六書漢字源난고(蘭皐) 김병연(金炳淵)
◑글자풀이: 난초 난(蘭) 부르는 소리 고(皐) 성 김(金) 밝을 병(炳) 못 연(淵). ◑뜻풀이: 김병연(金炳淵)의 호는 난고(蘭皐)이고 경기도 양주에서 출생하였으며 방랑시인(放浪詩人)으로 유명하였는데 항상 큰 삿갓을 쓰고 다닌다고 하여 김삿갓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출처: 김삿갓 시 모음.
난초 난(蘭)의 구성(構成)은 풀의 모양(模樣)을 상형(象形)한 풀 초(艹)와 가로막을 란(闌)으로 짜여 있다. 란(闌)은 문 문(門)과 가릴 간(柬)으로 구성(構成)되었다. 문(門)은 갑골문(甲骨文)의 자형 중에서 출입문(出入門)의 상부에 놓인 지붕(一)이 생략된 채 오늘날 까지 비교적 온전(穩全)하게 유지(維持)되어 오고 있는 상형글자(象形字)다. 두 개의 문짝으로 만들어진 ‘대문’의 상형(象形)이다. 외짝의 문은 戶(호)인데 단출하고 가난한 집을 상징(象徵)하기도 하며, 이에 비해 門(문)은 부잣집을 뜻하기도 한다. 간(柬)은 묶을 속(束)과 여덟 팔(八)로 구성(構成)되었다. 속(束)은 나뭇가지(木)를 줄로써 동여맨(口) 모양을 한 회의글자(會意字)다. 숫자 8을 나타내기도 하는 팔(八)은 어떤 물건(物件)을 쪼개거나 나눈다는 뜻도 지니고 있다. 이에 따라 란(闌)은 문(門) 앞에 뭔가를 풀어헤쳐(柬) 막는다는 뜻이 담겨 있다. 따라서 란(蘭)의 전체적인 의미(意味)는 고급(高級)스러운 문이나 창문가에 놓아(闌)두는 풀(艹)을 말한다.
소리 고(皐)의 구성(構成)은 뜻을 나타내는 흰 백(白) 부(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同時)에 뜻을 나타내는 둘 이(二) 변에 겹친 놓인 이(二) 아래 열 십(十)자로 이루어진 회의자(會意字)이다. 즉 흰 머리뼈와 네발짐승의 주검을 본뜬 글자이다. 고복(皐復)은 초혼(招魂)을 하는 의식(儀式)이다. 초혼(招魂)은 사람이 죽었을 때에, 그 혼(魂)을 소리쳐 부르는 일로. 죽은 사람이 생시(生時)에 입던 저고리를 왼손에 들고 오른손은 허리에 대고는 지붕에 올라서거나 마당에 서서, 북쪽을 향하여 ‘아무 동네 아무개 복(復)’이라고 세 번 부른다.
성 김(金)은 주물(鑄物)을 할 때 쓰이던 거푸집(亼)과 녹인 쇳덩이(土와 두 개의 점(點)를 상형(象形)하였다. 본래는 주물(鑄物)하기 쉬운 청동(靑銅)을 의미(意味)하였지만 때에 따라 ‘황금(黃金’을 뜻한다. 금(金)에 대해 "설문(說文)"에서는 “'금(金)'은 다섯 가지 색(色)의 쇠(鐵)를 뜻한다. 그 가운데서도 황금(黃金)을 으뜸으로 여긴다. 금(金)은 땅속에 오래 묻어두어도 녹(綠)이 생기지 않고, 백 번을 제련(製鍊)해도 감소(減少)하지 않으며 모양(模樣)을 바꾸어도 안 변(變)한다. 서쪽을 나타내는 오행(五行)이다. 흙(土)에서 생(生)겨나므로 토(土)로 구성(構成)되었으며 거푸집의 좌우(左右)에서 붓을 때 쇠(鐵)가 흙속에 있는 모양(模樣)을 본떴다. 금(今)은 소리요소가 된다.”고 하였다. 금(金)은 갑골문(甲骨文)에는 보이지 않고 금문(金文)에 보이는데, 잘 살펴보면 주물(鑄物)을 할 때 쓰이던 거푸집(亼)과 녹인 쇳덩이(土와 두 개의 점(點)를 상형(象形)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大部分) 소리요소(聲要素)인 금(今)의 생략형(省略形)에다 흙(土)에 덮여 있는 두 덩어리(두 점)의 금(金)을 나타낸 형성글자(形成字)로 보는 경향(傾向)이 많은데 금문(金文)을 고려(考慮)하지 않은 탓이다. 금(金)이라는 글자가 만들어진 시기(時期)는 상(商)나라이후 선진시대(先秦時代) 청동기문화(靑銅器文化)가 활발(活潑)하게 꽃피던 때로 ‘황금(黃金)’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청동(靑銅)’을 뜻했는데, 후대로 오면서 모든 쇠(鐵)를 아우른 금속(金屬)의 대표명사(代表名詞)가 된다.
밝을 병(炳)의 구성(構成)은 불 화(火)와 남녘 병(丙)자로 이루어진 형성자(形聲字)이다. 남녘 병(丙)자는 물건 받침대를 본떠 만든 글자로 추정(推定)된다. 나중에 십간십이지의 십간(十干十二支) 중 하나로 사용(使用)되면서 천간 병(丙)자가 되었다. 또 천간(天干)은 방향을 나타내는 데에도 사용되었는데, 병(丙)자가 남쪽을 가리키면서 남녘 병(丙)자가 되었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은 '병자(丙子)년에 오랑캐(胡)의 침입으로 일어난 난(亂)'으로, 병자(丙子)년인 1636년(인조 14년)에 중국 청(淸)나라가 조선에 침입(侵入)한 전쟁이다. 청나라는, 우리가 오랑캐라 부르는 만주 지방의 여진족(女眞族)이 만든 후금(後金)이라는 나라가 명나라를 멸망(滅亡)시킨 후 이름을 청(淸)으로 바꾸었다. 불(火)이 주변을 밝히니(丙) 밝게(炳) 빛나는 병연(炳然)한 모습은 우리들의 삶 속에서 사표(師表)로 삼는 사람들의 상징적(象徵的)인 표현이다. 그렇게 주변을 밝히며 살아가는 분들에게 '밝을 병(炳)'자 만큼 어울리는 이름도 드물 것이다. 그래서 부모님들의 이러한 소망(所望)을 담아 자식들의 이름에 '밝을 병(炳)'자를 애용한다. 따라서 병(炳)자는 주로 사람 이름에 사용된다. 조병화(趙炳華) 시인과 김삿갓으로 잘 알려진 조선 후기의 방랑 시인 김병연(金炳淵)이 그러한 예다.
못 연(淵)자는 형부인 물(氵)과 성부인 '연못 연()'으로 된 형성자(形聲字)이다. 그러니 연(淵)자는 물(氵)이 연못()에 고이도록 가두고 서서히 흘려보내는 '못(淵)'을 뜻한다. 성부인 연()자는 '못 연(淵)'자의 본의(本意)를 담고 있다. 연(淵)자는 본디 일정 구역(口)과 그 안에 흐르는 개념인 '川'처럼 세 줄로 나타낸 그림이었다. 그 후 물(氵)과 위아래로 흐를 수 있도록 입구와 출구가 난 '' 꼴이 되면서 지금의 연(淵)자가 되어 '못·소(沼)·웅덩이(淵)'를 뜻한다. 이 뜻 외에도 물이 못에 많이 모여서 깊고 조용하다는 의미(意味)에서 '물건이 많이 모이는 곳·깊다·조용하다(淵)'라는 뜻으로 확장(擴張)되었다. 연(淵)자는 위아래에 입구와 출구가 확연히 드러난 글꼴의 못으로 제주도(濟州道) 서귀포시(西歸浦市) 천지동(天地洞)의 천지연폭포(天地淵瀑布), 또는 전북(全北) 무주(茂朱)의 덕유산(德裕山)에 있는 칠연폭포(七淵瀑布)의 물줄기에 패인 일곱 개의 못이 한 줄로 늘어선 칠연(七淵) 등의 못을 보니 연(淵)자는 폭포처럼 유입(流入)되는 물줄기와 유출(流出)되는 물줄기가 뚜렷하게 드러난 모양의 못이란 특징(特徵)이 있다. 연(淵)자와 같은 입력(入力)과 출력(出力)의 균형이 뚜렷한 개념(槪念)으로 비유되는 역사의 인물(人物)로 고구려 말기 대막리지(大莫離支) 장군이었던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있다. 일명 천개소문(泉蓋蘇文)으로도 불린 그는 성씨로 보아 연(淵)자의 절제된 균형성과 천(泉)자의 샘솟는 생동감을 연상(聯想)케 한다.
◐약력: 김병연(金炳淵; 1807~1863)은 조선 후기(朝鮮後期) 시인으로 본관(本貫)은 안동(安東), 자는 성심(性深), 호 난고(蘭皐)이다. 속칭 김삿갓 혹은 김립(金笠)이라고도 부른다. 아버지는 김안근(金安根)이며 경기도 양주에서 출생(出生)하였다.
1811년(순조 11) 홍경래(洪景來)의 난 때 선천부사(宣川府使)로 있던 조부 김익순(金益淳)이 홍경래에게 항복(降伏)하였기 때문에 연좌제(連坐制)의 의해 집안이 망하였다. 당시 6세였던 그는 하인 김성수(金聖洙)의 구원을 받아 형 병하(炳河)와 함께 황해도 곡산(谷山)으로 피신(避身)하여 숨어 지냈다. 후에 사면(赦免)을 받고 과거에 응시(應試)하여 김익순(金益淳)의 행위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답을 적어 급제(及第)하였다.
그러나 김익순(金益淳)이 자신의 조부(祖父)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 벼슬을 버리고 20세 무렵부터 방랑생활(放浪生活)을 시작하였다. 그는 스스로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罪人)이라 생각하고 항상 큰 삿갓을 쓰고 다녀 김삿갓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전국을 방랑하면서 각지에 즉흥시(卽興詩)를 남겼는데 그 시 중에는 권력자(權力者)와 부자(富者)를 풍자(諷刺)하고 조롱(嘲弄)한 것이 많아 민중시인(民衆詩人)으로도 불린다.
아들 익균(翼均)이 여러 차례 귀가를 권유(勸誘)했으나 계속 방랑하다가 전라도 동복(同福:전남 화순)에서 객사(客死)하였다. 유해(遺骸)는 영월군(宁越郡) 태백산(太白山) 기슭에 있으며, 1978년 그의 후손(後孫)들이 광주(光州) 무등산(無等山)에 시비(詩碑)를 세우고, 1987년에는 영월에 시비가 세워졌다. 작품으로 《김립시집(金笠詩集)》이 있다.
◐<대하소설> 김삿갓 – 정비석 1988
줄거리 "첫눈에 보아도 외롭기 짝 없는 무덤이었다. 그 무덤 앞에는 높이가 두어 자 가량 되어 보이는 묘비가 서 있는데 그 묘비에는 ‘난고(蘭皐) 김병연지묘(金炳淵之墓)’라는 일곱 글자가 선명(鮮明)하게 새겨져 있었다."
인용은 작가 정비석(鄭飛石; 1911-1991)이 소설 <김삿갓>을 쓰기 위해 일흔 다섯의 노구(老軀)를 무릅쓰고 김삿갓 묘(墓)를 찾았을 때의 일화 중 한 부분이다. 천재(天才) 시인 김삿갓의 묘는 그렇게 초라하게 남아있었다.
소설 <김삿갓>은 작가가 김삿갓의 무덤을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첫 번째 장의 이 같은 구성은 '전기' 같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두 번째 장으로 넘어가면서 소설 <김삿갓>은 소설적인 흥미(興味)와 재미로 독자들을 매혹(魅惑)시킨다.
김삿갓의 일생(一生)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방랑시인 김삿갓(1807~1863)의 본명은 김병연(金炳淵)으로, 1807년(순조7년) 3월 13일 김안근과 함평이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다섯 살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열 살 전후에는 이미 사서삼경을 통달(通達)하는 수준이었다. 시 짓는 재주가 남달리 특출(特出)하고 역사에 각별한 흥미(興味)를 느껴오던 그는 고금의 시서(詩書)와 사서(史書)를 닥치는 대로 섭렵(涉獵)해왔기 때문에 모르는 글이 없을 정도였다.
그는 본시 글공부만 좋아하고 출세(出世)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홀어머니 이씨의 간곡한 부탁(付託)으로 20 살 되던 해에 과거 예비고사격인 백일장(白日場)에 참가하게 된다. 이날 백일장의 시제는 '정가산의 충성스러운 죽음을 논하고, 김익순의 죄가 하늘에 이를 정도였음을 통탄해보라(論鄭嘉山忠節死 嘆金益淳罪通干天)'는 것이었다.
이는 1811년(순조11년) 12월에 일어난 홍경래(洪景來)의 난과 관련이 있다.
당시 가산군수(嘉山郡守)였던 정시(鄭蓍)는 반란군과 용감하게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으나 선천방어사였던 김익순(金益淳)은 국가안보의 중책을 맡고 있는 무관임에도 불구하고 반란군(叛亂軍)이 쳐들어오자 싸우기는커녕 즉석에서 항복(降服)해 버렸던 것이다. 이듬해 봄, 난이 평정되자 김익순(金益淳)은 역적이라는 낙인(烙印)이 찍혀 처형당하고 말았다.
김병연(金炳淵)은 평소부터 가산군수(嘉山郡守) 정시(鄭蓍)를 '천고의 빛나는 충신' 이라고 존경(尊敬)해왔던 반면 김익순(金益淳)을 '백번 죽여도 아깝지 않은 만고의 비겁자'라고 몹시 경멸(輕蔑)해 오던 터라 김익순(金益淳)을 탄핵(彈劾)하는 글을 거침없이 적어 내려갔다.
장원을 차지한 그는 술 한 잔 걸치고 기쁜 맘으로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에게 자랑을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기뻐하기는커녕 눈물을 흘리며 이제까지 숨겨 오셨던 집안내력을 가르쳐 주시니 반역자 김익순(金益淳)이 바로 김병연(金炳淵)의 할아버지였던 것이다.
반역자(叛逆者)는 삼대를 멸하라는 그 당시의 법대로 김병연(金炳淵) 역시 죽어 마땅하였지만 어머니가 아들 삼형제를 데리고 도망쳐 숨어살고 있었던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얘기를 들은 김병연(金炳淵)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죽을 생각도 하며 울기도 하다가 그의 아내와 낳은 지 얼마 안 되는 아이와 홀어머니를 뒤로한 채 방랑(放浪)의 길을 떠나게 된다.
역적(逆賊)의 자손인데다 그 조부(祖父)를 욕하는 시를 지어 상을 탔으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 볼 수 없는 죄인(罪人)이라 생각하여 삿갓(笠)을 쓰게 되었고 이름도 김병연 대신 김삿갓이라 스스로 부르게 되었다. 술을 좋아하고 금강산(金剛山)을 특히 좋아했던 그는 서민 속에 섞여 상류사회(上流社會)를 풍자(諷刺)하는 시를 짓고 재치와 해학(諧謔)으로 서민의 애환(哀歡)을 읊으며 한평생을 보내게 된다.
삼천리 방방곡곡(坊坊曲曲)을 두루 살펴보며 수많은 시를 뿌려놓은 난고 김삿갓은 1863년 3월 29일, 57세의 나이로 마침내 전라도(全羅道) 동북 땅 적벽강(赤壁江) 흔들리는 배에 누워 기구(飢口)했던 한평생을 회고(回顧)하며 세상을 떠난다. 그의 시신은 차남인 익균(翼均)이 거두어 영월군(宁越郡) 하동면 노루목에 외로웠던 육신(肉身)을 모셔 놓았다.
저자 정비석(鄭飛石)은 <작가의 말>에서 김삿갓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한국 사람치고 <김삿갓>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그러나 이름만 알았다 뿐이지, 그가 어떤 사람이었던가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세상 사람들은 김삿갓을 흔히 '한평생 술이나 얻어먹으며 돌아다니다가 객사한 거지 시인'으로 알고 있기가 고작인데, 그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김삿갓은 우리나라 역사상(歷史上) 가장 뛰어난 생활 시인이었고, 문학적(文學的)으로도 모든 욕망을 초월(超越)한 세계적인 선(禪) 시인이었다.
1807년 개화 초기(開化初期)에 당대의 명문(名門)이었던 안동 김씨 가문에 태어난 김삿갓은, 20세 전에 과거에 장원 급제(壯元及第)하여 명시로써 이름을 천하에 떨쳐 왔었다. 그러던 그가 자기 가문의 치욕적(恥辱的)인 비밀을 알고 나자, 김병연(金炳淵)이라는 본명까지 깨끗이 버리고 집을 뛰쳐나와, 오직 삿갓과 죽장만을 친구삼아 거지처럼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며 떠돌아다니다가 57세를 일기로 비운(悲運)의 일생을 마쳤다.
그의 생애 자체부터가 전고(前古)에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극적 인간이었다. 게다가 그는 남의 집 문전(門前)에서 밥을 얻어먹어 가면서도 슬프고 외로울 때마다. 수많은 시를 남겨 놓았는데, 그의 시는 모두 선미(禪味)가 넘쳐나는 시들뿐이어서, 시에 있어서도 독보적(獨步的) 세계를 이루어 놓은 것은 하나의 기적(奇蹟)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결론적(結論的)으로 말하면, 김삿갓은 개화 초기(開化初期)의 시대적인 희생자(犧牲者)인 동시에, 한평생을 서민 속에서 서민들과 함께 웃고, 서민(庶民)들과 함께 울며 살아온 서민 생활의 거룩한 고행자(苦行者)였었다.
나는 이 소설 속에서 김삿갓의 자재 무애(自在無碍)했던 시의 세계를 소개함과 아울러, 그가 끝없는 방랑 생활(放浪生活)을 계속 해오는 동안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직접 겪어 온 가지가지 행적(行蹟)들을 김삿갓식으로, 풍류적으로 그려보려고 노력하였다. 그의 특이한 생애는 그 자체가 이미 한국적인 서민 생활의 애환(哀歡)이요, 해학(諧謔)이요, 풍자(諷刺)요, 익살이었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나라는 역사도 길고 문화도 일찍부터 발달(發達)되어 있었다. 그러나 양반과 상민의 생활 풍토(風土)만은 근본적으로 달랐는데, 김삿갓은 역사와 문화를 초월(超越)하여 항상 서민들과 호흡을 같이해 온 유일(唯一)한 서민 시인이었다. 김삿갓은 진실로 서민 속에서 자생(自生)한 위대한 생활 시인(詩人)이었던 것이다."
저자 정비석(鄭飛石)이 바라보는 김삿갓은 서민의 대변자(代辯者)였다. 그렇기 때문에 정비석(鄭飛石)의 소설 <김삿갓>은, 서민들 속에 있는 김삿갓에 주목(注目)한다. 그 속에서 기존(旣存)에 우리가 알고 있는 객사(客死)한 거지 시인 김삿갓과는 조금 다른, 서민들의 애환(哀歡)과 풍속을 시로 승격(昇格)시키는 김삿갓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김삿갓 그는, 천하의 바람둥이였고 재치와 기행(奇行)의 천재였다. 또한 그는 점잔 떠는 얼굴에 침을 뱉는 독설가(毒舌家)이기도 했다. 작가 정비석(鄭飛石)은 그런 김삿갓의 거침없는 인생을, 서민들과 함께 숨 쉬었던 김삿갓의 행적(行蹟)과 결부시켜 소설 <김삿갓>이라는 대작(大作)을 내어놓을 수 있었다.
◐<영화> 김삿갓 – 대양영화사 1957
출연: 김동원, 김승호, 황정순, 박경주 외
해설 ‘구원의 정화’(1956)에 이은 이만흥(李萬興)의 여덟 번째 작품. 조선 왕조 철종 때의 방랑시인 김병연(金炳淵, 1807~1863)의 일종의 전기 영화(傳記映畫)로 이운방 원작을 이광래가 각색(脚色)한 작품이다. 후일 시성, 혹은 시선으로 추앙(推仰)받았던 인물로 영화는 인간 김삿갓이 56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하기까지 그의 일생 중 가장 외로웠던 시기를 추출(抽出)해 한편의 멜로드라마(音乐戏剧)로 엮고 있다. 김삿갓으로 분한 박경주가 직접 제작했다.
영화 초반부에 김삿갓이 방랑하는 시퀀스(序列)는 맑고 깨끗한 자연의 이미지와 음악이 그의 시구절과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 같은 인상을 던져준다. 중·후반부로 넘어가면서 가련과 김삿갓이 사랑을 나눌 때와 홍경래(洪景來)의 난에서 백성들과 관군이 싸우는 전쟁 장면에서는 클래식 음악의 사용이 두드러진다. 김삿갓의 시의 경지(境地)를 충분히 섭렵하지 못했다 해도 김삿갓이라는 한 시대를 풍미한 시니컬(讥讽)한 시인의 풍모와 허무적이며 개성(個性)이 강한 보헤미안적 기질은 누구나 한 번 볼만한 흥미를 준다. (조선 57. 7. 24)
김문응 작사, 전오승 작곡, 가수 명국환이 부른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 흰 구름 뜬 고개 넘어 가는 객이 누구냐”로 시작되는 영화 주제가 ‘방랑시인 김삿갓’은 크게 히트(成功)하여 약 45만 장이 판매(서울 58. 10. 25)되었다.
줄거리선천부사 김익순(金益淳)의 손자 병연(박경주)은 장원급제(壯元及第)하지만, 할아버지가 홍경래(洪景來)의 난 때 반란군에 항복한 전력 때문에 벼슬에 오르지 못한다. 이에 좌절(挫折)한 그는 가족을 버리고 방랑길에 오른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타락한 세태를 개탄하는 기발한 시구를 남긴다. 그는 방랑생활 중 가련(박옥란)과 사랑하는 사이가 되지만 그녀가 바로 홍경래(김승호)의 딸임을 알고 크게 번민한다. 가련은 김삿갓을 향한 사랑 때문에 여승(女僧)이 되고 김삿갓은 어느 날 길 위에서 생을 마친다.
◐김병연(金炳淵)에 대하여
1807년(순조 7)∼1863년(철종 14). 조선시대의 방랑시인. 본관은 안동(安東[新]). 자는 난고(蘭皐), 별호는 김삿갓 또는 김립(金笠). 양주 출생.
선천(宣川)의 부사였던 할아버지 김익순(金益淳)이 홍경래의 난 때 투항한 죄로 집안이 멸족을 당하였다. 노복 김성수(金聖洙)의 구원으로 형 김병하(金炳河)와 함께 황해도 곡산(谷山)으로 피신해 공부하였다. 후일 멸족에서 폐족으로 사면되어 형제는 어머니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나 아버지 김안근(金安根)은 홧병으로 죽었다. 모친은 자식들이 폐족자(廢族者)로 멸시받는 것이 싫어서 강원도 영월로 옮겨 숨기고 살았다. 이 사실을 모르는 김병연이 과거에 응시, 〈논정가산충절사탄김익순죄통우천(論鄭嘉山忠節死嘆金益淳罪通于天)〉이라는 그의 할아버지 김익순을 조롱하는 시제로 장원급제(壯元及第)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내력을 어머니에게서 듣고는 조상을 욕되게 한 죄인이라는 자책과 폐족자(廢族者)에 대한 멸시 등으로 20세 무렵부터 처자식을 둔 채 방랑의 길에 오른다.
이때부터 그는 푸른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고 삿갓을 쓰고 죽장을 짚은 채 방랑생활을 시작하였다. 금강산(金剛山) 유람을 시작으로 각지의 서당을 주로 순방(巡訪)하고, 4년 뒤에 일단 귀향(歸鄕)하여 1년 남짓 묵었는데, 이때 둘째아들 김익균(金翼均)을 낳았다.
또다시 고향을 떠나서 서울(首尔)‧충청도(忠淸道)‧경상도(慶尙道)로 돌았으며, 도산서원(陶山書院) 아랫마을 서당에서 몇 해 훈장노릇도 하였다. 다시 전라도(全羅道)‧충청도(忠淸道)‧평안도(平安道)를 거쳐 어릴 때 자라던 곡산의 김성수 아들집에서 1년쯤 훈장노릇을 하였다.
충청도 계룡산(鷄龍山) 밑에서, 찾아온 아들 김익균(金翼均)을 만나 재워놓고 도망하였다가 1년 만에 또 찾아온 그 아들과 경상도 어느 산촌에서 만났으나, 이번에는 심부름을 보내놓고 도망쳤다. 3년 뒤 경상도(慶尙道) 진주 땅에서 또다시 아들을 만나 귀향을 마음먹었다가 또 변심하여 이번에는 용변을 핑계로 도피(逃避)하였다.
57세 때 전라도 동복(同福) 땅에 쓰러져 있는 것을 어느 선비가 나귀에 태워 자기 집으로 데려가 거기에서 반년 가까이 신세를 졌다. 그 뒤 지리산(智異山)을 두루 살펴본 뒤, 3년 만에 쇠약한 몸으로 그 선비 집에 되돌아와 한많 은 생애를 마쳤다. 뒤에 김익균(金翼均)이 유해를 강원도 영월군(寧越郡) 의풍면 태백산 기슭에 묻었다.
그의 한시는 풍자(諷刺)와 해학(諧謔)을 담고 있어 희화적(戱畵的)으로 한시에 파격적(破格的) 요인이 되었다.
그 파격적인 양상(樣相)을 한 예로 들어보면, “스무나무 아래 앉은 설운 나그네에게‧망할 놈의 마을에선 쉰밥을 주더라‧인간에 이런 일이 어찌 있는가‧내 집에 돌아가 설은 밥을 먹느니만 못하다(二十樹下三十客 四十村中五十食 人間豈有七十事 不如歸家三十食).” 전통적인 한시의 신성함 혹은 권위(權威)에 대한 도전(挑戰), 그 양식 파괴 등에서 이러한 파격(破格)의 의미(意味)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국문학사(國文學史)에서는 ‘김삿갓’으로 칭해지는 인물이 김병연(金炳淵) 외에도 여럿 있었음을 들어 김삿갓의 이러한 복수성(復讎性)은 당시 사회의 몰락양반계층(沒落兩班階層)의 편재(偏在)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보고 있다.
특히, 과거 제도의 문란(紊亂)으로 인하여 선비들의 시 창작기술은 이 같은 절망적(絶望的) 파격과 조롱(嘲弄)‧야유(揶揄)‧기지(機智)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1978년 후손(後孫)들이 중심이 되어 광주(光州) 무등산(無等山) 기슭에 시비(詩碑)를 세웠으며, 1987년 영월에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全國詩歌碑建立同好會)’에서 시비를 세웠다. 그의 시를 묶은 《김립시집(金笠詩集)》이 있다.
[참고문헌]
綠此集(黃五)
海藏集
大東奇聞
金笠詩集(李應洙編, 有吉書店, 1939)
金笠의 詩와 諷刺精神(金容浩, 漢陽 3권 7호, 1964)
金笠硏究(尹銀根, 고려대학교교육대학원석사학위논문,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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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대표적인 관광 아이콘 ‘장릉(莊陵)’
영월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바로 비운의 왕 단종의 애사가 서려있는 장릉(莊陵)이다. 지난 6월 27일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장릉은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청령포(淸泠浦)에 유배됐던 단종(조선 제6대)이 17세 되던 해(1457년) 사약을 받고 묻힌 곳이다. 대부분의 조선왕릉군(朝鮮王陵群)이 서울, 경기 일원(一圓) 평지에 있는데 반해, 거리가 먼 강원 영월의 언덕배기 위에 외롭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이채(異彩)롭다. 무신상이나 석호 등이 없는 점은 조선왕실의 법도에 따라 모셔진 다른 왕릉들과는 달리 유배(流配)라는 특수상황에서 조성됐음을 쉽게 짐작케 한다. 특히 능 주위를 둘러싼 울창(鬱蒼)한 소나무들이 마치 봉분 속에 잠들어 있는 단종에게 절을 하듯 틀어져 있어 신비함을 더해준다.
또한 정려각()은 삶의 도리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한다. 정려각은 ‘삼족을 멸한다’는 어명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내걸고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장릉에 몰래 모신 영월 호장 엄흥도의 혼을 기리는 곳이다. 영월이 ‘충절의 고장’으로 불리게 된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참배를 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속설로 인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장릉은 요즘 더욱 북적거린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후 종전보다 15~20%가량 많은 관광객(觀光客)들이 장릉(莊陵)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장릉 경내엔 단종 관련 유품을 비롯, 사육신(死六臣)과 생육신(生六臣)의 위패 등 각종 사료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단종역사관도 자리 잡고 있다.
◐“청령포의 물안개는 단종의 눈물”
또 다른 단종 관련 사적지인 청령포(淸泠浦)와 관풍헌(觀風軒)도 장릉(莊陵)에서 승용차로 5분 거리 이내에 위치해 있어 함께 둘러보기 편하다. 영월군 남면 광천리 남한강 상류에 위치한 청령포(淸泠浦)는 단종의 유배지(流配地)로 동, 남, 북 3면이 강물로 둘러싸여 있어 언뜻 섬처럼 보인다. 강물은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맑고 곱다. 사실상 고립된 채 애끓는 삶을 이어가다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한 단종(端宗)의 한이 서려있는 이곳은 이른 아침마다 물안개로 뒤덮인다. 일부 주민들은 “단종의 한숨 섞인 눈물이 물안개로 피어오르는 것”이라며 반복되는 자연현상조차 경외시하고 있다.
자갈밭을 지나 울창한 송림 속으로 들어가면 중앙에 예사롭지 않게 보이는 노송이 한눈에 들어온다. 단종의 유배생활과 관련된 수많은 일화가 녹아 있어 유명세를 타고 있는 ‘관음송’이다. 높이 30m, 수령이 600년에 달하는 관음송(觀音松)은 청령포(淸泠浦)를 포옹하듯 두 갈래로 갈라져 있다. 유배생활을 하던 단종이 갈라진 이 소나무에 걸터앉아 시름을 달랬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영월읍 중앙로에서 동강1교 방향으로 약 700m 지점에 위치해 있는 관풍헌은 영월 관아 건물로 단종이 승하한 곳이다. 청령포(淸泠浦)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단종은 홍수가 발생하자 이곳으로 옮겨와 머물던 중 세조의 명에 의해 사약을 받고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관풍헌 동쪽에는 작은 누각이 서 있다. 이 누각은 어린 단종이 피를 토하며 운다는 소쩍새(자규)의 한을 담은 시를 읊었다고 하여 ‘자규루(子規樓)’라고 불린다.
◐‘해학과 풍자’ 음미하며 자연경관도 덤으로 즐겨
단종과 함께 영월의 역사와 문화를 대변(代辯)하는 것은 방랑시인 ‘김삿갓’의 유적지다. 영월읍에서 27㎞가량 떨어져 있어 하동면 와석리는 난고 김삿갓 선생의 문학세계와 시대정신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읍내에서 승용차로 30분 거리여서 방문객(訪問客)이 많은 편이다. 이곳에는 김삿갓의 묘와 생가를 비롯해 시비와 문학관, 문학의 거리가 조성(造成)돼 있다. 문학관 내에는 김삿갓의 친필과 장원급제 시 등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돼 난고 선생의 해학과 풍류를 간접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다. 조상을 욕되게 하는 글로 장원급제를 했다는 자책감에 22세부터 전국 방방곳곳을 떠돌아다니며 시대상을 반영한 수많은 시들을 남기고 57세(1863년)에 세상을 등진 김삿갓은 당초 전라도 화순에 묻혔었다. 이후 차남 익균(翼均)에 의하여 유년시절을 보낸 영월군 하동면 노루목 계곡으로 이장되면서 이곳에 유적지가 조성된 것이다.
선생의 묘소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일명 ‘김삿갓 계곡’은 풍부한 수량과 함께 기암괴석(奇巖怪石)이 산재해 있어 탄성(歎聲)을 자아낸다. 가을철 계곡 주변을 형형색색(形形色色)으로 물들이는 단풍(丹楓)도 일품이다. 김삿갓 선생이 생전에 이곳을 ‘무릉계’로 부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을 정도의 비경(祕境)이다. 김삿갓 계곡 중간엔 ‘조선민화박물관’과 ‘묵산미술 박물관’ 등 2개 박물관이 자리하고 있어 자녀들과 함께 나들이하기에 더없이 좋다.
◐볼 것, 배울 것 많아 즐거운 박물관 투어
영월군 지역에는 현재 16개 박물관과 미술·전시관이 운영되고 있어 국내 유일의 ‘박물관고을 특구’로 지정됐다. 동강사진박물관(하송리), 곤충박물관(문곡리), 화석박물관(판운리), 호야지리박물관(무릉3리), 아프리카미술박물관(진별리), 국제현대미술관(삼옥리), 호안다구박물관(내리), 별마로천문대(봉래산)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영월군청 바로 옆에 있는 동강사진박물관은 국내 최초 공립사진박물관으로 주로 진솔한 삶의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 사진물을 전시하고 있다. 상설전시장에 전시된 300여 점의 클래식카메라도 볼만하다. 해발 800m의 영월 봉래산 정상에 위치한 별마로천문대로는 국내 최고의 관측여건을 갖춘 곳으로 유명하다. 천문대 옆 천문과학교육관에서는 별자리 여행과 천문 강의 등을 위한 영상강의실, 전시실, 취미교실 등이 마련돼 있다. 영화 <라디오스타> 촬영지로 유명한 이곳 정상에 서면 소박한 영월읍내의 야경을 볼 수도 있다.
중앙고속도로(제천 방향) 신림나들목에서 주천과 연당삼거리 지나 왼편에 위치한 영월곤충박물관은 학생들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곳이다. 지난 2002년 5월 문을 연 이곳엔 날개에 화려한 태극무늬가 그려진 태극나방을 비롯, 한라산(漢拏山)에서 설악산(雪嶽山)까지 날아간다는 왕나비, 쇠똥구리, 장수하늘소, 풍뎅이 등 1만여 종 3만여 점의 곤충 표본이 전시돼 있다. 이들 곤충 표본은 모두 이대암 관장이 30년 동안 발품을 팔아 수집(收集)한 것들이다. 이 관장은 한국인 최초로 새로운 혜성(彗星)을 발견한 아마추어 천문가이기도 하다. 국제천문연맹은 그가 발견한 혜성을 ‘이-스완(Yi-Swan)’으로 명명했다.
◐동강과 서강이 빚어놓은 비경에 탄성이 절로
백두대간(白頭大幹)에서 뿜어져 나온 물줄기는 산골짜기를 돌고 돌아 60㎞ 넘는 장강을 이룬다. 원시림과 깎아지른 듯한 절벽, 힘찬 물줄기가 절묘한 조화를 이뤄 한반도의 아마존으로 불리는 ‘동강’이다. 한때 댐 건설 논란으로 전 국민의 이목을 집중시킨 바로 그 강이다. 동강 유역을 향하는 일부 구간은 아직까지 비포장길로 접근이 쉽지 않다. 그만큼 사람들의 손때도 덜 타 자연미가 돋보이는 곳이다. 동강협곡(東江峽谷)이 빚어놓은 절경(絶景) 중 가장 이름난 곳은 ‘어라연’이다. 동강 상류인 영월읍 거운리에 위치한 어라연은 일명 삼선암(三仙岩)으로도 불린다. ‘고기가 비단결 같이 떠오르는 연못’이란 이름(어라연)이 말해주듯 풍광이 워낙 수려하다 보니 그 옛날 신선이 내려와 놀았다는 전설(傳說)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푸른 물속에 살포시 떠 있는 듯한 작은 바위섬과 단애(丹厓), 그리고 그 위에 어렵사리 뿌리를 내린 노송(老松)의 아름다운 자태를 보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영월 시가지에서 승용차로 30분 거리인 서면 옹정리 서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선암마을’은 마치 한반도 지도를 강물 속에 옮겨 놓은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바다를 대신해 삼면을 감싼 강물, 동고서저의 지세, 호미곶을 연상케 하듯 툭 삐져나온 꼬리까지 한반도(韓半島)의 지형을 그대로 닮았다. 송림으로 우거진 오솔길을 따라 약 600m 가량 올라가면 선암마을의 풍광을 제대로 감상(鑑賞)할 수 있는 전망대(展望臺)가 나온다. 여름이면 전망대 부근에 핀 무궁화(無窮花) 꽃이 발 아래로 펼쳐진 한반도지형과 조화(造化)를 이뤄 많은 관광객들을 불러 모은다. 서강변에 자리한 또 하나의 명소는 ‘선돌’이다. 영월의 관문격인 소나기재 부근에서 볼 수 있는 선돌은 70m 높이의 큰 바위로 일명 신선암(神仙巖)으로도 불린다. 두 갈래로 우뚝 솟아있는 선돌 사이로 보이는 서강의 푸른 물줄기는 청량감을 더한다.
◐삿갓시: 김삿갓이 황해도 어는 시골의 서당에 들렀을 때의 일이라고 한다.
사람이 왔는데도 훈장은 나와 볼 생각도 안하고 방안의 꼬마들 몇 놈만이 문 밖을 내다보며 손님을 우습게보고 깔깔대는지라 김삿삿이 이 욕시를 대뜸 읆었다고 한다.
辱說某書堂(욕설모서당) 서당욕설
學生乃早知(학생내조지) 학생은 곧 일찍 앎을 닦았는데
先生來不謁(선생내불알) 선생은 와서 뵙지를 아니하도다.
房中皆尊物(방중개존물) 방안은 모두 귀한 것 투성인데
學生諸未十(학생제미십) 학생은 모두 열살(놈)이 안되구나
破格詩(파격시) 파격시
天長去無執(천장거무집) 하늘은 멀어서 가도 잡을 수 없고
花老蝶不來(화로접불래) 꽃은 시들어 나비가 오지 않네.
菊樹寒沙發(국수한사발) 국화는 찬 모래밭에 피어나고
枝影半從池(지영반종지) 나뭇가지 그림자가 반이나 연못에 드리웠네.
江亭貧士過(강정빈사과) 강가 정자에 가난한 선비가 지나가다가
大醉伏松下(대취복송하) 크게 취해 소나무 아래 엎드렸네.
月利山影改(월이산영개) 달이 기우니 산 그림자 바뀌고
通市求利來(통시구이래) 시장을 통해 이익을 얻어 오네.
*이 시는 모든 글자를 우리말 음으로 읽어야 한다.
천장에 거미(무)집
화로에 겻(접)불 내
국수 한 사발
지렁(간장) 반 종지
강정 빈 사과
대추 복숭아
월리(워리) 사냥개
통시(변소) 구린내
방랑 시인 김삿갓의 욕시(辱詩) 가운데 한 절이라고 한다. 식사가 다 되어 친구를 찾아갔다. 둘이서 얘기를 나누는데 밖에서
친구 아내 : "인양복일(人良卜一)"하오리까
친구 : "월월산산"(月月山山)커든 이라고 답하는지라
김삿갓 : "견자화중(犬者禾重)들이 정구죽천"(丁口竹天)이로다
즉 식상(食上) : 밥상 올릴까요
붕출(朋出) : 벗이 나가거든
저종(猪種) : 돼지의 족속
가소(可笑) : 가소롭다는
이 시의 상상은 자유....
嚥乳三章(연유삼장) 젖 핥는 세장의 시
父嚥其上(부연기상) 시아버지가 그 위를 빨고
婦嚥其下(부연기하) 며느리가 그 아래를 빠니
上下不同(상하부동) 위와 아래는 같지 않으나
其味則同(기미즉동) 그 맛은 아마 같았으리라
父嚥其二(부연기이) 시아버지가 그 둘을 빨고
婦嚥其一(부연기일) 며느리가 그 하나를 빠니
一二不同(일이부동) 하나나 둘이 같지 않으나
其味則同(기미즉동) 그 맛은 아마 같았으리라
父嚥其甘(부연기감) 시아버지가 그 단 것을 빨고
婦嚥其酸(부연기산) 며느리가 그 신 것을 빠니
甘酸不同(감산부동) 달고 신 것은 같지 않으나
其味則同(기미즉동) 그 맛은 아마 같았으리라
是是非非詩(시시비비시) 시시비비
年年年去無窮去(년년년거무궁거) 이 해 저 해 해가 가고 끝없이 가네.
日日日來不盡來(일일일래부진래) 이 날 저 날 날은 오고 끝없이 오네.
年去月來來又去(년거월래래우거) 해가 가고 날이 와서 왔다가는 또 가니
天時人事此中催(천시인사차중최) 천시(天時)와 인사(人事)가 이 가운데 이뤄지네.
是是非非非是是(시시비비비시시) 옳은 것 옳다 하고 그른 것 그르다 함이 꼭 옳진 않고
是非非是非非是(시비비시비비시) 그른 것 옳다 하고 옳은 것 그르다 해도 옳지 않은 건 아닐세.
是非非是是非非(시비비시시비비) 그른 것 옳다 하고 옳은 것 그르다 함, 이것이 그른 것은 아니고
是是非非是是非(시시비비시시비) 옳은 것 옳다 하고 그른 것 그르다 함, 이것이 시비일세.
風俗薄(풍속박) 야박한 풍속
斜陽鼓立兩柴扉(사양고립양시비) 석양에 사립문 두드리며 멋쩍게 서있는데
三被主人手却揮(삼피주인수각휘) 집 주인이 세 번씩이나 손 내저어 물리치네.
杜宇亦知風俗薄(두우역지풍속박) 저 두견새도 야박한 풍속을 알았는지
隔林啼送不如歸(격림제송불여귀) 돌아가는 게 낫다고 숲속에서 울며 배웅하네.
詠笠(영립) 나의 삿갓은
浮浮我笠等虛舟(부부아립등허주) 머리에 쓴 내 삿갓 가볍기 빈 배 같아
一着平生四十秋(일착평생사십추) 어찌하다 쓰게 되어 사십 평생 흘렀네
牧竪輕裝隨野犢(목수경장수야독) 목동은 간편히 쓰고 소 먹이러 나가고
漁翁本色伴沙鷗(어옹본색반사구) 늙은 어부 갈매기와 낚시질 할 때 쓰네
醉來脫掛看花樹(취래탈괘간화수) 취하면 벗어서 걸고 꽃 나무 바라보고
興到携登翫月樓(흥도휴등완월루) 흥나면 벗어들고 누에 올라 달을 보네
自顧偶吟 나를 돌아보며
笑仰蒼穹坐可超(소앙창궁좌가초) 창공을 우러러 웃으며 초월했다가
回思世路更迢迢(회사세로경초초) 세상 길 돌이키면 다시 또 아득해
居貧每受家人謫(거빈매수가인적) 가난하다 식구들에게 핀잔을 받고
亂飮多逢市女嘲(란음다봉시녀조) 어지러이 마신다 거리의 여인들이 놀리네
萬事付看花散日(만사부간화산일) 세상만사 흩어지는 꽃이라 여기고
一生占得月明宵(일생점득명월소) 일생 밝은 달밤 같이 살려 했는데
也應身業斯而己(야응신업사이이) 내게 주어진 팔자가 이것뿐이거니
漸覺靑雲分外遙(점각청운분외요) 청운의 꿈 분수 밖임 차츰 깨닫네
---"가소롭다"는 파자어
◐파자: 김삿갓의 욕시(辱詩)가운데 정구죽천(丁口竹天)에서 나온 말로 김삿갓이 어느 유식(有識)한 척 하는 부부(夫婦) 집에 들러서 식사 때가 되어도 식사 대접(待接)할 마음이 없었던 이들 부부가 암호(暗號) 같은 대화(對話)를 나누었다
부인: "人良卜一(인량복일)하오니까?
남년: "月月이 山山커든 내오시오"
이들의 대화(對話)를 듣던 김삿갓이 다음과 같은 한마디를 던지고 떠나 버렸다
"이 견자화중( 견者禾重)아 정구죽천(丁口竹天)이로구나!"
이렇게 한자의 자획(字劃)을 나누거나 합치거나 하여 맞추는 놀이를 파자(破字)라고 하는데 하나의 글자를 여럿으로 나누거나 합치거나 하여 말장난하는 것이다
위의 대화를 정리하면
'인량복일(人良卜一)하오리까?
인(人)자와 량(良)자를 합치면 식(食)자가 되고 복(卜)자와 일(一)자를 합치면 상(上)자가 되어 식사(食上)이 된다. 즉 식사(食事)를 올릴까요? 라고 물은 것이었고
"월월(月月)이 산산(山山)커든 내오시오"
월(月)자가 두개 합치면 붕(朋)자가 되고 산(山)자 두개 합치면 출(出)자가 되어 붕출(朋出)이 된다. 즉 "친구가 나가면,돌아가면 내오시오"하고 대답(對答)한 것이었으며
"이 견자화중(견者禾重)아 정구죽천(丁口竹天)이로구나"는
견(견)자와 자(者)자를 합치면 저(猪)자가 되고 화(禾)자와 중(重)자를 합치면 종(種)자가 되어 저종(猪種)이 되어 돼지새끼라는 뜻이 되고 정(丁)자와 구(口)자가는 가(可)자가 되고 죽(竹)자와 천(天)자는 소(笑)자가 되어 가소(可笑)롭다가 된다
"이 돼지새끼들아 가소(可笑)롭구나"하고 대답(對答)하고 떠난 것이다. 파자(破字)의 대가인 김삿갓인데 공자(孔子) 앞에서 문자(文字) 쓰고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은 격이 되고 만 것이다. 참고: 도정 권상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