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문자학개설]중국문자학의 발전1~3

 [중국문자학개설]중국문자학의 발전1


박종민 기자
중국문자학개설 <16>

중국인의 문자 연구는 각종 문헌 잘에 의하면 주(周)나라 때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중국 문자 연구가 체계적인 하나의 학문으로 성립된 것은 동한(東漢) 때 『설문해자』를 지은 허신(許愼)이 나온 뒤부터라고 하겠다. 위ㆍ진(魏晉) 이후로 자형(字形)ㆍ자음(字音)ㆍ자의(字義)의 연구는 점차 발전의 방향을 달리하게 되었으며, 청대(淸代)에 들어서는 모든 연구가 이미 절정을 이루게 되었다. 이제 중국 문자학의 연구를 아래와 같이 4기(期)-창립시기, 확립시기, 발전시기, 전성시기-로 나누어 간략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1.중국문자학의 창제시기

『주례(周禮)』 「추관대행인(秋官大行人)」에 보면 “왕이 방국과 제후를 위무하하는데 9년마다 악사와 사관을 소집하여 서명을 깨우친다.[王之所以撫邦國諸侯者, 九歲, 屬瞽史ㆍ諭書名.]”이라는 말이 있고, 또 『설문해자서』에는

“『주례』에서 말하길 '8세에 소학에 들어가면 보씨가 먼저 육서를 가지고 대부의 자제를 가르친다.'고 하였다.[《周禮》:八歲入小學, 保氏教國子, 先以六書.]”

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들 기록에 의하면 주대(周代)에 이미 문자의 교육에 관심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이아(爾雅)』는 전하는 바에 의하면 주공(周公)이 지었다고 하는데, 그 목적은 “고금(古今)의 이언(異言)을 풀이하고, 방속(方俗)의 특수한 말을 통하게 하려는 데”있었다. 이(爾)는 ‘근(近)’의 뜻이고, 아(雅)는 ‘정(正)’의 뜻이다. 고금(古今) 방속(方俗, 지방의 풍속)의 언어는 “혹 뜻은 같으나 말이 다르며, 혹 말은 같으나 소리가 다르기 때문에 요속(謠俗, 세상의 풍속)을 모두 모아 아언(雅言, 바르고 우아한 말)으로 풀이하고, 물(物)을 비교하고 류(類)를 연관시켜 서로 가깝게 하였으니 고로 이아(爾雅)라고 하였다.” 이 책에 수록된 풀, 나무, 새, 짐승, 벌레, 고기 등의 명칭은 새로 만든 형성자(形聲字)가 매우 많다.

『사주편(史籀篇)』은 주선왕(周宣王) 때 태사(太史) 주(籀)가 정리하여 완성한 것이다. 진(秦)나라 이전의 전적(典籍) 중 『좌전(左傳)』에 ‘지과위무(止戈爲武)’, ‘반정위핍(反正爲乏)’, ‘혈충위고(血蟲爲蠱)’의 말이 있고, 한비자의 「오두(五蠹)」에는 “창힐이 글을 만들었는데, 스스로 에워싸는 것은 ‘사(私)’라고 말하고, 사를 등지는 것은 ‘공(公)’이다.[倉頡之作書也, 自環者謂之私, 背私謂之公]”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러한 서술에 따라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도 문자의 구조에 대하여 상당한 관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주역(周易)』「단전(彖傳)」 등에는 많은 해석이 있는데, 이는 훈고학(訓詁學)의 실마리인 것이다.

진시황(秦始皇)은 천하를 통일하고 또한 문자도 통일하였다. 이사는 「창힐편(倉頡篇)」, 조고는 「원력편(爰歷篇)」, 호무경(胡毋敬)은 「박학편(博學篇)」을 전술하였는데, 모두 소전체(小篆體)를 이용해 쓴 것으로 전국의 백성들이 문자 학습서의 표준본으로 삼았다. 이런 ‘서동문자(書同文字)’의 제도는 중국 문화사에 있어 커다란 공적이 아닐 수 없다.

유방(劉邦)이 한(漢)나라를 일으키자, 소하(蕭何)가 제정한 율령(律令)에서도 문자교육을 매우 중요시하였다. 『한서』「예문지」에서는 그 율령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태사가 학동(學童)을 시험하여, 9천 자 이상의 문자를 암송하고 쓸 수 있는 자는 곧 태사로 삼을 수 있다. 또 육체(六體)를 시험하여 그 성적이 가장 우수한 자는 상서(尙書)나 어사(御史) 또는 사서령사(史書令史)로 삼는다. 관리나 백성이 글을 올리면서 글자가 자못 잘못되었을 때는 법으로 탄핵할 것이다.[太史試學童, 能諷書九千字以上, 乃得爲史. 又以六體試之, 課最者以為尙書御史, 史書令史. 吏民上書, 字或不正, 輒擧劾.]”

한대(漢代) 초인(初人)이 「창힐편」·「원력편」·「박학편」을 합하여 창힐을 편명으로 삼았는데, 이런 류의 자서(字書)를 모방한 것으로 사마상여(司馬相如)의 「범장편(凡將篇)」, 사류(史游)의 「급취편(急就篇)」, 이장(李長)의 「원상편(元尙篇)」, 양웅(揚雄)의 「훈찬편(訓纂篇)」등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아이들이 읽기 쉽고 암송하기 쉽도록 편찬한 것들이다.

서한(西漢) 때에는 문자를 개정, 정리하기 위하여 두 차례 대회를 소집한 일이 있었으니, 한 차례는 선제(宣帝) 때에 제(齊)나라 사람을 불러다가 「창힐편」의 속독(俗讀)을 바로 잡았는데 장창(張敞)이 제나라 사람을 따라 배우다가 두림(杜林)에게 전하고 「창힐고(倉頡故)」·「창힐훈찬(倉頡訓纂)」을 저술하게 되어, 한인은 모두 그를 소학의 창조자라고 숭상했다.

또 한 차례는 평제(平帝) 때에 원례(爰禮) 등 100여 사람을 불러서 미사정(未史廷)에서 문자를 말하도록 하였는데, 양웅은 그것을 모아 「훈찬편」을 짓게 되었다. 이 밖에도 양웅은 또 「방언십삼편(方言十三篇)」을 저술하여 각 지방 방언의 다름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언어가 차이가 나는 것은 지역과 상관관계가 깊다는 점과, 또한 오늘날의 속언 중 고어절언(古語絶言)이 적지 않게 깔려 있다는 점을 알도록 하였다. 그러나 서한 때의 학술계는 당시의 금문경파(今文經派)에 의하여 독점이 되어 있어, 속유비부(俗儒鄙夫, 학문이 부족한 자)들이 한 대에 통용된 예서(隸書)를 근거로 하여 문자를 해설하였기 때문에, ‘마두인위장(馬頭人爲長)’, ‘인지십위두(人持十爲斗)’, ‘토력우을자위지(土力于乙者爲地)’, ‘팔추십위목(八推十爲木)’ 등과 같은 우스꽝스런 설법이 나왔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기의 문자학은 아직까지 체계적으로 수립되지 못하였다.

[중국문자학개설]중국문자학의 발전2

박종민 기자
중국문자학개설 <17>

중국인의 문자 연구는 각종 문헌 잘에 의하면 주(周)나라 때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중국 문자 연구가 체계적인 하나의 학문으로 성립된 것은 동한(東漢) 때 『설문해자』를 지은 허신(許愼)이 나온 뒤부터라고 하겠다. 위ㆍ진(魏晉) 이후로 자형(字形)ㆍ자음(字音)ㆍ자의(字義)의 연구는 점차 발전의 방향을 달리하게 되었으며, 청대(淸代)에 들어서는 모든 연구가 이미 절정을 이루게 되었다. 이제 중국 문자학의 연구를 아래와 같이 4기(期)-창립시기, 확립시기, 발전시기, 전성시기-로 나누어 간략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2. 중국문자학의 확립시기

중국 문자학의 확립은 『고문경(古文經)』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고문경』은 두 가지의 원류가 있는데, 하나는 『모시(毛詩)』·『비씨역(費氏易)』·『좌씨전(左氏傳)』등과 같은 대대로 전해져 오는 고서(古書)이고, 또 하나는 공자구옥(孔子舊屋)의 벽중에서 얻은 『예고경(禮古經)』·『고문상서(古文尙書)』·『고문논어(古文論語)』등을 말하는데, 유향(劉向) 부자에 이르러 비서(秘書)를 교정하는 중에 비로소 그것들의 귀함을 발견하였다. 유흠(劉歆)은 학관(學官)에서 이들 고문경을 가르치도록 건의하기 위하여 그 당시에 교육을 담당하던 태상(太常)으로부터 학관(學官)에서 글을 가르치던 박사(博士)들에게까지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태상과 박사들은 모두 그 당시 금문경학가(今文經學家)들이었기 때문에 유흠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유흠을 국도(國都)에서 추방시켰다. 이것이 바로 금고문의 싸움이 생긴 최초의 사건인 것이다. 고문경은 진나라 이전의 고주문자(古籀文字)로 쓰여진 것으로 한대(漢代)의 금문경(今文經)이 사용한 예서(隸書)에 비하여 비교적 오래된 것이다. 그러므로 고문경학가들은 고문경에 쓰인 글자로부터 중국문자의 근원과 그 법칙을 연구하여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유흠·정중(鄭衆)·가규(賈逵)에 의하여 육서(六書)의 조례(條例)는 더욱 그 연구가 성숙하게 되었다. 가규의 제자 허신에 이르러, 당시 '오경무쌍허숙종(五經無雙許叔宗)'이라는 이름을 떨치고 있던 그는 『고문경(古籀經)』·『사주편(史籀編)』·『창힐편(倉頡編)』과 정이고기상(鼎彝古器上)의 문자를 근거로 하여 중국 문자의 보전(寶典)이라고 할 수 있는 『설문해자』를 완성함으로써 육서를 중심 이론으로 한 중국 문자학을 확립하였다. 『설문해자』가 중국 문자학에 공헌한 바는 대략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육서의 이론으로써 중국 문자의 구조와 그 운용의 원칙을 설명하였다.
(2)고주와 전문에 의거하여 중국 문자의 근원과 변화의 관건을 파악하였다.
(3)문자의 본의를 설명하고 중국 문자의 가차와 인용의 기초를 수립하였다.
(4)문자의 전통을 존중하고 통인고철이 산발적으로 행하였던 문자의 해설을 집대성하였다.
(5)540부수를 만들어 내어 후세에 자서를 편배(編排)하고 검사하는 길을 열어 주었다.

『설문해자』 외에도 동한말년에 나온 대단한 문자학의 저작으로 유희(劉熙)가 지은 『석명(釋名)』이 있다. 이 책은 저자 개인의 관찰에 따라서 음훈(音訓)의 방법을 응용하고, 음이 가깝거나 또는 같은 문자로써 일사일물(一事一物)을 명명한 취의(取義)와 그 상(象)의 단서를 캐내었다. 비록 어떤 때는 우연히 맞은 경우도 있으나, 저자는 사물 명명의 근거를 충분히 추론하였고, 어근(語根)과 어사성(語詞性)과의 관계를 탐구하였으며 아울러 당시의 방언(方言)과 방언의 음을 이용하여 이를 증명하였으니 뛰어난 견해를 독창적으로 많이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 문헌>

지은이 임윤, 옮긴이 권택용,『중국문자학개설』, 형설출판사, 2002

[중국문자학개설]중국문자학의 발전3

박종민 기자
중국문자학개설 <18>

중국인의 문자 연구는 각종 문헌 자료에 의하면 주(周)나라 때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중국 문자 연구가 체계적인 하나의 학문으로 성립된 것은 동한(東漢) 때 『설문해자』를 지은 허신(許愼)이 나온 뒤부터라고 하겠다. 위ㆍ진(魏晉) 이후로 자형(字形)ㆍ자음(字音)ㆍ자의(字義)의 연구는 점차 발전의 방향을 달리하게 되었으며, 청대(淸代)에 들어서는 모든 연구가 이미 절정을 이루게 되었다. 이제 중국 문자학의 연구를 아래와 같이 4기(期)-창립시기, 확립시기, 발전시기, 전성시기-로 나누어 간략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3. 중국문자학의 발전시기

위ㆍ진(魏晉) 시대로부터 명말(明末)까지는 중국 문자학의 발전 시기로, 이 기간 중의 문자학은 이미 전문적인 연구의 추세가 보였다. 이에 자형ㆍ자음ㆍ자의 방면을 비롯하여 육서(六書, 한자를 만드는 여섯 가지 원리)의 이론에 이르기까지 모두 전문적인 저작이 나왔다. 이제 분별하여 아래와 같이 살펴보도록 하겠다.

자형학(字形學) 방면을 먼저 보면, 진(晉)나라 여침(呂忱)의 『자림(字林)』은 『설문해자』를 뒤이은 전문서로, 봉연(封演)의 『문견기(聞見記)』에 의하면 『자림』또한 540부(部)에다 글자 수는 12,824자로, 『설문』보다 3,000여자가 증가하였다. 자체가 예서(隸書)로 쓰여졌으며 『위서(魏書)』「강식전(江式傳)」에서는 "글씨가 바른 예서체(隷書體)를 얻었으되, 전서체(篆書體)의 본뜻과는 어긋남이 없다.[文得正隸, 不差篆意.]"고 하였는데, 그러나 이 책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남북조의 남진(南陳)시대에 고야왕(顧野王)이 지은 『옥편(玉篇)』30권이 있었는데, 이 역시 540부(部)로 나누었으나, 차례만은 『설문』과 약간 다르다. 수록된 글자 수는 16,917자로 대부분은 『설문』에 바탕을 두었는데, 『설문』이외에서 나온 글자들은 대부분 『삼창(三倉)』등의 책으로부터 베꼈다. 주해(注解)의 방면에서는 음(音)을 먼저 밝히고, 다음으로 증(證)ㆍ안(案)ㆍ광증(廣證)ㆍ체(體)의 순서로 대략 다섯 가지 예가 있었다. 그러나 아깝게도 『고일총서(古逸叢書)』에 영인(影印)되어 현재 일본에 보존되어 있는 원문은 10분의 1 또는 2에 불과하다. 그리고 『택존당본(澤存堂本)』ㆍ『조동정본(曹棟亭本)』ㆍ『건안정씨본(建安鄭氏本)』 또한 모두가 손강(孫强)의 증가본(增加本)이거나 약출본(略出本)이어서 주문이 대부분 삭제되어 버렸다.

당대(唐代)에 이르러 이양빙(李陽冰)은 전서(篆書)ㆍ주서(籀書)를 중흥시켜 『설문』을 간정(刊定)하고 늘 새로운 설을 제기하였다. 남당(南唐) 때 서현ㆍ서계 형제는 『설문』을 연구하였는데, 서계(徐鍇)는 『설문계전(說文繫傳)』을 저술하여 이양빙이 『설문』을 함부로 고친 점을 몹시 공박하였다. 그의 형인 서현(徐鉉)은 후에 송(宋)으로 돌아가 『설문』을 교정하였는데, 이것이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대서본설문(大徐本說文)』이다.

중국 문자는 예서에서 혜서(楷書)로 넘어오는 동안 서사방법(書寫方法, 글을 베끼는 방법)에 혼란이 생겼다. 안지추(顔之推)의 『안씨가훈(顔氏家訓)』「잡예편(雜藝篇)」에

"백(百)과 념(念)을 조합하여 우(憂)를 뜻하는 글자()를 만들고, 언(言)과 반(反)을 조합하여 변(變)을 뜻하는 글자(䛀)를 만들며, 불(不)과 용(用)을 조합하여 파(罷)를 뜻하는 글자(甭)를 만들고, 추(追)와 래(來)를 조합하여 귀(歸)를 뜻하는 글자()를 만들며, 갱(更)과 생(生)을 조합하여 소(蘇)를 뜻하는 글자(甦)를 만들고, 선(先)과 인(人)을 조합하여 노(老)를 뜻하는 글자()를 만들었는데, 이와 같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 경전(經傳) 여기저기에 가득하였다.[以百念爲憂, 言反爲變, 不用爲罷, 追來爲歸, 更生爲蘇, 先人爲老:如此非一, 徧滿經傳]"

이라 하였는데, 당시 북조(北朝)의 문자 혼란이 어떠하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리하여 『안씨가훈』「잡예편」에는

"정자(正字)를 따라 쓰자니 남들이 알아보지 못할까 겁이 나고, 속자(俗字)를 좇아 쓰자니 그것이 잘못된 글자라는 사실이 꺼림칙해 거의 글을 쓸 수 없었다.[從正則懼人不識, 隨俗則意嫌其非, 略是不得下筆也]"

라고 한탄한 기록이 있다. 이와같은 시대적 배경 밑에서 곧 속자학(俗字學)과 자양학(字樣學)이 나타나게 되었다. 전자의 대표작은 복건(服虔)의 저술로 알려진 『통속문(通俗文)』으로 당시의 속자를 전문적으로 수집한 것이다. 『안씨가훈』「잡예편」에서 "문장의 함의가 실로 합당하니 참으로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었음은 분명하다.[文義允愜, 實是高才.]"라 하였고, 또 "하북(河北) 지방 판본의 이 책(『통속문』)은 집에도 한 부 소장되어 있지만[河北此書, 家藏一本.]"이라고 하여 이 책이 널리 유포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후 왕의(王義)의 『소학편(小學篇)』, 갈홍(葛洪)의 『요용자원(要用字苑)』, 하승(何承)의 『천찬문(天纂文)』, 원효(院孝)의 『서문자집략(緖文字集略)』을 비롯하여 돈황(敦煌)에서 발견된 당나라 사람들의 『속무요명림(俗務要名林)』ㆍ『쇄금(碎金)』따위는 모두 이 계통에 속한다. 이 책들은 당시 전적(典籍)을 고증해 주는 점에서 물론 그 공은 있으나, 형체 방면에서 육서에 일치되지 않으며 정체가 아니기 때문에, 시대의 도태를 받아 대부분 흩어져 없어지게 되었다.

자양(字樣)의 학문은 그 목적이 혜서(楷書)의 필획(筆劃)을 확고하게 하는 데 있었다. 중요한 저작으로는 안사고(顔師古)의 『자양(字樣)』, 두연업(杜延業)의 『군서신정자양(羣書新定字樣)』, 안원손(顔元孫)의 『간록자서(干祿字書)』, 구양유(歐陽融)의『경전분호정자(經典分毫正字)』, 당 현종(玄宗) 개원(開元) 23년(서기 735)에 지어진 『개원문자음의(開元文字音義)』및 『개성석경(開成石經)』과 동시에 간행된 장참(張參)의 『오경문자(五經文字)』, 당현도(唐玄度)의 『구경자양(九經字樣)』등이 있는데, 모두 한 계통에 속한다. 후대의 조판(雕板, 목판, 금속판 등에 글 또는 그림을 조각하는 것)에는 모두 『개성석경』ㆍ『오경문자』ㆍ『구경자양』등의 자체를 기준으로 삼았으므로 1,200년래의 중국 자체는 '속(俗)'에 의해 흔들리지 않고 완전하게 통일되었는데, 이는 자양학의 공헌이라고 하겠다.

<참고 문헌>

지은이 임윤, 옮긴이 권택용,『중국문자학개설』, 형설출판사, 2002

瓢蟲

不朽의 古典에서 찾은 智慧와 心灵, 역사적 敎訓과 省察에서 옛글의 향기에 취해 사랑에 빠지게 되었음을 밝히는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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