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루몽은 왜 중국 고전문학의 백미라 하는가?

 홍루몽은 왜 중국 고전문학의 백미라 하는가?                                                                           

图片来源 | 红楼梦

홍루몽(紅樓夢)은 청나라 건륭제 시기의 작가인 조설근이 쓴 고전소설이다. 등장인물만 721명에 달하며 등장인물들의 세밀한 묘사로 청나라 시대의 대표적인 걸작소설로 칭송받고 있으며 100여 차례 간행되었고 30여 종의 후속편들이 나왔을 만큼 중국에서 크게 인기를 끈 국민적인 고전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홍루몽이 삼국지와 서유기, 수호전에 비해 인지도에 밀리지만 많은 중국 학자들도 홍루몽에 대해 연구해 "홍학"(홍루몽학)이란 말까지 생겨났을 정도다. 홍루몽은 문학적 가치, 예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중국 고전소설의 정점으로 평가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홍루몽을 금병매를 제외시킨 '사대명저'의 하나로 친다.

소설의 제목인 '홍루몽(紅樓夢)'의 뜻을 직역하면 붉은 누각의 꿈이다. 紅樓는 홍등가를 의미하는 게 아니고 중국의 전통 문화에서 여성이 거주하는 구역을 일컫는 말이며 작중에서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여성의 비율이 높다. 소설의 내용과 주제를 잘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제목의 유래에 대해서는 조설근이 소설의 도입부에서 언급하였는데, 가장 먼저 언급된 제목인 <석두기>는 주인공인 가보옥이 여와가 쓰다가 남은 돌의 화신인 것에서 유래되었으며 <정승록>은 속세의 정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다는 의미에서 유래되었다. 그 다음으로 언급된 <풍월보감>과 <금릉십이차(금릉십이채)>는 각각 작중에서 언급 및 등장한 보물 및 등장인물들을 의미하며, 최종적으로 확정된 제목이 <홍루몽>이라고 서술되어 있다. 또한 청대에 일시적으로 홍루몽이 금서로 지목되었을 때는 <금옥연>이라는 제목으로 유포되기도 했다.

홍루몽의 판본은 80회본과 120회본의 두 가지 버전이 있는데 1791년 정위원이 기존의 80회본에 고악이 쓴 40회본을 결합해서 120회본으로 간행한 것이 "정갑본"이고, 이듬해에 이 120회본을 개정한 것이 "정을본"이라 한다.

활자본으로 출간되기 이전에는 필사본의 형태로 유포되었는데, 문제는 작가인 조설근이 원고가 출간되기 전에 사망해 버려서 시간이 지나면서 조설근이 최초로 작성한 원고 중 유실된 부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를 보다 못한 정위원은 지인인 고악(1763~1815)에게 흩어진 필사본의 내용을 수집, 보완해 줄 것을 요청하게 되었고 1791년과 1792년에 거쳐 '홍루몽'이라는 제목이 붙은 120회본 소설로 출간되었다.

고악은 자신이 쓴 후반부가 조설근의 원고를 참고하여 '복원'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비록 고악이 진시를 통과하고 한림원에 들어가기도 할 정도의 정통 한학자이지만 그래도 진실은 알 수 없다. 조설근이 쓴 80회본까지만 읽었을 때 소설의 주제의식이 더욱 명확해진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 조설근이 쓴 부분까지만 읽으면 이야기가 덜 끝난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에 당시에도 수많은 자칭 후속편 동인지들이 나돌았는데, 정위원이 그 가운데 가장 작품성 있는 고악의 버전을 공식 후속편으로 '지정'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활자본으로 출간되기까지의 기간 동안 유실된 내용이 많았던 탓에, 2006년에는 중국에서 고악이 후반부 40회의 내용을 변개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기사 링크 그러다가 최근에는 고악과 정위원 이전에 이미 120회본 홍루몽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데다가 조설근의 판본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여러 종류가 드러남으로써 어느 쪽이 '원본'인지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홍루몽의 줄거리는 오늘날의 난징인 금릉을 기원으로 한 부유한 가(賈)씨 가문에서 벌어진 여러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이야기는 영국공(榮國公) 가사의 동생인 가정의 차남 가보옥(남자 주인공)과 똑똑하지만 몸이 약한 가보옥의 고종사촌 임대옥, 그리고 건강하고 가정적인 이종사촌 설보채의 세명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가씨 가문은 녕국공(寧國公)과 영국공(榮國公)이라는 두 개의 공작위를 받은 개국공신 형제의 후예이며 다른 유력가문인 사(史)씨, 설(薛)씨, 왕(王)씨와 인척관계를 맺으며 번성하였다. 하지만 본편 시점에 이르러서는 황제의 귀비가 된 가보옥의 누나 가원춘의 친정 나들이를 위해 엄청난 규모의 원림인 대관원을 신축한데다 4대 가문에 속한 가문원들의 지나친 사치, 주색잡기를 포함한 각종 폭정들[7]로 인해 가세는 점점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녕국공 가경은 불로장생법에 매달려 경조사를 제외하면 도관에서 생활하다가 수은중독으로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인 가진 및 가진의 손자인 가용, 영국공 가사, 가사의 아들 가련은 모두 주색잡기와 사치에 몰두하는 쓸모없는 이들이었다. 가사의 동생인 가정은 그나마 관직 생활을 하는 등 상대적으로 정상적인 편이었으나, 관직 생활로 인해 지방과 중앙을 전전하느라 집안일에 신경쓸 여력이 없어서 조카인 가련에게 집안일을 위임했고 결과는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 남성 가문원들이 대부분 무능력하였던 탓에 영국공 가사의 어머니인 사태군(가모)과 손자며느리인 왕희봉, 가사의 동생 가정의 정실인 왕부인(가보옥의 어머니) 등이 4대 가문의 세력을 어떻게든 유지하고 있었으나 결국 쇠퇴를 막지 못했다.

가보옥은 본래 신화 시대에 여와가 축융, 공공의 싸움으로 인해 구멍이 뚫린 하늘을 복구하기 위해 쓰다가 남은 돌이 오랜 세월을 거치며 선계에서 인간의 생활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지나가던 신선에게 부탁을 하여 입에 구슬을 물고 태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총명한 인물이었으나 유학과 입신양명에는 전혀 뜻을 두지 않고, 또래 소녀들과 어울리기만을 즐긴 탓에 부모의 걱정거리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가보옥의 조모인 사태군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가보옥을 총애하였다.

임대옥은 돌이 가보옥으로 태어나기 전에 신영시자라는 인간의 모습으로 변화하여 선계를 돌아다니던 중 물을 주었던 풀인 강주초의 화신으로, 물을 머금은 끝에 인간의 형상을 갖추게 되었으나 신영시자는 이미 인간계에서 다시 태어났기 때문에, 풀이었던 자신도 그 은혜에 보답하기위해 인간계로 내려오게 되었다. 그녀는 무남독녀였고 어머니인 가민이 사망하자 관직 생활을 하던 아버지에 의해 외가인 가씨 가문에 의탁하였으며, 시 짓기와 음악에 대한 재능을 갖춘 미소녀였으나 병약한 탓에 신경질이 잦고 앓아눕는 날이 많았다.

설보차(설보채)는 가보옥과는 이종사촌지간으로 어릴 때 지나가던 스님으로부터 받은 문장이 적힌 금목걸이를 항상 착용하였는데, 가보옥이 태어날 때 입에 물고 태어났던 구슬에 새겨진 문장과 서로 대구를 이루고 있었고 두 명이 서로 인연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임대옥을 불안하게 하였다. 또한 차분하고 단정한 외모와 성격을 갖추고 있어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황제의 후궁이 되어 귀비의 봉호를 받은 가원춘은 특별허가를 얻어 친정을 방문하였는데, 대관원의 모습을 보고 빈 공간으로 두기 아깝다고 여겨 가보옥 등에게 대관원에 거주할 것을 명하였고 가보옥은 임대옥, 설보차와 또래 소녀들과 함께 대관원 안에 각각 거처를 두게 되어 시와 노래를 짓거나 책을 읽으며 단란한 시절을 누렸다.

나이를 먹게 되자, 가보옥은 설보채에게도 일정한 호감이 있긴 했지만 임대옥과의 결혼을 더 원했다. 그러나 병약한 임대옥을 탐탁치않게 여긴 가보옥의 할머니 사태군은 임대옥보다는 설보차가 신부감으로 어울린다고 생각했고, 여기에 왕희봉과 왕부인이 동조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갖고 다니던 구슬 통령보옥이 돌연히 사라지는 사건이 일어나 가보옥은 망연자실한 상태가 되어 버렸고, 귀비 가원춘도 같은 시기에 병사하였다. 이에, 사태군 등은 불길한 기운을 액땜한다는 명분으로 가보옥과 설보차의 혼인을 강행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가보옥의 측근 시녀였던 화습인을 통해 임대옥에 대한 감정이 보통 것이 아님을 알게 되자, 왕희봉은 가보옥에게는 신부가 임대옥이라고 거짓말을 한 뒤 설보채와 결혼시킨다. 가보옥이 설보채와 결혼한 날, 임대옥은 결국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고 나중에서야 모든것을 알게된 가보옥은 엄청난 충격으로 인한 허탈상태에 빠져 방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문원들의 폐단이 겹친 결과 가씨 가문은 공작위들과 재산을 몰수당하면서 몰락해 버렸고 가보옥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조카와 함께 과거에 응시, 급제하였으나 응시장을 떠난 후 실종되어 버렸다. 이후 가보옥은 아버지 가정과 비릉의 나루터에서 재회하지만 가보옥은 한마디 말도 없이 목례만을 한채 승려와 도사의 무리들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마지막에 진비는 낙향하는 가화와 함께 이야기를 몇 마디 나누고 아이를 낳자마자 죽은 딸 영련의 영혼을 천계로 보낸 뒤 망망대사와 묘묘진인과 함께 이야기를 끝마친다. 후일담에 보차는 보옥의 아들을 홀로 키우며 수절하고 있다고 한다.

『홍루몽』은 조설근이 호사스러운 생활과 궁핍을 거치면서 인간과 세상을 통찰한 후에 경험을 바탕으로 재능과 역량을 기울여 완성해낸 걸작이다. 이 작품은 부귀영화를 누리던 귀족 가문이 몰락해가는 과정을 그려냈는데 다양한 성격, 외모, 운명을 지닌 각양각색의 인물들을 생동감 넘치게 표현하였다. 조설근은 시사(詩詞) 와 금석(金石), 서화, 의학, 건축, 요리, 직조, 염색 등 다 방면에 정통하였으므로 귀족 가문의 음식, 주거 문화와 건축 원예, 생활 용품, 의복과 인테리어 그리고 교통 수단과 연회장의 풍경까지도 상세하게 묘사했다. 무려 700명이 넘는 등장인물로 구성된 방대한 스케일의 구도 속에 역사적 흥망성쇠를 겪는 거대한 귀족가문을 설정하고, 다시 그곳을 무대로 하여 신화세계와 현실세계를 오가는 신비로운 사랑의 삼각관계를 깊이 그려내어 마침내 삶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진지한 고뇌와 성찰을 제시한다. 더 나아가 우주적 이법과 실재에 대한 사유에만 몰두했던 고전철학의 한계를 뛰어넘어 '인성'의 가치를 발견하고, 표상과 필멸의 욕망의 세계와 영원한 진리의 세계의 대립이 아닌, 서로 이어질 수 있는 길을 모색한 사상적으로도 큰 가치를 가진 작품이다. 또한 진정한 의미에서 이후에 꽃피게 되는 현대 중국문학의 초석을 쌓았으며, 수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중국의 무협작가들인 이수민, 왕도려, 양우생, 김용, 고룡 등등 홍루몽에 매우 많은 영향을 받았다.

홍루몽은 인물창조에 있어서 전형적 인물들을 대거 창조해냈다. 홍루몽의 인물은 더 이상 완전하게 좋은 사람이거나 나쁜 사람이 아니며 도덕관념의 화신도 아니고 다측면, 다각도, 다변화의 입체감을 지닌 인물들로 그들 모두의 내면에는 풍부한 현실성이 담겨 있다. 홍루몽에 묘사되고 있는 인물들은 진실 될 뿐만 아니라 독특하고도 선명하게 부각되기도 하였다. 소설사적으로 보아서 홍루몽의 인물창조가 갖는 또 하나의 의의는 각계각층의 인물, 특히 하층인물들의 각성과 분노를 큰 비중으로 다르고 있으며, 하녀들도 자각적이며 독특한 개성의 긍정적 인물로 그리고 있다는 데에서 참으로 특기할 만한 전진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홍루몽의 인물들은 모두 뛰어난 전형성과 진실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발전을 보이고 있으며 특히 긍정적 인물들을 대거 창조하여 작가의 희망과 이상을 기탁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의 소설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홍루몽은 금병매가 비록 인정세태를 다각적으로 묘사했다고는 하나, 묘사한 현상의 본질적 의의를 드러낼 수 없었던 한계를 극복하여, 삶의 모든 현상을 취사선택하고 가공하여 세세한 장면마다 자신의 이상과 감정을 불어넣었고, 자신의 이상과 비판을 나타냈다. 다시 말해서 홍루몽의 섬세한 묘사는 핍진하고 진실 될 뿐만 아니라 심각한 의미도 함께 지니고 있는 것으로 삶 자체에 대한 재현에다 삶의 본질에 대한 해부와 비판을 결합시킴으로써 객관적 묘사 가운데 본질적 의의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섬세한 묘사는 진실하고 심각한데서 그치지 않고 전체 작품의 구조 안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뛰어나며, 작품의 주제와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어 주제의 심각성을 한층 드러내는 작용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내용에 있어서 금병매보다 훨씬 풍부하고 생동적이다. 이러한 섬세한 묘사의 풍부성, 정련성, 진실성 등으로 말미암아 홍루몽은 중국고전소설 가운데 가장 풍부하나 예술적 매력을 지닐 수 있게 되었으며 작품의 주제 또한 한층 더 부각될 수 있었다. 홍루몽은 인물의 심리를 섬세하고 심도있게 묘사하였다. 보옥이 사상운과 습인을 보고 “대옥은 종래로 자기에게 벼슬을 하라는 얼빠진 소리를 하지 않는다”고 칭찬하는 것을 엿들은 대옥의 당시의 심정이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언어운용의 측면에서 보면, 홍루몽의 언어는 자연스럽고 유창할 뿐만 아니라 당시 북경지대의 구두어에 기초하여 순수하고 세련된 문학 언어를 사용하여 간결하고 정확하고 소박하면서도 생동적이다. 따라서 다양하고도 풍부한 표현력을 지닌다. 특히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평범한 언어로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형상을 적절하고도 생동적으로 묘사해 냄으로써 강렬한 예술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 시사의 삽입 면에서 보면, 홍루몽에 삽입된 시사(時詞), 그리고 곡부(曲賦)등은 예술적 효과는 물론이요 주제의 전개와 인물 및 환경묘사에 있어서 필수 불가결한 요소로 자리하고 있다. 홍루몽중의 시사 자체가 비록 당시와 송시보다 뛰어나지는 않지만, 많은 독자들이 이를 더 아름답게 보는 이유는 독자들이 홍루몽중의 시사를 읽으면서 인물과 스토리를 함께 결합시켜 보충하고 상상하는 까닭이다.

可歎停機德, 堪憐咏絮才 베틀 거둔 부덕(婦德)이여, 눈꽃 읊던 재주여

玉帶林中掛, 金簪雪裏埋 옥띠는 숲속에 걸리고, 금비녀는 눈 속에 묻혔구나

홍루몽의 표현기법상의 또 다른 특징은 명말 청초의 인정소설에 보편적으로 운용되고 있는 은폐수법(隱蔽手法)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들은 종종 작품 서두에 일단의 주장을 늘어놓아 그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미리 말리거나, 혹은 회말 등에 유불관념이 지배하는 주제를 개괄해 놓기도 하며, 줄거리의 전개 도중에 의론성 문장을 끼워 넣음으로써 인물과 사건에 대해 자신의 태도를 드러내기도 한다. 인정소설은 창작의도를 드러내지 않고 교묘히 감춤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세심하게 살펴 숨은 뜻을 깨닫도록 하기 위함인데 홍루몽에도 이러한 수법이 사용되었다. 조설근은 은폐수법의 운용으로 인해 예술성이 저하된 인정소설의 보편적 결함을 극복하고 이를 고도의 창조적 역량으로 승화시킴으로써 다른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효과를 거두었다.

홍루몽은 중국인의 문화와 중화미의 비극전통인 심리방식, 심미관까지도 그려내고 있으며 당시의 사회상을 현실감 넘치게 묘사하고 있는 중국인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문학 작품이다. 역사상 가치 있는 것이 소멸됨을 보여주는 것이 비극이라는 노신의 정의에 입각해 볼 때, 홍루몽을 이루는 중심적 비극 구조는 애정혼인 비극구조이다. 이러한 애정 혼인비극은 봉건제가 흔들리던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변모하는 사회의 많은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보옥과 금릉십이채로 대표되는 작가의 이상을 기탁한 인물들이 대부분 불행한 결국은 홍루몽 비극성 자체를 한층 더 강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홍루몽은 기존의 중국 고전 비극미학의 전통인 희비교집을 계승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대단원주의의 타파와 그로 인한 비극성의 제고라는 새로운 미학적 면모를 보여주는 훌륭한 비극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홍루몽의 뛰어난 성취는 주로 금병매와 재자가인소설에 나타나는 부족함을 창조적으로 극복한 것으로 파악될 수 있었는데, 그러한 보완과 혁신이 너무도 괄목할 만한 것이어서 홍루몽이 출현한 이래 전통적 사상과 작법이 타파되었다고 하는 최고의 평가까지 받은 듯하다. 그럴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은 무엇보다도 현실인식이 뚜렷했고 암울한 상황에서도 미래에 대한 희망과 이상을 품고 있었으며 누구보다도 예술적 구상이 뛰어났던 치열한 작가정신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청 중엽의 홍루몽은 명대의 금병매와 청초의 재자가인소설의 전통을 계승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전에 없는 참신하고도 대담한 중국 인정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홍루몽은 주제, 제재, 구성, 인물묘사, 언어의 운용 등 모든 면에서 기존의 소설뿐만 아니라 홍루몽 이후의 인정소설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높은 경지를 이룩한 중국소설의 최고봉으로 자리 매김을 한다. 이러한 성취는 작가 조설근의 진보적 세계관과 탁월한 작가적 역량에 기인하는 것이며, 이는 청초 인정소설의 부정적 측면에 대한 혁신이자 쇠퇴에 대한 반동의 결과라는 의미도 함께 지닌다.

홍루몽은 청 중엽 인정소설을 고조기로 끌어올리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청 중엽의 소설은 삼엄한 사상통제로 인해 풍정과 일사에만 주력했기 때문에 사실상 청초보다 퇴보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 중엽을 인정소설의 고조기라고 평가하는 이유는 고도의 사상성과 예술성을 지닌 홍루몽의 문학성 때문이다.

사대명저중 <홍루몽>이 가장 늦게 쓰였다. 그러나 후래거상(後來居上)이라고, 그중에서 최고의 작품으로 공인받고 있다. 중국고전문학의 최고봉이다. 다만, <홍루몽>이 이런 지위를 획득한 것은 확실히 기니간 과정을 겪었다. 구파홍학가중에서 최초의 홍학가인 지연재(脂硯齋) 그리고 청나라때의 왕희렴(王希廉), 장신지(張新之) 및 요섭(姚燮)등은 모두 "평점파(評點派)"라고 할 수 있다. <홍루몽색은>을 저술한 왕몽완(王夢阮), 심병암(沈甁庵)등은 "색은파(索隱派)"의 대표이다. 건륭시대에 <홍루몽제사(紅樓夢題詞)>를 쓴 섭숭륜(葉崇侖)등등은 개략 "제영파(題詠派)"의 대표라고 할 수 있다.

"홍학(紅學)"이라는 용어가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광서초기 <홍루몽>을 즐겨읽던 경사의 사대부들 입에서이다. 반은 농담식으로 붙인 말이다. 민국초기에 이르러, 소설을 읽기 좋아하던 주창정(朱昌鼎)이라는 사람이 <홍루몽>에 깊이 빠져 있었는데, 친구가 어느 날 방문했을 때 그가 머리를 쳐박고 책을 읽는 것을 보고, 웃으면서 물었다: "선생은 무슨 경전을 공부하시는지요?" 주창정이 답한다: "딴 것이 아니고, 내가 전공하는 것은 '홍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에피소드가 널리 알려진 후, "홍학"이라는 단어는 점차 <홍루몽>을 연구하는 학문의 전용명칭이 된다. 중국에 많은 소설들이 있지만 이처럼 그 소설만을 연구한 학문이 생길정도의 소설은 전무후무하다. 이는 홍루몽이 중국 소설사상에서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진 것인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홍루몽은 중국의 대표 고전이다. 중국 문화의 백과사전, 중국인의 자존심, 대표적인 문화유산이라고 평가받는다.

중국의 4대 소설 중 하나인 홍루몽의 인기는 중국에서 현재진행형이다. 최근에는 베이징시 대학교 입학 필수 시험과목으로 지정됐다.# 홍루몽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문분야, ‘홍학(紅學)’도 형성되어 학술 전문가부터 일반인 동호회를 아우르며 다양한 접근과 이해가 이뤄지고 있다. 홍루몽에 대한 중국인의 사랑을 셰익스피어에 대한 영국인의 사랑과 비교하는 것은 전혀 무리가 아니다. 홍루몽의 인기는 중국 역사공동체의 마지막 왕조인 청나라에 대한 중국인의 관심과 사랑을 반영한다. 동시에 멀지않은 과거로부터 오늘날 중국인 자신들의 의식구조와 생활습속을 이해해 보고자 하는 시도이기도 하다. 그들을 이해하는 새로운 첩경이 홍루몽 속에 담겨있다.

홍루몽은 사실주의 문학의 높은 성과로써 그 후의 문학에 풍부한 예술적 경험을 제공했으며 큰 영향을 남겨 홍루몽을 제재로 쓴 시, 사, 희곡, 소설, 영화는 이루다 헤아릴 수 없다. 홍루몽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는 '홍학(紅學)'이라는 전문적인 학문으로 형성되었는데 '구홍학'의 대표는 '색은파'이며, 5.4시기에 실험주의와 주관적 관념론의 고증방법으로 '색은파'를 비평하는 '신홍학파'가 나왔으나 이들도 극단으로 나갔다. 해방 후에 와서야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 의한 홍루몽 연구가 시작되었으며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봉건문인들은 《후홍루》, 《홍루보》, 《홍루복몽》, 《홍루원몽》등 홍루몽의 뒷부분이라고 하는 작품들을 대량적으로 써냈으나 이런 작품 등은 모두 재자가인들의 대단원 이야기를 쓴 것으로써 홍루몽의 주제 사상을 엄중히 왜곡하였으며 소설 발전중의 한 갈래 역류가 되었다. 중국민중에게 홍루몽은 아직도 고문서보다 생기 있는 대중소설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들은 홍루몽의 무대나 인명등을 즐겨 상호로 사용하기도 한다. 게다가 홍루몽은 지금도 발표 당시의 문장 그대로 읽히고 있다. 그뿐아니라 18세기 말엽 북경주변에서는 홍루몽의 내용을 그린 카드, 가구 등이 날개돋힌 듯 팔렸고, 심지어는 연인들 사이에 대옥처럼 폐결핵에 걸려죽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 풍조까지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을 식자들은 홍미( 紅迷, 홍루몽에 미쳤다는 뜻) 라하여 개탄해 마지 않았다.

근대 시기 이후 중국에서는 다들 『홍루몽』에 열광을 했다. 민중에서 시작된 홍학의 열기가 급기야 지식인 계층으로 옮아갔고 사회 지도층 인사들도 『홍루몽』을 언급하지 않는 이가 드물게 되었다. 황중헌(黃遵憲)은 청 말 주일대사관의 참사로서 조선통사로 파견된 김홍집에게 우리나라의 외교정책에 조언하는 『조선책략(朝鮮策略)』을 써준 인물로 유명하다. 그는 일본 문인들과 필담을 통한 대화에서 중일 양국 간의 문학을 비교하다가 중국 최고의 작품으로 『홍루몽』을 내세우기도 했다. 일본인은 당연히 자기네 최고(最古)의 장편소설인 『겐지모노가타리)』를 강조하였다. 황준헌은 개의치 않고 『홍루몽』의 장점을 내세우며 “천지개벽 이래 고금을 통해 가장 훌륭한 작품”이라고 칭찬하였다. 외국인과의 문화 대결이라는 점에서 자국의 작품을 내세우는 과장된 점도 있었겠지만 시문을 위주로 쓰고 있던 정통 문인의 입에서 당시에 소설을 이만큼 직접적으로 언급하기도 드문 일이었다.

중국 현대소설의 아버지 루쉰은 “《홍루몽》이 나타난 이후로 전통소설의 모든 사상과 작법이 타파되었다.”고 말했다. 홍루몽은 기존 중국 고전 소설의 주류를 이루던 남존여비, 입신양명 등의 가치를 타파하고 영웅호걸과는 거리가 먼 가보옥을 남자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그는 남성중심 혹은 유교중심의 봉건사회에 반항하는 이단아이며 섬세하고 여성적인 가치를 인생의 진리로 여긴다. 홍루몽 속 여인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녀들은 남성에게 종속적인 모습, 혹은 작품 속 부수적 역할에서 탈피하여 주체적인 인물로 생동한다. ‘금릉십이차’(金陵十二釵)라고 불리는 여주인공들은 학식과 교양을 갖추었으며 시를 나누며 우애를 쌓는다. 또 작품 속 변화하는 그녀들의 감성의 농담을 관찰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재미다. 홍루몽은 그야말로 세상의 약자인 여성이 중심이 되어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어나간 유토피아 그 자체인 것이다. 홍루몽에는 시대 배경이 언급이 안된다. 작가가 일부러 말을 안 한다. ‘언제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주인공이 귀족이라고 하나 그 정도 귀족들은 많았다. 시녀와 하인들 같은 보통 사람들의 얘기를 다룬 거다. 홍루몽은 삼국지나 수호전처럼 역사적 사건에 기반을 두는 기존의 작법을 깨뜨렸다. 이는 ‘술이부작(述而不作·서술하되 창작하지 않는다)’이란 공자(孔子)의 말을 정면으로 거스른 것이기도 했다. 홍루몽이 나오기 전만 해도 ‘술이부작’이란 말은 중국에서 소설 창작에 있어 일종의 족쇄였다. 대신 홍루몽의 작가는 소설의 초점을 개개인에 맞췄다. 그에 따르면 중국 소설은 크게 시대별로 삼국지, 수호전, 서유기, 금병매, 홍루몽 순으로 진화를 거듭했다. 삼국지가 역사와 국가에 초점을 맞췄다면 수호전은 사회 체제 변혁, 서유기는 권위에 대한 반항, 금병매는 기혼 남녀 간의 사랑에 주목했다. 홍루몽은 금병매에서 한발 더 나아가 미혼 남녀의 사랑과 감정에 초점을 맞춘 최초의 작품이다.

‘홍루몽’은 청(淸)조의 전성기이자 봉건전제통치가 삼엄했던 건륭(乾隆)년간에 창작된 장편 백화소설이다. 이 작품은 우리에게 친숙한 ‘삼국지’ ‘수호전’ ‘서유기’ 등과는 달리, 가부(賈府)라는 귀족 대가정의 일상생활을 소재로 상층 귀족사회의 삶과 갈등을 깊이 있고 생동감 넘치게 그린다. 그러는 가운데 18세기 중엽 중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 제 방면에 걸친 당시의 사회상을 광범위하고도 여실히 반영함으로써 ‘중국 봉건사회의 백과전서’라고 일컬어진다. 그러한 우수성과 함께 더욱 강조하고 싶은 점은 ‘홍루몽’은 ‘인간’의 문제에 관심을 집중시킨 뛰어난 휴머니즘 작품이다. 휴머니즘이란 인간성에 대한 왜곡과 억압에 저항하는 흐름으로, 시간과 공간의 차이를 떠나서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이 위협받는 순간에 항상 모습을 드러내왔다. 특히 작가들은 예술적 상상력과 표현력을 동원하여 휴머니즘 정신을 풍부하고도 다양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강한 호소력을 지닐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영향력은 각별하다고 할 수 있다. ‘홍루몽’의 작자 조설근은 바로 그러한 작가였다.

‘홍루몽’의 시대는 암울했다. 조설근이 살았던 때는 청조의 봉건 전제통치가 극에 달할 정도로 강력했으므로, 대다수의 사람들은 봉건사상과 제도의 억압하에 짓눌려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는 ‘홍루몽’에서 각성(覺醒)된 주인공의 눈을 통해 봉건체제에 물들지 않고 천부(天賦)의 인성(人性)을 지닌 참된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면서, 그들 중심의 스토리를 통해 개성, 해방을 추구하고 인욕(人欲)을 긍정하였으며 평등사상을 발현시킴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추구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추구는 당시로서는 실현될 수 없는 ‘꿈’이었으므로 결국 ‘홍루몽’의 이야기는 비극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그러한 바람과 추구는 더없이 값진 것일 뿐만 아니라 미래지향의 원동력이 됐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최근 중국의 류짜이푸[14](劉再復) 교수는 ‘쌍전(雙典)’이라는 책에서 ‘삼국지’와 ‘수호전’을 비판하면서, “홍루몽이야말로 중국 고전소설에서 영적인 횃불을 진정으로 높이 쳐든 위대한 소설”이라고 극찬했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들어 ‘쌍전-삼국지와 수호전은 어떻게 동양을 지배했는가’(글항아리)라는 제목으로 번역·소개됐다. 류 교수는 “당신의 아이들이 ‘수호전’의 영웅들을 모방하지 않도록 해야 하고, ‘삼국지’ 영웅들이 사용하는 무소부재(無所不在)의 권모술수를 모방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수호전이나 삼국지는 읽더라도 비판적으로 바라봐야 하고, 대신 ‘홍루몽(紅樓夢)’을 가까이 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류 교수는 이 책에서 ‘삼국지’와 ‘수호전’은 모두 상당한 매력을 지닌 소설이지만, 권모술수와 폭력을 숭배한다는 점에서 500여년간 중국 사회에서 사람들의 마음에 가장 크게 그리고 가장 광범위하게 해악을 끼쳤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정말 두려운 것은 이들 작품이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여전히 영향을 미쳐 사람들의 마음을 파괴하며 잠재의식을 변화시키는 점이라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류 교수는 ‘홍루몽’에 대해 “사실 ‘홍루몽’은 중국 대지 위에 생산된, 인간과 관련된 위대한 깃발이었다. 녜간누(聶紺弩)는 ‘홍루몽은 인간의 책이다. 인간을 발견한 책이고, 사람들이 인간 속에서 인간을 발견하는 책이다’라고 말했다. 이는 매우 깊이 있는 견해라고 할 수 있다”(‘쌍전’ 62쪽)라고 했다.

왕궈웨이는 “《홍루몽》은 ‘욕망의 비극’이자 ‘인생의 비극’이다.”라고 말했다. 인간의 감성세계를 정교하게 그려낸 소설로서 인생의 교과서와 같은 이 작품을 읽다보면 독자들은 인생의 진리가 보이고 인간관계의 이치란 무엇인지 새롭게 깨달을 것이다. 잔잔한 선율과도 같은 홍루몽은 거창한 명분이나 이론을 독자들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인간이 살아가는 데 ‘강한 것’이 아니라 ‘약한 것’이,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 ‘이성’이 아니라 ‘감성’이 궁극적으로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애잔한 느낌으로 잘 드러내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현실에서의 패배처럼 보이지만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휴머니즘이라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한 권이 480쪽에 달하는 책이 무려 여섯 권, 《홍루몽》을 한 마디로 전체를 개괄하기는 어렵지만 작품의 핵심 줄거리를 크게 두 축으로 말하자면 가보옥(賈寶玉)과 임대옥(林黛玉), 설보차(薛寶釵)를 둘러싼 ‘비극적인 사랑’과 ‘가씨 가문의 흥망성쇠’라 할 수 있다. 당대 최고 귀족집안의 귀공자 가보옥과 가정적이며 건강한 설보차, 가씨 집안의 실권을 쥔 할머니가 선택한 보옥의 사촌 누이 임대옥. 이 세 사람의 엇갈린 사랑을 둘러싼 이야기가 주된 줄거리를 구성한다. 홍루몽을 글자대로 풀이하면 ‘붉은 누각의 꿈’이다. 붉은 누각에서 꾸는 짧고도 아름다운 청춘의 꿈, 봄날의 꿈은, 봄꽃이 지듯 소리없이 사라진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비극적 죽음, 가문의 몰락 등 인생의 모든 꿈들이 그렇게 사라지는 것에 대해 중국인들은 늘 애통해하고, 이를 통해 인생과 우주의 지극한 이치를 깨닫는다.

나는 『홍루몽』을 적어도 다섯 번을 보았다. 나는 이 책을 역사로 본다. 보기 시작할 때는 이야기책(소설)으로 보다가 뒤에는 실제 역사로 알고 읽게 된다. 『홍루몽』 제4회에 대해서는 대부분 별다른 주목을 하지 않지만 나는 그 부분을 이 책의 강령이라고 본다. 또 냉자흥이 영국부를 소개하는 대목이나 도사의 ‘호료가’ 및 진사은의 ‘호료가주’도 주목해야 한다. 제4회 호로묘의 중이 판결하는 사건에서 호관부가 나오는데 네 귀족 가문을 말하고 있다. …… 『홍루몽』의 사대 가문의 계급투쟁은 격렬하여 수십 명의 인명이 목숨을 잃었다. 부르주아의 지배자는 20여 명인데 (혹자는 33명이라고도 하지만) 나머지 노비들은 300여 명이나 된다. 역사를 말하면서 계급투쟁의 관점으로 보지 않으면 말이 통하지 않는다. ― 마오쩌둥, 1964년 8월 18일, 북대하(北戴河)에서 철학 연구자들과의 대화

중국에서는 단연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는 고전소설이다. 홍루몽은 중화권에서는 줄곧 열광적 반응을 얻었다. 중국의 어떤 서점에 가면 한쪽 벽면 전체가 홍루몽에 관한 서적며 코흘리개 아이들부터 노인들까지 코너에 서 있을 정도다. 실제 홍루몽은 중국에서 여성과 청소년에게 인기가 더 많다고 한다. 홍루몽은 여성 세계의 종합세트다. 작품 속에는 강인한 여성과 우둔한 여성, 슬기로운 여성과 간교한 여성, 심약하고 감성적인 여성과 둔감한 여성이 모두 등장한다. 최용철 고려대 교수는 “인생살이의 세밀하고 정교한 일면을 모두 다루고 있다”며 “남녀 주인공도 인생의 풍파를 헤쳐나가야 하는 오늘날 젊은이와 다를 바 없다”고 했다. 이 같은 열기는 대륙과 대만, 홍콩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한다. 베이징대 총장을 지낸 차이위안페이·후스와 같은 중국 근대의 대학자들은 물론 마오쩌둥 역시 홍루몽 팬이었다. 최용철 교수에 의하면 “홍루몽이 뜬 것은 공교롭게도 문화대혁명 때입니다. 마오쩌둥과 그의 부인 장칭(江靑)은 홍루몽의 팬이었어요. 문화대혁명 때 허용한 책이 딱 두 권인데 빨간색 ‘마오쩌둥 어록’과 ‘홍루몽’이에요. ‘마오쩌둥 어록’은 읽어봤자 재미가 없는데 그걸 읽었겠어요. 그러다 보니 문화대혁명 때 하방(下放)당한 젊은이들도 시골에서 홍루몽을 읽었던 것이죠.” 최용철 교수에 따르면 마오쩌둥은 홍루몽의 반(反)봉건적 측면에 주목했다고 한다. 작품 속에서 시녀에 불과한 여성들이 가보옥 등 주인공 가씨 집안에 거침없이 대드는 데 상당한 매력을 느꼈다는 것. 이에 마오쩌둥은 “귀족 집안 출신의 작가가 어찌 이 같은 반봉건적 작품을 쓸 수 있었냐”면서 상당한 관심을 나타냈다고 한다.

중국은 최근 세계의 양대 최강국으로 자리잡으면서 자국의 문화를 세계에 전파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공자아카데미를 세계 각지의 대학에 만들어 중국어와 중국 문화를 적극 홍보하는 것은 물론 『홍루몽』을 중국 문화의 아이콘으로 삼아 세계로 진출하고 있다. 중국의 전 총리 원자바오는 영국 국빈 방문 중 셰익스피어 한 권을 받았을 때, 신임 중국대사 푸잉은 여왕에게 홍루몽의 호크스 번역을 주었다. 2010년 원자바오가 한국 방문 때 주한중국 문화원에서 한국의 중국어 학습자 및 『홍루몽』 애호가들과 만남을 가졌다. 그의 방문 활동에 ‘홍루몽과 중국 문화’를 제목으로 한중 간의 민간 토론을 주도한 것은 역시 『홍루몽』을 중국 문화의 대표 작품으로 분명히 드러낸 것이다. 시진핑은 중국공산당의 당서기와 국가주석으로 취임하면서 중국몽(中國夢)을 국가발전의 슬로건으로 내세우고 대대적인 국민 계몽 운동을 펼쳐나갔다. 당과 국가의 창립을 기념하는 두 개의 백 년을 향후 발전의 목표 지점으로 정하고 부국강병의 꿈을 실현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1986년 하북(河北)성 석가장(石家莊)시 정정(正定)현의 당서기로 있으면서 『홍루몽』의 무대인 영국부(榮國府)를 청나라 당시의 고전 건축으로 재현하여 CCTV의 「홍루몽」 연속극 촬영세트로 활용한 뒤에 일반에 공개하여 이 작은 지방 도시를 관광 명소로 발전시키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시진핑은 이후 기회 있을 때 마다 『홍루몽』을 언급하였고 또 『홍루몽』과의 인연을 이어 나갔다. 2014년 프랑스를 방문할 때는 『홍루몽』의 프랑스어 번역자인 당시 이미 99세에 이른 이치화(李治華)를 직접 만나 치하하였고, 2015년 미국을 방문할 때는 『홍루몽』을 가져가 링컨고등학교에 직접 기증하며 중국 문화의 전파에 신경을 쓰기도 하였다. 다만 이러한 고평가에 비해 대중적인 인기는 미비한 편이다. 중국 대륙, 심지어 천계와 저승세계라는 넓은 무대에서 먼치킨들이 활약하는 삼국지, 수호전, 서유기와는 달리 홍루몽의 이야기 여러 가문의 일상적인 집안일 위주로 흘러가기 때문에 자극적인 컨텐츠가 부족하고 질려버리기 쉽다. 게다가 게임이나 애니 등의 분야에서 상당수의 인기 창작물들이 여전히 전투, 전쟁 등을 다룬다는 점도 평화로운 일상물인 홍루몽에게 있어서는 인기를 확보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소다.

김경주의 시 ‘非情聖市’ 안에는 “귀신으로 태어나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이 세상을 살다가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사라져버리는 생들이 있다”고 쓰여 있다. 이 프랑켄슈타인 문법이 인간의 생애에 비하여 더 서글픈 서사구조를 가진다는 보장은 없다.

홍루몽의 서사구조는 중층적이다. 신화의 서사구조는 꿈의 서사구조와 수평선 상에 존재하며 현실의 서사는 꿈에 의하여 지배되는 착종된 구조로 되어 있다. 대국적으로는 꿈과 현실의 서사는 태고의 신화 속에 버려진 돌덩이(石頭) 위에 중과 도사가 오래 전 새겨놓은 이야기(石頭記)와 같다. 그러니까 모든 이야기는 예정조화인 셈이다. 또 지나던 공공도인이 이 석두기(石頭記)를 읽게 된다. 이야기를 읽고서 공(空)에서 색(色)을 보고, 색에서 정(情)이 생기고 정을 전해 다시 색에 들고 색에서 다시 공을 깨닫는다. 그래서 자신의 이름을 ‘정승(情僧)’이라 고치고 ‘석두기’를 고쳐 ‘정승록’이라 한다. 그 뒤 이 이야기는 오옥봉(吳玉峰)의 손을 거쳐 ‘홍루몽(紅樓夢)’이라 하고, 동노(東魯)의 공매계(孔梅溪)는 ‘풍월보감(風月寶鑑)’이라 제목을 지었다. 다시 그 뒤에 조설근이라는 사람이 도홍헌에서 이 책을 십년동안 연구하면서 다섯번 고쳐 쓴 다음(曹雪芹于悼紅軒中披閱十載, 增刪五次) 목록을 엮고 장회(章回)를 나누어 ‘금릉십이채(金陵十二釵)’라 이름하고 책머리에 시 한 수를 적어 넣는다.


红楼梦

1. 홍루몽 줄거리

滿紙荒唐言 이야기는 모두 허튼소리 같지만

一把辛酸淚 실로 피눈물로 쓰여진 것이어늘

都云作者癡 모두들 지은이를 미쳤다고 하나

誰解其中味 이 속의 진미를 누가 알리요

신화시대에 공공과 전욱이 싸우다가 하늘의 한쪽이 무너져 내린다. 중국의 창세신인 여와(女媧)가 하늘을 떠받치기 위하여 대황산 무해애에서 3만6천5백1덩이의 석두(石頭)를 연단한다. 하늘을 떠받친 후, 남은 1덩이의 석두를 청경봉 아래 버린다. 이 석두가 통령보옥(通靈寶玉)으로 다년간의 수련 끝에 영혼을 갖게 되었고 스스로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게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늘을 떠받치는데 쓰이지 못한 채, 청경봉 아래에 버려졌다는 사실이 늘 서운했다.

이 곳을 지나던 중과 도사가 이 석두를 보자 영혼이 생긴 것을 알게 되고 앞으로 좋은 시절, 좋은 집에 태어나 여러가지 일을 겪게 될 것임을 넌즈시 알려주고 석두에 겪게 될 이야기를 새겨넣는다. 한참 후 공공도인이 지나가던 중 석두에 새겨진 이야기를 읽게 되고 자신의 이름을 정승이라고 바꾸고 이야기(情僧錄)를 전하게 된다.

여기서부터 신화의 시대를 벗어난다. 고소(姑蘇=蘇州)의 창문성(閶門城) 안 인청 골목(仁淸巷)의 호로묘(葫蘆廟) 옆에 사는 진사은(甄士隱 : 진짜 사실은 감추어져 있다는 眞事隱과 동일한 소리)이 꿈 속에서 중과 도사가 석두 통령보옥을 경환선자(警幻仙子 : 太虛幻境의 주관자로 남녀의 치정관계를 맡아봄)의 적하궁(赤霞宮)으로 데려가는 것을 본다. 경환선자는 통령보옥을 신영시자(神瑛侍子)로 임명한다. 이 신영시자는 강주선초에 물을 주곤 한다. 진사은이 중과 도사 등이 어리석은 물건(蠢物)이라고 하는 석두를 집어서 보니 통령보옥이라고 새겨져 있고 자세한 글을 읽어보려 하니 이미 환경에 들어섰노라고 하여 눈을 들어보니 누각문에 태허환경(太虛幻境 : 아무 것도 없는 꿈 속)이라고 쓰여 있고 양쪽에 대련이 있다.

假作眞時眞亦假 헛 것(夢)이 참된 것을 만드는 때(시간)는 참된 것 역시 헛 것이요

無爲有處有還無 없음(太虛)이 있는 것이 되는 곳(공간)에서는 있음 또한 없음이라.

이 대련을 보는 순간, 그만 뇌성벽력이 나며 진사은은 꿈에서 깨어난다. 이 태허환경을 좀더 들어가보면 중문에 얼해정천(孼海情天 : 수심과 애정의 바다와 하늘)에 쓰여 있고 대련에는

厚地高天堪歎古今情不盡 하늘 땅에 사무치는 고금의 정 다할 날이 없고

癡男怨女可憐風月債難酬 치정에 빠진 남녀의 안타까운 회포 풀 길이 없다. 즉 꿈과 풍월(애정이야기)이 뒤섞여 있는 곳이다.

참고로 이 태허환경의 주소는 Lihentien Guanchouhai Fangchunshan Qianxiangdong(離恨天 灌愁海 放春山 遣香同)이다. 한마디로 이별의 원망으로 가득한 하늘과 근심이 흘러드는 바다를 건너 봄이 풀린 뫼 안의 향기가 풀린 동네인데, 얼빠진나루(迷津)를 건너야 한다.

결국 태허환경의 신영시자(석두)는 통령보옥을 입에 물고 남경의 영국부(榮國府)라는 가(賈)씨의 대갓집에 가보옥(賈寶玉)이란 이름으로 태어난다. 네 누이와 임대옥, 설보채, 사상운, 왕희봉, 습인 등의 열두미녀와 함께 대관원이라는 영국부의 비원에서 보내며 시를 짓기도 하고 서로의 정을 나눈다. 이러한 시간을 보내는 중 여자들은 시집을 가거나 죽고 가씨 집안을 비롯 왕씨, 사씨, 설씨 등의 금릉 네 대가는 갖은 치정사건과 고리대, 폭력, 살인, 이권 개입등의 사건으로 서서히 영락하기 시작한다. 이런 가운데 통령보옥을 잃어버리고 반백치가 된 보옥은 태허환경의 강추선초의 화신인 임대옥과 목석의 인연은 맺지 못하고 그만 설보채와 결혼을 하게 된다. 그 사이 임대옥은 죽고, 잃어버렸던 통령보옥을 찾게 되고 정신을 차리게 되지만, 그만 보옥은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게 된다. 아버지의 강권에 마지 못해 과거를 보고 합격했지만, 중과 도사를 따라 홀연히 속세를 떠난다.

위와 같은 석두에 쓰여진 이야기가 한 차례 끝난 후, 공공도인 즉 정승이 다시 청경봉 밑을 지나다가 석두를 마주하게 된다. 돌에 적힌 글을 다시 자세히 읽어보니 기왕의 게문 뒤에 새로 여러가지 사연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석두가 세상에 내려가 단련을 받은 끝에 밝은 빛을 내고 수도를 하여 원만하게 각성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왕이면 자기 손으로 다시 한번 옮겨서 누구든 한가한 사람에게 부탁하여 널리 전하게 한다면 사람들은 이 기이하면서도 기이하지 않고 속되면서도 속되지 않고 진짜이면서도 진짜가 아니고 가짜이면서도 가짜가 아닌 이야기를 알게 되리라며,

說到辛酸處 피눈물로 씌여진 이 이야기는

荒唐愈可悲 황당할수록 더욱 슬프다

由來同一夢 애당초 다 같은 꿈이었던 것을

休笑世人癡 세인들의 어리석음 비웃으며 어쩌랴!

고 다시 계송을 단다.

2. 홍루몽이라는 소설

홍루몽이란 소설 속에서 중과 도사가 돌 위에 쓴 것을 공공도인이 베껴쓰고 이를 전하여 오옥봉, 공매계 등을 거쳐 조설근(대략 1715~1763)이 십년이란 기간동안 다섯차례 고쳐쓰고 한 것이라고 한다. 이것의 사실 유무는 차치하고 조설근은 홍루몽의 가보옥처럼 금릉(남경)의 대갓집에 태어났지만 옹정제의 즉위 후 조부의 해직과 가산의 몰수로 가문이 영락하면서 어렸을 적부터 아르바이트를 하며 간신히 생계를 유지했고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요절한 다음 해, 석두기 80회 전편과 후편 약간 만 완성된 상태의 원고를 남긴 후 48세의 일기로 한 많은 세상을 떠난다. 나머지 부분은 고악(高顎 : 1738~1815 추정)이 40회를 지어 석두기 80회와 함께 120회 전편 홍루몽으로 이름을 단다.

조설근이 남긴 후편의 내용에는 ‘가보옥은 몰락하여 거지가 되고, 가교저는 기녀가 되며, 왕희봉은 인심을 잃고 몸종이 되어 쓸쓸하게 죽어간다'(천지인 刊 그림으로 읽는 중국고전 335쪽)고 되어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고악의 40회의 내용은 내가 읽은 텍스트나 정갑본이나 가씨의 ‘영국부’가 완전히 몰락하는 것이 아니라, 몰락 직전 황제의 은사로 가문이 다시 회생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홍루몽의 저자는 두 사람, 조설근과 고악인 셈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홍루몽은 3가지다. 하나는 홍콩 三民書局의 완판 홍루몽으로 120회본 정갑본(程甲本)을 저본으로 한 홍루몽이다. 분량은 상하 두책 1400쪽에 달한다.

정갑본(程偉元이 쓴 첫 판본)은 1791년(乾隆 辛亥 冬至 後 5日)에 출간한다. 그 다음 해 정갑본을 개정한 정을본이 나왔다고 한다.

이 정갑본 출간에 즈음하여 고악이 쓴 서문에 보면, 홍루몽이 인구에 회자되기 이십여년이 지났다고 되어 있는 바, 원작과 시간 간격이 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또 정위원이 쓴 120회본의 서(序)를 보면, “석두기(石頭記)가 원명이며, 작자는 서로 전하되 하나가 아니다. 오로지  책 안에 조설근이 잘못된 글귀를 지우고 바르게 하기(刪改)를 수차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조설근이 작자인지는 분명치 않다.

또 하나는 홍콩 中華書局의 그림과 글이 함께 들어 있는 간사본(簡寫本 : 다이제스트판)이다.

마지막으로는 간자체로 된 연환화(만화) 홍루몽이다.

중국어나 한문을 읽지도 못하면서 욕심으로 산 책들이라 읽지도 못하고 그냥 갖고 만 있다.

이번에 읽은 12권 짜리 홍루몽은 청계에서 번역한 것이다. 그 판본은 척료생이 서문을 단 석두기 80회에 고악의 40회를 더한 판본이다. 척서본은 후대의 가감을 거친 정갑본보다 원작을 비교적 잘 보존하고 있다고 본 책의 서문에 강조하고 있다.

번역자는 안의운, 김광렬 두 사람인데, 두 사람 다 북경중앙민족대학 중문과를 졸업하고 북경외문출판사에 근무하면서 중국문학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계속해 온 사람들로 자세한 내용은 없으나 조선족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번역이 여간 잘된 것이 아니다. 딱딱하고 생경한 표현이 없다. 필요할 경우 의역을 함으로써 직역이 지닌 이질감을 덜어낸 탓으로 보인다. 때때로 요즘에는 거의 쓰지 않는 낱말이나 격언같은 것을 만날 수 있다. 이는 본래 북한의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먼저 번역했던 것을 우리나라 사정에 맞게 교정을 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남은 흔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중국문화의 총체라고 할 홍루몽에 나오는 모르는 개념이나 낱말 등에 대한 주석이 깔끔하여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홍루몽에 대한 연구를 홍학이라고 한다. 세익스피어 이후 하나의 작품에 수많은 사람이 매달려 연구를 하는 예는 흔하지 않다고 한다. 홍루몽은 정을본(정위원의 두번째 판본)이 출간된 이후 백여종의 간본에 30종의 속작이 나와 판본에 대한 연구도 연구지만, 홍루몽 자체가 중국문화를 읽을 수 있는 거대한 코드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유불선이 혼효된 문화 그리고 융성기의 청대의 문물과 천문, 역법, 시계 등 서양외래문물 등이 유입되어 뒤섞이는 당시의 상황 또한 연구과제로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

모택동은 “홍루몽은 적어도 다섯번은 읽어야 그 진수를 알게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홍루몽을 읽지 않으면 중국 봉건사회를 이해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이는 중국의 근대사회에서 상류층의 생활이 어떠했으며, 그로 인해 인민들이 얼마나 피폐했는가를 홍루몽이 단적으로 보여준다는 의미이겠으나, 홍루몽이 써질 무렵의 중국은 청나라 강희 옹정 건륭 3대 황제의 치세가 융성하여 팍스 차이나를 구가하던 시절로 우리나라로는 정조 때였고 조선의 사신들이 북경에 도착하면 유리창 거리에서 서적과 각종 문물을 수집하기에 바빴고 조선으로 돌아와 청나라에서 배우자는 북학을 주장하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홍루몽에 나오는 단어나 시, 그리고 서사구조 만을 연구하여도 유교, 불교, 도교 뿐 아니라, 시 그리고 서상기 등의 연극, 그리고 축적되어 면면히 흘러내려온 중국문학의 대체를 감잡을 수 있을 정도의 문화의 보고로 이런 사정 상 홍학이라는 것이 나왔다.

4. 다시 홍루몽으로

홍루몽의 마지막 부분에 금릉의 미녀들이 태허환경으로 돌아가고 가보옥마저 속세를 떠난 후

天外書傳天外事 하늘 밖의 책은 하늘 밖의 일을 전하고

兩番人作一番人 두 세상(현실과 태허환경) 사람은 한 세상(태허환경) 사람이 되었다.

고 쓰여 있다. 그렇다면 호접몽은 나비가 장자를 꿈꾸었던 것이 맞는다. 물론 나비는 악몽을 꾼 것이다.

또 하늘 밖의 책을 하늘 밖에서 이루어지는 법이라 이 세상에서 읽을 수 없듯 “사실 나는 귀신이다. 산목숨으로서 이렇게 외로울 수는 없는 법이다”고 쓴 고대 시인 침연이 없는 만큼 김경주의 이 프랑켄슈타인 언어는 진여복지(眞如福地)의 세상에는 통하지 않는다.

태허환경에 반하는 진여복지에는 다음과 같은 대련이 씌여 있다.
假去眞來眞勝假 가짜가 가고 진짜가 오매 진짜가 가짜를 누르고
無原有時有非無 없음은 본시 있는 것임에 있음은 없음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진여복지보다는 태허환경 쪽이 마음에 든다.

'만리장성과도 안 바꾼다'는 소설을 둘러싼 100년간의 논쟁
박해현 기자
'논쟁 극장'
논쟁 극장|류멍시 지음|한혜경 옮김|글항아리|816쪽|4만5000원

중국 고전소설 '홍루몽(紅樓夢)은 1740년 무렵 조설근(曹雪芹)이 지은 작품이다. 아녀자들이 사는 붉은 누각(홍루)이 규방을 가리키므로, '홍루몽'은 규방의 꿈을 뜻한다. 중국어로 약 100만 자에 달하는 대하소설이다. 등장인물만도 400명이 넘고, 신분과 계층 또한 천차만별이다.

중국에서는 '홍루몽은 만리장성과도 바꿀 수 없다'는 말까지 있다. '삼국지'와는 달리 '홍루몽'은 영웅호걸을 내세우지 않는다. 일상생활 속의 인간 군상을 등장시켜 근대 이후 중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소설이 됐다고 한다.

셰익스피어 문학 연구를 '셰익스피어학'이라고 하듯이, '홍루몽'을 연구하는 학문을 '홍학'이라고 한다. 류멍시(柳夢溪) 중국예술연구원 종신 연구원이 쓴 '논쟁 극장'은 지난 100년 동안 '홍루몽'을 두고 벌어진 설전을 다루면서 20세기 중국 지성사도 조명했다. '홍학을 둘러싼 17차례 논쟁, 9가지 공안(公案), 4가지 수수께끼, 3가지 옭매듭'을 차례차례 해설했다. '홍루몽'은 청나라 때 '삼라만상을 두루 아울러 빠짐이 없으니 어찌 다른 소설들이 어깨를 견줄 수 있겠는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어 '소설 형식을 빌린 작가의 자서전', '반(反)봉건주의를 처음 내세운 소설'이라는 근대 비평을 거쳤다. 요즘엔 소설에 나타난 의복과 음식, 건축 묘사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중국 문화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소설'로 드높여졌다.

중국 전문가들이나 읽을 법한 이 두툼한 책을 우리말로 옮긴 한혜경 교수는 '홍루몽' 전문가다. 저자와 자주 소통하면서 번역과 교열에 지난 10년을 쏟아부었다고 한다.

중국 고전소설 - 홍루몽(紅樓夢)
중국 고전소설 - 홍루몽(紅樓夢) - 중국 고전소설 - 홍루몽(紅樓夢)
중국 고전소설의 최고 걸작인 홍루몽

중국 고전소설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홍루몽(紅樓夢)은 청나라 건륭제 시기의 작가인 조설근(曹雪芹: 이름은 점(霑). 자는 몽완(夢阮)ㆍ근포(芹圃). 설근은 호)이 쓴 고전소설이다.

등장인물만 721명에 달하며 등장인물들의 세밀한 묘사로 청나라 시대의 대표적인 걸작소설로 칭송받고 있으며 100여 차례 간행되었고 30여 종의 후속편들이 나왔을 만큼 중국에서 크게 인기를 끈 국민적인 고전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홍루몽이 삼국지(三國志)와 서유기(西遊記), 수호전(水滸傳)에 비해 인지도에 밀리지만 많은 중국학자들도 홍루몽에 대해 연구해 "홍학"(紅學; 홍루몽학)이란 말까지 생겨났을 정도다. 홍루몽은 문학적 가치, 예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중국 고전소설의 정점으로 평가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홍루몽을 금병매를 제외시킨 '사대명저'의 하나로 친다.

아래에 홍루몽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홍루몽 작가, 홍루몽 소개, 홍루몽 배경, 홍루몽 등장인물, 등장인물 소개 등등을 차트로 간략히 만들었다. 여러분들의 소설연구에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기대(企待)로 받아드렸으면 좋겠다.

'홍루몽'의 원작 '석두기'에 대하여

루쉰은 '중국소설사략'에서 “건륭 연간(1765년 무렵)에 '석두기(石頭記)'라는 소설이 갑자기 북경에 나타나 5, 6년 만에 크게 인기를 끌었는데, 모두 손으로 베껴 쓴 필사본으로 묘시(廟市: 寺廟에서 열리는 시장)에서 수십 냥에 거래되었다.”고 하였다. 이 필사본는 상당히 비쌌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많은 사람들이 구하지를 못해 안달이었다고 전해진다.

필사본 '석두기'는 모두 80회로 되어 있었는데, 이 작품이 워낙 인기를 끌었던 때문에 1792년에는 배인본, 즉 목판으로 인쇄한 책이 출판되었다. 이 배인본은 원래의 '석두기' 80회에 40회를 더해서 전부 120회로 만들었고, 제목도 '홍루몽'으로 바꾸었다.

'홍루몽' 때문에 목숨 잃은 소녀

악균(樂鈞)의 '이식록(耳食錄; 1820)에 따르면 무명의 한 소녀가 자기 오라버니의 책상 위에 있던 이 소설을 우연히 읽기 시작하여 차츰 식음을 전폐하고 밤새워 탐독하다가 마침내 병이 들고 말았다. 부모가 이를 알고 책을 불살라 버렸더니 어찌 우리 보옥(寶玉)과 대옥(黛玉)을 불태워버렸느냐고 탄식하면서 결국 실성하여 몽매간에 보옥의 이름을 부르다가 어느날 밤 절명하고 말았다고 한다. 한때 중국의 젊은 여인들 사이에 대옥처럼 폐결핵으로 죽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 풍조가 있어 독자들이 개탄하기도 했다는 이야기는 독일에서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유행하자 권총자살의 풍조가 급격히 늘어났다는 얘기를 연상시킨다.

'홍루몽'의 두 여주인공 임대옥과 설보채

임대옥은 병약하고 예민하며, 전통적인 부덕(婦德)을 따르기보다는 반항적이고 개성이 강한 여성이다. 반면에 설보채는 행동거지가 우아하고 안정감을 주며 봉건 윤리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엄격한 규범을 잘 지키는 인물이다. 광서(光緖) 5년(1879) 추도(鄒弢)가 지은 '삼차려필담(三借廬筆談)'의 일화를 보면 당시 사람들이 이 두 인물에 얼마나 심취해 있었는지 알 수 있다.

“허백겸(許伯謙)은 설보채를 추켜올리고 임대옥을 나무랐다. 나는 임대옥을 추켜세우고 설보채를 깎아 내렸다. 기묘년 봄에 나는 백겸과 이 책을 평론하다 말이 맞지 않아서 서로 욕질을 하고 거의 주먹까지 쓸 뻔했다. 그리하여 우리 두 사람은 함께 '홍루몽'을 평론하지 않기로 맹서하였다.”

중국 고전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홍루몽’의 새로운 비밀이 중국 대륙을 발칵
중국 고전소설 - 홍루몽(紅樓夢) - 중국 고전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홍루몽’의 새로운 비밀이 중국 대륙을 발칵
图片信息 文化解析是解读《红楼梦》的核心
홍루몽(紅樓夢)고전산문작품

구성 및 형식 : 120권 117책(권24, 54, 71 유실). 필사본(筆寫本). 중국 청(淸)나라 건륭(乾隆) 때의 소설 ‘홍루몽(紅樓夢)’ 120회(前 80회는 조설근(曹雪芹) 작, 後 40회는 高鶚의 續作이라고 전함)를 완역(完譯)한 것이다. 현재는 그 중 3권이 없어지고 117책이 남아 있다.

책의 크기는 28.3㎝×18.2cm이다. 표지에 ‘홍루몽(紅樓夢)’이란 제목과 회목(回目)을 쓴 별지를 붙이고 본문 상단(本文上段)에 주필로 원문을 싣고 옆에 한글로 중국어 발음을 표기(表記)했으며 하단에는 우리말 번역을수록(蒐錄)했다. 1면은 8행이며, 1행은 18자 내외로 가지런하다. 회목(回目)과 시사(詩詞)의 경우에는 두 칸을 내려썼다. 원문도 8행이지만 옆에 글자마다 발음(發音)이 달려 있어 크기가 작고 행의 길이는 하단의 역문 내용(譯文內容)에 맞추었기 때문에 각각 다르다.

역문에는 부분적으로 간단한 쌍주(雙註)가 있는데 주로 고유명사(固有名詞)나 중국의 고금 문물제도(文物制度) 중 당시 우리 독자들이 알기 어려운 것에 대해 달았다. 번역자(飜譯者)나 필사 연대 등은 책 속에 밝혀져 있지 않으므로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가람(嘉藍) 이병기(李秉岐)의 말에 따르면 1884년(고종 21) 전후에 이종태(李鍾泰)가 고종의 명으로 수십 명의 문사를 동원하여 번역(飜譯)했다고 한다. 현재까지 세계에서 가장 이른 ‘홍루몽’ 완역본(完譯本)으로 알려져 있다.

‘홍루몽(紅樓夢)’의 판본으로는 80회본과 120회본이 있는데 80회본은 필사본(筆寫本)이다. 120회본은 고악(高鶚)이 쓴 40회본을 덧붙여 1791년경 정위원(程偉元)에 의해 간행된 것으로 ‘정갑본(程甲本)’이라 한다. 이 ‘정갑본’을 개정한 것이 1892년에 간행(刊行)되었다는 ‘정을본(程乙本)’이다.

‘홍루몽’의 번역과 완전히 일치하는 원본 판본은 알 수 없으나 다만 정각본(程刻本) 이후에 출현한 ‘본아장판본(本衙藏板本)’이나 1832년 간행된 ‘왕희렴판본(王希廉板本)’ 등이 가장 근접(近接)한 것으로 추정된다.

내용: 이 소설은 등장인물이 500여 명에 달하는 장편 대하소설(長篇大河小說)로 우리나라의 장편 가문소설(長篇家門小說)과 비견(比肩)된다. 주인공은 옥을 입에 물고 태어나 “여성은 맑고 깨끗한 물로 되어 있고 남자는 더러운 진흙으로 되었다.”고 말할 정도로 여성주의자인 가보옥(賈寶玉)과 총명하지만 병약한 그의 사촌 누이동생 임대옥(林黛玉), 그리고 가정적이며 건강한 설보채(薛寶釵)이다. 많은 사람들의 사치(奢侈)와 대관원(大觀園) 등의 건축으로 차차 기울기 시작하는 가씨 집안에서 보옥(寶玉)은 보채(寶釵)에 대해서도 호감을 가지지만 대옥(黛玉)을 더 사랑한다. 그러나 보옥이 집안의 계략(計略)으로 설보채(薛寶釵)와 마음에 없는 혼인을 함에 따라 그들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안타까운 그리움 속에 죽음의 결별로 끝나고 만다. 가보옥(賈寶玉)은 마침내 사랑의 허무함을 절실히 깨닫고 모든 것을 훌훌 털어 버리고는 출가(出家)하고 만다. ‘홍루몽’의 이야기는 바로 그가 인간세상(人間世上)에서 겪은 19년간의 사연(事緣)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의 내용을 형성하고 있는 또 하나의 커다란 줄기는 앞의 세 젊은이의 사랑과 혼인이라는 문제 외에도 가씨 집안의 흥망성쇠(興亡盛衰) 과정에 관한 서술이다. 이 집안은 개국공신(開國功臣)의 후예로서 이미 백년 가까이 온갖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사치와 낭비(浪費)를 일삼아왔다. 집안에는 이미 장래를 진지하게 걱정하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다. 가문의 체통(體統)과 규율을 책임져야 할 가보옥(賈寶玉)의 백부와 부친은 각각 책임을 통감(痛感)하지 못하고 실질적으로 일을 맡아보는 그의 종형제들은 방탕(放蕩)한 생활만을 열심히 추구하고 있을 뿐이다.

할머니 사태군(史太君)은 집안에서 가장 연로한 어른으로서 존경과 추앙(推仰)을 한 몸에 받고 있지만 미처 가문의 몰락(沒落)을 감지하지 못하고 그저 귀여운 손자 손녀들과 시간가는 줄 모르고 즐거운 나날을 보낸다.

가보옥의 외사촌 누나이면서 동시에 사촌 형수가 되는 왕희봉(王熙鳳)은 수백 명에 이르는 집안 식구를 관리(管理)하며 강력한 권세를 휘두른다. 그러나 사리사욕을 채우다가 마침내 가문의 몰락을 초래(招來)하여 죽음에 이르는 비참한 결말을 맞이한다. 마치 먹이를 다 먹은 새들이 각기 숲 속으로 날아가듯이 집안은 와해(瓦解)되어 갔으며, 그 와중에서 주인공 가보옥(賈寶玉)은 더더욱 인생과 사회에 대한 쓰라린 회한(悔恨)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의의와 평가 :
이 소설은 등장인물의 성격에 대한 세밀한 묘사(描寫)와 긴박감 넘치는 구성 및 유려(流麗)한 문체로 청대의 으뜸가는 소설로 꼽히며 1792년 ‘정을본(程乙本)’이 초간(初刊)된 이래 100종 이상의 간본과 30종 이상의 속작(續作)이 나왔다.

낙선재 번역본(樂善齋飜譯本)은 ‘홍루몽’ 외에도 5종의 속작까지 번역했지만 소수 궁중의 여인들에게만 읽힌 듯 널리 유통(流通)되지 못했으며 우리나라 국문소설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 이보다 훨씬 이전에 나온 ‘완월회맹연(玩月會盟宴)’ 등의 장편 대하소설과는 아무런 영향 관계가 없다.

다른 중국 통속소설(通俗小說) 번역본과는 달리 대역본의 형태를 취하고 중국어 발음을 한글로 표기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중국어 교재(敎材)로서의 이용도 고려한 듯 하나 발음 표기에 오류(誤謬)가 너무 많아 정확성(正確性)이 크게 떨어진다. 그러나 ‘홍루몽(紅樓夢)’ 원전의 다양한 내용과 분량의 방대함으로 인해 풍부한 어휘 자료를 담고 있고 이를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그에 상응하는 우리말 어휘의 활용(活用)을 보여주고 있으며 “거후로다, 밋브다, 벅벅이, 셰답ᄒᆞ다, 시러곰” 등 고어의 흔적(痕迹)이 역력하기 때문에 근대 국어 연구자료(硏究資料)로서도 그 가치가 높다. 장서각(藏書閣)에 있다.

중국 고전소설 홍루몽의 등장인물(登場人物)을 정리한 문서다. 등장인물의 수는 주역부터 조역까지 이름만 언급(言及)되는 단역까지 포함하여 500여 명에 달하며, 주요 인물들 중에서 여성의 비율이 높다. 남성 인물들도 여럿 등장하지만 대부분 막장이며 주색잡기(酒色雜技)에 빠져 지내는 잉여들이 많다. 대표적인 인물이 왕희봉(王熙鳳)의 남편인 가련(賈璉)과 설보차(薛寶釵)의 오빠인 설반(薛蟠)이다.

그리고 비중 있게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결말이 영 좋지 못하다. 왕희봉의 경우 일족이 몰락하고 후원자인 가모(史太君)마저 노환으로 사망하자 권력(權力)을 잃고 병까지 겹쳐 안습한 죽음을 맞은데다가 딸인 가교저(賈巧姐)는 인신매매단(人身賣買團)에 팔려갈 뻔 했으며 영국공(營國公) 가사의 딸인 가영춘(賈迎春)은 가정폭력에 시달리다가 요절(夭折)했고 가보옥(賈宝玉)을 짝사랑했던 비구니인 묘옥은 도적단에게 검열삭제(檢閱削除)당한 후 행방불명(行方不明), 가보옥의 측근 시녀 중 한 명인 청문은 다른 하인의 모함을 받고 쫓겨난 후 병사했으며 임대옥(林黛玉)은 가보옥과 설보채(薛寶釵)의 혼인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은 나머지 지병이 악화(惡化)되어 선물 받았던 손수건과 자신이 쓴 시집을 태우고 죽어 버렸다.

작중에서 죽지 않은 캐릭터도 안습(眼濕)한 결말을 맞는 게 대부분이며 가보옥(賈宝玉)은 계략에 휘말려 설보채(薛寶釵)를 임대옥(林黛玉)으로 착각하고 아내로 맞았다가 멘붕에 빠진 후 아내를 두고 가출해 버렸고 녕국공(寧國公) 가진의 여동생인 가석춘(賈惜春)은 시궁창스러운 상황을 보고 비구니가 되었다. 가보옥의 형수인 이환은 아예 시작부터 과부(寡婦)로 등장했으며 사상운(史湘雲)은 결혼 직후 남편이 요절해 버렸다. 이환과 사상운, 그리고 설보채의 경우 과부의 개가를 금지(禁止)하던 풍습과 맞물려 그야말로 현시창인 상황이다. 그나마 이환(李紈)과 보채는 아들이라도 두어 대를 이을 수 있기 때문에 다행이나 남편이 결혼 직후 바로 요절(夭折)한 사상운은 그야말로 답도 찾을 수 없는 상황이다.

금릉 십이차(金陵十二钗)

소설의 초반부인 5회에서 등장한 명부에 기록된 캐릭터들로 해석하면 금릉(金陵)의 열두 여인이며 도입부(導入部)에서 소개된 홍루몽의 다른 제목이기도 하다. 이들은 묘옥, 진가경(秦可卿), 이환을 제외하면 모두 4대 가문인 가씨(賈氏), 사씨(史氏), 설씨(薛氏), 왕씨(王氏)에 속해 있거나 이들과 친인척관계(親姻戚關係)를 맺고 있다.

실상 홍루몽(紅樓夢)의 주요 여성진 전원이 이 금릉 십이차(金陵十二钗)에 포함되어 있다고 보면 된다. 다만 부책(副冊)과 우부책(又副冊)에 소속된 여성들은 비중이 매우 적으며 정책(正冊)에 수록된 인물들 역시 해당 시사편이 지나면 얼굴보기가 힘들어진다. 정책의 명단(名單)에 수록된 12명은 모두 작중에서 등장하지만 부책과 우부책의 명단 중에서 이름이 공개된 인물은 진영련(香菱)과 청문(晴雯), 화습인(花襲人) 뿐이다. 공통점(共通點)으로는 작중에서 최소 한 번씩은 불행해지며 대부분 결말이 영 좋지 않아서 죽거나 불운(不運)을 겪는 캐릭터가 많다.

4대 가문

홍루몽에서 4대 가문은 서로 혼맥(婚脈)으로 이어진 가씨·사씨·설씨·왕씨 가문을 작중에서 일컫는 말이며 소설의 주요 인물들은 거의 모두 4대 가문 출신이거나 이들과 직,간접적으로 엮여 있다. 작중 4회에서 언급된 호관부를 통해 4대 가문의 권력을 알 수 있는데 혼맥과 인맥(人脈)을 통해 안팎으로 엮여 있는 탓에 전성기 때는 웬만한 신분(身分)의 사람들은 감히 맞설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소설 후반에는 사씨 가문을 제외하면 주요 인물(主要人物)들이 죽거나 가세(家勢)가 기울게 된다.

주인공인 가보옥(賈宝玉)을 포함한 주요 인물들이 속한 가문으로 작중에서는 개국공신(開國功臣) 형제인 녕국공(寧國公) 가연의 후손들과 영국공(英國公) 가원의 후손으로 나뉘어 있으며 형제 중에서 가연(賈演)이 형이었던 이유로 가문 전체의 수장(首長)은 가연의 후손인 가경(賈敬)이 맡았으나 그의 아들인 가진(賈珍)이 지위를 물려받게 된다. 영국공의 작위는 가원춘(賈元春)의 후손인 가사에게 3대째 세습(世襲)되었으나 그가 작위를 몰수(沒收)당한 후에는 동생인 가정에게 공작위(公爵位)가 돌아갔다.

중국 고전문학(古典文學)의 백미로 꼽히는 ‘홍루몽(紅樓夢)’의 새로운 비밀이 중국 대륙을 들썩이게 하고 있다. 청나라 때 작가 조설근(曹雪芹)이 이 소설을 ‘80회’까지 쓰고 죽자 훗날 고악(高顎)이라는 문관이 뒤를 이어 ‘120회’로 정리했다는 통설(通說)을 뒤집는 파격적인 주장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조설근은 애초 이 소설을 ‘108회’로 완성했으나 고악이 청 왕조에 대한 비판적 함의(含意)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80회’ 이후 ‘28회’를 ‘40회’로 늘리면서 의도적(意圖的)으로 결론(結論)을 왜곡했다는 것이다.

중국의 유명 작가 류신우(刘心武)가 최근 내놓은 이 주장은 ‘홍루몽(紅樓夢)’의 결말이 당시 청 왕조의 ‘사상 탄압’에 의해 왜곡(歪曲)됐다는 얘기여서, 원작의 ‘사라진 내용’에 대한 궁금증을 일으키고 있다. 류신우(刘心武)는 한 텔레비전 강론에서 “‘홍루몽’은 왕조시대 귀족들의 도덕적 타락(道德的墮落)을 보여주면서 그 결말을 비극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당시 사회의 총체적인 파탄(破綻)을 암시했다”며 “청 왕조가 이런 불온성(不穩性)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고악을 ‘대리 작가’로 투입(投入)했다”고 주장했다.

“조설근의 ‘홍루몽’은 고악(高顎)에 의해 왜곡됐다.” 류신우(刘心武)는 요즘 ‘중국중앙텔레비전’을 통해 방영(放映)되고 있는 ‘백가강단’이란 프로그램에서 ‘홍루몽’은 청나라의 관헌 고악(高顎)에 의해 왜곡됐다고 주장(主張)했다. 지금 중국인들이 보고 있는 ‘홍루몽’은 조설근(曹雪芹)의 원작과 매우 다르다는 것이다. 그는 “‘홍루몽’이 조설근과 고악의 공저(共著)라는 오류는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며 “조설근은 ‘홍루몽’을 108회로 완성했으나 고악이 훗날 이를 정리(整理)하면서 80회 이후 28회를 재구성하고 나머지 12회는 직접 지어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홍루몽(紅樓夢)’의 결론이 왜곡됐다“며 “고악(高顎)은 청 왕조를 대신해 ‘홍루몽’의 반봉건성을 희석(稀釋)시켰다”고 비판한다. 고악은 청 왕조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대중의 사상을 통제한 궁중문인(宮中文人)으로서 그가 손을 댄 40회는 진짜 ‘홍루몽’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고악은 ‘홍루몽’을 개작 혹은 창작하면서 원작의 내용을 삭제(削除)하고 흐름을 바꿨다”며 “‘홍루몽’의 원 모습을 복원(復元)하기 위해선 조설근(曹雪芹)과 고악을 반드시 갈라놓아야 한다”는 강조(强調)했다. 그에 따르면 ‘홍루몽(紅樓夢)’의 결말은 지금 알려진 것보다 훨씬 비극적이다. 남자 주인공 가보옥(賈寶玉)의 집안은 비참하게 몰락(沒落)하고 그와 사랑을 나눴던 여자 주인공 임대옥(林黛玉)은 호수에 뛰어들어 자살한다. 가보옥은 임대옥이 죽은 뒤 또 다른 여자 주인공인 설보채(薛寶釵)와 결혼하나 설보채 역시 곧 병에 걸려 죽는다. 임대옥을 이어 또 다른 여자 주인공 사상운(史湘雲)과 만나 거지처럼 처참(悽慘)하게 살아가다 사상운이 굶어 죽자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고 출가해 승려(僧侶)가 된다. 류신우(刘心武)의 이런 주장이 알려지자 곳곳에서 반론이 제기(提起)되고 있다. 그의 주장이 기존 ‘홍루몽(紅樓夢)’에 대한 해석을 완전히 뒤집었기 때문이다. ‘홍루몽’ 연구자 천린은 “고악이 ‘홍루몽’의 40회를 왜곡했다는 류의 주장(主張)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며 “‘홍루몽’ 연구자(硏究者)들이 그의 해석을 참고(參考)한다면 큰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비판한다. 일각(一角)에선 류신우(刘心武)의 주장을 책을 팔기 위한 장사꾼 심보에서 나온 것이라고 깎아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류는 “나의 해석(解釋)은 전적으로 ‘홍루몽’에서 나온 것”이라며 ‘홍루몽’을 더 꼼꼼히 읽으라고 받아친다. 한편에선 조설근(曹雪芹)의 사라진 결론을 복원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한 인터넷 포탈에선 누리꾼들이 연명(聯名)해 조설근의 사라진 원본 28회를 완성해달라고 류신우(刘心武)에게 요청하기도 했다. 류신우(刘心武)는 이에 대해 “‘홍루몽’을 복원(復元)하는 것은 창작(創作)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라면서도 “이 늙은 몸을 바쳐 한번 해볼 지도 모른다”고 여운(餘韻)을 남기고 있다. 그는 “‘홍루몽’은 ‘레미제라블’보다 더 위대한 걸작”이라며 “나의 해석이 ‘홍루몽(紅樓夢)’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높이는 계기(契機)가 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홍루몽이 뭐길래?

'석두기(石頭記)' '금옥연(金玉緣)' 등으로도 불리는 '홍루몽(紅樓夢)'은 등장인물의 세밀한 성격 묘사(性格描寫)와 기복이 넘치는 구성으로 중국을 대표하는 고전문학으로 꼽힌다. 1792년 초간 된 이래 100여종의 간본과 30여종의 속작(續作)이 나왔을 정도로 중국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지금까지도 작자와 등장인물에 대한 평론이 속출해 ‘홍학(紅學)’이라는 말까지 생겼다. 그동안 영화와 드라마로도 여러 차례 만들어졌다. 중국 정부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 맞춰 새로운 '홍루몽' 드라마를 내보낼 계획(計劃)이다.

난징의 귀족 가씨 집안을 주무대(主舞臺)로 펼쳐지는 '홍루몽(紅樓夢)'에는 무려 500여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인물(人物) 하나하나가 뚜렷한 개성(個性)을 뽐내면서 거대한 대하소설을 이룬다. 옥을 입에 물고 태어났다는 남자 주인공 가보옥(賈寶玉)과 총명하지만 병약한 그의 사촌 누이동생 임대옥(林黛玉), 그리고 가정적이며 건강한 설보채(薛寶釵)의 사랑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최근 연구는 이를 조설근 자신의 얘기로 보는 경향(傾向)이 강하다.

가보옥(賈寶玉)의 삶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하다. 가보옥은 설보채(薛寶釵)에 대해서도 호감을 느끼지만 임대옥(林黛玉)과 결혼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집안의 실권을 쥔 할머니 사태군(史太君)은 임대옥의 몸이 허약하다며 이를 허락(許諾)하지 않는다. 할머니의 계략(計略)에 속은 가보옥이 설보채와 결혼(結婚)하던 날에 임대옥은 쓸쓸히 숨을 거둔다. 인생무상(人生無常)을 느낀 가보옥은 과거장에서 몰래 도망간다. 훗날 나루터에서 아버지를 만나지만 목례(目禮)만 남긴 채 스님과 도사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사라진다.

홍루몽(紅樓夢)의 작가-조설근(曹雪芹)

중국 고전소설 - 홍루몽(紅樓夢) - 중국 고전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홍루몽’의 새로운 비밀이 중국 대륙을 발칵 뒤집혔다. 1715년에 출생, 설근은 그의 자이고 본명은 조점(曹霑)이다. 조설근의 아버지는 2대 이상을 조씨 집안에서 역임한 정부의 요직을 계승했고 그 이후 이유를 알 수 없는 정치적 사건으로 인해 조씨 집안이 몰락(沒落)의 길을 걷게 되어 이 후로부터는 쇠퇴일로(衰退一路)에 접어들었다.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조설근의 홍루몽이 탄생했다. 따라서 홍루몽은 저자가 비참한 현실에서 화려했던 유년시절을 되돌아본 자선적적인 소설이다.

홍루몽(紅樓夢) 소개

1791년 첫 출간 되었으며 ‘석두기(石頭記)’ 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홍루몽은 총 120회에 90여만 자나 되는 대장편이다. 120회본 중 앞부분 80회는 조설근이 지었고 40화는 고악이 지었다. 조설근이 만년에 쓴 작품 “열 번을 읽어보고 다섯 번을 고쳤을 정도”의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다. 청 말의 몰락해가는 대가의 젊은 남녀들의 생태를 생동감 있게 묘사한 작품이다. 대관원(大观园)을 배경으로 하고 가보옥(賈寶玉)과 임대옥(林黛玉)의 사랑과 비극적 결말을 나타내고 있다. 봉건 관념과 봉건 질서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홍루몽(紅樓夢)의 배경

01 정치 사상적 배경

1)홍루몽은 청조의 건륭 연간에 창작되었음
2)당시 중앙집권 독재통치가 최고조에 달함
3)관료들의 부패가 두드러지게 나타남

02 경제적 배경

1)농업 수공업 등, 작은 산업화의 시작
2)토지집중 현상이 나타나고 계급이 분화 됨 – 양극화 현상 대두
3)상업자본이 형성되고 외국세력이 유입되기 시작

03 문단적 배경

1)당시에 문자옥에 연루되는 것이 염려 되어 글쓰기가 위축됨
2)시대적 특징이 드러나는 장편백화소설이 유행함
3)대부분이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은 은폐기법을 사용함
4)재자가인 소설 등이 유행하여 청초문단의 부정적인 특성이 드러남

홍루몽(紅樓夢) 등장인물 - 가보옥(賈寶玉)

중국 고전소설 - 홍루몽(紅樓夢) - 중국 고전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홍루몽’의 새로운 비밀이 중국 대륙을 발칵

红楼梦宝玉
01 가보옥 관련 줄거리

홍루몽의 남자주인공,  가씨 집안의 아들로서 형이 일찍 죽어 매우 귀한 손자, 아들이 됨. 그들의 거처인 영국부의 최고 어른인 가모의 사랑을 받고 자람, 사랑하는 임대옥과의 결혼이 가모와 왕희봉의 계략으로 실패되고 설보채와 결혼함. 이후에 가보옥은 과거시험을 치른 후 행방이 묘연해짐.

02 가보옥의 성격

새로운 인생을 추구하고 전통적인 가치관과 충돌함, 여성성이 매우 강하여 여자와 어울리기 좋아함. 봉건제도에 반하여 과거 벼슬길에 오르지 않음, 남녀평등 혼인자유, 개성 해방들을 요구하는 근대적인 사고와 연결됨

홍루몽(紅樓夢) 등장인물 - 임대옥(林黛玉)

중국 고전소설 - 홍루몽(紅樓夢) - 중국 고전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홍루몽’의 새로운 비밀이 중국 대륙을 발칵

红楼梦十二金钗林黛玉
01 임대옥 관련 줄거리

금릉십이채 중 한 사람, 보옥의 고종사촌 여동생임. 어려서부터 늘 병을 앓고 약하지만 뛰어난 미모를 가짐.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가모의 집인 영국부로 들어와서 살게 됨. 가보옥과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마침내 보옥이 설보채와 결혼식을 올리는 것을 알고 숨을 거둠

02 임대옥의 성격

예술적인 재능과 시 창작 재능이 있음, 보옥과 마찬가지로, 세속적인 것에 관심이 없음. 봉건예교의 속방을 벗어나고자 하는 반항적 인물로 부각됨. 그러나 그녀 자신의 죽음으로 끝내 새로운 연애이야기의 한 전형을 이끌어 내지 함.

홍루몽(紅樓夢) 등장인물 – 설보채(薛宝钗)

红楼梦薛宝钗的人物特点
01 설보채 관련 줄거리

금릉십이채 중 한 사람, 보옥과는 이종사촌으로 나옴. 임대옥과 대비되어 매우 건강하고 전통적인 현모양처의 모습임. 가모 등의 영향으로 가보옥과 결혼하게 됨. 가보옥이 떠나게 되고, 홀로 유복자를 기르며 불행한 삶을 꾸려나감

02 설보채의 성격

그녀의 성격은 임대옥과의 대비가 확연함. 가모, 왕희봉 등과 함께 봉건수호자의 입장에 선 사람

홍루몽(紅樓夢)의 줄거리

01 가씨 집안의 흥망성쇠를 시간의 순서에 따라 담담히 보여줌
02 이야기를 구성하는 두가지 흐름 – 대관원에서 벌어지는 연애이야기와 가씨 가문의 집안일
03 두 흐름이 맞물리며 전체적인 이야기를 이끌어감

홍루몽(紅樓夢)의 철학 사상

01 유교

1)아직은 깊숙한 유교 문화
2)무너져 가는 유교사상

02 도교

1)처음 시작부터 도교적 전설로 시작함 -> 꿈과 현실 구분의 애매모호함.
2)도교의 신선들이 사는 선계를 그리고 동경함 -> 결국 물질과 속세에 찌든 생활을 지속하게 되는 인간세계의 현실을 비판
3)결국 가장 큰 주제로 귀결됨 -> 인생무상과 허망함.

03 불교

1)불교의 윤회설이나 인연설과 연관
2)현실세계의 불교의 타락을 그림
3)작품 전판에 불교적인 의식이나 사상이 깔려있음.

홍루몽, 그 화려함 속 인생 현타 🧐

찐행복은 어디에 있을까?
세상 모든 부귀영화를 누렸던 그들의 이야기에서
오늘 우리의 '진정한 가치'를 찾아봅니다.

들어가며: 왜 지금, 다시 홍루몽인가?

안녕! 👋 오늘 우리가 함께 떠나볼 이야기는 그냥 '옛날 소설'이 아니야. 무려 250년 전에 쓰였지만, 스크롤을 내리다 마주치는 요즘 웹소설보다 더 파격적이고, 웬만한 막장 드라마보다 더 스펙터클하며, 그 어떤 철학책보다 깊은 '인생 현타'를 선사하는 작품이거든. 바로 중국 4대 기서 중 단연 원탑으로 꼽히는 『홍루몽(紅樓夢)』이야.

'홍루몽'하면 보통 '가보옥이랑 임대옥의 짠내 나는 사랑 이야기' 정도로 알고 있는 친구들이 많을 거야. 물론 맞아. 그들의 애절한 사랑은 이야기의 아주 중요한 축이지. 하지만 홍루몽의 진정한 클라스는 그 너머에 있어. 이건 한 가문의 흥망성쇠를 통해 '인생의 부귀영화란 얼마나 덧없는가'를 처절하게 보여주고, '그래서 진짜 중요한 건 대체 뭔데?'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는 거대한 인생 철학서에 가깝거든.

마치 인스타그램 속 화려한 인플루언서의 삶을 부러워하다가도 문득 '저게 다 무슨 의미가 있지?' 싶을 때, 남들 다 가는 길을 따라 숨 가쁘게 달리다가 '나 지금 잘 살고 있는 거 맞나?' 하는 번아웃이 올 때, 바로 그 순간 홍루몽은 우리에게 말을 걸어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고민과 놀랍도록 맞닿아 있다는 거지. 자, 그럼 지금부터 화려하지만 위태롭고, 아름답지만 슬픈 '붉은 누각의 꿈' 속으로 함께 다이빙해보자! 🏊‍♂️

1부: 홍루몽, 대체 뭐길래? - 기본 세팅값부터 알고 가자!

본격적으로 이야기의 깊은 맛을 느끼기 전에, 기본 배경지식부터 살짝 세팅하고 가는 게 좋겠지? '홍루몽'이라는 거대한 세계관을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가이드맵이라고 생각해줘. 어렵지 않으니 겁먹지 말고 따라와 봐!

1. 누가, 언제 쓴 이야기야? (feat. 미완의 대작)

홍루몽은 청나라 건륭제 시절, 조설근(曹雪芹)이라는 인물이 쓴 소설이야. 이 분, 정말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어.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황제의 총애를 받으며 어마어마한 부와 권력을 누렸던 명문가의 자제였지. 조설근 자신도 어린 시절에는 소설 속 주인공 '가보옥'처럼 부족함 없는 귀공자로 자랐어. 하지만 정치적 격변에 휘말리면서 가문이 하루아침에 쫄딱 망해버리고 말아. 😱

인생의 정점과 나락을 모두 경험한 조설근은 베이징 외곽의 허름한 집에서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며, 자신이 겪었던 그 찬란하고도 허망했던 시절을 회고하며 10년에 걸쳐 이 소설을 집필했어. 그래서 홍루몽의 묘사는 그야말로 '찐'이야. 디테일이 살아있는 리얼리즘의 끝판왕이지. 의식주, 건축, 의학, 예술 등 당시 귀족 문화의 모든 것이 담긴 '18세기판 백과사전'이라고 불릴 정도니까.

🚨 잠깐, 미완성이라고?

맞아. 안타깝게도 조설근은 총 120회로 구상된 홍루몽 중 80회까지만 완성하고 세상을 떠났어. 그래서 우리가 현재 읽는 홍루몽의 마지막 40회는 고악(高鶚)이라는 다른 인물이 썼다고 알려져 있어. 이 때문에 후반부 내용이 조설근의 원래 의도와 다르다는 '홍학(紅學)' 연구가들의 논쟁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지. 하지만 이야기의 완결성을 위해 현재는 120회 완본이 정본처럼 읽히고 있어.

2. 그래서 줄거리가 뭔데? (핵심만 초간단 요약)

홍루몽의 세계관은 크게 두 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어. 하나는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 다른 하나는 신선들이 사는 초현실적인 세계. 이 두 세계가 얽히고설키며 이야기가 진행돼.

[초현실 세계]

아주 먼 옛날, 여신이 하늘을 메울 때 썼던 돌 중 하나가 남겨졌어. 이 돌은 영성(靈性)을 갖게 되어 세상을 구경하고 싶어 했지. 때마침 이 돌은 '신瑛시자(신영시자)'라는 신선과, 그의 보살핌을 받던 '강주초(绛珠草)'라는 풀과 인연을 맺게 돼. 강주초는 신영시자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일생 동안 흘릴 눈물'을 가지고 인간으로 태어나기로 결심해.

[현실 세계]

이들이 인간 세상에 환생한 곳이 바로 당대 최고의 권세가인 가(賈)씨 가문이야.

- 돌(石頭) & 신영시자 → 가보옥(賈寶玉): 가씨 가문의 핵심 상속자. 입에 '통령보옥'이라는 구슬을 물고 태어남.
- 강주초 → 임대옥(林黛玉): 가보옥의 고종사촌. 병약하고 예민하지만 순수한 사랑을 간직한 인물.
- 그리고 여기에 또 다른 운명의 인물, 설보채(薛寶釵)가 등장해. 그녀는 부유한 상인 가문의 딸로, 지혜롭고 현실적이며, 가보옥과 '금옥의 인연'으로 엮여 있어.

소설의 주된 내용은 이 세 사람의 엇갈리는 사랑과 운명을 중심으로, '가씨'라는 거대 가문이 어떻게 번영의 정점을 찍고, 또 어떻게 한순간에 몰락해 흩어지는지를 생생하게 그려내는 거야. 마치 넷플릭스 대하드라마 시리즈 같지? 😎

3. '가짜'가 '진짜'가 되는 세상: 홍루몽의 핵심 코드 '진가(眞假)'

홍루몽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를 딱 하나만 꼽으라면 단연 '진가(眞假)'야. '참'과 '거짓'이라는 뜻이지. 작가는 이걸 아주 교묘한 장치로 소설 곳곳에 심어놨어.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인 견사은(甄士隱)과 가우촌(賈雨村)의 이름부터 봐봐.

- 견사은(甄士隱) → '진실은(眞事隱)'과 발음이 같아. (진실한 일은 숨겨져 있다)
- 가우촌(賈雨村) → '가어존(假語存)'과 발음이 같아. (거짓된 말이 남아있다)

소름 돋지 않아? 작가는 시작부터 '이 이야기는 거짓(假)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진실(眞)이 숨겨져 있다'고 대놓고 말하고 있는 거야. 우리가 보는 화려한 부귀영화, 아름다운 사랑, 이 모든 것이 사실은 한바탕 꿈(夢)과 같은 '가짜'일 수 있다는 거지. 그리고 그 '가짜' 속에서 '진짜' 가치를 찾아가는 과정, 그것이 바로 홍루몽의 핵심 주제라고 할 수 있어.

태허환경 (太虛幻境)

초월적 '진실(眞)'의 세계
돌 (石頭) 신영시자 (神瑛侍者) 강주초 (絳珠草)
본질, 이데아, 운명의 근원

2부: '가짜'의 세계, 대관원(大觀園) - 화려함의 정점에서 허무를 보다

가씨 가문의 부귀영화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그들은 가문의 딸이자 황제의 후궁이 된 원춘(元春)이 친정에 잠시 방문하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프로젝트를 진행해. 바로 소설의 핵심 배경이 되는 대관원(大觀園)이라는 인공 낙원을 만드는 것이었지. 대관원은 단순한 정원이 아니야. 이건 홍루몽의 주제 의식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인 공간이야.

1. 지상에 구현된 파라다이스, 그 눈부신 화려함

대관원의 묘사를 보면 입이 떡 벌어져. 😲 기이한 암석과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온갖 희귀한 꽃과 나무가 가득하며, 각기 다른 매력을 뽐내는 수십 채의 누각과 정자가 그림처럼 배치되어 있어. 그야말로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아름다움을 모두 모아놓은 곳이지.

황귀비 원춘이 다녀간 후, 이 텅 빈 공간에 가보옥과 임대옥, 설보채를 비롯한 가문의 젊은 남녀들이 모여 살게 돼. 그들은 이곳에서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고, 연회를 열며 세상의 근심 걱정은 하나도 없는 듯한 나날을 보내. 매일매일이 축제 같고, 그들의 삶은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과도 같았지. 이것이 바로 '홍루(紅樓)', 즉 붉은 누각에서 보내는 꿈(夢)같은 시간이야.

대관원의 삶 = 부귀영화의 절정

이곳에서의 삶은 그야말로 럭셔리의 끝판왕이야. 한 끼 식사에 올라오는 반찬이 수십 가지고, 입는 옷은 계절마다 최고급 비단으로 새로 지으며, 사소한 놀이 하나에도 엄청난 돈과 인력이 동원돼. 이 화려함은 가씨 가문이 누리는 부와 권세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실감 나게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해.

2. 아름다운 새장, 그 안에 갇힌 사람들

하지만 이 완벽해 보이는 낙원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어. 대관원은 외부 세계와 철저히 단절된 공간이야. 이곳의 아름다움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영원할 수 없는 환상에 불과하지. 작가는 이 점을 여러 장치를 통해 암시해.

첫째, 대관원은 '가짜'라는 이름에서 시작돼.

가보옥은 처음 대관원을 구경하며 각 건물에 자신만의 현판 이름을 붙이는데, 이는 모두 자연과 예술에서 따온 순수한 이름들이야. 하지만 아버지 가정(賈政)은 이를 모두 유교적 이념과 황제에 대한 충성을 드러내는 이름으로 바꿔버려. 예를 들어, 보옥이 '소상관(瀟湘館)'이라 이름 붙인 곳은 '유봉래의(有鳳來儀)'라는 식으로 말이지. 이는 순수한 아름다움의 공간이 결국엔 체제와 규율을 위한 '가짜' 공간으로 변질됨을 상징해.

둘째, 그 안의 삶은 결코 자유롭지 않아.

대관원의 아가씨들은 겉보기엔 화려하지만, 실제로는 엄격한 규율과 위계질서 속에 갇혀 있어. 그들은 정해진 운명에 따라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며느리가 되어야만 해. 그들의 웃음 뒤에는 시기와 질투, 암투와 눈물이 숨겨져 있지. 특히 하녀나 하인들의 삶은 더욱 비참해서, 사소한 실수 하나로 쫓겨나거나 목숨을 잃기도 해. 대관원은 결국 신분에 따라 운명이 결정되는 봉건사회의 축소판이었던 거야.

결국 대관원은 '아름다운 감옥'이자 '화려한 새장'이었던 셈이지. 그 안의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질 운명이었어. 마치 우리가 SNS에 전시하는 완벽한 일상이 사실은 수많은 노력과 감정 노동으로 만들어진 '연출된 행복'인 것처럼 말이야.

3. 낙원의 몰락, 모든 것은 연기처럼

가문의 권력 기반이었던 황귀비 원춘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가문의 남자들이 정치 싸움에 휘말려 관직을 박탈당하고 재산을 몰수당하면서 가씨 가문은 급격히 몰락의 길을 걷게 돼. 그들의 부귀영화를 상징하던 대관원 역시 폐허로 변해가지.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대관원은 귀신이 나온다는 흉흉한 소문이 도는 음산한 곳으로 전락해. 한때는 웃음소리와 시 읊는 소리가 가득했던 그곳이 잡초만 무성한 폐허가 되는 과정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성대한 잔치는 언젠가 끝난다(盛筵必散)'는 진리를 극명하게 보여줘. 모든 부귀영화는 결국 한바탕 꿈처럼 허망하게 사라진다는 것, 이것이 바로 홍루몽이 우리에게 던지는 첫 번째 인생 철학이야.

우리가 그토록 집착하는 돈, 명예, 권력. 그것들이 영원할 거라고 믿지만, 사실은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신기루와 같다는 거지. 홍루몽은 대관원의 흥망성쇠를 통해 바로 이 냉혹한 진실을 눈앞에 펼쳐 보여주는 거야. 씁쓸하지만, 곱씹어볼 만한 메시지 아닐까? 🤔

3부: 주인공 3인방, 그들의 선택과 운명 - 당신은 누구에게 공감하나요?

홍루몽의 철학은 결국 인물들을 통해 구현돼. 특히 세 주인공 가보옥, 임대옥, 설보채는 단순한 로맨스의 주인공이 아니라, 각기 다른 삶의 방식과 가치관을 대표하는 철학적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어. 이들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나는 어떤 가치를 추구하며 살고 있는가'를 돌아보게 될 거야.

1. 가보옥(賈寶玉): 세상의 룰을 거부한 이단아 rebel 🤘

가보옥은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작가 조설근의 페르소나로 여겨지는 인물이야. 그는 모든 것을 다 가진 '금수저'로 태어났지만, 세상이 정해놓은 성공의 길을 철저히 거부해.

- 반(反)유교적 아웃사이더: 당시 남자의 유일한 성공 코스는 과거 시험에 합격해서 관리가 되는 것이었어. 하지만 보옥은 과거 시험 공부를 '나라를 망치는 짓'이라며 경멸하고, 공자 맹자 책을 읽는 대신 여자들의 방에서 시를 짓고 노는 것을 더 가치 있게 여겨. "여자는 물로 만들어졌고 남자는 진흙으로 만들어졌다"는 그의 유명한 말처럼, 그는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질서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여성들의 순수함과 섬세함을 숭배하지.

- '정(情)'의 신봉자: 보옥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바로 '정(情)', 즉 사람 사이의 진실한 감정이야. 그는 신분이나 외모, 재산을 따지지 않고 모든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려고 해. 특히 대관원의 여성들이 겪는 고통에 깊이 공감하고 그들의 슬픔을 자신의 슬픔처럼 여기지. 그에게 세상의 부귀영화나 공명(功名)은 모두 '가짜'이고, 오직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진실한 감정만이 '진짜'였던 거야.

- 그의 운명: 결국 보옥은 세상의 질서와 끝까지 화해하지 못해. 사랑하는 임대옥을 잃고, 집안은 몰락하며, 원치 않는 설보채와의 결혼 생활에 괴로워하던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 길을 택해. 이는 세상의 '가짜' 가치로부터 벗어나 '진짜'를 찾으려는 그의 마지막 몸부림이었지. 그의 선택은 현실 도피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가장 순수한 것을 지키기 위한 가장 치열한 저항이기도 했어.

💡 가보옥, 현대의 'N잡러'나 '파이어족'과 닮았다?

정해진 성공 공식을 따르기보다 자신의 가치와 행복을 우선시하는 가보옥의 모습은, 어쩌면 현대의 N잡러나 파이어족의 모습과도 닮아있어. 조직의 논리보다 개인의 성장을, 물질적 성공보다 시간적 자유와 정신적 만족을 추구하는 삶의 태도 말이야.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가보옥은 시대를 250년이나 앞서간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2. 임대옥(林黛玉): 순수한 진심을 지키려 했던 영혼 💧

임대옥은 홍루몽에서 가장 많은 사랑과 연민을 받는 비극의 히로인이야. 그녀는 가보옥과 영혼의 단짝이자,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함 그 자체를 상징해.

- 예술가적 감수성의 화신: 대옥은 병약하고 눈물이 많지만,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문학적 재능과 섬세한 감수성을 지녔어. 그녀가 짓는 시는 언제나 대관원 시회에서 최고로 꼽히지. 그녀에게 시는 단순한 기교가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표현하는 유일한 수단이야. 그녀가 꽃을 묻어주며 읊는 '장화사(葬花詞)'는 자신의 처지를 꽃에 빗대어 노래한 명장면으로, 그녀의 비극적 운명을 암시하는 복선이기도 해.

- 타협 없는 사랑: 대옥의 사랑은 오직 가보옥만을 향해 있어. 그녀는 보옥의 마음을 얻기 위해 밀당을 하거나 현실적인 조건을 따지지 않아. 오직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순수한 교감을 원할 뿐이지. 이 때문에 그녀는 사소한 오해에도 쉽게 상처받고 눈물 흘리지만, 그만큼 그녀의 사랑은 한 점의 불순물도 없는 '진짜' 사랑이었어.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사랑을 지키려 했던 거야.

- 그녀의 운명: 하지만 그녀의 이런 순수함은 현실의 벽 앞에서 처참히 부서져. 어른들의 계략으로 가보옥이 설보채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은 대옥은 피를 토하며 죽음을 맞이해. 그녀의 죽음은 '진실한 감정(眞情)'이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찬 세상(假世)에서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는 홍루몽의 비극적 세계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야.

3. 설보채(薛寶釵): 현실의 룰에 순응한 모범생 👑

설보채는 임대옥과 모든 면에서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야. 그녀는 아름답고, 지혜롭고, 성격까지 원만해서 모든 사람에게 칭찬받는 '완벽한 여성'의 표본이지.

- 뛰어난 현실 감각과 처세술: 보채는 언제나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야. 감정에 휘둘리는 법이 없고, 자신의 본심을 드러내기보다는 상황에 맞게 처신할 줄 알지. 그녀는 윗사람에게는 순종하고 아랫사람에게는 너그러워서 가씨 집안의 실질적인 안주인감으로 평가받아. 그녀의 삶의 방식은 유교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의 덕목을 완벽하게 구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어.

- '금옥의 인연'과 세속적 성공: 보채는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온 금패(金牌)가 있어. 이 금패는 보옥의 통령보옥과 한 쌍을 이루는 '금옥의 인연(金玉良緣)'으로 여겨져. 이는 두 사람의 결합이 하늘이 정한 운명이라는 명분을 만들어주지. 결국 그녀는 임대옥을 제치고 가보옥의 아내가 되는 세속적인 성공을 거머쥐게 돼.

- 그녀의 운명: 하지만 그녀의 성공은 결국 공허한 것이었어. 그녀는 보옥의 아내가 되었지만, 그의 마음만은 끝내 얻지 못해. 남편은 자신을 외면하고 결국 출가해버리고, 그녀는 텅 빈 집을 지키는 신세가 되지. 보채의 삶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져. 세상의 기준에 맞춰 성공하고 안정적인 삶을 얻는 것이 과연 진정한 행복일까? 마음이 없는 관계, 영혼이 없는 성공은 결국 또 다른 형태의 불행이 아닐까 하고 말이야.

홍루몽 인물 관계도: 가치관의 대립

이 세 사람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 당신은 가보옥처럼 세상의 기준을 거부하고 나만의 가치를 찾을 용기가 있는가? 임대옥처럼 상처받을지언정 순수한 마음을 지키고 싶은가? 아니면 설보채처럼 현실과 타협하며 안정적인 성공을 추구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하는가? 정답은 없어. 다만 이들의 삶을 통해 나 자신의 삶을 비춰볼 뿐이지.

4부: "좋다! 노래(好了歌)" - 홍루몽의 핵심 철학 꿰뚫기

자, 이제 홍루몽의 하이라이트, 이 소설의 주제 의식을 단 한 곡의 노래로 압축해 놓은 '좋다! 노래(好了歌, 하오랴오거)'를 만나볼 시간이야. 이 노래는 소설 초반에 한 미치광이 도사가 부르는 노래인데, 그 내용이 너무나도 핵심을 꿰뚫어서 소름이 돋을 정도지. 이 노래와 그에 대한 해설을 이해하면, 당신은 홍루몽의 절반 이상을 이해한 거나 다름없어. 😉

1. 미치광이 도사의 기묘한 노래

가문의 몰락으로 모든 것을 잃고 실의에 빠져 있던 견사은(기억나? '진실은 숨겨져 있다'는 이름의 그 사람) 앞에, 남루한 차림의 도사가 나타나 이 노래를 부르며 지나가.

世人都曉神仙好,惟有功名忘不了!
세상 사람들 신선이 좋은 건 다 알면서, 공명(功名)만은 잊지 못하네!
古今將相在何方?荒塚一堆草沒了。
옛날의 장군과 재상들 지금 어디 있나? 거친 무덤에 잡초만 무성한 것을.
世人都曉神仙好,只有金銀忘不了!
세상 사람들 신선이 좋은 건 다 알면서, 금은보화만은 잊지 못하네!
終朝只恨聚無多,及到多時眼閉了。
평생 재물이 적다고 한탄하더니, 막상 많아지니 눈을 감아버렸네.
世人都曉神仙好,只有姣妻忘不了!
세상 사람들 신선이 좋은 건 다 알면서, 예쁜 아내만은 잊지 못하네!
君生日日說恩情,君死又隨人去了。
살아생전엔 은혜와 사랑을 말하더니, 남편 죽으니 다른 사람 따라가 버렸네.
世人都曉神仙好,只有兒孫忘不了!
세상 사람들 신선이 좋은 건 다 알면서, 자식과 손자만은 잊지 못하네!
痴心父母古來多,孝順兒孫誰見了?
어리석은 부모는 예부터 많았지만, 효순한 자손은 누가 보았던가?

어때? 가사가 정말 신랄하지 않아? 이 노래는 인간이 그토록 집착하는 네 가지 가치, 즉 공명(명예), 금은(돈), 처첩(사랑), 아들(대)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직설적으로 노래하고 있어. 사람들은 영원한 가치(신선)가 좋다는 걸 알면서도, 눈앞의 덧없는 것들을 잊지 못하고 평생을 바치다가 결국 빈손으로 돌아간다는 거야.

2. '좋다(好)'와 '끝나다(了)'의 이중주

이 노래의 제목인 '好了歌(하오랴오거)'는 아주 중의적인 의미를 담고 있어.

- 好(hǎo, 하오): '좋다'는 뜻.
- 了(liǎo, 랴오): '끝나다', '마치다'는 뜻.

그래서 '好了'는 '좋다!'라는 감탄사이면서 동시에 '다 끝났다', '사라졌다'는 의미를 가져. 즉, 세상 사람들이 '좋다(好)'고 여기는 것들은 결국 '끝나고 마는(了)' 것들이라는 거야. 이 노래는 바로 이 '좋음'과 '끝남'의 변증법을 통해 세상 만물의 허무함을 설파하고 있는 거지.

견사은은 이 노래를 듣고 큰 깨달음을 얻어. 그리고는 노래에 대한 해설, 즉 '좋다! 노래 해설(好了歌解注)'을 덧붙이지. 이 해설은 도사의 추상적인 노래를 가씨 가문의 구체적인 현실과 연결시켜 줘.

예를 들어, "옛날의 장군과 재상들 지금 어디 있나?"라는 구절을 "금으로 만든 침상에 잠자던 아가씨, 지금은 어찌하여 누더기 옷 걸치고 종살이하는가?" 와 같이 가문의 몰락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식으로 말이야. 이는 앞으로 펼쳐질 가씨 가문의 비극적 운명을 예고하는 강력한 스포일러이기도 해.

3. 불교와 도교 사상의 결정체: 공(空) 사상

'좋다! 노래'에 담긴 철학은 불교의 공(空) 사상과 도교의 무위자연(無爲自然) 사상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어.

- 공(空) 사상: 세상의 모든 것은 고정된 실체가 없으며, 인연에 따라 잠시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일 뿐이라는 불교의 핵심 사상이야. 우리가 '내 것'이라고 집착하는 부, 명예, 사랑, 심지어 나 자신조차도 결국에는 텅 비어있다는(空) 거지. 홍루몽은 가씨 가문의 흥망성쇠를 통해 이 '공'의 진리를 생생하게 보여줘. 모든 것을 가졌던 그들이 결국 모든 것을 잃는 과정을 통해, 애초에 '가졌다'는 것 자체가 환상이었음을 말해주는 거야.

- 무위자연(無爲自然): 인위적인 욕망과 집착을 버리고, 세상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몸을 맡기라는 도교의 가르침이야. '좋다! 노래'는 바로 이 인위적인 집착(공명, 금은 등)을 버리고 '신선'으로 상징되는 자연의 순리로 돌아가라고 말하고 있어. 주인공 가보옥이 결국 세속을 떠나 출가하는 것도 이러한 도교적 세계관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지.

🚨 잠깐, 그럼 그냥 다 포기하고 살라는 거야?

그건 아니야! 홍루몽이 말하는 '허무'는 허무주의나 염세주의와는 달라. 모든 것이 덧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거지. 이 깨달음을 통해 우리는 불필요한 집착에서 벗어나, 유한한 삶에서 무엇이 정말 소중한지를 다시 생각하게 돼. 즉, '비움'을 통해 역설적으로 '채움'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거야. 이것이 바로 홍루몽 철학의 깊이야.

'좋다! 노래'는 홍루몽 전체를 관통하는 나침반과도 같아. 이 노래의 가사를 마음에 새기고 소설을 읽는다면, 각 인물들의 행동과 사건의 의미가 훨씬 더 깊이 있게 다가올 거야. 모든 화려함 뒤에 숨겨진 '끝남'의 그림자를, 모든 비극 뒤에 숨겨진 '깨달음'의 빛을 발견할 수 있게 되지.

5부: 그래서, '진정한 가치'는 무엇인가? - 홍루몽이 내놓은 대답

자, 이제 가장 중요한 질문에 도달했어. 부귀영화도, 공명도, 심지어 사랑과 가족마저도 모두 덧없는 것이라면, 대체 인생에서 '진정한 가치'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 홍루몽은 이 질문에 대해 명쾌한 정답을 내려주지는 않아. 대신 몇 가지 방향을 제시하며 우리 스스로 답을 찾도록 유도하지.

1. 역설의 가치: '정(情)'의 위대함과 위험함

홍루몽은 모든 세속적 가치가 허망하다고 말하면서도, 유독 '정(情)', 즉 인간적인 감정의 가치에 대해서는 복합적인 시선을 보내. 가보옥과 임대옥의 사랑은 결국 비극으로 끝나지만, 그 과정에서 그들이 나눈 순수한 교감과 진심은 소설 전체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들이야. ✨

- '정'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 가보옥이 세상의 모든 '가짜'를 경멸하면서도 유일하게 집착했던 것이 바로 이 '정'이야. 그에게는 임대옥과의 사랑, 대관원 아가씨들과의 우정, 심지어 하녀들에게 느끼는 연민까지 모두가 소중했어. 이러한 감정들이 있었기에 그의 삶은 고뇌로 가득 찼지만, 동시에 그 누구보다 풍요로웠다고 할 수 있어.

- 그러나 '정'은 고통의 근원: 아이러니하게도 이 '정' 때문에 모든 비극이 시작돼. 정이 깊을수록 집착이 생기고, 집착은 곧 고통을 낳지. 임대옥은 너무 깊은 정 때문에 병을 얻어 죽고, 가보옥 역시 정을 끊어내지 못해 괴로워하다 결국 출가를 택해. 불교에서 말하는 '애별리고(愛別離苦)', 즉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거야. 결국 홍루몽이 말하는 '정'은 양날의 검과 같아. 그것은 삶을 가장 의미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지만, 동시에 우리를 가장 깊은 고통으로 몰아넣는 족쇄이기도 해. 작가는 '정'을 버리라고 말하는 대신, 그 본질이 기쁨이자 고통임을 직시하라고 말하는 것 같아. 그 허망함을 알면서도 기꺼이 빠져드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의 숙명이라고 말이야.

2. 궁극의 가치: '깨달음(悟)'을 통한 초월

홍루몽이 제시하는 가장 궁극적인 가치는 바로 '깨달음'이야. 소설의 구조 자체가 '꿈(夢)'에서 깨어나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지. 주인공 가보옥의 여정은 '미혹(迷惑)'에서 시작하여 '깨달음(覺悟)'으로 끝나는 구도의 길이야.

- 꿈에서 깨어나기: 가보옥은 태허환경에서 자신의 운명을 미리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사랑과 욕망이라는 꿈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하지만 임대옥의 죽음과 가문의 몰락이라는 거대한 충격을 겪으며, 비로소 자신이 집착했던 모든 것이 한바탕 꿈이었음을 깨닫게 돼. 그가 마지막에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하는 것은, 이 꿈에서 완전히 깨어나 현실의 고통을 초월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야.

- '공(空)'의 진정한 의미: 여기서의 깨달음은 단순히 '모든 것은 헛되다'는 허무주의가 아니야. 오히려 모든 것이 텅 비어있기 때문에,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대자유'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의미해. 마치 우리가 명상을 통해 복잡한 생각과 감정을 흘려보내고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처럼 말이야. 가보옥은 이 깨달음을 통해 비로소 모든 고통의 근원인 집착에서 벗어나게 된 거지.

💡 우리 삶의 '깨달음'은?

물론 우리 모두가 가보옥처럼 출가할 수는 없어. 하지만 우리 삶에도 작은 '깨달음'의 순간들은 존재해. 치열한 경쟁 끝에 얻은 성취가 생각보다 큰 기쁨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 영원할 것 같던 관계가 끝났을 때, 우리는 한 뼘 더 성장하고 성숙해지잖아. 홍루몽은 바로 이런 '깨달음'의 순간들을 통해 삶의 진정한 가치를 찾아가라고 조언하는 거야.

3. 창조와 기억의 가치: 사라지는 것들을 붙잡는 행위

마지막으로, 홍루몽은 작품 그 자체를 통해 또 다른 '진정한 가치'를 보여줘. 바로 '기록하고 기억하는 행위'의 가치야.

작가 조설근은 왜 이토록 방대한 소설을 썼을까? 그는 몰락한 가문의 한을 풀기 위해서가 아니었어. 그는 서문에서 "내가 겪었던 꿈같은 환상을 잊지 못하여 이를 세상에 전하고자 한다"고 밝히고 있어. 특히 그는 자신이 만났던 수많은 여성들의 아름다움과 재능, 그리고 그들의 비극적인 삶을 기록으로 남겨주고 싶어 했지.

- 예술을 통한 구원: 대관원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잿더미가 되었지만, 조설근의 글을 통해 그들의 삶은 '홍루몽'이라는 작품 속에서 영원히 살아 숨 쉬게 되었어. 임대옥의 시, 보채의 지혜, 다른 수많은 여성들의 웃음과 눈물이 문자가 되어 박제된 거야. 이는 덧없는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예술의 위대한 힘을 보여줘. 모든 것은 사라지지만, 그것을 기억하고 표현하는 행위는 시간을 초월하는 가치를 지니는 거지.

우리도 마찬가지야. 스쳐 지나가는 일상의 소중한 순간들을 사진으로 남기고, 복잡한 감정을 일기에 쓰고, 나의 경험과 지식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행위. 이 모든 것이 사라져가는 시간을 붙잡고 삶의 의미를 만들어가는 과정일 수 있어. 요즘은 **재능넷** 같은 플랫폼을 통해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을 콘텐츠로 만들어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기도 하잖아? 조설근이 '홍루몽'을 통해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했듯, 우리도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며 '진정한 가치'를 만들어갈 수 있는 거야.

마치며: 홍루몽, 21세기 우리에게 말을 걸다

자, 지금까지 정말 긴 시간 동안 '홍루몽'이라는 거대한 꿈속을 함께 여행했어. 어땠어? 250년 전의 이야기가 지금 우리의 현실과 너무나도 닮아있어서 놀라지 않았어? 😲

우리는 어쩌면 우리 자신만의 '대관원' 속에서 살고 있는지도 몰라. SNS 피드를 가득 채운 화려한 일상,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스펙과 성공, '좋아요' 수로 평가받는 나의 가치... 이 모든 것이 한때 가씨 가문이 그토록 자랑했던 부귀영화와 무엇이 다를까? 우리는 그것이 언젠가 사라질 신기루일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좇느라 정작 소중한 것들을 놓치고 있지는 않을까?

홍루몽은 우리에게 '인생 현타'를 강하게 안겨주는 소설이야. 하지만 그 현타는 결코 우리를 절망에 빠뜨리지 않아. 오히려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죽비'와도 같지.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진짜를 볼 수 있는 눈을 뜨게 되거든.

- 가보옥처럼, 세상이 정해놓은 성공의 길에 의문을 던지고 나만의 '진짜' 가치를 찾아 나설 용기를 얻을 수도 있고,

- 임대옥처럼, 상처받더라도 내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순수함을 잃지 않겠다고 다짐할 수도 있으며,

- 설보채처럼, 현실적인 성공을 추구하되 그 안에서 공허함을 느끼지 않기 위해 무엇을 채워야 할지 고민하게 될 수도 있어.

홍루몽은 우리에게 '이렇게 살아라' 하고 정답을 알려주지 않아. 대신 우리의 삶을 비춰주는 거대한 거울이 되어줄 뿐이야. 그 거울 앞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되지.

"나의 '좋다! 노래'에 등장할, 내가 끝까지 놓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의 삶이라는 한바탕 꿈에서 깨어났을 때, 내게 남는 '진정한 가치'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여정, 그것이 바로 홍루몽이 21세기의 우리에게 선사하는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 화려한 부귀영화의 꿈에서 깨어나, 당신만의 '진짜' 인생을 살아가길. 홍루몽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당신의 삶이 이전과는 조금은 다른 깊이를 갖게 되기를 바라. 🙏

홍루몽, 그 붉은 누각의 꿈은 왜 악몽이 되었나?

봉건 가족 제도라는 '대저택'의 화려함 뒤에 숨겨진 모순과 한계를 낱낱이 파헤쳐 보자!
프롤로그: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고? 🧐

안녕! 오늘 우리가 함께 떠나볼 여정은 중국 고전 문학의 '끝판왕', 바로 <홍루몽(紅樓夢)>이야. '붉은 누각의 꿈'이라는 아련한 제목 때문에 가보옥과 임대옥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로만 알고 있는 친구들이 많을 거야. 물론, 그들의 로맨스는 소설의 아주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지. 하지만 <홍루몽>의 진짜 매력은 그 사랑 이야기를 렌즈 삼아 18세기 청나라 봉건 사회의 심장부를 해부하는 데 있어. 이 소설은 단순한 연애 소설이 아니라, 당시 사회를 지배했던 '가족'이라는 거대한 시스템, 즉 봉건 가족 제도가 얼마나 많은 모순과 한계를 내포하고 있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회 비판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어. 마치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가씨(賈氏) 집안'이라는 거대한 가문을 통해 당대 사회의 병폐를 샅샅이 파헤치지. "에이, 너무 어렵고 고리타분한 거 아냐?"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걱정은 No! 🙅‍♀️ 오늘 나는 너의 친한 친구처럼, 이 복잡하고 거대한 이야기를 아주 쉽고 재미있게 풀어줄 거야. 우리 함께 가씨 집안의 화려한 대저택, '영국부'와 '닝국부'의 문을 열고 들어가 그 안에서 벌어지는 희로애락과 숨겨진 진실을 파헤쳐 보자. 이 여정이 끝나면, 너는 <홍루몽>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될 거야. 준비됐어? Let's Go!

잠깐, <홍루몽>은 어떤 책?

<홍루몽>은 중국 청나라 건륭제 시대에 조설근(曹雪芹)이 쓴 장편 소설이야. 원래 제목은 <석두기(石頭記)>였대. 작가가 살아있을 때 80회까지만 완성되었고, 나중에 고악(高鶚)이라는 사람이 40회를 덧붙여 120회 완본으로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어. 중국 4대 기서(삼국지연의, 수호전, 서유기, 금병매)를 넘어 '중국 최고의 고전 소설'로 꼽히는, 그야말로 '넘사벽' 작품이지! 등장인물만 400명이 넘는 대서사시야. 🤯

1장: 화려한 무대, 썩어가는 대저택 '가부(賈府)' 🏰

<홍루몽>의 주요 배경은 '가부(賈府)', 즉 가씨 집안이야. 이 가문은 그냥 부잣집이 아니야. 황실과 연결된 최고위층 귀족, 즉 '공후(公侯) 가문'이지. 가부는 다시 형님 댁인 '닝국부(寧國府)'와 동생 댁인 '영국부(榮國府)'로 나뉘어. 소설의 주인공 가보옥은 영국부에 살고 있어. 이들의 삶은 어떨까? 상상 그 이상이야. 수백 명의 하인을 거느리고, 매일같이 산해진미로 연회를 열고, 입는 옷은 최고급 비단이지. 특히 가보옥의 누나인 가원춘(賈元春)이 황제의 후궁, 즉 현덕비(賢德妃)가 되면서 가문의 위세는 하늘을 찔러. 황비가 친정에 한 번 방문하는 '성친(省親)'을 위해, 이들은 '대관원(大觀園)'이라는 어마어마한 정원을 짓는데, 그 화려함은 입이 떡 벌어질 정도야. 💸 하지만 이게 전부일까? 조설근은 이 화려함의 이면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겉으로는 번쩍이지만, 속으로는 이미 곪아 터지기 직전이라는 걸 계속해서 암시하지.

"밖에서 보기엔 그럴듯한 가문이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알 수 있지. 속은 이미 썩어 문드러졌어."

- 소설 속 인물 냉자흥(冷子興)의 대사 中 -

이 대사처럼, 가씨 집안은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어. 수입은 한정적인데 씀씀이는 헤프기 짝이 없었거든. 체면과 허례허식 때문에 지출을 줄일 수도 없었지. 결국 몰래 재산을 저당 잡히고, 빚을 내서 빚을 갚는 악순환이 반복돼. 더 큰 문제는 도덕적 해이야. 닝국부의 가장인 가진(賈珍)은 며느리인 진가경(秦可卿)과 불륜을 저지르고, 아들 가용(賈蓉)과 함께 온갖 방탕한 짓을 일삼아. 영국부의 가련(賈璉)은 아내 왕희봉 몰래 바람을 피우고, 권력을 이용해 남의 재산을 빼앗기도 해. 이처럼 가부라는 공간은 봉건 제도의 정점에서 누리는 부귀영화와 그 이면에 숨겨진 경제적 파탄, 도덕적 타락을 동시에 보여주는, 그야말로 '모순의 집합체'인 셈이야.

대관원(大觀園)은 단순한 정원이 아니야. 가씨 집안의 젊은 아가씨들과 가보옥이 외부 세계와 단절된 채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기는, 일종의 '지상낙원'처럼 묘사돼. 하지만 이 낙원은 결국 가부라는 거대한 감옥 안에 있는 '아름다운 감옥'일 뿐이었지. 그들의 자유와 행복은 일시적이고 제한적이었으며, 결국 가문의 몰락과 함께 산산조각 나고 말아. 💔

2장: 누가 진짜 권력자인가? 가부장제의 균열 🎭

봉건 사회의 핵심은 뭐니 뭐니 해도 '가부장제(家父長制)'야. 아버지가, 남성이 집안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시스템이지. <홍루몽>의 가부 역시 이 원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보여.

가보옥의 아버지인 가정(賈政)이 대표적인 인물이야. 그는 엄격하고 근엄한 유학자로, 아들 보옥이 과거 시험을 통해 가문을 빛내주길 바라. 보옥이 여자아이들과 어울리거나 '쓸데없는' 책을 읽는 것을 보면 불호령을 내리고 매질도 서슴지 않아. 겉으로 보기에 가정은 가부의 절대 권력자처럼 보이지. 하지만, 정말 그럴까? 🤔 소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실제 권력의 흐름은 훨씬 복잡해. 가부의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는 바로 가보옥의 할머니, 가모(賈母)야.

가모는 집안의 최고 어른이라는 '효(孝)'의 논리 아래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특히 그녀의 총애를 받는 손자 가보옥에 관한 일이라면, 아들인 가정도 함부로 어쩌지 못해. 가정이 보옥을 때려 반죽음 상태로 만들었을 때, 가모가 눈물을 흘리며 "내가 이 집을 떠나겠다!"고 하자 가정은 즉시 엎드려 사죄해야 했지. 이는 남성 중심의 공식적인 권력 구조와 연장자, 특히 '어머니'의 비공식적인 권력이 충돌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지점이야. 그리고 또 한 명의 실세가 있어. 바로 가련의 아내이자 가보옥의 사촌 형수인 왕희봉(王熙鳳)이야. 그녀는 영국부의 재정과 살림을 총괄하는 'CEO' 같은 인물이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여성이지만, 숫자에 밝고 상황 판단이 빠르며, 카리스마와 수완이 엄청나.

왕희봉은 가부의 재정권을 틀어쥐고 고리대금업까지 하면서 막대한 부를 쌓아. 자신에게 밉보이는 하인들은 가차 없이 내치고, 심지어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살인 교사까지 저지르는 무서운 인물이야. 남편 가련조차 그녀 앞에서는 꼼짝 못 할 때가 많아. 결국 가부의 권력 구조는 '공식적 남성 권력'과 '비공식적 여성 권력'이 기묘하게 공존하며 충돌하는 형태를 띠고 있어. 이는 봉건 가부장제가 겉으로 내세우는 명분과 실제 작동 방식 사이에 큰 괴리가 있음을 보여주는 거야. 남성들은 가문의 '얼굴' 역할을 하지만, 실질적인 운영은 여성들의 손에 달려있는 경우가 많았지. 이러한 시스템은 필연적으로 비극을 낳아. 남성들은 책임감 없이 방탕해지기 쉽고 (가진, 가련), 여성들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암투와 모략을 일삼게 돼 (왕희봉). 결국 가부장제는 남성과 여성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모순적인 제도였음을 <홍루몽>은 생생하게 고발하고 있는 거야.

3장: 사랑이냐, 조건이냐? 정략결혼의 비극 💔

봉건 가족 제도에서 '결혼'은 개인의 행복이나 사랑과는 거리가 멀었어. 철저히 가문의 이익을 위한 수단이었지. 좋은 가문과 사돈을 맺어 정치적, 경제적 입지를 다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어. <홍루몽>은 이 정략결혼의 비극을 가보옥, 임대옥, 설보채 세 사람의 관계를 통해 절절하게 그려내.

먼저, 주인공 가보옥(賈寶玉). 그는 입에 옥을 물고 태어난 귀한 도련님이지만, 봉건 사회의 가치관을 온몸으로 거부하는 인물이야. 과거 시험 공부는 뒷전이고, 여자아이들과 어울려 시를 짓고 노는 것을 좋아하지. 그는 "여자는 물로 만들어졌고, 남자는 진흙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하며 남성 중심 사회에 반기를 들어. 이런 보옥의 운명의 상대는 바로 고모의 딸, 임대옥(林黛玉)이야. 어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외가인 가부에 와서 더부살이하는 처지지. 몸이 약하고 예민하며, 눈물이 마를 날이 없어. 하지만 그녀는 보옥과 영혼의 교감을 나누는 유일한 사람이야. 그들의 사랑은 '목석전맹(木石前盟)', 즉 전생에 나무와 돌이었을 때부터 이어진 운명적인 사랑으로 묘사돼. 하지만 이들의 사랑 앞에 강력한 경쟁자가 나타나. 이모의 딸인 설보채(薛寶釵)야. 그녀는 임대옥과 정반대의 인물이야. 건강하고, 단아하며, 누구에게나 싹싹하게 대하는, 그야말로 봉건 사회가 요구하는 '현모양처'의 표본이지. 게다가 그녀의 집안은 황실에 물품을 대는 거상(巨商)이라 재력도 막강해.

금옥량연(金玉良緣) vs 목석전맹(木石前盟)
이 두 사자성어는 소설의 핵심 갈등을 상징해.

금옥량연(金玉良緣): '금과 옥의 좋은 인연'이라는 뜻. 설보채는 금목걸이를, 가보옥은 통령보옥을 가지고 태어나, 둘이 천생연분이라는 소문이 퍼져. 이는 가문의 이익과 조건을 중시하는 현실적인 결합을 상징해.

목석전맹(木石前盟): '나무와 돌의 전생의 맹세'라는 뜻. 전생에 신선이었던 보옥(신영시자)이 강주초(임대옥의 전생)라는 풀에게 물을 주어 살렸고, 강주초는 인간 세상에 내려가 평생 흘릴 눈물로 그 은혜를 갚겠다고 맹세했다는 이야기. 이는 조건 없는 순수한 사랑, 영혼의 교감을 상징해.

가부의 어른들, 특히 왕부인(보옥의 어머니)과 왕희봉은 누구를 며느리로 원했을까? 답은 정해져 있지. 😥 가세가 기운 가부에게 설보채의 재력은 너무나 매력적이었어. 또한 순종적이고 현실적인 설보채가 반항아 보옥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 줄 것이라 믿었지.

결국 어른들은 보옥을 속여 설보채와 결혼시켜. 보옥은 신부가 임대옥인 줄 알고 혼례를 치렀다가, 첫날밤에야 모든 것이 거짓이었음을 알게 돼. 이 소식을 들은 임대옥은 피를 토하며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고, 모든 것을 잃은 보옥은 결국 집을 떠나 승려가 되는 것으로 소설은 비극적인 결말을 향해 달려가. 이들의 비극은 단순히 운이 나빠서가 아니야. 개인의 감정과 자유로운 선택을 억압하고, 오직 가문의 이익만을 위해 개인을 희생시키는 봉건적 결혼 제도의 필연적인 결과물이었던 거지. 다른 여성들의 운명도 마찬가지야. 보옥의 누이동생인 가탐춘(賈探春)은 총명하고 재능이 뛰어나지만, 멀리 변방으로 시집가 가족과 생이별을 해야 했고, 유약한 가영춘(賈迎春)은 '손중산'이라는 난폭한 남자에게 팔려가듯 시집가 구박받다 죽음을 맞이해. 이처럼 <홍루몽> 속 여성들에게 결혼은 행복의 시작이 아니라, 가문의 도구로 전락하여 고통 속으로 빠져드는 과정 그 자체였어.

4장: 억압된 여성들의 목소리, 그리고 한계 👩‍🎨

<홍루몽>이 위대한 작품으로 평가받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수많은 여성 인물들을 입체적이고 생생하게 그려냈다는 점이야. 소설의 또 다른 제목이 '금릉십이채(金陵十二釵)'일 정도로, 12명의 주요 여성 인물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져. 이들은 저마다 다른 개성과 재능을 가지고 있어. 임대옥과 설보채는 물론이고, 호탕하고 능력 있는 사상운(史湘雲), 그림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가석춘(賈惜春) 등. 이들은 '대관원'이라는 공간에서 '해당시사(海棠詩社)' 같은 시 모임을 만들며 자신들의 재능과 감정을 마음껏 표현해. 이는 당시 여성들에게는 상상하기 힘든, 짧지만 눈부신 해방의 순간이었지. 하지만 이들의 재능과 개성은 봉건 사회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좌절될 운명이었어. 여성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무재(無才)', 즉 재능이 없는 것이 미덕이었으니까. 그들의 시와 그림은 한낱 '소일거리'로 치부될 뿐, 사회적으로 아무런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지. 이러한 여성 억압의 모순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앞서 말한 왕희봉이야.

"왕희봉은 정말 복잡한 인물이야. 그녀는 봉건 제도의 충실한 수호자이면서 동시에 가장 뛰어난 희생자이기도 해. 그녀의 능력은 남성들을 압도하지만, '여성'이라는 한계 때문에 공식적인 지위를 가질 수 없었지. 그녀의 비극은 봉건 사회가 유능한 여성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야."

왕희봉은 남자로 태어났다면 엄청난 정치가나 사업가가 되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녀는 '가련의 아내'라는 위치에 갇혀 있어야 했지. 그녀는 자신의 욕망과 능력을 실현하기 위해 온갖 불법적이고 비정한 수단을 사용했지만, 결국 남편의 외도와 가문의 몰락, 그리고 자신의 건강 악화로 인해 비참한 최후를 맞아. 그녀의 삶은 봉건 사회가 여성의 재능을 얼마나 왜곡하고 파괴하는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사례야. 아가씨들뿐만 아니라, 하녀들의 삶을 통해서도 사회 비판은 이뤄져.

보옥의 하녀인 청문(晴雯)은 손재주가 뛰어나고 자존심이 강하지만, '요망하다'는 누명을 쓰고 쫓겨나 병들어 죽어. 반면 또 다른 하녀 습인(襲人)은 순종적이고 현실적인 처세로 살아남아 보옥의 첩이 되기를 꿈꾸지. 가모의 충직한 하녀 원앙(鴛鴦)은 늙고 호색한 가사(賈赦)의 첩이 되라는 강요에 맞서 머리를 자르고 저항하기도 해.

이처럼 <홍루몽>은 신분이 다른 다양한 여성들의 삶을 통해, 봉건 가족 제도라는 억압적인 시스템 속에서 여성들이 어떻게 저항하고, 순응하고, 또 파멸해 가는지를 다각적으로 보여주고 있어. 그들의 목소리는 작지만 분명하게, 이 사회가 잘못되었다고 외치고 있는 거야.

이러한 깊이 있는 고전 분석은 혼자서는 어려울 수 있어. 때로는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지. 재능넷과 같은 플랫폼에서는 문학, 역사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지식 콘텐츠 제작이나 튜터링을 의뢰할 수 있으니, 더 깊은 탐구를 원한다면 좋은 선택이 될 수 있을 거야.

5장: 몰락의 교향곡, 경제적 붕괴와 도덕적 파탄 📉

가씨 집안은 왜 몰락했을까? 단순히 보옥과 대옥의 사랑이 비극으로 끝나서? 아니야. 그들의 몰락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고, 그 근본 원인은 경제적 문제와 도덕적 타락에 있었어.

가씨 가문의 주 수입원은 조상들이 세운 공으로 나라에서 받는 녹봉과 소유한 땅에서 나오는 소작료였어. 하지만 후손들은 조상의 공에 기대어 놀고먹기만 할 뿐, 새로운 부를 창출할 능력이 없었지. 반면 씀씀이는 어땠을까?

앞서 언급한 황비 가원춘의 '성친' 행사가 대표적인 예야. 단 하루의 행사를 위해 지은 '대관원'은 천문학적인 비용을 소모했어. 이는 가문의 재정에 치명타를 날렸지. 그 외에도 생일잔치, 명절 행사 등 체면 유지를 위한 과시적 소비는 끝이 없었어.

소설 속 유씨(劉氏) 할머니는 가씨 집안의 한 끼 식사 비용이 자신들 같은 농가의 1년 생활비와 맞먹는다는 말을 듣고 경악해. 이 에피소드는 귀족 가문의 사치와 일반 민중의 삶이 얼마나 동떨어져 있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치야.

수입은 줄고 지출은 늘어나는 상황에서, 가문을 좀먹는 내부의 적들이 있었으니, 바로 부패와 착취야. 왕희봉은 공금을 빼돌려 고리대금업을 하고, 하인들의 월급을 착복해. 가련은 집안의 귀한 물건들을 몰래 빼다 팔아 유흥비로 탕진해. 하인들 역시 주인의 눈을 피해 온갖 부정을 저지르지. 총체적 부실, 그 자체였던 거야.

경제적 파탄은 필연적으로 도덕적 파탄을 동반해. 닝국부의 가장인 가진은 며느리와의 불륜도 모자라, 아들 가용과 함께 온갖 추잡한 짓을 일삼아. '효'와 '예'를 중시해야 할 귀족 가문의 중심에서 근친상간과 같은 패륜이 벌어지고 있었던 거지. 이러한 도덕적 타락은 가부장제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야. 가문의 어른들은 아랫사람들을 올바르게 이끌기는커녕,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권력을 남용하고 있었어. 그들이 입으로는 공자와 맹자를 외쳤지만, 행동은禽獸(금수)와 다를 바 없었지. 결국 가씨 집안은 황제의 미움을 사 재산을 몰수당하고 완전히 몰락하게 돼. 하지만 이는 외부적인 충격 때문만이 아니야. 이미 내부에서부터 썩어 문드러져, 작은 충격에도 와르르 무너질 수밖에 없는 상태였던 거지. 조설근은 가씨 가문의 몰락을 통해, 겉만 번지르르한 채 속으로 곪아가던 청나라 봉건 사회 전체가 결국 같은 운명을 맞이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

에필로그: 붉은 누각의 꿈에서 깨어난 지금 🌅

지금까지 우리는 <홍루몽>이라는 거대한 세계를 탐험하며, 봉건 가족 제도의 모순과 한계를 다각도로 살펴보았어. 이제 우리는 이 소설이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한 시대의 종말을 고하는 장엄한 서사시임을 알게 되었지.

<홍루몽>은 가씨 집안의 흥망성쇠를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고발해.

첫째, 겉으로는 질서정연해 보이는 가부장제는 내부적으로 권력의 왜곡과 암투로 가득 찬 모순적인 시스템이었다는 것.

둘째, 개인의 감정과 선택을 억압하는 정략결혼은 수많은 젊은이들을 비극으로 몰아넣었다는 것.

셋째, 여성의 재능과 인간성을 억압하는 사회 구조는 개인과 사회 모두를 파괴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

넷째, 허례허식과 도덕적 타락에 빠진 지배 계층은 결국 경제적 파탄과 함께 자멸할 수밖에 없다는 것.

가보옥이 마지막에 속세를 떠나 승려가 되는 결말은, 이러한 모순으로 가득 찬 봉건 체제 자체에 대한 완전한 부정과 저항을 상징해. 그는 그저 사랑을 잃은 슬픔 때문에 떠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옭아매던 '가족'과 '사회'라는 거대한 감옥으로부터의 탈출을 감행한 거야.

수백 년 전의 이야기지만, <홍루몽>이 던지는 질문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해. 우리는 과연 '가족'이나 '사회'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억압하고 있지는 않은가? 여성에 대한, 혹은 소수자에 대한 보이지 않는 차별과 억압은 없는가? 우리 사회의 화려한 외면 뒤에 가려진 모순과 병폐는 없는가?

<홍루몽>은 한바탕의 '붉은 누각의 꿈'처럼 허망하게 사라져 간 사람들의 이야기야. 하지만 그 꿈에서 깨어난 우리에게, 시대를 초월하는 깊은 성찰과 질문을 던져주고 있지. 이 위대한 고전을 통해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눈을 뜨게 된 것을 축하하며, 오늘의 여정을 마무리할게! 😊 다음에 또 재미있는 지식 콘텐츠로 만나자!

홍루몽-청대의 중국 사회상을 파헤친 최고의 걸작 소설은 은폐 서술 기법으로 시작한다.

기자명 金池山 

제1회-진비는 꿈속에서 신령한 돌을 알게 되고,  가화는 속세에서 미녀를 그리워하다. “이 부문은 소설의 첫 회이다. 작자는 한바탕 꿈같은 경험을 하고 난 뒤에 진짜 사실을 숨기고 ‘신령한 돌(通靈)’의 이야기를 빌려 이 ‘석두기(石頭記)’를 지었다. 그래서 진사은(甄士隱)을 운운한 것이라 스스로 말한다. 그렇다면 책에는 어떤 사건, 어떤 인물들이 그려져 있는 것인가? 작자는 또 이렇게 말한다. ‘이제 세상사가 하릴없이 바쁘기만 할 뿐 한 가지 일도 이루어놓지 못했는데 문득 옛날에….’”(조설근 저, 홍상훈 역, 솔, 2012)

중국 고전 최고의 명작 조설근(曹雪芹,차오쉐친)의 ‘홍루몽(紅樓夢, 1791~1792)’은 인파가 북적이는 장마당의 친절한 변사(辯士)의 열변처럼 시작한다. 전지적 시점의 작가가 모여 있는 청중에서 구전 이야기를 다시 내레이션 하듯이 쓰면서도 이야기 속에 이야기를 담는 액자(額子)소설 형식을 취했다. 뭔가 복잡한 내용 전개가 있을 것을 암시하지만 상징과 은유로 숨겼다. 숨기면서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은폐(隱蔽) 형식을 취했다. 일반 대중이 읽기 쉬운 편한 문체의 첫 문단이다.

홍루몽은 중국 4대 기서(奇書) 중 하나로 중국인의 필독 도서로 꼽힌다. 홍루몽은 ‘붉은 누각의 꿈’이라는 말로 꿈같은 여인들의 삶의 이야기라는 뜻이다. 홍루(紅樓)의 원뜻은 붉은 누각으로 규방(閨房, 부녀자 거주 내실), 즉 여성 거주구역을 지칭한다. 중국 문화의 백과사전 격인 홍루몽은 판본이 많다. 80회(분량) 본과 120회 본이 대표적인데, 80회 본은 필사본이다. 120회 본은 청나라 문인 고악(高鶚,1763~1815 추정)이 40회 본을 덧붙여 쓴 것을 1791년 무렵 문인이자 서적상인 정위원(程偉元)이 간행했다. 그래서 ‘정갑본(程甲本)’이라 하는데 이를 개정한 것이 1792년에 간행됐다. 이 때가 청나라 건륭제(高宗 純皇帝,1711~1799) 통치기다. 원제는 ‘석두기(石頭記)’이다. 다른 이름으로 ‘금옥연(金玉緣)’, ‘금릉십이채(金陵十二釵)’, ‘정승연(情僧緣)’, ‘풍월보감(風月寶鑑)’ 등으로 불린다. 영어 번역본은 ‘Dream of the Red Chamber’이다.

홍루몽은 저자가 30대에 창작에 들어가 여러 일화를 나열한 형태로 10년 동안 쓴 것이다. 국 백성의 입말(口語) 백화(白話, Vernacular Sinitic)를 한자로 기록한 것이다. 이를 백화문(白話文 )이라고 한다. 홍루몽은 단순하게 읽으면 그저 그런 단순한 연애소설, 통속 문학의 전형이다. 하지만 그 속에 명말 청대의 사회상과 문화 등이 유려한 문체로 잘 드러나 있는 걸작이다. 나오는 인물만 700여 명에 이르고, 한글 번역 출판본 기준으로도 7~8권에 이르는 방대한 대하소설이다. 100종 이상의 간본(刊本)과 30종 이상의 속작(續作,속편), 위작(僞作)이 있다.

홍루몽은 워낙 대중화 됐음에도 발표 당시의 문장이 대부분 그대로 읽힌다고 한다. 당대 백성의 입말(구어)로 쓰여졌기 때문이다.등장인물은 황실과 명문 고관대작, 궁중의 환관, 궁녀, 관리, 창극배우, 봉사 여자 이야기꾼, 화훼 전문인, 무당, 도사, 승려, 신선과 선녀 등 700여명이 나온다. 주요 인물은 여성주의자이자 남자주인공 지아 바오유(賈寶玉,가보옥), 여자주인공으로 병약한 사촌 누이 린다이유(林黛玉,임대옥), 여자주인공으로 가정적이며 건강한 쉬바오차이(薛寶釵,설보차) 등이다. 줄거리는 금릉(金陵, 현 남경, 南京)에 있는 ‘가씨(賈氏) 가문의 흥망성쇠’와 가보옥과 임대옥, 설보차를 둘러싼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다. 즉 3류 로맨스의 핵심인 삼각관계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비극적 죽음, 가문의 몰락 등이 소설의 핵심 줄기이다.

홍루몽이 중국 백성들 사이에서 읽히고 구전되다가 유명해진 것은 청말 반청(反淸,청나라에 반대) 운동의 동력이 됐기 때문이다. 반청주의자들이 한족이 아닌 청나라와 봉건 전제군주 타도의 소재로 써먹은 것이다. 중국사 최초 공화국의 등장을 알린 신해혁명(辛亥革命,1911~1912) 전후 한족 지식인들의 홍루몽 언급도 한몫했다. 당시 저명한 학자 후스(胡適, 1891~1962)는 ‘홍루몽고증(紅樓夢考證)’을 통해 홍루몽이 조설근의 자전적인 소설이라는 것을 밝혀내 인기를 배가시켰다. 청나라 말 대학자 왕궈웨이(王國維,1877~1927)는 “홍루몽은 우주의 대저술”이라고 극찬했다. 중국 문학의 아버지 루쉰(魯迅, 1881~1936)은 “홍루몽이 나타난 뒤로 전통적인 사상과 작법이 모두 타파됐다”고 말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조선책략’을 쓴 황준헌(黃遵憲, 1848~1905)은 청 말 주일대사관 참사 시절에 일본 식자층에게 “천지개벽 이래 고금을 통해 가장 훌륭한 작품”이라고 자랑했다고 한다.

거의 모든 책이 불태워지던 중국 문화대혁명(文革,1966~1976, 중국 사회정치 혁신을 내세운 문화 운동)기간에도 ‘홍루몽’ 은 살아남았다. 중국 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毛澤東,1893~1976)의 추천도 컸다. 마오는 “홍루몽은 다섯 번 읽어야 한다”고 추천했다. 중국에서는 ‘만리장성과도 바꿀 수 없는 중국인의 자존심’이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으며, 홍루몽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하는 '홍학(紅學)'이라는 전문적인 학문 분야도 있다. 영화로는 1977년 홍콩 쇼 브라더스가 이한상(李翰祥,Li Han Hsiang,1926~1996) 감독, 임청하(Brigitte Lin, 林靑霞,1954~현재) 주연(남주인공 가보옥 연기) ‘금옥양연홍루몽(金玉良緣紅樓夢, 영어 제목 The Dream Of The Red Chamber, 1977)’을 개봉했다. 중국에서 1987년 중앙텔레비전 1채널(제작 왕푸린), 2010년 안후이위성TV(제작 리샤오훙)에서 방영됐다.

우리나라에서는 세계 최초로 번역본이 나왔다. 1884년 역관 이종태와 문사들이 고종 연간 궁중의 명으로 120회 본을 처음 완역한 것이다. 현재 서울대 장서각(藏書閣)에 소장돼 있다. 이 책은 구한말의 다양한 우리말 어휘가 활용돼 근대 국어 연구 자료 가치가 높다. 1990년대에는 연변대학의 중국 교포(조선족) 학자들이 완역한 본이 예하출판사에서 나왔다. 또 다른 중국교포들이 번역한 청계출판사 판이 나왔고, 2000년대에는 중국문학 전문가 최용철 고려대 중어중문학과 교수와 고민희 한림대 중국학과 교수가 공동 번역한 나남출판사 판이 간행됐다. 최신에는 2013년 솔출판사에서 홍상훈 인제대 중국학부 교수의 완역본(전 7권)이 출간됐다.

홍루몽의 저자로 알려진 조설근(曹雪芹, 차오쉐친,1715년 혹은 1724?~1764)은 청나라 시대 대표 소설가다. 본명은 조점(曹霑). 자는 몽완이다. 현대에 와서 이름으로 알려진 설근은 호다. 성과 호를 붙여 후대에 조설근으로 정착됐다. 카오잔으로도 불린다. 조설근은 청나라 때 장쑤성(江蘇省) 난징(南京)에서 출생했다. 가문은 난징 강녕직조(江寧織造·황궁에 물건을 공급하는 일)를 맡은 귀족이었다. 한족인 조설근 고조(高祖) 조진언(曺振彦)이 명말 침략군 청군에 포로로 잡혔으나 재능을 인정받아 입궐한 것이 출세의 계기였다. 청 강희제(康熙帝, 1654~1722, 베이징 자금성에서 태어난 첫 청 제국 군주) 때 조부에 이어 아버지도 강녕직조를 맡아 권력과 부를 함께 누렸으나 옹정제(雍正帝,1678~1735)압박을 받고, 재산까지 몰수당했다. 조설근 유소년기에 집안이 풍비박산 난 것이다. 조설근 가족은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강제 이주당했고, 베이징 교외에서 가난하게 살았다. 홍루몽을 쓰기 전후에도 매우 궁핍했다.

조설근은 말년에 그림을 그려서 팔아 겨우 생활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10년 동안 써온 가문의 내력과 자전(自傳) 이야기인 홍루몽을 완성하지 못하고, 1763년 마흔여덟 살 되던 해 섣달 그믐날에 영면, 베이징 교외 동북쪽에 있는 지장구에 묻혔다. 조설근이 죽은 직후부터 홍루몽은 필사본으로 주변 사람에게 읽히기 시작해 인기를 끌었다. 이후 사망 30년 전후 활자본으로 출간됐다. 현대 중국에 들어와서 조설근이 묻힌 지장구 인근 베이징 둥청구(东城区)에 베이징국가식물원 황엽촌(黃葉村) 조설근 옛집은 기념관으로 꾸며졌다. 조설근이 유소년기에 살았던 난징에도 조설근 기념관(曹雪芹纪念馆)이 건립됐다. 랴오닝성 랴오양시에도 조설근기념관이 있다. (콘텐츠 프로듀서)

《홍루몽》과 해석 방법론-《홍루몽》작자의 신분 및 그 강력한 해석 기능

글:  백운재

제2장 《홍루몽》 작자의 신분 및 그 강력한 해석 기능 
《홍루몽》 작자의 종족과 해석 사이의 관계
1) 《홍루몽》과 작자 결정론

앞서 살펴본 색은파 저작에 따르면 《홍루몽》의 작자는 사실 해석상의 역할을 하고 있다. 훗날(1921년) 후스가 〈《홍루몽》고증〉을 발표한 것도 작자의 신분을 통해 《홍루몽》이 서술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추적한 것이었다. 그는 그 글에서 색은파의 방법이 ‘수수께끼 풀이’이고 ‘견강부회’라고 비판하면서, 《홍루몽》에 대한 고증은 “믿을 만한 자료에 의거해서 이 책의 저자가 대체 누구이고 저자의 사적과 가계는 어떠하며, 책을 지은 시대는 언제인지 고증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표현으로 보건대 후스는 색은파에 대해 더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바꿔 말하자면 후스가 건립한 ‘신홍학’은 결코 근본적인 문제 해결의 전략으로서 ‘작자 결정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색은파와 마찬가지로 작자의 신분에 집착하여 학설을 세우는 것이었다. 훗날 후스의 영향을 받은 위핑보나 저우루창 같은 ‘신홍학가’들은 더 나아가 작자의 해석 역할을 확정했다.

2) 신홍학의 ‘기인(旗人) 작자설’

후스가 고증을 한 본래 의도는 단지 ‘저작권’을 분명히 하려 한 것일 테지만, 이후의 사태는 오히려 복잡하게 발전했다. ‘저작권’의 위력은 아주 신속하게 해석의 영역으로 스며들어서 많은 소설 연구자들도 조설근이 《홍루몽》의 작자라고 인정했다. 예를 들어서 루쉰(魯迅, 周樹人: 1881~1936) 역시 《홍루몽》의 모델이 작자 조점(曹霑)이라고 지적하면서 차이위앤페이의 관점을 불신했다. 그리하여 심지어 후스의 논적으로서 ‘반만설(反滿說)’을 주장하는 연구자들까지 작자의 문제가 관건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또한 ‘조설근’에게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작자가 기인(旗人) 신분이라는 것은 그 후 수십 년 동안의 역사적 해석(historical reading)을 주도했다. 물론 후스의 고증 이후 모든 비평가들이 작자 문제를 처리하려 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사실은 당연히 그렇지 않았다. 적지 않은 평론가들은 ‘작품의 자율성(autonomous)’을 강조하면서 작자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홍루몽》의 작자’와 관련된 해석 영역에서 후스는 의심할 바 없이 ‘조설근’을 ‘부활(rebirth)’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후로 평론가들이 조설근을 ‘취소’하려면 상당한 힘을 쏟아야 했다.

(1) 후스의 연구와 해석의 전환: 작자의 ‘탈취’는 곧 해석권의 탈취이다

“이 책의 저자가 대체 누구이고 저자의 사적과 가계는 어떠하며, 책을 지은 시대는 언제인지 고증”하는 것이 〈《홍루몽》고증〉(개정판)의 중심 내용이다. 이전의 색은파는 모두 조설근을 편찬자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후스의 고증에 따르면 조설근은 본래 《홍루몽》의 작자였다. 설정이 달라지자 《홍루몽》에 대한 해석에도 즉시 효과가 나타났다. 후스는 “이런 자료들(조설근 개인과 가계에 관한 자료)을 보면 아마 《홍루몽》이 조설근의 자서전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자서전’이라는 견해를 입증하기 위해 그는 다섯 가지 증거를 들었다. 이 다섯 가지 ‘중요한 증거’는 네 번째를 제외하면 모두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작자의 의도와 소설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한 가지로 귀납될 수 있다. 이 둘은 모두 소설 안의 문장을 인용하여 작자 의도의 표현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첫 번째 증거는 제1회의 시작 부분 즉 “작자 스스로 말하기를[作者自云] ……또 스스로 말하기를[自己又云]”을 인용하고 있고, 두 번째 증거는 제1회에서 돌이 한 말(“자신의 일과 정리[自己的事體情理]”, “내가 이 반평생 동안 직접 보고 들은 것[我這半世親聞親見]”)을 인용하면서 그것이 모두 작자가 저작 의도를 스스로 말한 것으로, 아주 ‘명백’하게 쓰여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다고 주장했다.

후스의 세 번째 증거는 그가 집안일에 대해 ‘스스로 서술[自敍]’한다는 작자의 의도를 어떻게 건립했는지를 더욱 잘 보여준다. 《홍루몽》 제16회에는 황제의 강남 순시에 대해 길게 논하는 장면이 들어 있는데, 그 가운데 예전에 태조 황제가 순시한 것을 따라서 순시하자 가씨 집안에서는 소주(蘇州)와 양주(揚州) 일대에서 한 차례 황제를 접대했고, 강남의 진(甄)씨 집안에서 네 차례 접대했다는 이야기가 언급된다. 후스는 여기서 말하는 진씨 집안과 가씨 집안이 모두 실제 역사에서 조(曹)씨 집안을 가리킨다고 주장했다. 그가 제시한 이유는 역사상 강희제가 강남을 여섯 차례 순시했고 조인(曹寅)이 네 차례 접대했는데, 《홍루몽》에서는 역사적 사실을 거의 언급하기 않다가 여기에서만 엄숙하게 제기하기 때문에 작자의 의도를 이렇게 추측할 수 있다고 했다.

아마 조씨 집안에서 황제를 네 차례나 접대한 것은 대단히 이례적이고 성대한 일이기 때문에 조설근이 자기도 모르게——어쩌면 의식적으로——자기 집안의 가장 사치스러운 이 성전(盛典)을 얘기했을 것이다.

후스가 ‘가장 중요한 다섯 번째 증거’라고 여긴 것은 ‘조설근의 역사와 그 집안의 역사’였다. 이 ‘가장 중요한 증거’는 또 가보옥이 반드시 몰락하게 되고, 가씨 집안이 반드시 쇠락하게 된다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가보옥의 몰락에 대해서 후스는 단지 《홍루몽》 첫 부분에서 “한 가지 일도 이루지 못했고[一事無成]” “한 가지 재주도 없이 반평생을 영락하여 살았다[一技無成, 半生潦倒]”와 같은 구절을 인용하여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당연히 작자가 ‘스스로 서술’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고 가정한 다음 작자의 실제 처지를 가지고 이야기의 결말을 추측한 것이다. 하지만 가씨 집안의 쇠락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논술했다. 그의 논술 맥락은 여전히 조씨 집안의 사적(事蹟)을 앞세운 다음 《홍루몽》 안의 문장(제72회에서 태감이 돈을 요구한 일과 제53회에서 가진[賈珍]이 오진효[烏進孝]에게 집안에 수입은 적고 지출은 많다고 얘기하는 것, 제72회에서 전당포에 물건을 맡기고 돈을 마련한 것)을 인용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그는 작자의 의도를 이렇게 추측한다.

《홍루몽》은 조설근이 ‘실제 사실을 숨긴’ 자서(自敍)이기 때문에, 자잘한 일임에도 재삼재사 자기 집안이 부귀했다가 가난해지는 상황을 묘사했다. 이상의 분석을 통해 후스가 채용한 분석 방법이 ‘전기적 비평(biographical criticism)’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비평 방법은 작자의 생애에 관한 자료들에 도움을 받지 않으면 진행할 수 없다. 이전의 색은파는 작자를 이용하려면 작자가 ‘은어’를 만들었다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야 파자(破字)랄지 수수께끼 풀이 등등의 수단으로 방대한 책의 문장을 해석하고 또 책 밖에서 무수한 역사적 사실들을 가져와 자신의 견해에 배합할 수 있었던 것이다. 후스의 전기적 비평은 조씨 집안의 역사적 사실에만 한정되기 때문에 이용할 수 있는 외연(작자의 가계와 생애)이 색은파에 비해 좁았지만, 그의 해석과 작자 사이의 관계는 오히려 더욱 긴밀해졌다. 이 때문에 그의 해석은 세인들의 눈에도 특별히 믿을 만한 것처럼 보였다.

〈《홍루몽》고증〉(개정판)은 주로 작자의 저작 의도와 소설 자체의 관계를 강조하기 때문에, 색은파의 ‘반만설’처럼 작자의 종족을 중시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후스 역시 작자 종족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서 그는 도자들에게 조씨 집안의 쇠락 역사에 주목하라고 하면서 3가지 요점을 지적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팔기세가(八旗世家)의 부유하고 화려한 문학예술 환경이다. 그는 팔기세가의 독특한 점을 이렇게 묘사했다.

부귀한 환경과 문학예술 환경이 합치된 경우는 당시의 한족들 가운데도 없었고, 당시 팔기세가 가운데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여기서 “당시의 한족들 가운데도 없었”다는 구절이 특히 주목할 만하다. 왜냐하면 이렇게 얘기하면 팔기세가인 조씨 가문과 소설 속에 묘사된 가씨 집안의 관계가 더욱 강화되어 ‘자서전’설의 외부 증거 가운데 하나가 됨과 동시에 색은파의 유민 저서설을 암중에 부인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홍루몽》고증〉(개정판)은 1921년 11월 12일에 쓴 것인데, 당시까지 후스는 아직 자신이 고증한 작자의 신분을 근거로 색은파를 공격하지는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1922년 5월 10일에 쓴 〈《홍루몽고증》발문〉은 제2절의 제목이 “차이졔민 선생의 토의에 답함[答蔡孑民先生的商榷]”인데, 여기서 이렇게 썼다. 이전까지 《홍루몽》에 대해 쉽게 견강부회할 수 있었던 까닭은 바로 이전 논자들이 모두 ‘작자의 생애’라는 큰 문제를 소홀히 했기 때문입니다. 조씨 집안이 그렇게 부귀영화를 누리는 환경에 처해 있었음을 몰랐기 때문에 모두들 조씨 집안이 황실 가정, 적어도 명주(明珠) 같은 재상 집안을 가리키지 않을까 의심했습니다. 조씨 집안이 팔기에 속한 세가라는 걸 깊이 믿지 않았기 때문에 이 책이 만주족을 비난하는 것이 아닐까 의심한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구절은 작자의 가계와 종족을 토대로 색은파의 반만설에 대한 반박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 후 위핑보, 저우루창 같은 신홍학가들도 이 새로운 작자 관념으로 색은파를 공격했다. 저우루창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후스는 그에게 소설은 결국 소설이지 역사가 아니니까 너무 융통성 없이 보지 말라고 권한 적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사실이 증명하듯이 후스는 다른 사람이 “조씨 집안을 통해 가씨 집안을 증명하는” 것을 막을 힘이 없었다. 최초에 후스 계열의 학자들과 색은파 반만설 사이의 논쟁점은 ‘작자의 종족’이라는 문제에 달려 있었다. 다음에서는 위핑보와 저우루창의 구체적인 주장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2)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반만설에 대한 위핑보 비판

일찍이 1921년 7월 23일에 위핑보는 구졔깡(顧頡剛: 1893~1980)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그들(다른 《홍루몽》 연구자)이 바른 길을 잃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1) 먼저 편견을 가지고 《홍루몽》을 읽는다. (예를 들어서 차이위앤페이 선생은 스스로 민족주의를 견지하기 때문에 조설근도 역시 그걸 아주 굳건히 지니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사실 조씨 집안은 한군기[漢軍旗]인데 그를 만주족에 반대하며 명나라 왕조의 멸망을 애석하게 여기는 인물이 되라고 억지로 핍박하는 것은 정말 우스운 일이다.)

위핑보의 주장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첫째, 색은파는 미리 편견을 갖고 있다. 둘째, 작자의 측면에서 생각하면 반만설은 성립될 수 없다. 이른바 색은파의 ‘편견’이란 시대사조와 문화 환경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것일 터인데, 이 점은 위잉스(余英時)가 이미 〈근대 홍학의 발전과 홍학 혁명〉에서 제기했고, 나중에 류멍시(柳夢溪) 또한 그를 응용한 자세한 해석을 한 바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들의 주장을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겠다. 다만 위핑보가 색은파가 그(조설근)를 “만주족에 반대하며 명나라 왕조의 멸망을 애석하게 여기는 인물이 되라고 억지로 핍박”한다고 한 점에 대해서는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첫째, 색은파의 마음속에는 기인 작자라는 개념이 전혀 없고, 따로 한족 작자관을 가져다가 “만주족에 반대하며 명나라 왕조의 멸망을 애석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는 견해와 배합한다.

둘째, 색은파는 조설근을 개편자로 여기면서 또한 그를 한족으로 여겼다. 가령 차이위앤페이는 그를 명나라를 애도하는[悼紅, ‘紅’은 곧 ‘朱’씨의 명나라] 사람으로 여기고, 덩쾅옌은 그에게 ‘유민의 마음’이 있었다고 여겼다. 이 때문에 위핑보의 말은 일부분만 맞는 것이다.

어쩌면 이런 이유 때문에 위핑보는 《홍루몽변》(1923)에서 차이위앤페이의 설명에 확실한 증거가 없이 견강부회했고 편견이 담겼다고 비판하기는 했지만, 또한 “작자가 결국 이런 뜻이 없었는지는 사실 알기 어렵고,” “(조설근이) 반드시 만주족을 배척하고 명 왕조를 애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는 할 수 없다.”고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홍루몽연구》(1953)에서는 또 차이위앤페이의 설명에 확실한 증거가 없이 견강부회했고 편견이 담겼다는 비판을 삭제했다. 이걸 보면 어쩌면 위핑보는 자신이 억울하게 차이위앤페이를 비판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3) ‘반만설’에 대한 저우루창의 맹공

후스의 자서전설에 깊이 영향을 받은 또 한 명의 《홍루몽》 연구자인 저우루창의 색은파에 대한 공격은 훨씬 맹렬했다.

조세선(曹世選)으로부터 6대 후손인 조설근에 이르러 집안이 쇠락했지만 조설근의 책에 적힌 바에 따르면 그가 어렸을 때 집안은 음식이나 옷차림, 가정 예법이 전부 만주족의 풍속이었기 때문에 결코 한족을 사칭할 수 없었다. 종합적으로 보면 청 왕조가 개국한 후 100년 뒤에 태어난 조설근은 핏속에 ‘한족’의 유전자가 남아 있긴 했지만 이미 99%이상 만주 기인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의 머릿속에 ‘망한 나라’랄지 ‘명 왕조에 대한 그리움’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면 웃음이 나오게 할 정도로 황당한 얘기가 된다. ‘명주’니 ‘순치제’니 하는 설명들은 여러 세대 동안 이어 온 만주 귀족집안에서 태어나 자란 조설근이 중간에 집안이 몰락하여 산촌에서 책을 썼는데, 예전과 달라진 현재 상황에 대한 감상으로 개인적인 가정의 변천이 아니라 오로지 다른 사람 또는 궁중을 위해 일기장 같은 글을 써서 기묘한 수수께끼를 무수히 만들어 지난 왕조의 일반 명사를 비유하고, 그것을 통해 당시 자신의 처지와 심정을 논했다고 하는 것도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얘기인 것이다. 우리는 조설근의 전체 가계 배경을 충분히 이해해야 비로소 그 개인과 작품을 깊이 이해하여 저 황당무계한 ‘색은파’의 견강부회한 설명을 믿지 않게 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기본적으로 정확한 인식을 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는 작자의 신분과 저작 의도를 동시에 언급하고 있다. 후스는 조씨 집안 같은 팔기세가가 “당시의 한족 가운데는 없었”다고 했지만, 저우루창처럼 조설근의 책 속에 적힌 것이 “전부 만주족의 풍속이었기 때문에 결코 한족을 사칭할 수 없다”고는 하지 않았다. “결코 한족을 사칭할 수 없다”는 말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 책 속에 적힌 것이 모두 만주족의 풍속이니 한족의 풍속이라고 억지로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저우루창의 원문은 분명히 ‘한족[漢人]’이지 ‘한족의 풍속[漢俗]’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해석의 그의 뜻이 아닐 것이다.

둘째, 책 속에 적힌 것은 모두 만주족의 풍속이니 ‘한족’은 만주인을 사칭해서 쓸 수 없다. 저우루창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본문의 내용과 작자의 신분을 배합시킨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런 논조는 《홍루가세(紅樓家世)》에서 다시 한 번 강조된다.

저우루창이 “청 왕조가 개국한 후 100년 뒤에 태어난 조설근은 ……웃음이 나오게 할 정도로 황당한 얘기”라고 한 것은 위핑보의 설명과 사유 방식이 일치하는데, 다만 위핑보는 아직 사형 판결을 내리려 하지 않는다(“[작자의 의도]는 사실 알기 어렵다.” “[작자가] 반드시 그렇게 주장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는 데에 차이가 있다. 하지만 저우루창은 기인 출신의 작자는 ‘만주족에 반대’할 수 없다는 데에 충분히 동의한다. 사실 이 두 연구자가 적수(색은파: 역자)들에 대해 부정한 것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위핑보는 상대방의 설명이 ‘정말 웃기는 이야기’라고 평했고, 저우루창은 상대방의 주장이 ‘웃음이 나오게 할 정도로 황당한 얘기’라고 했다. 저우루창은 “이 책은 결코 ‘만주족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만주족 문화를 칭송한다.”고 했다. (나중에 《홍루몽신증》 수정판에서는 앞서 설명한 중요한 구절들이 “대부분 만주 풍속[多係滿俗]”이라거나 “[조설근이] 머릿속에 ‘명 왕조를 그리는[思明]’ 생각을 가졌다는 얘기는 ‘농담처럼 들린다.[令人感覺滑稽]’”라고 고쳐졌다. 어투가 예전처럼 그렇게 격렬하지는 않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2000년대에 들어서 그는 오히려 조설근이 만주족 황제를 풍자했다고 칭송했다.)

이런 상황은 바로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가 〈작가란 무엇인가〉에서 작가는 우리의 문화에서 제한과 배제, 선택을 하는 데에 쓰이는 어떤 기능적인 원칙이라고 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저우루창의 견해는 분명 조설근의 특수한 신분에 의거하여 다른 의견을 배척한 것이다. 사실 그도 위핑보와 마찬가지로 색은파의 ‘작자론’을 어느 정도 곡해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색은파가 ‘망국’의 회한이나 ‘명 왕조를 그리워’한다는 주장을 할 때에는 작자를 결코 ‘만주 기인’ 출신이라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설정한 ‘유민’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자서전설은 ‘깨뜨림[破]’의 측면에서는 큰 성공을 거두어서 반만설은 순식간에 목소리가 가라앉아 버렸다. 하지만 ‘세움[立]’의 측면에서 자서전설을 주장하는 논자들은 작자가 만주족이라는 배경이 소설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에 대해서는 특별한 의견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작자의 종족이 그저 자서전설을 주장하는 논자들이 색은파를 공격하는 도구 이상의 무엇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자서전설은 주로 ‘조설근의 집안과 경력’을 전제로 노력을 기울였으니, 그들의 정면적인 이론은 《홍루몽》이 조설근의 자서전이라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자서전설이 주류 학설이 된 뒤의 추세는 연구 범주가 ‘종족’에서 ‘가계’로 축소되는 것이었다. 이를 보면 ‘작자의 종족’이 갖는 해석 작용이 점점 쇠퇴하고 있음(완전히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이 분명하지만, 후스가 창립한 ‘신홍학’은 구홍학의 해석 관례를 깨뜨리지 못하고 그저 방향만 바꾸어서 연구의 방향이 더 분명해지고 목표가 더 명확해지게 만들었을 따름이다. 서양의 문학이론가 바르트(Roland Barthes)는 ‘작자’는 제한하는 작용을 한다고 했다.

텍스트에 작자를 부여하는 것은 그 텍스트에 어떤 한계를 부과하고, 최종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글쓰기를 종결짓는 것이다. 이 말에 담긴 이치는 자서전설의 상황에도 참조할 만하다.

조설근이 작자라는 판단을 독자들이 받아들인다면 후스, 위핑보, 저우루창의 관점은 해석에서도 대단히 유리한 지위를 차지할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 이런 관점은 ‘작자’의 가정을 배경으로 삼아 가정환경이 작자의 사상에 영향을 주고, 작자의 사상은 또 소설 창작에 영향을 준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것은 엄밀한 논리적 추론이 아니지만(여전히 필연설이 결여되었으므로) 적어도 사유 방식에서는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가 비교적 쉽다. 둘째, 당시 조설근에 관한 사료(史料)가 많지 않기 때문에 문헌에서 증거를 찾아서 한족과 만주족에 대한 조설근의 태도를 확정하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 (예를 들어서 조설근이 ‘만주족에 반대’한 ‘역사적 증거’는 찾기 어렵다.) 만약 학자들이 ‘저자가 조설근’이라는 신홍학의 개념을 받아들인다면 자서전설의의 ‘종족-가계 결정론’을 뒤집으려 해도 직접적이고 유력한 증거를 제시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기인 출신의 작자 조설근의 출현은 확실히 《홍루몽》의 작자가 ‘한족을 생각하며 만주족에 반대’한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3) ‘기인 작자설’에 대한 색은파의 반응

‘반만설’을 주장하는 《홍루몽》 연구자가 후스 계열의 추론을 약화시키고자 한다면 두 가지 전략을 채택할 수 있다. 첫째는 작자가 작품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면서 ‘작품 자율론’을 견지하는 것이다. 둘째는 ‘조설근’이 작자라는 주장을 뒤집어서 ‘작자 조설근’의 특수한 가계가 작품에 미치는 영향을 없앰으로써 ‘반만설’에 대한 ‘가계 결정론’의 위협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다음에서는 ‘기인 작자설’에 대한 반만설을 주장하는 연구자들(서우펑페이[壽鵬飛], 징메이지우[景梅九], 차이위앤페이, 판중궤이[潘重規], 두스졔[杜世傑], 리즈치[李知其])의 반응을 분석해 보겠다.

(1) 새로운 작자를 내세운 서우펑페이와 징메이지우

신홍학의 자서전설이 주류가 돈 상황에서 ‘반만설’을 주장하는 연구자들이 변론을 위해 채택한 전략은 앞서 설명한 구상과 암암리에 들어맞는다. 예를 들어서 1927년에 서우펑페이는 《홍루몽본사변증(紅樓夢本事辨證)》에서 이 작품의 작자가 “강희 연간 어느 귀족 집안의 빈객으로 있던 어느 거인”이며, 그 거인은 바로 조일사(曹一士)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이 책의 작자는 분명히 후스가 고증한 강녕직조(江寧織造)를 지낸 심양(瀋陽) 조인(曹寅)의 손자이자 조부(曹頫)의 아들인 조점(曹霑)이 아니다. 그러니 또 어떻게 자신의 생애를 스스로 서술할 수 있었겠는가?

서우펑페이는 《홍루몽》이 조설근의 저작이 아니라면 자신의 생애를 스스로 서술했을 리 없으니, 하물며 무슨 ‘종족-가계의 영향’ 같은 것을 논하겠느냐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바로 첫 번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는 전략이었다. 다음으로 자서전설을 주장하는 이들이 작품이 아니라 작자라는 독특한 관점에서 작품에 대한 이해를 추구했다면, 서우펑페이는 반대로 작품의 내용을 통해 작자를 살펴보려 했다. 이 책이 명 왕조를 그리며 청 왕조를 원망하는 의도를 담고 있다는 관점에서 보더라도 절대 기인 신분의 만주족 신하로서 여러 세대 동안 출세하여 청 황실의 은혜에 감격한 사람이 지었을 리 없다. 당연히 명 왕조에 대한 충심을 꺾지 않은 유민이나 시름을 품은 지사(志士)가 지은 것이어야 한다. 그는 여유량(呂留良: 1629~1683)이나 증정(曾靜: 1679~1736) 같은 이들과 같은 마음을 품고 있었지만, 그들보다 자신의 재능을 숨겨서 명성이 드러나지 않게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 또한 엄연히 ‘작품 우선’의 ‘작품 자율성(autonomous)’을 중시하는 논조이다. 그러나 이렇게 소설 자체로 ‘그 의미가 자명하다’는 변론 방법은 서우페이펑의 저작에서 우담바라(Udumbara)처럼 잠깐 나타났다가 바로 사라져 버린다. ‘작자의 권위’에 호소하는 방법은 《홍루몽》 연구의 두 학파에서 줄곧 관행적으로 사용하던 것이었는데, 서우펑페이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조일사가 《홍루몽》의 작자’라는 주장의 증거에 대해 물으면 서우펑페이는 마수신(馬水臣)이라는 작자의 학우(學友)가 한 말을 근거로 제시한다. 그 말의 근거를 물으면 또 마수신의 말이 “분명 근거가 있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이로 보건대 이 논의가 얼마나 유치한지 알 수 있으니, 그 “근거가 있을 것”이라고 했을 때의 ‘근거’가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작자와 개편자에 관한 서우펑페이의 생각은 또 다른 색은파 학자에게 계승되었다. 1934년에 징메이지우(景梅九: 1882~1961)는 《홍루몽진체(紅樓夢眞諦)》에서 왜 작자가 조일사인지에 대해 이렇게 해명했다.

책(《홍루몽》) 속에서 책에 대해 강론하고 문제를 내는 것은 모두 귀결점이 있는데, 다만 가정(賈政)이 얘기한 ‘오직 선비만이 할 수 있다[惟士爲能]’라는 제목은 아주 특이하다. 내가 추측해 보건대 ‘유사(惟士)’는 바로 ‘일사(一士)’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일사만이 이 책을 지을 수 있었다는 말인 듯하다. 이 진술에는 두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 첫째, 그는 이것이 자신의 ‘추측’이라고 솔직히 밝혔다는 것이다. 둘째, 이 ‘추측’에서 ‘유사위능(惟士爲能)’이라는 구절이 반드시 ‘《홍루몽》을 쓸 수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가 하는 점이다. 그게 다른 책이나 다른 일이 아닌 이유는 무엇인가? 메이징지우는 이 문제에 대해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았다. 우리가 보기에 “오직 선비만이 (《홍루몽》을 지을) 수 있다”는 식으로 괄호 안의 말을 덧붙이는 방식은 ‘글자를 더해서 경전을 해석하는[增字解經]’ 것과 다를 바 없다. 글자를 더해서 경전을 해석하는 것은 ‘훈고학(訓詁學)’에서 열 가지 폐단 가운데 하나로 꼽는 것이다.

메이징지우는 세 가지 ‘의체(義諦)’를 제시했는데, 첫째는 명‧청 두 왕조의 정치 및 궁궐 안에서 일어난 일에서 뜻을 찾는 것이고, 둘째는 재상 명주와 그의 아들 성덕(性德)의 일에서 뜻을 찾는 것이고, 셋째는 저자와 편찬자 자체 및 그 집안일에서 뜻을 찾는 것이라고 했다. ‘저자에게서 찾는다’는 것은 바로 조일사에게서 찾는다는 뜻이다. 메이징지우가 찾아 낸 것은 여전히 ‘종족의 은밀한 아픔[種族之隱痛]’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예를 들어서 《홍루몽》 권수(卷首)에 들어 있는 “종이 가득 황당한 말[滿紙荒唐言]”과 마지막 회의 “가슴 아픈 이야기[說到辛酸處]”라는 두 개의 시 구절에 대해 그는 이렇게 풀이한다.

원저자가 망국의 슬픈 한을 감당하기 어려워 두 눈에서 붉은 피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잘 느낄 수 있다. ‘황(荒)’이라는 것은 ‘망한다[亡]’는 뜻이고, ‘당(唐)’은 중국이다. 그러므로 ‘황당’은 곧 망국을 일컫는다. 인간 세상의 가슴 아픔[辛酸] 가운데 나라가 망한 것보다 심한 것은 없다. 이로 보건대 메이징지우가 “작자에게서 찾는다”고 한 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찾는[求]’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알고 보면 결국 그 자신이 설정한 색은의 방법(예를 들어서 황[荒]은 망[亡]이라고 해석하는 음훈[音訓]으로)으로 찾는 것이다.

(2) 자서전설의 작자론에 대한 반만설의 해소

서우펑페이는 조일사를 이용하여 기인 출신의 작자 조설근을 대체하려 했지만, 작자가 조일사라는 그의 주장은 “역사에 증거가 없는 주관적 억측”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겨우 소설의 본문(글자 수수께끼)에 의지하여 자서전파의 작자론을 공격하는 것은 그다지 큰 반박의 힘을 갖기 못한다. 적어도 작자의 의도를 중시하는 사회에서 서우펑페이의 설명은 분명히 설득력이 부족하다.

반만설을 주장하는 또 다른 논자인 차이위앤페이는 심지어 싸움을 포기하고 ‘작자’에 대한 후스의 추단을 인정했다. 이제 후 선생이 앞쪽 80회의 작자 조설근의 가계와 생애, 그리고 뒤쪽 40회의 작자 고악(高鶚: 1763~1815)의 약력에 대해 짧은 기간 동안 아주 많은 자료를 수집했다. 이는 진실로 《석두기》에 대해 공헌한 것으로서……

차이위앤페이는 《홍루몽》 작자에 대한 후스의 견해를 받아들이는 쪽으로 기울었지만(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완전히 받아들이지는 않고 여전히 “책 전체를 조설근이 썼다고 할 수는 없다[未可以全書屬之曹氏]”는 입장을 견지했음), 결코 자서전설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반대로 그는 모순을 파헤치는 방법으로 자서전설을 비판했다. 그는 ‘조설근이 작자’라는 입장에서 후스에게 반문했다.

가씨 집안이 정말 조씨 집안을 반영한 것이고 이 책이 조설근이 자기 집안의 상황을 스스로 서술한 것이라면 어휘 선택에 당연히 분별이 있었어야 한다. 그런데 이제 제17회에서 초대(焦大)가 함부로 욕을 퍼붓고, 제66회에서 유상련(柳湘蓮)이 “당신네 동쪽 집(녕국부: 역자)은 저 대문 앞의 돌사자 두 개만 (도덕적으로: 역자) 깨끗하다.”고 말한 것은 지나치게 여지를 남기지 않은 표현인 듯하다.

차이위앤페이가 문제를 제기한 어투는 상당히 부드럽지만(“지나치게 여지를 남기지 않은 표현인 듯하다.”), 그의 이 논점과 사유 방식은 이후에 반만설을 주장하는 논자들에게 자서전설을 공격하는 중요한 무기가 되었다. 예를 들어서 1951년에 판중궤이(潘重規)는 〈민족의피눈물로 이루어진 《홍루몽》〉을 발표하면서 기인 출신의 작자가 자기 민족과 자기 가문에 대해 심한 욕을 퍼부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본서의 제3장 참조). 또 1959년에 판중궤이는 《홍루몽신해(紅樓夢新解)》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작품은 전체적으로 가씨 집안에서 어린 숙부(가보옥)을 받들어 기르는 것을 질책하고, 더욱이 “한 편에서도 여러 차례 그런 뜻을 나타냈다.” 만약 가씨 집안이 조씨 가문을 비유한 것이라면 조설근이 어떻게 이토록 자기 조상을 심하게 매도했겠는가! 이는 바로 청대 초기에 문태후(文太后)가 예친왕(睿親王) 다이곤(多爾袞)에게 시집간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77년에 두스졔(杜世傑)는 《홍루몽고석(紅樓夢考釋)》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홍루몽》에서 가(賈)씨 성을 가진 사람치고 좋은 사람은 없는 것 같은데, 이는 작자의 집안일을 서술한 것이라는 설명이 성립하지 않는 큰 관건이다. 그런데 그 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이 점을 깊이 숨긴다. 자전(自傳)이 본래 자기를 내세워 자랑하는 것을 위주로 하지는 않지만 자기 집안사람 가운데 선한 이가 하나도 없다고 서술할 이유도 없다. 그런데 가씨 집안의 인물들에 대한 《홍루몽》 서술은 얼마나 비난과 풍자가 심한가!

공평청(龔鵬程: 1956~ ) 역시 비슷한 질문을 던진다. 즉 책에서 가씨 집안의 음란하고 수치심 모르는 일에 대해 풍자하고 비판한 것이 아무 많은데, 정말 자전이라면 누가 이렇게 모진 마음으로 자기 부모와 친척 어른들을 모욕했겠느냐는 것이다. 이 점(작품 속에서 조씨 집안에 대해 비난한 부분이 있는 점)은 확실히 ‘후스 계열’의 연구자들에게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예를 들어서 위핑보는 〈독《홍루몽》수필〉 제36조(條)에서 이렇게 말했다.

설보차를 양귀비에 비유하든 임대옥을 조비연(趙飛燕)에 비유하든(제27회) 상관없이 모두 비난하는 것이고, 가보옥을 양국충(楊國忠)에 비유하는 것도(제37회) 비난하는 것이며, 가씨 집안을 《일봉설(一捧雪)》에 나오는 엄(嚴)씨 집안에 비유하는 것도(제18회) 완전한 비난이다. 《홍루몽》은 가씨 집안과 가보옥, 금릉 12차(釵) 가운데 첫째인 설보차와 임대옥, 금릉 12차의 맨 끝에 있는 진가경(秦可卿)에 대해 이렇게 부정적이니, 지금도 유행하고 있는 자서전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위핑보의 생각은 이렇다. 만약 가씨 집안이 조씨 가문이라면 작자 조설근은 곳곳에서 자기 집안사람들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셈이 아닌가? 이것은 정리상(情理上) 얘기가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서전설’을 신봉하는 또 다른 연구자인 저우루창은 진즉 이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그는 가씨 집안의 인물들에 대한 비판은 바로 ‘작자의 자책’이라고 했다. 어떤 이는 유상련이 녕국부에는 돌사자만 깨끗하다고 얘기했는데, 그렇다면 작자가 자기 집안의 일을 서술하는데 어떻게 조금이라도 숨기거나 서술하기 꺼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인지 의아해 했다. 그렇게 의아해 하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예를 들어서 제5회의 노래는 작자의 자책이다. ……이는 바로 녕국부에서 일어난 모든 애매한 일과 진가경을 암암리에 가리키는 것으로, 그 부분의 지연재 비평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무슨 말투이며 무슨 뜻이며 무슨 심정인가? 조설근이 다른 사람의 숨겨진 일과 궁중의 은밀한 역사를 묘사했다고 생각하려 애쓰는 독자들은 이런 것들을 읽어서 더 깨달아야 할 것인가. 그러면 생각이 조금 바뀔 수 있지 않을까?

저우루창의 논술에서는 조설근이 서술한 것은 단지 자기가 목도하고 경험한 몇 년 동안의 영국부 ‘말세(末世)’에 국한된 뿐이며, 그가 보지 못한 금릉의 옛 일과 조인(曹寅) 당시의 흥성했던 시절은 전혀 끌어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책의 곳곳에 서술된 것은 쇠락하는 장면들뿐이며, 이를 통해 지금 상황이 옛날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것을 나타냈다고 했다. 바꿔 말하면 저우루창은 그런 폄하의 말들이 단지 ‘대비(對比)’하기 위해 쓰였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이론적인 면에서 말하자면 위핑보는 “사랑하지만 그 죄악을 알린다[愛而知其惡]”는 주장을 한 적이 있는데, 그 또한 반만설을 주장하는 연구자들의 의문에 반격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사랑하지만 그 죄악을 알린다”는 것은 《홍루몽》의 작자가 가씨 가문을 아끼기는 하지만 가문 사람들의 단점을 서술하는 것을 기피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그는 조설근의 서술 방법은 일종의 ‘객관적’이고 ‘공평’하며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했다. 그의 말을 빌리면 “《홍루몽》 작자의 수단은 ‘생동적으로 묘사하는 것[寫生]’이다.”이 때문에 색은파 연구자들이 조설근의 창작 의도를 토대로 한 추론은 ‘자서전설’의 뿌리를 철저히 흔들 수 없었다. 자서전설은 또 문헌의 증가로 인해서 장족의 발전을 했다. 1927년 후스는 갑술본(甲戌本)을 입수했고, 1933년에는 경진본(庚辰本)을 보았으며, 이때마다 그는 자신의 자서전설을 공고하게 다지는 글을 썼다(본서 제4장의 지연재를 논한 부분, 특히 “지연재 비평의 신뢰성” 부분을 참조할 것). 1930년대부터 고궁박물원(古宮博物院)의 《문헌총편(文獻叢編)》은 강희 연간의 조인(曹寅)과 조옹(曹顒), 조부(曹頫), 이후(李煦) 등의 상주문에 대한 황제의 주비(硃批)를 계속 간행하여 조씨 집안의 가계에 대한 개황을 드러냈다. 이런 자료들은 자서전설을 발휘하는 데에 더욱 유리하게 작용했다.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상반기까지 발견된 조씨 집안에 대한 문건은 이 외에도 저우루창이 펴낸 《홍루몽신증》(1953)에도 많이 들어 있는데(예를 들어서 ‘조씨가세표[曹氏家世表]’ 등), 그의 고증에는 조씨 집안의 몇몇 친척들까지 포함되어 있다. 1950년대 말엽부터 1960년대 초까지 우언위(吳恩裕)는 《조설근 관련 자료 8종[有關曹雪芹八種]》(1958)과 《조설근 관련 자료 10종》(1964)을 펴냈고, 우스창(吳世昌)은 영문 저작 《홍루몽에 대하여(On Red Chamber Dream)》(1961)을 펴냈는데, 이들 전문 저작들은 모두 조씨 가문의 가계를 깊이 파헤쳐 공백을 메웠다. 당시의 객관적인 정세는 후스의 고증에 동의하는 연구자들이 이미 조설근을 의심할 바 없이 확실한 《홍루몽》의 작자로 여기고 있었다. 이 때문에 1962년부터 1963년 무렵에 중국 대륙에서는 조설근 서거 200주년 기념행사가 열렸고, 이것은 또 연구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그 후 최초의 ‘조설근 전기’로서 저우루창의 《조설근》(1964)가 출간되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전반기까지 현지(縣志)와 비기(碑記), 고궁(古宮)의 공문서 등등의 조씨 가문의 가계와 관련된 문헌자료들이 계속 발견되었다. 1975년과 1976년에는 고궁박물원에서 《강녕직조 조씨 가문 관련 공문서 사료[關於江寧織造曹家檔案史料]》와 《이후의 상주문[李煦奏折]》을 출판했는데, 거기에는 조씨 가문과 이씨 가문에서 강희제에게 올린 상주문이 포함되어 있었다. 신홍학 연구자들은 이런 자료들을 무척 중시해서 연구 보고가 잇달아 나왔다. 이상의 여러 사실들은 이미 《홍루몽》의 작자는 조설근이라는 것을 ‘기정사실’로 만들면서(대대적인 문헌과 기념사업, 연구 활동이 이어졌음) 상당한 기세를 올려서, 여타 학파의 연구자들도 그 현상을 무시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이 때문에 반만설을 주장하는 연구자들이 자신들의 학설을 부연하려 할 때에도 기인 출신의 ‘작자 조설근’이라는 관건을 피해 가기 어려웠다.

기인 저서설은 결국 ‘한(漢) 민족주의’에 입각한 반만설을 주장하던 색은파에게 절대적인 위협이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텍스트’과 ‘작자’ 사이의 ‘모순’을 지적하는 한편, ‘작자 조설근’이라는 견해를 뒤집으려고 시도하거나 조설근을 ‘개조’하여 자서전설을 부정하려 했다. 이리하여 조설근은 색은파의 논쟁에서 초점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조설근에게서 작자라는 신분을 제거하려는 작업은 그 노선에서 또 약간 차이가 있다. 판중궤이는 조설근을 그저 편찬자로만 인정했고, 두스졔는 조설근이란 그저 성실히 베껴 쓴 사람을 가리키는 ‘초사근(抄寫勤)’과 비슷한 발음을 이용해 만든 가명일 뿐이라고 했으며, 리즈치(李知其)는 조설근을 이야기꾼[說書人]이라고 생각했다.

(3) 판중궤이: 원작자는 ‘돌[石頭]’——조설근의 위협 해소 작업 1

판중궤이의 《홍루몽신해》는 시작부터 작자가 기인 출신의 조설근이라는 점을 부정한다. 그는 〈자서(自序)〉에서 “《홍루몽》은 뜻있는 한족 선비가 은어(隱語)로써 은밀한 아픔과 은밀한 일을 서술한 은밀한 책이지, 결코 기인 출신의 조설근이 지은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또 “내가 책 전체를 자세히 살펴보니 확실히 이 책은 어느 민족주의자의 피눈물의 결정이라고 느껴졌다.”고 했다. 그의 관점은 차이위앤페이의 그것과 대체로 비슷하다. 그러나 이 ‘뜻있는 한족 선비’ 또는 ‘민족주의자’는 대체 누구인가? 판중궤이는 이에 대답하지 않고, ‘유민’의 일처리는 모두 묵묵히 진행되기 때문에 자연히 세상에 성명을 드러내려 하지 않으므로 작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돌[石頭]이란 바로 이름을 숨긴 작자의 가명”이라고 했다. 종합하자면 《홍루몽》 작자의 성명은 고의로 숨겨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돌을 작자로 여기게 되면 최소한 세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다. 첫째,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실제 있었던 이들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것은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뒤섞어 버린다. 둘째, ‘돌’이 실제 있었던 인물이라고 인정한다 해도 조설근 역시 ‘돌’이라는 가명을 쓸 수 있는 것이다. 셋째, ‘돌’은 실제로 역사상 어느 인물인가? 왜 ‘돌’은 그런 수수께끼를 지었는가? 이에 대해 판중궤이는 이렇게 말했다.

천지회(天地會)의 인물들은 엄지와 둘째, 셋째 손가락을 펴서 하늘을 대표하고, 중지와 넷째 손가락을 펴서 땅을 대표했다. 천지회의 인물이 아니라면 이따금 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똑같이 해석할 수 없다. 그렇다면 돌은 청 왕조에 반대하는 인물인가? 돌이 청 왕조에 반대하는 인물이라는 역사적 증거는 무엇인가?

문제는 이렇다. 작자가 수수께끼를 지은 게 아니라면(그저 후세 사람들이 억지로 책 속의 어떤 문장을 수수께끼로 여기고 해석한 것이라면) 색은파의 해석 방법은 즉시 완전한 물거품으로 변해 버린다. 이렇게 은밀히 내포된 해석의 위기를 판중궤이도 느끼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풍월보감(風月寶鑑)》을 《명청보감(明淸寶鑑)》으로 해석하면서 아울러 여유량(呂留良)의 “맑은 바람 가늘다지만 나를 불기 어렵고, 밝은 달이야 사람 비추지 않은 적 어디 있던가?[淸風雖細難吹我, 明月何嘗不照人]”라는 시 구절과 서술기(徐述夔: 1703~1763)의 “내일 아침 날개 떨쳐 청조의 수도를 단번에 떠나리라[明朝期振翮, 一擧去淸都]”라는 시 구절 등의 방증(傍證)을 들면서 《홍루몽》 작자의 기교도 그와 마찬가지라고 했다. 하지만 문제는 ‘돌’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판중궤이는 이 부분을 독자에게 설명하지 않았다.) ‘돌’이 반드시 판중궤이가 말한 ‘기교’를 쓰지 않았을 수도 있고, 《풍월보감》도 반드시 ‘청풍과 명월’을 비유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도 이렇게 인정했다. 명월과 청풍은 본래 글에서 상용하는 어휘로서……거기에 은유가 담겨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

자서전설의 핵심 인물인 조설근에 대하여 판중궤이는 단지 편찬자로만 인정한다. 그는 “규방의 일을 천속한 언어로 서술하여 만주족에 반대하는 사상이 지식인이 아닌 사람들 사이에 쉽게 유행하게 만드는 것이 원작자의 의도로서, 이는 조설근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했다. 그는 또 난고거사(蘭皐居士)와 유서(裕瑞: 1771~1838), 진용(陳鏞), 서가(徐珂: 1869~?) 등의 주장을 인용하여 정위원과 고악 이전에는 확실히 많은 이들이 조설근을 《홍루몽》의 작자라고 인정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영충(永忠)이나 명의(明義) 같은 이들의 말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이에 대해 그는 영충은 조설근과 만난 적이 없고, 명의는 조설근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으니, “영충이나 명의처럼 조설근이 《홍루몽》을 지었다고 하는 이들은 모두 그저 소문을 들었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은 조설근이 《홍루몽》의 작자라는 증거로 보기에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런 변론 방식은 판중궤이가 이중적인 기준을 채용했음을 보여준다. 영충이나 명의 같은 이들이 조설근과 모르는 사이이기 때문에 그들의 말이 증거가 될 수 없다면 난고거사나 유서, 진용, 서가 등은 조설근이 살았던 때보다 훨씬 뒤에 살았던 이들이니 그들의 말은 더욱 증거로서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판중궤이가 난고거사나 유서, 진용, 서가 등의 말을 증거로 삼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어떤 것은 중시하고 어떤 것은 무시하는가? 해답은 생각해 보면 대충 알 수 있을 것이다(본서의 마지막 장을 참조할 것).

조설근과 모르는 사람이 한 말은 증거로서 자격이 없다면, 지연재나 기홀수처럼 조설근과 아는 사람들은 또 어떠한가? 판중궤이는 이렇게 해석한다. “그들의 비평에서는 이름을 숨긴 원작자와 《홍루몽》을 개편한 조설근을 구별하지 않고 함부로 그들을 작자라고 칭했다. 평점가들은 원작자를 극도로 숭배하면서 그들의 친한 벗인 조설근에 대해서도 대단히 친밀하게 표현했다.” 그런데 판중궤이의 이 말은 이해하기 어렵다. ‘원작자’(사실상 조설근도 ‘원작자’가 될 수 있다)와 ‘개편자’를 일률적으로 ‘작자’라고 칭했다면 그는 왜 또 그걸 구분하려 하는가? 극도로 숭배한다는 말이 왜 반드시 ‘원작자’에게만 해당하는가? 평점가는 ‘개편자’를 숭배할 수 없는가?

판중궤이는 조설근을 《홍루몽》의 작자로 인정하지 않고 그 자리에 ‘돌’을 내세웠다. 그러나 ‘돌’이 누구인지는 끝내 설명하지 않았다. 반만설을 주장하는 또 다른 연구자인 두스졔는 《홍루몽》의 작자가 오위업(吳偉業)이라고 명확하게 제시했다. 그가 조설근을 부정하는 수법은 더욱 주목할 만하다.

(4) 두스졔: 조설근은 가명이다――조설근의 위협 해소 작업 2

이전의 색은파 연구자들은 비록 조설근을 《홍루몽》의 작자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누구도 조설근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두스졔에 이르면 조설근은 하나의 가명이 된다. 1972년 두스졔는 《홍루몽원리》에서 《홍루몽》의 전신(前身)인 《풍월보감》은 명나라의 유민이 쓴 것인데, 조설근이 베껴 쓰면서 내용을 더하거나 삭제하여 《홍루몽》을 완성했다고 주장했다. 그의 ‘홍학 명명법(命名法)’에 따르면 조설근은 단지 부지런히 베껴 쓴 사람이라는 뜻의 ‘초사근(抄寫勤)’과 비슷한 발음[諧韻]을 이용해 만든 가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설명은 이러하다.

조설근이라는 단어는 또 ‘초사근’과 비슷한 발음을 이용해 만든 가명인 듯하다. 정위원(程偉元)의 〈원서(原序)〉(2)에 따르면, “다만 책에는 설잠(雪岑) 선생이 여러 차례 개편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했다. 조설잠(曹雪岑)이 조설근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렇든 그렇지 않든 이것은 조설근(또는 조설잠)이 그저 가명일 뿐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이 선생의 목적은 ‘초사근’과 비슷한 발음의 가명을 취하는 것일 뿐이다. 최초의 목적은 베껴 써서 소장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에 초사존(抄寫存, 즉 曹雪岑)이라는 가명을 지었지만, 결과적으로 10년 동안 읽으면서 다섯 차례나 개편함으로써 부지런히 베껴 쓰는 현상이 나타나서 초사근(抄寫勤, 즉 曹雪芹)이라는 이름을 지은 것이다. 왜 “그렇든 그렇지 않든 이것은 조설근(또는 조설잠)이 그저 가명일 뿐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인가? 조설근은 비슷한 발음을 이용해 만든 비유적인 가명인가? 이 점은 근본적으로 실증할 방법이 없다. 두스졔 자신의 ‘홍학 명명법’에 따르면 당연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홍학 명명법’은 그가 만든 것이니 그걸 이용하여 혼자 즐길 수는 있다. 하지만 다른 독자들이 반드시 똑같이 받아들이지는 않을 테니 그 가치가 한정적이다. 나중에 두스졔는 이 ‘비슷한 발음[諧韻]’을 이용한 독법을 한 걸음 더 나아가 부연한다.

조설근은 10년 동안 읽고 다섯 차례 개편했는데, 그는 ‘부지런히 베껴 썼을[抄寫勤’] 뿐만 아니라 증보(增補)도 부지런히 했다. 이 때문에 또 조근포(曹芹圃)라는 호를 썼으니, 이는 바로 ‘초근보(抄勤補)’와 비슷한 발음을 이용한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면 비록 견강부회이긴 하지만 이것 말고는 더 좋은 해석이 없다. 그리고 조설근은 또 조몽완(曹夢阮)이라는 이름도 있으니, 이것은 ‘초몽원(抄夢圓)’과 비슷한 발음을 이용한 것인 듯하다. 원(圓)은 원만(圓滿) 즉, 완성했다는 뜻으로 풀이해야 한다. 《홍루몽》은 사실 그가 베껴서 완성했는데, 그것은 그의 《석두기》와 《정승록(情僧錄)》의 명명법에 근거하자면 응당 ‘초몽원’(曹夢阮과 발음이 비슷한)으로 명명해야 한다. 이 설명을 통해 보건대, 두스졔의 얘기가 흥미진진하기는 하지만 그 자신도 ‘견강부회’할 때가 있다고 솔직히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조설근’이 가명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의 진짜 신분은 무엇일까? 두스졔는 이 ‘조설근’이라는 가명을 쓴 사람이 어쩌면 “강희 연간 북경의 어느 귀족 집에 빈객으로 있던 상주(常州) 출신의 어떤 거인(擧人)”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홍루몽》이 ‘상주 출신의 어느 거인’이 지은 것이라는 견해는 일찍이 《저산헌총담(樗散軒叢談)》에 보이는데, 색은파 연구자인 서우펑페이가 그 설을 가져다 쓰면서 그 거인이 조일사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조일사가 바로 조설근이라고는 하지 않고, “다만 그에게 설근이라는 별호가 있었다는 것은 고증할 수 없는데, 혹시 이 책을 개편하기 위해 일부러 이 호를 만들어 자신을 감춘 것은 아닌가?” 라고 했다. 그런데 두스졔는 그 효렴을 ‘조설근’과 동일시하고 있다. 서우펑페이는 《홍루몽》이 궁중의 비사를 숨겨서 서술한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조일사는 강희제 시대의 인물이니 그 작품이 “강희 말년의 궁중 비사”를 담고 있다는 자신의 주장에 배합시키기 적당했을 것이다. 이에 비해 두스졔는 “어느 거인이 혹시 스승이나 친구가 전해주는 《홍루몽》 원본을 얻었는데, 남방의 반청(反淸) 사상에 영향을 받아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글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며 떠돌다가 북경에 이르러 재능을 펼쳤을 것”이라고 가정했다. 결국 그가 생각하기에 개편자 ‘조설근’(상주 출신의 어느 거인)은 ‘반청 사상’을 갖고 있으니, 자서전설을 주장하는 이들이 설정한 기인 출신의 조설근과는 매우 동떨어진 인물인 것이다. 그러나 자서전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조설근이 건륭 연간의 인물임을 분명히 고증했는데, 그가 어떻게 ‘강희 연간’의 상주 출신의 어느 거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 점에 대해 두스졔는 “조설근이 가명이라면 건륭, 가경 연간의 조설근에 대한 기록들은 모두 믿을 만한 자료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가명’이라는 간단한 한 마디로 건륭, 가경 연간의 조설근에 관한 각종 기록들을 단번에 묵살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단지 ‘믿을 만하지 않다’는 말로 논적을 물리치려고 한 것은 분명 설득력이 부족하다.

종합하자면 두스졔의 논술 체계에서 ‘조설근’이라는 이름은 《홍루몽》과 약간 관련이 있기는 하지만, 그 ‘조설근’은 자서전설 논자들이 얘기하는 기인 출신의 조설근이 절대 아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서전파의 ‘기인 작자론’이 반만설에 가하는 위협을 완전히 해소할 수 있었다. (이른바 ‘해소’라는 것은 두스졔가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효과이다.)

두스졔는 오위업이 바로 《홍루몽》의 원작자라고 주장했다. 그의 논증 방법은 ‘동시대 사람의 증명’이나 역사 문헌을 통한 증명을 제시하지 않고 여전히 이름으로부터 시작한다.

《홍루몽》은 오옥봉(吳玉峰)과 공매계(孔梅溪), 그리고 가우촌(賈雨村)의 소개로 조설근에게 전해졌는데, 앞의 세 사람의 이름에서 각기 순서대로 한 글자씩 취하면 ‘오매촌(吳梅村)’ 즉 오위업이 된다. 이 외에 오매촌의 ‘매(梅)’자도 오위업이 《홍루몽》의 작자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에 사용된다. 증명의 방법은 “진실한 사정은 가우촌(假雨村) 안에 숨겨져 있는데, 거짓으로 지어낸 소박한 이야기[假語村言]는 바로 수수께끼[謎]이다. 미(謎)와 매(梅)는 발음이 같으니,” 오매촌이 바로 《홍루몽》의 작자라는 것이다. 위에 거론한 예를 통해서 우리는 두스졔가 ‘조설근’이라는 이름을 처리할 때 자신의 독특한 해운(諧韻)의 독법으로 부정적인 의견을 제시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위업이 《홍루몽》을 지었다는 것을 증명할 때에도 종종 ‘해운’의 방법으로 작품 안의 문장을 해독하여 곳곳에서 오매촌과 간련된 우연한 내용들을 찾아낸다. 《홍루몽》의 수수께끼[謎]를 오위업이 만든 것이라고 하고 나서, 다시 《홍루몽》의 ‘수수께끼’ 속에서 여러 가지로 이 작품이 오위업의 저작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니 순환논증의 흔적이 환히 드러나는 것이다. 두스졔는 또 다른 논리를 끌어다가 《홍루몽》과 오위업을 결합시키기도 한다.

《매촌행장(梅村行狀)》에 따르면 정월 아침에 선생이 꿈에 어두 관리의 저택에 갔는데, 주인이 왕후(王侯)의 관복(官服)을 입고 계단에서 내려와 읍(揖)을 하며 맞이하면서 종이쪽지를 꺼내 보였다. 거기 적힌 글자는 인간 세상의 글자가 아니라서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자 주인이 말했다. “이 자리는 선생에게 맡깁니다.” 또 12월 초하루에 다시 꿈속에서 여러 사람들이 맞이하러 와서 선생에게 날짜를 적어 보여주어서 시일(時日)을 미리 알 수 있었으나 기분은 좋지 않았다고 했다. 매촌이 앞서 꾼 꿈에서는 왕후의 관을 쓴 사람이 자리를 물려주었고, 나중에 꾼 꿈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맞이하러 왔다고 했으니 아마 전에 꾼 꿈에서 보았던 왕후의 관을 쓴 사람들일 것이다. 이것은 바로 오매촌의 홍루몽(紅樓夢)인 것이다. 그는 이 점을 이용해 이렇게 추가적인 논리를 이끌어낸다. “이 꿈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이 한바탕 ‘홍루몽’인지는 알 수 있다. 오매촌은 홍루몽을 꾼 적이 있으니, 응당 《홍루몽》의 작자일 것이다.” 이런 설명은 억지로 관계를 만들어낸 것에 지나지 않으며, 논증 과정도 너무 단순하고 설득력이 부족하다. 오매촌의 꿈이라는 것 역시 ‘청루몽(靑樓夢)’이랄지 다른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한 가지 예만 들었지만, 이걸로도 나머지 것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오매촌이 《홍루몽》의 작자라는 설은 이미 덩쾅옌(鄧狂言)이 제시한 바 있는데, 두스졔는 거기에 추가적인 해석과 견강부회한 증명을 시도했을 뿐이다. 하지만 견강부회가 치밀할수록 파탄도 더 크고 분명하게 드러난다. 종합적으로 보자면 이런 논리는 역사적 증명이 불가능한데, 색은파는 이런 ‘명나라 유민의 저작’이라는 논리로 자신들의 반만설에 결합시킬 필요가 있었다. 두스졔의 방법은 조금 더 세밀해졌을 뿐이다. 그나마 조금 참신한 것은 그가 ‘조설근’을 처리한 수법이다. 첫째, ‘조설근’과 ‘조근포’, ‘조몽완’ 등의 이름을 모두 색은의 대상으로 만들었다(혹은 수수께끼로 만들어 그 안에 숨겨진 말이 있다고 주장했다.) 둘째, ‘조설근’을 청 왕조에 반대하는 선비로 만들었다. 셋째, 건륭, 가경 시대의 조설근에 관한 기록들을 부정했다. 사실 ‘조설근’을 색은의 대상으로 만드는 방법은 이후의 색은파 연구자들도 채용했는데, 리즈치(李知其)야말로 아주 좋은 예이다.

(5) 리즈치: 조설근은 이야기꾼이다――조설근의 위협 해소 작업 3

리즈치는 작자를 알 수 없다는 견해를 유지했기 때문에 두스졔보다는 번거로운 일이 줄어서 작자가 누구인지를 밝히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었다. 조설근에 대해서는 리즈치도 마찬가지로 색은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는 이론을 설정했다. 즉 《홍루몽》은 금기를 범하여 만주족에 반대하는 소설이니 작자가 진짜 성명을 밝혀 재앙을 초래하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조설근’은 작자의 성명이 아니라 수수께끼라는 것이다. 하지만 리즈치의 이런 설명 자체는 미리 《홍루몽》이 만주족에 반대하는 소설이라고 가정함으로써 실증해야 할 명제를 오히려 논증의 중요한 전제로 삼아 버린다. 조설근이라는 단어에 수수께끼가 숨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사실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리즈치가 조설근이라는 단어에 수수께끼가 숨어 있다고 생각했다면 해답은 무엇인가? 그는 조(曹)는 조위(曹魏)를 가리키는데 위(魏)자는 예(囈)자와 발음이 비슷하고, 설(雪)자는 설(說)과 발음이 비슷하며, 근(芹)자는 인(人)자와 발음이 비슷하니, “예설인(囈說人)은 잠꼬대를 하는 사람이니, 바꿔 말하자면 바로 《홍루몽》을 들려주는 이야기꾼[說書人]”이라고 했다. 그는 또 세상 사람들이 예전부터 이야기꾼을 부를 때 설서선생(說書先生)이라고 했는데, 작품 속에서 조설근도 ‘선생’이라고 불린 경우가 많으니 조설근은 이야기꾼이라고 주장했다. 이 추론 자체는 설득력이 충분하지 않지만(예를 들어서 ‘근[芹]’자와 ‘인[人]’자가 발음이 비슷하다고 한 것), 어쨌든 조설근을 이야기꾼이라고 함으로써 조설근과 《홍루몽》의 관계(즉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상의 관계)를 끊어 버렸으니, 가세 결정론을 주장하는 자서전설 논자들의 설명도 근거를 잃어버리게 된다. 리즈치의 의도가 그런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겠지만 객관적으로 이런 효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조설근과 《홍루몽》 저작 사이의 관계를 끊는 것은 소극적인 방법에 지나지 않지만,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리즈치가 어떻게 조설근을 색은파에게 유리한 인물로 변화시키는가 하는 것이다. 두스졔와 마찬가지로 리즈치도 조설근을 만주족에 반대하는 작가라고 주장한다. 두스졔가 해운(諧韻)의 독법을 근거로 ‘설근’을 ‘사근(寫勤)’으로 읽은 데에 비해, 리즈치는 “‘설근’이라는 이름은 비슷한 발음을 이용하여 한을 씻는다는 의미의 ‘설한(雪恨)’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조(曹)’자에 대해서 리즈치는 “조(曹)자는 호(號)자와 발음이 비슷하여 호곡(號哭)을 의미하기도 하고 또 울부짖을 ‘호(嚎)’ 또는 울 ‘도(啕)’와 발음이 비슷하니, 조설근이란 곧 울부짖으며 한을 얘기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우는 이유는 색정(色情)의 일이 한바탕 꿈처럼 사라져 버려서가 아니라 나라와 민족이 멸망한 한 때문”이라고 했다.

‘조설근’이라는 단어는 당연히 수많은 해음의 조합을 만들어낼 수 있는데,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이것이 왜 가명(또는 수수께끼)이냐는 것이다. 앞서 서술한 두스졔와 리즈치의 예에서 보건대 ‘조설근’이라는 단어를 색은의 대상이나 수수께끼로 만드는 것은 소극적인 측면에서 조설근의 저작권을 부정할 수 있다. 그러나 적극적인 측면에서는 조설근을 ‘만주족에 반대하는’ 작자를 지칭하는 말로 바꿔 버릴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이런 ‘해운’의 독법은 반만설과 결합시키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각종 문헌이 보여주듯이 조설근이라는 사람은 실존 인물이지 가명이 아니다. 이 사실은 ‘해운’의 독법이 직면할 수밖에 없는 문제이다. 물론 그들이 직면하느냐 마느냐는 또 다른 문제이다. 이상의 논술을 종합하자면 자서전파 연구자들은 종종 조설근의 기인 출신이라는 신분에 집착하여 그가 만주족에 반대하는 의식을 가졌을 리 없다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그에 비해 반만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또 다른 작자론을 자신들을 주장에 배합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서전파의 기인 작자론을 모른 척할 수 없었으니, 반만설을 주장하는 이들 가운데서도 몇몇 사람들은 자서전파의 추론을 묵인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도 조설근의 저작권을 부인하는 데에 급급하거나, 심지어 ‘조설근’이라는 단어에 대해 갖가지 일반인의 의표를 넘어서는 해석을 해놓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4) 위잉스의 ‘조화론’——조설근의 ‘한족에 대한 동질감’

사실 “기인 출신의 작자는 만주족에 반대하는 의식을 가질 수 없다”는 주장 자체는 단지 ‘작자 결정론의 영향 아래 이루어진 일종의 추측일 뿐이다. 이런 추측은 표면적으로는 당연해 보이지만 사실 증명하기가 무척 어렵다. 색은파와 자서전파는 이런 추측에 갇혀서 다른 탐색은 별로 하지 않았는데, 마치 조설근이 작자라는 것만 인정하면 기인 출신이라는 그의 신분이 그로 하여금 분명 만주족을 동정하게 만들어 줄 거라고 믿는 듯했다.

기인 출신은 만주족 청나라에 반대할 리 없다는 추측은 결코 필연적인 것이 아니다. 이런 관점은 ‘한족은 한족을 공격할 리 없다’는 추측과 마찬가지로 논리적 필연성도 없고 사회 현실과도 부합하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위잉스의 글은 “기인 출신의 작자가 만주족에 반대하며 한족으로 귀환”했다는 측면에서 탐색해 들어간다.

위잉스는 우선 두 가지 전제를 인정한다. 첫째, 《홍루몽》의 작자는 조설근이다. 이 점은 그가 일찍이 〈근대 홍학의 발전과 홍학 혁명〉에서 분명히 밝혔다. “고증파와 색은파의 연구 성과를 살펴보면 그들 역시 《홍루몽》의 작자를 조설근으로 보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타당성 있는(즉 모순이 가장 적은) 결론이라고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의 《홍루몽의 두 세계[紅樓夢的兩個世界]》에도 전체적으로 이런 작자관이 관철되어 있다. 둘째, 그는 자서전파의 작자 연구 성과를 받아들여 조설근의 ‘종족’이 문화적으로는 이미 만주족이라고 확인한다.

근대 홍학 연구의 주요 성과는 우리에게 기본적으로 조설근의 가계를 뚜렷이 밝혀 준 것이다. 우리는 이제 조씨 가문이 원래 한족이었지만 일찍부터 만주인에게 투항했으며, 청 왕조가 들어선 뒤에는 내무부(內務部) 정백기(正白旗)에 예속되어 있었다는 것을 확실히 안다. 바꿔 말하면 조씨 집안은 문화적으로는 이미 만주인이지 한족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위잉스는 저작권과 작자의 종족 문제에서 모두 자서전파(그의 표현에 따르면 ‘고증파’)에 기울어 있다. 그러나 그와 자서전파는 근본적으로 다른 면이 있다. 그의 조화론은 “기인 출신의 작자는 만주족에 반대하는 의식을 가질 수 없다”는 추측을 깨뜨렸던 것이다. 위잉스의 논리는 기본적으로 조설근의 ‘심리(心理) 과정’에 대한 재건을 바탕으로 한다. 이런 심리 과정은 3단계로 나뉘어 형성되었다.

1. 조설근은 자신이 본래 한족이라는 것을 깨닫고
2. 문자옥으로 한족 문인들이 억압당하는 것을 보고 격동하여
3. 가문의 한으로부터 ‘한족에 대한 동질감’을 이끌어낸다.

위잉스가 제시한 ‘심리 과정’은 두 가지 가설과 연관되어 있다. 첫째, 조설근의 ‘격동’과 ‘한족에 대한 동질감’은 외재 환경에 대한 일종 일종의 자연스럽고 합당한 반응이다. 둘째, 조설근은 이 ‘격동’과 ‘동질감’을 반드시 글로 써 내야 했다. 이를 위해 위잉스는 두 가지 내적 증거를 인용했다.

1. 대명각등(大明角燈): 《홍루몽》 제53회 본문
2. 야율웅노(耶律雄奴): 《홍루몽》 제63회 본문

그리고 요화(瑤華)의 비평과 정본(靖本)의 비평을 방증으로 들었다. 이 두 가지 방증은 모두 다른 사람의 이해 방식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가장 중요한 내적 증거에 대해 위잉스는 자세히 분석하지 않았다. 나중에 자오깡(趙岡: 1929~ )은 〈조설근의 민족주의사상〉을 통해 위잉스의 견해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에 따르면 ‘대명각등’의 ‘대(大)’자는 순전히 등의 크기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큰 명각등도 있을 수 있고 작은 명각등도 있을 수 있다. 방관(芳官)의 이름을 야율웅노로 고치게 된 부분에 대해 자오깡은 그것이 만주족을 풍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공송덕(歌功頌德)’함으로써 만주 귀족[旗人]이 변방민족을 정복한 우월감을 드러낸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후반부에서 옹정제(雍正帝, 淸 世宗 愛新覺羅‧胤禛, 1678~1735)가 편찬한 《대의각미록(大義覺迷錄)》의 이론을 직접 인용한 것은 만주족의 청 왕조가 ‘위대한 순 임금의 정통 후예’임을 강조하고 건륭제의 무공(武功)을 칭송한 것이라고 했다(본서의 제3장 참조.)이런 의문에 대해 위잉스는 〈조설근의 ‘한족에 대한 동질감’에 대한 보론(補論)〉을 발표하여 예전에 자신의 글에서 인용한 내적 증거에 대해 추가적으로 해석했다. 그의 방법은 주로 《홍루몽》에 담긴 건륭 시대의 환경을 통해 이해하는 것이었다. ‘대명각등’은 보통의 언어 환경에서는 첫째, 이어 읽기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즉 ‘대명’이라는 단어는 이어 읽으면 안 되는 것이다. 둘째, 수식어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즉 ‘대(大)’는 ‘소(小)’와 대비되는 것이다. 사실 일찍이 1970년 7월 10일에 우언위(吳恩裕)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오신칭(趙信卿)은 이런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하지만 위잉스는 ‘대명각등’을 일반적인 단어로 취급해서는 안 되고 당시의 환경 속에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건륭 시기에 ‘대명’이라는 글자를 연이어 쓰는 것은 대단히 금기를 범하는 일이었다. 조설근이 왜 ‘대경성등(大慶成燈)’ 또는 ‘대양각등(大羊角燈)’이라고 쓰지 않고 하필 ‘대명각등’이라고 썼겠는가? 그 다음으로 ‘대명’이라는 단어에 전혀 문제가 없다면 정고본(程高本)에서 그 두 글자만 삭제했을 리 없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위잉스는 문자옥의 특색은 문장과 단어를 곱씹는 방식으로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이기 때문에 이어 읽기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작자가 변명할 수 있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그러므로 그는 조설근이 ‘대명각등’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분명 깊은 뜻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위잉스의 관점에서 보면 조설근이 ‘대명각등’이나 ‘야율웅노’ 등의 어휘를 쓴 것은 당연히 명 왕조를 애도하고 만주족에 반대하기 위해 일부러 한 행위이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 보면 그이 이런 해석 자체도 전혀 재고의 여지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이론 가운데 조설근이 한족 문인들이 문자옥의 압박을 받고 있는 것을 보았다는 점이 또한 조설근이 ‘만주족을 배반하고 한족으로 돌아서는’ 심리 과정의 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설근이 이런 의심스러운 구절을 써서 일부러 청나라 조정을 도발할 수 있었을까? 색은파 연구자들도 종종 청 조정의 문자옥을 들어 설명하기 때문에, 그들의 이론에서 작자는 그저 ‘은어’나 ‘수수께끼’로 암중에 풍자할 뿐이다. (이를 두고 차이위앤페이는 “여러 겹의 장막을 쳤다”고 표현했다.) 색은파의 ‘은어’나 ‘장막’이라는 논리가 성립하는지 여부는 또 다른 문제지만, 그들의 이론 자체에는 전혀 내재적인 모순이 없다. 그런데 위잉스의 논리에 따르면 조설근은 고압적인 정책 아래에서 감히 공개적으로 ‘만주족에 반대하는’ 태도를 취했으니, 이는 위잉스가 가정한 것처럼 ‘용기 있게 만주족을 배반하고 한족으로 돌아섰다’기보다는 차라리 차이위앤페이의 주장처럼 ‘(한족의) 민족주의를 아주 굳게 견지한’ 셈이 아닌가!

《홍루몽》 자체로 보면 작자는 사실 문자옥의 재앙을 초래하는 것을 무척 두려워하고 있었다.(공공도인은) 거기 적힌 이야기에 비록 간사한 이들을 질책하고 악한 이들을 비판하는 내용이 들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시대에 해를 끼치거나 세상을 욕하는 뜻은 없다는 것을 발견했지요. 그리고 군주는 어질어야 하고 신하는 충성스러워야 하며 아비는 자상해야 하고 자식은 효성스러워야 한다는 것과 같은 윤리강상(倫理綱常)과 관련된 부분들은 모두가 공덕(功德)을 칭송하는 한 가지 뜻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는지라, ……이야기가 시대와 세상사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작자가 공개적으로 만주족에 반대할 생각이었다면 왜 시대와 세상사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특별히 설명했겠는가? 이렇게 하면 더욱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않겠는가? 이 때문에 위잉스의 주장은 사실 의심을 살 만하다. 이제 ‘대명각등’이 ‘청 왕조에 반대하는’ 증거라는 주장의 신뢰성에 대해 다시 검토해 보자. ‘대명각등’의 ‘대’자는 아주 중요한 관계가 있다. ‘대명’이라는 두 글자가 사제되느냐 이어 쓰느냐는 ‘금기설[忌諱說]’에서 필쟁의 초점이다. 그것의 삭제 문제에 관련해서 각 판본들을 검토해 보면 일반 학자들이 비교적 초기 필사본이라고 여기는 경진본과 몽부본, 척녕본, 열장본 같은 들에는 모두 ‘대명각등’이라고 표기되어 있지만(열장본에는 ‘등(燈)’자가 ‘촉(燭)’자로 도어 있음), 비교적 후기 필사본으로 여겨지는 몽고본(夢稿本), 갑진본, 정갑본(程甲本)에는 모두 ‘각등(角燈)’이라고 되어 있다(현존하는 기묘본과 갑술본, 서서본에는 이 회가 빠져 있음). 이런 상황은 작자가 원고를 쓸 때에는 ‘대명각등’이라고 썼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렇게 단어가 들어 있거나 빠져 있는 현상에 대해서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 작자가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금기 어휘를 썼다. 둘째, 작자가 금기에 대해 분명히 알았지만 일부러 그렇게 썼다. 하지만 작자가 일부러 이렇게 써서 청 왕조에 반대하는 뜻을 나타냈다는 믿을 만한 증거가 없다면 우리는 첫 번째 가능성을 완전히 말살해서는 안 된다.

‘대명’이라는 글자가 삭제된 것은 이 단어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는 위잉스의 추측이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글자가 삭제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으며, 그 어휘가 금기를 저촉했기 때문에 삭제되었는지 여부는 더 깊이 연구할 여지가 있다. 그리고 설령 두 글자가 확실히 금기 때문에 삭제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베껴 쓴 사람이 삭제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 몇 가지 판본들은 모두 조설근이 죽은 후에 나온 필사본들이기 때문이다.

이어 쓰기 문제에 대해서는 ‘명각등’이 《홍루몽》 제14회에도 나온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현존하는 필사본(경진본, 기묘본, 몽고본, 갑술본, 몽부본, 척서본, 척녕본, 갑진본, 열장본)에는 모두 일률적으로 앞에 ‘대(大)’가 없이 ‘명각등’이라고만 되어 있다. 제53회의 ‘대명각등’이 일부러 만주족에 반대하기 위해 쓴 것이라면 제14회의 ‘명각등’에 ‘대’자를 붙이지 않은 것은 그런 뜻이 없다는 셈이 된다. 이 점은 반반설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불리할 듯하다.

‘야율웅노’의 문제에 대해서도 위잉스는 당시의 환경에 결합하여 작자의 본의를 미루어 헤아리고 있다. 당시에는 ‘이(夷)’ 또는 ‘적(狄)’과 같이 역사상 소수민족에 간련된 어휘는 모두 금기를 범하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당시’라는 말은 의미가 명확하지 않다. 사실 청 세종(世宗)은 ‘이’나 ‘적’ 같은 글자를 피할 필요가 없다는 칙령을 내린 바 있다. 《청실록(淸實錄)》의 《세종헌황제실록(世宗憲皇帝實錄)》 권130에 따르면, 옹정 11년(1733) 4월 기묘(己卯)에 세종은 내각에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짐이 본 왕조 사람들이 간행하거나 쓴 서적들을 보니 호(胡), 노(虜), 이(夷), 적(狄) 등의 글자가 나올 자리가 늘 공백으로 있거나 ‘이(夷)’를 ‘이(彝)’로, ‘노(虜)’를 ‘노(鹵)’로 바꾸듯이 글자의 모양이나 발음을 바꾸어 놓아서 해석이 되지 않았다. 그 의도를 헤아려 보건대 본 왕조의 금기 때문에 그런 글자들을 피해 공경하고 삼가는 자세를 표명하려는 것일 터이다. 하지만 이는 진실로 이치에 어긋나도 도의를 어기는 것으로서 대단히 불경한 행위이다. ……군신 간의 의리를 모르고 역대의 성인들께서 중국 안팎을 편히 보살피려는 공명정대한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면 오히려 한족이니 만주족이니 하는 틀에 얽매이게 된다. 문예의 기록에서 이(夷), 노(虜) 같은 글자들을 모두 삭제하거나 바꾸어서 금기를 피하려 하고, 이것이 신하가 군주에 대해 존경하는 것이라고 여기려 하는가? 이는 이런 생각이야말로 이미 크나큰 불경죄를 저지르는 것임을 모르는 처사이다. 이후로 글을 쓰거나 서적을 간행할 때에 여전히 예전 같은 관행을 답습하여 이런 글자들을 공백으로 두거나 바꾸는 경우는 불경죄를 적용하여 엄히 다스리리라. ……종전의 서적들을 모두 꾸짖어 보충하고 바꾸라고 한다면 아마 책의 권질(卷帙)이 너무 많아 빠뜨리는 경우가 생길 것이고, 어리석은 관리들이 이를 빌미로 사실을 조사하여 기록하는 법규를 따르지 않아 많은 해독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에 한꺼번에 유지를 내려 일깨우나니, 간절히 보충하거나 바꾸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스스로 그리 하도록 하라. 이로 보건대 옹정 11년에는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이(夷)’, ‘적(狄)’ 등의 글자를 쓰는 것이 위잉스의 말처럼 ‘금기를 범하는 것’이 전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1733년의 일인데, 《홍루몽》은 건륭 19년(1754)년에 이르러서야 갑술본이 나타났다.(‘이(夷)’, ‘적(狄)’의 문제에 관해서는 본서 제3장의 “방관(芳官)의 개명(改名)” 부분을 참조할 것.)

위잉스의 논리가 성립할 수 있는지 여부는 잠시 젖혀두고, 사실상 후세의 연구자들도 조설근이 ‘만주족에 반대’했다는 관점에서 연구를 시작했다. 예를 들어서 대륙의 학자 류상성(劉上生)은 조설근이 청나라 조정에 (재산 몰수 때문에) 원한을 갖고 있었다는 점을 주축으로 수십만 자의 논저를 써 냈다. 이 외에도 류멍시(劉夢溪)는 《홍루몽과 백년 중국》에서, “정치적 태도와 종족 관념의 복잡한 요소가 거기에 관여되어 있지 않다고 말하기는 매우 어렵다”고 지적했다.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은 ‘기인 작자설’을 주장하는 선도적인 인물들까지 기존의 태도를 바꾸어 ‘반만설’의 추세를 추종하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저우루창은 위잉스의 ‘두 개의 세계론’에 대해 여러 차례 비판했지만, 그 역시 조설근이 소설로써 옹정제를 암암리에 풍자했다고 설명했다. 저우루창과 같은 입장인 류신우(劉心武: 1942~ )는 조씨 가문이 폐위된 태자 집단이 은밀히 ‘혁명[變天]’을 모의했다는 이야기를 가정했다. 《홍루몽》의 ‘반청복명(反淸復明)’의 사상을 담고 있다는 이전의 주장은 조설근 때문에(종족 문제) 단지 ‘반청’ 부분만 남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복명’의 주장이 성립되기 어려운 것은 무엇 때문인가? 원인은 아마 두 가지일 것이다. 첫째, 조설근이 살았던 연대는 명나라 말엽 청나라 초기가 아니니, 이 시간의 좌표가 ‘복명설’의 설득력을 절감시킨다. 그러므로 이것은 ‘선험적인 부족함’이라고 할 수 있겠다. 둘째, 학자들은 조씨 가문의 재산 몰수라는 비극적인 역사가 조설근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깊이 믿었기 때문에, 이에 따라 해석의 초점도 원래의 ‘종족’ 문제에서 ‘가계’ 문제로, ‘국가’에서 ‘가문’으로 축소되었던 것이다. 이런 몇 가지 점들에서 우리는 ‘작자 조설근’이 순수한 저작권의 문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해석의 방향을 좌우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曹雪芹(조설근: 1715~ 1761) - 18세기 중국사회의 거울,『紅樓夢(홍루몽)』
 이름은 점(霑), 자는 몽원(夢阮)이고 근포(芹圃), 설근(雪芹), 근계(芹溪) 등 호를 가지고 있다.

 중국의 역동적인 발전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른바 자본주의 맹아를 이야기한다. 서구사회와 같이 중국도 자본주의의 싹이 자라고 있었다는 그러한 논리가 초기에는 엉뚱하게도 조설근의 작품인 '홍루몽(紅樓夢)'을 토대로 펼쳐졌다.

조설근은 1715년 출생했으며, 설근은 그의 자이고 본명은 曺霑(조점)이었다. 그의 조상은 원래 河北(하북)의 한족으로, 일찍이 만주로 이주하여 살다 만주귀족에 의해 노예가 됐다. 그러나 몽고제국의 징기스칸과 비교될 수 있는 누루하치(1559~1626)가 만주족을 재조직하면서, 그의 조상은 八旗(팔기)의 일원으로 정복왕조의 창출을 위한 대열에 참여했다.

 팔기제도란 淸 太祖(청 태조) 누루하치가 1601년경 창설한 것으로 만주족의 부족적 질서를 관료제의 원리에 따라 구성한 조직이다. 원래는 붉은색, 노란색, 파란색, 흰색의 4가지 깃발 아래 4개의 부대였지만, 다른 4가지 깃발의 부대를 추가하여 모두 8개의 부대로 확대 개편됐다. 청의 정복활동이 거의 매듭지어지자 8기는 24기로 확대 개편되면서 만주족 외에 몽고족과 한족을 포함시켰다. 결국 청의 친위세력으로서 팔기는 정복왕조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조설근의 아버지는 이미 2대 이상을 조씨 집안에서 역임한 강남의 요직 江寧織造(강령직조)를 계승했다. 이러한 행정 고위직의 부자계승은 청조와 같은 정복왕조에서만 볼 수 있었던 현상이다. 그러나 그가 불행하게도 병치료 끝에 일찍 사망하자, 그 직책은 사촌에게 넘아 갔다.

 설상가상으로 조설근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또 다른 사건이 일어났다. 강희 황제의 뒤를 이른 雍正(옹정, 1723-1735)은 즉위 후 왕위계승을 둘러싼 형제들과의 치열한 권력다툼에 연루된 반대파 인사를 탄압했다. 이때 조씨가문도 숙정대상이 되어, 강녕직조인 조설근의 숙부는 북경의 한직으로 촤천됐다. 그러나 옹정황제의 뒤를 이은 乾隆(건륭, 1835~1795) 황제의 관용으로 조씨 집안은 잠시 과거의 영화를 만회하는 듯 했다. 하지만 이유를 분명히 알 수 없는 정치적 사건으로 인해 조씨 집안은 다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이로부터는 영영 쇠퇴일로에 접어 들었다.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조설근의 가문의 성쇠를 한꺼번에 맛보았던 셈이다. 비록 가세는 기울었지만, 귀족의 후예답게 그는 사람 사귀기를 좋아하고 다재다능했다. 술을 좋아하고 성격이 활달하여 그 주위에는 문인재사들이 늘 끊이지 않았다. 또한 시적 재질이 뛰어나고 노래와 악기를 즐기며, 그림과 글씨는 물론 춤과 검술도 탁월했다. 그야말로 못하는 것이 없는 그에게 가난은 절망이었으며, 그러한 절망을 삭일 수 있는 길이 절실했는데, 소설이 그의 탈출구였던 셈이다. 드디어 그는 삶의 최종 10여년을 적막한 산촌에 은거하며 가난과 고독 속에서 '홍루몽(紅樓夢)'의 저술에 몰두했다.

 '홍루몽(紅樓夢)'은 저자가 비참한 현실에서 화려했던 유년시절을 되돌아본 자서전적인 소설이다. 원래는 조설근이 '石頭記(석두기)'란 제목으로 80회까지 써서 미완성인 채로 세상에 내놓았다. 그래서 판본은 80회본과 120회본이 있는데, 80회본은 필사본이다. 120회본은 고악(高帽)이 쓴 40회본을 덧붙여 1791년경 정위원(程偉元)에 의해 간행된 것으로 '정갑본(程甲本)'이라 하고, 이 '정갑본'을 개정한 것이 1892년에 간행되었다는 '정을본(程乙本)'이다. 그리고 그 인쇄본은 1791년에 출간되어 급속도로 민간에 퍼지기 시작했다.

 조설근의 작품은 한마디로 18세기 중국의 사회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실주의 작품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문학적 가치 외에도 역사학자의 주목을 받을 만한 사회사적 가치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중국사회에도 자본주의 맹아가 이미 자생적으로 형성됐음을 증명하는 근거로 그의 '홍루몽'이 활용했다.

 중국사를 보는 시각 중 중국인 자신들이 아직도 가장 집착하는 자본주의 맹아론은 엉뚱하게도 1950년대 중반부의 '홍루몽'에 대한 논쟁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중국에는 '紅學(홍학)'이라는 '홍루몽'에 대한 연구만을 전문으로 하는 학문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자본주의 맹아론은 모택동의 소위 '선각자적 발언'을 토대로 이루어졌다. 그는 1939년에 '중국혁명과 중국공산당'이란 제목 아래 발표한 글에서 '중국 봉건사회내의 상품경제 발전은 자본주의 맹아를 내포하고 있었다. 설령 외국 자본주의의 영향이 없었더라도 중국은 서서히 자본주의 사회로 발전해 나갔을 것이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중국학자들이 주장하는대로 그의 견해가 얼마만큼 선구적인 역할을 수행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위에 인용한 그의 주장은 어쨌든 자본주의 맹아론을 적절하게 요약하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맹아론은 엉뚱하게도 고전소설 '홍루몽'에 관란 문학논쟁이 시작되면서, 그 여파로 본격화됐다. 일부 학자들이 이 소설에 묘사된 18세기 중국사회를 통해 강남등 일부 선진지역에서 자본주의의 싹인 농업노동자나 신흥시민세력등이 등장하고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실제로 조설근의 시대에 수공원이 면직이나 견직산업을 중심으로 강남지대등 몇몇 지역에서 상당 수준에 이를 정도로 발전하고 있었다. 더욱이 수공업 공장 내부에서는 임금노동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고용관계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을 자본주의 맹아론자들은 노동시장의 발달을 전제로 주로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제생산하는' 노동자 계급이 중국사회에도 형성됐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다른 한편으로 '홍루몽'의 무대가 되는 강남지방에서는 수공원의 공장주나 상인들이 도시시민의 삶을 영위했다. 특히 주인공 賈寶玉(가보옥)의 자유분방한 애정관과 같이 집단보다는 개인, 공동체보다는 개성을 강조하는 새로운 유형의 정신세계가 점차 확산됐다. 이로써 마르크스가 말하는 부르좌계급의 삶과 정신이 이미 중국사회에서 성장하고 있는 것으로 맹아론자들은 파악했던 것이다. 나중에 '홍루몽'에 대한 해석은 '자본주의가 싹트는 시기에 시민계급이 봉건적 사회질서에 대해 계급투쟁을 전개한 것'으로 확대되기에 이르렀다.

 조설근(曹雪芹)의 문학은 결국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발전하는 역사의 보편적 법칙을 확인하는 수단으로 사용됐다. 이러한 자본주의 맹아론적 시각이 옳고 그른가 하는 여부는 더 많은 역사적 고증이 필요함은 물론이지만, 세계사의 보편성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결국 중국인들이 극복해가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루몽'이 보여주는 중국사회는 결코 정체적인 모습이 아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중국고전 『홍루몽』을 해부한 친절한 길잡이

 최용철 고려대 명예교수·중문학 
■ 저자에게 듣는다_ 『홍루몽』 읽기 | 최용철 지음 | 세창출판사 | 2024년 01월 17일 | 320쪽

중국 고전 최고의 명작소설 『홍루몽』 출현의 의의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분명한 것은 창작의 방법이나 묘사의 대상이 이전의 전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이다. 귀족 가문의 흥망성쇠와 대가족 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파헤치며 사랑과 혼인, 가족 구성원 사이의 복잡한 인간관계를 다루면서 보편적인 인류애를 실천하고 여성을 존중하며 깊은 사랑과 배려의 따뜻한 정서를 그려내고 있다는 점은 이 소설의 큰 장점이다.

청나라 건륭(乾隆) 연간 북경에서 처음 간행된 『홍루몽』이 짧은 시간 내에 중국 전역에 전파되고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된 원인은 다음 몇 가지로 요약된다. 우선 이야기 자체의 기발한 발상과 뛰어난 스토리텔링의 힘이다. 작가는 천성적인 이야기꾼으로서 자유자재로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톡특한 기제를 활용한다. 중국 고대의 여와 신화를 끌어와서 이용하는가 하면 또 새롭게 태허환경이란 선경을 만들어 남녀 주인공의 전생 인연을 설정하여 소설의 기본 배경을 깔았다. 옥을 물고 태어나는 신비로운 이야기를 이끌어 가면서도 시종 진지하고 면밀한 묘사 방식을 적절하게 가미하여 독서의 흥미를 놓치지 않도록 한다.

『홍루몽』의 소설적 성공은 다양한 고전 문화에 해박한 지식을 갖춘 작가의 박식과 더불어 유려한 문장을 이끌어가는 문필의 힘이다. 작가 조설근(曹雪芹)은 비록 한족의 후예이지만 대대로 청나라 황실과 긴밀한 관계를 지닌 만주 귀족으로서 가문의 전통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남경의 강녕직조(江寧織造)에서 태어났지만 어려서 가문이 몰락하여 가족을 따라 북경으로 이주하였다. 만년에는 북경의 서산 아래에서 궁핍하게 살며 가문의 파란만장한 흥망의 역사를 담은 이 작품을 집필하여 거의 완성될 무렵에 안타깝게 절명하였다. 그는 당시 시인으로서 그림에도 솜씨가 있었으며 호탕하게 술 마시고 좌중을 사로잡는 이야기꾼이기도 했다. 소설의 등장인물을 통해 지어낸 수많은 시사 작품이 모두 그의 독창적인 창작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의 사후 소설은 한동안 필사본으로 전해지다가 후인에 의해 정리되어 120회본 『홍루몽』으로 온전하게 간행되었다. 작품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 곧 사대기서의 반열에 오르게 됐다. 이 책의 매력에 흠뻑 빠진 사람들을 홍미(紅迷)라고 부르고 이 책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 경학에 빗대어 홍학(紅學)이라고 했다. 

20세기 초 중국의 석학들은 이 책을 중국문화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내세워 대서특필하고 언문일치 운동의 일환으로 백화문학의 가장 우수한 모델로 선정했다. 급기야 마오쩌둥 같은 정치지도자는 『홍루몽』을 극찬하면서 이 책을 읽지 않으면 봉건사회를 이해할 수 없다고 강조하고 홍학 논쟁에 불을 지폈다. 이로 인해 현대 중국에서 전국적인 ‘『홍루몽』 읽기의 붐’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정치적 홍학 논쟁은 작품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안 된다. 『홍루몽』은 그 자체로 충분한 문학성과 예술성을 갖추고 있는 보석과 같아서 스스로 영원히 빛날 뿐이다.

필자는 독자들에게 『홍루몽』을 좀 더 쉽고 편안하게 이해하도록 다음과 같이 여섯 단계로 나누어 분석하면서 길잡이 역할을 하고자 했다. 각 장의 제목과 더불어 더욱 명료한 키워드를 함께 제시하여 일목요연하게 살필 수 있도록 배려했다. 각 장은 제1장 ‘홍루몽은 어떤 소설인가(참회의 기록)’, 제2장 ‘홍루몽의 사랑과 운명(보옥과 대옥)’, 제3장 ‘사대 가문의 흥망성쇠(가문과 외척)’, 제4장 ‘가보옥의 치정과 충돌(부자의 갈등)’, 제5장 ‘대관원 야간수색 사건(사랑과 죽음)’, 제6장 ‘홍루몽의 문화와 배경(전통의 계승)’과 같은 제목과 부제로 이루어져 있다.

『홍루몽』은 어떤 소설인가. 작가의 젊은 시절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정한 사랑의 애틋함과 생사이별의 아픔을 노래한 장편 서사시다. 또한 귀족 가문의 파란만장한 흥망성쇠를 그리며 몰락하는 가문을 구원할 수 없었던 자신의 무력감을 드러내는 참회록의 성격도 띤다. 작가 조설근의 생애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의 가문이 황실과 가까웠고 남경에서 65년간 강녕직조의 직을 맡았던 귀족가문이었음은 역사적 사료가 많이 남아있다. 특히 할아버지 조인(曹寅)은 강희제의 총애를 받았으며 시문과 사곡에 정통하였고 강남지역의 문화계를 이끈 인물로 널리 알려져 조설근의 문화적 전통의 배경이 된다. 신화적 설정과 낭만적인 환상을 제시하고 있지만 미묘한 인간관계에서 오는 감성의 묘사에서는 치밀하고 사실적이다. 작가 스스로 토로하였듯이 “정(情)을 말하고 있으나, 사실 그대로를 그려내고 있을 뿐, 결코 망녕되게 거짓 이야기를 만들어 내지는 않았다”고 한 말이 그것을 증명한다.

제2장에서 제5장까지는 『홍루몽』의 인물과 내용을 집중적으로 살펴본 것이다. 핵심 인물인 가보옥과 임대옥의 전생의 만남과 생사 이별의 과정에서 어떻게 서로의 마음 깊은 곳에 공명을 일으키는지, 그리고 시시때때로 일어나는 심리적 갈등과 모순 때문에 불필요한 실랑이와 가슴앓이를 얼마나 계속하는지 여실하게 보여준다. 청춘남녀의 독자들이 주인공들의 일거수일투족과 주고받는 한마디 말에 깊이 공감하고 매료되는 것은 바로 자신들의 가슴속에 숨겨진 못다한 말을 작가가 대신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전생의 목석인연이 있어 이승에 따라온 임대옥은 끝내 가보옥과는 맺어지지 못하고 태허환경으로 떠난다. 이승에서는 금옥인연을 가진 가보옥과 설보차가 맺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운명조차 보옥은 거부하고 보차를 남겨둔 채 눈덮인 광야를 지나 대황산으로 돌아가 돌이 되었다.

가씨 가문을 비롯한 사대가문의 흥망성쇠를 묘사한 것은 또 하나의 『홍루몽』 기둥 줄거리다. 주인공 가보옥을 핵심으로 그려내기 때문에 가씨 집안의 영국부의 소소한 일상에서부터 후반부 금의부에 의한 가산 몰수라는 절체절명의 순간까지 관통한다. 얽히고설킨 사대가문의 친인척 관계는 일찌감치 「호관부」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나머지 세 가문도 사실 가씨의 중요한 외척이다. 할머니 사씨, 어머니 왕씨 그리고 보옥의 아내가 되는 설씨가 그들이다. 보옥이 깊은 정을 주었지만 부부로 맺지 못한 임대옥의 임씨는 사대 가문에 들어 있지 않다.

주인공 가보옥의 원형은 여와보천(女媧補天)의 시절에 하늘을 때우고 남아 대황산 청경봉에 버려진 거대한 돌이다. 스님과 도사의 도움으로 영롱한 옥으로 환생하였고 태어나면서 입에 물고 나온 옥은 통령보옥으로 명명되어 늘 목에 걸고 다녔다. 이름도 그냥 보옥이라고 지어서 누구든 부르도록 했다. 가문 내 항렬에서 형제들의 이름도 구슬 옥자변을 썼으니 사실 보옥으로부터 시작된 발상이다. 귀공자로 태어났으나 천성이 남에 대한 인정과 배려가 넘치고 자매나 시녀들과 늘 어울렸으며 유교적 체면을 따지는 허울 좋은 남성들과는 만나기 싫어했다. 부친 가정(賈政)으로서는 큰아들 가주가 죽고 이제 작은 아들 보옥에게 가문의 장래를 맡겨야 하는 형편이었다. 가문 내에서도 그나마 가정의 인품이 가장 반듯한 편이었다. 보옥이 과거시험을 통해 공명을 따서 가문을 부흥시켜주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어린 아들의 감성과 취향을 세밀히 살피고 맞춤형 교육을 설계하려는 생각은 없었고 고리타분한 방식으로 남들 앞에서 체면만 따질 뿐이었다. 

대관원 낙성 때는 보옥이 제법 총명한 시재를 보여 많은 정자와 건물의 현판 이름을 짓기도 했지만, 할머니의 총애를 받으며 멋대로 자란 보옥은 자연히 부친을 만나는 일이 부담스러웠다. 부친을 찾아온 가우촌 같은 벼슬아치 앞에 나가 응대하는 일도 싫어했다. 그런 와중에 배우 기관(장옥함)의 실종과 시녀 금천아의 자살 사건에 보옥의 책임이 있다고 본 부친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보옥에게 혹독한 곤장으로 매질을 하여 부자 충돌의 수위를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부친은 아들을 훈계하겠다는 당초의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할머니의 개입으로 인해 아들 교육을 방치하게 되고 말았다. 가보옥이 매를 맞고 누워 정양할 때 문병 온 설보차와 임대옥은 각각 자신의 성격을 드러냈다. 침상 곁에서 말없이 눈물만 흘리다 돌아간 대옥에게 보옥은 자신의 손수건을 보냈다. 대옥은 깊은 뜻을 짐작하고 손수건에 사랑의 시를 지어 적었다. 두 사람의 깊은 마음은 그렇게 통했지만 훗날 보옥이 보차와 혼례를 올린다는 소식을 알게 된 대옥은 병상에서 그 손수건을 꺼내 화롯불에 태우면서 절명하게 된다. 남녀 주인공의 안타까운 결말이다. 한편 가씨 가문의 몰락과정에서 조짐을 보여주는 것은 대관원 수색 사건이다. 대관원은 원춘 귀비의 성친을 기념하여 조성한 지상낙원과 같은 정원이다. 작가는 천상의 태허환경과 대비가 되는 곳으로 설정했다. 귀비의 뜻에 따라 집안의 누이들이 거처를 하나씩 정해 살게 되었고 유일하게 남자인 보옥도 이홍원에 들어갔다. 대관원에서 누이들과 함께 시를 짓고 놀이를 하고 연회를 열며 꿈같은 세월을 보냈다. 그러한 낙원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춘화도를 수놓은 주머니가 발견되어 형부인과 왕부인 등 어른들을 아연 긴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고부와 동서지간 등 여성 가족 구성원의 갈등과 하인 어멈들의 미묘한 시기와 허영심까지 합세하여 사건이 터졌다. 야간에 바깥문을 닫아걸고 대관원 각 거처의 시녀들 사물함을 조사하는 미증유의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탐춘은 이 사태를 보고 통탄하면서 “세상의 대갓집이란 일시에 망할 수가 없는 법이니, 반드시 안으로부터 망해 들어가야 완전히 몰락하는 법”이라고 소리쳤다. 머지않아 가문의 몰락이 닥쳐올 것임을 내다본 것이었다. 

대관원 수색의 과정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쫓겨난 보옥의 시녀 청문은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다. 보옥은 청문의 죽음에 「부용여야뢰」의 제문을 지어 애도했다. 제문은 또한 대옥의 죽음을 미리 애도한 글로도 읽힌다. 또 남몰래 사랑의 정표를 주고받던 영춘의 시녀 사기도 쫓겨 나갔다. 사기와 사랑하는 사이인 반우안은 끝내 맺어지지 못하고 안타깝게 둘 다 죽고 말았다. 낙원에서 쫓겨난 젊은 청춘들의 안타까운 사랑과 죽음은 가슴을 저미게 한다. 무너지기 시작한 가문의 몰락은 더욱 급속하게 진행된다.

마지막 장에서는 전통의 계승이란 측면에서 『홍루몽』의 문화와 배경을 일별하였다. 조설근은 중국 고전문학의 정수를 다양한 방식으로 요소요소에 배치하고 활용하였다. 태허환경의 경환선녀를 묘사할 때는 조식의 「낙신부」를 패러디하였고, 청문을 위한 제문에서는 초사체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시녀 습인의 명명에 송나라 육유의 시구를 썼고, 철함사와 만두암의 이름에는 범성대의 시구를 이용했다. 원명희곡 『서상기』와 『모란정』은 가장 직접적으로 소설 속에서 활용되었다. 『홍루몽』은 중국문화의 백과사전이라는 말도 있듯이 세시풍속과 음식문화, 복식과 건축문화 등이 풍부하게 담겨있다.

『홍루몽 읽기』는 본격적으로 『홍루몽』 전체를 감상하기 위한 안내서다. 이 작은 책자에 작품 전체의 방대한 내용과 디테일한 묘사를 모두 담을 수는 없지만 독자의 흥미를 이끌어내고 진정한 감상의 길로 나아갈 길잡이로 삼을 수는 있을 것이다.

《홍루몽》과 해석 방법론-《홍루몽》작자의 신분 및 그 강력한 해석 기능

글: 백운재
제2장 《홍루몽》 작자의 신분 및 그 강력한 해석 기능 홍루몽》의 작자에 관한 청대의 기록 및 견강부회

1921년 후스가 〈《홍루몽》 고증〉(개정판)을 발표한 이래, 근대의 많은 학자들은 대부분 《홍루몽》(《석두기》)의 앞부분 80회의 작자가 조설근이라고 믿었다. 사실 후스 이전에도 조설근과 동시대 사람들이 이미 그를 《홍루몽》의 작자로 인정한 적이 있다. 일반 학자들이 즐겨 인용하는 증거는 《홍루몽》 필사본에 들어 있는 비평이다. 《지연재중평석두기(脂硯齋重評石頭記)》(갑술본) 제1회의 미비(眉批)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조설근이 읽고 문장을 더하거나 삭제했다면, 책을 펼쳐서 여기에 이르렀을 때 보이는 이 설자(楔子)는 또 누가 쓴 것인가? 이로 보건대 작자의 문장이 대단히 교활하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뒤쪽에서도 이런 문장이 적지 않다. 이야말로 작자가 안개와 구름으로 풍경을 흐릿하게 가리는 화가의 방법을 이용한 것이니, 보는 사람이 절대 작자에게 속지 않아야 비로소 눈이 밝은 사람인 것이다. 또 같은 회에서 가우촌(賈雨村)이 중추절에 지은 시에 대해 붙인 방비(旁批)에서는, “내가 보기에 조설근이 이 책을 지은 데에는 시를 전하려는 뜻도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이 외에도 애신각라 영충(愛新覺羅‧永忠: 1735~1793)의 《연분실집(延芬室集)》에는 〈묵향(墨香) 덕분에 소설 《홍루몽》을 보고 조설근을 추모함〉이라는 3수의 절구(絶句)가 들어 있는데, 제목 아래 “성이 조이다[姓曹]”라고 밝혀져 있다. 우언위(吳恩裕: 1909~1979)의 고증에 따르면 그 3수의 절구는 건륭 33년(1768), 조설근이 죽은 뒤 겨우 4, 5년 후에 지어졌다고 한다. 이를 보면 영충은 조설근을 《홍루몽》의 작자로 여긴 듯하다. 그렇지 않다면 《홍루몽》을 읽고 왜 조설근을 추모했겠는가? 이 외에도 부찰명의(富察明義: 1740?~ )의 《녹연쇄창집(綠煙瑣窗集)》에는 〈《홍루몽》에 대하여[題紅樓夢]〉이라는 12수의 시가 들어 있는데, 시 앞의 ‘소인(小引)’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조설근이 지은 《홍루몽》은 풍류와 화려한 나날의 극치를 모두 기록하고 있다. 아마 그 조상이 강녕직부(江寧織府)를 지냈으니, 그가 말한 대관원(大觀園)이라는 것은 바로 지금의 수원(隨園)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그 책이 전해지지 않아 아는 사람이 세상에 드문데, 나는 필사본을 보았다. 일반적으로 〈《홍루몽》에 대하여〉라는 시는 1770년에서 1775년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상 세 사람의 기록은 모두 조설근이 《홍루몽》의 작자라는 주장을 유도하고 있다.

부찰명의의 ‘소인’에서는 수원(隨園)을 언급하고 있는데, 원매(袁枚: 1716~1797) 역시 《수원시화(隨園詩話)》에서 그 말을 인용하고 있다.……그(曹寅: 1658~1712)의 아들이 《홍루몽》을 지었는데, 풍류와 화려한 나날의 극치를 모두 기록하고 있어서 아재(我齋, 즉 富察明義)가 읽고 칭송했다. 당시 《홍루몽》에 등장하는 어느 글재주 좋은 여인이 특히 아름다워서 아재는 이런 시를 지었다.

원매는 당시의 저명한 문인이고 또 그의 《수원시화》도 대단히 널리 전파되었기 때문에, 청대의 많은 논자들이 그의 영향을 받아서 조설근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모두들 원매와 비슷한 방식으로 이야기했다. 예를 들어서 원매는 조연정(曹楝亭, 楝亭은 曹寅의 字)을 조연정(曹練亭)으로 잘못 썼고 또 조설근을 조연정의 아들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자 몽치학인(夢癡學人)도 조설근을 “강녕직조(江寧織造) 조연정(曹練亭)의 아들[公子]”이라고 했고, 진기원(陳其元)은 “이 책(《홍루몽》)은 바로 강희 연간 강녕직조 조연정의 아들 조설근이 지은 것”이라고 했다. 섭덕휘(葉德輝) 또한 “이 책은 조인의 아들인 조설근이라는 효렴(孝廉)이 지은 것”이라고 했다. 청나라 때에 《홍루몽》을 논하면서 《수원시화》를 인용한 이들로는 또 전정방(錢靜方)과 이자명(李慈銘), 유월(兪樾: 1821~1907), 이보가(李寶嘉: 1867~1906) 등등이 있다. 이렇게 보건대 청나라 때에 원매의 설이 얼마나 널리 퍼져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아주 많은 이들이 《홍루몽》의 작자가 조설근으로 알고 있었다.

비록 청나라 때에 적지 않은 이들이 《홍루몽》을 조설근이 지은 것으로 믿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들이 조설근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아주 적어서, 그들의 기록은 모두 꼬리를 물고 널리 퍼진 헛소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앞서 거명한 몽치학인이나 진기원, 섭덕휘 등이 바로 좋은 예이다. 조설근의 사적은 알려진 바가 적은데, ‘조설근’이라는 이름은 오히려 써 먹을 만한 것으로 변했다. 논자들은 종종 ‘조설근’이라는 이름을 《홍루몽》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와 배합하거나 견강부회했다. 예를 들어서 모경진(毛慶臻)은 《홍루몽》의 “교화에 해를 끼치기” 때문에 작자인 조설근(그리고 그의 후대 자손들)이 응보를 받았다고 했다.

선례를 연 조설근은 한군(漢軍) 귀족 출신의 거인(擧人)이다. ……저승에 다녀온 이들이 모두들 전하기를 조설근이 지옥에서 심한 벌을 받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도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고 했다. 그가 다른 사람들의 몸과 마음의 성명(性命)을 꾀어 망가뜨린 죄업이 무척 커서 ……가경(嘉慶) 계유(癸酉, 1813)년에 임청(林淸)의 역모 사건에 도사(都司) 조 아무개가 연루되어 능지처참을 당하고 일족이 몰살당했는데, 바로 한군 귀족 조설근의 집안이었다. 또 양공신(梁恭辰)은 “《홍루몽》은 음란함을 가르치는 게 심하기” 때문에 조설근은 “공생(貢生)으로 늙어 창 아래에서 죽으면서 부질없이 자손이 끊기는 데에 대한 탄식만 했고 죽은 뒤에도 쓸쓸했지만 조금이나마 불쌍히 여겨 주는 사람이 없었으니, 분명히 음란한 책을 만들어 낸 응보를 받은 게 아니라고 하기 어렵다.”고 했다. 근대 학자의 고증에 따르면 조설근은 ‘한군 귀족 거인’이나 ‘공생’이 아니라 내무부 소속의 벼슬 없는 평민 신분이었다고 하니, 모경진과 양공신은 그저 조설근의 ‘저지’를 억지로 끌어들여 《홍루몽》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인증했을 뿐이다. 이렇게 작자를 자신의 해석에 배합하는 방법은 또한 청나라 때 색은파 독자들이 관행으로 사용하던 것이었다. 청대 사람들은 《홍루몽》의 바탕이 되는 이야기[本事]에 대해 여러 가지로 추측하여 부긍(傅恆)의 집안일이랄지, 화신(和珅)의 집안일, 장후(張侯)의 집안일, 명주(明珠)의 집안일 등등 다양한 ‘집안일과 관련된 설’들을 내놓았다. 그 가운데 가장 자세한 것은 장후의 집안일이라는 설과 명주의 집안일이라는 설인데, 후자가 더욱 유행했다. 《고전문학연구자료휘편(古典文學硏究資料彙編)》 《홍루몽권(紅樓夢卷)》에 수록된 것만 보더라도 명주의 집안일에 관한 이야기라는 설을 제기한 사람이 20명이 넘는다. 장후 가사설과 명주 가사설은 모두 조설근을 끌어들여 자신의 견해를 인증한다. 예를 들어서 《임무필기(賃廡筆記)》에서는 명주 가사설의 유래를 이렇게 설명한다.

조설근은 처음에 다른 저작이 없어서 참고할 도리가 없었다. 그러다가 그의 부친 연정(楝亭) 선생의 문집을 읽고 나서야 누란씨(納蘭氏)와 아주 친밀하게 왕래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그들의 생애와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해 조설근이 모든 집안사람들에 대해 모르는 게 없었던 것이 당연하다. 이런 설명에는 확실한 증거가 없고 모두 작자를 내세워 자신의 견해에 무게를 싣는 것이지만, 이론적으로는 다른 색은파에 비해 조금 치밀한 면이 있다. 왜냐하면 기타 색은파는 그저 《홍루몽》이 어느 집안의 일을 배경으로 한다고 제시하기만 할 뿐, 작자가 남의 집안일에 대해 알고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후 가사설의 경우, 주춘(周春)은 《열홍루몽수필(閱紅樓夢隨筆)》에서 자신이 《수원시화》를 참고하여 증명했다고 인정했다. 그도 아마 원매의 영향을 받아 조설근이 《홍루몽》의 작자라고 믿었던 듯하다. 그래서 그의 장후 가사설도 “거기서 임여해(林如海)라고 한 것은 바로 조설근의 부친 연정 선생”이라고 하여 조설근의 집안과 억지로 관계를 끌어다 붙인다. 그는 ‘조(曹)’의 은어(隱語)가 ‘임(林)’이니, ‘조’자의 이체자(異體字)가 ‘임’자와 마찬가지로 나무 목(木) 두 개가 나란히 있는 모양이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두 성씨의 원류를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또 어찌 작자의 뜻을 알 수 있겠는가?” 라고 했다. 색은파는 ‘성명의 상관관계’에서 ‘비밀을 드러내기’ 좋아하는데, 이 또한 그런 예 가운데 하나이다. 이상의 논자들은 모두 조설근이 《홍루몽》의 저자라고 믿었지만, 다른 몇몇 독자들은 작자를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서 난고거사(蘭皐居士)는 〈《기홍루몽》설자(綺紅樓夢楔子)〉에서 “《홍루몽》은 누가 지은 것인지 모른다.”고 했고, 눌산인(訥山人)은 〈증보《홍루몽》서(增補紅樓夢序)〉에서 “작자가 누구인지는 모르는데, 조설근이 지었다는 설도 있지만 그에 대해서는 잠시 깊이 따지지 않겠다.”고 했다. 진용(陳鏞)은 《저산헌총담(樗散軒叢談)》에서 이렇게 썼다. 그러나 《홍루몽》은 사실 이야기 책[才子書]이다. 처음에는 작자가 누구인지 몰랐는데, 누군가 강희 연간에 경사의 어느 고관의 저택에 빈객으로 있던 상주(常州) 출신의 어느 거인(擧人)이 지은 것이라고 했다. 사실 정위원(程偉元: 1745?~1818?)은 췌문서옥(萃文書屋)의 《수상홍루몽(繡像紅樓夢)》(이것은 표지 제목이고, 흔히 ‘정갑본[程甲本]’이라고 칭함)의 〈서문[序]〉에서 이렇게 밝혔다.

소설 《홍루몽》의 본래 제목은 《석두기》인데, 작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결국 누가 지은 것인지는 아직 모른다. 다만 책 속에서 조설근 선생이 여러 차례 다듬고 고쳤다는 기록이 들어 있다.

1927년 아동중배본(亞東重排本, 표지 제목은 《紅樓夢》, 上海亞東圖書館 鉛印)이 나오기 전에는 거의 모든 인쇄본이 정갑본을 바탕으로 다시 찍은 것이었기 때문에 정위원의 서문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독자들이 만약 정위원의 말을 믿었다면 더 이상 작자가 누구인지 따지지 않았을 테고, 그랬더라면 정갑본 《홍루몽》만 읽어서는 그 소설의 작자가 누구인지 알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 저명한 학자 왕궈웨이(王國維: 1877~1927, 호는 靜庵)조차도 조설근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고, 후스가 조설근이 작자라는 것을 고증해 낸 뒤에 차이위앤페이(蔡元培)는 그로 인해 왕궈웨이의 여한이 풀렸을 거라고 칭송했다.

《홍루몽》과 해석 방법론-《홍루몽》작자의 신분 및 그 강력한 해석 기능

글: 백운재
제2장 《홍루몽》 작자의 신분 및 그 강력한 해석 기능 
1. 《홍루몽》의 작자에 관한 청대의 기록 및 견강부회

1921년 후스가 〈《홍루몽》 고증〉(개정판)을 발표한 이래, 근대의 많은 학자들은 대부분 《홍루몽》(《석두기》)의 앞부분 80회의 작자가 조설근이라고 믿었다. 사실 후스 이전에도 조설근과 동시대 사람들이 이미 그를 《홍루몽》의 작자로 인정한 적이 있다. 일반 학자들이 즐겨 인용하는 증거는 《홍루몽》 필사본에 들어 있는 비평이다. 《지연재중평석두기(脂硯齋重評石頭記)》(갑술본) 제1회의 미비(眉批)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조설근이 읽고 문장을 더하거나 삭제했다면, 책을 펼쳐서 여기에 이르렀을 때 보이는 이 설자(楔子)는 또 누가 쓴 것인가? 이로 보건대 작자의 문장이 대단히 교활하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뒤쪽에서도 이런 문장이 적지 않다. 이야말로 작자가 안개와 구름으로 풍경을 흐릿하게 가리는 화가의 방법을 이용한 것이니, 보는 사람이 절대 작자에게 속지 않아야 비로소 눈이 밝은 사람인 것이다. 또 같은 회에서 가우촌(賈雨村)이 중추절에 지은 시에 대해 붙인 방비(旁批)에서는, “내가 보기에 조설근이 이 책을 지은 데에는 시를 전하려는 뜻도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이 외에도 애신각라 영충(愛新覺羅‧永忠: 1735~1793)의 《연분실집(延芬室集)》에는 〈묵향(墨香) 덕분에 소설 《홍루몽》을 보고 조설근을 추모함〉이라는 3수의 절구(絶句)가 들어 있는데, 제목 아래 “성이 조이다[姓曹]”라고 밝혀져 있다. 우언위(吳恩裕: 1909~1979)의 고증에 따르면 그 3수의 절구는 건륭 33년(1768), 조설근이 죽은 뒤 겨우 4, 5년 후에 지어졌다고 한다. 이를 보면 영충은 조설근을 《홍루몽》의 작자로 여긴 듯하다. 그렇지 않다면 《홍루몽》을 읽고 왜 조설근을 추모했겠는가? 이 외에도 부찰명의(富察明義: 1740?~ )의 《녹연쇄창집(綠煙瑣窗集)》에는 〈《홍루몽》에 대하여[題紅樓夢]〉이라는 12수의 시가 들어 있는데, 시 앞의 ‘소인(小引)’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조설근이 지은 《홍루몽》은 풍류와 화려한 나날의 극치를 모두 기록하고 있다. 아마 그 조상이 강녕직부(江寧織府)를 지냈으니, 그가 말한 대관원(大觀園)이라는 것은 바로 지금의 수원(隨園)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그 책이 전해지지 않아 아는 사람이 세상에 드문데, 나는 필사본을 보았다. 일반적으로 〈《홍루몽》에 대하여〉라는 시는 1770년에서 1775년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상 세 사람의 기록은 모두 조설근이 《홍루몽》의 작자라는 주장을 유도하고 있다. 부찰명의의 ‘소인’에서는 수원(隨園)을 언급하고 있는데, 원매(袁枚: 1716~1797) 역시 《수원시화(隨園詩話)》에서 그 말을 인용하고 있다.……그(曹寅: 1658~1712)의 아들이 《홍루몽》을 지었는데, 풍류와 화려한 나날의 극치를 모두 기록하고 있어서 아재(我齋, 즉 富察明義)가 읽고 칭송했다. 당시 《홍루몽》에 등장하는 어느 글재주 좋은 여인이 특히 아름다워서 아재는 이런 시를 지었다.

원매는 당시의 저명한 문인이고 또 그의 《수원시화》도 대단히 널리 전파되었기 때문에, 청대의 많은 논자들이 그의 영향을 받아서 조설근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모두들 원매와 비슷한 방식으로 이야기했다. 예를 들어서 원매는 조연정(曹楝亭, 楝亭은 曹寅의 字)을 조연정(曹練亭)으로 잘못 썼고 또 조설근을 조연정의 아들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자 몽치학인(夢癡學人)도 조설근을 “강녕직조(江寧織造) 조연정(曹練亭)의 아들[公子]”이라고 했고, 진기원(陳其元)은 “이 책(《홍루몽》)은 바로 강희 연간 강녕직조 조연정의 아들 조설근이 지은 것”이라고 했다. 섭덕휘(葉德輝) 또한 “이 책은 조인의 아들인 조설근이라는 효렴(孝廉)이 지은 것”이라고 했다. 청나라 때에 《홍루몽》을 논하면서 《수원시화》를 인용한 이들로는 또 전정방(錢靜方)과 이자명(李慈銘), 유월(兪樾: 1821~1907), 이보가(李寶嘉: 1867~1906) 등등이 있다. 이렇게 보건대 청나라 때에 원매의 설이 얼마나 널리 퍼져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아주 많은 이들이 《홍루몽》의 작자가 조설근으로 알고 있었다. 비록 청나라 때에 적지 않은 이들이 《홍루몽》을 조설근이 지은 것으로 믿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들이 조설근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아주 적어서, 그들의 기록은 모두 꼬리를 물고 널리 퍼진 헛소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앞서 거명한 몽치학인이나 진기원, 섭덕휘 등이 바로 좋은 예이다. 조설근의 사적은 알려진 바가 적은데, ‘조설근’이라는 이름은 오히려 써 먹을 만한 것으로 변했다. 논자들은 종종 ‘조설근’이라는 이름을 《홍루몽》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와 배합하거나 견강부회했다. 예를 들어서 모경진(毛慶臻)은 《홍루몽》의 “교화에 해를 끼치기” 때문에 작자인 조설근(그리고 그의 후대 자손들)이 응보를 받았다고 했다.

선례를 연 조설근은 한군(漢軍) 귀족 출신의 거인(擧人)이다. ……저승에 다녀온 이들이 모두들 전하기를 조설근이 지옥에서 심한 벌을 받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도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고 했다. 그가 다른 사람들의 몸과 마음의 성명(性命)을 꾀어 망가뜨린 죄업이 무척 커서 ……가경(嘉慶) 계유(癸酉, 1813)년에 임청(林淸)의 역모 사건에 도사(都司) 조 아무개가 연루되어 능지처참을 당하고 일족이 몰살당했는데, 바로 한군 귀족 조설근의 집안이었다. 또 양공신(梁恭辰)은 “《홍루몽》은 음란함을 가르치는 게 심하기” 때문에 조설근은 “공생(貢生)으로 늙어 창 아래에서 죽으면서 부질없이 자손이 끊기는 데에 대한 탄식만 했고 죽은 뒤에도 쓸쓸했지만 조금이나마 불쌍히 여겨 주는 사람이 없었으니, 분명히 음란한 책을 만들어 낸 응보를 받은 게 아니라고 하기 어렵다.”고 했다. 근대 학자의 고증에 따르면 조설근은 ‘한군 귀족 거인’이나 ‘공생’이 아니라 내무부 소속의 벼슬 없는 평민 신분이었다고 하니, 모경진과 양공신은 그저 조설근의 ‘저지’를 억지로 끌어들여 《홍루몽》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인증했을 뿐이다. 이렇게 작자를 자신의 해석에 배합하는 방법은 또한 청나라 때 색은파 독자들이 관행으로 사용하던 것이었다. 청대 사람들은 《홍루몽》의 바탕이 되는 이야기[本事]에 대해 여러 가지로 추측하여 부긍(傅恆)의 집안일이랄지, 화신(和珅)의 집안일, 장후(張侯)의 집안일, 명주(明珠)의 집안일 등등 다양한 ‘집안일과 관련된 설’들을 내놓았다. 그 가운데 가장 자세한 것은 장후의 집안일이라는 설과 명주의 집안일이라는 설인데, 후자가 더욱 유행했다. 《고전문학연구자료휘편(古典文學硏究資料彙編)》 《홍루몽권(紅樓夢卷)》에 수록된 것만 보더라도 명주의 집안일에 관한 이야기라는 설을 제기한 사람이 20명이 넘는다. 장후 가사설과 명주 가사설은 모두 조설근을 끌어들여 자신의 견해를 인증한다. 예를 들어서 《임무필기(賃廡筆記)》에서는 명주 가사설의 유래를 이렇게 설명한다.

조설근은 처음에 다른 저작이 없어서 참고할 도리가 없었다. 그러다가 그의 부친 연정(楝亭) 선생의 문집을 읽고 나서야 누란씨(納蘭氏)와 아주 친밀하게 왕래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그들의 생애와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해 조설근이 모든 집안사람들에 대해 모르는 게 없었던 것이 당연하다. 이런 설명에는 확실한 증거가 없고 모두 작자를 내세워 자신의 견해에 무게를 싣는 것이지만, 이론적으로는 다른 색은파에 비해 조금 치밀한 면이 있다. 왜냐하면 기타 색은파는 그저 《홍루몽》이 어느 집안의 일을 배경으로 한다고 제시하기만 할 뿐, 작자가 남의 집안일에 대해 알고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후 가사설의 경우, 주춘(周春)은 《열홍루몽수필(閱紅樓夢隨筆)》에서 자신이 《수원시화》를 참고하여 증명했다고 인정했다. 그도 아마 원매의 영향을 받아 조설근이 《홍루몽》의 작자라고 믿었던 듯하다. 그래서 그의 장후 가사설도 “거기서 임여해(林如海)라고 한 것은 바로 조설근의 부친 연정 선생”이라고 하여 조설근의 집안과 억지로 관계를 끌어다 붙인다. 그는 ‘조(曹)’의 은어(隱語)가 ‘임(林)’이니, ‘조’자의 이체자(異體字)가 ‘임’자와 마찬가지로 나무 목(木) 두 개가 나란히 있는 모양이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두 성씨의 원류를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또 어찌 작자의 뜻을 알 수 있겠는가?” 라고 했다. 색은파는 ‘성명의 상관관계’에서 ‘비밀을 드러내기’ 좋아하는데, 이 또한 그런 예 가운데 하나이다. 이상의 논자들은 모두 조설근이 《홍루몽》의 저자라고 믿었지만, 다른 몇몇 독자들은 작자를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서 난고거사(蘭皐居士)는 〈《기홍루몽》설자(綺紅樓夢楔子)〉에서 “《홍루몽》은 누가 지은 것인지 모른다.”고 했고, 눌산인(訥山人)은 〈증보《홍루몽》서(增補紅樓夢序)〉에서 “작자가 누구인지는 모르는데, 조설근이 지었다는 설도 있지만 그에 대해서는 잠시 깊이 따지지 않겠다.”고 했다. 진용(陳鏞)은 《저산헌총담(樗散軒叢談)》에서 이렇게 썼다. 그러나 《홍루몽》은 사실 이야기 책[才子書]이다. 처음에는 작자가 누구인지 몰랐는데, 누군가 강희 연간에 경사의 어느 고관의 저택에 빈객으로 있던 상주(常州) 출신의 어느 거인(擧人)이 지은 것이라고 했다.

사실 정위원(程偉元: 1745?~1818?)은 췌문서옥(萃文書屋)의 《수상홍루몽(繡像紅樓夢)》(이것은 표지 제목이고, 흔히 ‘정갑본[程甲本]’이라고 칭함)의 〈서문[序]〉에서 이렇게 밝혔다.

소설 《홍루몽》의 본래 제목은 《석두기》인데, 작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결국 누가 지은 것인지는 아직 모른다. 다만 책 속에서 조설근 선생이 여러 차례 다듬고 고쳤다는 기록이 들어 있다.

1927년 아동중배본(亞東重排本, 표지 제목은 《紅樓夢》, 上海亞東圖書館 鉛印)이 나오기 전에는 거의 모든 인쇄본이 정갑본을 바탕으로 다시 찍은 것이었기 때문에 정위원의 서문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독자들이 만약 정위원의 말을 믿었다면 더 이상 작자가 누구인지 따지지 않았을 테고, 그랬더라면 정갑본 《홍루몽》만 읽어서는 그 소설의 작자가 누구인지 알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 저명한 학자 왕궈웨이(王國維: 1877~1927, 호는 靜庵)조차도 조설근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고, 후스가 조설근이 작자라는 것을 고증해 낸 뒤에 차이위앤페이(蔡元培)는 그로 인해 왕궈웨이의 여한이 풀렸을 거라고 칭송했다.

중국 문학사에서 ‘4대 명작’으로 꼽히는 4대 고전 소설이 있다. 한국과 일본에서 비교적 잘 알려진 <삼국연의-三國演義>, <서유기-西遊記>, <수호전-水滸傳> 외에 <홍루몽-紅樓夢>이 있다. 4대 명작 중의 조설근(曹雪芹, 18세기 초반) 원작의 <홍루몽>은 구미 한학(漢學)계나 문학계에서 이 소설만을 집중 연구하는 ‘홍학(紅學)’ 연구파들이 있을 만큼 유럽이나 미국에서 오히려 더 인기이다. 물론 화인(華人)세계에서는 4대 명작 모두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여겨질 만큼 경극(京劇, 베이징 지방극), 예극(豫劇, 허난성 지방극), 황매희(黃梅戱/黃梅調, 후베이 지방극) 등의 고전 지방 희극에서부터 라디오 드라마, TV드라마나 영화 그리고 연극과 뮤지컬 등 모든 장르에서 아주 많이 다루어졌었고 앞으로도 사라지진 않을 것이라 믿는다.

11월2일 오늘은 ‘고궁박물원 제대로 알기’ 시리즈로 현재 타이베이 고궁 2층에서 만나볼 수 있는 ‘보이는 홍루몽’을 공유한다. 소설 원작을 각색한 드라마,영화,연극 등 다양한 장르의 새로운 작품들로 새롭게 태어나는 건 자주 볼 수 있는데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에서 소설을 주제로 기획한 특별 전시의 대표작으로 바로 ‘보이는 홍루몽’을 꼽을 수 있다. 중국의 마지막 제국 청나라 성세 때의 귀족 집안이 부귀영화를 누렸던 옛 세월을 추억하며 그린 이야기로 가문이 황제의 두터운 신임과 정으로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었지만 나중에는 죄를 얻어 집안 재산을 모두 나라에 몰수 당하고 가족들의 앞길도 막막했던 작가의 실제적인 인생 역정이 소설에 스며들어 있다.

가문과 인생으로는 불행했던 조설근이 운명을 탓하며 타락할 수도 있었겠지만 뛰어난 학식을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소설에 쏟아부었는데 확실한 건 <홍루몽>은 당시 신분이 높은 사람이든 서민층이든 남녀를 불문하고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고 한다. 소설에서 귀족들의 ‘물질’ 문화에 대한 서술을 보면 그 물건이 내 앞에 놓여진 듯한 생동감을 준다. 또 물질 가운데 17, 18세기 때 서양 물건들이 궁정으로 도입되면서 신기하게 느껴졌던 서양 물건이나 그들의 스타일을 받아들이고 심지어 모방을 하는 풍조를 엿볼 수 있다.

<홍루몽>은 <삼국연의>나 <수호전>과 같은 브로맨스나 마초주의적인 것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여성 작가가 써도 이렇게까지 섬세하게 여성의 마음을 그려내지는 못할 것만 같은 여성 심리를 잘 묘사해 냈다. 그것도 한 명의 여자주인공만 있는 게 아니라 여러 명의 각기 다른 성격의 여성상을 그려냈다.

작가의 집안이 최고 흥했던 17세기 강희제 시대에 이어 18세기 초기 옹정제 시대엔 죄를 얻어 재산을 몰수 당하여 가문이 몰락해버린 건륭제 시대에 이르러 성인이 된 조설근은 소설을 다 완성하지 않을 상황 아래서 짧은 일생을 마감했다. 미완성이지만 작품 자체가 너무 매력적이라 그 후에 ‘홍루몽’의 이야기를 이어가는 작업이 이어져 나갔다.  

제국 시대 귀족 집안 여성이라면 자기 스스로를 잘 가꾸지 않았을까? 수를 놓고 그림 그리고 글을 쓰고 우아한 외출을 하는 것 외에 무엇을 했을지도 궁금한데, 박물관에서는 어떠한 방식으로 무엇으로 ‘홍루몽’을 표현할지 더 궁금하다.

문학 작품에 삽화는 그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삽화가 아니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작품을 해석해 주는 것도 접근하기에 좋은 방법이라 생각되는데 앞서 현대 연극,영화,방송 등등 너무 많은 분야에서  <홍루몽>을 재현했다고 했는데 20세기는 1924년 매란방(생몰: 1894년-1961년, 최고의 경극 4대 명단(名旦,유명 인기 여주) 중의 한 명)이 여주 임대옥이 꽃을 묻는다는 뜻의 ‘대옥장화’를 들 수 있다. 그 후로는 1927년, 44년의 홍루몽 영화가 있었고, 고 장졔스 총통이 국부천도를 하여 타이완에서 정착한 후에도 ‘홍루몽’ 열기는 식지 않았다. 다소 가까운 시기의 것을 보면 1977년 임청하가 남주 가보옥 역을 맡아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게 기억난다. 지금도 이토록 홍루몽에 매혹되어 있는데 청나라 중기에는 더욱더 그랬을 것 같다. 청나라 화가 개기(改琦)의 소설 <홍루몽>에 관한 시화(詩畵)집이 있다. ‘청ㆍ개기 찬, 홍루몽 도영, 청 광서 5년(1979년) 간도회본 (清 改琦撰 紅樓夢圖詠 清光緒五年(1879)刊圖繪本, 좌측 사진, 국립고궁박물원 제공)’은 그림 도서의 서적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이번 특전에서 그 출판물을 볼 수 있다. 소설을 읽는데 글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삽화를 넣어주어 더 큰 인기를 끌 수 있었고 더 널리 알려지는 데 크게 작용했다고 본다.

<홍루몽>에는 가씨(賈氏), 사씨(史氏), 왕씨(王氏), 설씨(薛氏) 4개의 가문이 주역으로 나오는데, 이 중에 사상운(史湘雲)은 어려서 부모님을 잃었지만 활달하고 명랑한 성격을 가졌다고 작각가 묘사하였는데 사상운은 천성이 너그럽고 이해심이 많아 화도 잘 내지 않는 성격을 지녀 소설 ‘홍루몽’의 수많은 여성 가운데 가장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인물로 묘사되었는데 심지어 남장도 하는 털털한 성격이라고 한다.

그런데 소설에서 사상운에 관해 매우 여성스러운 걸 표현한 게 있다. 바로 그녀가 술에 취해 누워있는 부분인데, 소설 속의 광경을 이 부채에서 찾아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 작품에는 꽃과 나비가 있고 손잡이에는 옥과 기타 보석으로 장식을 하였다. 잠을 자다 손에 쥔 부채를 떨어트렸다고 상상해볼 때 필자는 부채의 그림과 소설 이야기가 어우러져 마치 향기가 나는 듯한 느낌이다. ('보이는 홍루몽' 전시물 일부. -사진: 백조미)

‘청 ㆍ백주 채수 감주보취옥 화접 단선(清 白綢彩繡嵌珠寶翠玉花蝶團扇)’ 부채는 ‘보이는 홍루몽’의 전시 작품중 꼭 갖고 싶은 것 중의 하나인데  이 외에도 모든 전시품이 다 정교하고 아름다우며 직접 써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욕심도 생긴다. 옛날엔 더위를 식혀 주기도 하겠지만 사실 얼굴을 살짝 가리는 데에도 부채가 자주 등장하였다고 생각되며, 부드러운 여성미를 나태낼 때에도 일종의 장식품, 소품으로 부채를 쓴다. 전시실의 이 부채는 하얀 비단에 수를 놓고 보석을 박은 것인데 화려하다는 생각보다는 정교함, 섬세함에 대한 감탄이 더 앞선다.-白兆美 취재 ㆍ보도: 백조미

거창한 제목들이 탄생하기까지

석두기石頭記, 풍월보감風月寶鑑, 금릉십이차金陵十二釵, 정승록情僧錄. 이 단어들은 일정한 규칙이 보이지도 않고, 비슷한 구석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네 단어는 다름 아니라 중국소설 <홍루몽紅樓夢>을 부르는 서로 다른 이름이다. 심지어 <홍루몽>의 네 가지 이름 사이에는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존재한다. 독자들은 작품 첫 머리부터 이 소설이 여러 이름을 갖게 된 내력에 대해 살펴보게 된다. 이로부터 공공도인은 …… 스스로 이름을 바꾸어 정승情僧이라 하고 이 <석두기>를 <정승록>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오옥봉에 이르러 <홍루몽>으로 이름을 붙였으며 동로東魯의 공매계孔梅溪가 다시 이 책을 <풍월보감>이라 제목을 달았다. 훗날 조설근曹雪芹이 도홍헌悼紅軒에서 10년간 열람하면서 다섯 차례나 덧붙이고 목록을 만들고 장회를 나누었으니 책이름을 <금릉십이차>라고 하였다. (<홍루몽> 1회)위 내용이 소설 속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또한 <홍루몽>이 존재 자체만으로 중국인들에게 신격화되어왔다는 점 역시 주의해야 한다. 즉, <홍루몽>을 둘러싼 여러 이야기를 접할 때는 이마저 소설일 수 있다는 경계의 태도가 필요하다. 인용한 홍루몽 1회의 내용에 대해 지연재指硯齋라는 인물은 ‘작가(조설근)에게 속지 말아야 한다’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  (비유하자면, 소설 <장미의 이름> 서문에 나오는 “1986년 8월 16일, 나는 발레라는 수도원장이 펴낸 한권의 책을 손에 넣었다”라는 구절이 실제로 움베르트 에코의 체험담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이다.) 다시 <홍루몽>의 네 가지 이명異名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와서, 이렇게 작품에 여러 이름이 붙은 것은 이런 제목을 붙인 사람들이 저마다 중요하다고 여긴 요소를 부각시킨 결과이다. (최대한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가 되지 않는 선에서 이야기하자면) <석두기>는 주인공 가보옥의 처지를 강조한 제목이고 <풍월보감>은 작품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 소재인 거울에 주목한 것이다. <금릉십이차>는 말 그대로 <홍루몽>의 주요 여성인물 열두 명을 상징하는 것이고 <정승록>은 위의 글에 등장하는 공공도인의 이야기와 연관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홍루몽> 영어판의 제목에도 이와 비슷한 논쟁이 있었다는 점이다. <홍루몽>은 이전에 주로 “The Dream of Red Chamber"로 많이 번역되다 최근에 와서는 주로 “The Dream of Red Mansions"라고 번역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에는 "Chamber(규모가 큰 방)"라는 단어 대신 "Mansion"(대저택)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대관원大觀園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홍루몽>의 전반적인 이야기를 담을 수 있다는 시각이 반영된 것이다. 어떤 이름을 지어 부를 것인가? 제목을 둘러 싼 쟁점 말고도, <홍루몽>은 ‘이름 짓기’와 관련된 이야기 거리가 많다. 애초에 이 작품은 등장인물들의 이름에서부터 작가의 특정한 의도를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홍루몽>에서 가씨 집안 네 자매 이름은 원춘元春・영춘迎春・탐춘探春・석춘惜春인데, 이들의 이름 앞 글자를 딴 '원영탐석(元迎探惜; yuanyingtanxi)' 네 자는 ‘원래 탄식하는 것이 마땅하다(原應歎息; yuanyingtanxi)’라는 의미의 한자 어구와 중국어 독음이 같다. 작가가 언어유희를 통해 암시한 것처럼, 네 자매의 최후는 읽는 사람에게 절로 한숨이 나오게 만든다.

내가 다시 짓는 나의 이름

대관원에서 펼쳐지는 에피소드 속에서도 ‘이름 짓기 모티프’가 여러 번 등장한다. 예컨대 대관원에서 이름이 정해지지 않은 곳에 이름을 붙이는 이야기(17회), 하금계夏金桂의 명에 따라 추릉秋菱으로 이름이 바뀌는 향릉香菱 이야기(79회)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은 ‘이름 짓기 소동’은 37회의 시 창작 모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관원의 청소년(?)들은 여느 중국 고대인들처럼 글 짓는 소일거리를 통해 무료함을 달래려 한다. 탐춘은 보옥에게 편지를 통해 옛사람들처럼 시 모임을 만들어 보자는 제안을 한다. “……그것이 설사 일시적 흥취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해도 마침내 천고의 미담으로 남게 되지 않았습니까.”(<홍루몽> 37회) 호기롭게 시작된 시 모임은 나름대로 형식을 갖추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홍루몽>에서 등장인물들이 짓는 시야말로 이 소설을 가장 빛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시알못’인 나에게는 시작詩作 이외에 자꾸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온다. <홍루몽> 시 모임에서 시를 짓기 위해 가장 먼저 거치는 단계는 자신들의 이름을 다시 짓는 일―필명을 만드는 과정이다.

“정녕 시 모임을 만든다고 하면 우리 모두가 진짜 시인이 되는 것이니 우선 언니, 동생이니 시동생, 형수님이니 하는 호칭부터 없애야 비로소 속되지 않은 것 같아요.” 대옥이 이번에는 아주 현실적인 문제를 제안했다. 이환이 곧바로 맞장구를 쳤다.“그거 아주 좋은 의견이야. 다들 멋진 아호를 지어서 서로 부르면 고상하겠군요.”(이하 생략)

(조설근, <홍루몽> 37회)

37회 에피소드에 개인적으로 흥미를 느끼는 이유는 등장인물들이 스스로의 이름을 다시 짓는 과정에서 그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흔히 ‘자호自號’라고 불리는 것을 만들 기회를 얻을 때 누군가는 거창한 의미를 담아 작명을 할 것이다. 그러나 <홍루몽>의 시사 모임에 참여한 인물들이 지은 호는 소박하기 짝이 없다. 심지어 보옥・대옥・보차 등 주요 등장인물의 호는 그들이 거처하는 건물의 명칭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가보옥을 부르는 이름인 ‘이홍공자怡紅公子’는 그가 이홍원怡紅園에 살고 있기 때문에 붙은 것이다. 그리고 임대옥은 소상관瀟湘館에 거처하기 때문에 ‘소상비자瀟湘妃子’로, 보차는 형무원蘅蕪園이라는 곳에 살기에 형무군蘅蕪君이라는 칭호를 얻는다. 이런 호를 접하고 나니 ‘호칭부터 없애야 한다’는 임대옥의 선언이 무색해진다는 생각마저 든다. 부모 혹은 집안 어르신이 지어준, 내가 바꿀 수 없는 본래 이름 이외에 새로운 이름을 짓는 순간에 다소 맥 빠지는 선택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소한 주변 사물을 따라 보잘 것 없는 의미를 담아 호를 짓는 경우는 <홍루몽>보다 더 이전 시대에서도 예시를 찾아볼 수 있다. 집 근처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따라 ‘오류선생五柳先生’이라는 호를 지은 시인 도연명陶淵明, 자신과 자신이 아끼는 물건 다섯 가지가 하나가 되는 흡족한 심정을 ‘육일거사六一居士’라는 호에 담았던 문인 구양수歐陽脩 등등. <홍루몽>의 등장인물들과 도연명・구양수의 ‘평범한’ 이름 짓기는 호에 거창한 신념을 담는 행위가 이름에 스스로를 얽매이게 하는 것은 아닌지 되묻는 듯하다.

어떤 의미를 부각시킬 것인가

보옥이 이홍공자라는 호를 얻기까지 ‘무사망無事忙(일없이 바쁘다)’, ‘부귀한인富貴閑人(부귀와 한가로움 두 가지를 모두 가진 사람)’과 같은 이름도 후보에 오른다. 보옥은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왈가왈부 하는 사람들에게 한마디 던진다. “아무래도 그냥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는게 훨씬 낫겠어요.”

<홍루몽>의 이름 짓기를 포함한 여러 사건들은 복잡한 접근 방법 대신 ‘반봉건’ 한 단어만 추가하면 그럴 듯하게 퍼즐이 풀릴 때가 많다. 이 키워드는 마오쩌둥毛澤東이 본격적으로 <홍루몽> 해석에 적용하면서 널리 알려졌으며, 지금까지도 작품 해석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시사 모임에서 호칭을 없애자는 대옥의 발언에서 비장함을 느끼는 것, 혹은 등장인물들의 소소한 필명에 허탈감이 느껴지는 것 모두가 반봉건과 저항정신의 관점에서 <홍루몽>의 이야기 전개에 기대를 걸고 있기 때문이다.

<홍루몽> 속 인물들이 시사 모임을 통해 일상과 격리된 세계를 형성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시사 모임에 심각한 의미를 부여하기에 앞서, 왜 <홍루몽>에서 그 중요한 모임이 정작 두 번밖에 결성되지 않았는지 먼저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이다. 시 모임의 원래 취지대로 한 달에 두 세 차례 회동이 있었다고 한 들, 이들에게 시 짓는 행위는 봉건 질서에서 잠시 도피하는 것에 불과하다. 물론 이렇게 시사 모임이 형성한 세계가 <홍루몽> 속 인물들이 택할 수 있는 소극적인 저항의 방식이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좋은 문학 작품일수록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생긴다는 것에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 당연한 사실은 <홍루몽>이 본격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청대淸代에도 이미 회자되던 이야기였다. 당시 한 사람은 명제주인明齋主人이라는 필명으로 ‘<홍루몽>의 백가쟁명百家爭鳴’ 현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어떤 사람은 그 화려함을 좋아했고, 어떤 사람은 비극성이 깊은 것을 좋아했다. 또 어떤 이는 말투를 하나하나 묘사한 것이 현실과 닮아있는 것을 좋아했으며, 어떤 이는 시기와 상황에 따라 작품에 나타난 광경이 다른 것을 좋아했다.或愛其繁華富麗, 或愛其纏緜悲惻, 或愛其描寫口吻一一逼肖, 或愛其隨時隨地各有景象 (<명제주인총평明齋主人總評>)

<홍루몽>에 다른 제목을 지은 사람들이 저마다 방점을 찍은 부분이 다른 것처럼, <홍루몽> 내용의 분석에도 다양한 시각이 필요하다. 이 당연한 독해 방식이 특정 시기를 거치면서 해석의 다양성이 줄어드는 방향으로 변한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든다. 마오쩌둥의 <홍루몽> 해석의 그림자에서 의식적으로 벗어나려 노력했던 중국도, 교조적인 <홍루몽> 해석에서 자유로울 수 있던 우리나라도 해석의 다양성 차원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홍루몽-청대의 중국 사회상을 파헤친 걸작, 중국 최고의 소설은 은폐 서술로 시작한다.

제1회-진비는 꿈속에서 신령한 돌을 알게 되고, 가화는 속세에서 미녀를 그리워하다. “이 부문은 소설의 첫 회이다. 작자는 한바탕 꿈같은 경험을 하고 난 뒤에 진짜 사실을 숨기고 ‘신령한 돌(通靈)’의 이야기를 빌려 이 ‘석두기(石頭記)’를 지었다. 그래서 진사은(甄士隱)을 운운한 것이라 스스로 말한다. 그렇다면 책에는 어떤 사건, 어떤 인물들이 그려져 있는 것인가? 작자는 또 이렇게 말한다. ‘이제 세상사가 하릴없이 바쁘기만 할 뿐 한가지 일도 이루어놓지 못했는데 문득 옛날에….’”(조설근 저, 홍상훈 역, 솔, 2012)

1.인파가 북적이는 장 마당이나 대중이 많이 모인 곳에서 이야기하는 형식을 취한 도입부다. 전지적 시점의 작가가 모여 있는 청중에서 내레이션 하듯이 썼지만 이야기속에 이야기를 담는 형식인 액자소설 형식을 취했다. 뭔가 복잡한 내용 전개가 있을 것을 암시하지만 상징과 은유로 숨겼다. 이른바 은폐수법(隱蔽手法)이다. 문체는 대중이 읽기 쉬운 편한 형식이다.

2.조설근(차오쉐친)의 ‘홍루몽(紅樓夢, 1791~1792)’은 중국 고전 소설 최고의 명작이다. 중국 4대 기서(奇書) 중 하나로 중국인의 필독 도서로 꼽힌다. 홍루몽은 ‘붉은 누각의 꿈’이라는 뜻이다. 홍루(紅樓)는 규방(閨房, 부녀자 거주 내실), 즉 여성 거주구역이라는 뜻이다.

많은 판본이 있다. 80회 본과 120회 본이 대표적인데, 80회 본은 필사본이다. 120회 본은 고악(高鶚,1763~1815)이 40회 본을 덧붙여 쓴 것을 1791년 무렵 문인 정위원(程偉元)이 간행했다. 그래서 ‘정갑본(程甲本)’이라 하는데 이를 개정한 것이 1792년에 간행됐다. 이 때가 청나라 건륭제(高宗 純皇帝,1711~1799) 통치기다. 다른 명칭으로는 ‘석두기(石頭記)’, ‘금옥연(金玉緣)’, ‘금릉십이채(金陵十二釵)’ 등이 있다. 영어 번역본은 ‘Dream of the Red Chamber’이다.

3.홍루몽은 저자가 30대에 창작에 들어가 여러 일화를 나열한 형태로 10년 동안 썼다고 한다. 중국 백성의 입말인 백화(白話, Vernacular Sinitic, 구어)를 한자로 기록한 것이다. 이를 백화문(白話文 )이라고 한다.

단순하게 읽으면 그저 그런 단순한 연애소설, 통속 문학의 하나이다. 하지만 그 속에 명말 청대의 사회상과 문화 등이 유려한 문체로 잘 드러나 있는 걸작이다.

나오는 인물만 700여 명에 이르고, 한글 번역 출판본 기준으로도 7~8권에 이르는 방대한 대하소설이다. 100종 이상의 간본(刊本)과 30종 이상의 속작(續作,속편), 위작(僞作)이 있다고 한다.

4.홍루몽은 워낙 대중화 됐음에도 발표 당시의 문장이 대부분 그대로 읽힌다고 한다. 당대 백성의 입말(구어)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등장인물은 황실과 명문 고관대작, 궁중의 환관, 궁녀, 관리, 창극배우, 봉사 여자 이야기꾼, 화훼 전문인, 무당, 도사, 승려, 신선과 선녀 등 700여명이 나온다. 주요 인물은 여성주의자이자 남자주인공 가보옥(賈寶玉), 여자주인공으로 병약한 사촌 누이 임대옥(林黛玉), 여자주인공으로 가정적이며 건강한 설보채(薛寶釵) 등이다.

5.줄거리는 ‘가씨 가문의 흥망성쇠’와 가보옥과 임대옥, 설보차를 둘러싼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다. 즉 3류 로맨스의 핵심인 삼각관계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비극적 죽음, 가문의 몰락 등이 소설의 핵심 줄기다.

 금릉(金陵, 현 남경, 南京)에 있는 가씨(賈氏) 가문은 사치와 대관원(大觀園, 큰 정원) 등의 건축으로 집안이 기울기 시작한다. 가씨 집안의 총아 가보옥은 설보채에 호감을 느끼지만, 임대옥을 더 사랑한다. 그러나 집안의 실권자인 할머니 사태군(史太君)은 임대옥과 결혼을 허락치 않는다. 결국 가보옥은 집안의 계략으로 설보채와 마음에 없는 혼인을 한다.

가보옥이 결혼하는 날 임대옥은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절망, 쓸쓸히 숨을 거둔다. 인생무상을 느낀 가보옥은 과거 시험장에서 그대로 사라지고, 고민 끝에 출가한다.

훗날 아버지 가정(賈政)과 나루터에서 만나지만, 가보옥은 눈인사만 보내고 승려와 도사 사이에 끼여 사라진다. 첫장에 나온 진비는 낙향하는 가화와 함께 이야기를 몇 마디 나누고, 아이를 낳자마자 죽은 딸 영련의 영혼을 천계로 보낸 뒤 망망대사, 묘묘진인과 함께 이야기를 끝마친다.

5.홍루몽이 중국 백성들 사이에서 읽히고 구전되다가 유명해 진 것은 청말 반청(反淸,청나라에 반대) 운동의 동력이 됐기 때문이다. 반청주의자들이 한족이 아닌 청 나라와 봉건 전제군주 타도의 소재로 써먹은 것이다.

중국사 최초 공화국의 등장을 알린 신해혁명(辛亥革命,1911~1912) 전후 한족 지식인들의 홍루몽 언급도 한몫했다. 당시 저명한 학자 후스(胡適, 1891~1962)는 고증을 통해 홍루몽이 조설근의 자전적인 소설이라는 것을 밝혀내는 등 화제를 불러 인기를 배가 시켰다.

청나라 말 대학자 왕국유(王國維,1877~1927)는 “홍루몽은 우주의 대저술”이라고 극찬했다. 중국 문학의 아버지 루쉰(魯迅, 1881~1936)은 “홍루몽이 나타난 뒤로 전통적인 사상과 작법이 모두 타파됐다”고 말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조선 책략’을 쓴 황준헌(黃遵憲, 1848~1905)은 청 말 주일대사관 참사 시절에 일본 식자층에게 “천지개벽 이래 고금을 통해 가장 훌륭한 작품”이라고 자랑했다고 한다.

6.거의 모든 책이 불태워지던 중국 문화대혁명(文革,1966~1976, 중국 사회정치 혁신을 내세운 문화 운동 ) 기간에도 ‘홍루몽’ 은 살아남았다. 중국 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毛澤東,1893~1976)의 추천도 컸다. 마오는 “홍루몽은 다섯 번 읽어야 한다”고 추천했다.

중국에서는 ‘만리장성과도 바꿀 수 없는 중국인의 자존심’이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으며, 홍루몽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하는 '홍학(紅學)'이라는 전문적인 학문 분야도 있다.

1977년 홍콩 쇼 브라더스가 이한상(李翰祥,Li Han Hsiang,1926~1996) 감독, 임청하(Brigitte Lin, 林靑霞,1954~현재) 주연(남주인공 가보옥 연기) ‘금옥양연홍루몽(金玉良緣紅樓夢, 영어 제목 The Dream Of The Red Chamber, 1977)’을 개봉했다. 중국에서 1987년 중앙텔레비전 1채널(제작 왕푸린), 2010년안후이위성TV(제작 리샤오훙)에서 방영됐다.

7.우리나라에서는 세계 최초로 번역본이 나왔다. 1884년 역관 이종태와 문사들이 고종 연간 궁중의 명으로 120회본을 처음 완역한 것이다. 현재 서울대 장서각(藏書閣)에 소장돼 있다. 이책은 구한말의 다양한 우리말 어휘가 활용돼 근대 국어 연구 자료 가치가 높다고 한다.

1990년대에는 연변대학의 중국 교포(조선족) 학자들이 완역한 본이 예하출판사에서 나왔다. 또 다른 중국교포들이 번역한 청계출판사 판이 나왔고, 2000년대에는 중국문학 전문가 최용철 고려대 중어중문학과 교수와 고민희 한림대 중국학과 교수가 공동 번역한 나남출판사 판이 간행됐다. 최신에는 2013년 솔출판사에서 홍상훈 인제대 중국학부 교수의 완역본(전 7권)이 출간됐다.

#.조설근( 曹雪芹, 차오쉐친,1715년 혹은 1724?~1764)=청나라 대표 소설가. 본명은 조점(曹霑). 자는 몽완, 호는 설근. 후대에 조설근으로 정착됐다.

중국 난징에 있는 조설근 기념관

石頭記
홍루몽
金玉良緣紅樓夢
紅樓夢
금옥양연홍루몽

1.청나라 시기 난징(南京) 강녕직조(江寧織造·황궁에 물건을 공급하는 일)를 맡은 명문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한족인 조설근 고조(高祖) 조진언(曺振彦)이 명말 침략군 청군에 포로로 잡혔으나 재능을 인정받아 입궐한 것이 출세의 계기였다. 청 강희제 때 조부에 이어 아버지도 강녕직조를 맡아 권력과 부를 함께 누렸으나 옹정제 때 황궁의 압박을 받고, 재산까지 몰수됐다. 유소년기에 집안이 풍비박산 나면서 조설근 가족은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강제 이주 당했고, 베이징 교외에서 가난하게 살았다.

2.조설근이 홍루몽을 쓰던 시기도 매우 궁핍한 생활이 이어졌다. 말년에는 그림을 그려서 팔아 겨우 생활했을 정도로 가난했다고 한다. 10년동안 써온 가문의 내력과 자전 이야기인 홍루몽을 완성하지 못하고, 1763년 마흔여덟 살 되던 해 섣달 그믐날에 영면했다. 베이징 교외 마을의 동북쪽에 있는 지장구에 묻혔다. 조설근이 죽은 직후부터 홍루몽은 필사본으로 주변사람에게 읽히기 시작해 인기를 끌었다. 이후 사망 30년 전후에 활자본으로 출간됐다.

3.하북성 석가장시(石家庄市) 부근의 영국부(榮國府)에 홍루몽 드라마를 촬영한 세트장이 관광지로 만들어져 있다고 한다. 조설근이 묻힌 곳 인근 베이징 둥청구에 베이징 국가 식물원이 조성됐고, 조설근 옛집은 기념관으로 꾸며져 있다. 조설근이 유소년기에 살았던 난징에도 조설근기념관이 건립돼 있다.(콘텐츠 프로듀서)

용기의 반대는 무지
기자명 김종천 원로교무 

중국 청나라 때의 소설 『홍루몽(紅樓夢)』이 있다. 이를 ‘만리장성하고도 바꾸지 않을 중국인의 자존심’이라고 표현한 사람도 있고, 일개 소설을 연구하는 학문을 ‘홍학(紅學)’이라고 할 정도로 유명하다.

“나는 『홍루몽』을 왕양명 이후에 등장한, 가장 위대하면서도 정서적인 분위기를 갖춘 심학(心學)으로 본다. 이 심학은 유일무이한 영적 표상인 가보옥을 창조해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여성으로 구성된 지극히 아름다운 영혼의 체계를 창조했다. … 문학이 영혼의 작업이라고 한다면 중국 고전소설에서 영적인 횃불을 진정으로 높이 든 것은 조설근(曹雪芹)의 『홍루몽』이었다. 시내암의 『수호전』도 아니고 나관중의 『삼국지』도 아니다.”(류짜이 푸우, 『쌍전』, 글항아리)

그 소설의 주인공 가보옥에게는, 인척이면서 사촌 형수이자 남매 같은 왕희봉이라는 여자가 있다. 전형적으로 제 꾀에 자기가 넘어간 여자다. 왕희봉은 가(賈)씨 집안의 여장부로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물을 모으려다 그 때문에 집안 사람들의 불만을 사고 비참한 결말을 맞는다.

머리가 똑똑하다는 것은 자산이지만, 그런 재능은 어디에 쓰느냐에 따라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도 있고 한순간 바람에 날릴 수도 있다. 그래서 진짜 똑똑하고 현명한 사람은 자신의 재능을 아무 때나 내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함부로 머리를 굴리며 잔재주를 부리다가는 생각지 않은 화를 입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할 수 있다는 것과 꼭 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지 않는 것은 망설임이고, 능력이 없어 하지 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하는 것은 어리석음이다. 또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실행하는 것은 슬기로움이고, 할 수 있다는 것을 몰라 하지 못하는 것은 우둔함이다. 무슨 일을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파악하고 확실하게 아는 것이 모든 지(知, 智)의 근본이 된다.

인생의 가장 큰 비극 중 하나는 할 필요가 없는 일을 온 힘을 다해서 하는 것이고, 해서는 안 될 일을 죽을 힘을 다해서 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다 무지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기원전 4세기 경 플라톤이 제시한 온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 필요한 네 가지 덕목은 지혜·용기·절제·정의인데, 여기서도 지혜가 무엇보다 우선한다.

알고 짓는 죄와 모르고 짓는 죄 중에 어느 것이 더 클까? 이것은 지와 무지를 판단하는 중요한 질문이다. 그것에 관해 토론을 한 경이 있다. 불경 중에서는 매우 이색적이고 특이한 분위기를 가진 경이다. 그 경의 이름은 『밀린다 팡하』(Milindapanha), 혹은 『밀린다왕(王)문경』 또는 『나선비구경』이라고도 한다. 밀린다는 고대 인도-그리스 왕국인 박트리아(大夏) 왕 메난드로스(B.C.163~105)의 인도식 이름이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의 카불 지역에서 태어나 왕위에 올랐다. 기원전 2세기 경 알렉산더 대왕의 인도 원정 이후 북부 인도를 그리스에서 지배한 후다.

오늘날 힌두쿠시 산맥과 우즈베키스탄에 걸쳐 위치한 지역인데, 이곳에 기원전 3세기 무렵 그리스인 총독 디오도토스가 박트리아왕국을 건설했고, 그 후계자인 메난드로스는 샤카라(현재 파키스탄의 시알코트)를 수도로 정하고 인도 내륙지방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불교도들은 그를 인도의 아쇼카 대왕에 비유한다. 『밀린다팡하』에서 밀린다 왕과 불교의 고승 나가세나(Nagasena,那先)가 불교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그 대화의 무대가 박트리아 왕국의 수도 샤카라다. 이 대화는 희랍과 인도의 조우라는 문명사적인 토론이 되었다. 이 때 나가세나 스님은 지배자인 왕에게 ‘왕자(王者)’의 방식이 아닌 ‘현자(賢者)의 방식’으로 토론하자고 요청했다. 곧 계급장을 떼고 이야기하자는 것이다. 결론은, ‘모르고 나쁜 짓을 한 사람이 죄가 더 크다’고 결론이 났다. 

그 경에 나오는 대화다. “존사 나가세나여, 알고 나쁜 짓을 한 자와 모르고 나쁜 짓을 한 자는 어느 쪽이 더 죄가 크겠습니까?“ ”대왕이시여, 모르는 채 나쁜 짓을 한 사람이 죄가 더 큽니다.” “존사 나가세나여, 그렇다면 내 왕자와 대신이 모르고 나쁜 행위를 한다면 두 곱 더 무겁게 벌해야 되겠소이다.” “대왕이시여,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시뻘겋게 달궈진 쇳덩어리를 어느 사람은 모르고 잡았고, 또 한 사람은 알고 잡았다 할 때, 누가 더 많이 데겠습니까?” “존사여, 모르고 잡은 사람이 더 데겠지요.” “대왕이시여, 그와 마찬가지로, 모르고 나쁜 짓을 한 사람이 죄가 더 큰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어록에 있는 “알고 악을 행하는 것은 모르고 악을 행하는 것보다 낫다”라는 이야기와 비슷하다. 현대에서는 알고 짓는 나쁜 행위가 더 나쁘다고 할 수 있겠지만, 고대인의 의식에는 모르고 짓는 죄가 더 크다고 봤다. 그러니 먼저 잘 알아야 된다. 곧 지혜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경은 리스 데이비스와 호너에 의해 번역되었고, 한글 번역도 몇 가지가 있다. 동서양의 만남, 너무 재미있다. 

 강남을 여행한 만주인          

  홍루몽紅樓夢은 청 건륭제 시절에 조설근曹雪芹이 쓴 작품으로, 중국 4대 기서奇書에 꼽힐 만큼 중국에서 대중적인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한국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다. 나 역시 인생 어느 순간엔가 삼국지나 수호지, 서유기, 금병매를 책이나 만화로 즐긴 기억이 있는데 홍루몽에는 그런 기억이 없었다. 시기적으로 가장 늦게 출현한 이유도 있겠지만, 청나라 봉건 생활 풍경을 집대성한 매우 중국적인 작품이기 때문이다. 

  홍루몽은 역사나 무협에서 소재를 찾은 이전의 소설들과 달리 여자들의 활동공간 속에서 소재와 배경을 찾았다. 홍루몽은 남경의 저택이자 장원莊園, 원림园林인 대관원大觀园이 서서히 몰락해 가는 과정을 그렸으나, 도덕 관념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일상의 도덕 안에서 사는 인간, 특히 여성을 그려냈다. 주인공이 등장하는 도입부는 신기한 돌이 환생하여 인간 세상에 오는데, 도교와 불교적인 분위기가 짙어 이전 시대의 작품보다 더 예스러운 느낌을 준다. 하지만 소설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근대 부르주아 통속소설처럼 청춘남녀의 연애 감정을 이야기한다. 홍루몽 이전에 금병매도 애정 이야기를 다뤘는데 기혼남녀의 성생활 풍속도와 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다뤘다. 홍루몽처럼 인간과 연애 감정이 어떻게 이어지는가에 대해 섬세한 통찰을 하고 있지 않다. 당시 청나라는 자본주의 산업발달 수준이 높지 않았음에도 조설근은 혼자 창작 능력을 갈고 다듬어서 근대문학 정신을 표현하는 문학적 성과를 만들어냈다. 나는 이런 문학 업적을 이뤄낸 작가에 대해 호기심이 일었다.       

  조설근은 18세기 남경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남경에서 태어났으면 남경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자연스럽겠지만, 그의 집안의 독특한 내력은 그를 남경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을 주저하게 만든다. 나의 머릿속에 그는 ‘강남을 유람한 만주인’이었다. 조설근의 집안은 만주에 살던 만주족이었으며 조부모 대에 청 황실과 각별한 인연이 있었다. 베이징에서 그의 부모는 황실 업무를 담당하다가 남경에 요직을 얻어 남경에서 부호로 살게 되었다. 요즘 말로 하면 이권이 있는 좋은 자리에 최고 권력층이 꽂아 준 셈이었다. 그러니 그 집안은 청 황제의 입김에 따라 흥망이 순식간에 바뀔 수 있었다. 황제의 배려가 사라지자 조설근 집안은 급격히 몰락했고 조설근은 베이징으로 이주해야만 했다. 그는 베이징의 외곽, 향산 아래 동네에서 여기저기 옮겨 살며 가난 속에서 작품을 집필했다. 나는 그가 얼마만큼 자신이 만주족이라는 자각 속에서 살았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나는 그가 중년과 말년에 베이징에서 지낸 것은 타향을 헤맸다기보다는 고향에 정착한 것으로 생각한다. 베이징은 만주족의 도시였으니까. 아마도 어린 시절, 남경에서의 부유한 생활은 꿈이었을 것이다. 붉은색 누각에서의 꿈. 

  조설근에게 남경은 청춘과 사랑, 부유함의 땅이었다. 그리고 그의 작품에서 전생의 인연처럼 남경과 엮여 있는 또 다른 도시는 소주였다. 홍루몽의 1장엔 고소姑苏, 소주성을 창문이라고 지칭하고, 창문 밖의 십리, 산당가를 ‘부귀영화와 풍요의 땅’이라고 했다. 홍루몽 작품 속 대관원 역시 소주의 대표적인 원림인 ‘졸정원’을 모델로 했다고 한다.

   “그 옛날 땅이 동남쪽으로 기울었을 때, 이 동남지방의 한 귀퉁이에 고소姑苏라는 큰 고을이 있었다. 그 성의 이름을 창문阊门이라 했는데, 인간세상에서 첫째, 둘째가는 부귀영화를 누리는 풍요로운 땅이었다. 이 창문 밖에 십리가十里街라는 거리가 있고 그 안에는 인청仁清이라는 골목이 있는데 골목 안에 한 낡은 절이 있었다. 들어가는 길이 매우 좁은 그 절을 사람들은 모두 호로묘葫芦庙라고 불렀다”     

  강남에 다녀간 만주족 중엔 청 황제들도 있다. 강희제도 그랬지만 건륭제도 대략 60년의 제위 기간 중에 강남 순방을 여섯 차례 했다. 황제는 순방 중 남경을 지날 때는 조설근 집에 여러 차례 머물렀다고 하니 조설근의 집안과 청 황실과의 관계가 얼마나 가까웠는지 알 수 있다. 건륭제는 특히 송명시기에 소금 무역으로 명성을 떨친 도시, 양주揚州를 좋아했다고 하는데 그 소리를 들으니 나는 기분이 좀 묘했다. 요녕을 거쳐 심양에 있던 청은 산해관을 넘어 중원 진출에 성공한다. 이후 청은 강남의 여러 성을 차례로 공격하여 무너뜨리며 대륙 통일에 나섰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강남 사람들이 저항하다가 죽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양주성 학살이었다. 명청교체기인 1645년 청군에 의해 명나라 제3의 대도시인 양주성에서 10일에 걸쳐 대학살이 있었다. 일설에 따르면 당시 죽은 사람 수가 수십만 명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일반인 왕수초는 당시 자신이 보고 겪은 끔찍한 일을 ‘양주십일’이라는 문서가 기록해 두었다. 이 서적은 청나라 시기 금서禁書였고 양주성에서의 일은 감춰졌다. 

  어쨌든 청나라가 자리를 잡은 후, 황제들은 강남 순행巡幸을 즐겼던 것 같다. 황제가 다녀간 강남의 도시들엔 흔적을 남겼는데, 쑤저우에도 황제 순행과 관련된 여러 이야기들이 전해져 온다. 관전가, 십전가, 한산사 등엔 모두 황제들이 다녀간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건륭제가 관전가 부근의 송학루에서 송서계어松鼠桂魚를 먹고간 이야기는 유명하다. 송서계어는 쏘가리에 칼집을 내어 튀긴 요리로 완성된 요리 모양이 다람쥐와 비슷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건륭제는 항주와 소주의 풍경을 좋아해서 베이징으로 돌아간 후 이화원颐和园에 소주가蘇州街를 만들도록 했다. 훗날 영국과 프랑스 군의 침입으로 이화원과 원명원이 파괴되었을 때 서태후는 이화원 복원에 거액의 국방비를 퍼부어 화려한 모습으로 복구했다.     

  홍루몽을 작품으로 좋아했다면 베이징 남쪽에 있는 작품 배경을 재현한 ‘대관원’을 찾아가 보는 것이 좋았다. 사진으로 대충 본 조설근 옛집은 베이징 시민도 아닌 여행객이 일부러 찾아가 볼만하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겨울이 한참인 2월 오후, 베이징 식물원 안에 있는 ‘조설근 옛집’을 찾아 나섰다. 다행히 날씨는 좋았다. 베이징 시민들의 가벼운 소풍 장소로 가을 단풍이 유명한 향산은 베이징의 북서쪽이며 이화원을 지나 있었다. 나는 조설근 옛집을 구경한 다음 겨울이니 베이징 식물원의 온실을 구경해 볼 계획이었다. 

  버스를 타고 먼저 베이징 식물원으로 갔다. 겨울이라 볼 것이 없는 관계로 입장료를 낼 필요가 없었는데 나는 멍청하게도 입장료까지 내면서 식물원 안에 들어갔다. 그런데 베이징 식물원은 생각보다 넓었고, 길을 물어볼 사람도 거의 없었다. 겨울이라 말라비틀어진 화단 식물 외에 볼 것이 없는 식물원을 이리저리 헤매고 다녔지만 목적지인 조설근 옛집을 찾지 못했다. 결국 해는 뉘엿뉘엿 져서 온실도 못 들어가고 조설근 집도 못 찾고 말았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향산에 올라 베이징 시내나 내려다보았으면 좋았을걸’ 하는 후회를 했다. 그런데 나의 중국 여행은 많은 경우 엉성한 계획으로 장소를 못 찾거나, 참관 시간을 놓쳐서 관람을 못 하는 일의 연속이었다. 박물관이나 공원 관람 기회를 놓친 것에 비하면 별일도 아니었다. 조설근은 내 마음속의 허상일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조설근은 자신을 적극적으로 세상에 드러내지 못한 채, 홍루몽이 인기 소설이 되기 전에 사망했다. 그래서 홍루몽이 누구의 작품이냐에 대한 논란이 따라다녔다. 이런 일은 저작권 개념이 확립되기 전의 사회에서 탄생한 작품에 흔히 따라다니는 일이었다. 근세에 홍루몽의 원작자는 학자들에 의해 ‘조설근’이라고 결론이 내려졌지만 후세 연구자들에 의해 도전을 받기도 했다.     

  여행을 마치고 향산에 대해서 다시 찾아봤다. 향산은 청나라 시기에는 베이징 외곽의 황실 원림의 일부였다고 한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갈 수 있는 향산 등산코스와 향산공원, 벽운사碧云寺, 마오쩌뚱의 별장인 쌍청연서가 눈에 띄었다. 벽운사는 라마식 탑이 인상적이었고 쌍청연사는 인상적인 것은 없어 보였다. 이렇게 여러 선택지가 있었음에도 나는 콕 집어서 ‘조설근 옛집’을 가보고 싶어했다. 이런 유난스러움이 나 였을까?

瓢蟲

不朽의 古典에서 찾은 智慧와 心灵, 역사적 敎訓과 省察에서 옛글의 향기에 취해 사랑에 빠지게 되었음을 밝히는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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