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論語)』 ‘지(知)’ 개념의 재해석

 『논어(論語)』 ‘지(知)’ 개념의 재해석

중국 고전 강독: 논어 핵심 구절 해석 및 현대적 적용

서 세 영(한국외대 강사)

Ⅰ. 서론
Ⅱ. 지(知)의 어의(語義)

1. 사(詞) : 언어
2. 식(識) : 알다, 인식하다
3. 사(司) : 주관하다, 담당하다
4. 철(哲), 지(智) : 지혜

Ⅲ. 『논어』의 지(知) 개념

1. 알다·인식하다[識]
2. 사람을 알다[知人]
3. 덕성으로서 지혜[智]

Ⅳ.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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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요약>

본 논문에서는 『논어』의 지(知)를 용례에 따라 분류하여 지 개념을 파악하였다. 지(知)는 일관된 개념 체계를 가지기 보다는, 동사, 형용사, 명사 등 다양한 용법으로 사용되며 용법에 따라 각기 다른 의미를 가진다.지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용법에 따라 의미를 구분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명사로서의 지는 대상화하고 개념화할 수 있지만, 동사로서 지는 ‘알다’라는 행위가 가진 의미를 탐구해야 한다. ‘알다’라는 행위를 구체화하는 것은 문장 속에서 어떤 목적어, 주어와 관계를 맺는가에 달려있다. 즉 행위로서의 ‘알다’는 ‘무엇을’ 아는가, 혹은 ‘어떻게’ 아는가, 또는 ‘누가’ 아는가 등의 질문을 통해 구체화될 수 있다.

본 논문은 이에 근거하여 지의 개념을 분류하였다. ‘알다’라는 것은일차적으로 식(識)의 의미를 가지며, 이는 각각 정보나 지식을 갖추다,새로운 것을 추론하고 유추하다, 천명을 깨닫다는 의미로 구분된다. 또한 지는 사(司)의 맥락에서 사람의 능력을 인정한다는 의미를 가지는데,사람의 능력을 알아보아 관리에 등용한다는 의미에서 도덕적 가치로서의 사람됨을 알아주다는 의미로 변화되어 가고 있음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지(知)는 명사로서 쓰이며, 이때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덕목의 하나로서 지(智), 혹은 그것을 갖춘 사람으로서 지자(智者)의 의미를 가진다.이러한 분류를 통해 『논어』의 특정한 맥락에서 지 개념이 어떻게 변용되는지 고찰하였으며, 이를 통해 『논어』의 특징적인 지 개념을 포착하였다. 나아가 『논어』와 공자 학문의 전체 체계 속에서 ‘지’가 구성하고 있는 지위를 구상하였다.

주제어: 지(知), 식(識), 지천명(知天命), 지인(知人), 지(智)
Ⅰ. 서론

‘지(知)’는 『논어』에 등장하는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이다. 특히 인자(仁者)·지자(知者) 등, 『논어(論語)』의 핵심 주제인 ‘인(仁)’과 병렬하여 등장하는 경우도 종종 있어, 지가 인(仁)과 적어도 대등한 범주를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논어』의 체계 속에서 지는 인(仁)보다 가치의 비중이 덜한 것은 사실이다. 공자(孔子)의 학문 체계의 핵심은 인(仁)으로, 『논어』 안에서 인(仁)은 구체적이고 한정된 맥락 안에서 사용되어 비교적 분명한 개념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지 역시 중요한 개념을 형성하기는 하지만 일관된 개념 체계를 이루지는 못하였는데, 이는 지가 다양한 맥락 속에서 다층적인 의미로 사용된 일반적이며 추상적인단어이기 때문이다.1) 지의 가장 대표적인 의미는 ‘식(識)’으로 우리말로 풀자면 ‘알다’, ‘인식하다’인데, ‘알다’라는 단어는 다양한 문맥으로 다양한 맥락으로 사용된다. 기실,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란 매우 어렵다.

‘지’는 『논어』 안에서 다양한 용법으로 사용되는데, 이를 분류해 보면동사, 명사, 형용사 등으로 쓰이고 있고, 대부분 동사이며, 다음이 명사와 형용사의 순이다.2) 동사로 쓰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문장 속에서다양한 방식으로 활용될 수 있다. 명사로서의 지는 그 자체로 대상화하고 개념화할 수 있어 탐구의 대상으로 삼기에 적합하다. 이때 ‘지’에 관한 연구는 구체적 ‘지식’에 대한 연구나 진리로서의 지식과 그 타당성에대한 인식론적 연구 등이 포함될 것이다. 그러나 ‘지’가 동사로 읽힐 때는 ‘알다’라는 행위를 의미하므로, 그 자체만으로 개념을 포착하기가 쉽지 않다. 문장 속에서 다른 요소와의 관계 속에서 그 의미를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 개념에 대한 탐구는 대상화된 ‘지식’ 자체에 대한 연구뿐만이 아니라, ‘알다’라는 행위가 가진 의미가 무엇인지 탐구하는 것 역시 포함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특히 『논어』의 ‘지’가 대부분 동사로 사용되었음을 상기한다면, 지에 대한 탐구는 ‘알다’라는 행위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이 주요 작업이 될 것이다.

1) 『논어』에서 지(知) 자는 「향당」을 제외한 전편에 모두 82곳에 걸쳐 118차례나타나며, 그중 공자가 직접 언급한 것이 93차례이다. 이경무, 「‘지(知)’와 공자 인학(仁學)」, 대한철학회, 『哲學硏究』 제107집, 2008, 277쪽 참조. 이는 『논어』의 주요 주제인 인(仁)이 58곳에서 105차례 등장하고 군자(君子)가 85곳에서 107차례 등장하는 것보다 많은 수이다. 등장 횟수만으로 개념의 중요도를매길 수는 없지만, 등장 횟수에 비해 일관된 개념 체계를 구축하지 못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지가 다양한 맥락 속에서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는일반적이며 추상적인 언어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2) 위의 논문, 277쪽 참조.

‘알다’라는 행위를 구체화하는 것은 문장 속에서 관계 맺는 다른 요소들이다. 즉 ‘지’라는 술어가 어떠한 목적어와 결합하는지, 또한 어떠한주어와 결합하는지에 따라 그 행위가 구체화된다. 따라서 행위로서 ‘알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아는가, 혹은 ‘어떻게’ 아는가, 또는‘누가’ 아는가 등의 물음이 필요하다. 이에 대한 적절한 답을 낼 수 있을때, ‘알다’라는 행위를 보다 참되게 알 수 있다. 본 논문은 이 점을 바탕으로 하여 지의 개념을 재해석하고자 하였다.

『논어』의 ‘지(知)’ 개념에 관한 기존의 연구로는 문석윤3), 이경무4), 김철운5) 등의 연구가 있다. 문석윤은 『논어』의 지(知)라는 용어 자체에 대해 집중하여 분석한 것이 특징이다. 지(知)의 고의를 살피고 이어 『시경』과 『서경』에서 사용된 지의 의미를 살피는 과정을 걸쳐 『논어』의 지 개념의 분석에 이르고 있다. 그는 『논어』의 지를 지천명(知天命), 문화의 건설자로서의 지, 지인과 지기, 덕성으로서의 지로 분류하였다. 이경무는 공자 인학(仁學)의 체계를 구성하는 주요 개념들을 종합적으로 고찰하는 과정의 일환에서 지 개념을 분석하였다. 그는 공자가 주장한 지의 의미와 주제별 특징을 밝히고, 지에 관한 공자의 관점과 지향을 드러내며, 지가 갖는 위상을 인(仁)의 범주와 체계 속에서 규명하였다. 김철운은 공자의 앎에 대한 관점을, 앎의 내원(內願)을 제출했는가, 어떤 원칙하에서 앎을 구했는가, 앎과 배움을 어떤 관계로 설정하여 앎의 목표에도달하려고 하였는가 등의 문제 하에서 파악하고 있다. 선행 연구에서제시되었듯이, 『논어』의 지 개념에 관한 연구의 방법은 다양하다. 지 개념 자체에 관해 탐구할 수도 있고, 공자의 전체적인 학문적 체계 속에서지가 갖는 함의를 탐구할 수도 있으며, 특정한 문제의식 아래에서 ‘지’를탐구할 수도 있다. 이외에도 『논어』의 특정한 구절에 한정하여 ‘지’ 자해석의 방법에 대해 탐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선행 연구에서 제시된 여러 방법들을 참고하면서, 특히 지 개념 자체에 관한 분석에 집중하였다. 지는 다양한 의미를 가지며특히 용법에 따라 ‘지’의 의미의 결이 달라진다. 크게 명사로 대상화할수 있는 개념으로서의 지와 동사로서 ‘알다’라는 행위로 분류할 수 있고,대부분의 용례를 차지하는 동사 ‘지’를 다시 세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지 개념 재해석의 일환으로서 『논어』에서 ‘지’ 자가 사용된 용례를 살펴 지 개념을 분류하고 범주화하였다. 『논어』의 지 개념을크게 세 가지로 분류하였는데, 하나는 ‘식(識)’의 의미로서 ‘알다’, ‘인식하다’는 의미이며, 다른 하나는 ‘사(司)’의 맥락에서 읽을 수 있는 ‘사람을알다’, ‘알아주다’는 의미이며, 마지막으로 덕성으로서 지혜(智慧), 혹은 지혜를 갖춘 자[知者]의 의미이다.

이어 ‘지’ 자가 가진 본래적 개념과 더불어 그것이 『논어』의 특정한 맥락에서 어떻게 사용되며, 그 의미가 어떻게 변용되는지를 살폈다. 이를 통해 『논어』의 특징적인 지 개념을 포착하였고 나아가 『논어』와 공자 학문의 전체 체계 속에서 ‘지’가 구성하고 있는 지위를 구상하고자 하였다.

3) 문석윤, 「『논어』에서 ‘知’의 의미(知字淺釋)」, 동양철학연구회, 『동양철학연구』 제18집, 1998. 「선진(先秦) 유학(儒學)에서 지(知)와 인식(認識)의 문제」, 한국철학회, 『철학』 제76집, 2003.

4) 이경무, 「‘지(知)’와 공자 인학(仁學)」, 대한철학회, 『哲學硏究』 제107집, 2008.

5) 김철운, 「孔子의 ‘앎’(知) : 人道의 실현」, 한국양명학회, 『양명학』 제37호,2014.

Ⅱ. 지(知)의 어의(語義)

한자의 고의(古義)에 대한 최초의 해석인 『설문해자』에서는 ‘지(知)’에대해, 그 뜻은 ‘사(詞)’이고, 글자의 모양은 구(口)와 시(矢)로 이루어졌다고 풀이하였다.6) 허신(許愼)은 이외에 별다른 풀이를 하지 않았다.글자를 이루는 시(矢)와 구(口)에 대해, 시라카와 시즈카(白川静)는 시(矢)에는 시서(矢誓)의 의미가 있고 서약할 때 사용되는 것이며, 구(口)는축도(祝禱)를 거두는 기구의 모양으로 해석하였다. 지(知)는 신에게 기도하고 서약한다는 의미의 글자로, 기도와 서약을 통해 해야 하는 일들이 확실하게 인식이 된다.7)

반면 가토 조켄(加藤常賢)은 知를 고문의 ‘지( )’로 풀이하며, 知와 는 동일한 글자로 보았다. 그에 따르면 는 ‘놀라서 외치다’라는 의미를나타내는 우(吁)와 음을 나타내는 시(矢)가 결합한 형성자이다.8)

1. 사(詞) : 언어

허신은 ‘지(知)’의 의미를 ‘사(詞)’로 풀이하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는언급하지 않았다. 사(詞)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설문해자』의 사 항목을 살펴보는 것이 유용하다. 사 항목을 살펴보면, 사란 ‘안으로 뜻을포함하고, 밖으로 소리를 가지는 것[意内而言外也]’이다. 단옥재는 이를해석하며 “뜻이 있은 뒤에 소리가 있고, 소리가 있은 뒤에 모양이 있으니, 글자를 만드는 기본이다. 모양이 있으면 소리가 있고, 소리가 있으면뜻이 있으니, 육예(六藝)의 학문이다.”9)라고 하여, 문자의 구성이 뜻, 소리, 모양임을 밝혔다. 의미와 소리, 표기 체제를 갖춘 것, 즉 사란 언어이다.

가토 역시 지의 원의는 사(詞), 즉 언어라고 보았다.10) 계속하여 외쳐서 말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며, “신이 내려서 중얼중얼 말하는 사람을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라고 풀이하였다.11) 이에 대해 문석윤은“신의 뜻을 전하는 계시적인 말(언어)이며, 신성(神聖)한 것에 대한, 혹은신성한 기원을 가진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라 해석하였다.12)

허신의 해석대로라면 지는 언어라는 의미를 가진다. 구체적 혹은 추상적인 어떤 대상에 대해 그 의미를 포착하고 그것을 음성의 형태로 드러내며 나아가 문자의 형태로 나타낸다. 대상을 말과 소리, 문자로 포착하는 것이다. 언어로 포착되는 순간 세계는 분별되고 식별된다. 지에는더 나아가, 언어로 표현된 정보, 지식이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이것이 지가 가진 일차적 의미일 것이다.

6) (漢)許愼 撰, (淸)段玉裁 注, 『說文解字注』, 上海古籍出版社, 1997, p227下. “知詞也. 从口从矢.”
7) 白川静, 『字統』, 東京: 平凡社, 1984, p.587.
8) 加藤常賢, 『漢字の起原』 15版, 東京: 角川書店, 1986, p.693.
 9) 『說文解字注』 “有義而後有聲. 有聲而後有形. 造字之本也. 形在而聲在焉. 形聲在而義在焉. 六藝之學也.”
10) 加藤常賢, p.693.
11) 加藤常賢 外, 『角川 字源辭典』 9版, 東京: 角川書店, 1977.
12) 문석윤(1998), 367쪽.

2. 식(識) : 알다, 인식하다

허신은 지(知)에 대해 사(詞) 이외의 언급은 하고 있지 않지만, 단옥재(段玉裁)는 지에 ‘식(識)’의 의미를 더한다. 단옥재는 ‘사’ 앞에 식(識) 자가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즉 지란 ‘식사(識䛐)’이다. 이어 그는 글자가 口와矢로 이루어진 것에 대하여, “아는 것이 민첩하여, 입에서 나오는 말이 빠르기가 마치 화살과 같다.[識敏, 故出於口者疾如矢也.]”라고 풀이하였다.

지를 식(識)으로 풀이하는 단옥재의 설은 허신의 견해에서 더 나아간것은 아니다. 허신 역시 지가 식의 의미군이 됨을 분명히 하고 있는데,이는 『설문해자』 ‘식’ 항목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식 항목에서는 식을 “상이다. 한편으로는 지라고도 한다.[常也. 一曰知也.]”라고 하여, 식에 상(常)과 지(知)의 의미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허신의 견해에서, 지란 사(詞)와 식(識)이다.

허신이 식을 상이라 풀이한 것에 대한 의미는 분분하다. 단옥재는 상(常)은 의(意)의 오류라고 보았다. 의는 지(志)이며, 지는 식(識)으로, 이들은 옛날에는 통용되는 글자였다. 의란 심(心)이 보존된 것이며, 지식(知識)이다.13)

반면 가토와 시라카와는 달리 해석하여, 상(常)은 오자가 아니라 기(旗)를 의미한다고 보았으며, 여기서 인신하여 ‘알다’라는 뜻이 나왔다고보았다. 시라카와는 상을 직문(織文)이 있는 깃발, 旗旘, 旗常이라는 뜻으로 보았으며, 또한 戠는 전공(戰功)으로 획득한 괵(聝, 馘)과 결합하여,그 공을 기록하는 것을 직(職)이라 하고, 그 기록한 것은 식(識)과 관계된다고 보았다. 또한 旗旘이란 전공을 기록하는 것이다.14)

가토는 식(識)은 言과 戠로 구성되고, 戠가 소리인 회의자에 소리를겸한 글자라 보았다. 식은 幟, 혹은 職과 言의 회의자로, 본래 기가 먼곳에 있는 사람에게 명령을 전달하는 도구이므로, 그것에 의해 전해지는 명령의 의미 내용을 멀리서 보고서 아는 것이 가능하다. 따라서 깃발이라는 상(常)의 의미에서 ‘알다’라는 뜻이 인신되었다.15)

또한 가토는 식이란, 지상에 나뭇가지를 세워서 말과 명령을 전달하는 작은 깃발을 거는 것, 혹은 명령을 전하는 작은 깃발을 의미한다고보았다.

13) 『說文解字注』, p92上 “識 常也. 常當爲意. 字之誤也. 草書常意相似. 六朝以草寫書. 迨草變眞. 譌誤往往如此. 意者、志也. 志者、心所之也. 意與志、志與識古皆通用. 心之所存謂之意. 所謂知識者此也.”
14) 白川静, p386.
15) 加藤常賢, 1986, p310.

 원래 작은 깃발이 먼 곳에 있는 사람에게 명령을 전하는 도구였기 때문에, 그것에 의해 전달되는 명령의 의미 내용을 멀리서 보고 알수 있다. 거기서 ‘알다’, ‘인식하다’라는 의미가 인신되었다는 것이다.16)식이란 일차적으로 깃발에 나타내는 어떤 표식을 의미하는데, 그 표식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알게 한다는 의미에서, 인식 능력을 의미하게 되었다. 따라서 지에는 언어와 문자로 표현된 정보와 지식이 사람들에게 전파되는 과정을 나타낸다.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사람들이 ‘알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지의 다른 의미인, ‘알다’, ‘이해하다’가 나왔다.

3. 사(司) : 주관하다, 담당하다

시라카와는 ‘지(知)’를 ‘사(詞)’로 풀이한 허신의 견해에 의문을 표한다.그는 ‘사(詞)’는 ‘사(司)’의 오기일 것이라 보고, 그 뜻은 ‘주관하다, 담당하다[司主]’로 풀이하였다. 그에 의하면 『춘추좌전(春秋左傳)』 양공(襄公)26년 기사의 “자산이 장차 정사를 맡게 될 것이다.[子產其將知政矣]”라는구절에 보이는 지(知)가 원의에 가장 가까우며, 이는 곧 사(司)의 의미를가진다. 담당하다는 의미에서 나아가 상세히 알다[知悉]라는 의미가 되었다.17) 어떤 일을 담당하여 주관한다는 의미에서, ‘어떤 일을 할 줄 안다’는 의미로 파생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는 특히 관료제와 관련되어지식, 지능, 직능을 갖춘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

4. 철(哲), 지(智) : 지혜

이와 함께, 지(知)의 의미군에 속하는 글자로 철(哲)이 있다. 허신은 철(哲)은 지(知)이며 口로 이루어지며 소리는 折이라 풀이하였다. 철 역시지와 동일한 의미군에 속하는 것이다. 단옥재는 철을 지(智)로 해석하였는데, 고대에는 지(知)와 지(智)가 통용되었다고 풀이하였다. 시라카와는갑골문에서는 지(知)와 지(智)가 같은 글자이며, 이후 知와 智로 분화되었을 것이라 본다. 『묵자(墨子)』에서는 지(智)는 동사로 쓰이고 있지만, 『맹자(孟子)』에 오면 사단(四端)의 하나인 지(智)로, 명사로 쓰이는 것이일반적이다. 이러한 해석에서 살필 수 있는 것은, 즉, 앞서 지(知)가 동사로 쓰이는 것에 반해 지(智)는 명사로, 덕성을 의미한다.

이상 지(知) 자의 고의에 대해 분석하였다. 지의 일차적 의미는 사(詞)로, 언어와 문자로 표현되는 정보, 지식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또 지는식(識)으로, ‘알다’, ‘인식하다’는 의미를 가지는데, 사람이 정보와 지식을수용하여 일어나는 인지의 결과이다. 지는 사(司), ‘담당하다’라는 의미를가지고 있으며, 담당한 기능과 관련하여 그것을 ‘할 줄 알다’는 의미를가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지는 지(智)의 의미도 포함하고 있으며, 이때는특히 덕성의 하나로 명사로 읽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16) 위의 책, p528 참조.
17) 白川静, 앞의 책, p587 참조.

Ⅲ. 『논어(論語)』의 지(知) 개념

지(知)의 고의에서는 사(詞), 즉 언어‧정보‧지식을 원의(原義)로 하고 있으며, 이렇게 이해될 때, ‘지’는 명사로 사용되어 개념어에 해당한다. 언어로 분별·식별되는 모든 대상 세계, 즉 인간의 앎의 체계 혹은 체계적인 앎을 의미한다. 이때의 지는 그 자체로 대상화하여 탐구의 대상이 될수 있을 것이다. 또한 ‘지’는 명사가 아닌 동사로, ‘알다’·‘인식하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고문 속에서 ‘지’는 ‘언어’라는 원의보다는 ‘알다’라는 동사로 쓰이는 경우가 더 흔한데, 『논어』 역시 예외는 아니다. ‘알다’라는 개념 자체는 다양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며, 구체적 의미를 한정하기 위해서는 문장 속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사용되었는지 구분하는것이 필요하다. 지의 개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용법에 따라 구분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논어』의 ‘지’ 개념을 구분하면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하나는 ‘식(識)’의 의미로서, ‘알다’, ‘인식하다’는 의미이며,다른 하나는 ‘사(司)’의 맥락에서 읽을 수 있는 ‘사람을 알다’, ‘알아주다’는 의미이다. 이들은 동사로 쓰인 것으로 문장 안에서 어떠한 목적어와쓰이는가에 따라 의미의 결이 달라진다. 마지막으로 명사로 쓰인 것으로, 덕성으로서 지혜(智慧), 혹은 지혜를 갖춘 자[知者]의 의미가 있다.이 개념들은 앞서 살핀 ‘지’ 자의 고의와 어느 정도 일치한다.

1. 알다·인식하다[識]

서술어로서 지(知)가 가진 가장 대표적인 의미는 식(識)으로, 우리말로 풀자면 ‘알다’, ‘인식하다’이다. 그러나 ‘지’를 ‘알다’, ‘인식하다’라는 단어로 바로 치환해 버린다면 모호함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개념어가아닌 이상, ‘지’ 자체의 개념을 천착하는 것으로는 ‘지’의 의미를 규명하는 데 부족하기 때문이다. 지의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하는 것은 ‘알다’라는 행위가 가진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문장 속에서다른 요소와의 관계를 살펴야 한다. ‘지’라는 술어가 어떠한 목적어, 주어와 결합하는가에 따라 의미를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1) 정보나 지식을 갖추다

‘안다’는 것의 가장 대표적인 의미는 정보 혹은 지식을 갖춘다는 의미이다. 대상화된 지식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수용자에게 이미 ‘습득된’ 상태를 말한다. 이는 사물과 세계, 인간에 관한 경험과 접촉을 통해 습득된다. ‘앎’의 대상이 되는 지식은 이미 정형화되고고정화된 것이다. 육예(六藝) 등으로 대표되는 문(文)이 그것이다. 이 지식은 과거의 성인(聖人)들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문(文)을 습득하는 과정이 바로 학(學), 배움이다. ‘배움’을 통해 지식이 습득되며, 그 결과 ‘알게’ 된다. 배움과 ‘앎’의 관계는 밀접하다. 배움의 대상이 앎의 대상이 된다. 배우고 익힌 결과 ‘알게’ 되는 것이다. 『논어』에서는 특히 배움을 강조하는데, 이는 공자가 주(周) 문화를 전승하여 실현하는 것을 자신의 삶의 사명으로 삼은것으로 이어진다.

『논어』에서 ‘지’가 지식을 갖춘다는 의미로 사용될 때, 앎의 대상이 되는 용례는 특히 예(禮)와 악(樂) 등으로 한정되어 나타난다. 즉 예와 악이목적어가 되어, ‘예를 알다[知禮]’, ‘음악을 알다’18) 등으로 해석이 된다.공자가 태묘에 들어가 매번 묻자, 혹자가 공자는 예를 알지 못한다고 평한 적이 있는데,19) 이것이 ‘앎’의 대상으로 예가 제시된 대표적 사례일것이다. 또한 구체적인 의례가 앎의 대상으로 제시되기도 하는데, 누군가 체(禘) 제사의 내용에 대해 묻자 공자가 알지 못한다고 답한 것20)이 그 사례이다. 이러한 용례들은 ‘지’가 구체적인 대상에 대해 정보나 지식을 갖추다는 의미로 ‘알다’라고 해석되는 대표적인 용례이다.

대상화된 지식의 체계는 다양할 수 있으므로, 이를 인식하고 아는 것역시 다양할 수 있다. 그 습득의 과정 역시 다양할 수 있다. 그러나 『논어』에서 등장하는 ‘앎’의 대상은, 흥미롭게도 모든 지식을 포괄하지 않는다. 위에 제시된 예와 악 등으로 제한적이다. 

18) 음악과 관련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八佾」 23. 子語魯大師樂. 曰:「樂其可知也:始作, 翕如也;從之, 純如也, 皦如也, 繹如也, 以成.」
19) 「八佾」 15. 子入大廟, 每事問. 或曰:「孰謂鄹人之子知禮乎? 入大廟, 每事問.」子聞之曰:「是禮也.」
20) 「八佾」 11. 或問禘之說. 子曰:「不知也.知其說者之於天下也, 其如示諸斯乎!」指其掌.

이는 ‘배움’의 대상이 되는 학문의 영역과 비교해 보면 더욱 특징적이다. 『논어』에 보이는 학(學)의용례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가 전문적 기술 지식을 획득하기 위한 탐구, 둘째 인격 함양을 목적으로 하는 인문학, 셋째 도의인식을 위한 도학이다.21) 이는 학문의 체계, 지식의 체계라 할 수 있을것이다. 이 중 ‘전문적인 기술 지식의 탐구’는 구체적으로 ‘벼슬을 구하는 법’, ‘말을 부리고 활을 쏘는 것’, ‘농사와 원예를 하는 방법’, ‘군대를통솔하는 방법’ 등과 같은 전문적인 기술, 기예에 해당하는 지식 분야이다.22) 이들 전문적인 기술 지식은 배움의 대상이 되는 학문으로 제시되지만, 이들이 앎의 대상으로 등장하는 용례는 보이지 않는다. 『논어』에서 전문적 기술에 관한 지식은 ‘아는’ 것의 대상에서 배제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전문적인 기술에 대해 공자가 배우려고도 하지 않았고 다른이들에게 가르치기도 거부하였다는 점에서 쉽게 예측할 수 있는 일이다.『논어』에 제시된 학문의 대상 중, ‘지’의 목적어가 되는 것은 둘째와 셋째의 학문이다. 그중 배우고 습득하여 ‘알게’ 되는 것은 두 번째인 인문학이다. 세 번째 도학 역시 ‘지’의 목적어가 되지만 이는 인문학을 아는것과는 다른 앎이므로 구분하여 서술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3)장에서 후술하겠다.

이를 통해 공자가 강조한 학문, 지식의 성격을 한정할 수 있다. 공자는 전문적인 기술, 기예의 지식을 강학하지 않았으며, 그가 강조하였던학문은 시(詩), 예(禮), 악(樂)의 인문학이다.

예가 앎의 대상이 될 때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지식이나 정보로서예를 숙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는 ‘예를 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지적인 앎뿐만이 아니라 그것이 실천과 결부되었을 때, 이를 ‘안다’라고말할 수 있다. 관중(管仲)에 대한 평가가 대표적이다. 공자는 관중이 예를 모른다고 평하였는데, 이는 예에 대한 관중의 지식의 정도로 평가된 것은 아니다. 바로 그의 행동을 통해 평가된 것이다. 

21) 이 분류는 임헌규의 분류 체계를 따랐다. 임헌규, 「『논어』에서 학(學)의 의미」,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 『동방학』 33권, 2015 참조.

22) 위의 논문, 182쪽 참조.

그는 대부의 지위에 있으면서 제후의 예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예에 맞는 행동이 아니다.따라서 공자는 그를 예를 알지 못한다고 평하였다.

“그러면 관중은 예를 알았습니까?” 하고 묻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나라의 임금이어야 병풍으로 문을 가릴 수 있는데 관씨도 병풍으로 문을 가렸다.나라의 임금이어야 두 임금이 우호로 만날 때에 술잔을 되돌려 놓는 자리를 둘수 있는데 관씨도 술잔을 되돌려 놓은 자리를 두었다. 관씨가 예를 안다면 누가예를 알지 못하겠는가.”23)

관중은 자신의 지위에 맞지 않은 예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예를 올바르게 사용한 것이 아니다. ‘예를 안다’는 것은 지식으로 예를 숙지하고나아가 상황과 지위에 맞게 예를 사용하여 그 예를 실현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이는 소공(昭公)에 대한 평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소공은 동성(同姓)인 오(吳)나라에 장가를 갔으므로 예를 지키지 않은 것이고, 따라서 소공은 예를 안다고 할 수 없다.24)

어떤 지식이 있고 그것을 행위로 실현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그지식을 ‘안다’라고 할 수 있다. 행위와 분리된 앎이라면 이는 참되게 ‘아는’ 것이 될 수 없다. 이는 지(知)와 행(行)의 관계로, 실천과의 관계 속에서 지식을 논하였던 유학의 특징을 보여준다. 아마 초기 지에는 행위로실현된 앎이라는 의미도 포함하였을 것이며, 이후 실천과 괴리된 대상화된 앎이 구분되었을 것이다.

23) 「八佾」 22, 「然則管仲知禮乎?」曰:「邦君樹塞門, 管氏亦樹塞門;邦君爲兩君之好, 有反坫, 管氏亦有反坫. 管氏而知禮, 孰不知禮?」
24) 「述而」 30, 陳司敗問昭公知禮乎? 孔子曰:「知禮.」 孔子退, 揖巫馬期而進之,曰:「吾聞君子不黨, 君子亦黨乎? 君取於吳爲同姓, 謂之吳孟子. 君而知禮, 孰不知禮?」 巫馬期以告. 子曰:「丘也幸, 苟有過, 人必知之.」

2) 추론하다

앎의 대상이 되는 정형화된 지식, 정보는 과거에 형성되어 온 것이며,이를 습득하는 과정을 학습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는’ 것은 과거의 것에 국한되지만은 않는다. 이미 제공된 정보를 바탕으로 아직 알지 못하는것을 ‘새로이 알게 되는 것’ 역시 ‘앎’의 의미가 된다. 『논어』에서는 이러한 용례들이 자주 보이는데, “지나간 것을 말해 주니 올 것을 안다.[告諸往而知來者]”라는 구절이 대표적이다.

자공이 말하였다. “가난하지만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지만 교만하지 않다면어떻습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괜찮다. 하지만 가난하여도 즐거워하고,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 못하다.” 자공이 말하였다. “시에서 ‘자르고다듬듯이 하며, 쪼고 가는 듯이 한다.’라고 한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이군요.” 선생님께서 말하였다. “사(賜)야, 비로소 더불어 시를 말할 만하구나. 지나간 것을말해 주니 올 것을 아는구나!”25)

‘올 것’이란 ‘지나간 것’과 대조되어, 아직 말해 주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말해 주지 않은 것을 안다는 것은 배우지 않은 것을 안다는 것으로,아직 주어지지 않은 새로운 것을 아는 것이다. 이는 창조적 작업이나 창작 등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논어』에 보이는 ‘새로운 것을 아는것’은 ‘창조’, ‘창작’이라기보다는, 지금으로서는 알지 못하는 것을 이미알려진 과거의 정보에 근거하여 알아 나가는 것, 즉 추론에 가깝다. 완전히 새로운 것을 창작해 내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정보를 토대로 하여아직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판단이나 결론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이구절에서 ‘지나간 것’이란 ‘가난하면서도 즐거워하고 부유하면서도 예를좋아하는 것’이며, ‘올 것’이란 『시경』 「기욱(淇奧)」의 ‘절차탁마(切磋琢磨)’ 구절이다.26) 

25) 「學而」 15, 子貢曰:「貧而無諂, 富而無驕, 何如?」 子曰:「可也. 未若貧而樂,富而好禮者也.」 子貢曰:「《詩》云:『如切如磋, 如琢如磨.』其斯之謂與?」子曰:「賜也, 始可與言詩已矣!告諸往而知來者.」

즉 지나간 것을 말해 주자 올 것을 안다는 것은, 한 가지 개별적 사례를 경전의 일반적 사례로 치환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이러한 능력은 특히 학습의 과정에서 배우는 이가 가진 능력으로 강조된다. 배운 것을 토대로 새로운 것을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이다.

선생님께서 자공에게 말씀하셨다. “너와 안연 중에 누가 더 나으냐?” 자공이대답하였다. “제가 어찌 안연을 바라겠습니까. 안연은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고, 저는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알 뿐입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같지 않겠지, 내가 너의 같지 않음을 허여한다.”27)

이 구절에는 공자의 제자인 안연과 자공에 대한 평가가 보이는데, 이들은 모두 배우는 자들의 이해력에 대한 평가이다. 안연은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 이, 자공을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아는 이로 말하고 있다. 이구절에 대한 해석은 주석가들의 견해가 일치한다. ‘하나’는 숫자의 시작이며 ‘열’은 숫자의 끝을 의미한다. ‘10’은 숫자가 갖추어진 것으로, 수는1에서 시작하여 10에서 끝난다.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는 것은, 시작을 들으면 끝을 아는 것이다. 특히 유보남은 이를 ‘일이관지(一以貫之)’와관련하여 설명하고 있기도 하다.28) 반면 2는 1에 대비되는 숫자이다. 논어집주(論語集註) 에서 주희(朱熹)는 자공에 대해 ‘추측하여 알아 이것을 인하여 저것을 아는 것’이라 덧붙였다.

26) 하안(何晏)은 “‘가난하여도 도를 즐기는 것’으로 지나간 것을 일러주자 ‘절차탁마’로 올 것을 답하였다.”라고 해석하였다. 형병(刑柄), 유보남(劉寶楠) 역시이 해석을 따르고 있다. 論語注疏 十三經注疏整理本 卷23, 北京: 北京大學出版社, 2000, pp.13~14. (淸)劉寶楠 撰, 『論語正義』 十三經淸人注疏, 北京: 中和書局, 2007, pp.33~34.
27) 「公冶長」 08. 子謂子貢曰:「女與回也孰愈?」 對曰:「賜也何敢望回. 回也聞一以知十, 賜也聞一以知二.」 子曰:「弗如也!吾與女弗如也.」
28) 論語注疏 , p.65. 『論語正義』, p.177.

시작을 통해 끝을 안다는 것은, 시작과 끝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의미한다. 어느 방향으로 향할지 모르는 미지의 영역을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시작과 함께 결말이 완벽하게 구성된 지식 체계를 습득하는 것이다. 새로운 창조, 새로운 결말을 향하는 것이 아니다.이런 의미에서 공자의 학문은 닫힌 지식 체계를 가지고 있다. 공자 스스로 자신의 학문에 대해 “조술할 뿐 창작하지는 않는다.[述而不作]”라고하여 고전, 옛것을 강조한 것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배운 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아는’ 학습 능력이란 창작의 능력이아니라 추론 능력, 특히 유추의 능력이다. 열을 안다거나 둘을 안다거나하는 것은 유추 능력의 우열에 대한 표현이다. 유추란 “두 개의 사물이몇몇 성질이나 관계를 공통으로 가지며, 또 한쪽의 사물이 어떤 성질,또는 관계를 가질 경우, 다른 사물도 그와 같은 성질 또는 관계를 가질것이라고 추리하는 일”29)을 의미한다. 유추는 어떤 사물이 서로 연관되어 있고 그들이 비슷한 특징과 유사한 구조, 기능을 가진다는 것을 가정한다. 사물간의 특징의 일치나 유사성을 염두에 두는 것이다. 따라서 한사물에 적용되는 것은 다른 사물에서도 들어맞으며 적용된다. 공자에있어 닫힌 지식 체계의 총체이자 유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고전, 주(周) 문화이다. 주 문화야말로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을 추론하여 알 수 있게 해 주는 기준이 된다.

자장이 물었다. “열 왕조 뒤의 일을 알 수 있습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은나라는 하나라의 예를 인습했으므로 그 덜고 더한 것을 알 수 있다. 주나라는 은나라의 예를 인습했으므로 그 덜고 더한 것을 알 수 있다. 혹시 주나라를 이어 일어나는 나라가 있다면 비록 100세 이후의 일이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30)

은나라는 하나라를 계승하였고 주나라는 은나라를 계승하였으므로,그들 문화에서 지속된 것과 변화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주나라의 문화를 계승한다면, 이후의 왕조 역시 주나라와 유사할 것임을 유추할 수있다. 이미 아는 정보를 통해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을 유추하여 예측할수 있는 것이다.31)

29)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32820&cid=40942&categoryId=31530 두산백과 , ‘유추’ 항목 참조.

30) 「爲政」 23, 子張問:「十世可知也?」 子曰:「殷因於夏禮, 所損益, 可知也;周因於殷禮, 所損益, 可知也;其或繼周者, 雖百世可知也.」

 31) 제시한 용례 외에도 「위정」의 “옛 것을 잊지 않고 새 것을 알면, 스승이 될수 있다.[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라는 구절 역시 옛것과 새로운 것의 대비를 통해 유추를 통한 지식의 습득을 의미하는 용례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전통적인 주석에서는 이 구절의 ‘지신(知新)’을 ‘지금 새로 알게 된 것’,‘현재의 일을 아는 것’ 등으로 풀이하여, 위의 방식으로 읽고 있지 않다. 참고의 의미에서 간단히 소개하자면, 논어주소(論語注疏) 에서는 이 구절을 “옛것을 분석하여 잊지 않고 새로운 것을 알면, 스승이 될 수 있다.”라고 해석하고 있으며, 형병의 소에서, “본래 알지 못하던 것을 배워서 알게 하는 것을지신(知新)이라 한다.”라고 하였다.(p.20) 주희 역시 “고는 예전에 들은 것, 신은 지금 새로 터득한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논어집석(論語集釋) 에서는“新은 今으로, 당시의 일이다.”라고 풀이하여, 지신(知新)은 대의에 통하여 후세의 제작을 참작하는 것이라 본다. 이 해석에 따르면 ‘온고지신’은 ‘옛일과현재의 일을 모두 아는 것’이다.

3) 천명(天命)을 깨닫다

‘안다’는 것은 정보나 지식이 습득된 상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의식이나 감각으로 분별하고 판단한다는 의미도 포함한다. 이는 『논어』의 용례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삼 개월 동안 고기 맛을몰랐다.[三月不知肉味]”32)거나 “즐거워 근심을 잊어 늙음이 장차 닥쳐오는지도 모른다.[樂以忘憂, 不知老之將至云爾].”33)거나 “자신의 분수를 모른다.[不知量]”34) 등이 포함된다.

또한 ‘지(知)’는 심리적 상태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다. 이때 ‘안다’는 것은 의식이나 심리적으로 무엇인가를 느끼거나 깨달았음을 뜻한다.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안다.[歲寒然後,知松柏之後彫也.]”35)라는 구절이 대표적이다. 이 구절에서 아는 것은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든다는 단순한 생물학적 지식이 아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알고 있던 지식을 ‘다시금 알게 된 것’이다. 습득한 정보나 지식이 삶의 구체적인 맥락 속에서 새롭게 환기된 것이며 삶의 경험 속에서 다시금 포착된 것이다. 이렇게 아는 것은 정보나 지식을 갖추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정보나 지식이 내 삶 안에서 경험을 통해 온 몸으로, 온 마음으로 환기되어 아는 것이다. 이렇게 아는 것이 바로 심리적 상태를 마음속으로 느끼거나 깨닫는 것, 곧 ‘깨달음’이다.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까지 시들지 않음을 ‘알게’ 된 것은 공자의앎이자 깨달음이다. 지식이 그의 삶의 맥락에서 생명력을 갖기 시작한순간이다.

‘지’와 관련된 가장 중요한 용례인 ‘지천명(知天命)’은 이러한 맥락에서이해할 수 있다. 천명은 공자의 사유 체계 안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논어』에서 ‘천명’이 사용되는 용례는 ‘지천명(知天命)’, ‘외천명(畏天命)’36)등으로, 천명과 동반되어 행해지는 주된 행위는 ‘아는’ 것이다.37)고대 중국 사상에서 ‘명(命)’은 크게 두 가지 범주의 뜻을 가지는데,‘명령을 내리다’와 ‘한정하다’이다. 명령하다는 것이 명의 본래 뜻으로,이때는 어떠한 의지의 요구를 가정하게 된다. 이후 명령하다는 뜻에서한정하다는 뜻으로 전환되었는데, 한정한다는 것은 ‘운명’으로 정해진환경이나 조건이라는 관념을 가리키게 되었다.38)

32) 「述而」 13, 子在齊聞韶, 三月不知肉味. 曰:「不圖爲樂之至於斯也!」
33) 「述而」 18, 葉公問孔子於子路, 子路不對. 子曰:「女奚不曰, 其爲人也, 發憤忘食, 樂以忘憂, 不知老之將至云爾.」
34) 「子張」 23, 叔孫武叔毀仲尼. 子貢曰:「無以爲也, 仲尼不可毀也. 他人之賢者,丘陵也, 猶可踰也;仲尼, 日月也, 無得而踰焉. 人雖欲自絕, 其何傷於日月乎?多見其不知量也!
 35) 「子罕」 28.
36) 「爲政」 04, 五十而知天命. 「季氏」 08, 孔子曰:「君子有三畏:畏天命, 畏大人,畏聖人之言. 小人不知天命而不畏也, 狎大人, 侮聖人之言.」

37) 「季氏」 08 구절에서 ‘천명을 두려워하는 것’은 ‘천명을 알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외에도 천명(天命)이라 명시되지 않았지만, 명(命)을 앎의 대상으로 삼은 구절들이 등장한다. 「堯曰」 03, 子曰:「不知命, 無以爲君子也. 不知禮, 無以立也. 不知言, 無以知人也.」

 38) 이는 노사광의 분류를 따른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졸고, 「『논어』에 나타난배움의 의미」, 석사학위논문, 한국외국어대학교, 서울, 2009, 29쪽 주63) 참조.이택용은 명을 ‘수명, 생명, 명맥’, ‘운명’, ‘하늘의 도덕적 명령, 이치’로 분류한다. 이때 운명이란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자 인과 메커니즘을 벗어나 있는 삶의 우연성이다. 도덕적 명령은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한 임무로서의 사명의 의미를 포함한다. 이들 개념은 시간적으로 구성되기도 하는데, 천명은 대체로 하늘의 도덕적 의미로 사용되다가 수명의 의미가 더해지고, 춘추 말기로 접어들면서 운명의 의미가 부가되기 시작하였다. 이택용, 「『논어』 “지명(知命)”의 의미 고찰 -『논어』 전후 전적에 나타난 “지명”의 용례를 통해서-」,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 『동방학』 28권, 2013, 198쪽, 213쪽 참조.

 천명 역시 이 두 가지 범주 안에서 이해된다. 『시경』, 『서경』 등의 고전에서 천명은 명령하다는 의미를 가지며, 하늘의 명령, 인격천의 의지를 나타낸다. 하늘의 의지는 권위의 표준이자 가치의 표준이 된다. 하늘의 의지는 구체적으로 선한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복을 내리는 것으로 나타나며, 따라서 도덕적인 명령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도덕적 명령의 의미에서 점차 ‘도덕’의 의미가 탈락하여 ‘운명’이라는 의미로 변화한다. 화복(禍福)의 보상이 하늘의 도덕적 명령과는 무관하게 제한적이며 한정적으로 이뤄지는 것으로 파악한 것이다.39)

『논어』의 천명은 도덕적 명령에서 운명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경향을 보인다. 지천명(知天命) 구절에서 천명은 도덕적 명령, 운명 어느 쪽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며, 학자들에 따라 해석이 분분하다. 논어주소 에서 하안은 「위정」4의 “50세에 천명을 알았다.[五十而知天命]”라는 구절에서 지천명을 천명의 처음과 끝을 아는 것이라 풀이하고 다른 설명을 덧붙이지는 않았으나,40) 「계씨」8의 ‘외천명(畏天命)’구에서는 천명을 “따르면 길하고 거스르면 흉한 것”이라 설명하고 있다.41) 화복의 보상과 관련된 명령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또한 황간은 「위정」4에서는 명을 하늘에서 품부받은 것으로 설명하며, 공자는 47세에 역 을 배워, 50세에 이치를 궁구하고 본성을 다하고 천명의 시작과 끝을 알았다고 풀이한다.42)하늘로부터 부여받았다는 것은 조건의 제한을 의미하며, 역 과 관련성을 짐작하여도, 여기서의 천명은 운명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계씨」8에서는 “도(道)는 천명이며, 천명은 보답하지 않음이 없다.”라고하여,43) 보상 체계와 관련된 도덕적 명령으로 파악하고 있다.

논어정의 는 기본적으로 ‘사명’의 측면에서 파악한다. 「위정」4에서는 현명함과 어리석음과 같은 타고난 성질의 차이를 덕명(德命)으로, 길흉과 수명 등을 녹명(祿命)으로 구분하는데, 군자가 덕명을 닦으면 절로 녹명에 편안히 처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사명이란 도덕적 명령에 가깝고, “군자는 명이 하늘에서 연원한다는 것을 알고 반드시 하늘을 따라 행해야” 하므로, 사명이 된다.44) 이러한 관점은 「계씨」8에서도 동일하게 유지된다.45)

39) 하늘의 도덕적 명령에서 ‘운명’으로 의미가 변화된 이유에 대해여, 이택용은선한 자에게 복을 주고 악한 자에게 화를 내린다는 하늘의 도덕적 보상 법칙이 현실에서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당시 사람들이 인식하였기 때문이라설명한다. “운명은 개인의 덕과 그가 누리는 복의 괴리를 귀속시키는 대상으로 자리매김”한다는 것이다. 위의 논문, 208~209쪽 참조.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화복(禍福)의 보상이, 하늘의 도덕적 명령과는 무관하게 제한적이며 한정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운명’이다. 문석윤은 명령에서 운명으로 변하는 과정을 천과 천명이 도덕적 맥락과 벗어나 이법(理法)화 되는 경향으로 설명한다. 문석윤, 앞의 논문, 377쪽 참조.

40) 『論語注疏』 p.16
41) 『論語注疏』 p.259.
42) 『論語注疏』 p.17.
43) 『論語注疏』 p.259.
44) 『論語正義』 pp.44~45.
45) 『論語正義』 p661.

주희는 천명을 고전적 의미의 ‘사명’, ‘운명’으로 해석하지 않고 성리학개념인 천리(天理)로 이해한다. 그에 의하면 “천명(天命)은 천도(天道)가유행(流行)하여 사물에 부여한 것으로, 바로 사물에 당연한 도리(道理)의소이연(所以然)”(『논어집주』, 「위정」4)이며, “하늘이 부여해 준 바의 정리(正理)”(『논어집주』, 「계씨」8)이다. 천명을 천리로 치환한 주희의 해석은 선진 유학에서 성리학으로의 전환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처럼 주석가들의 의견은 분분하여 고정된 해석으로 모이지 않는다.46)

지금까지 ‘천명’이 무엇이 무엇인지 간략히 살피고 관련된 해석을 제시하였다. 천명은 하늘의 도덕적 명령 혹은 운명을 의미한다. 그러나 천명에 관한 많은 해석을 살폈음에도, 논자는 아직 천명이 도덕적 명령인지 운명인지 판단하지 못하였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해 보자. 논자가 천명이 도덕적 명령인지 운명인지 알아서 판단할 수 있게 된다면, 과연 천명을 ‘아는’ 것일까? 천명에 관한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고, 그 정보를 이해하며, 시비를 가려낼 수 있다면, 이는 천명을 ‘아는’ 것일까?

천명과 관련하여 이뤄지는 행위는 ‘안다’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천명에 관한 지식을 습득하고 이해하며 시비를 판단할 수 있다고 해서, 천명을 ‘아는’ 것은 아니다. 천명이 도덕적 명령이든 운명이든 어느것도 인지적 학습을 통해 습득할 수 있는 지식, 정보가 아니라는 점은동일하다. 천명을 아는 것은 일반적 지식이나 정보를 갖추어서 아는 것과는 다른 앎이다.

천명이란 하늘의 명령이자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것을 의미한다.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것은 신체적 생명이기도 하고 조건적 한계이기도 하다.명령이 하늘의 의지이자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라면 운명은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적 한계이다. 천명이 가진 명령과 운명의 의미는 서로 배치하지 않는다. 행위를 바탕으로 상벌을 내리는 도덕적 명령의 의미가 탈각되었더라도 사명으로서 명령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천명을 안다는것은 하늘의 의지에 기초한 사명을 이해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와주어진 조건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명령과 운명의 절충이다.47)

공자는 하늘의 의지에 기초한 사명을 주 문화의 실현, 사문(斯文)의 실현이라 여겼다. 사문의 실현을 위해 굳세게 살아가는 와중에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의 참된 의미와 가치를 이해하는 순간 천명을 알게 된다. 천명에 대한 앎은 삶의 구체적인 맥락 속에서 새롭게 환기된 것이며 삶의경험 속에서 다시금 포착된 것이다. 하늘의 의지가 내 삶 안에서 경험을통해 온 몸으로, 온 마음으로 환기되어 아는 것이다. 그래서 천명을 ‘안다’는 것은 깨달음이다.

46) 천명과 명에 대한 논의는 중요한 문제이며 그 자체로 큰 연구 주제가 된다.그러나 이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것은 본 논문의 범위를 넘어서는 작업이므로 자세한 논의는 다음 지면을 기다리겠으며, 이에 관련된 논문을 소개하는것으로 대신한다. 명론(命論)에 관해서는 이택용의 논문에서 자세히 살필 수있다. 그는 명론 자체만 한정하여 분석하여, 명이 ‘운명’임을 논증하였다. 기존의 명론에 대한 해석과 용례를 자세히 제시하고 있으므로 좋은 참고가 된다. 이택용, 앞의 논문.

47) 문석윤은 『논어』에서의 명을 기본적으로 ‘운명’으로 파악하지만, “천의 선한의지와 결부되는” 경향 역시 띠고 있다고 파악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도덕천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운명의 힘을 인정하되 그것을 넘어서는 절대적 의지로서의 천의 요소가 공자에 의해 발굴되었다는 것”이며, “명은 천의 의지, 그에 기초한 우리의 사명”이라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천명은 운명과 사명을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문석윤, 앞의 논문, 377쪽 참조.

2. 사람을 알다[知人]
1) 사람을 알아주다[知人]

『논어』에는 ‘지(知)’의 용례 가운데 ‘지인(知人: 사람을 알다)’, ‘지기(知己: 자기를 알다)’ 등 사람을 목적어로 사용하는 용례가 자주 등장한다.이는 앞서 살펴본 지의 의미 가운데 ‘사(司)’, 주관하다, 담당하다는 의미에서 읽어야 한다. 일을 담당하여 주관하다는 의미에서, ‘어떤 일을 할줄 안다’는 의미로 파생되었다. 어떠한 일을 할 능력이나 소양을 갖추었을 경우, 그 일을 ‘안다’라고 할 수 있다. 즉 직능에 대한 능력의 여부를표현하는 말로 쓰이는 것이다. 이 의미군은 관료제와의 관련에서 사용되기도 한다. 어떠한 일을 할 줄 안다는 것은 그 직임을 맡아 실행할 수있다는 것으로, 관료제의 구성원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어떠한 특수한 직능들의 경우, 관료가 되어야만이 수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가령병법(兵法)의 경우는 한 국가의 군인으로 등용되어야만이 시행할 수 있는 것이고, 외교술 역시 한 국가의 대사가 되어야만이 시행할 수 있는능력이다. 구체적인 직능을 익혀서 할 수 있더라도, 그것을 하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자리, 지위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관료제의 맥락에서 ‘지’의 또 다른 의미인 ‘사람을 안다[知人]’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을 안다’는 것은 한 사람이 가진 능력의여부를 파악하는 것이며, 구체적으로는 그 능력을 실현하여 일을 할 수있는 자리에 등용하는 것이다. 즉 그 사람의 능력을 파악하여 관료로 등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관료제에서 채용하는 군주의 관점에서 사용된다.

『논어』에서도 이러한 지인(知人)의 용례를 찾을 수 있다. 공자가 자로(子路), 증석(曾皙), 염유(冉有), 공서화(公西華)에게 “너희들을 알아준다면, 어떻게 하겠는가?[如或知爾, 則何以哉.]”라고 묻자, 자로는 천승의 제후국에서 정치를 행할 것이며, 염유는 작은 나라에서 정치를 행할 것이며, 공서화는 집례자의 일을 행할 것이라 포부를 말하였다.48) 이들의 대화에서 보이는 ‘사람을 알아주다’는 것이 바로 관료로써 등용해 준다는의미로 쓰인 대표적인 구절일 것이다.

48) 「先進」 25 참조.

‘사람을 알아주다’는 것은 ‘등용[用]’, ‘선발[舉]’의 의미를 가진다. 관료체계 안에서 한 사람을 등용하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진 직무 능력의 유무에 달려 있다. 그러나 『논어』에서 사람을 알아 등용한다는 의미는, 그사람의 실무적 기술과 직능에 한정된 것은 아니다. 실무자로서 관료가되는 것이 아니라, 재상이 되어 제후가 도덕 정치로 국가를 다스리도록 보좌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그 목표이다. 여기서 종래 ‘지인’의 의미가 『논어』에서 확장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사람을 알아주는 것’이 관료제의 기능적 측면에서의 능력 여부에 대한 판단만이 아니라, 내면의도덕성 여부의 판단을 의미하는 것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이는 업무에맞는 기능적 능력만이 아니라 내면적 덕목까지 정치적인 능력으로 포함 시키려는 시도이다.

번지(樊遲)가 인에 대해 묻자 선생님께서 말씀하였다. “사람을 아끼는 것이다.” 앎에 대해 묻자 “사람을 아는 것이다.”라 하였다. 번지가 그 뜻을 알아듣지못하자 선생님께서 말씀하였다. “곧은 이를 들어서 굽은 이에게 두면 굽은 이가 곧아질 것이다.” 번지가 물러나와 자하(子夏)를 보고 말하였다. “지난번에 내가 선생님을 뵙고서 앎에 대해 묻자 선생님께서는 ‘곧은 이를 들어서 굽은 이에게 두면 굽은 이가 곧아질 것이다’라 하셨는데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자하가 말하였다. “풍부하구나, 그 말이여! 순(舜) 임금이 천하를 다스리실 때 여러사람 중에서 선택하여 고요(皐陶)를 등용하였더니 인(仁)하지 않은 이들이 멀리사라졌다. 탕(湯) 임금이 천하를 다스리실 때 여러 사람 중에서 선택하여 이윤(伊尹)을 등용하였더니 인하지 않은 사람들이 멀리 사라졌다.”49)

사람을 안다는 것은, 정직한 사람을 등용하는 것[舉直], 즉 그 사람의도덕적 역량을 파악하여 도덕적인 이를 등용하고 그렇지 않은 이를 멀리하는 것이다. 순 임금이 재상 고요를 등용하고 탕 임금이 이윤을 등용한 것이, 사람을 알아보는 것의 모범적인 사례이다. 그리고 덧붙이자면,도덕적인 재상을 등용하여 도덕 정치를 펼치는 것이 곧 사람을 사랑하는 것, 인(仁)이 된다.

49) 「顔淵」 22, 樊遲問仁. 子曰:「愛人.」 問知. 子曰:「知人.」 樊遲未達. 子曰:「舉直錯諸枉, 能使枉者直.」 樊遲退, 見子夏. 曰:「鄉也吾見於夫子而問知, 子曰,『舉直錯諸枉, 能使枉者直』, 何謂也?」 子夏曰:「富哉言乎!舜有天下, 選於眾, 舉皋陶, 不仁者遠矣. 湯有天下, 選於眾, 舉伊尹, 不仁者遠矣.」

2) 자신을 알아주다[知己]

사람을 알아주는 것은 자질과 능력을 갖춘 사람을 등용하는 것이므로, 이는 사람을 등용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 즉 집정자의 고유한능력이다. 반면 관료로 등용되기를 원하는 이들은 집정자가 ‘자신을 알아주기[知己]’를 기다릴 뿐이다. 관료로 등용된다면 이는 집정자가 ‘자신을 알아준’ 것이다. 반대로 자질과 능력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등용되지 못하는 상황은, 군주나 제후가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것이다.

공자는 사(士)의 신분으로, 집정자의 지위를 가지지 못하였으므로, 그주된 관심사는 사람을 알아주는 것보다는 ‘자신을 알아주는’ 것에 있었다. 공자의 정치적 이력으로 보자면 공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것보다는알아주지 않는 상황에 더 익숙하였을 것이다. 『논어』에서는 이러한 ‘자신을 알아주지 않음’에 대한 회한이 강하게 감지되는데, 이러한 상황에대처하는 공자의 태도에는 주목할 만한 점이 몇 가지 있다. 우선 공자는자신을 알아주지 않음에 대해 ‘노여워하지 않으며’ ‘원망하고 탓하지 않을’ 것을 강조한다. 자신의 의지‧의도가 세상과 불화하는 현실에 대해 분노하지 않고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이들을 원망하지 않으며, 그 사태를받아들인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때마다 익힌다면 기쁘지 않겠는가. 벗이 먼곳에서 찾아온다면 즐겁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노여워하지않는다면 군자가 아니겠는가.”50)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를 알아주는 이가 없구나!” 자공이 “어찌하여 선생님을 알아주는 이가 없는 것입니까?” 하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으며 사람을 탓하지 않고, 아래에서 배워 위로 통달하니, 나를알아주는 것은 하늘일 것이다.”51)

노여워하지 않으며 원망하고 탓하지 않는 태도는, 일견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현실에 대한 소극적인 순응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위의 구절들에 대한 타당한 해석은 아니다. 

50) 「學而」 01, 子曰:「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51) 「憲問」 37, 子曰:「莫我知也夫!」 子貢曰:「何爲其莫知子也?」 子曰:「不怨天, 不尤人. 下學而上達. 知我者, 其天乎!」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것에노여워하지 않는 것은 공자의 학문적 태도와 관련하여 읽어야 한다. 배움의 일차적 목표는 자기의 완성에 있으며, 외부의 인정 여부는 부차적인 일이다. 자신을 위한 학문[爲己之學]을 하므로, 도를 얻었다면 이로써내면의 충만감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고, 외부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더라도 그것은 별개의 일이다. 이러한 태도의 일환으로서, 공자는 자신의무능함, 부족함을 걱정하지, 외부에서 인정받지 못함을 걱정하지 말 것을 강조한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못함을 걱정하지 말고, 자신의능하지 못함을 걱정해야 한다.”52)

노여워하지 않는 것은 군자로서 덕의 완성을 의미하지만, 자신을 알아주지 않음에 대한 공자의 대응에는 이보다 더 중요한 태도가 있다. 바로 알아주지 않더라도 ‘그만두지 않는 것’이다. 세상에 도를 실현하겠다는 의지를 가졌더라도 자신이 등용되어 쓰이지 않는다면 현실에 실현할수 없다. 노여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만두지 않는다.

선생님께서 위(衛)나라에서 경쇠를 두들기셨는데, 삼태기를 메고 공씨(孔氏)의 문 앞을 지나가는 자가 듣고서 말하였다. “마음이 천하에 있구나. 경쇠를 두들김이여!” 조금 있다가 말하였다. “비루하다. 너무도 단단하구나! 자기를 알아주지 않으면 그만둘 뿐이다. 물이 깊으면 옷을 벗고 건너고, 얕으면 옷을 걷고건너야 하는 것이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세상을 잊는 것이 과감하구나!그렇게 산다면 어려울 것이 없겠구나!”53)

“알아주지 않으면 그만두어야 할 것”이며, “물이 깊으면 옷을 벗고 건너고 얕으면 걷고서 건너면 되듯이” 세상의 흐름에 맞추어 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자면 공자는 비루한 사람이 된다. 그러나 공자는 이러한 비평에도 불구하고, 도를 실현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다. 그것이 실현되리라는 낙관적 기대는 가지지 않았으나54) 그만두지 않은 것은 그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이다. 공자는 “불가능하다는것을 알면서도 하는 자[知其不可而爲之者]”이다.55)

52) 「憲問」 32. 子曰:「不患人之不己知, 患其不能也.」이 구절과 유사한 형태로 쓰여 동일한 의미를 가지는 문장이 여럿 보이는데, 제시하자면 다음과 같다. 「衛靈公」 18, 子曰:「君子病無能焉, 不病人之不己知也.」 「里仁」 14, 子曰:「不患無位, 患所以立;不患莫己知, 求爲可知也.」
 53) 「憲問」 42, 子擊磬於衛. 有荷蕢而過孔氏之門者, 曰:「有心哉!擊磬乎!」既而曰:「鄙哉!硜硜乎!莫己知也, 斯己而已矣. 深則厲, 淺則揭.」 子曰:「果哉!末之難矣.」
54) 「微子」 07 참조.
55) 「憲問」 41.
3) 사람됨을 알다[知仁]

마지막으로 ‘사람을 알아주는 것’에 적극적인 변환이 일어난다. 바로상대가 자신을 알아주기를 바라기보다는 내가 상대를 알아줄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상대가 나를 알아주는 것이 중요한 만큼, 내가 상대를 알아주는 것 역시 중요하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못함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남을 알지 못함을 걱정해야 한다.”56)

관리 등용의 측면에서, 사람을 알아주는 것은 채용자의 입장에, 자신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은 채용대상자의 입장에 한정된 것이지만, 이러한 변환은 채용자와 채용대상자의 관계를 벗어난다. 일방적 평가의관계에서 벗어나 쌍방의 관계로 전환하는 것이다.57) 그리고 이는 사람을 알아주는 것이 더 이상 관료제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음을 의미한다.58)사람을 아는 것이 관리 등용과 별개로 이뤄지게 된 것은, 공자가 내면적 덕목까지 정치적 능력으로 포함시킨 결과라 할 수 있다. 사람이 가진내면적 덕목이 관리 등용의 중요한 기준이므로, 채용자가 관료를 등용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가진 기능적 역량과 함께 도덕적 역량까지 ‘알아야’ 하며, 채용대상자는 등용되기 위해 도덕적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사람을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진 도덕성에 대한 평가라 할 수 있다.이런 측면에서 『논어』에서 자주 등장하는 용례인 ‘지인(知仁)’, ‘부지인(不知仁)’을 설명할 수 있다.

‘지인(知仁)’, ‘부지인(不知仁)’은 앞서 ‘예를 안다’거나 ‘악을 안다’는 것과 동일한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여기서 인(仁)은 예와 악 등 전승된 지식을 의미하지 않으며, ‘안다’는 행위 역시 지식 습득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인(知仁)’이란 사람의 내면적 덕목을 인(仁)이라는 기준으로 평가하여, ‘그 사람됨이 인(仁)한지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의 허물은 각기 그 부류에 따라 다르다. 허물을보면 (그 사람이) 인한지 알 수 있다.”59)

‘사람됨이 인(仁)한지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이 인한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용법은 특히 공자가 제자들에 대해 평가할때 자주 사용되는 방식이다.60) 인(仁)이란 실현하기 어려운 가치이므로,인하다고 인정되기는 경우란 드물다. 이러한 경우 ‘(그 사람됨이) 인한지모르겠다’는 것은 ‘그 사람됨이 인하지 않다’고 완곡하게 부정하는 표현으로 사용된다.

56) 「學而」 16, 子曰:「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57) 흥미로운 것은 ‘자신을 알아줌’에서 ‘다른 사람을 알아줌’으로 확장되는 것이‘서(恕)’의 개념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서’란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베풀지 않는 것[己所不欲, 勿施於人.](「위령공」 23장)”이며, 자신의 마음을 미루어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다. 「안연」에서는 이를 인(仁)으로 설명하고 있기도 하다.

58) 이런 측면에서 문석윤은 ‘남을 알아본다는 것’에서 지인(知人)의 문제가 관료제의 맥락을 벗어나는 것으로 이해한다. 남을 알아보는 것은 “타인의 관료적능력에 대한 인식이라기보다는 그의 다른 면모에 대한 이해를 의미하는 것”이며, 그 면모란 ‘참된 인간다움’이라 설명하고 있다. 문석윤, 앞의 논문, 381쪽 참조.

59) 「里仁」 07, 子曰:「人之過也, 各於其黨.觀過, 斯知仁矣.」
 60) 이와 관련된 구절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公冶長」 04, 或曰:「雍也, 仁而不佞.」 子曰:「焉用佞? 禦人以口給, 屢憎於人. 不知其仁, 焉用佞?」「公冶長」, 08, 孟武伯問:「子路仁乎?」 子曰:「不知也.」 又問. 子曰:「由也, 千乘之國, 可使治其賦也, 不知其仁也.」 「求也何如?」 子曰:「求也, 千室之邑, 百乘之家, 可使爲之宰也, 不知其仁也.」 「赤也何如?」 子曰:「赤也, 束帶立於朝, 可使與賓客言也, 不知其仁也.」「公冶長」 18, 子張問曰:「令尹子文三仕爲令尹, 無喜色;三已之, 無慍色. 舊令尹之政, 必以告新令尹.何如?」 子曰:「忠矣.」 曰:「仁矣乎?」曰:「未知, 焉得仁?」「崔子弒齊君, 陳文子有馬十乘, 棄而違之.至於他邦, 則曰:『猶吾大夫崔子也.』違之.之一邦, 則又曰:『猶吾大夫崔子也.』違之.何如?」 子曰:「清矣.」曰:「仁矣乎?」 曰:「未知.焉得仁?」「憲問」 02, 「克、伐、怨、欲不行焉, 可以爲仁矣?」 子曰:「可以爲難矣, 仁則吾不知也.」

3. 덕성으로서 지혜

지금까지 살핀 것은 ‘지(知)’가 동사로 쓰인 것이다. ‘지’는 명사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때는 앞서 지의 고의에서 살펴보았듯이 ‘지(智)’의 의미를 가진다. 지(智)는 덕성으로서 지혜를 의미하는데, 특히 『논어』에서는 지(智)를 갖춘 사람, 지자(知者)를 지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지(知)는 『논어』에서 언급되는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이다. 용례적인특징으로는 덕성으로서 지가 제시될 때 다른 덕성들과 병렬되어 제시되는데, 대표적인 것이 인자(仁者)와 병칭되거나,61) 지(智)‧인(仁)‧용(勇)의 삼달덕(三達德)으로 병칭되는 것이다.62) 이로써 본다면 지(知)는 『논어』의 핵심 가치인 인(仁)과 적어도 대등한 카테고리를 형성할 정도의 중요한덕목임을 알 수 있다. 반면 지자‧인자, 지자‧인자‧용자의 병칭은 덕목으로거론되는 것인데 비해, 지와 대립하는 성품으로 어리석음, ‘우(愚)’가 제시되기도 한다.63)

지자(智者)가 어떠한 사람인지는 공자가 생각한 ‘지’ 개념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지자란 지식을 갖춘 자이긴 하지만 그 지식이 전문적 기술,기예까지 포괄하지 않으며, 시, 예, 악 등 인문학에 정통한 사람이긴 하지만 박학다식한 사람은 아니다. 지자란 본질에 대한 통찰을 지니며 실천으로 앎을 완성하는 사람이다.

61) 「雍也」 21, 子曰:「知者樂水, 仁者樂山;知者動, 仁者靜;知者樂, 仁者壽.」
62) 「子罕」 28, 子曰:「知者不惑, 仁者不憂, 勇者不懼.」

Ⅳ. 결론

지금까지 『논어』의 지 용례를 분류하여 그 개념을 분석해 보았다. 동사 식(識), ‘알다’라는 의미가 지가 가진 가장 대표적인 의미이다. ‘알다’라는 것은 여러 층위가 있으므로, 그것이 문장 속에서 어떠한 대상과 결합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를 구분할 수 있다. 안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정보나 지식을 습득하여 갖춘다는 의미를 가진다. 『논어』에 보이는 용례의 특징은 농사, 군사 등의 기술에 대해서는 ‘알다’라고 언급한 적이 없고, 주로 예·악을 비롯한 인문학에 대해 ‘알다’라고 표현한다. 『논어』에서앎의 대상으로 취하는 정보나 지식은 인문학에 한정된 것이다. 그리고정보나 지식을 행위로 몸소 실현할 수 있을 때 그것을 참되게 안다고할 수 있다. 행위와 괴리된 인지적 앎은 참된 앎이 아니다. 또한 ‘알다’라는 것은 추론, 유추의 능력을 의미하기도 한다. 개별의 사례를 경전과 고문의 보편 사례로 치환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들은 모두 주 문화라고 하는 하나의 보편적인 문화를 상정하고 그것을 완결된 형태로 습득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마지막으로 학습이나 추론을 통해 습득하는 정보나지식 외에도, 삶의 맥락과 경험 속에서 새롭게 환기되는 깨달음 역시‘아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지천명(知天命)이다. 천명을 안다는 것은 하늘의 의지에 기초한 사명을 이해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와 주어진 조건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또한 지에는 관료제의 맥락에서 ‘사람을 알다[知人]’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때 사람을 아는 것은 일차적으로 한 사람이 관료의 직능에 관련된기술, 기능을 갖추고 있음을 아는 것이고, 이어 관료로 적합한 자리에등용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공자는 지인의 종래의 의미를 확장하여, 내면의 도덕성 여부의 판단까지 포함하였다. 군주는 실무적 능력만으로 관료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덕성을 갖춘 이를 등용하여 도덕정치를 시행하여야 한다. 이는 내면적 덕목까지 정치적 능력으로 포함시킨 시도이다. 또한 『논어』는 ‘자신을 알아주지 않음’에 관한 회한이 종종 등장하는데, 자신을 알아주지 않더라도 ‘노여워하지 않으며’ ‘원망하고 탓하지 않는’ 것이 공자가 가진 태도의 특징이다. 마지막으로 공자는사람을 알아주는 것을 관리 등용과 별개의 일로 발전시켜, 그 사람의 도덕적 역량을 헤아리는 일까지 포함하였다. 사람에 대한 “사람됨이 인(仁)한지 안다”, “사람됨이 인(仁)한지 모르겠다.” 등의 평가가 이러한 맥락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가 명사로 쓰인 경우도 있으며, 이때는 덕목으로서 의지(智), 혹은 지를 갖춘 사람[智者]를 의미한다.

이처럼 ‘지(知)’는 다양한 맥락에서 다양한 의미로 읽을 수 있다. 이 점은 『논어』에서 ‘지’가 중요한 가치를 가졌음에 비해, 일관된 개념 체계를 형성할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양한 의미에도 불구하고,지의 의미를 분류하고 범주화하는 재해석 작업을 통해 공자의 학문 체계 속에서 ‘지’의 지위를 살펴볼 수 있다. 『논어』의 특정한 맥락에서 구성되는 ‘지’의 의미는 이를 더욱 특징적으로 드러낸다.

‘알다’라는 행위는 인지적 지식의 습득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깨닫다’는 의미에서 감각적, 정서적 상태 또한 포함한다. 정서적 상태인 ‘깨달음’은 인지적 앎이 행위로 구현될 때 환기된다. 공자가 강조한 ‘지’는 인지적 앎이 행위와 결합된 앎인 것이다. 인지적 앎을 나의 몸과 마음, 행동으로 온전하게 실현해 낼 수 있을 때 지식이 나와 온전한 결합을 하였다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이 앎이 된다. 이는 천명(天命) 역시 마찬가지이다. 지식이 나의 삶의 맥락 속에서 환기될 때, 그것이 진짜 아는 것이되는 것이다.

63) 「陽貨」 03, 子曰:「唯上知與下愚不移.」「公冶長」 20, 子曰:「甯武子邦有道則知, 邦無道則愚. 其知可及也, 其愚不可及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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瓢蟲

不朽의 古典에서 찾은 智慧와 心灵, 역사적 敎訓과 省察에서 옛글의 향기에 취해 사랑에 빠지게 되었음을 밝히는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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