적 성찰, 즉 넓은 의미의 학(즉 '學'·'問')이 없는 데서 발생한 결과물이다. 그러므로 학문을 좋아하면 폐단이 없어진다. 즉 "호학즉불폐(好學則不蔽)"이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학문을 하지 않으면 고루해진다" "(학문을 해야 고루해지지 않는다)"(學則不固)

"학즉불고(學則不固)"는 곧 "호학즉불폐(好學則不蔽)"의 의미이다. 문맥상 폐단(蔽)은 곧 고루해짐(固)을 의미한다. 실제로 공안국은 여기서 "고(固)"는 폐(蔽)의 의미이라고 풀이했다.(『十三經注疏』 10, 『論語注疏』, 北京大學出版社, 1999) 또 공자는 말하기를 "나는 고루함을 증오한다(疾固)"(14-32)고 했다. "고(固)"를 주희는 "하나를 고집하여 융통성이 없음(執一而不通)"이라고 풀었다. 여기서 말하는 "仁을 좋아함(仁에 대한 열정)"이 "仁에 대한 자기만의 생각을 고집하여 융통성이 없는 경우"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요컨대 인(仁)·용(勇)·사랑·자비 등 ("진리")에 대해 열정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자신의 열정("思")에 대해 끊임없는 비판적 성찰을 가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터득한 진리도 결국 이상한 것("蔽")이 되고 만다. 이 때의 비판적인 성찰이 곧 학문(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처음에 공자가 "배움(學)"과 "생각(思, 성찰)"을 구분했던 구도가 허물어진다. 육언육폐에서 논하는 배움은 성찰도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인(仁)·용(勇) 등에 대해 처음 배우는 것도 학문(學)이지만, 그 덕목에 대한 자신의 생각 자체를 끊임없이 성찰하는 것도 학문(學)이다. 이 때의 학은 자기의 열정을 기반으로 그 열정을 객관적인 각도에서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것을 일컫기 때문에 '사'와 '학'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배운 다음 또 배운 것에 대해 비판적인 성찰을 계속하는 이 일련의 배움의 과정이 곧 변증법적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학문을 해야 고루해지지 않을 수 있다(學則不固)"고 할 때의 학은 '사'가 포함된 '학', 즉 학문을 일컫는다.

공자는 아들 백어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너는 주남·소남을 배웠느냐? 사람으로서 「주남」·「소남」을 배우지 않으면 바로 담장 앞에 서 있는 경우와 똑같이 된다."(17-10 子謂伯魚曰 : "女爲周南 召南矣乎? 人而不爲周南 召南, 其猶正牆面而立也與?")

「주남」·「소남」은 『시경』의 편명이다. 시를 배우고 배우면서 자신의 생각을 넓혀가지 않으면 앞이 꽉 막힌 답답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앞이 꽉 막혔다"가 곧 "固"와 "蔽"의 의미이다. "고(固)"는 "굳다, 단단하다, 오로지, 기필하다, 틀림없이, 완고하다, 고루하다, 독점하다, 가두다, 감금하다, 못쓰게 되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공자가 말한 "학즉불고(學則不固)"의 의미는, "옛 고전을 배운 다음 단순히 배운 것에 머물지 않고 그 지식을 바탕으로 비판적이고 주체적인 안목으로 다양한 각도에서 성찰함으로써 이전까지의 나의 작은 관점을 벗어나 넓은 시야를 갖추어 나가야 고루해지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공자를 포함하여 그 누구도 각 덕목(진리)에 대해 완벽한 인식에 도달했고, 또 실천한다고 스스로 자부할 수 없다. 그래서 공자도 "공부를 할 때는 항상 바른 인식에 도달하지 못한 것처럼 하고, 그저 다만 배운 것을 잊어버리지 않을까 염려하라"(8-17 子曰 : "學如不及, 猶恐失之.")고 말했던 것이다. 공자는, 어떤 주제에 대한 완벽한 인식과 실천은 존재하지 않고 다만 그것에 대한 공부(학문, 탐구)만 계속할 수 있을 뿐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래서 공자 스스로 유일하게 자부했던 점은 바로 "학문을 좋아함(好學)"일 뿐이었다.(5-28) 여기서 공자는 인간은 어디까지나 진리의 추구자(노력하는 자)이지 진리의 대변자가 아니라는 점을 명백히 하고 있다. 이와 같이 배움에는 한번 배웠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성찰을 요구하는 변증법적 과정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단순히 많은 책을 공부했다고 해서 고루함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지식을 섭렵한 박식한 학자일수록 의외로 고루하고 완고한 경우가 많다.

공자는 네 가지를 근절했다. 즉 '사적인 추측(意, 억측, 예단)', '기필함(必)', '고집(固)', '아집(자기 주장)'을 배척했다.(9-4 子絶四 : 毋意, 毋必, 毋固, 毋我.)

박식한(좁은 의미의 학에 밝은) 학자일수록 억측이 많고 자기주장이 강하며 어떤 것을 고집하여 기필 이루려고 한다. 즉 보통 사람보다 오히려 집일이불통(執一而不通)하여, 지극히 고루하기 쉽다. 그런 학자의 공부는 공자가 말하는 학문이 아니다. 비판적인 성찰이 빠졌기 때문이다. 진정한 학문(學과 思가 포함된)은 이 네 가지로부터 벗어나는 데 있다고 하겠다. 요컨대 군자는 그러한 "학문을 해야 (모든 것에 대한 생각과 인식이) 고루해지지 않는다(學則不固)." 이 네 가지로부터 우리의 갇힌 정신을 해방시키는 과정이 곧 학문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학문의 과정은 곧 정신 해방의 과정인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학문을 해야 고루해지지 않음 (공자 『논어』 (해제), 2005., 박성규)

瓢蟲

不朽의 古典에서 찾은 智慧와 心灵, 역사적 敎訓과 省察에서 옛글의 향기에 취해 사랑에 빠지게 되었음을 밝히는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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