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영화 전성기를 상징하는 '쇼브라더스"&'골든하베스트'(Ⅰ)

 홍콩영화 전성기를 상징하는 '쇼브라더스"&'골든하베스트'(Ⅰ)


1990년대 초반까지 전성기를 구가했던 홍콩영화산업과 관련해 홍콩이 중국어권 영화산업의 메카가 되었던 이유와 홍콩 영화산업 전성기를 상징하는 영화사인 '쇼브라더스'와 '골든하베스트'에 대해 알아 보겠습니다.

홍콩이 영화산업의 메카로 발전한 이유

중국 남부의 작은 어촌이었던 홍콩은 영국의 식민지 통치를 받는 가운데 무역항이자 국제적인 금융도시로 발전하게 되고 중국어권 영화산업의 메카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1970년대를 거쳐 1980년대에 이르러 홍콩 영화산업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는데 홍콩이 이렇게 중국어권 영화산업의 중심지로 발전하게 된 데에는 그 역사적 배경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 기타 기능1990년대 초반까지 전성기를 구가했던 홍콩영화산업과 관련해 홍콩이 중국어권 영화산업의 메카가 되었던 이유와 홍콩 영화산업 전성기를 상징하는 영화사인 '쇼브라더스'와 '골든하베스트'에 대해 알아 보겠습니다홍콩이 영화산업의 메카로 발전한 이유

중국 남부의 작은 어촌이었던 홍콩은 영국의 식민지 통치를 받는 가운데 무역항이자 국제적인 금융도시로 발전하게 되고 중국어권 영화산업의 메카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1970년대를 거쳐 1980년대에 이르러 홍콩 영화산업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는데 홍콩이 이렇게 중국어권 영화산업의 중심지로 발전하게 된 데에는 그 역사적 배경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842년 아편전쟁의 패배로 청나라와 영국사이에 난징조약(南京條約)이 체결되면서 홍콩섬이 영국에 넘어가게 되고 1898년 제2차 북경조약에 의해 홍콩은 1997년 6월30일까지 99년간 영국의 조차지로 넘어가게 됩니다.이렇게 해서 개방된 홍콩은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게 되고 영화라는 신문물 역시 홍콩에 도입됩니다. 

그렇게 시작된 홍콩의 영화산업은 20세기 초반 상하이와 함께 중국 영화산업의 양대 산맥으로 발전하게 됩니다.당시 중국의 영화산업은 전통극인 경극의 영향을 받은 무협영화를 비롯한  다양한 장르가 제작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 후 중화민국 정부와는 별도로 영국의 식민지였던 홍콩에서는 현지 방언인 광동어로 제작된 영화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로 상하이가 일본에 넘어간 시기에도 홍콩은 1941년 일본에 점령당하기 전까지 항일영화들이 제작되면서 중국 영화산업의 중심지 역할을 맡게 됩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후 중국에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홍콩과 경쟁관계에 있던  상하이의 영화산업은 완전히 쇠퇴하게 되고 대만의 국민당 정부 역시 사상통제와 창작 및 언론의 자유를 말살하면서 자유로운 영화 창작을 위해 중국과 대만의 영화인들이 홍콩을 찾게 됩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영국의 식민통치하에서 홍콩은 영화창작에 있어서 별다른 제약없이 자유롭게 영화를 제작하게 되었고 표준어와 홍콩 방언인 광동어가 영화제작에 있어 경쟁을 벌이게 됩니다. 이런 까닭으로 홍콩영화의 경우 자국민이 시청하는 경우에도 자막을 붙이는 현상이 등장하게 되었고 현재까지도 홍콩영화에는 자막을 붙이는 관례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홍콩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들 중에는 표준어와 광동어 중에 어느 하나만 유창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후작업으로 더빙을 하는 것이 일반화되게 됩니다.  

홍콩 영화산업을 상징하는 양대 산맥 "쇼브라더스"&"골든하베스트"

1950년대를 거치며 성장가도를 걷게 된 홍콩영화산업은 쇼브라더스와 골든하베스트라는 홍콩영화산업을 대표하는 양대 프로덕션이 등장하게 되는데 먼저 홍콩영화산업을 대표하는 위치를 차지한 것은 쇼브라더스였습니다.

1950년대 후반 홍콩 영화산업은 '쇼브라더스(邵氏兄弟有限公司, Shaw Brothers Limited)'와 '국제전영무업유한공사(國際電影懋業有限公司, Motion Pictures & General Investment, LTD)'라는 두 회사가 경쟁하는 구도였습니다. 두 회사는 모두 홍콩 현지인이 아닌 싱가폴과 말레이시아 출신 화교가 만든 회사라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국제전영무업유한공사를 설립한  육운도(陆运涛/Loke Wan Tho,1915年-1964年6月)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태어난 화교로 1951년 싱가폴에 영화사를 설립하고 1953년에 홍콩에 자회사를 설립하면서 영화제작에 뛰어들게 됩니다. 하지만 1964년 대만에서 열린 영화제에 참석하고 돌아오던 비행기가 추락해 육운도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회사는 기울기 시작하고 그렇게 명맥을 유지하던 영화사는 1970년대 등장한 골든하베스트에 스튜디오와 촬영장비를 넘겨주게 되면서 국제전영무업유한공사는 영화제작에서 손을 떼고 영화 배급에만 치중하게 됩니다.


불투명한 유리에 "SHAW SCOPE"라는 글자가 인상적이었던 쇼브라더스는 1925년부터 싱가포르에서 영화 배급 및 극장 체인 사업을 하던 4명의 소(邵)씨 형제들이 홍콩 영화산업에 진출하면서 설립한 회사입니다.한국 영화팬들에게는 '쇼브라더스'라는 이름만 기억되고 있지만 소(邵)씨 형제들의 홍콩 영화산업 진출은  '소씨부자공사(邵氏父子公司)'란 이름으로 시작되었습니다. 1950년 소씨 형제가운데 둘째였던 소인력(邵仁枥)은 기존 남양영편공사(南洋影片公)란 홍콩의 영화제작사를 인수해 "소씨부자공사(邵氏父子公司)"를 설립하고 영화제작에 뛰어들게 됩니다. 하지만 1950년대 후반 앞에서 이야기한 '국제전영무업유한공사'와의 경쟁속에서  소씨부자공사는 경쟁에서 밀리게 되고 이에 소씨부자공사는 영화제작에서  손을 떼고 영화배급과 극장업으로 방향을 틀게 됩니다.

하지만 영화제작에 대한 욕심이 있었던 네째 소일부(邵逸夫)는 형제들과의 상의끝에 1958년 지금 우리가 알고있는 쇼브라더스 즉 소씨형제유한공사(邵氏兄弟有限公司)를 설립하고 영화제작에 나서게 됩니다.이렇게 해서 소씨부자공사는 영화배급을 맡게 되고 쇼브라더스는 영화제작을 맡게 됩니다.​


"쇼브라더스"를 대표하는 4명의 감독과 3명의 배우

1961년 홍콩에 소씨영성(邵氏影城)이란 세트장을 완성한 쇼브라더스는 이후 천 편이 넘는 영화들을 제작하며 1960년대와 70년대 홍콩영화를 대표하는 영화사로 자리매김하게 되는데  쇼브라더스를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4명의 감독과 쇼브라더스를 대표하는 3명의 배우입니다.

먼저 4명의 감독은 쇼브라더스의 발전과 함께 했는데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쇼브라더스의 창업기를 대표하는 감독이 이한상(李翰祥)입니다.그는 중국 호북성(湖北省) 황매(黄梅)란 지역에서 유래한 중국 전통극인 황매희(黄梅戱)의 가창(歌唱)요소를 영화에 도입했는데 대표작으로 1958년작 초선(貂蝉)과 1959년 홍콩 영화 흥행순위 1위를 기록한 강산미인(江山美人)을 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1960년 발표한 천녀유혼(倩女幽魂)은 1987년 제작된 장국영 왕조현 주연의 천녀유혼의 원작이기도 합니다.​

이한상 감독의 강산미인

1960년대 중반 이후 쇼브라더스 영화의 중심은 무협영화로 옮겨가게 되는데 이 시기를 대표하는 감독이 바로 호금전(胡金铨)과 장철(张彻)입니다. 2명의 감독은 신파 무협감독으로 불리우는데 1966년 발표된 호금전이 제작한 정패패(郑佩佩) 주연의 대취협(大醉侠)과 장철이 제작한 왕우 주연의 독비도(独臂刀:외팔이 검객)를 그 시작으로 봅니다.

호금전 감독의 대취협

호금전과 장철은 이후 쇼브라더스하면 떠올리게 되는 수 많은 무협영화들을 제작하면서 쇼브라더스의 황금기를 이루게되고 1970년대 호금전과 장철의 뒤를 이어 쇼브라더스의 전성기를 이끈 감독이 초원(楚原)입니다.그는 홍콩 출신으로 대만에서 활동한 무협소설 작가 고룡(古龍)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무협영화들을 발표하게 됩니다. 1976년 발표된 유성호접검(流星蝴蝶剑)을 시작으로 다정검객무정검(1977년) 초류향(1977년) 서검은구록(1981년) 같은 작품을 대표작품으로 들 수 있는데 호금전,장철의 작품이 거칠고 남성적 느낌이 강한 반면 초원의 작품은 남녀간의 사랑이야기가 들어가면서 보다 드라마적인 요소가 강한 특징을 보여줍니다.초원은 후에 조연급 배우로도 영화에 출연했는데 성룡 주연의 폴리스 스토리에서 악역으로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초원 감독의 유성호접검

이렇게 1970년대까지 이어진 쇼브라더스의 전성기 시절을 대표하는 배우로는 왕우(王羽) 강대위(姜大卫) 적룡(狄龍)을 들 수 있습니다.

왕우 주연의 독비도

1943년생으로 182cm의 건장한 체구를 지닌 왕우는 상하이 출신으로 원래 수영 선수였다고 하는데 1964년 쇼브라더스의 공개 오디션에 참가해  장철 감독의 '호협섬구'로 데뷔하게 됩니다.이후 '변성삼협' '독비도' '금연자'''독비도왕'등의 히트를 통해 1960년대 쇼브라더스의 황태자로 등장한 그는 거친 성격으로 인해 구설수에 오르면서 쇼브라더스를 떠나 대만으로 활동 무대를 옮겨 '독비권왕' '독비권왕대파혈적자'등의 작품을 발표하게 되는데 이전 홍콩 무협영화들이 칼과 창같은 무기를 사용하는 무협물이었다면 왕우의 무협영화는 주먹을 주로 사용하는 권격(拳擊)영화였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왕우는 폭력조직과의 연류설이 끊임없이 제기되었고 실제 대만의 3대 폭력조직인 죽련방(竹联帮)의 일원으로 알려져 있으며 1981년에는 경쟁관계에 있던 폭력조직 사해방(四海帮)과의 싸움에서 중상을 당하기도 했고, 살인미수 혐의로 기소되었다가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판결을 받기도 했습니다. 노년에 뇌졸증으로 고생하던 그는 2022년 4월5일 대만의 중견 여가수로 활동하고 있는 큰 딸인 왕형평(王馨平)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우락부락하고 거칠어 보이던 왕우와 비교되는 곱상한 얼굴을 지닌  쇼브라더스의 또 한 명의 황태자가 강대위(姜大卫)입니다.강대위는  1947년생으로 왕우와 마찬가지로 상하이 출신인데 3살 때 홍콩으로 이주한 후 4살때 부터 아역배우로 활동하게 됩니다. 1968년 장철 감독에 의해 "유협아(遊俠兒)"의 주연을 맡으며 인기을 얻게 된 그는 1970년"13인의 무사" "복수(報仇)"와 1971년 "신독비도(新獨臂刀)"에서 적룡과 함께 출연해 거물급으로 성장하며 잡음이 끊이지 않았던 왕우의 자리를 대신하게 됩니다. 172cm의 비교적 단신에 곱상한 얼굴을 지녔던 그는 꽃미남 배우 적룡과 함께 큰 인기를 얻었고 홍콩의 여배우 리임임(李琳琳)과 결혼한 후 40년 넘게 행복한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어 임청하와의 스캔들을 비롯해 잡음이 끊이지 않았던 왕우와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강대위의 모친인 홍미(红薇)는 1950년대 홍콩을 대표하는 미녀 배우였고  홍콩 유명 배우인 진패(秦沛)는 강대위의 배다른 형이기도 합니다.200여 편의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한 강대위의 젊은 시절 모습이 중화권 최고 인기가수인 주걸륜과 닮았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쇼브라더스를 대표하는 황태자는 우리에게는 영화 영웅본색 시리즈의 큰형으로 유명한 적룡(狄龍)입니다. 한 때 우리나라에서는 추룡으로 잘못 불리우기도 했는데 이는 1970년 초반 우리나라에 소개된 적룡의 영화에서 영화 자막에 적(狄)자를 추(秋)자 잘못 써놓은 것이 그대로 전해지면서 생긴 해프닝인데 이런 식의 오류는 상당히 많아서 성룡 주연의 사형도수(蛇形刀手)역시 원래는 사형조수(蛇形刁手)가 맞는데 조(刁)자가 도(刀)자로 잘못 표기되면서 우리나라에는 사형도수로 알려지게 됩니다.

1946년 생인 적룡의 본명은 담부영(譚富榮)으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1968년 쇼브라더스에서 설립한 배우 양성소에 들어가게 되고 1969년 독비도왕(獨臂刀王)에 조연급으로 출연하면서 영화계에 첫 발을 내딛게 됩니다.이 후 강대위와 함께 쇼브라더스의 영화에 출연하며 왕우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는데 쇼브라더스의 부사장이었던 방일화(方逸華)의 총애를 받았던 그는 방일화에게서 적룡(狄龍)이란 예명을 받게 됩니다. 알랭 들롱의 팬이었던 방일화는 꽃미남에 근육질 몸매를 자랑했던 담부영이 홍콩의 알랭 들롱이 되라는 뜻으로 적룡이란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하는데 적룡의 중국어 발음이 "디롱'으로 들롱의 음차였기 때문입니다.

이후 적룡은 강대위와 함께 주로 장철 감독의 작품에 주연으로 출연하게 되고 이어 초원 감독이 만든 고룡의 무협소설을 원작으로 한  초류향, 다정검객무정검,소십일랑 등의 히트작을 발표하게 됩니다. 하지만 1970년대 중반을 넘어가면서  마치 제품을 찍어내듯 스튜디오 안에서 영화를 만들어내던 쇼브라더스가 쇠퇴기에 들어가게 되면서 적룡 역시 대중에게서 사라지게 됩니다.

적룡 주연의 영웅본색

그리고 1986년 쇼브라더스 출신의 오우삼 감독이 서극과 손잡과 제작한 영웅본색에 캐스팅되면서 영화 흥행성공과 함께 대만 금마장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다시 한번 대중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사실 영웅본색은 1967년에 만들어졌던 작품을 리메이크한 영화로 영웅본색의 리메이크를 계획하는 과정에서 망설임없이 선택한 배우가 바로 적룡이었다고 합니다.

가끔씩 우리나라 케이블TV에도 적룡이 주연을 맡은 판관 포청천이 방영되기도 하는데 적룡은 영화 영웅본색 이후 홍콩과 중국 대륙에서 제작된 드라마에 얼굴을 비추고 있습니다. 

1971년 이소룡의 당산대형

1970년대 초반까지 홍콩 영화산업을 주도하던 쇼브라더스는 1971년 이소룡이란 걸출한 스타의 출현과 함께 후발주자인 골든하베스트에게 자리를 내주고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게 됩니다. 1970년대 후반까지 이따금 히트작을 내놓던 쇼브라더스는 1980년대에 들어서는 이렇다할 작품을 내놓지 못하고 침체기게 빠지게 되는데 그렇게 명맥을 유지하던 쇼브라더스사는 2000년 쇼브라더스에서 제작한 760편 영화의 영구판권을 4억 홍콩 달러에 말레이시아 유선TV업체인 ASTRO의 자회사 천영오락(天映娱乐)에 매각하게 됩니다.이후 쇼브라더스사는 영화스튜디오를 새롭게 정비하고 2000년대 이후에도 매 년 몇 편의 영화를 선보이고 있지만 2000년대 홍콩 영화산업의 몰락과 함께 옛 영광을 재현하는데는 실패하게 됩니다.

이상으로 홍콩이 중국어권 영화산업의 메카로 등장했던 이유와 1960년대와 70년대 홍콩영화산업을 대표했던 쇼브라더스에 대해 알아보았는데 2편에서는 쇼브라더스에 이어 홍콩영화산업의 전성기를 이끈 골든하베스트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瓢蟲

不朽의 古典에서 찾은 智慧와 心灵, 역사적 敎訓과 省察에서 옛글의 향기에 취해 사랑에 빠지게 되었음을 밝히는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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