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헌 (bockh57@gmail.com)
낯선 사이도 함께 앉게 만드는 햇살(사진: 이해헌)
따뜻한 만남이 빚어내는 풍경은 통영에서의 시간이 천천히 흐르고 있음을 조용히 증명해 준다. 한 달 살이를 하며 찾은 윤이상 기념관. 그중에서도 야외공연장 아래의 낮은 석벽과 완만한 잔디 경사는 무대도 객석도 아닌, 그저 햇볕을 받아들이기 위한 자리처럼 보인다. 12월 중순이라는 계절이 무색하게 하늘은 유난히 맑고, 겨울 햇살은 차갑기보다 부드럽다.
긴 그림자가 드리운 잔디 위에 어르신 세 분이 나란히 앉아 있다. 두툼한 외투와 모자, 무릎 위에 얹은 손, 그리고 느슨한 자세에서 이 시간이 ‘약속된 만남’이 아니라 ‘우연히 주어진 휴식’임을 알 수 있다. 처음엔 두 분만 아는 사이처럼 보인다. 몸을 약간 기울여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가는 모습에서 오랜 친구 특유의 편안함이 묻어난다. 반면 한 분은 살짝 떨어져 앉아 주변을 살피는 듯하다. 말수도 적고 시선도 조심스럽다. 하지만 햇볕은 차별 없이 모두에게 내려앉고, 시간은 그 간격을 서서히 좁힌다. 어느새 세 분의 시선이 같은 방향으로 향하고 짧은 웃음이 오간다. 낯섦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그 자리에 소박한 다정함이 들어선다.
특별한 화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날씨 이야기, 장날 이야기, 요즘 몸은 어떤지에 대한 안부 정도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평범함이야말로 지금 이 풍경을 특별하게 만든다. 요즘 서울이나 대도시에서 이런 장면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른 채 살아가고, 층간소음이 분노로 번져 극단적인 사건으로 이어지는 뉴스가 낯설지 않은 시대다. 관계는 점점 얇아지고 사람들은 서로를 경계하는 법에 더 익숙해졌다.
그에 비해 통영의 이 오후는 마치 다른 시간대에 놓인 것처럼 느껴진다. 빈집이 드문드문 남아 있고 오일장이 서며 동네의 얼굴들이 아직 서로를 알아보는 곳. 도시라기보다 ‘마을’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공간이다. 윤이상 기념관이라는 이름이 주는 예술적·역사적 무게와 달리, 그 아래에서는 삶이 아주 가볍게 흘러간다. 거창한 공연도, 웅장한 음악도 없지만 사람과 사람이 햇볕을 매개로 이어지는 작은 합주가 있다. 말과 말 사이의 침묵조차 불편하지 않은 시간. 그 침묵을 채우는 것은 햇살과 온기다. 어르신들의 얼굴에 스친 겨울빛은 주름을 더 깊게 만들기보다 오히려 부드럽게 감싸 안는다.
이 장면이 신기하게 느껴진 이유는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이런 풍경에서 멀어져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특별할 것 없는 하루, 특별할 것 없는 대화, 그리고 낯선 이와도 자연스레 나눌 수 있는 웃음. 통영의 겨울 오후는 그런 것들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정이 많다’는 말은 거창한 미담이 아니라,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함께 앉아 햇볕을 쬐는 태도에서 드러난다. 이곳에서의 한 달 살이는 여행이기보다 잊고 지냈던 감각을 다시 배우는 시간처럼 느껴진다.
따뜻한 햇볕 속 세 분의 뒷모습은 그래서 오래 마음에 남는다. 마치 “아직 괜찮다”라고,
“이런 세상도 여전히 존재한다”라고 조용히 말해주는 것처럼. l 이해헌(bockh57@gmail.com) : 포토그래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