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고의 타짜 원인손(어우야담 1)
어우야담(於于野譚)에는 다양한 재미있는 야사들이 담겨있는 책이다. 조선 최고의 스토리텔러(광해군 충신)이다. 1621년 광해군 때 어우당(於于堂) 유몽인이 암행어사로 전국을 다니면서 보고, 들은 야사와 향담을 모은 책이라고 하는데, 조선 수필의 백미로 손꼽힌다고 한다. 원본은 한문본 이자만 한글본도 함께 전해진다.
어우야담은 왕실과 사대부의 이야기부터, 백성들과 노비들의 고달픈 삶을 기록한 설화집 으로, 원래는 10여 권이었으나 유몽인이 모반죄로 (억울하게) 처형된 후, 일부가 소실되었다고 한다.
1964년에 유몽인의 후손인, '유제한이 필사본 등 30여 종의 이본을 보충'하여 어우야담을 새로 간행했다. 그러면서 어유야담은 유몽인이 죽은 이 후의 이야기도 (여러편) 실리게 된 것 이다.
1. 어유야담을 지은 유몽인(광해군의 충신) 에 대하여
유몽인은 전라도 고흥 출신으로, 초시, 복시, 전시에 모두 장원급제한 천재였다고 한다. 특히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던 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평양까지 호종했다.
광해군과 인연이 깊었는데, 그는 광해군의 세자시절 스승이었고, 광해군이 선조의 명으로 받를어, 분조(즉 임시정부)를 만들자 참여했다.
임진왜란 후, 암행어사와 관찰사, 대사성 등을 역임했고, 도승지(왕의 비서실장)에 임명되어 광해군의 즉위에 공헌했다. 하지만 광해군이 집권하면서, 승승장구 할지 알았지만, '이이첨 등 대북이 인목대비 폐비론 주장'에 반대하며, 낙향하여 ‘어우야담’ 등 을 저술하며 지낸다.
SBS드라마 '푸른바다의 전설'은 어유야담의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작품이었다. 그러나 막상 광해군을 쫓아낸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불사이군을 주장하며 광해군에 대한 절개를 지켰다.
이에 유응형이 ‘유몽인이 광해군의 복위를 꾀한다.’고 무고하여 체포된 후, 유몽인은 64세의 나이에 아들과 함께 억울한 죽음을 당한다.
2. 정조에 의해 복권이 되는 '유몽인'
정조는 재야에 은거한 두 거두인 김시습(세조에 반대하여 은거)과 유몽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한다.
어유야담 세트(워낙 책이 네임드라, 저자가 죽은 뒤에 일어난 사건들도, 수록이 되면서 내용이 늘어난다)
‘김시습이 웅장한 설악산과 같다면 유몽인은 화려한 금강산과 같다’
정조는 유몽인에게 의정(義貞)이라는 시호를 내라고, 이조판서를 추증하면서 그의 명예를 회복시킨다.
1832년 방계 후손들이 유몽인의 글을 모아 어우집(於于集)을 간행했다고 한다.
3. 어유야담에 등장하는 한국의 국수(國手 혹은 타짜)
원인손 元仁孫(1721 ~ 1774)은 이조, 병조판서를 지낸 원경하의 아들. 효종의 딸 숙경공주의 증손자였다고 한다.
당시 조선 최고의 명문가 출신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원인손이 영조 때 인물인 것으로 보아 그는,(원 저자)인 유몽인이 '어유야담집'에 넣은 인물이 아니라, 훗날 어유야담에 여러 이야기가 들어올 때, 같이 '타짜 우의정 원인손 의 일화'가 소개 된 듯 한다.
이 원인손 이란 인물이 너무 네임드적인 인물 인지라 글을 적어본다. (즉, 원인손은 '오리지날 어유야담' 에는 없는 인물인 셈 이다) 이 원인손은 ‘타짜 출신’ 임에도 무려 우의정이 된 인물이다. 한국역사 상 가장 출세한 타짜 라는 생각이 든다.
4. 이조판서 였던 아버지도 원경하도 포기한, 투전판의 왕자
원인손은 관직에 출사하기 전에는 투전판의 고수로 유명했으며, 그를 사람들은 이른바 국수(國手)라고 칭했다고 한다.
당시 이조판서 였던 아버지 원경하 로서는 아들의 행동에 대해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었는데, 비록 원인손이 타짜라고는 해도 머리도 좋았고, 학문에도 상당한 깊이가 있던 인재였기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원인손의 집안은 엄청난 명문가 였는데, 타짜가 나왔으니...)
원인손은 아버지 원경하 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한다.
‘노름을 끊으려고 해도 국수라고 소문나서, 여러 사람들이 도전하기 때문에 이를 거절하면 비겁하다고 나쁜소문을 냅니다’ 그러니 제 명예를 위해 어쩔수 없이 투전을 안할 수 없습니다.
결국 부친인 원경하는 원인손을 불러서 투전패 80장을 보여준 뒤 뒤집어 놓은 체, 원인손의 눈까지 가린 상태에서, 투전패를 알아 맞추어 보라고 한다.
투전 패를 못맞추면, 손을 자르겠다고 위협하는 '부친 원경하' 그리고 만약 틀리면 (원인손)의 손을 잘라 버리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원인손은 원경하가 뒤집어 놓은 패를(그것도 눈을 가린상태에서) 모두 맞춰 버린다. 아들 원인손의 투전 능력을 본 원경하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탄식한다.
‘투전능력도 하늘이 낸 재주요. 귀신의 지혜다’ 라면서 더 이상 원인손이 투전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고 한다.
5. 그러나 살인을 목격하고는 투전판을 떠나는 원인손
원인손은 그러나 결국 투전판을 깨끗이 떠나는데, 그 이유는 자신을 호종하던 집안의 머슴이 (일명 김서방) 자신이 투전을 하던 중, 옆의 다른 판에서 게임을 즐기다가 칼에 맞아 죽은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원인손은 완전히 투전을 끊고, 그 후에는 진짜로 학문에만 전념한다. '투전판 머리' 만 봐도 그가 보통 인물은 아니었으니...
30세에 사마시에 합격해 결국 출사를 했고, 33세에는 정식문과에 급제해 관직 생활을 시작한다. 그 후 명문가문 출신이라는 뒷배경에, 영조가 적극 추진하던 탕평책을 지지하면서 고속승진 열차를 탄다.
사간원 정언을 시작으로, 사헌부 지평과 홍문관 부흥교를 지낸 후에, 충주와 광주에 암행어사로도 나갔고, (국왕의 비서실장인) 승정원 도승지를 거쳐서 성균관 대사성, 사헌부 대사헌, 한성부 판윤을 지낸다. 그리고 ‘이조판서와 판의금사’를 지내다가 결국 52세에는 정승인 우의정이 되었다.
■ 조정의 모든 요직은 다 거친 셈 이었다. 그리고 정승이 된 후 2년 만인 54세에 사망을 한다.
원인손의 인생이 파란만장 하기는 하지만, 나름 ‘좋은 직책과 조선 최고의 타짜’ 까지 다 거친 셈이니, '방바닥과 키보드 만 박박 긁는 인생' 인 나로서는 부럽기는 하다.
원인손元仁孫(1721 ~ 1774)
조선의 인물. 자는 자정(子靜). 이조, 병조판서를 지낸 원경하의 아들. 효종의 딸 경숙옹주의 손자다. 우의정이라는 고위 관직까지 올랐지만, 투전에 뛰어난 타짜로 유명했다.
관직에 출사하기 전에는 투전판의 고수인 타자로 유명했으며, 그에 대한 일화로 여주의 주막에서 투전에 끼어들어 돈을 따가자 그의 실력을 보고 겨루던 사람들이 그를 알아봤다고 한다. 아버지 원경하가 노름판을 하는 것을 보고 꾸짖자 노름을 끊으려고 해도 국수라고 소문나서 여러 사람들이 도전하기 때문에 이를 거절하면 비겁하다고 나쁜 소문을 낸다고 했다. 원경하가 아무리 꾸짖어도 노름을 그만두지 않으니 아예 노름판에 못 나가게 하려고 후당에 가둬버렸는데, 거기서 병풍을 둘러치고 왈짜들을 불러모아 투전을 연구해서 타짜가 되어 나왔다고 한다(...).
실력이 어느 정도였냐면 원경하가 그 재주가 얼마나 뛰어난지 보겠다고 투전을 가져와서 섞은 뒤에 소매 속에 숨겼는데, 원인손은 정확히 그 위치를 알아챘고 원경하가 여러 차례 숨겨도 찾아냈고 투전패 80장을 보여준 뒤 뒤집어 놓으면 전부 다 알아 맞췄다고 한다. 그 재주를 본 원경하는 "이것은 하늘이 낸 재주요. 귀신의 지혜다"라면서 원인손이 투전하는 것을 막지 않았고 원인손은 매일 나가서 투전을 했지만, 투전판에서 싸움이 나서 칼에 맞아 사람이 죽은 사건이 일어나자 투전을 끊고 학문에 전념했다.
30세에 사마시에 합격해 음보로 출사했고 33세에는 문과에 급제해 관직 생활을 했으며, 탕평책을 지지했고 사간원 정언, 세자시강원 사서, 사헌부 지평, 홍문관 부흥교를 지냈다. 이후 충주, 광주에 암행어사로 나갔고 사복시정, 당상관, 승정원 동부승지, 승정원 도승지, 사간원 대사간, 성균관 대사성, 예조참의, 전라도관찰사, 사헌부 대사헌, 이조참판, 한성부 판윤, 이조판서, 판의금사를 지내다가 52세에 우의정이 되었다가 2년 후에 사망했다.
조선의 '국수'(國手, 타짜) 원인손(元仁孫, 1721~1774)은 명문가 출신으로 젊은 시절 투전에 능해 '국수'라 불렸으나, 이후 학문에 정진하여 이조판서, 우의정 등 고위 관직에 오른 인물로, 최고의 타짜가 타짜를 잡는다는 흥미로운 일화로 유명하며 『어우야담』 등에도 기록되어 있다.
주요 특징:
출신 배경: 효종의 딸 숙경공주의 손자로, 병조판서/이조판서를 지낸 원경하의 아들인 명문가 출신이다.
투전 실력: 투전(패놀이)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80장의 투전패를 한번 섞어 뒤집어놓고도 뒷면 그림을 다 맞혔다고 전해진다.
관직 생활: 정언, 지평, 이조참판, 병조판서 등을 거쳐 우의정까지 올랐습니다.
아이러니한 삶: 최고의 타짜였던 그가 관직에 오른 후에는 투전꾼들을 소탕하는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는 그의 삶을 더욱 극적으로 만든다.
기록: 『어우야담』 등 여러 기록에 등장하며, '하늘이 낸 재주', '귀신의 지혜'라 묘사되기도 했다.
요약: 원인손은 조선 후기 명문가의 자제였으나 투전판의 신기로 통하다가, 이후 재상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로, 투전과 관직 생활이라는 상반된 삶을 살았던 역사적 인물이다.
원인손(元仁孫, 1721년 ~ 1774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효종과 인선왕후의 딸 숙경공주의 손자로 병조판서와 이조판서를 지낸 원경하의 아들이다. 정언, 지평 등을 지내고 전라도관찰사와 대사간, 부제학, 대사성, 대사헌, 공조참판, 동지경연사, 우승지, 이조참판을 거쳐 도승지, 병조판서, 우참찬, 형조판서, 지경연사, 홍문관제학, 대사헌, 예조판서, 좌빈객, 이조판서 등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자는 자정(子靜), 시호는 문민(文敏), 본관은 원주(原州)이다.
일화
18세기 투전판의 타자(打子, 투전의 고수)였는데, 전설에 따르면, 투전목 80장을 한 번 보면 섞어 뒤집어놓아도 뒷면의 그림을 다 알아맞혔다고 한다.
그 아버지 원경하가 아들이 투전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투전을 하지 못하도록 후당에 가두었다. 그러자 원인손은 투전꾼을 불러모아 병풍으로 사면을 가리고 촛불을 켜놓고는 투전에 골몰했는데, 다른 사람의 투전패를 모두 읽어내는 그 탁월한 기량에 숨어서 몰래 지켜보던 원경하가 “이것은 하늘이 낸 재주이며, 귀신의 지혜다.”(此乃天生也, 神智也)라고 탄식하고는 다시는 금하지 않았다고 한다.
1. 개요
조선의 인물. 이조, 병조판서를 지낸 원경하의 아들. 효종의 다섯째 딸인 숙경공주의 손자이다.
2. 생애
30세에 사마시에 합격해 음서로 출사했고 33세에는 문과에 급제해 관직 생활을 했으며, 탕평책을 지지했고 사간원 정언, 세자시강원 사서, 사헌부 지평, 홍문관 부흥교를 지냈다. 이후 충주, 광주에 암행어사로 나갔고 사복시정, 당상관, 승정원 동부승지, 승정원 도승지, 사간원 대사간, 성균관 대사성, 예조 참의, 전라도 관찰사, 사헌부 대사헌, 이조 참판, 한성부판윤, 이조판서, 판의금부사를 지내다가 52세에 우의정이 되었다가 2년 후에 사망했다.
3. 야사
우의정이라는 고위 관직까지 올랐지만, 소싯적에는 투전에 뛰어난 타짜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에 대한 일화로 여주의 주막에서 투전에 끼어들어 돈을 따가자 그의 실력을 보고 겨루던 사람들이 그를 알아봤다고 한다. 아버지 원경하가 노름판을 하는 것을 보고 꾸짖자 노름을 끊으려고 해도 국수라고 소문나서 여러 사람들이 도전하기 때문에 이를 거절하면 비겁하다고 나쁜 소문을 낸다고 했다. 원경하가 아무리 꾸짖어도 노름을 그만두지 않으니 아예 노름판에 못 나가게 하려고 후당에 가둬버렸는데, 거기서 병풍을 둘러치고 왈짜들을 불러모아 투전을 연구해서 타짜가 되어 나왔다고 한다(...).
실력이 어느 정도였냐면 원경하가 그 재주가 얼마나 뛰어난지 보겠다고 투전을 가져와서 섞은 뒤에 소매 속에 숨겼는데, 원인손은 정확히 그 위치를 알아챘고 원경하가 여러 차례 숨겨도 찾아냈고 투전패 80장을 보여준 뒤 뒤집어 놓으면 전부 다 알아맞혔다고 한다. 그 재주를 본 원경하는 "이것은 하늘이 낸 재주요. 귀신의 지혜다"라면서 원인손이 투전하는 것을 막지 않았고 원인손은 매일 나가서 투전을 했지만, 투전판에서 싸움이 나서 칼에 맞아 사람이 죽은 사건이 일어나자 투전을 끊고 학문에 전념했다.
책과세상/ 다산과 연암, 노름에 빠지다 '조선 투정꾼이 우의정에?'
‘윗말 최소사집 윗방에서는 희미한 석유 등잔 밑에 네 사람이 상투를 마주 모으고 앉았다. …“자들 까라고.” “서시(여섯끗).” 돌쇠는 성선이 앞에 놓인 돈을 좍 긁어 들였다.
완득이가 석 장을 까놓는 것이 일육팔 진주(다섯끗)였다. “난 일곱끗이야” 하고 응삼이도 석 장을 까놓으며 머리를 긁는데 돌쇠는 거침없이 응삼이 앞에 놓인 돈도 소리개가 병아리 움키듯 집어 들이면서 “청산만리일고주(靑山萬里一孤舟) 칠칠오 돗대 갑오(아홉끗) 흔들거리고 떠온다.” 툭 제끼는데 그것은 분명히 오칠칠 갑오였다. 응삼이는 두 눈이 툭 벌거졌다.’
소설가 이기영이 1935년 발표한 ‘서화(鼠火)’에는 당시 투전(鬪錢)판의 모습이 눈에 잡힐 듯 하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이나 나도향의 ‘뽕’처럼 당시 소설은 이런 노름판 풍경이나 노름꾼을 작품의 에피소드나 캐릭터로 흔하게 다뤘다. 예나 지금이나 노름은 생활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고, 생활사의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별로 조명된 적은 없지만).
유승훈(36) 부산시립박물관 학예연구사가 쓴 ‘다산과 연암, 노름에 빠지다’는 아마도 고금의 우리 문화 속에 나타나는 도박의 역사를 통사적으로 정리한 최초의 저작물이 아닐까 싶다.
문화사나 민속사 연구는 갈수록 더 구체적인 주제를 지향하지만, 어쩐 일인지(특히, 대중적인 관심사를 고려한다면 의아할 정도로) 노름을 본격으로 다룬 경우는 드물었다. 책이 빈틈없이 완정한 체계를 갖추었다거나 밀도 높은 자료 수집으로 빛난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시도만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기에 충분하다. 이 책은 출판사에서 의미 부여한대로 한국사 속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들의 발견’이다.
책은 우선 멀리 신라시대부터 현대까지 우리 민족이 어떤 노름을 즐겼고, 기록으로 남아 있는 노름과 관련된 사건들은 어떤 것이 있는지 살피고 있어 흥미롭다. 노름이란 원래 승패를 가리는 놀이에서 출발했다고 보는 관점까지 포함, 저자는 놀이 문화 중에서도 우연을 이용해 즐기는 것까지도 이 범주에 포함했다.
신라 시대 최상류 귀족들의 연회장이었던 경주 안압지에서 발견된 주사위는 당시의 놀이 문화가 지금과 별로 다를 게 없다는 점에서 놀라울 정도다. 1975년 찾아낸 이 목제 주사위는 4각형이 6면, 3각형이 8면인데 각 면에는 벌칙일 것으로 추정되는 문구가 새겨 있다.
술 세 잔 한 번에 마시기(三盞一去), 혼자 부르고 혼자 마시기(自唱自飮), 노래 없이 춤추기(禁聲作儛), 시 한 수 읊기(空詠詩過), 얼굴 간질여도 꼼짝 않기(弄面孔過) 등이다. 고려에서 조선 초까지 유행했던 격구(擊毬)도 내기를 걸었던 까닭에 단순한 운동 경기가 아니라 도박으로 이어지기가 단사였다. 유 학예연구사는 “당시 유흥 풍속과 놀이 문화의 발전은 귀족 계급의 성장과 무관하지 않다”며 “계급의 분화, 귀족 문화의 발전, 통치 계급의 부패 등이 도박이 발전하는 원인”이라고 풀이했다.
너댓 명이 둘러앉아 말판이나 종잇장을 들고 돈따기를 목적으로 벌이는 본격적인 노름은 조선 시대부터 유행했다. 주사위 두 개를 던진 뒤에 나온 수만큼 말을 움직여 승부를 가리는 쌍륙(雙六), 조선 후기 도박꾼을 사로 잡았던 투전, 일제 강점기 이후 지금까지 우리 생활에 깊이 뿌리내린 화투는 가볍게 즐기면 놀이고, 돈이나 재물 따위를 걸고 승부를 다투면 진짜 도박이다.
당대를 풍미했던 이런 노름은 모두 단순한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판에 끼어드는 사람의 관심이 거기에 거는 돈이니까 복잡해 봐야 머리만 아플 뿐이고, 승부가 간단하게 나면 판이 빨리 돌아서 또 좋은 법이다.
에피소드가 많다. 조선 성종 21년(1490년)에는 태조와 태종, 왕비의 위폐를 모신 사당인 문소전(文昭殿)의 종들이 술내기로 쌍륙을 하다가 싸움이 나 불이 난 사건이 있었다. 요즘 ‘타짜’에 해당한다고 할 18세기 투전의 국수(國手)는 원인손(1721~1774)이다. 예조판서 원인하의 아들인 인손은 소싯적에 투전에 빠졌지만 이후 우의정까지 지내 당시는 물론이고 그 이후로도 투전꾼들의 추앙을 받은 인물.
하루는 아버지가 아들의 재주가 어느 정도인가를 시험해 보려고 투전패 중 인장(人將)을 몰래 감추고 나머지 투전패만을 쥔 채 그 중에서 인장을 뽑지 못하면 매질하겠다고 호통을 쳤더니, 패를 이리 저리 만져 본 인손이 “이 속에는 인장이 없습니다”고 했다고 한다. 다산 정약용은 한 편지글에서 기생들과 노름을 벌여 3,000전을 뿌리며 논 이야기를 했고, 연암 박지원은 편지를 쓰다 문장이 막히면 혼자서 왼손과 오른손을 양편으로 삼아 쌍륙을 쳤다고 한다. 을사오적의 한 사람인 이지용은 나라 판 돈으로 한꺼번에 수만 원씩 판돈을 건 ‘희대의 화투 대왕’이었다.
책 끝에서 저자는 도박에 얽힌 ‘흥미로운 일상의 역사’를 복원한다는 당초 취지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수많은 도박꾼들로 법석거리’로 세상에 한 마디 메시지를 던진다. 저자는 “현대에 들어서는 도박의 시장이 국가 권력의 용인 하에 비대해지고 있으므로 그 위험성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는 마당”이라며 “도박으로 인한 폐단 역시 개인의 문제이기보다는 엄연히 사회적 문제”라고 환기했다. l 김범수기자
우의정 <원인손>의 글
작성자: 비오
※이 글은 2010년 11월 19일에 본 카페에 연구자가 올린 글이다.
※사진은 연구자가 우의정 <원인손>묘를 종손과 함께 참배하고 직접 촬영한 것이다.
※여주 상구리에는 우의정 <원인손>의 종손이 건재하고 있다. 교지를 도난당했다고 하는 부산에 계시는 분은 우의정 <원인손>의 종손은 아닌 것이 틀림 없으나, 우의정 <원인손>의 후손 여부는 확인 중에 있다.
※여주 상구리의 우의정 <원인손>의 종가에는 <원인손>의 교지가 14장이나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이 14장 가운데 우의정 교지가 있는지는 확인해 봐야 한다고 한다. 그동안 우의정 <원인손>의 유품이 많이 분실 되었다고 한다.
※당연히 종가에 있어야 할 교지가 왜 부산까지 내려와 있는지? 그 경위에 대해서는 확인 중에 있다.
朝鮮時代 원주원씨 華閥 名文家를 찾아서①
<원지연>종손 <원종극>종사연구원회 고문 <원종석> 연구자(필자)
원주원씨의 최고 화벌 명문가인 여주 북내면 장암리 상구리 원주원씨 종가를 찾아갔다.
2010년 11월 17일(음력 10월 12일) 좌의정<元斗杓>의 세일사가 있는 날이다.
제례에 참례하고 <淑敬公主>묘소를 참배하였다. 興平君<元夢麟>과 <淑敬公主>의 묘 앞에서 기념 촐영을 하였다.
조선시대에 왕실과 혼인을 한 예는 이 묘가 유일합니다. <貞純王后>와 더불어 원주원씨는 왕실과 혼인을 했으니 화벌 명문가로 부상했습니다.
서울시 서기관으로 근무하다가 퇴임후 고향에 내려와 선조의 묘를 지키고 있다.
시중공계의 족보를 처음 만드신 蒼霞公<元景夏>의 九世孫이다.
효종의 다섯 번째 공주인 淑敬公主와 혼인하여 효조의 부마가 된 興平君<元夢麟>의 11세손이 된다.
灘雲<元鍾極>종사연구위원회 고문(향년 86세)
忠翼公<元斗杓>의 12세손(직계 후손), 육군 중령으로 예편, 1985년 ≪乙丑譜≫편찬위원회간사장이셨고, <原陵君>에 대한 교과서 오기 수정, 묘소조성 등 <原陵君> 살리기에 실질적으로 최일선에서 분투하신 분이다.
서예에 조예가 깊어 시중공계 설단비문, <原山君> 비문, <參判公> 비문, <葛豊齊> <蘇山祠> 등의 현판의 글씨를 쓰신 분이다.
備悟 <元鍾石> 연구자(필자) 이다.
원주원씨 화벌 명문가
원주원씨(原州元氏)의 위세는 인조 때를 고비로 다시 떨치게 되었는데, 그 주인공은 좌의정을 지낸 <원두표(元斗杓)>이다. 그는 인조 반정에 가담, 공을 세위 정사공신(靖社功臣)에 책록되고 전라도관찰사·형조판서·경상도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현종 때 좌의정에 올랐다. 그의 아들 <원만리(萬里)>·<원만춘(萬春)>이 모두 음보로 벼슬에 올랐는데, <원만리>는 현종 때 평안도관찰사, <원만춘>은 숙종 때 한성부우윤을 지냈다.
<원만리>의 아들 <원몽린(夢麟)>은 효종의 부마가 되어 도총관을 지냈고, 손자 <원경하(景夏)>는 영조 때 정시문과에 장원, 이조·병조 판서를 역임하였다. 또 <원경하>의 큰아들 <원인손(仁孫)>은 영조 때 우의정을 지냈으며 작은아들 <원계손(繼孫)>은 당대의 명필로서 <이언진(李彦瑱)>의 시 <임비남(任芾男)>의 그림과 함께 삼절(三絶)로 일컬어졌다. 이로서 시중공계(侍中公系)는 정승(政丞)을 두 분이나 배출한 화벌(華閥) 명문가(名文家)로 부상(浮上)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원주원씨 화벌명문가를 찾아서③
본관 원주(原州). 자 자정(子靜). 시호 문민(文敏). 1740년(영조 16) 진사시에 급제,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가 되었다. 1753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 사서(司書) 등을 지냈다. 그뒤 부응교(副應敎) 때 《천의소감(闡義昭鑑)》 편찬에 참여한 뒤부터 영조의 총애를 받았다. 1765년 이조참판 때 《어제독서록(御製讀書錄)》 《연대고(年代考)》를 교정(校正)하였다. 1769년 왕명에 따라 울릉도의 형승(形勝)과 물산을 그려서 바쳤습니다. 1772년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다.
18세기 투전판의 타자(打子, 투전의 고수)였는데, 전설에 따르면, 투전목 80장을 한 번 보면 섞어 뒤집어놓아도 뒷면의 그림을 다 알아맞혔다고 한다. 그 아버지< 원경하>가 아들이 투전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투전을 하지 못하도록 후당에 가두었다고 한다. 그러자 원인손은 투전꾼을 불러모아 병풍으로 사면을 가리고 촛불을 켜놓고는 투전에 골몰했는데, 다른 사람의 투전패를 모두 읽어내는 그 탁월한 기량에 숨어서 몰래 지켜보던 <원경하>가 “이것은 하늘이 낸 재주이며, 귀신의 지혜다.”(此乃天生也, 神智也)라고 탄식하고는 다시는 금하지 않았다고 한다.
강명관 (2004년 1월 5일). 〈투전 노름에 날새는 줄 몰랐다 | 도박〉, 《조선의 뒷골목 풍경》, 초판 12쇄, 서울: 푸른역사. ISBN 89-87787-74-5
비문은 집자한 것이라 합니다. 이 곳 원주원시세묘지에는 이와 같이 집자하여 각자한 비석이 많다고 한다.
『안말 뒤쪽의 원주원씨세장지에 있다. 원인손은 충문공 원경하의 아들로, 1753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여러 벼슬을 거쳐 1772년(영조 48) 우의정까지 역임했다. 부친인 원경하의 탕평책을 계승하여 영조의 신망을 얻었고 성격이 강직하여 매사를 공정하게 처리하였다.』
『부인 남씨(南氏)와의 합장묘로 조성되었다. 봉분 주위로 혼유석(魂遊石),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 고석(鼓石), 망주석(望柱石)이 배치되어 있다. 묘역 좌우에 자리 잡은 망주석은 높이 237cm, 폭 50cm, 두께 50cm로 규모가 크며 문양은 없지만 주신(柱身)에 매달린 세호(細虎)가 뒤를 돌아보는 모습이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봉분 오른쪽에 있는 묘표는 높이 228cm이며 보존 상태가 좋다. 오석으로 비신을 만들었고 앞면에 새겨진 큰 글씨는 중국 송(宋)나라의 명필 소식(蘇軾)의 해서체 글씨를 집자했다. 나머지 비문은 이조판서 황경원(黃景源)이 짓고 중국 당(唐)나라의 명필인 저수량(褚遂良)의 글씨를 집자하였다. 원인손이 죽은 1774년(영조 50)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원인손묘 [元仁孫墓 ] | 네이버 백과사전
2010년 11월 19일
연구자 비오 글올림
역사와 함께 문화와 함께
난신적자(亂臣賊子)
조성문
난신적자(亂臣賊子). 나라를 어지럽히는 불충한 신하와 부모의 뜻을 거역하는 불효자식이란 뜻으로 세상을 살아가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천하의 몹쓸 사람이나 역적의 무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출전은 맹자(孟子) 등문공하.
맹자의 제자인 공도자(公都子)가 맹자에게 물었다. “외부 사람들이 모두 선생님은 논쟁을 좋아하신다고 일컬으니 감히 여쭙건대 무슨 까닭입니까?” 맹자가 말하기를 “내가 어찌 논쟁을 좋아하겠는가? 내 마지 못해서이니라. 천하에 사람이 생긴 지 오래 되었으니 한 번 다스려지면 한 번 어지러운 법이다. …세상이 쇠하여 지자 정도(正道)가 혼미하여 사설(邪說)과 폭행(暴行)이 일어나니 신하로서 임금을 죽이는 자가 있고 자식으로서 아버지를 죽이는 자가 있었다. 공자께서 두려워하시어 춘추(春秋)를 지으시니 춘추는 천자의 일이라, 이런 고로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알아 줄 자도 춘추요 나를 죄 줄자도 춘추라’ 고 하셨다. 성군의 도가 흥하지 않으니 제후가 방자해지고, 선비들이 제멋대로 의논하여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의 말이 천하에 가득하였다. 천하의 말이 양주에게 돌아가지 않으면 묵적에게로 돌아간다. 양씨는 나만을 위하니 이것은 임금이 없음이요, 묵씨는 친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를 두루 사랑하니 이것은 아비가 없는 것이니, 아비가 없고 임금이 없는 것은 금수이다. 공명의(公明儀)가 말하기를 ‘푸줏간에 살진 고기가 있고 마굿간에 살진 말이 있음에도 백성이 주린 빛이 있으며 들에 굶어 죽은 시체가 있다면 이것은 짐승을 몰아다 사람을 잡아먹게 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으니 양묵의 도가 그치지 않으면 공자의 도가 드러나지 않을 것이요 이것은 간사한 말이 백성을 속이고 인의(仁義)를 꽉 막아버림이다. 인의가 막히면 즉 짐승을 몰아다 사람을 잡아먹는 것이요 장차 사람끼리 서로 잡아먹게 되는 것이다. 내가 이것을 두려워하여 선성(先聖)의 도를 지키고 양묵의 도를 막아서 음탕한 말을 몰아내며, 간사한 말을 하는 자가 일어나지 못하게 함이니, 그 마음에서 일어나 그 일을 해치고 그 일에서 일어나 그 정치를 해칠 것이다. 성인이 다시 일어나셔도 나의 말을 바꾸지 않으시리라. 옛적에 우(禹)임금이 홍수를 막으니 천하가 태평해졌고 주공(周公)이 오랑캐를 아우르고 맹수를 몰아내니 백성들이 편안해졌으며 공자께서 춘추를 완성하니 나라를 어지럽히는 신하와 어버이를 해치는 자식들이(亂臣賊子) 두려워하게 되었다. …나도 인심을 바르게 하여 간사한 말을 없애며 비뚤어진 행실을 막으며 음란한 말을 몰아내어 세 성인을 계승하고자 하는 것이니 어찌 논쟁이 좋아서 하겠는가? 부득이해서 그런 것이니라. 능히 양묵을 막는다고 말하는 자는 성인의 무리인 것이다”하였다.
1755년(영조 31) 5월 29일. 집의 서명응, 지평 원인손이 연명(聯名)하여 차자를 올리기를, “난신적자(亂臣賊子)가 어느 시대엔들 없었겠습니까만, 어찌 오늘날 같이 흉한 역적이 있겠습니까? 주륙(誅戮)의 법은 한때에 행하는 것이지만, 군주의 위엄은 백세를 두렵게 하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국가에서 난적(亂賊)을 제거하는 데에 있어 처음에는 형장(刑章)으로 간귀(奸?)를 죽이고, 나중에는 간책(簡策)에다 그 역절(逆節)을 밝혔으니, 이것이 성인이 《춘추(春秋)》를 지은 까닭입니다. 아! 통분합니다. 이번의 흉역은 지난 사첩에 없던 바로서 대개 신축년·임인년에 싹이 터서 무신년에 화란이 빚어져 오늘날에 이르렀습니다. 갖가지 귀역 같은 일을 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조태구·유봉휘는 김일경·목호룡의 근본이 되었고, 박필몽·심유현은 신치운·박사집의 마음과 관통되었습니다. 그 효경과 같은 성품과 사갈(蛇蝎) 같은 마음이 아래로는 부리에서 부리가 생기고 위로는 가지에서 가지가 뻗어 30년 동안 만연되고도 아직 그치지 않고 있으니, 이는 실로 《주역》의 이른바 ‘일조일석(一朝一夕)에 이루어진 까닭이 아니요, 그 유래가 점차로 된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다행히 이제 하늘이 우리 동방을 도와 과단성 있는 결단을 하시어 역모와 흉계가 저절로 천벌을 받고, 난령 요요(亂領妖腰)들이 모두 나라의 형벌을 받았으나, 참으로 그 난(亂)의 근본을 제거하고 역적의 싹을 드러내어 책자로 만들어 《춘추》 무장(無將)의 주륙을 엄중히 하지 않는다면, 어리석은 신들은 일종의 흉얼이 몰래 일어나 장차 소멸되어 꺾이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생각하고 멀리 내다보시어 빨리 사신(詞臣)에게 명하여 국(局)을 열어 전후 난역(亂逆)의 원류를 찬술하고, 주토(誅討)의 전말을 자세히 기록해 갖추 싣도록 하소서. …” 하였다.
원인손(元仁孫 1721 - 1774) 본관은 원주(原州). 시호는 문민(文敏). 1753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다. 젊은시절 조선의 국수(國手)라 불릴 정도로 이름난 노름꾼이었다. 묘는 대신면 상구리(上九里)에 있다.
조선 최고 타짜의 타짜소탕 사연
스포츠동아
조선시대 성균관 유생인 원인손은 효종의 딸 숙경옹주의 손자이자 예조판서를 지낸 원경하의 아들이다. 31세에 정시 장원에 급제하고 최고 행정기관인 의정부를 이끈 삼의정 중 하나인 우의정에 오른 인물이다. 이런 그가 과거 특이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돼 눈길을 끈다.
어린 시절 원인손은 잡기에 능한 것으로 유명했다. 우연한 기회에 노름판에 발을 들이고 투전의 고수가 된 후 ‘국수’(國手)라 불렸다. 밤낮없이 투전에 빠져 살며 투전꾼들에게 추앙 받기까지 했다. 이랬던 그가 갑자기 학문에 열중해 우의정에 올라 투전꾼을 소탕하기 시작했다.
조선 최고의 ‘타짜’가 ‘타짜’를 잡게 된 사연이 밤 11시 공개된다.
정의
조선 후기에, 이조참판, 이조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자정(子靜). 원몽린(元夢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목사 원명구(元命龜)이다. 아버지는 예조판서 원경하(元景夏)이며, 어머니는 예조판서 신사철(申思喆)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50년(영조 26) 진사시에 합격하고, 1752년(영조 28)에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세마(洗馬)가 되었다. 1753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가 되고, 정언(正言)·사서(司書) 등을 역임하였다. 홍문관부응교(弘文館副應敎) 재임시 『천의소감(闡義昭鑑)』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이조참판·이조판서 등을 거쳐 1772년에 우의정에 이르렀다. 아버지의 대탕평(大蕩平)의 뜻을 받아 편당에 기울어지지 않아, 영조의 총애를 받았다. 성격이 공평하고 정직하여 전주(銓注)나 고시(考試)를 공정하게 하였으며, 세자시강원찬선(世子贊善) 송명흠(宋明欽)이 억울하게 관직이 추삭됨을 보고 임금에게 직간하여 송명흠을 복구시켰다.
사장(詞章)에 능하여 1765년 이조참판으로 재직시, 서명응(徐命膺)과 함께 『어제독서록(御製讀書錄)』과 『연대고(年代考)』를 왕명으로 교정하였다. 1769년(영조 45) 역시 왕명으로 울릉도의 지세와 물산을 그리고 조사하여 바쳤다. 시호는 문민(文敏)이다.
참고문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