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준의 여행만리]용(龍)기 뿜뿜! 새해 첫 여행지는 여기 - 아시아경제
“천하에 부끄러운 일이란 명실이 일치하지 않은 게 제일 크다. 그렇지만 또한 명성이 먼저 있고 나중에 실질을 요구하는 것을 고명사의(顧名思義)라고 한다. 가령 영주(瀛洲, 제주도) 서쪽 고을의 청룡재라는 곳 또한 고명사의할 수 있는 경우이다. 무릇 이제 용이라는 것은 하늘을 날다가도 못에 잠기며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내리게 하며 건원의 기운을 체득하여 성인의 쓰임을 얻은 동물이다. 그런데 외진 마을의 말학에게 이름을 생각하고 실질을 요구하려고 한다면 난쟁이에게 천균의 무게를 들라고 하는 경우에 가깝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용의 종잡을 수 없는 신령한 변화는 사람의 머리로 헤아릴 수 없을 것 같지만, 용이라고 말한 것은 양(陽)에 순수하다고 한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사람이 선에 순수하여 악이 없어지면 또한 사람 중의 용이지 않겠습니까. 순선무악(純善無惡)은 덕을 이룬 자의 일이니, 본디 하루아침에 이룰 수 있는 공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 집에 지내는 사람은 닭이 울 때 일어나 부지런히 선행을 하여 한 생각의 선이라도 곡식을 키우듯 하고 한 생각의 악이라도 덤불을 자르듯이 합니다. 독서할 때는 대의를 먼저 구하고 글을 지을 때는 이치에 합당함을 요체로 삼으며, 집에 들어가서는 부형을 섬기고 나와서는 어른을 섬기면서 사물을 응접하거나 먹고 쉬고 움직이고 가만히 지낼 때도 오로지 선(善)을 구하지 않음이 없어서 자기 마음에 부끄럽지 않기를 기약한다면, 악은 날로 사라지고 선은 날로 쌓여서 넉넉하게 순(舜) 임금의 무리가 될 수 있을 테고 비록 하루아침에 용이 되지 못하더라도 또한 용의 종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이런 생각을 하지 않고 성현의 가르침을 그저 자기가 표절(標竊)할 바탕으로 삼고 시짓는 기예로 남들의 이목을 즐겁게 하는 데 힘쓰며 자잘한 18운(韻)의 과체시(科體詩)를 자기가 잘하는 일로 삼고 심신을 도외시(度外視)하여, 사람들과 하루 종일 지내면서 의리를 언급하지 않고 세속에서 좋아하는 것만 따라 유학의 교화가 미치지 않은 곳에서 편안히 지낸다면, 거기가 바로 미꾸라지와 두렁허리 같은 소인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청룡(靑龍)이라는 편액(扁額)을 한번 본다면, 얼굴이 뜨끈하게 달아오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정영엽(丁永燁)이 이 재(齋)에서 독서하는 자인데, 나를 찾아와 재의 기문을 써달라고 하였다. 대체로 재실의 편액은 언덕의 이름을 따르지만 삼가 용이라는 이름에 느낀 점이 있어 우선 이 말로 써서 부치노라.
“天下之恥, 莫大於名浮其實. 然亦有先有其名而後責其實者, 所謂顧名思義者是已. 若瀛洲西鄕之靑龍齋者, 亦可以顧名而思義者耶? 今夫龍之爲物, 飛潛天淵, 興雲降雨, 軆乾元之氣而得聖人之用者也, 而欲使窮鄕末學顧其名而責其實, 則不幾於强僬僥以千鈞之重哉?” 曰: “不然. 龍之靈變不測, 若未可以擬議, 然語其所以爲龍, 則不過曰純乎陽而已, 人能純乎善而無惡則不亦人中之龍乎? 純善無惡, 成德者之事也, 固非一朝一夕之功, 然使居是齋者, 雞鳴而起, 孜孜爲善, 一念之善, 培之如嘉穀, 一念之惡, 剪之如荊棘. 讀書則先求大義, 作文則要在理勝, 入而事父兄, 出而事長上, 以至於應事接物動靜食息之際, 莫不惟善之是求, 而期於不愧乎吾心, 則將見惡日祛而善日積, 優可以爲舜之徒矣, 縱不能一朝而成龍, 其亦可謂龍之種也. 苟其不出於此, 聖謨賢訓, 徒資吾之剽竊, 蟲雕蛩吟, 務悅人之耳目, 區區十八韻, 自以爲能事, 而置身心於度外, 羣居終日, 言不及義, 循世俗之好尙, 安遐風之僻陋, 則是乃鰌鱓蝦蟆之所萃, 試瞻靑龍之扁, 能不赧然而發赬哉?” 丁生永燁讀書於齋中者也, 謁余文以記其齋, 蓋曰齋之扁, 因岡號也, 然竊有感於龍之名, 聊爲此語以付之.
<양원유집(陽園遺集) 권9 청룡재기(靑龍齋記) 임진(壬辰)>
청룡의 해가 벌써 2달이나 지났다. 고래로 용은 하늘을 노닐며 구름을 몰고 다니는 신성한 동물이었다. 그래서 《주역》에서는 건천(乾天)을 대변하는 동물이며, 후대에는 천자와 그 권위를 상징하게 되었다. 그래서 조선 문인들의 문집 속에서 용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대체로 풍수지리와 관련한 부분, 혹은 임금에게 올리는 글에 제한적으로 보인다. 그런데 청룡(靑龍)이라는 단어를 자기 재실의 편액으로 내건 사람이 있었다. 바로 제주에 사는 정영엽(丁永燁)이라는 인물이다. 자칫하면 임금에 대한 불경죄에 저촉될 수 있는데도 과감하게 청룡재라고 내걸다니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이 기문을 지은 신기선(申箕善)은 1886년(고종23) 갑신정변의 동조자로 지목되어 전라도 여도(呂島)에 유배된다. 임진년(1892년, 고종29)은 그가 유배된 지 6년이 되는 해이다. 신기선은 임헌회(任憲晦)에게서 수학하며 우암 학맥을 이을 제자로 인정받을 만큼 학문이 고매하였다. 또 그가 유배갔던 여도는 제주도와 그렇게 멀지 않기 때문에 그에 대한 소문이 제주도까지 전해져 정영엽이 찾아왔으리라 추측된다.
기문은 두 사람 간의 문답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두에서 신기선은 재실 이름을 청룡이라고 지은 점에 대해 질책한다. 용이란 신묘막측한데다 성인의 쓰임을 얻은 동물이다. 네가 성인도 아니고, 촉망받는 기재도 아닌데 용이란 단어로 편액을 걸었으니, 이름에 비해 실질이 너무 부족하다고 말이다. 재실 편액을 다시 지으라는 말과 다름없다. 그런데 정영엽의 답이 걸출하다.
정영엽은 용이 변화무쌍한 것은 천도를 따르기 때문이고, 천도를 따르는 것은 양에 순수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렇다면 양에 순수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정영엽은 순선무악(純善無惡)이라고 보았다. 즉 성인과 용의 공통점은 ‘순선’인 것이다. 그리고 구체적으로는 독서할 때는 대의를 구하고 글을 지을 때는 도리를 세우며, 어른과 부형을 섬기고 자나 깨나 내 마음에 부끄럽지 않게 선행을 하는 것이라고 꼽았다.
성현의 글을 많이 읽고 시문을 잘 짓고 과거시험에 합격한다 한들, 그것은 선행이 아니다. 공자도 효도하고 공손하고 행실을 삼가고 말을 성실하게 하고 사람들을 사랑하고도 힘이 남으면 글을 배우라 하지 않았던가. 일상의 도를 실천하면서 불현듯 찾아오는 귀찮음과 불만, 조바심 등을 이겨나가는 것이 성인이 되고 용이 되는 지름길이다. 정영엽이 말한 청룡은 소설 속 영웅이나 권위있는 존재가 아니라 유학이 제시한 덕목을 순수한 마음으로 하는 사람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명명덕(明明德) 혹은 극기복례(克己復禮)를 한 사람이라고도 볼 수 있다.
몇 달 전 전 세계 17개국을 대상으로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요소가 무엇인지 조사한 결과 한국만 유일하게 '물질적 행복(material well-being)'을 내세운 것으로 나타났다. 그래서인지 요즘 책이나 인터넷을 보면 흙수저에서 자기 계발하여 몇백억 대 부자가 되는 2, 30대들이 너무 많아졌다. 또 그들이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다면서 강연하고 책을 낸다. 그런데 이를 자세하게 뜯어보면 결국 이들이 이야기하는 성공, 부의 재창출이란 흡사 프랜차이즈처럼 본사와 가맹점 관계와 다를 게 없다. 언젠가는 포화 상태에 이를 ‘성공을 파는 사업’인 것이다. 실제로도 자수성가를 광고하던 사람들이 얼마 못 가 패망하는 모습을 종종 보기도 한다.
책을 몇십 권 이상을 읽고 자신만의 성공 공식을 찾아 발전하는 모습은 화려해 보이지만, 그것은 앞에서 말한 성현의 글을 많이 읽고 시문을 잘 짓고 과거시험에 합격하는 경우와 같다. 이런 방법은 도금한 용처럼 언젠가는 본색이 드러난다. 끝없이 솟아나는 덕의 샘을 내면에 갖추어야 진정한 용이 되어 타인의 비교에 걸리지 않고 누구에게든 친절하고 겸손하면서도 떳떳하고 자신감있게 삶을 살아 나갈 수 있게 된다. 이를 위해서는 빈한(貧寒) 속에서도 버틸 항심(恒心)이 필요하지만, 또한 개인의 신념과 노력에만 내맡겨서도 안 된다. 시민들의 의식, 정부의 정책 등 다양한 제도적 장치가 있어야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다.
글쓴이 이승재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위원
용거북/용귀(龍龜)(세트)
이동철(李東哲)
정의
용이 되려다 인간의 방해로 승천하지 못한 이무기 설화.
공부를 많이 했지만 벼슬을 못한 가난한 양반이 있었다. 어느 날 아내가 베를 짜서 남편에게 주면서 양식을 사 오라고 했다. 남편은 베를 팔았으나 양식을 안 사고 돈을 들고 집으로 오는데, 사람들이 모여 구렁이를 죽이려고 하였다. 양반은 사람들에게 구렁이도 하나의 생명인데 죽이지 말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간섭하지 말라며 양반을 위협했다. 양반은 구렁이를 죽이지 않는 조건으로, 사람들에게 베를 판 돈을 모두 술값으로 지불했다. 남편이 빈손으로 돌아왔기에 가족은 굶을 수밖에 없었다. 아내는 풍수라도 하라며 패철(무덤 자리나 집터를 정할 때 풍수나 지관이 사용하던 나침반)을 얻어 와서 남편에게 주었다. 양반은 풍수에 문외한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길을 나섰다. 가다가 어떤 집에 초상이 나서 가 보니, 좋은 묏자리를 정하기 위해 풍수쟁이를 불러 모으고 있었다. 양반도 그 자리에 갔으나 풍수에 아는 것이 없어 난감해 했다. 그 집에서 밥을 얻어먹고 있는데, 불쌍한 한 아이가 들어왔다. 양반은 자기 밥을 아이에게 나누어 주었다. 아이는 신통한 능력이 있어, 풍수에 문외한인 양반을 최고의 풍수가로 만들어 주었다. 양반은 엄청난 부자가 되었고, 아이는 자신이 지난번 양반이 구해 준 구렁이라고 정체를 말했다. 그때 사람들은 약속을 어기고 이무기인 자기를 죽이려고 했고, 그래서 용으로 변신하지 못했다고 했다. 아이는 은혜를 갚고자 찾아온 것이라 하며, 이제 더는 도움을 줄 수 없다며 사라졌다. 양반은 이무기 덕분에 부자로 잘 살았다.
변이
이러한 유형의 설화는 많지 않다. 이무기가 용이 못한 경우, 이무기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이 설화처럼 과거에 자신을 도운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내용도 있지만, 다른 설화는 용이 되는 것을 방해한 사람들에게 보복하는 내용도 있다.
분석
우리 문화에서 용을 지칭하거나 용과 관련된 말에는 ‘이무기, 이시미, 미리, 영노, 꽝철이, 바리’들이 있다. 보통 용은 긍정의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이무기는 부정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용 못 된 이무기 심술만 남았다.”, “용 못 된 이무기 방천 낸다.” 같은 속담이 생겨났다. 이 설화에서 주인공이 부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착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사람들이 구렁이를 죽이려고 할 때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며 구해 주고, 굶주린 아이에게 자신의 밥을 내어 주었기 때문에 큰 부자가 될 수 있었다.
특징
이무기가 용이 되기 위해서는 사람의 도움을 받거나 최소한 사람의 방해를 받지 않아야 한다. 사람의 방해로 용으로 승천하지 못하면, 이무기는 보복하는 것이 일반이다. 그러나 이 설화에서는 자신을 도와준 사람에게 은혜를 갚고, 자신을 죽이고 방해한 사람들에게 보복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출처
한국구비문학대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0~1988) 7-16, 567; 8-11, 474.
참고문헌
용사사상의 한국문학적 수용양상(이혜화,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9), 한국설화에서 용신신앙의 수용 양상과 의미 연구(이동철, 한양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2).
승천 앞둔 부부 용(龍) < 자료모음집 < 기사본문 - 일간경기
글: 목사 wannabe
개천용. 개천에서 용난다는 우리 옛 말이 있다. 그 뜻을 모를 리가 없겠지만, 얼마 전부터 나는, 과연 "지금은", 또한 "앞으로도" 개천에서 용이 나올 수 있을까? 하는, 이 옛 말의 현실성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정말로 개천에서 용이 나올 수 있는 걸까? 아니면 우리 시대는 용이 되길 간절히 바라는 이무기의 현실을 짊어 지고 점점 더 스스로에게 희망고문을 하며 살아하는 것은 아닐까..
정확하게 어제-2015. 3. 26-였다. 메일을 정리하다가 신문사 만평 한 컷을 보고는 잠시 쓴 웃음을 짓고 말았다. 기분이 나빠 금새 지워버려 출처가 확실하지는 않다만, 정확하게 기억나는 것은 "출발선이 같다"는 하단 문장과 그 위에 그어진 출발선에, 한 청년은 리어카에 노부모를 태우고는 힘겹게 서 있었고, 그 옆에는 부모님이 타고 있는 외제 승용차, 그 위에서 방방 거리며 출발을 기다리는 또 다른 청년이 있었다. 둘 다, 같은 출발선이었다. 동일한 선(線) 상이었건만, 결과는 왜 그리도 뻔해 보이던지. 아마도 우리 사회는 더 이상 개천용은 되지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작은 세상이 그 속의 모양새를 그렇게 잡아놓았기 때문이다. 개천용은 커녕, 이제는 이무기도 못 되는 현실, 아니, 이무기가 된 것만 해도 감사해야 할 현실을 맞이해야 할 판이다.
요즘 정치 판에서는 저 남쪽 지방의 자치단체 장이라는 "홍씨"가 의무급식을 폐지해서 난리가 났다. 서울 동대문구에서 낙선 한 후, 정계를 은퇴하겠다고 큰 소리 뻥뻥 치더니, 자리를 옮겨 경상남도 도지사가 되셨더란다. 일명 "모래시계 검사"로 통하는 홍씨는 많은 기자들 앞에서 "어렸을 때 밥도 못 먹고 가난하게 자랐지만 수돗물이라도 먹으면서 공부를 열심히 했더니 검사가 되었고, 도지사가 되었"다고 열변했단다. 그러면서 자신을 용처럼 생각했을 테지.. "학교에는 밥 먹으러 가는 게 아니라 공부하러 가는 것"이라면서, 내심 용 된 자신을 본 받으라고 한 말이라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그리 가난하게 살아서, 그 가난이 억울해서 열심히 했다는 것. 그것이 좋은 성과를 얻어 검사가 되고, 여당의 대표 직함도 얻어보고, 자치단체장을 하게 된 것, 그 자체가 잘못 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랬던 그 사람이, 이제는 개천에서 용 되기에 좀 더 수월하게, 모두에게 그 기회를 주겠다는 국민의 의사를 무참히 잘라버리고 기회를 막아버렸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그날 그 분이 드신 점심식사비는 무려 2만 5천원이었다지? 용된 그 분에게 아마도 그 점심값은 참 저렴했을 것이다. 으리으리한 용왕궁에서 남들이 비벼대며 차려준 초호화 밥상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치 저렴했을 것이다.
어쨌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정치비판이 아니라, 지금 그 분의 꼬라지가 용이 아니라 "욕"스럽다는 점이다. 안타깝게도 개천용의 허상을 스스로 보여준 모범스승-반면교사랄까..
팟캐스트 중에 내가 자주 즐겨 듣는 공익(?) 방송이 하나 있다. <신날새-그대에게 보내는 편지>인데, 신날새라는 해금 연주자가 양서를 선정해서 글을 읽어주고, 청취자들의 후원으로 청각장애인들에게 보청기를 지원하는, 정말 "공익방송"이다. 취지도 좋지만 내가 정말 즐겨듣는 이유는 "양서"를 핵심만 간략하게 전달한다는 데 있다. 나 같은 사람에게는 삶의 촉수를 간지럽히는 알짜방송이다. (궁금하면 들어보라) 몇 주 전 방송에서는 "고병권 작가" 의 저서 <철학자와 하녀>의 한 대목을 낭독해 주었는데, 그 내용이 이렇다.
<철학자와 하녀>에서 저자는 삶을 일깨우는 한 문장, 또는 단어들을 소개하는데, "노예"라는 말도 그런 말 중에 하나라고 말한다. "노예란, 저 자신이 옳고그름을 따져 볼 능력이 없는 존재이거나 그런 것에 무관심한 존재를 뜻하는 말이다. 따라서 노예는 습관에 의탁하고, 언론에 의탁하고 , 권력자에게 의탁하고, 다수에 의탁한다. 쉽게 굴복한다는 것은 스스로 따져볼 능력과 의지가 없는 것이니, 그에게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 바탕이 없는 것과 같다."
너도 용 될래..?
내가 묻는 이 질문은 나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며, 동시에 그대에게 하는 말이다. 개천용. 이 담론 안에는 왜 용이 되어야 하는지는 없다. 그저 용이 되는 것이 꽤나 옳은 것 마냥 툭 던져놓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말과 의도를 스스로 따져보지 않는 이, 그러면서 용이 되려고 하는 이, 나아가 용 된 것을 부러워만 하는 이, 따져보지 않고 그것에 지향을 두는 이는 -고병권 작가에 의하면, 그리고 내 생각에도- 모두 "노예"다. 그렇게 되어야 좋다고 하니 따져보지도 않고 나도 그렇게 되고 싶은 것. 이것의 뒷모습은 노예의 근성이다.
속도전의 신자유주의 속에서 많은 청년들이 용이 되지 못해 안달이다. 그래서 서로를 물고 뜯는 무한경쟁을 하고, 그 속에서 물고 뜯으면서 서서히 죽어간다. 용은 커녕 도롱"용"(뇽)도 되지 못한 채, 하늘 쳐다보며, 부모 쳐다보며 원망을 삼킨다. 그대에게 묻고 싶다. 나에게도 묻는다. "너도 용 될래?"
왜. 도대체 왜?
요즘 나는 내가 용의 새끼라는 오만한 "속임수-틀"을 벗어버리기 위해서 무척이나 애쓰는 중이다. 내 삶의 특성상,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고, 많은 사람들 앞에 서고.. 내 속사정과는 전혀 다를 수도 있는 그럴싸한 말들을 해야 하고.. 여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래서 좋은 사람이어야 하는 강박관념에서 둘러싸여 산다. 내 스스로의 시각이 아닌, 타자의 시선과 평가로 인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용트림을 하며 산다. 꼭 용이 될 것 마냥. 아니 이미 용인 것처럼. 그리도 교만하고 오만하게.
무척이나 애쓰지 않으면 이 굴레는 벗어날 수가 없다. 스스로 치고, 또 쳐서 발끝으로 가지 않으면 나는, 도롱뇽도 되지 못한 것이 용인듯 착각하며 살다가 하늘의 심판대 앞에서 쓴 눈물을 삼켜야 할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더. 더. 나를 깨뜨리고 쳐야 한다.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그 방법 밖에는 없다. 이것을 내 삶의 정황으로 쉽게 표현하자면 예수의 길이고 십자가의 도라 하겠다.
개천용. 너도 용 될래..?
내가 무척 좋아하는 박노해 시인의 <경주마>라는 시를 읊어주고 싶다.
-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2010, 느린걸음) 중.
<경주마>
너는 초원을 달리는 야생마
어느 날부터 경주마로 길러지고
너는 지금 트랙을 달리고 있다
경주마가 할 일은
좋은 사료를 먹고 좋은 기수를 만나
레이스에 앞서는 것이 아니라
경주마가 할 일은
자신이 달리고 있는 곳이 결국
트랙임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리고
트랙을 빠져나와
저 푸른 초원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나 스스로에게 질문하며, 그대에게도 묻고 싶다.
너도 용 될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창하게 용되려 하기 보다, 지금 주어진 일상에서 나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스스로 용이라 생각하는 홍씨가 우리의 모범이 아니다. 스카이 대학에 가는 것도 좋지만 그것이 네 삶의 정답은 아니다. 때깔나는 옷을 입고 비싼 음식을 먹고 하는 것이 너와 내가 바라보야 할 지향이 아니라는 말이다. 모두가 그렇게 살려하면 망한다. 그러니 세상이 요구하는 용이 되려 하지 말고 너는 너의 삶을, 나는 나의 삶을 살아야 행복하다. 어느 특별한 날들을 바라지 말고, 바로 오늘을 특별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 해 사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삼포, 오포.. 그런 말들에 주눅들지 말고,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해보자는 말이다. 효과 안 나는 변명같은 최선 말고, 즉시 행동으로 옮겨 삶에 파장이 일어나고 변화가 나타나는 진짜 최선을 살자는 말이다. 네가 너다워지고, 내가 나다워질 때, 그 세상이 가장 아름다운 세상이고 가장 옳은 세상이 되지 않겠는가? 그런 사람을 통해 불합리한 용의 세상이 무너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 다수가 모여 용의 성, 용궁을 헐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용 되려 하기 보다, 특별한 보상이나 특별한 어느 때를 선망하기 보다, 지금 내 하루를 최선으로, 감사로 살기로 날마다 다짐해 본다. 날마다 내 자리를 겸손하게 유지하고, 날마다 나의 몫에 열정과 헌신을 다 하며, 너와 연결된 모든 삶의 고리들에 진심의 희생과 섬김을 다 한다면.. 나는 우리 주변이 변화되리라 믿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에게 주신 삶의 숨결이고 신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을 기대하고, 작은 파장이 일어나는 네 삶의 자리를 기대한다. 거창한 용, 황금 비늘의 번쩍거림이 아닌, 지금 이 봄, 개나리처럼 소박하지만 정말 잘 어울리는. 바라 보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존재만으로도 선물이 되는, 그런 너와 나를 기대한다. 언제 봄이 오느냐고 투덜대던 날들이 어느 새인가 봄이 되듯이, 우리의 옳은 하루가 켜켜이 쌓여 너라는 꽃, 나라는 꽃이 참 어울리게 피어나리라 믿는다.
이 봄에. 이 봄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