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원장(朱元璋)의 얼굴을 누가 추악하게 그렸는가?

 주원장(朱元璋)의 얼굴을 누가 추악하게 그렸는가?

글: 계릉(啓凌)

역사교과서에서 명태조 주원장의 화상(畵像)을 교체하기로 한 것은 어느 정도 정본청원(正本淸源, 근본문제를 바로잡아 해결한다는 의미임)이라 할 수 있다. 주원장의 화상은 처음부터 그렇게 기괴한 모습이 아니었었다.

역대제왕의 초상화중 주원장의 초상화는 상대적으로 많이 남아서 전해져 내려온다. 그의 용모에 대한 편차는 매우 크다: 하나는 정식초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금 타이페이 고궁박물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중년전신상과 노년반신상이다; 다른 하나는 기괴초상으로 얼굴이 일그러지고, 주걱턱이 두드러지며, 얼굴에 검은 점이 있어 보통사람과 다른 모습이다.




전해지는 초상화의 수량은 정상초상보다 기괴초상이 훨씬 많다. 그리하여 적지 않은 사람들은 기괴한 모습이 주원장의 진짜 모습이라고 여기고 있다.

예를 들어, 청나라말기의 조여진(趙汝珍)은 <고동변의(古董辨疑)>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치로 추측해보면, 깊은 눈에 긴 턱을 가진 것이 진짜일 것이다. 이 초상은 거의 모욕에 가깝고, 주저(朱猪, 돼지 저의 발음은 zhu로 주원장의 성인 주와 같다)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만일 진짜 모습이 아니었다면 독재시대에 누구든 감히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즉, 제왕의 초상화를 이렇게 추하게 그렸다는 것은 아마도 그 본인이 그렇게 추했기 때문일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주원장은 원래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1) 먼저 설명해야 할 점은 오늘날의 심미안으로 보면 자연히 주원장의 기괴한 초상은 추악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의 눈에는 반드시 그렇지 않았다.

명청부터 민국까지, 주원장의 기괴한 초상은 당시 사람들의 마음 속에 주는 인상은 "기이(奇)"하다는 쪽이지 "추악(醜)"하다는 쪽은 아니었다. 주원장의 용모는 '특이'했는데 그 기원을 따져보면 항간에 떠도는 민간야사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조정에서 편찬한 정사이다.

<명사.태조본기>에는 명확하게 주원장이 젊어서 군대에 들어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곽자흥)은 그의 용모가 기이한 것을 보고 남겨서 친병(親兵)으로 삼았다." <명사.곽자흥전>에도 마찬가지로 기록하고 있다: "자흥은 태조의 용모가 기이하다고 여겼다."

즉, 관방 정사의 기록에서, 주원장은 용모가 기이했다고 적어놓은 것이다.

주원장이 스스로 쓴 <기몽(紀夢)>이라는 글이건 아니면 황제에 오른 후에 곽자흥의 비석에 새긴 <저양왕묘비(滁陽王廟碑)>이건 모두 자신의 용모때문에 곽자흥이 자신을 남다르게 대했다고는 적지 않았다.

용모를 그가 성공한 중요한 원인으로 끌어올린 것은 그의 아들인 명성조(明成祖) 주체(朱棣)의 재위기간에 편찬된 <명태조실록>이다. <실록>에서는 "곽자흥이 사람을 보내 그를 쫓게 했고, 황상의 용모를 보니 기이하고 위엄있고 보통사람과 다른 것(奇偉異常人)을 보았다." 주원장은 그의 용모가 보통사람과 다른 점때문에 곽자흥에게 발탁되어 황제가 되는 길을 걷게 되었다는 것이다. <명사>도 <실록>의 내용을 그대로 실어, 그의 용모가 기이했다는 것을 정사에 넣게 된 것이다.

주원장의 일생을 되돌아보면, 주원장은 스스로에 대하여 상당히 소박하게 묘사했다: "짐은 본래 농부였다(朕本農夫)", "회우의 포의이다(淮右布衣)"같은 식으로.

주체가 정난지역으로 조카인 건문제에게서 황위를 빼앗아 온 후, 주체의 묘사 속에서부터 다른 것들과 달라지기 시작한다. 영락11년(1413년), 주원장의 남경 효릉(孝陵)에 신공성덕비(神功聖德碑)를 세울 때, 어제비문(御製碑文)에 이미 주원장이 보통사람과 다른 외관을 가졌다고 새겨넣기 시작한다:

".....목에 기골(奇骨)이 은연중에 솟아 정수리에 이른다. 위의천표(威儀天表)하여, 바라보면 마치 신과 같았다(望之如神)."

즉위의 합법성에 상당한 논쟁이 있었으므로, 주체는 죽어라 증명하려 애썼다: 자신이 조카를 대체하여 황위에 오른 것은 공정하고 공평한 것이라는 점을. 해진(解縉)같은 부하에게 글을 쓰게 하여 문장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얻으려 노력하는 외에 신비한 역량들 예를 들어 관상술까지도 주체는 활용한다. 그 논리는 이러하다: 만일 명태조가 원래 태어나면서부터 기이한 용모를 하여, 관상가의 말에 따르면 천자가 될 운명이었다; 그렇다면 관상가들이 나 주체도 천자가 될 운명이었다고 말하니, 나의 즉위도 마찬가지 합법성이 있다.

고대 관상책에 나오는 용형(龍形)의 관상

이것이 아마도 주체가 자신에게 황위를 물려주지 않은 부친의 용모에 대하여 기이하다고 말한 근본원인일 것이다. <태조실록>을 편찬함으로써, 그리고 어용상사(相士, 관상가)인 원공(袁珙), 원충철(袁忠徹) 부자의 말을 통하여, 주원장은 "태어나면서부터 기이한 용모를 지녔다(生具異相)"는 사실을 퍼트리게 된다. 원충철의 <고금식감(古今識鑒)>에는 주원장의 "보골삽빈(輔骨揷鬢)의 용모에 관한 묘사가 나온다. 이는 이미 후세의 기이한 초상의 모습과 아주 가까워졌다. 같은 시기의 다른 기록을 보면, 예를 들어, 주원장의 조카인 주문정(朱文正)에 대해 "용모가 고제(高帝, 주원장)와 비슷하다"라고 하였고, 홍무18년(1385년)의 진사인 진사도(陳思道)에 대하여도 "용모가 황제의 모습을 꼭 닮았다"고 하였지만, 이 두 사람이 괴이한 용모였다는 묘사는 없다.

주체가 시작을 해놓았으니, 주원장의 용모가 기이하다는 것은 갈수록 더욱 심해진다. "기골관정(奇骨貫頂)"에서부터 온 얼굴이 검은 점으로 뒤덮여 있다는 것까지.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의 명태조상, 청나라때 그린 그림

2) 주원장이 죽은 후 1세기내에,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모습의 초상화가 이미 유행했다. 왕기(王錡, 1432-1499)는 그가 소주(蘇州) 천왕사(天王寺)에서 본 신상(神像)을 묘사하는데, "눈이 깊고 피부는 두꺼우며(目深膚厚), 입술이 뾰족하고 풍성하며(脣努而豊), 이마는 매우 넓고(額甚廣), 광대뼈는 높이 솟아있다(顴甚高)" 그리고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우리 태조황제의 모습이라고 한다"고 적었다. 이를 보면, 이때 주원장을 이미 후세에 전해지는 기이한 모습으로 그리는 것이 통상적인 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명나라말기의 장훤(張萱, 1558-1641)은 일찌기 그의 부친 장정희(張政熙)가 운남에서 관료로 있을 때, 당시 검국공(黔國公)의 집에서 명태조상을 임모(臨摹, 베껴 그린 그림)한 것을 보았다고 한다. "용형규염(龍形虬髥)이고 왼쪽 뺨에는 12개의 검은 점이 있어, 그 모습이 아주 기이했다. 세속에 전해지는 것과 같으니, 진짜인 것같다." 장훤은 만력15년이후 북경으로 와서 중서성에 들어가는데 직접 궁정에서 소장하고 있는 주원장의 초상을 볼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기이한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고황제는 미남자였다. 수염은 은사처럼 수를 헤아릴 수 있었고, 그다지 다듬지 않았다. 소위 "용형규염"이나 "십이흑자"같은 것은 없었다."

장훤보다 약간 이른 시기에 공부상서를 지낸 장한(張澣, 1511-1593)도 유사한 기록을 남겼다. 그는 무영전(武英殿)에서 주원장초상을 보았는데, "태조의 용모는 눈썹이 멋있고 눈이 빛났으며(眉秀目炬), 코는 곧고 입술은 길었다(鼻直脣長), 얼굴은 보름달같았고(面如滿月), 수염은 많이 나거나 길지도 않았다(鬚不盈尺). 민간에서 전해지는 기이한 초상과는 크게 달랐다."

타이페이고궁박물원 소장 명태조주원장만년반신상

장한이건 장훤이건, 모두 당시 관방 주원장초상을 볼 수 있었던 극소수의 인물들이다. 민간에는 그런 기회가 없었따. 그리하여 주원장의 얼굴에 검은 점을 없던 것을 만들어내고, 적었던 것을 많이 늘인다. 전통적인 관상술에서 얼굴에 검은 점이 많은 것은 길조로 여겨지지 않는다. 다만 제왕과 같은 귀인의 경우에는 달랐다. 검은 점이 많이 난 것은 귀한 기운을 드러내는 사례로 본다.

그러나 명말청초에 이르러서도, 기이한 초상에서 검은 점의 수량은 어느 정도 제한적이었다. 청나라때 사람 설희(薛熙)는 1683년 명효릉을 참배한다. 당시 본 기이한 초상에는 "얼굴에 검은 점이 7개 있었다. 왼쪽에 4개, 오른쪽에 3개가 있는데, 북두칠성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이때만 해도 겨우 7개였다. 다만 바로 이 시기에, "칠십이흑자(七十二黑子)"라는 설이 유행하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강희제때의 진사 전문(田雯, 1635-1704)은 <호량고시가(濠梁古詩歌)>에서 "면협칠십이흑자(面頰七十二黑子)"라고 썼다. 수십년후에 또 다른 진사 양승무(楊繩武)도 명효릉을 참배한 후에 이렇게 썼다: "이라칠십이흑자(而羅七十二黑子), 융준략여한조동(隆准略與漢祖同)"

양승무가 보기에, 칠십이라는 숫자는 주원장을 유방(劉邦)과 비교한 결과이다. <사기. 고조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유방은 왼쪽다리에 "칠십이흑자"가 있다. 같은 천자라면 주원장의 얼굴에 검은 점이 있다면, 그 검은 점은 유방의 다리에 있는 것이 주원장의 얼굴로 옮겨왔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타이페이고궁박물원에 소장하고 있는 명태조상의 얼굴에 있는 점들

명나라 황궁의 제왕초상은 왕조교체시에 내무부고(內務府庫)에 보관한다. 건륭9년(1744년) 일제검사를 하는데, 명태조의 상은 "대소상양축(大小像兩軸)"이 있었다. 후세에 현존하는 입축(立軸) 중년좌상과 책혈(冊頁) 노년반신상일 것이라고 본다. 나머지 황제, 황후의 초상과 함께 남훈전(南薰殿)에 보관되어 있었다.

가경제에 이르러, 이때는 이미 주원장상이 12축으로 늘어나 있었다. 학자 호단(胡丹)의 추측에 따르면, 기이한 초상들이 건륭말기에 청나라궁중으로 들어와 소장되었을 것으로 본다. 가경20년(1815년) 호경(胡敬)이 편찬한 <남훈전도상고(南薰殿圖像考)>에는 이 12축의 주원장상을 상세하게 나열하고 있다. 그러나 기이한 초상의 유래에 대하여는 고증할 방법이 없다.

3) 주체가 주원장의 이미지를 기이하게 바꾼 후에, 연대가 흐르면 흐를수록 시간이 오래됨에 따라 신비감이 증가된다. 관방 초상화는 보기 힘들고, 게다가, "주원장은 그의 용모를 추악하게 그렸다는 이유로 사실대로 그린 화공(畵工)을 죽였다"는 이야기가 민간의 전설로 전래되면서, 주원장이 기이한 용모였다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깊이 뿌리박혔다. 원래 조정에서의 선전으로 시작된 것인데, 민간에서의 변천을 거쳐, 오히려 다시 궁정과 상층부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특히 관상술이라는 군중기초를 널리 가진 현학(玄學)으로 시대가 흐름에 따라 주원장의 용모는 더욱 심하게 바뀌었다. 그렇게 해야 오히려 초범탈속(超凡脫俗)하다고 여긴 것이다. 제왕이 보통사람과 같이 생겼다면 그것이 오히려 의심을 받았다.

청나라궁중에 소장된 주원장의 기이한 초상들을 모조리 황포(黃袍)를 걸치거나, 곤룡포(袞龍袍)를 걸쳤다. 붉은옷은 입은 화상은 하나도 없다. 이는 "주(朱)" 즉 홍색은 명청교체기에 반청복명(反淸復明)을 상징하는 것을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건륭제때 지하조직인 "홍문(洪門)"은 입회시의 중요장소가 "홍화정(紅花亭)"이고, 의식을 주재할 때는 반드시 머리에 홍건(紅巾)을 써야 한다. 그러므로 청나라조정이 소장한 화상은 단지 '명태조'이지, 원나라에 항거하여 반란을 일으킨 '주'원장은 아니었다.

청말민초에도 명나라는 여전히 홍색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겼다. 그리하여 청나라조정이 망하고, 민국이 건국되었을 때, 손중산은 남경임시정부의 문무백관을 이끌고 명효릉으로 가서 명태조에 제사지낼 때, 효릉에 걸어둔 주원장상은 백성들의 마음 속에 깊이 심어진 기이한 초상이었다. 궁중에 깊이 소장되어 있어서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고, 보통사람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의 초상이 아니라.

1912년 2월 15일 손중산이 명효릉에서 제사지낸 후 촬영한 사진

세월이 흐르면서, 지금 옳은 것이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청나라궁중에서 소장하고 있건 주원장초상이 공개된 후의 호기심과 탐구, 그리고 인터네시대의 오락거리로 주원장의 기이한 초상과 정상적인 초상은 계속하여 화제거리가 되었다. 단정한 용모의 초상은 정통적인 심미관을 대표하고, 유가의 규범에 맞는 제왕의 서사를 가지고 있다. 거기에 그려진 명태조는 황제로서 '당연히 갖추어야할'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모습이 추악한 기이한 초상화는 민간의 신비색채를 더한 집단서사를 대표한다. 그것이 묘사하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왕조교체를 이룬 '대인물'이 반드시 갖추어야할 기이한 용모를 대표한다.

그러므로, 주원장의 두 가지 모습은 하나가 봉건황권의 미안(美顔)이고, 하나는 초근민간의 신화(神化)이다. 그리고 신화(神化)는 왕왕 이화(異化)된다. 주원장 본인의 진실한 모습은 일찌감치 두 가지 똑같이 이상을 추구하는 것이지만, 서로 다른 이상을 추구하는 흐름 속에서 매몰되어 버렸다.

주원장(朱元璋)의 얼굴을 누가 추악하게 그렸는가?

瓢蟲

不朽의 古典에서 찾은 智慧와 心灵, 역사적 敎訓과 省察에서 옛글의 향기에 취해 사랑에 빠지게 되었음을 밝히는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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