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정병조
인도 전통사상과의 결별 '무아'
역사는 무한히 해석 가능하다. 고정된 틀을 탈피해 새로운 해석이 끊임없이 시도될 때 오히려 역사의 진실과 대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 불교학계는 '논쟁 부재의 시대'라고 불릴 만큼 불교연구가 점차 고착화, 정형화되어 간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이에 따라 본지에서는 인도, 중국, 한국불교에서 논쟁이 되었던 부분을 각 분야 최고의 권위자들을 통해 새로운 불교 이해, 새로운 불교사 서술을 50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주>
※자아와 무아
인도 아리얀(Aryan) 문화의 핵심은 종교다. 물질문명으로만 말한다면 고대 인도문명은 두드러지게 내세울 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풍부한 정신문화의 세계는시공(時空)을 초월하여 우리들의 마음을 두드린다. 베다(Veda)의 신화세계, 우파니샤드(Upanishad)의 심미적 자아의식 등은 신선하면서도 충격적이다. 도저히 고대인들이라고 믿기 어려운 세련된 우주관, 정밀한 논리구조 등을 지니고 있다. 막스 밀러(Max M ller)의 명쾌한 지적처럼 고대 인도의 종교는 다신교(多神敎)에서교체신교(交替神敎)를 거쳐 유일신교에 이르는 과정을 노정(露呈)하고 있다. 인도의 신들은 희랍신화가 무색할 만큼의 무한한 상상력을 현실 속에 그려간다. 나중에 이들 인도의 민족신앙은 힌두이즘으로 정착하게 된다. 불교는 정통 인도 종교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히 이단이다. 우선 신들의 계시인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사회관습으로 정착해온 캐스트 제도도 파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절대화되고 신비화된 신들의 권능 대신에 인간성의 무한한 가능성을 부르짖는다는 점에서 불교는 분명히 '인간적인' 종교이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인도종교와 불교의 근원적 차별은 '자아인식'의 문제이다. 우파니샤드이래 인도종교는 한결같이 영원한 인간성의 고향, 아트만(Atman)에 대해서 논구한다. 아트만은 진정한 자아이다. 모든 생명의 근원이며, 회귀처이다. 아트만의 회복이 곧 윤회의 단절이요, 영원한 해탈이다.
그러나 붓다의 첫 번째 선언은 무아(無我)였다. 영원한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상의 테두리 밖에 있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아트만을 실아(實我)라고 고집하는 것이 집착이다. 따라서 무아를 자각하고 무아를 실현하는 길이 참다운 현자의 자세이다. 이 자아와 무아의 교리논쟁은 인도불교를 관통하는 중심테마였다. 《미린다팡하(Milindapanha)》에도 이를 주제로 하는 격렬한 논쟁이 실려있다. 희랍의 지성을 대표하는 메난드로스(Menandros)는 사실상, 당시 불교에 대한 모든 공격을 대변하는 악역이다. 반면 나가세나(Nagasena) 비구는 불교를 옹호하는 호법신장과 같은 배역이다. "만약 무아라면 나의 존재는 무엇인가? 윤회와 업의 주체는 무엇인가? 지옥에 떨어지는 나는 누구이고 천상에 올라가는 나는 누구인가? 이에 대한 불교의 해답은 둘로 대변된다. 첫째, 업은 실체가 없으면서 결과를 잉태하는 '그 무엇'이다. 업은 불길과 같다. 불은 타오를 때 맹렬한 힘을 발휘하지만 그 본질은 공이다. 또 업은 눈(雪)과 같다. 본질은 무이지만 나무를 꺾고, 산사태를 일으키는 괴력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두 번째의 입장은 사후의 윤회에 대한 점이다. 유명한 부처님의 설법 가운데 '장작더미의 불꽃'이라는 비유가 있다. 사람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제자의 물음에 답한 내용이다. 장작에 불이 타고 있다가 꺼졌다고 가정하자. 장작을 매개체로 해서 불길은 치솟았고, 장작이 다 탔을 때 불길은 스러졌다. 육신을 장작에 비유하고 죽음을 그 소멸에 대비한 비유이다. 그러나 중생들은 꼭 '어디에 다시 태어나고' 싶은 것이다.
물론 부처님 열반 직후 무아를 자아로 환원시키려는 교리적 대결이 불교내부에서 있었다.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가 바로 그 중심학파였다. 그러나 불교교설의 핵심은 무아였다. 대승불교의 중심테마였던 공(空)의 이론 또한 무아라는 토대 위에 세워진 방편설이었다.
※불교의 평등주의
사회적인 관점에서 말한다면, 불교의 선언은 집요한 신(神) 중심적 권위 제사의식으로부터의 해방을 약속한 가르침이었다. 인도종교에서 가르친대로 인간의 길흉화복이 모두 신으로부터 비롯된다면 인간은 더 이상 노력할 필요가 없다. 잘 살아도 신의 뜻, 못살아도 신의 뜻. 우리는 그 예정된 코스를 따라 걷는 숙명적 나그네일 뿐이다. 그러나 인생에는 숱한 우여곡절, 필연과 우연들이 교차하고 있지 않은가.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운명을 개척해 가고 있지 않은가.
붓다는 태어날 때의 신분으로 인간의 귀천이 결정되는 캐스트제도를 부정하였다. "인간은 바라문이기 때문에 존경받아야 하고 수드라이기 때문에 멸시받아야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그가 무엇을 하는가에 따라 비천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고귀한 사람이 되기도 하느니라." 붓다의 이 선언은 인간업(人間業)에 대한 소박한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동시에 집요한 캐스트제도에 대한 거부로도 생각할수 있다.
우리는 지금, 인간의 존엄성이나 남녀평등 등을 명문화시킨 시대에 살고 있다.그러나 이 선언이 2,500여 년 전임을 감안할 때, 가히 혁명적이라고 말하지 않을수 없다. 즉 불교는 철저한 휴머니즘의 입장에 서 있었다. 서양식의 휴머니즘은'인간위주'의 사고(思考)로 뭉쳐 있다. 따라서 동물을 학대해도 무방하고, 자연의파괴 또한 용인되었다. 왜냐하면 자연은 인간의 '편의'를 위해 있다고 생각했기때문이다. 그러나 불교의 휴머니즘은 전존재를 관통하고 있다. 불살(不殺)의 선언은 모든 생명체(living being)뿐 아니라 '살려는 의지를 가진 전존재'로 확대해석될 수 있다. 이것이 진정한 휴머니즘이다. 오늘날 서양의 학자들이 동양의 지혜에주목하는 소이(所以)도 여기에 있다. 여태까지의 인류는 무한한 인간욕망의 '노예'였다. 땅따먹기의 야욕을 영웅시했고, 중생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룩한 부를 예찬했었다. 그 필연적 과보가 바로 생태계 파괴이며 빈부갈등이다. 따라서 불교의 평등주의는 더 이상 관념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참다운 생명실현의 가치이며, 인류보편의 공통 선으로 인식되어야 하는 것이다.
불교는 인도에서 태어난 종교이다. 당연히 인도적인 환경과 풍습, 그리고 그 전통의 무게 속에서 생성, 발전되었다. 그러나 불교는 인도가 가진 한계점을 극복한종교이다. 그 때문에 세계종교로서의 성가를 누릴 수 있기도 하다. 인도종교와 불교의 철학적 쟁점은 앞서 말한 자아문제 이외에도 내세의 문제, 업의 승계 등 대부분 형이상학적 관심들이 많았다. 한편 실천적 면에서도 상당히 흡사한 면이 많다. 고행, 참선, 만행, 보시 등은 양자가 고루 실천해온 수행의지들이었다. l 정병조/동국대 교수, 한국불교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