六書漢字源 ㅣ 미녀(美女)와 자객(刺客)의 공통점
◑글자풀이: 아름다울 미(美) 여자 녀(女) 찌를 자(刺) 손 객(客). ◑뜻풀이: 미녀(美女)는 얼굴이 아름다운 여자(女子)이고, 자객(刺客)은 사람을 몰래 죽이는 일을 전문(專門)으로 하는 사람임. ◑출처: 네이버사전.
아름다울 미(美)의 구성(構成)은 두 개의 뿔(角)과 털(毛)에 감싸인 통통한 몸집(體軀)을 지닌 양(羊)의 모습(模襲)을 상형(象形)한 양 양(羊)과 큰 대(大)로 짜여 있다. 대(大)는 두 팔을 활짝 편 사람의 모습(模襲)을 담아 사람의 몸짓으로 나타낼 수 있는 가장 커다란 모양(模樣), 즉 크다는 의미(意味)를 부여(附與)했다. 일반적(一般的)으로 아름다운 무늬(花紋)를 띈 새의 깃털이나 양의 탈(羊) 등으로 머리를 장식(裝飾)한 사람(大)을 이르러 ‘아름답다’고 했지만, 제사문화(祭祀文化)와 관련(關聯)지어 유추(類推)해보면 상서(祥瑞)로운 동물(動物)로 여긴 양(羊)을 제물(祭物)로 바칠 때는 크고 통통(大)한 놈을 ‘아름답게’ 여겨 제상(祭床)에 올렸었다. 동서양(東西洋) 공히 미인도(美人圖)에 나타난 미의식(美意識)은 ‘크고 통통함’이었다. 미(美)라고 하는 한자어(漢字語)는 그 구성상(構成上)으로 볼 때, ‘양(羊)’ 자와 ‘대(大)’ 자가 합(合)쳐진 것으로 설명(說明)된다. 이러한 설명(說明)에 따르자면, 미(美)는 ‘큰(大) 양(羊)’으로서, 양(羊)이 크면 살지고 맛이 좋다는 뜻을 함축(含蓄)하는 셈이 된다. 양(羊)은 말(馬), 소(牛), 돼지(豕), 개(犬), 닭(鷄)과 더불어 이른바 육축(六畜) 중의 하나로서 반찬(膳) 가운데 주(主)가 되기도 하다. 이 ‘선(膳)’ 은 다시금 고기를 뜻하는 글자(月)와 좋다는 글자(善)가 합(合)쳐져서 이루어진 만큼, 양(羊)은 상서(祥瑞)로움을 상징(象徵)하기도 한다. 이처럼 미(美)를 맛(味)을 매개(媒介)로 선(善)과 상통(相通)하는 문자(文字)로 풀이하는 설명(說明)은 이를 곧 ‘달다(甘)’와 바꿔 쓰기도 한다.
여자 녀(女)는 무릎을 꿇고서 두 손을 모아 신(神)에게 기도(祈禱)하는 사람을 그려낸 상형글자(象形字)이다. 여자 녀(女)자는 부수(部首) 글자로 여자(女子)에 관련(關聯)된 글자에 들어가지만, 소리로 사용(使用)되는 경우(境遇)도 있다. 일부(一部) 학자(學者)들은 한자(漢字)에 모계(母系)쪽 호칭(呼稱)은 많으나 부계(父系)쪽 호칭(呼稱)이 별로 없는 것이 모계사회(母系社會)였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주장(主張)한다. 하지만 한자(漢字)가 정착(定着)되면서 부계사회(父系社會)로 접어들었기 때문에 신빙성(神憑性)은 없어 보인다. 여(女)자는 두 손을 교차(交叉)하여 무릎에 두고 꿇어앉은 여자(女子)의 가슴(胸) 부위(部位), 두 종아리, 두 팔뚝을 본뜬 상형자(象形字)로 '계집(女)'이라는 뜻의 글자이다. 계집(丫头)이라는 호칭(呼稱)은 여성(女性)을 비하(卑下)시킨다고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런데 먼 옛날에는 여자(女子)든 남자(男子)든 모두 사람(亻)과 같은 모양(模樣)으로 썼고, 또한 여(女)자는 글꼴에서도 남녀(男女)의 여자(女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신(神)을 섬기는 사람의 경건(敬虔)한 자세(姿勢)를 나타낸 것이라는 설(說)도 있다. 하지만 세인(世人)들은 일반적(一般的)으로 계집(女)은 결혼(結婚)하지 않은 여자(女子)이고, 결혼(結婚)하여 아이(兒)를 낳아 젓을 먹인 여자(女子)는 어미(母)로 대별(大別)하여 구분(區分)한다. 여(女)자가 부수(部首)로 쓰인 글자들은 “여자(女子)의 호칭(呼稱), 상태(狀態), 동작(動作)”에 관(關)한 의미(意味)들이 스며있다.
찌를 자(刺)의 구성(構成)은 가시 자(朿)와 칼 도(刂)로 이루어져 있다. 자(朿)는 나무의 모양(模樣)을 상형(象形)한 나무 목(木)에 덮을 멱(冖)으로 구성(構成)되었는데, 표피(表皮)가 가시로 둘러싸인(冖) 나무(木)라는 뜻이다. 도(刂)는 도(刀)의 간략형(簡略形)으로 한 쪽 날만을 세운 칼이다. 오늘날 주로 주방(廚房)에서 쓰는 칼과 같이 한 쪽 면만 날을 세우고 다른 한 면은 양념 등을 다질 수 있도록 등을 만든 것을 ‘刀’라고 한다. 이에 비해 다 첨(僉)과 칼 도(刀)로 짜인 검(劍)은 양 날을 지닌 칼을 뜻한다. 따라서 자(刺)는 가시(朿)나 칼(刀)로 찌른다는 데서 ‘찌르다’는 뜻과 함께 ‘험담(險談)하다’ ‘책망(責望)하다’는 뜻으로 확대(擴大)되었다.
손 객(客)은 의미요소(意味要素)로 집(家)이나 사당(祠堂)을 나타내는 갓머리 면(宀)에 소리요소(聲要素)인 각각 각(各)이 합(合)쳐진 형태(形態)이다. 각(各)은 거꾸로 된 발(夂)과 집의 입구(口)를 표시(表示)한 것이니 결국(結局) '객(客)'은 축문(祝文) 연주(演奏)로 부름을 받은 신령(神靈)이 하늘로부터 사당(祀堂)에 손님(客)처럼 나타나는 것을 의미(意味)한다. 우리는 흔히 '주객전도(主客顚倒)'라는 말을 하는데 중국어(中國語)에서는 '본말도치(本末倒置)'라고 표현(表現)한다. 객(客)은 주(主)인 내가 아닌 남을 가리킨다. 그 '내가 아닌 남'인 객(客)을 어떻게 이해(理解)하고 받아들이는지가 국가(國家)의 발전(發展)이나 타인(他人)과의 소통(疏通)에서 매우 중요(重要)한 역할(役割)을 하기 마련이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인 객(客)을 환대(歡待)하는 것을 '호객(好客)'이라고 하고, 다른 사람을 내치는 것을 '축객(逐客)'이라고 한다. 자신(自身)을 찾아온 모든 사람들을 예우(禮遇)하며 '호객(呼客)'한 것으로 유명(有名)한 맹상군(孟嘗君)은 '계명구도(鷄鳴狗盜)'로 목숨(命)을 부지(扶支)할 수 있었다. 진시황(秦始皇)의 "진(秦)나라 사람을 제외(除外)한 객경(客卿)을 모두 쫓아내라"는 축객령(逐客令)에 대한 반론(反論)인 이사(李斯)의 '간축객서(諫逐客書)'는 명문(名文) 중의 명문(名文)으로 뽑히며 널리 회자(膾炙)된다. 5대 16국 남당(南唐)의 마지막 황제(黃帝), 이욱(李煜)이 쓴 '낭도사(浪淘沙)'에서 "꿈 속에서 이 몸이 나그네인 줄도 모르고 잠시(暫時) 한바탕의 쾌락(快樂)을 탐(貪)하였구나(夢裏不知身是客, 一嚮貪歡)"라고 노래하고 있다. 스스로에 너무 집착(執着)하지 않고 자신(自身)조차도 잠시(暫時) 이 세상(世上)에 머물게 된 '손님(客)'이라고 여긴다면, '나 아닌 다른 누군가'와도 보다 쉽게 소통(疏通)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다만 '손님(客)'일 따름이다.
◑요약: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두 자객;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여자는 자기를 기쁘게 해주는 사람을 위해 화장한다”고 한다.
1. 역사상 최초로 자살한 자객, 서예(鉏麑)
춘추시대 진영공(晉靈公)은 후세 진시황(秦始皇)보다 인간적으로 더 악독하고 악랄하기 짝이 없는 폭군이었다. 얼마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으면 『좌전(左傳)』 『국어(國語)』 『공양전(公羊傳)』 『여씨춘추(呂氏春秋)』 『사기(史記)』의 「진세가(晉世家)」와 「조세가(趙世家)」등 사서에 기록되었을 정도였다.
실제로 진영공(陳靈公)은 산해진미(山海珍味)를 먹거나 백성의 소혈을 쥐어짜 궁궐을 꾸미는 데에만 열중했다. 이런 행위는 임금으로서 흔히 있었던 일이다. 그러나 다음 행위는 너무 끔찍해서 소름이 돋는다. 높은 누대(樓臺)에서 활로 탄알을 쏘아 사람을 맞히고 행인들이 그 탄알을 피해 허겁지겁 숨는 모습을 보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다. 기원전 607년 즉 노나라 선공(宣公) 2년의 어느 날 그는 곰발바닥이 설익었다는 이유로 요리사(料理師)를 죽여서 키에 그 시체를 담아 밖에 버리게 했다.
진영공(陳靈公)의 이 악랄한 행위는 정경(正卿: 국무총리에 해당되는 직위)인 조순(趙盾)의 눈에 띄었다. 조순은 정의로운 관리였다. 진영공(陳靈公)의 행위에 당연히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자 진영공(陳靈公)의 앞에 선 조순(趙盾)은 눈엣가시였다. 횡행패도(橫行覇道)하려면 조순(趙盾)을 제거해야 했다. 그런데 내놓고 광명정대(光明正大)하게 죽일 수가 없어 자객을 파견하여 없애기로 하였다. 대통령(大統領)이 국무총리(國務總理)를 암살하려 했으니 보통일이 아니었을 것이고 자객(刺客)도 보통 자객이 아니었을 것이다.
진영공(陳靈公)이 물색한 자객은 서예(鉏麑)였다.
서예(鉏麑)가 조씨 저택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동틀 무렵이었고 저택의 세 대문이 모두 활짝 열려 있었다. 조정에 나가기에는 아직 이른 시각이었으므로 조순(趙盾)은 의관을 차려 입고 방 안에 단정히 앉아 마음을 추스르고 있었다. 자객(刺客)이 왔는지는 당연히 몰랐으며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조순(趙盾)의 모습이 하도 대바르고 있어 서예(鉏麑)는 숙연한 기분이 들었다.
당시 서예(鉏麑)는 깊은 감동을 느끼고 내심 탄복(歎服)했다고 한다.
‘홀로 있을 때도 정중(鄭重)함을 잃지 않다니 실로 백성들을 책임질 만한 인물이로구나!’
이런 사람을 살해할 수 있었을까? 그럴 수 없었다.
실제 죽여야 할 사람은 조순(趙盾)이 아니라 진영공(陳靈公)이라는 생각이 서예(鉏麑)의 머리에 떠올랐다.
서예는 진퇴양난(進退兩難)에 처했다. 명령에 따라야 했지만 충신(忠臣)을 죽일 수는 없었다. 나라의 동량(棟樑)을 죽이는 것은 불의였다. 그러나 군주의 명을 어기는 것은 불충(不忠)이었다. 서예(鉏麑)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 그는 스스로 죽는 길을 택했다. 홰나무에 머리를 부딪쳐 죽은 그는 역사상 최초의 ‘자살한 자객’이었다.
2. 역사상 가장 존경(尊敬)받는 자객, 예양(豫讓)
조씨 가문에서 조순(趙盾)보다 5대 아래인 조양자(趙襄子)도 자객에게 암살당할 뻔 했다. 그 자객의 이름은 예양(豫讓)이었다.
예양(豫讓)은 춘추에서 전국시대에로 과도하는 시기의 인물이었다. 그는 진(晉)나라의 대권을 손에 쥔 여섯 씨실(氏室) 중 하나였던 지백(知伯)의 부하였다. 지백(知伯)은 천하다툼에서 조씨 가문 실세 조양자(趙襄子)에게 살해되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조양자(趙襄子)는 원한을 해소하기 위해 지백의 두개골에 색칠하여 술 마시는 도구로 삼기까지 했다. 일설(一說)에 의하면 요강으로 삼았다고도 했다. 이 일은 예양에게는 엄청난 치욕이었다. 예양(豫讓)은 자신의 주군을 위해 복수하기로 맘먹었다.
예양(豫讓)은 이름을 바꾸고 진양(陳陽)에 잠입한 뒤 노역형을 받은 범죄자로 변장해 궁 안에서 변소에 석회를 칠했다. 이때 석회를 바르는 흙손 속에 비수를 감추고 있었다. 조양자(趙襄子)가 나타나기만 하면 단칼에 저 세상으로 보낼 계획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하늘은 조양자(趙襄子)의 죽음을 원치 않았다. 막 볼일을 보러 걸어오던 조양자(趙襄子)는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어 매 같은 눈초리로 예양(豫讓)을 노려보았다. 예양(豫讓)은 꼼짝 못하고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전혀 거리낌 없이 자기가 지백(知伯)의 복수를 하려고 한다고 자백했다.
호위무사(護衛武士)들이 포위한 채 검을 뽑아 들었을 때 갑자기 조양자(趙襄子)가 손을 흔들어 제지했다.
“이 자는 의로운 인물이다. 죽은 지백(知伯)에게는 후손도 없는데 가신이 이렇게 복수(復讎)를 하러 나서다니 보기 드문 일이로다!”
그러나 예양(豫讓)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이제 본래 얼굴로 활개 치며 다니는 것은 당연히 힘들었다. 용모를 바꿔야 했다. 그래서 예양(豫讓)은 눈썹과 수염을 뽑고 몸에 반점을 가득 그려 넣은 뒤, 시험 삼아 거지를 흉내 내어 구걸(求乞)을 나섰다. 아내조차 그를 몰라보고 이렇게 말했다. “신기(神奇)하기도 해라. 이 사람 목소리가 내 남편을 닮았네.” 이처럼 갖은 고생 끝에 마침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제야 예양(豫讓)은 조양자(趙襄子)가 늘 다니는 길에 몸을 숨기고 습격(襲擊)할 준비를 취했다. 드디어 조양자(趙襄子)의 수레가 정해진 길을 따라 다리를 건너왔다. 그런데 천만 뜻밖에 말이 놀라서 요동(搖動)을 쳤다.
뭔가를 알아챈 조양자(趙襄子)가 벌떡 일어났다.
“예양이 분명하다. 달아나지 못하게 하라!”
예양(豫讓)은 다시 붙잡혔다. 이치대로라면 이번에는 다시 풀려날 가망이 없었다.
본래 예양(豫讓)은 복수를 위해 그토록 가시밭길을 걸을 필요가 없었다. 예양(豫讓)이 고통스럽게 용모(容貌)를 고칠 때 한 친구가 눈물을 흘리며 그를 말렸다.
“이럴 필요가 뭐 있나? 자네 재주라면 투항해서 어렵지 않게 조씨에게 중용(重用)될 걸세. 그렇게 친해졌을 때 일을 도모하는 게 더 편하지 않겠나. 무엇 때문에 이렇게 자신을 괴롭히는가? 자네가 이러는 건 기개는 있어보일지언정 너무 미련한 방법일세!”
예양(豫讓)은 웃으며 답했다. “자네가 말하는 방법은 확실히 가능성이 더 크긴 하지만 도덕적으로 문제가 좀 있다네. 만약 조씨가 정말 나를 가까이하고 신뢰(信賴)한다면 내가 그를 죽이는 것은 옛 지기를 위해 새로운 지기에게 복수하고 예전 주공(主公)을 위해 지금 주공을 죽이는 꼴이 되지 않겠나. 지금 내 방법은 성공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네. 그러나 아무리 어려워도 만천하에 대의(大義)를 밝히는 것, 이것이야말로 나의 목적일세. 내가 어떻게 남의 밑에서 일하면서 그 사람의 머리를 취할 생각을 하겠는가!”
이런 ‘정의로운 뒷이야기’를 조양자(趙襄子)가 반드시 알고 있었을 리는 없다.
이 순간 조양자(趙襄子)는 예양(豫讓) 앞에 우뚝 서서 왕이 쓰는 ‘과인(寡人)’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면서 입을 열었다.
“예양(豫讓), 네가 왜 복수를 하려는지 과인이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정말 이해가 안 가는 것이 있는데 너는 과거에 범씨(范氏)와 중항씨(中行氏)를 섬긴 적도 있지 않느냐? 지백(知伯)이 범씨와 중항씨를 멸했을 때 너는 그들을 위해 복수를 하기는 커녕 도리어 스스로 지백을 찾아가 주군으로 섬겼다. 똑같은 주군(主君)이건만 너는 왜 지백(知伯)에게만 충성하고 범씨(范氏)와 중항씨(中行氏)에게는 충성하지 않았느냐? 똑같은 원수이건만 너는 왜 과인만 미워하고 지백(知伯)은 미워하지 않고서 죽을 둥 살 둥 그를 위해 복수를 하려고 하느냐?”
예양(豫讓)은 당당히 대답했다.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여자는 자기를 기쁘게 해주는 사람을 위해 화장을 하오. 범씨(范氏)와 중항씨(中行氏)를 위해 일할 때 그들은 나를 보통 사람으로 취급했으니 나도 당연히 보통사람처럼 보답(報答)했을 뿐이오. 그러나 지백(知伯)은 나를 하늘 아래 가장 뛰어난 인물로 여겨주었소. 이에 나는 가장 뛰어난 인물처럼 그에게 보답하려는 것이오.”
이 말을 듣고 조양자(趙襄子)는 눈물을 흘리며 길게 탄식했다.
“알겠네. 알겠어. 예양(豫讓) 선생, 자네는 지백(知伯)에게 충성을 다했고 명예도 이루었네. 그리고 과인은 벌써 충분히 아량(雅量)을 베푼 셈이니 이번에는 놓아주지 않겠네."
말을 마치고 그는 호위무사들에게 예양(豫讓)을 에워싸라고 명했다. 조양자(趙襄子)는 이 존경할 만한 자객이 품위 있게 죽을 수 있도록 배려(配慮)할 작정이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싸우다 죽는 것이 가장 영광스러운 죽음이 될 듯했다. 그것은 조양자(趙襄子)가 표시할 수 있는 최고의 존경과 존중(尊重)이었다.
그런데 예양(豫讓)은 싸움에 응하지 않았다. 자기가 곧 죽을 것을 알면서도 그는 안색 하나 바뀌지 않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지혜로운 군주는 다른 사람의 뛰어남을 가리지 않고 충신은 절개(節槪)를 위해 목숨까지 버리는 의리가 있다고 들었소. 오늘 나는 마땅히 엎드려 죽음을 기다려야 하지만 부디 내 청을 하나 들어주시오. 당신의 옷자락을 베어 소망(所望)을 이룬 셈 치게 도와주시오.”
뜻밖의 부탁이었지만 조양자(趙襄子)는 이해할 수 있었다.
“알겠네. 그러면 검을 뽑게.”
예양(豫讓)은 검을 뽑아들고 뛰어들어 조양자(趙襄子)의 옷을 베었다. 검을 휘두르면서 그는 울고 있었다. 하늘이시어, 마침내 지백의 은혜를 갚았나이다!“
세 번 검을 휘두른 뒤 예양(豫讓)은 태연히 자신의 목을 베었다.
이 일을 전해들은 천하의 인의지사(仁義志士)들은 슬프게 울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군자(君子)는 예양(豫讓)처럼 고귀(高貴)하게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예양(豫讓)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에도 모두 동감(同感)했다.
◐평언: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여자는 자기를 기쁘게 해주는 사람을 위해 화장(化粧)을 한다.” 글: 김정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